소설리스트

11화 (11/14)

11. 신의 자비

그 후에도 나는 일린저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 밤 이후에 일린저가 계속해서 내 침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할아버지의 침실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왔다.

일린저는 몇 번이고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회의는 내일도,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잡혀 있었다. 회의 중간중간에 올라오는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가신들은 지나가는 말로 왕자를 자주 만나는 것에 대해 은근히 물어왔다. 그 물음은 나를 간 떨리게 했다.

“예레카 하.”

나는 이제 예레 하가 아닌, 예레카 하로 불렸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가능해졌지만 전투에 투입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벽 앞에서 바예레카 두 명과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 앞에 선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고, 나는 벽에 손을 대고서 위험을 살폈다.

며칠간 나를 괴롭힌 이명은 벽이 보낸 것이었다. 벽은 근처에 다가오는 적의 위험을 내게 알리고 있었다. 나는 벽에 손을 대고서 파도치는 바깥을 돌아보았다. 바깥에는 수많은 배가 깔렸고, 그들은 벽 바깥과 땅에 주둔하고 있었다. 아예 성내의 작은 마을이 아닌, 성안에 있는 도시까지 노리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이 기회에 서부를 약탈할 계획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들은 예레카가 바뀌면, 저렇게 시위를 하곤 했습니다.”

위드먼 가문의 수장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죽여 달라고 난리를 피우는데 무시하자는 말입니까? 서부의 안녕을, 위명을 이렇게 땅에 처박아 두자는 말이냐고요.”

페네크 가문의 수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저들의 목을 썬다는 의미는 사람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이라곤 학원에서 모의 전투 때가 다였다.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실전에, 먹을 것이 없어 약탈을 하러 온 이들과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다들 내가 어리고, 전쟁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서 말했다.

“저희끼리 가겠습니다.”

“예레카 하께서는 벽을 지켜 주십시오. 적들이 기어 올라올 수 없도록 예레카 하께서…….”

일단 외벽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잔당들을 소탕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섬에 들어가 단단히 경고를 해 주어야 했다.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닐 터. 내 목을 따고서 서부를 점령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저쪽이었다. 그러하니 이렇게 나를 보란 듯이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도 소문이나 나에 대한 것은 빠삭하게 알아 둔 것일 터다.

“나도 참전하겠습니다.”

“예레카.”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나는 두 명의 바예레카를 돌아보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저들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이 벽을 넘으려고 들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더 하겠죠. 왕실은 번번이 공격당하는 서부를 불안하게 여길 거고, 그러면 나는 예레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겁니다.”

예레카는 벽을 지키는 자였다. 그 의미는 단순하게 이 벽 안에서 벽만 어루만진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예레카를 보고자 내게 맡기신 게 아니었다.

“내일부터 출전 준비를…….”

거기까지 말하고 서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준비를 하겠습니다.”

두 명의 바예레카는 잠시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짧은 몸짓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음을 느꼈다. 항상 할아버지처럼 나를 돌보려는 이들이었다. 처음으로 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생각했다. 내일이면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앎에도 나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무릎을 꿇고서 달밤에 기도했다. 내게 단 한 번의 자비를 주실 수 있다면.

일린저가 얼른 나를 잊고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마음을 잊고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저 벽이 되고, 그는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처음으로 나는 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어보았다.

얼마 있지 않으면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내게는 그 사실보다도 내일 그를 향해서 이별의 말을 거는 내가 끔찍했다. 상세하게 상상되는 것이 더 마음에 아팠다. 자비를 내리신다면 다음 생에는 그의 오누이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헤어질 수 없는 가족이 되고 싶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에 손이 떨려 오다가도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알았다. 처음에는 그를 가지고 싶어서 나를 속이려고 하였으나. 나는 이제 알았다. 나는 평생을 이 벽을 지키며, 이와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살 것이었다.

예레카의 자리를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떨쳐 버리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 * *

각 가문의 사병 중에 최정예만 모았다. 바예레카에서 각각 오백씩, 나의 가문에서 칠백, 그 외의 가문에서 각각 최정예 백 명씩을 모아 삼천을 받았다.

각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들었다. 그들이 식량이나 화살 등을 짊어지고 모였을 때. 나는 하루의 시간이 있음을 알았다. 출정 준비를 마치고서 다시 성에 들어오자마자, 오늘도 어김없이 일린저의 방에 배치해둔 하녀가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가 나오자마자 그 방을 치워둬라.”

“네?”

“곧 만나자는 얘기를 전하고.”

하녀는 의뭉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거역할 수는 없는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하녀가 나가자마자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그러나 일린저를 다시 만나서 이별을 이야기해야 했다. 뺨을 때리고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 이런 곳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최대한 냉철하게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출정 전, 하루하루가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일런저의 짐을 싸기 쉽도록 그를 성 밖으로 불렀다. 내가 처음 이곳 관문을 통과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 안에 서 있는 병사의 깃발을 보고 덜덜 떨었었다. 지금은 그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는 나를 보며 새삼스럽게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라.”

염소나 가축이 뜯을 수 있도록 초목을 심어둔 밖이었다. 이 바로 앞으로 나가면 서부의 위테르발도 성에서 나갈 수가 있었다. 일린저는 자신을 이리로 부른 이유가 설마 내쫓기 위함인 것을 모르는 채였다.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내가 없는 사이 내 방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으며, 홀로 그랬던 그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밝게 달려온 그는 내가 포옹하지 않자 얼굴이 굳었다. 타고난 직감일 것이다.

그는 내 뺨에 입을 맞추려다가 말았다. 나를 보고서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내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일린저.”

“이야라.”

“할 말이 있어.”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아는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별을 통보하는 것은 그의 몫인 줄 알았다. 우리의 사이가 끝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일 거라고, 나는 그저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내가 우연찮게 예레카가 된 것처럼, 그와의 이별도 우연찮게 나의 몫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늘 널 한번 이겨보고 싶었어.”

일린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장소를 둘러보다가 내가 좋은 말을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된 눈치였다. 내가 저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것도. 아마 그는 셉시스로 가서 내가 출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었다. 당장 얼마 뒤에 전쟁을 떠나면서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은 것도. 독한 여자라며 일린저는 혀를 찰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왕으로, 예레카로 살면 된다.

“이겨?”

일린저는 내 말에 어리숙한 얼굴을 했다. 그에게 이기고 싶었다. 나에게 모질게 대한다고 생각한 그를 보면서부터였다. 나는 항상 일린저가 내게 패배하거나 안타까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의 패배보다 그의 미소를 더 간절하게 바라게 되었다. 그의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사랑. 그래,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날 사랑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내게 사랑을 요구할 때. 이걸 계기 삼아 너의 감정을 가지고, 한번, 이용하고 싶었어. 내가 우위에 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야라.”

“사랑이 아니었어. 널 기만했어, 난.”

나는 일린저를 볼 수 없어,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닷바람에 마모된 돌처럼 서서히 얼굴이 무너지고, 손이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거짓말을 뱉을 때마다 심장이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다. 뱉는 말이 진실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단 한순간도 널 사랑한 적 없어.”

“단 한순간도.”

일린저는 내 머리 위에서 내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단 한순간도.”

“그렇게 오만하던 네가 내 앞에서 무릎 꿇는 모습에 희열을 느꼈지. 그런데 점점 도를 넘으면서 치대고 있을 때는…… 지겹다. 지겨워졌어.”

“지겨워.”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란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일린저의 목소리가 의외로 평온했다.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일린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일린저는 가만히 서서 숨을 내뱉었다. 그는 눈을 감고서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까 그만해.”

“왜 그렇게까지 확신을 해? 내가 언제 너한테 한 번 사랑한다고 한 적이 있어?”

“입 좀 닥쳐 봐.”

“이만큼 몸도 대주고, 시간도 보내줬으면 이제 좀 놔줄 줄 알았는데. 눈치 없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왜 싫은 소리를 들어 그러니까.”

지겹다는 나의 마지막 말에 일린저는 무너졌다. 그는 긴 숨과 함께 고개를 내렸다. 눈가가 새빨개졌다. 눈알은 핏줄이 터질 듯했다. 그는 울지 않으려 하는데 눈물은 내가 날 것 같았다. 나는 혀끝을 물었다.

“왕자님. 떨어져 나가 주십시오.”

“…….”

“저랑 언제까지 이러실 작정입니까. 왕자께서 혼인까지 하고 나서도? 제가 혼인을 하고 나서도?”

“제발 그만해…….”

일린저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일린저는 세뇌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나 사랑하는 거 알아. 알아. 아니까, 그만해.’ 혼자 중얼거리던 일린저는 갑자기 돌변하여 내 어깨를 잡았다.

“나 사랑 안 해도 돼.”

“가세요. 여긴 서부고, 왕자께서 지켜야 할 곳은 중앙입니다.”

“나 떼어 놓으려고 이러는 거잖아. 가끔씩만 만나줘, 조용히 돌아가서 예전처럼 너 기다릴 테니까…… 내가.”

“제발 꺼져.”

난도질당하는 가슴이 더 독한 말을 꺼내 들었다.

“꺼지라고. 네 자리로.”

“…….”

“제발 위엄을 갖춰.”

“…….”

“이기적인 왕자님. 왜. 나를 꼭 네 정부로 두어야지 만족하겠어?”

나는 그의 어깨를 밀쳤다. 그는 힘없이 손을 늘어뜨렸다. 일린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심장이 난리를 쳤다. 나는 그 비명을 무시했다. 나는 일린저를 지나쳐, 그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멀어졌다. 일린저의 흐느낌이 뒤에서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를 버리고 어떻게 내가 뛰어왔는지 모르겠다.

다시 다음 날 그 자리에 갔을 때 일린저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서부를 뒤졌으나 그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일린저를 마음에 묻어 두고 출정했다. 나의 첫 출정이었다.

우리가 완전히 이별한 날이기도 했다.

* * *

- 공금 by Jira

긴 나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내가 살았던 외벽의 사이로 들어갔다. 거기에 있는 잔당부터 마주했다. 그들은 시체를 뒤적거리며 귀중품을 찾아내다가 우리에게 기습당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말의 숫자를 보고 뒤로 넘어가며 도망가다가, 자신의 아군을 부르기 위해서 불을 질렀다.

검이 위에서 내려온다. 내 옆에 있는 병사를 찌르고, 그 새빨간 검이 내게로 왔다. 나는 피했으나 뺨에 상처가 남았다. 그것을 본 병사 하나가 내 앞에 있는 적군의 심장을 꿰뚫었다. 적은 하얀 동공만을 보인 채 내 쪽으로 쓰러졌다. 적군의 반은 매복하고, 뒤편에 숨어서 우리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알아챈 위드먼이었다. 군사 오십을 이끌고 뒤로 빠졌다. 뒤에서 매복된 이들이 죽어 나가는 비명이 들려왔다. 앞에서 병사들을 막던 오합지졸이 당황했다. 적군의 검은 느리고, 나는 재빨리 빛으로 불꽃을 만들었다. 새빨간 불이 그들을 태웠다.

나는 적의 숫자가 줄어들자마자 벽으로 달려갔다. 벽에 내 손이 닿고, 내 부름을 들은 벽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벽에서 튀어나온 손이 기다랗게 뻗어갔다. 알량한 적군만을 쥐었다. 벽은 자신을 안위를 위해 입을 벌렸다.

벽에서 손이 튀어나오고 입이 벌어지자 적군은 기함을 하며 도망쳤다. 그러나 앞은 바다고, 뒤는 나의 벽이었다. 누군가 나를 벽에서 떨어트려 놓으려고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벽은 내게로 다가오는 자를 가장 먼저 집어 제 입 안에 넣었다. 이빨에 씹혀 나가는 적군의 다리가 내 옆에 있었다. 피가 튀어 뺨에 묻었다.

그 괴이한 모습에 적군은 겁에 질렸고, 아군은 환호했다. 도망치는 잔당들은 병사들이 칼을 들어 배를 갈랐다.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고, 벽의 손이 점점 느려지는 때. 어떤 적군 하나가 벽에 달라붙어서 올라갔다.

딱히 재능이 뛰어나서 그 벽을 오르려는 것보다는, 그저 살기 위해서 올랐음이었다. 그러나 벽은 제 위에 오르는 이를 용서치 않았다. 나는 벽을 달구고 달구어, 그자의 손이 익게 만들었다. 적군은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칼이 하늘로 치솟은 곳으로 등이 떨어졌다. 그는 꼬챙이처럼 검에 꿰였다.

다음은 시시할 정도였다. 적군의 기세는 금세 죽어 우리의 숫자를 당해 내지 못했다. 저들이 타고 온 배조차 먼저 간 군사에 의해 점령되었다. 적군은 의지를 잃고 항복을 외쳤으나 바예레카 두 명의 결정에 의해 모두 죽였다. 빈 배 스무 척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나는 그날 멀쩡한 척 막사로 돌아가 하루 종일 구역질을 했다. 그게 사흘이 걸린 전투였다. 사흘 동안 나는 피 칠갑을 한 채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르고 칼을 휘둘렀다. 누군가의 내장이 내게로 쏟아지고, 피가 머리 위로 게워졌다. 그게 일상인 것을 위해 빛을 배웠나. 그러나 나는 쉬지 못하고, 일정을 위해 다음 날 배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다들 나를 보고서 예레카라 불렀다. 나는 예레카로, 할아버지의 뒤를 잘 따르고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 * *

1년. 나는 아직도 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소식병 하나가 이따금 성 내부 소식을 전하곤 하는 게 고작이었다. 전쟁에 무뎌질 줄 알았으나 나는 1년 동안 바닥을 쳤다.

빛을 처음 본 순간, 그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바람, 불, 물을 불러 적군을 찢고, 태우고, 익사시켰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배운 것이었다. 나의 빛들은 점차 강해졌으나 나는 빛을 꺼내어서 볼 때마다 풍겨오는 피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했다.

바다를 건너왔다.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배가 건너오는 것을 보고 땅에서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섬은 야만인의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쪽에서 빛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면전은 피했다. 막사를 치고 쉬려고 할 때마다 소수의 인원이 나타나 우리의 신경만 긁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바예레카의 가주 두 명도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내가 편히 잠을 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나는 손을 떨면서 낮에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만 들려도 잠이 깨어나고 말았다.

2년. 식량을 위해서 섬의 주민들을 기습했다. 복종을 얻어내고, 그 주변에 막사를 치는 것에 한 달을 소비했다. 죄가 없는 주민들은 내버려두었으나 이따금 반항하는 이들은 죽였다. 점점 사람을 죽이는 것에 무뎌지고 있었다. 나는 지휘자였다. 그러니 누군가 끌고 오면 가장 먼저 내 앞에 데리고 왔다. 그들을 죽이는 게, 그걸 보여 주는 게 내 의무였다.

그리고 나는 빛의 힘으로 보았던 아름다운 불꽃으로 사람을 태우고, 바다 같은 물로 그들의 숨을 앗아가고, 땅을 불러 그들의 사지를 옭아맸다. 때로는 그냥 베기도 했다. 주민들에게 협박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냈다.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사람들이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점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를 입었고,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는지를 잊어먹고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로 군사를 몰고 갔을 때는 겨울이 되었다. 나는 흰 눈을 맞으며 그들을 베었다. 우리가 주민들을 점령한 탓에 식량 보급이 어려워졌던 적들은 손쉽게 당했다. 흰 눈 위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최대한 많은 피를 줄이기 위해서 나는 수장을 찾아냈다. 목을 벤다는 협박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결했다. 그가 죽자 적군은 사기를 잃었다. 자신들이 사는 섬임에도 도망을 가버렸다. 우리는 이 섬을 점령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자꾸만 헛된 꿈을 꾸는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우리의 뜻을 잘 알아듣는 자가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예레카. 대단하십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것이 대단한 것이었다. 처음에 빛을 밟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에 신기해했었는데. 빛의 힘으로 날아다니는 것보다 사람을 베는 것이 대단한 게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빛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빛을 다루는 것이 아주 능숙하십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지 뭡니까. 태생부터 역시 예레카의 핏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회의를 할 때마다 늘 따라붙는 칭찬. 빛을 다루는 것을 능숙하게 만들어 준 한 남자가 떠올랐다. 이럴 때마다 내 머릿속을 덮쳐 왔다. 마지막으로 본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는지. 나는 내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보다 그가 악몽이었다. 그 빈 들판에 남아 있던 그의 뒷모습을 더 악몽으로 쳤다. 깨어나면 내가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막사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냐고 말을 걸어올 때마다 나는 눈물만 훔쳤다.

“예레카!”

그렇게 눈물에 익숙해질 때 즈음, 악몽에 익숙해질 때 즈음, 나는 승리를 예견하고 단박에 섬의 중앙부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으나.

“해적 떼가 몰려옵니다!”

2년이 다 되어가는 그때. 남부에 있을 해적들이 이리로 왔다. 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3년. 해적은 보통 남부의 바다에서 돌아다녔다. 그들이 서부의 해안까지 앞질러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들은 남부에서 저들끼리 놀다가 옆 대륙을 약탈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노리는 것은 나였다. 나의 목인 것이 자명했다. 여자가 예레카 하가 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호시탐탐 만만하게 노리는 녀석들이 늘어난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후퇴했다. 본거지를 벽이 있는 성이 아니라, 이쪽 섬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식량은 보급하고 있지만 여기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이들도 완전한 우리의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었다. 우리가 약해진다면 바로 뒤통수를 칠 것이다.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바닷길이 막혔다. 나아가지 못하고 섬에 발목이 잡혔다.

아직도 바다가 보이고, 바다의 비린내가 맡아졌다. 가져온 식량은 바닥이 날 때 즈음 해적 함대 하나를 부서트렸다. 해적들은 그제야 한발 물러섰다. 우리의 보급품을 쥐처럼 갉아먹은 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반년이 지나있었다. 그간 부족한 식량을 섬에서 얻어냈지만 막대한 병사들의 식욕을 따라잡기란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 더 지치고 병들기 전에 우리는 중앙으로 나아가야 했으나 적들은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중앙에서 얌전히 우리를 기다렸다.

해적은 틈만 나면 나타났다. 우리가 체력을 비축하고 어렵사리 섬에서 음식을 얻으면 그랬다. 벌떼같이 나타나 우리의 체력을 빼앗았다. 나는 이것이 작전임을 알고, 바예레카 두 명과 나서서 조를 나누었다. 반은 해적을 맡고, 반은 중앙으로 침투한다. 나는 반을 이끌고, 두 바예레카는 나머지 반을 이끌었다. 가신의 반 이상이 나를 따랐다.

치열한 전투였다. 나는 빛을 끌어모아 그들의 배에 불을 붙이고 가르고, 뱃머리에 기어올랐다. 그들이 만든 배의 나뭇결은 촘촘하지 못했다. 또 사람이 오르기엔 거칠었다. 위에서 돌을 쏟아부었으나 나는 빛을 이용해 그것을 막았다. 빛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이 섬의 사람들은 나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정말 괴물처럼 그들을 베었다.

* * *

중앙을 덮치고, 해적을 마무리한 바예레카들이 이쪽으로 넘어오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달이 걸렸고, 그들의 수장을 내 앞에 무릎 꿇리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그들의 수장이 이 넓은 섬에 숨어 있던 까닭이었다. 나는 그동안 섬을 점령하며, 그 해적의 아들들을 인질로 삼고 있었다.

해적의 수장은 잡혀 올 때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곧장 그의 목을 베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를 죽이면 나는 다시는 서부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수 없었다. 아들들은 너무 어렸다. 수장이 죽으면 이들은 또 다른 수장을 만들어 내고, 전쟁은 다시금 매해 벌어질 것이었다.

수많은 고문 끝에 수장은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는 그의 얼굴이 내 발등에 닿았다. 모두가 보고, 그의 아들이 보고, 그의 수하가 보았다. 다들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차가웠다. 언젠가 이들이 또다시 배신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새 예레카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이들이기에. 차라리 여기서 다 죽이고 떠나면 안 되나.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도 인간성이 많이 말소된 것이었다.

떠나갈 때 스물둘이었던 내가 돌아왔을 때는 스물다섯이 되었다. 땅을 밟고 서부로 돌아왔을 때. 다들 나를 향해서 꽃을 뿌렸다.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떠나가 있는 동안 무사히 계셨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할아버지는 나 대신에 이 성을 지켰다. 왕은 내게 상을 보냈다. 말 백 필과 왕이 아끼는 시종 오십이었다. 금도 하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고도 웃지 못했다.

“예레카.”

나는 어떤 절차가 필요 없었다. 이제 누구도 내가 예레카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내게 더는 시비 거는 자가 없는 대신, 나는 이제 내게 시비 거는 자의 목을 베는 데에 심취해야 했다.

“밀린 일을 가져와.”

기계처럼 일을 했다. 서명을 적어야 할 곳에 적고, 분란이 일어난 곳에 직접 나아갔다. 제 땅이니 내 땅이니, 그런 것은 우스웠다. 형제의 난이나 후계자 싸움으로 저들끼리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벌이면 일은 커졌다. 그중에 내게 반기를 드는 쪽이 있다면, 나는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쪽에 병사를 보내야 했다.

“겐치스 가문에 힘을 보태 주십시오, 예레카.”

“직접 나서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십니다.”

바예레카의 두 가주는 나를 성심껏 보필했다. 전쟁으로 쌓은 전우애인가 뭔가. 나도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알았다. 열흘 뒤에 간다고 전해라.”

그들을 아비 대하듯 대하던 나는 전쟁을 치르며 사라졌다. 내 말투는 지극히 할아버지와 닮아 갔다. 건조하고, 메말랐다. 바예레카의 두 가주는 익숙한 듯 내 말을 따랐다. 평소라면 그냥 나갔을 두 사람이 오늘따라 왠지 나가지를 않았다.

“더 할 말이 있나.”

“예레카.”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나는 이것이 문제가 생겼을 때 두 사람의 눈이라는 걸 익히 알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예레카.”

위드먼의 가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레카께서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쓰지 않도록 보통 이 나이쯤 혼인을 하십니다.”

나는 두 사람이 말하려는 바를 알고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골이 너무도 아팠다.

“꼭 저희의 아들들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후계 문제도 중요합니다, 예레카.”

두 사람이 중년임을 실감했다. 나는 고작 스물다섯이었고, 후계 문제를 걱정할 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다. 그것도 훌륭한 예레카가 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기는 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내가 해내야 할 목록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중인 줄 알았는지, 고개를 숙이고서 금세 밖으로 나갔다.

‘사랑해.’

그렇게 말하는 한 남자의 고백이 떠올랐다. 일이 끝나고 문득 그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심장이 뛰고, 그가 보고 싶고. 그러나 일린저는 냉정하게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내지 않았다.

왕실에서 명령이나 축전을 보내올 때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실 일을 도맡아 하고 있음을 아는데도 그는 나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안다. 아는 바였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한 결말 아니었나. 다행히도 그도, 나도 혼인한다는 소식이 없지만. 이제 그 소식을 듣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기랄…….”

누가 그의 혼인이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었나. 아니다. 죽고 싶었다.

* * *

할아버지는 점차 몸이 악화되었다.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할머니가 묻힌 섬으로 보내 드릴 텐데 전혀 차도가 없어서 문제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곁에서 가만히 있다가 잠이 들면 쪽잠을 잤다. 금방 자고 일어났다.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벽을 따라서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벽에 귀를 대고 기울여 보았다. 온갖 세상의 소리가 들리는 벽이니, 그의 목소리를 혹시 한 번 잡아 주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그렇게 밤새도록 벽에 서있었다. 이렇게 그의 목소리를 기다려 본 적도 없었다.

“이야라.”

그날도 할아버지가 잠이 드는 것을 보고 벽을 따라 거닐다가,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서 빛을 이끌고 찾아오셨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다가 이제야 안 모양이었다. 내가 벽에 달라붙어서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얼굴이 서글프게 구겨졌다.

“여기서…… 여기서 밤새 뭐 하는 거니.”

“그냥요.”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되면, 할아버지가 믿고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두 사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 벽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이 벽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요즘, 잠도 잘 자지 않는다던데.”

“전쟁 후유증인가 봐요. 곧 이겨 낼 거예요.”

“정말 그게 다니?”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어머니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꽤 오래전부터 안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품에서 나온 희끄무레한 뭉치가 내게로 내밀어졌다.

“네게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것을 받았다. 다량의 편지였다.

“이거.”

편지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일린저가 내게로 보내온 편지였다. 다급히 뜯어 첫 장을 열어 보니 보낸 때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내가 전장으로 나간 그때부터.

“하필 왕자라니.”

전장으로 가는 편지는 어머니가 맡아 둔다는 명목으로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고, 내가 전쟁에서 복귀한 것을 기점으로 더는 편지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참담한 얼굴을 뒤로했다. 재빠르게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어 하나씩 읽어 보았다.

[한 번만 답장해 줘. 살아 있는지, 아닌지만이라도.]

[승전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살아 있는 거지?]

[날 사랑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디 다쳤는지, 그것만 알려.]

[네가 귀환한다는 소식은 들었어. 네 팔이라도 부러졌다고, 네가 전쟁 중에 어떻게 된 모양이라고 혼자 병신처럼 울고 있었던 시간이 아까워. 넌 정말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충분히 알겠어. 그간 내가 귀찮았을 텐데. 내가 몹시 지겨웠을 텐데. 앞으로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그 편지를 끌어안고 밤새 울었다. 벽 앞에서 떠나가라 우는 내 목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셨다. 다른 이들이 소리를 듣고 오면 물리고, 내 앞을 누구도 오지 못하게 지키셨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야라.”

어머니는 그렇게만 말하고 동이 트자마자 성으로 돌아가셨다. 그 발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주저앉아 일린저가 보낸 편지만 쓸어 만져 보았다.

* * *

스물다섯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의리라도 지키는 것처럼 있었다. 약혼이라도 하라는 모든 요청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선물 같은 소식이 두 가지가 전달되었다. 하나는 북부의 가문에게서 온 것이었다.

“산도르아 아가씨를 봤다고 합니다.”

결국 너는 북부로 갔구나. 북부의 성벽을 넘어, 그 험난하다는 산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마을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이가 산도르아와 닮았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더 캐내 보겠다는 이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전했다. 은밀하게 알아볼 것과 만약 맞다면 그들을 방해하지 말고, 위치만 내게 알릴 것을 당부했다.

또 하나의 소식은 왕도에서 날아왔다. 늘 왕의 이름으로 날아오던 서신에 처음으로 일린저 모르온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일린저가 내게 보낸 서신인 것을 알자마자 허겁지겁 뜯었다. 거기에는 일린저가 각 부의 예레카를 부른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나는 손을 떨었다. 일을 미뤄 두고 당장 말을 꺼냈다.

몇 년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설렘을 안고서 일린저를 쫓아가듯 셉시스로 달려갔다. 어머니에게 잡다한 일거리를 맡기고, 외부 경비는 바예레카에게 맡겼다. 나는 모든 것을 제쳐두었다. 단박에 일린저가 있는 셉시스로 날아갔다.

밤낮없이 쉬지 않고 말을 몰고서 도착했다. 셉시스에 다다랐을 때 즈음에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다급하게 근처 여관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으나, 은의 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 번 더 몰골을 점검했다.

학원에서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까지 일린저는 매일 제 목소리며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니까 일린저가 내 곁에서 이렇게 오래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일린저가 내게 보내는 애정에 익숙해져, 그것이 없을 때의 고통을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갈수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전장에 있을 때는 그를 덜 생각할 수 있으나, 이렇게 일상에 젖어 들면 나는 그를 떨쳐 내지 못했다.

그가 아니라 예레카를 택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중이었다. 그가 매달리는 기억에만 취해, 그가 설마 나를 잊고 살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드디어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사실 예레카를 부른다는 것은 핑계고, 그는 나를 부르는 것이라고. 그러나 도착한 그의 집무실에서 희망이 깨졌다. 그는 먼저 도착한 남부의 예레카와 환히 웃으며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별 때문에 생긴 초췌함이나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오, 위테르발도의 예레카께서 오셨군.”

남부의 예레카가 이렇듯 나를 아는 척하기 전까지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을 때. 그의 눈은 무심함에 가까웠다. 사무적인 눈으로 나를 위아래 훑었을 뿐이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이 당혹스러웠다. 나는 무릎을 꿇는 동작에서 엉거주춤하고 말았다. 평상시라면 제대로 꿇기도 전에 일어나라고 했을 텐데. 그는 내가 꿇어서 앉아 있음에도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

감정 없이 냉정한 목소리였다.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에 남부의 예레카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그는 인자한 성품이지만 남부의 해적들 때문에 종종 내게 연락해 도와 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나마 이 자리에서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그는 왕자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고 껄껄 웃었다. 그러나 왕자도 나도 웃을 수 없었다.

일린저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일린저와 내가 서로를 보지 않자, 가운데에 끼인 남부의 예레카만 애꿎은 차를 들이켰다. 이윽고 북부가 도착했다. 그제야 일린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동부가 오지 않았습니다만.”

북부의 예레카는 잔혹하고 냉랭한 땅을 지키느라 말수가 없었다. 대신 살집이 두툼한 편이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그답게 앉아서 먹을 것부터 손이 갔다. 일린저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중앙으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벌써부터 시작하려는 모양새였다. 그에 얌전히 기다리던 남부의 예레카가 의문을 표한 것이었다.

“내가 초대한 것은 이 셋이야.”

일린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잠시 내게 눈길이 닿았다. 그러나 일린저는 금세 시선을 거두었다.

“동부를 빼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동부에는 내 동생이 있지.”

동부 예레카의 차남. 유명한 일린저의 이복동생이었다. 언젠가 학원에서 보았던, 일린저와 이목구비가 똑 닮았던 그자. 그러나 갑자기 그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여기서 태연한 것은 일린저뿐이었다.

“동부의 예레카가 호른과 열두 부족를 만났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배가 동부에 정박했고, 사유는 식료품의 수입이라지만 실상은 무기와 사람이라는.”

“이런.”

“반역이라는 말씀입니까.”

동부는 서부, 남부, 북부와 달리 싸워야 할 것이 없었다. 동부는 부유하고 기름진 땅이었고, 외국과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땅이었다. 그들은 수출과 수입을 명목으로 자릿세를 두둑이 챙기며, 왕가의 배를 불리는 데 톡톡히 일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내 쪽을 칠 모양이었겠지.”

일린저는 안 본 사이에 많이 메마르고, 건조해졌다. 꼭 나처럼. 그는 할 말만을 하고 입을 다무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 사이사이의 건조함은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복동생의 배를 갈라야겠다.”

“하지만…… 왕자 전하.”

북부의 예레카는 실상을 잘 아는 듯 일린저를 말렸다.

“그 이복동생분은……왕께서 아끼시는 이가 아닙니까.”

왕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낳은 아들을 무척이나 아꼈다. 여인이 죽고, 혼자 남은 아들은 더욱 안쓰러워하며 귀애했다. 그 여인 하나만이 삶의 이유였던 것처럼. 왕이 급격하게 늙고 추레해진 시점도 그 여인의 사후라고 했다. 젊은 시절의 왕은 총명하고 아름다워, 모든 예레카가 그를 우러러볼 정도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유독 왕에게 지고 사는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이라고.

“아버지는 병환이 도지셔서 몇 달을 주무시다가, 다시 눈을 겨우 뜨고, 다시 주무시길 반복하고 있기만 하지. 설령 깨어나신다고 하더라도 일이 다 끝난 후인 데다가.”

그 후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픈 왕이 죽으면 일린저가 왕위를 이을 것임이 명백했다. 사실상 반역의 증거물이 모였을 때 바로 쳤어도 됐으나 왕이 그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믿고 기세등등해진 동부의 예레카일 것이다. 왕의 핏줄을 데리고 있다는 명목으로 일을 계획했고, 눈치채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왕이 병환으로 오락가락하다니. 그는 이 사이에 자신의 후환을 제거할 목적인 것이다.

그때의 그가 떠올랐다. 학원에서 자신의 이복동생을 보았을 때, 그는 혐오스럽다거나 싫다는 표정보다는 약간의 따스함을 지녔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랬던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동생의 죽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출정은 이달 말로 하지.”

얼마 남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었다. 약속된 장소에서 각자의 병사를 끌고 와 만나기로 한 뒤였다. 동부의 예레카가 만약 순순히 항복한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날 수 있었다. 일린저는 담뱃대에 불을 피우고 깊이 들이마시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많이 지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지친 표정이나마 볼 수 있어 좋다니, 그렇게 생각되는 내가 징그러웠다. 나는 눈을 감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전쟁, 다음 분란, 끝나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일린저와 함께 있는 것은 내 마음을 좋지 않게 했다. 오히려 그가 전쟁보다 나에게 더 위험한 존재였다.

* * *

말발굽의 소리가 다닥다닥 울렸다. 가련한 땅을 울리며 수많은 군사는 전진하고 있었다. 동부의 예레카는 침묵했다. 순순히 항복하고, 왕의 사생아의 목과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하면 지장 없을 거라는 얘기에 묵묵부답으로 이행했다.

약속된 시효를 지났으므로 우리는 일린저의 뒤를 따라서 동부로 향했다.

일린저는 피곤한 듯이 자주 막사 안에서 있었다. 이따금 회의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린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따금 먼 책상이나 침대의 모서리를 응시하다가 내 할 일이 끝나면 막사로 들어와 눈물을 삼켰다.

그와 같이 있은 지가 며칠이 되었다고 벌써 나는 말랑해져 가고 있었다. 그의 눈물을 보았던 내가, 이별하자고 난리를 피웠던 내가, 오히려 그에게 미련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첫 전쟁은 예상보다 일찍이 찾아왔다. 동부에 거의 다 왔을 때 즈음, 동부의 바예레카 중 하나가 우리를 기습한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쉬운 전쟁은 아니었다. 동부의 바예레카는 자신들의 땅이니만큼 지리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아무리 남부, 북부, 서부의 병사들을 데려왔어도 우리는 먼 거리에서부터 몇 달을 왔기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후였다.

막기는 하였으나 약간의 힘에 부칠 때. 나는 일린저가 검을 들고 전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등장하여 검을 빼 들고, 큰 해일을 불렀다. 바다가 없는 동부에 바다가 나타났다. 내가 부리는 바다가 실개천쯤이라면 일린저는 해협이었다. 난데없이 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간 적군은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일린저의 불은 화마가 되어 성벽을 부쉈다. 당연히 우리에게 협조하는 동부의 귀족들이 많았으나 저항하는 자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애초에 동부에서도 나뉘는 일이었으므로 우리에게 승기는 잡혀 있었다. 동부가 똘똘 뭉쳐 반항했더라면 힘들고 긴 전쟁이 될 뻔하였다.

나는 검을 휘둘러 또 사람을 베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보다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일린저를 보며 마음이 다쳤다. 그는 침착한 판단으로 다수의 군대를 쓰러트리고 무너뜨렸으나 그의 눈에는 흥분도, 기쁨도 없었다.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움직여 적을 베고 사람을 베었다.

그러나 온기가 없고 잔인한 지휘관은 부하들의 목숨을 살리는 지휘관이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서 앞으로 전진하였으며, 나는 그에 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가 지시하는 것을 따랐다. 동부의 반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동부의 끝, 외국인 연합군이 기다리는 큰 전쟁만이 남았다. 다음을 위해서 막사를 치고 쉬고 있었다.

다행히 내륙인데다가 도움을 주는 성이 많았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잠자리도 괜찮았으나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해서 바깥에 막사를 차렸다. 그때가 전쟁을 시작하고 두 달이 되었을 때였다.

일린저는 싸느란 표정으로 축배를 들었다. 나는 점차 그와 같이 있는 것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를 남몰래 훔쳐보았다. 그는 예의상 축사를 들지도 않고 그저 포도주를 조금 들다가 막사로 들어갔다. 건조한 그의 모습에 우리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다가 포도주를 들었으나 전쟁을 앞둔지라 크게 취하지는 않았다. 모두 일찍이 들어가 잠을 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나는 막사로 들어가기 전,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근처 숲속으로 잠시 산책을 나갔다. 혼자는 위험하니까 따라오겠다는 병사의 말도 제쳐둔 채였다. 홀로 조용히 숲으로 들어갔다. 몸을 뉠 만한 곳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폭포수가 쏟아지는 그곳에서 나는 그를 보았다. 일린저는 폭포 앞에서 술병을 들고서 있었다. 거뭇한 바위 위에 앉아, 가만히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뭇가지를 밟는 바람에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일린저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처음으로 나의 눈과 마주쳤다.

지난 몇 달간 시선을 피했던 것이 무색했다. 나는 그를 탐하는 눈빛으로 절절하게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건조한 눈, 코, 입을 보며 어린 시절의 향수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찾아지는 것이라고는 나를 증오하는 두 눈과 메마른 입술, 그리고 피를 닦지 못한 그의 손뿐이었다. 우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 또한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귀관은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물러서려고 걸음을 돌리자마자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몇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의 웃음기 가득하던 목소리가 변했다. 딱딱하고 건조해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돌아보았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일린저는 피식 웃고서는 술병을 목에 기울였다.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내일 바로 출정하게 되실지 모릅니다. 적당히 드시고 들어가 쉬십시오.”

그러자 일린저는 술병을 천천히 입술에서 떼어놓았다. 바닥에 차게 내려두었다. 일린저가 버려둔 그 술병을 보다가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주위에서 피어오르는 빛을 보았다. 그가 전쟁 중이 아님에도 빛을 불러내는 것을 보고 나는 숨을 삼켰다. 빛이 피어오르고, 피어올라 온 숲과 호수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린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예전에 학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있었다. 나는 나무 밑에, 그는 호숫가 바위에 앉아서 빛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몇 달간 피비린내에 절여져 있었던 나의 빛들이었다. 빛들은 우리 둘 중에 누구에게도 오지 않았다. 자유스럽게 하늘을 떠다녔다. 일린저는 그 빛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귀관에게는 무슨 색으로 보이지?”

사람마다 빛의 색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연분홍색, 산도르아는 흰색, 할아버지는 하늘색으로 보인다고 들었다. 나에게는 연한 초록의 빛으로 보였다. 일린저에게는 들은 바가 없었다.

“제게는 초록으로 보입니다.”

내 말을 들은 일린저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시 그 빛들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을 때였다. 일린저는 다시 몸을 젖히고 앉아 하늘을 보았다. 나는 그의 눈에 떠다니는 빛을 보았다.

“내게는 푸른색이었어.”

일린저는 바위 위에 드러누울 듯이 누워서 내 쪽을 바라봤다. 그의 옆에 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으며, 나는 손을 꼭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귀관.”

“네.”

“귀관은 증오하는 사람이 있나?”

일린저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일린저의 눈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린저는 내 고갯짓을 보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그랬거든.”

“…….”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색으로 빛이 보인다고.”

일린저는 공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눈물이 툭 떨어지는 찰나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달려가 입을 맞추고 아니라고, 아직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멈추지 않고서 말을 계속했다.

“조금도 날 사랑할 마음이 들지 않았어?”

“왕자님.”

“늘, 나는 늘 궁금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일린저는 그 공허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고서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서 울면 다 끝이었다. 지난 세월에 대한 인내가 끝나고 있었다.

“저는.”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고 몸이 돌려졌다. 나무에 등이 닿고,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내려왔다. 춥, 하고 내 입술을 가져갔다.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허리에 나도 모르게 손을 휘감았다. 그의 눈물이 수시로 내 뺨에 떨어지고, 나도 울면서 그의 입술을 받았다. 그런고로 누구의 눈물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섞이고 섞여, 입에 들어오기도 했다. 짰다. 입 안에서 바닷물의 맛이 났다.

일린저는 중간중간 더운 숨을 내뱉었다. 나의 허리를 꼭 안고서 절대 입술이 떼어지지 않게 했다. 일린저의 눈에는 진득한 흥분이 내려앉고, 조금씩 진정이 되자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내 옆입술, 윗입술에 입술을 가져가 대고 있었다.

사랑해. 나는 속으로 말을 눌러 삼켰다.

“왜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았지?”

일린저는 아까의 그 다정한 입맞춤을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차가웠다. 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눈물로 젖어 든 얼굴을 바닥에 두었다. 그에게 울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쟁에 나가서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도 공주와 혼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계속 왕이 위태로우니 지금이라도 혼인을 해야 할 텐데 왜 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하면서 말이 많았다. 아까 예레카끼리 모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왕자님은 왜 안 하시는 겁니까?”

일린저는 그 질문이 되돌아올 줄 몰랐던 사람처럼 멈췄다.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픽 입술을 비웃듯이 올렸다.

“네가 다른 여자한테 가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건조할 줄 알았던 그의 눈이 내 뺨, 내 입술, 내 목덜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직도. 왜 아직까지. 신의 자비가 통하지 않은 것일까. 왜 나의 기도가 아직까지 먹히지 않았을까. 왜 우리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것일까. 몇 년이 지나야지 나는 그를, 그는 나를 잊을 수 있는 것일까.

“왕자님.”

나는 이것을 물으면 돌이킬 수 없음을 아는데도 그에게 물었다.

“아직 저를 사랑하십니까?”

일린저는 입술을 벌렸다. 그때 그의 뒤에서 날아다니던 초록의 빛에 푸르른 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초록빛이었다가 푸른 빛으로 변해 갔다. 두 가지의 색이 변해 가며 나의 뒤에 떠올랐을 때. 나는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 평생 벌처럼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나는 다시 벽 안에 갇혀, 오늘을 곱씹으며 살아갈 것이다. 이제 빛을 부르면 그가 떠오를 것이다. 그의 색을 닮은, 그의 빛을 보며.

“날이 늦었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나는 일린저의 손을 툭 밀어냈다. 일린저는 반항할 의지 없는 것처럼 손의 힘을 풀었다. 그의 손이 놓아지고서였다. 내가 숲을 빠져나오려고 몸을 틀었으나 일린저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전쟁을 생각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이렇게 그의 마음을 어지럽혀 놓은 내 죄가 컸다. 그러나 일린저의 발소리가 계속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숲을 의아하게 생각한 찰나. 한번 뒤돌아보았다. 내가 뒤돌아보자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일린저가 보였다.

“돌아봤네.”

일린저의 마음은 이렇듯 나에게로 다시 기어 왔다. 그는 항상 내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내가 돌아볼 것을, 그것을 기다렸던 것처럼 일린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린저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가 뒤로 돌았다. 오지 않는 그를 오게 만드는 것은 힘들었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일린저를 바라보며 찬찬히 걸어가자, 그가 천천히 나를 따라서 왔다. 우리가 이렇듯 서로를 놓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알았으니 나는 알게 될 것이었다. 이 삶은 절망이라는 걸.

이제 점점 모든 게 지쳐가고 있었다. 그를 향한 마음까지 지쳤다. 그렇게 나는 그의 막사까지 걸어왔다. 그를 데려다주기 위함이었는데 일린저는 제 막사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서 우뚝 멈추었다.

“들어가십시오.”

일린저의 눈은 막사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의 막사로 돌아가려고 한 찰나였다. 갑자기 그가 제 옆을 지나가려는 나를 불렀다.

“한 번만.”

일린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나를 강타했다. 나는 꿈쩍도 못 하고 멈추어 섰다.

“한 번만.”

일린저의 눈에는 나만이 담겨 있었다. 모두가 잠들었다. 보초병 몇몇이 서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조용한 목소리가 두 번 울렸다. 천천히 내 손목을 잡았다. 그는 떨고 있었다.

“역겨워도 한 번만.”

그 말을 듣고서 내가 멀쩡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나는 모든 핑계를 대어서 그를 쫓아내려고 했었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빌 때에는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한 번만 나 사랑해줘.”

오늘 밤을 달라는 듯 있었다. 그는 내 손목을 끌어다가 자기의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행태에 나는 그만 마음이 넘어갔다.

* * *

한 번만 사랑해달라는 뜻을 수락한 나는 그것을 철저히 이행했다.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쪽쪽, 입술을 가져다가 그의 온 뺨에 입술을 맞췄다. 일린저는 참지 못하겠는 듯 우리의 옷을 찢었다. 나를 막사의 침상에 눕혔다. 보드라운 짐승의 털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일린저는 내 위에서 나에게 하나씩 요구했다.

“정말 날 사랑하는 것처럼 해줘야 해.”

“일린저.”

“내가 착각할 수 있도록.”

나는 그가 더 말할 수 없게 그의 입술을 삼켰다. 일린저는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내 입술에 밀려서 뒤로,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서로의 입술을 훔치며 손으로는 지난 시간 동안 달라진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일린저의 몸은 예전보다 더 간고해졌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맛이 있던 손은 거칠어졌으며, 약간의 살이 빠졌다.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이 되었다. 자세히 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만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를 가지니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그와 접촉해서 그런가. 별로 한 것도 없었다. 입맞춤을 하고, 그가 내 목 부근에 입술을 비볐을 뿐인데도 아래가 젖고 말았다. 손가락 하나를 부드러운 음부 근처에서 노닐고 있던 그가 바로 알아차렸다.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넣고는 살짝 움직였다.

“으음…….”

예전의 그라면 조금 더 침착하게 나의 몸을 달구고서는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벌써부터 약간씩 흘려대고 있는 그의 성기를 나에게 들이밀었다. 다급하게 나를 밀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일린저의 배려 없는 느낌이라지만 오히려 그게 좋았다. 나를 갈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내 몸 안에 푹 성기를 찔러넣었다.

“하…….”

“아!”

그는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내 목에 이를 박아넣었다. 내 어깨를 핥으며 허리를 무식하게 치받아 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가슴을 살며시 머금었다. 그리고 입맞춤을 퍼부었던 부위에서 입술을 떼어내고 천천히 바라봤다. 일린저의 잇자국이 난 가슴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더 자국을 내고 싶어서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여기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막사 안이었다. 잘 하면 적의 기습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은 사실상 미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안고, 그는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부드러이 허리를 놀렸다. 속살에 치받고 꾹 누른 다음에, 다급하게 앞뒤로 그 부분만 끈질기게 때려주었다.

“아, 으, 응!”

일린저는 몇 번 그렇게 박아넣다가, 사정이 임박한 것 같으면 천천히 음부에서 빼냈다. 빳빳한 그것을 제 손에 쥐고 몇 번 흔든 다음에 다시 혀를 가져왔다. 그는 이제야 나를 만족시키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길게 뺀 혀를 음부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바깥으로 흘러 내려오는 애액을 샅샅이 핥아먹었다.

“아, 으!”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는 애썼다. 하다하다 음핵까지 짓누르면서 물을 짜내려고 했다. 일린저의 혀가 깊숙이 들어와 속살을 휘저을 때에 전신이 지릿했다. 나는 엉덩이를 빼기 위해서 슬금슬금 올라갔다가 다시 붙잡혀 내려왔다. 그의 얼굴에 음부를 대고서 마구 둔부를 흔들었다.

일린저의 혀에 깊숙이 박혀 있는 음부는 움찔거리다가 애액을 토해냈다. 그러다가 다시 그는 박아넣고 흔들기 바빴다.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그의 성기가 쭉 누르면서 들어와 나를 가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나는 위로 튀어 올랐다가 그의 손에 잡혀 끌려왔다. 다시 그는 푹 박아넣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아!”

절정에 몸부림치는 나를 재밌다는 듯이 가두어둔 그였다. 그는 나의 절정과 함께 씨물을 파정했다. 그가 내 속에서 파정을 끝내길 기다렸다. 나는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일린저는 부드럽게 내 목덜미에 입술을 맞대었다. 가만가만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대화를 하면서도 성기를 박아넣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거짓말해 줘.”

나는 지친 몸을 뒤로 돌렸다. 약간의 비음을 흘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일린저와 마주 안고 누웠을 때, 그는 내 손가락을 들어 입을 맞췄다.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상대방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고 싶지 않으나, 이런 식이 아니면 나는 평생 고백할 수 없었다.

“일린저.”

거짓인 것처럼 할 수 있는 밤은 어찌나 속이 편리한지. 나는 마음껏 거짓말이라는 핑계를 삼아 그의 앞에서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묵은 마음이었다.

“다음 생에는 꼭 평범한 집안의 사내로 태어나서, 날 기다리고 있어 줘.”

일린저는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너를 너무 아프게 했으니까. 나 만나기 전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어도 참아볼게.”

거짓말처럼 해야 하는데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그의 뺨에,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그 말은 절대 거짓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일린저는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

“이번 생엔 나를 내버려 두겠다는 뜻이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일린저는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보다가 그거면 되었다는 듯이 내 머리칼을 귀 뒤에 꽂아주었다.

“얼른 이생이 끝났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데려올 수 있게. 일린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 나는 그대로 일린저의 눈이 평온하게 감기는 것을 보았다. 일린저는 되었다는 듯 내게 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 미련이 없는 것처럼.

* * *

다음 날부터 우리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왕과 군신의 관계로 돌아갔다. 나는 그게 꿈인 것 같다가도, 여러 붉은 흔적을 보고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우리가 이제 끝이라고 했다. 마지막 유희는 그것이면 되었다고.

일린저를 필두로 모두 전장에 나갔을 때. 우리는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전쟁이 치열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동부의 바예레카 중 하나가 배반을 했다. 우리의 기세를 보고서 물러날 게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그는 성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손쉽게 동부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합군은 기세가 불리해지자 발을 빼기 시작했다. 애초에 남의 나라에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그들은 일린저의 빛을 보고서 금세 후퇴했다. 동부의 바예레카의 성 앞까지 왔을 때였다. 일린저는 성벽보다 거대한 불을 불러내었다.

예레카는 벽을 지키는 자였다. 그러나 벽은 왕가를 적으로 치지 않는다. 왕의 핏줄은 벽이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속수무책으로 일린저의 화마에 성벽이 무너졌다. 부유하다고 소문 난 그를 끌고 나온 것은 예레카 가문의 새 부인이었다. 그녀는 전쟁과 자신이 상관이 없다고 애원했다. 반역자를 데려가라며, 성내에 있는 어린 아들의 목숨을 구걸했다.

어차피 다 이긴 싸움이었다. 일린저는 동부의 바예레카를 손쉽게 잡아넣어 이겼다. 그는 나무로 만든 감옥에 갇혀, 일린저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왕의 첫사랑이라고 알려진 여자를 아내로 두었던 사내. 그는 죽음이 목전에 왔는데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일린저의 이복동생 또한 잡혀 나왔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은지 덜덜 떨며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같은 왕의 핏줄이면서도 그는 손바닥이 부들부들한 귀족에 불과했다. 피를 뒤집어쓰고 온 일린저의 앞에 반역자와 그의 아들이 끌려왔다.

“왜 그런 일을 벌인 겐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은 북부의 예레카였다. 처형이 결정된 자신의 오랜 친우를 보려고 온 듯했다. 북부의 예레카에게는 일말의 동정이 남아 있었다.

“질 싸움이라는 거, 알았지 않나.”

그러나 동부의 예레카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왕께서 내게 아들이라며 선물해주시지 않았나. 나는 선물을 받아서, 사용했을 뿐이네.”

그는 그리고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생을 부유하게 살았으나 어딘가 불행해 보이던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오히려 나는 이것이 바로 그가 바라던 결말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죽음을 바라고, 자신의 둘째 아들의 죽음을 바랐다. 일린저가 검을 빼내어 들었을 때, 그는 반역자의 눈이 아닌 충신의 눈을 했다. 그러나 살려둘 수 없기에 일린저는 망설임 없이 칼로 그를 베었다. 그의 목이 떨어져 나가 회랑을 굴렀다. 옆에 있는 아들은 그것을 보고 오열을 했다.

“아버지!”

자신의 몸이 꽁꽁 묶여있음에도 그는 기어가 자신의 아버지의 시체를 어루만졌다. 친아버지는 왕이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그는‘아버지’라고 부르며 슬퍼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오는 일린저의 앞에서 딱 한 마디를 했다.

“형님…….”

일린저는 검을 그의 목에 겨누었다가, 다시 물렸다. 그는 일린저의 동생이었다. 일린저의 눈에는 반역자를 향한 증오심보다 슬픔이 고여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복동생이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순간, 일린저의 검은 동생의 목을 베었다.

오랜 전쟁이었다. 북부, 남부, 서부의 예레카까지 끌고 와 외세와 반역자를 처단하는 데에 몇 개월이 걸린 싸움이었다. 그런데 만약 일린저가 자신의 감정에 이기지 못하여 검을 빼 들지 않았다면, 보지 못하겠다며 다른 이를 시켰다면, 그에 대한 신망은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일린저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시선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검집에 검을 넣었다. 그가 나를 냉정하게 피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우리는 더는 엮일 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났는데. 나는 왜 내 삶이 끝났다고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 * *

나는 내심 기대하고 말았다. 일린저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들켰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조금 더 그와 같이 대화할 줄 알았지만, 그는 몹시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귀관.’

‘예.’

‘할 말이라도 있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돌아가는 길. 서부, 북부, 남부로 갈리는 갈림길에서 마지막 연회를 열었을 때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술잔을 들고 그를 찾아갔으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일축이었다.

‘없습니다.’

일린저는 더는 대화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듯 달을 바라보고 섰다. 나는 차라리 그 지난날이 꿈이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너무 생생한 현실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물렸다. 그래 그의 태도가 옳은 것이었다. 나는 또 무슨 기대를 한 것일까.

일린저는 이제 적수가 없는 완벽한 왕이었다. 잘하면 왕이 된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몇 번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살게 되겠지.

그러나 나는 다시 성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성에 돌아와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를 다시 보았을 때. 두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살고 싶지가 않다고 느꼈다.

몇 달이 지났다. 나는 매일매일을 죽음을 바라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다음 생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나의 희망임에도 불과했다. 한데 정말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그러기만 한다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시달렸다.

이러면 안 되지만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마음이었다. 업무를 잘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며칠 쉬엄쉬엄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나를 다시 그나마 들뜨게 한 소식이 있었다. 은밀하게 북부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한 것이었다. 산도르아가 살고 있는 곳, 그 아이의 위치를 적은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이것을 할아버지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머니를 불렀다.

“내가 가마.”

“어머니께서요?”

나는 산도르아를 당장이라도 병사를 보내어 끌고 오라고 할 줄 알았다. 어머니의 태연한 태도에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는 내게 산도르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 들으시고는 눈을 감았다. 썩 좋은 위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내가 가 보마.”

단호한 어머니의 말에 나는 병사와 하녀를 대동하여 어머니의 여행을 꾸렷다. 성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어머니가 그렇게 여행을 떠났을 때. 이 바닷바람 부는 성에는 할아버지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매일 똑같은 하루를 넘기며 살았다. 그러다가 일린저의 소식이 들려왔다. 왕이 방탕한 그를 추방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나는 일린저의 아버지, 왕이 아직도 살아서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소식을 들고 들어온 사람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다행히 대신들의 반대로 일린저는 추방당하지 않지만,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방탕하게 산다는 것이었다. 그는 업무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몇 달간 셉시스에서 와야 할 서류가 오지 않아서 사람을 보냈더니 담당자가 없다는 소리가 들렸다. 담당자는 일린저였다. 그가 일을 하지 않는다.

반역자까지 훌륭하게 처단하고, 이미 왕을 대신해서 일을 하고 있었던 그였다. 그가 손을 놓으니까 와야 할 게 오지 않고, 보내도 소식이 없었다. 열흘 뒤에 온 것은 일린저의 이름이 아닌, 공주인 일리인의 이름이 적힌 봉투였다. 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왕자가 술에 취해 여자들을 끼고 논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설마 내가 다음 생을 기약해서 그가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수도를 한 번 들려 그에게 말을 걸까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나의 처지가 생각나서 나는 행동을 말았다.

가면 무엇을 할까. 어차피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해 줄 수 없는 처지인데. 그러나 하루 종일 신경 쓰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안색이 많이 좋아진 얼굴로 앉아 책을 보셨다. 할아버지의 집무실을 내가 쓰게 되고, 할아버지는 종종 아버지의 묘비 앞이나 벽의 끝에 올라가서 할머니를 묻어 두었다는 섬을 바라보았다.

나는 벽으로 올라가 바닷바람을 맡았다. 여전히 그 섬만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야라.”

할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네.”

난 몇 년 만에 지친 것을 할아버지는 책임감 하나로 버텼다. 아들이 죽고, 또 그 자리를 지겨워했음에도 지켜냈다. 나는 그래서 할아버지를 존경하였다. 나는 지금도 지쳐서 죽고 싶었다.

“네 할머니 말이다.”

할아버지는 돌아보면서 나를 보며 웃었다.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네 할머니를 똑 닮았다고 했지.”

“네.”

할아버지의 뒤로 가서 그의 담요를 조금 더 덮어주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계신 섬으로 가고 싶었으나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너처럼 괄괄하고, 무뚝뚝하고, 그래도 속은 따듯한 사람이었지.”

“그러셨어요.”

“이야라.”

“네.”

“내가 죽으면 네 할머니 옆에 묻어주렴.”

대대로 예레카가 된 사람들은 성의 뒤편에 있는 자리에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살아 있는 사람도 못 봐서 미치는 통에 할아버지는 죽어서 몇십 년을 못 보신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거면 됐다는 듯 웃었다.

“산도르아는 나를 원망하며 살아가겠지.”

“할아버지.”

“만나면, 네가 나 대신에 사과해주지 않겠니.”

나는 산도르아를 찾았다는 말을 할아버지에게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로 나를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네 어머니가 그렇게 서둘러 여행을 떠날 사람은 아니지.’ 했다. 산도르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계속해서 성안에 계셨던 어머니였다. 그 속사정을 할아버지가 다 안 것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산도르아를 만나지 못하고 갈 것 같아서 말이야.”

할아버지는 그때 내 손을 잡았다. 툭툭 두드리면서 할아버지는 내 손등을 뺨에 가져가셨다.

“이야라. 넌 지금 행복하니?”

거기서 나의 마음은 무너졌다. 나는 벽처럼 완고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변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이 벽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진심을 말했다.

“일린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울면서 할아버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어요. 앞으로도 나는 영원히 못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래서 행복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내 등을 쓸어내려 주면서 내 울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의 주름 진 손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을 때였다. 부드러운 할아버지의 말이 들려왔다.

“아직 그래도 내가 한 달은 버틸 수 있단다.”

나는 젖은 눈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잡으시고 나를 일으켰다.

“네 할머니가 죽기 전에 같이 놀러 가자고 한 것을,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며칠을 무시했지. 다음이 있을 줄 알았거든. 내 아들이 죽기 전에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따듯하게 한 번 안아 주지 못한 것도. 산도르아에게 왜 그런 길을 가고 싶으냐고 묻지 않은 것도.”

할아버지는 젖은 내 눈가를 가볍게 쓸어주셨다.

“넌 아직 기회가 있잖니. 이야라.”

“할아버지.”

“내 손녀가 평생 가슴에 묻어 두다가 나처럼 병에 걸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렇지만, 그거는…… 예레카로서 자격이 안 되는 거잖아요.”

할아버지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나의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넌 이미 훌륭한 예레카란다. 이야라.”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숨 막히는 벽에서 뒤돌아나가 말을 꺼내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것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이 나의 앞에 새로운 가능성처럼 보였다. 일린저, 일린저. 나의 눈물이 앞을 가려올 때,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말에 올라탔다.

그를 처음 만난 계절이 떠오른다. 바람이 내 귓가를 스쳤다. 말에 올라탄 그때. 나는 이제 질주를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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