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

10. 서부의 예레카

할아버지는 예레카를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건강이 안 좋아지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다시 돌려받으셨다. 예레카가 아닌 삶보다 예레카였던 삶이 훨씬 긴 할아버지였다. 누구보다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가 간곡하셨던 분이었다. 산도르아가 적합한 후계자가 아닌 걸 알자마자 나를 찾았고, 나를 찾아내었을 때 순수한 기쁨으로만 차올랐던 사람은 할아버지가 유일했다.

“이야라가 졸업 시험을 무사히 치러 다행이야.”

내가 돌아온 후에 할아버지는 줄곧 저 말을 하셨다. 어머니는 주책맞다며 축하한다는 말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하셨지만, 할아버지의 누렇게 뜬 안색을 보면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새벽까지 예레카의 업무를 보느라 잠들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이제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졸업하고 돌아온 나에게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도 이해하는 바였다. 할아버지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이제 그 자리는 내가 지켜야 했다.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각오한 적이 없었는데. 막상 내 눈앞에 닥쳐오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매번 겨울이 오면 학원으로 떠나야 했던 나의 일상이, 올해부터는 겨울에도 서부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목을 졸랐다. 수시로 도망치고 싶다고 느꼈다. 할아버지의 부담스러운 기대와 어머니의 응원을 듣고 있으면 말이다. 나의 작은 어깨가 무거워지곤 했다.

산도르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북부로 자신의 연인이 떠나 버려 말수가 줄어들었다. 산도르아는 졸업은 꿈도 못 꾼 채였다.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겨울이면 약혼식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느 밤, 할아버지에게 업무를 배당받고 밤을 새우고 온 날이었다. 산도르아는 들어오던 내게 말했다.

“이야라. 할아버지가 좋아?”

“무슨 말이야.”

새로 배운 업무에 지쳐있었다. 내가 못 알아들으면 할아버지가 실망하실까 싶었다. 나는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세워졌었다. 신경이 예민해질 만도 했다. 산도르아의 말 때문에 쉬지도 못했다.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지도 못하고 서 있는 게 몹시 피곤하다고 여겨졌나 보다. 눈빛이, 말이 날카롭게 나갔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이었고, 내 든든한 선생님이었고, 보호자였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끝에 서 계신 분이었어.”

산도르아는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못 견디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할아버지는 벽일 뿐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벽?’ 내가 묻자, 산도르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너를 처음 만나고 싸운 날. 기억해?”

머리끄덩이 잡으며 싸우고, 서로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만들었던 그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때도 우리를 벽에 가두었지. 결국 너와 내가 빛을 다루는 법을 깨우쳐 벽을 뛰어넘었고.”

“산도르아.”

나는 산도르아가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도, 알 수 없을 것도 같았다. 내가 돌아왔을 때 산도르아는 더 이상 할아버지와 싸우지 않았다. 마음대로 잡아 버린 약혼 날짜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산도르아는 그럴 때마다 지그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여기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 있어. 평생 그것을 보고 자랐는데 이제 와 갑갑해진 걸 보면…….”

산도르아는 한숨처럼 마지막 말을 뱉으면서 일어났다.

“벽 안에 갇혀 있지 못할 만큼 내가 자란 모양이야.”

그리고 산도르아는 ‘잘자.’한마디와 함께 떠났다. 내게 전할 말은 그것뿐이었다는 듯했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어갔다. 나는 천천히 따라 나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산도르아를 하염없이 보았다. 왠지 산도르아가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에 불안한 그 밤. 일린저의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시종일관 불안에 사로잡혀, 어쩌면 산도르아의 방에 뛰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산도르아는 위태로웠다. 나는 그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 * *

[ 곧 사냥 대회를 열 거야. 네가 보고 싶어서 눈에서 진물이 났어. 한 번만 “응.” 해 주는 네 답장을 기대하고 있을게. ]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한다는 내용, 보고 싶다는 투정이 섞인 일린저의 편지를 받고 있었다. 어쩔 때는 내가 아무런 걱정 없이 사랑 노래를 불러도 되는 여인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편지로 시작하는 아침은 짧았다. 할아버지와 점심과 저녁을 보내고 하루를 끝마치면, 나는 다시 예레카가 되기 위한 사람임을 깨닫고 말지만.

산도르아와 할아버지는 겉으로 데면데면하게나마 잘 지내었다. 어머니는 산도르아의 약혼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산도르아가 끝나면 곧장 나의 약혼이 진행될 것임을 알기에, 나는 에이버넷만은 안 된다고 말할까 싶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는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야라.”

“네.”

“식사 시간에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니?”

어머니는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내 손에 달린 편지를 바라보았다. 일린저가 드물게 길게 보낸 편지 때문에 아침 식사 시간까지 그것을 끌고 내려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설렘을 숨기지 못한 나의 표정 때문인지 어머니는 더욱 궁금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린저의 편지를 다급하게 구겨서 손에 말아 쥐고 말았다.

“친구들인가 보구나.”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산도르아의 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관심은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절대로 방관하는 처지에 놓일 수가 없었다.

“이야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고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셨다.

“오늘은 업무를 따로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요.”

“소개해야 할 사람들이 있어.”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어머니도 작게 탄식했다. ‘드디어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군요.’ 하면서. 산도르아는 알아들은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전혀 감도 오지 않는 상태였다.

어머니의 부산스러움은 그때부터 시작했다. 모든 하녀를 시켜 성내를 반짝반짝하게 닦기 시작하더니, 나는 예레카들이 어깨에 다는 금관 숄더를 달고, 붉은색의 망토를 입었다. 종아리까지 닿는 길이의 망토였다. 한껏 늘어뜨린 내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흡족하게 웃으셨다.

점심이 다 지나서야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마차와 말, 그리고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선 알게 된 것이었다. 두 명의 바예레카, 그리고 그 밑의 주요 가신들. 할아버지는 정복으로 갖추어 입고 나의 곁에 서 계셨다.

“예레카.”

“예레카.”

가장 먼저 할아버지의 앞에 걸어와 인사를 한 사람은 둘이었다. 각각 서부의 오른편과 왼편을 맡고 있는 위드먼과 페네크였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작게 설명하셨다. 두 가문은 바예레카 가문이었으므로 나의 손등에 입을 맞출 영광을 얻었단다.

오늘이 나를 정식으로 인사시키는 날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드먼을 보면 그 가문의 둘째인 에이버넷이 떠올랐고, 페네크를 보면 학원을 중퇴한 아킨이 떠올랐다. 그러나 두 가문의 가주는 그러한 사정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나를 대할 때 한 치의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위드먼 가문의 수장은 진중하고 조용한 성격이고, 페네크 가문의 수장은 보기보다 다혈질이며 말을 막 뱉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도 두 가문의 수장 모두 내 앞에서 무례하게 구는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버티고 앉아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다른 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출 때, 한 치의 망설임이나 기분 나쁜 표정은 없었다.

“이드리하임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예레카께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과연 예레카의 자리에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비록 바깥에서 자라셨어도 그 빛은 어디 가지를 않는군요.”

나의 아버지뻘 되는 이들 사이였다. 나 혼자 무덤덤하기란 여간 뻘쭘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수시로 나를 평가해 대는 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속 불편한 점심 자리를 가졌다. 저녁까지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성인이 되었으니 술도 마셨다. 점잖은 예레 하라며 다들 치켜세워 주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닌 나의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충정이었다. 시시때때로 느껴 버린 후였다.

그들이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자신의 후계에게 물려줄 때까지. 나는 배 속에 구렁이가 수백 마리는 들어앉은 저 늙은이들을 상대해야 했다. 안정적으로 서부를 이끌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내 어깨에 얹혀 있는 책임이 무엇인지 보여 주려는 듯했다. 그들이 내게 수없이 질문하고, 어려운 말로 나를 시험하려고 들었음에도 딱히 나서질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의도는 빤히 보였다. 요즘 들어 내게 업무를 맡기시는 것도, 이런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신 것도, 후계를 탄탄히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일부러 그들의 앞에서 나를 자랑하며, 빛의 힘을 담은 검을 휘두르게 한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조금도 나를 후계가 아닌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기필코 단단하게 못 박아 두시려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받고 싶었던 인정이었던가. 할아버지의 기대와 눈높이에 나는 지쳐갔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었다. 고개를 조아리나 약삭빠른 가주들에게 맞서야 했고, 약혼자가 생길 때까지 옆자리를 대신할 어머니를 지켜야 했으며, 산도르아가 시집을 가면, 산도르아의 안위는 곧 나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잘 해내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은 다치고 우스워지리란 걸. 할아버지는 그날을 통해 톡톡히 각인시키셨다.

“오늘 수고했다, 이야라.”

늦은 시간까지 버티고 앉아 술통을 비웠다. 수많은 가주를 끝까지 배웅하고서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자랑스럽다며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시었다. 나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왜 일린저가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술기운에 취해서일까. 그래도 거창한 숙제 하나는 끝냈다고 생각해서일까. 할아버지와 밤길을 걸을 때, 나도 모르게 용기가 샘솟았다.

“할아버지.”

“그래.”

딱 한 번. 이렇게 잘 해내고 있으니까 딱 한 번은 사실대로 얘기해보고 싶었다. 내 어깨를 어루만지는 할아버지의 온기에 기대어 딱 한 번만이라도.

“조만간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너무 기대된다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지 않냐며 웃으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웃음이 부디 오래가기를. 나는 내 발밑에 주황색으로 빛나는 벽돌을 바라보며 빌었다.

그래도 내 진심을 말해볼 수는 있는 거니까.

* * *

“할아버지.”

“이제는 예레카라고 부르려무나, 이야라.”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할아버지가 아닌, 예레카가 되기를 원하셨다. 나는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지시하신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가 타고 갈 마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중요한 서류가 담긴 상자를 건네셨다. 이 앞을 대충 시찰하는 줄 알았던 내 예상은 깨졌다.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나를 설레게도, 걱정스럽게도 했다.

조만간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 조만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셉시스로 가서, 왕을 만나야 했다. 예레카가 되기 위한 서류를 전달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일, 이 년 안으로 은퇴하실 작정이셨다. 그 안에 내게 모든 것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할아버지는 서부의 조용한 섬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마차 안에서 어머니가 내게 ‘괜찮은 계획인 것 같아.’했다.

나는 다만 이제 이곳을 떠나 셉시스로 간다는, 일린저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다. 항상 목소리로만, 편지로만 그를 만났었다. 한 번만 자신을 보러 와 달라는, 아니면 자신이 오겠다는 편지를 얼마나 거부하고 무시했는가. 일린저가 화났다고 말하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그를 만날 기회가 왔다니. 나는 소심하게 기뻐했다.

“그렇게 좋으니?”

어머니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가 셉시스로 떠나가, 드디어 예레카로서 정식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에 기뻐하는 줄 아셨다. 그러나 그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하지만 나는 남자에 마음이 팔려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어머니가 상상도 하지 못한 상대에.

“어머니.”

“응.”

“어머니는, 아버지랑 집안에서 정해 두신 정혼자이신 건가요?”

“그랬지.”

“따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셨고요?”

마차 안이 덜컹거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셨다. 어머니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를 다 안다는 듯이 꿰뚫어 보는 눈이 남았다.

“그 사람이구나. 너를 흔드는 사람이.”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에서 나는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피식 웃으셨다. 자신의 손안에 담긴 상자를 조용히 쓸어 보셨다.

“매일 네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 말이야.”

“친우라고…….”

“졸업하고서 매일 편지를 보내는 친우라니. 나는 그런 게 있다고 믿지 않는단다, 딸아.”

어머니는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창가를 바라보셨다. 말없이 밖을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결연함, 그리고 태연함이 남아 있었다. 상대가 일린저인 것은 모르시겠지만, 따로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네가 당황하는 것을 보니 에이버넷은 아닐 테고. 다른 가문의 사내이겠지.”

어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셨다. 결연함이 날아간 어머니의 눈에는 냉정한 현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예레카 두 가문 중 한 곳에서 반려를 구해야 한다, 이야라. 위드먼 가문의 에이버넷이나 페네크 가문의 아킨 중에 네 짝이 골라지겠지마는.”

“…….”

“네가 그들과 혼인해 완전한 예레카로 우뚝 선 후, 따로 연인을 만나는 것까지는 아무도 방해할 이가 없을 거다.”

“어머니.”

“그래야 해.”

어머니는 손에 쥔 상자를 꽉 쥐었다. 내 예상과 많이 달랐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완고하고,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줄 줄 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미 져 버린 기분이었다.

셉시스로 가는 설렘의 길이 다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가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내가 이 길에 서고 싶었고, 이 길 위에 들고자 노력했던 것은 나였다. 그런데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일린저 때문일까. 모두가 내게 이 길이 맞고, 괜찮다고 했다. 우리 가족 또한 아무렇지 않았다. 나만 무너져 가는 기분이었다.

셉시스에 도착해서도 일린저를 만날 기회는 적었다. 우선 내가 왕을 만날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나의 신분을 증명해 주고, 왕의 비서관이라는 사람에게 준비한 서류를 건네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예레카의 후계임을, 할아버지가 자리에 물러나자마자 내게 적법한 권리가 주어짐을 모두 증명하는 것이었다.

셉시스의 궁은 모두가 은색 빛이었다. 창틀, 기둥부터 바닥까지. 금에 취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초대 왕의 계획이라지만, 이미 금을 경계하는 것을 넘어선 수치였다. 하얀 은이라서일까. 그 사치스러운 성은 너무도 외롭고 추웠다.

이곳이 바로 일린저가 사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나, 이곳의 왕이 될 것이었다. 나는 벽을 지키고, 일린저는 이 은색의 궁을 지켰다. 그렇게 나고 자란 우리의 운명이 서로를 갈라놓으리라는 것을, 그게 몹시도 슬프고 괴롭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변화는 없을 터였다. 나와 일린저는 서로의 자리를 무사하게 지켜 나갈 것이다.

왕을 따로 만날 필요가 없음에도 나는 왕과의 독대를 얻어 냈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왕이 원한 것이었다. 왕은 어머니를 두고 나를 홀로 만나고 싶어 했다. 다 끝내고 일린저를 만나러 가야 했던 나의 앞에 생긴 고난이었다. 왕을 독대한답시고 그의 시종이 안내한 곳으로 갔을 때부터 지루함이 번졌다.

왕이란 이름으로만 들었던 사람이었다. 돔의 중심에 있고, 사위의 벽을 지키는 예레카들이 충성해야 할 단 한 사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 그러나 내가 상상한 왕과 눈앞에 있는 왕은 많이 어긋나는 면이 있었다.

내가 상상한 왕은 왕관을 쓰고 의젓하게 앉아 나를 맞이하는 이였지만, 지금 내가 본 왕은 푹 수그러들고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셌으며, 오로지 푸른 두 눈에는 탐욕만이 그득했다.

무엇보다 일린저의 아버지였기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일린저의 어머니인 왕비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으니, 아마 왕이 내가 만날 수 있는 일린저의 유일한 부모일 것이었다.

나는 왕의 추레함에 놀라고, 그의 앞에 앉은 의젓한 왕자 때문에 놀랐다. 일린저의 모습에 다시 설렘이 피어났다. 일린저는 왕의 앞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왕의 중얼거림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자세가 잠시 흐트러졌을 때는 나를 발견한 그때뿐이었다. 일린저는 나를 보고 잠시 눈이 커졌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이 평화로웠다.

“폐하. 서부의 예레 하께서 들었습니다.”

왕이 아끼는 시종이라는 자가 제법 크게 말했음에도 왕은 반응이 느렸다. 나이가 생각보다 많아 보였다. 왕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후에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일린저도 왕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내게 꽂히는 왕과 일린저의 시선은 상반되었다. 왕 쪽은 신선한 장난감을 본 듯 뜨거웠고, 일린저는 동상이라도 걸릴 듯 차가웠다.

“이리 앉아라.”

왕의 텁텁한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일린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일린저는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오로지 무표정하던 왕만이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외벽에서 자랐다고.”

왕은 앞뒤를 다 잘라먹고, 자신이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나는 왕의 앞에서 궁금증을 솔직하게 풀어 줘야 할지, 짧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네.’ 한마디를 했다. 왕은 그것만으로도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예레카가 탄생하겠구나.”

그것 말고는 크게 할 말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왕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 급격하게 흥미가 식은 듯했다. 눈앞의 차나 케이크를 먹는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왕의 벌벌 떨리는 손이 찻잔을 들어 입가에 댔을 때. 내 종아리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살짝 시선을 내리까니, 일린저의 다리가 내 쪽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일린저의 시선은 곧게 앞을 향했다. 제 아버지에게서 떼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아.”

차를 홀짝이던 왕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자네. 약혼은 했나?”

“아닐 겁니다.”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 옆에 있던 일린저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하게, 그러나 무신경하다는 듯이 말했다. 왕은 무언가가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나와 일린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 같은 나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같은 학원에 다녔겠고.”

“예.”

“그렇군.”

흥미를 잃어 가던 왕의 눈이 다시 차를 홀짝이며 나를 향해 있었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던 눈은 내 옆에 있는 일린저에게 옮겨 갔다. 왕은 마치 지금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달게 말을 했다.

“다비든의 공주는 언제 만나기로 되어 있지?”

내가 아닌 일린저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신하와 왕의 분위기였던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일린저는 냉철한 표정으로 답을 이어 갔다.

“두 달 뒤입니다.”

“두 달 뒤.”

왕은 그렇게만 답하고 차를 꿀꺽 삼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임에도 왕은 뜨겁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흡족하다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은 뒤, 후들거리며 의자를 밀어냈다.

“서운함 없이, 오면 잘 맞아 주도록 해.”

그제야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던 나의 귀가 열렸다. 다비든의 공주라는 의미가 와닿았다. 그건 일린저의 약혼녀일 것이다. 다비든은 동부 해협 건너에 있는 나라로, 돔과 몇 안 되는 우방국이었다.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심장이 찢겨져 나갔다. 오한이 든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냉정한 일린저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레 하.”

왕의 메마른 입술이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불렀다.

“네. 폐하.”

“서부를 맡아 줌에 있어, 자네가 부족함이 없기를 빌어.”

왕은 그렇게 말하고선 곤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느릿느릿 접대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시종들도 별말 없이 왕을 따라 나가는 것으로 보아 나를 만나서 할 이야기란 것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왕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마치 나와 일린저의 관계를 안다는 듯이 훑어보던 그 비열한 눈을. 왕의 마지막 당부가 그저 당부가 아닌 충고에 가까운 것임을.

“예레 하.”

바깥으로 안내할 시종이 가까워지기 전,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린저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네.”

일린저는 내 대답을 듣고서 살짝 미소를 지은 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인데, 잠시 차 한잔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린저의 입술은 친절한 듯 웃고 있으나 그의 눈은 살벌하게 나를 질타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극을 잘 아는 자로서, 일린저가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일린저는 내 대답은 필요치 않다는 듯 일어났다. 바깥으로 따라올 수 있을 만큼 느리게 걸었다. 그의 시종들이 뒤따르려고 하자, 일린저는 손을 들어 가볍게 그들을 제지했다. 일린저의 뒤만을 바라보던 시종들이 멈추고, 나는 홀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방금 전 왕의 경고 아닌 경고가 신경 쓰였다. 혹여나 궁에서 그와 친밀하게 붙어 있다가 일이 커질까 싶었다. 그의 떨어진 평판이 왕의 귀에 들어갈까 봐. 나는 신경 써서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일린저는 은의 궁을 성큼성큼 걸었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 발소리로 어련히 잘 따라오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왕자의 복을 걸쳤고, 나는 빨간 망토를 늘어뜨린 예레카였다. 각자 위치에 맞는 옷을 갖추고 있었다. 졸업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렇게 변하고 있었다. 왕자의 위를 가진 그가 다비든의 공주와 혼인할 날이 머지않았음에, 나는 현기증이 나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은의 궁을, 그의 옆을 당당히 차지할 여자가 벌써부터 손이 떨리게 미운데.

“아!”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급하게 열린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손목이 잡혀, 어느 한적한 침실로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달았다. 입술이 거칠게 부딪혔다. 일린저의 익숙한 혀가 다급하게 내 입 안을 휘저었다. 오랜만에 겪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끌어 안았으나 일린저는 내가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거슬리는 듯 나의 망토를 끌어 내리고, 드러난 내 목에 입술을 문댔다. 간지럽고 그리움 느낌에 살풋 웃음이 나왔다. 일린저는 내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잠깐 바라보다가 내 목을 살짝 깨물었다.

“왜 말 안 했어.”

일린저는 그렇게 나를 추궁하면서도 수시로 나의 뺨에 입을 맞댔다. 잠시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그랬다. 나를 몰아붙인 입맞춤에서 나는 일린저의 그리움을 읽었다. 늘 흐트러짐 없는 왕자의 모습을 갖춘 그가 이렇게 질 나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이게 그의 본 모습이었다. 차분하고 냉정한 왕자가 아닌, 뜨겁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

“보고 싶다고 그 난리를 치는데도 냉담하던 네가, 이렇게 간단하게 나타나 주실 줄이야. 응?”

“말하면 기다릴 것 같아서.”

그를 위해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지만, 그를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리웠던 만큼 그의 뺨과 입술, 그리고 머리칼을 쓸어 만졌다. 일린저는 내가 저를 만지자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진짜 같네, 이러니까.”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자신이 늘상 하는 말임에도 내가 하자 믿기지 않은가 보다. 나는 일린저의 뺨을 잡고 그의 입술을 훔쳤다. 그가 그리웠던 만큼 그를 맛보았다. 일린저의 부드러운 입술, 욕심 많은 혀와 깜빡이는 눈까지 쓸어 만지며. 일린저는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하다가 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내 속도에 같이 발을 맞추었다. 우리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서로의 입술을 가졌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이렇게 만나서 기뻐 날뛰는 내 심장이 가여웠다.

이럴수록 더 많이 베이고, 더 많이 아파할 것은 나인데 말이다.

* * *

어머니를 먼저 서부에 돌려보내었다. 나는 왕자와 친목을 다진다는 핑계로 남았다. 의외로 왕은 흔쾌히 나의 체류를 응해 주었고, 할아버지는 왕가에 충성하는 입장으로서, 또 나와 일린저의 사이를 모르기에, 내가 여기에 더 머무른다는 말에도 별말을 더 얹으시진 않으셨다.

다만 그 기한이 길지 않음은 나와 일린저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일린저는 나를 데리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중이었다. 일린저는 왕실 재단사를 불러, 내게 어울릴 드레스와 장신구를 선물했다. 그걸 입고 자기와 데이트를 나가자고 요구했다. 이 성안에서 내가 입을 수 있는 것은 예레카 복장뿐이었다. 그의 요구는 그의 침실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와는 주로 사냥을 나갔다. 다른 예레카들은 왕자와 무얼 하는지 몰랐다. 보통 와서 왕자에게 요구할 것을 요구하거나, 친목을 위해 사냥이나 술을 마신다고 했다. 우리는 빛의 힘으로 대강 사슴 몇 마리를 묶어 두었다. 사냥하는 척을 하다가, 아무도 없는 왕실 사냥터에서 서로를 탐했다.

그의 목에 손을 휘감고 입술을 나눴다. 사랑을 얘기한 것은 일린저뿐이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내가 먼저 입을 맞추면 그에 대해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나도 저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일린저를 포기하는 중이었다. 그와 나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눈을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나를 충직한 일린저의 신하로 보지, 일린저의 연인으로 보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일린저의 연인이 아닌, 그의 뒤를 보좌할 신하로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넘길 수 없이 비참했다. 그의 손을 잡고 거니는 것은 불경죄고, 그를 마음대로 껴안았다가는 왕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왕궁에 와서 결심이 무뎌졌다. 일린저를 본 뒤로 더욱더 마음이 굳어지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현실 앞이었다. 나와 일린저는 서로를 정부로밖에 둘 수가 없구나, 싶었다.

아마 세상의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반려를 끼고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사냥이나 회의라는 명목으로 가끔씩 서로를 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부와 중앙은 거리가 멀고, 우리는 서로의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가자. 어?”

일린저는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상의를 홀딱 벗은 채로 내게 안겼다. 나를 안고서 큰 바위 위에 앉았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이번 겨울에 따로 휴가를 내라고 했다. 서로만을 마음껏 탐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는 말을 흘렸다.

“그때. 다비든의 공주가 오잖아.”

네 약혼녀를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내가 물었다. 대놓고 물은 질문임에도 일린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 사랑은 그런 것 신경 쓰지 마. 너를 아프거나 속상하게 할 일 따윈 없으니까.”

평상시라면 그렇구나 하고 대충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헐벗은 채로 안겨 있는 나의 연인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네 약혼녀가 왕비가, 내가 모셔야 할 사람이 된다는 건데.”

일린저는 내가 화가 난 것을 알고선 약간 눈이 커졌다. 나는 왠지 놀라는 그 표정조차 일린저가 계산한 것만 같아 약간 가증스러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둘의 사이는 숨겨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열이 받았다.

“갈래.”

나는 헐벗은 그를 사냥터에 버려두고 먼저 말에 올랐다. 버려진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바위에 앉았다. 기쁜 듯이 나를 불렀다.

“이야라.”

“얼른 옷 입어.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게.”

“나를 사랑해?”

나는 말의 고삐를 잡고 그를 돌아보았다. 일린저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내게 대답을 요했다.

“사랑해서 화내는 거지? 그렇지?”

“지금 그게 질문거리가 된다고 생각해?”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할 일도 없는 건데, 그렇지.”

일린저는 자신이 말하면서 점점 얼굴이 환해졌다. 대화의 내용보다 내가 화를 낸다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그를 벗어나기 위해서 말을 움직였다. 말이 달려 나가며, 사냥터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숲을 메우고 있었다. 일린저는 웃고 있었다. 어디 한 번 저에게서 달아나 보라는 듯이.

그리고 그날 밤, 일린저는 내가 묵는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여러 번 돌려 보았으나 내가 잠근 것을 알고선 문 앞에 기댔다. 내가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내 사랑, 자지 않고 있는 거 알고 있어.”

귀신이었다. 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일린저는 계속해서 문 앞에서 말을 걸어왔다.

“사랑해. 넌 상처 받지 않아도 돼. 나만 생각해, 나만.”

그 말은 주문과도 같았다. 일린저의 말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를 사랑해서 무언가가 준비되었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에 우습게도 마음이 풀리고, 다시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느꼈지만.

떠나야 되는 날 아침이었다. 일린저는 침대 옆을 나보다 이르게 나갔다. 나는 늦잠을 자도 되니까 침대가 출렁거렸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일린저가 나의 뺨에 입을 맞추고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업무를 보기 위해서 일찍 눈을 뜨는 날은 많았다. 그러나 일린저만큼은 아니었다. 스르르 눈을 떠보니 이제 동틀까 말까 하는 새벽이었다.

아침부터 남의 침대에 깨어서 있기가 민망한 관계로 나는 일어났다. 씻자마자 그를 찾으려고 은색의 성을 돌아다녔다. 사실 돌아다녔다는 표현보다 그가 자주 들리는 곳 위주로 방문하였을 뿐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일린저의 집무실 앞까지 가 보았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나 혼자 걸었다. 혹시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까 그의 침실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내 발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성이었다. 이상한 외로움과 씁쓸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저 계단 아래에서 사내의 신음 같은 것이 낫다. 아아, 하면서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차갑게 몸이 얼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나의 연인인 일린저 모르온의 목소리였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그곳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간간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굳게 닫혀 있는 방문만 그득한 복도. 단 한 곳에서만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곳이다 싶었다. 나는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런데 열자마자 풍기는 지독한 느낌에 나는 순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어질어질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문을 연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것들은 빛이었다.

그 안에는 일린저의 숨소리,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사람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나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문을 조금씩 열었다. 내가 들어갈 정도로 공간을 확보한 다음, 소리 나지 않게 들어갔다.

바로 허리를 숙였다. 한가운데 일린저가 서 있었다. 안에는 커다란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사람 열 명 정도가 일린저의 주위에 빙 둘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까만 로브를 머리까지 쓰고, 검을 든 왕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땅에 수많은 빛이 올라와 있었다. 여기서 빛의 훈련을 하고 있는구나, 싶었다. 이게 일린저의 왕실 특별 교육인가 뭔가 하는 것일 터였다. 옛날에 무엇이든 잘하는 그를 보고서 나도 한번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누가 그랬었다. 범재도 인재로 만들어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일린저는 가만히 그 중앙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일린저의 몸은 빛을 흡수하지도, 그것을 이용하지도 않고 서 있었다. 바라만 보고 있는 그때. 갑자기 그의 주위에 있던 열 명이 빛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에워싸고 있는 그들의 주위로 빛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일린저는 나의 예상과 다르게 반항하지 않았다. 그것을 얌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일린저를 에워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족할 만큼의 빛을 갖고도 일린저를 공격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서 빛을 빼앗기지 않는 훈련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무슨 훈련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였다.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로브를 쓴 사람들은 모은 빛을 일린저에게 쏟아 보냈다. 그것은 단순하게 빛으로 일린저를 공격했다기보다 몸속에 빛을 주입하는 것에 가까웠다. 저런 식의 빛의 흐름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억지로 빛을 모아서 상대에게 주다니. 일린저의 표정이 딱히 밝아 보이지도 않았다.

일린저는 먹여주는 듯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을 감내했다. 머리 위로 땀이 뚝뚝 흘렀다. 고통을 모르는 것 같이 굴던 그였다. 저렇게 괴로워하는 얼굴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일린저의 등 뒤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그를 막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살짝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려는 나를 누군가 붙들었다.

“예레 하.”

일린저의 목소리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보다 조금 더 가냘픈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나를 잡고서 뒤로 불러세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손목을 잡은 이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긴 일린저였다. 꼭 그 같은 얼굴이 앞에 있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달려 나가려는 나에게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

그의 여동생과 이야기를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주는 일린저와 똑 닮은 얼굴로 팔에는 검을, 복장은 승마복이라고 할 정도의 옷을 입고서 서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를 끌었다. 상대가 잘 보이지 않는 그늘로 데려갔다.

“방해하지 마요.”

나는 내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음을 알았다.

“괴로워 보이는데요.”

“빛은 자신이 가고 싶은, 자신을 부른 사람한테 가게 되어있죠. 그런데 저렇게 누군가 불러놓고, 남의 몸에 들어가라고 하니까 빛들이 조금 열 받겠어요? 당연히 속상해하면서 억지로 들어가게 된 몸 안에서 날뛰는 거죠.”

실상을 잘 알고 있는 공주의 앞에서 나는 해괴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왜 저렇게 하는 겁니까?”

“글쎄. 저걸 견뎌내는 훈련이니까요. 저렇게 날뛰는 빛들까지, 자신이 원치 않아 온 빛들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러나 공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일린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거칠게 숨을 내뱉는 그의 등 뒤로는 무식할 정도의 빛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공주는 저거 정말로 아프거든요, 하면서 말한 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있었다. 그러나 괴로워 보이는 일린저에게 일말의 안타까움이나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주는 당연히 왕실의 사람이라면 받는 훈련이라고 했다.

내 눈에도 빛이 억지로 일린저의 몸으로 끌려가는 게 보였다. 빛들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아닌 일린저의 곁으로 가 화가 나 보였다. 계속해서 퍼부어지는 통에 자신들도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성질을 내면 내는 대로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은 일린저였다. 일린저는 들어온 빛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있지만 늦었다. 퍼부어지는 양에 비해 자신의 것으로 바뀌는 빛의 양이 턱없이 적었다.

결국 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옛날의 나처럼 날아가는 일린저를 보았다. 그 밤의 나처럼, 흙먼지를 굴러다녔던 나처럼 그가 몸을 구르고 굴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멈춤이 없었다.

그의 주변을 에워싼 이들은 동정의 여지 없이 압박했다. 계속해서 빛을 보내고, 일린저는 굴러가지 않기 위해서 재빨라졌다. 자신의 주변을 빛으로 채웠으나, 그 과정에서 몇 번 더 아프게 굴렀다. 그래도 일린저의 표정은 당황이나 분노가 없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빛을 설득하고 있었다.

이게 왕실의 특별 훈련법이었나. 이건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매일같이 하는 거예요.”

나는 공주가 뒤에 서서 나를 관찰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공주는 여기에 내가 나타날 것을 아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당황하는 법도 없었다. 나에게 이런 것을 구경시켜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보아하니 여기에 내가 들어온 것이 우연은 아닌 듯싶었다.

“왜 저에게 이런 것을 보여 주는 겁니까?”

공주는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나는 쏟아지는 빛을 피해서 자신의 빛을 늘려가고 있는 일린저를 보고 감탄보다는 동정이 들었다. 저렇게 하는데도 그는 빛을 사랑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나였다면, 이렇게 매일 잔인한 훈련이 반복된다면, 나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며칠 이 성에 묵는 것을 계속 지켜봤어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앳된 얼굴의 공주는 순순히 자신이 벌인 짓임을 인정했다.

“여기는 왕족과 그의 스승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고. 지금 예레 하는 내가 보이지 않도록 따로 장치를 해 두었으니 안심해요.”

“공주님. 왜 저를 여기에 데려왔냐고 물었습니다.”

“일린저가 망설이고 있으니까요.”

나는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공주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왕자의 훈련을 톡톡히 받은 그가 이제 코앞만 참으면 됐는데. 조금만 더 견디면 되는데. 이상하게 자꾸 딴 길로 새려고 드니까요. 그리고 그 원인이…….”

공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가라앉혔다.

“일린저와는 단순한 애인 사이인 거죠?”

“…….”

“그러면 거기서 멈춰요.”

왕이 되기 위해서 길러진 사람을 그만 내버려 두길 바라요.

나는 일린저와 멈추고 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주는 무엇이 불안한 것일까. 일린저의 앞에서 미래를, 왕관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터무니없는 부탁이자, 씁쓸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나에게 묻고 있었다. 더 넘을 선도, 우리의 앞에 다가오는 미래도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면 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에 묶여 가두어 두었다.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되는 서로를 가두어 두는 꼴이 되었다.

왕자의 주변에서 나는 무언가를 뺏어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 공주였다.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나는 마음의 싹이 기죽었음을 알았다. 그가 손쉽게 타고난 대가로 얻었다고 생각한 그 능력. 그는 뼈를 깎는 훈련을 견디며 얻어낸 것이었다.

“서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일린저 모르온의 왕관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잔인하게 거기까지만 보여 주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였다. 이미 나는 아까의 빈 복도에 나와 있었다.

사실 왕자에 대한 내 마음을 꼬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왕자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 같이 도망갈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러나 도망치면 무얼 할까. 아마 일린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인내하는 그에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종용할 자격이 없었다. 이제야 감히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나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고통과 의무에 시달리는 왕자였다. 그래서 그의 침실로 돌아가 아무것도 아닌 척, 잠이 든 척을 하고 있었다. 훈련을 끝낸 그가 씻은 몸으로 들어왔다. 나를 꼭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가 아닌 학원에서 끝내는 것이 맞았음을 상기했다.

나는 그를 가질 수가 없겠다.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왔을 때. 서부에서 나를 찾을 때. 나는 일린저가 다시 내게 의무적인 왕자로 돌아가야 할 때. 다시 비참함이 내 입 안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아플 일이 없을 거라곤 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서부에 다 도착했을 즈음에 깨달았다.

* * *

서부에 도착하자마자 일거리가 쏟아졌다. 할아버지는 이제 최종 결정권자에서 물러나, 내게 거의 일을 일임하셨다. 은근히 놀기 좋아하는 할아버지였다. 나를 피해서 꽃밭에 물을 주며 돌아다니셨다. 할아버지가 이 시간만을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거리를 내게 쏟아 버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네 할머니와 조용히 얘기를 나눈 게 벌써 몇 년 전인지 모르겠다.”

“할머니요?”

“이 벽에 갇혀서 평생을 보낸 게 억울하다며, 작은 섬에 제 묘비를 세워 둔 나쁜 아내가 한 명 있었지.”

할아버지의 눈은 그리운 사람을 말하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늘 차분하고 일정한 감정의 폭이 넓지 않으셨다. 그건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드러낸 슬픔이었다.

“보고 싶어.”

“…….”

“정말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단다.”

할아버지는 이 벽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벽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처음 나를 만나 벽을 소개할 때, 벽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귀를 기울이라고 했을 때. 전혀 벽을 싫어하거나 진저리치는 기색이 없으셨다.

그러나 늙고 쇠약해진 할아버지의 시선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 벽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지긋지긋한 건 산도르아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또한 이 벽을 벗어나 할머니가 묻혀 있는 작은 섬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걸 위해서 나를 빨리 가르치려고 애쓴 것이었다.

“내년 봄이면 갈 수 있겠지.”

그런 기대를 품고 꽃에 물을 주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설렘이 피어났다. 나는 저 얼굴이 일린저를 만날 때의 나의 얼굴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에게만은 말할 생각이었다. 일린저와 내 감정에 대해. 어쩌면 나는 할아버지에게 몇 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지겨운 의무를 몇 년이나 해 온 할아버지의 앞이었다. 나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편지에 답장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일거리가 쏟아지는 날에는 하루 이틀씩 늦곤 했다. 일린저 또한 나보다 더 바쁠 것이 자명한데도 그는 단 한 번도 편지의 답장을 늦추는 법이 없었다.

일주일 뒤에 만나, 열흘 뒤에 만나. 우리의 약속은 점차 말뿐인 것으로 변해 갔다. 나는 나대로, 일린저는 일린저대로 바빴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찬 바람이 부는 겨울 날씨로 변해 갔다. 우리가 같이 보내겠다고 한 겨울이 다가왔음에도 나는 침묵했다. 일린저에게 쉽사리 가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감기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모든 이들이 내게로 일거리를 가지고 왔다. 작게는 성내에서 일어난 패거리 싸움부터 크게는 가문과 가문의 신경전까지. 엉덩이 붙일 시간 없이 내게 처리해 달라고 가지고 왔다.

“그 영토는 백 년 전부터 저희 가문에 내려오는 영토였습니다.”

“영토만 그쪽 것이지, 사실상 거기서 난 포도는 저희 가문이 심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수확만 같이하고, 수익을 반으로 나누자는 저희의 의견에 욕심을 부린 것은 저쪽이란 말입니다.”

각자 가문의 대변인을 끼고 나왔음에도 말이 거칠어졌다. 대변인을 밀치고 나와 멱살을 잡고서 서로의 권리를 주장했다. 한쪽의 편을 들면 한쪽이 성가시게 굴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병사를 시켜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일주일 뒤에 판결을 내릴 테니 다시 찾아오라고 일렀다. 서부에서 이런 자잘한 사건까지 내 입김이 닿았다. 사소한 일이 쌓여 내 평판이 되고, 내 위신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누군가의 호소를 듣는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피곤을 삼켰다. 그때 내 손 위에 차가운 무언가가 올려졌다.

“힘들어 보이네.”

“산도르아.”

어느새 산도르아는 집무실에 조용히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었다며 술 한잔을 내게 건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산도르아가 만들어 준 술을 조금씩 맛보았다. 산도르아는 내게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산도르아의 뒤를 따랐다.

“그럴 때는 선대들이 적어 놓은 판결문을 읽어 봐. 분명 비슷한 사례가 있을 거야.”

“맞아. 할아버지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

“참 재밌지.”

“뭐가.”

“그렇게 재미없고 힘든 자리인데, 왜 그렇게 가지고 싶었는지 몰라.”

나는 나를 정원 밖으로, 점점 으슥한 뒤편으로 안내하는 산도르아를 따라갔다. 이럴 때의 내가 한 생각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예레카가 된 산도르아를 떠올려 보았다. 나보다 침착하고 할아버지를 닮은 면이 많은 산도르아였다. 나보다 잘 해내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벽이 산도르아를 선택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 것은, 명백히 일이 고되기 때문이었다.

산도르아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아버지의 묘비가 있는 곳이었다. 언뜻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데였다. 처음 어머니가 나를 아버지에게 소개시켜 준다며 데려갔을 때 느꼈다. 정말 아버지의 품이라도 들어온 듯 따듯하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산도르아는 아버지의 묘 앞에 앉아 술을 홀짝였다. 병째로 들고 마시던 산도르아는 나를 보며 맑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

“뭐를.”

나는 산도르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산도르아는 아버지의 묘비명을 쓸어 만지다가 우는 것처럼 웃었다.

“처음 너를 봤을 때, 네가 걸어 들어올 때.”

“…….”

“나는 네가 너무 미웠어.”

나는 술잔을 입에서 내렸다. 산도르아의 말은 지금, 이 순간에 나올 것이 아니었다. 다소 뜬금없는 산도르아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이것이 내내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임을 알았다.

“나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는 걸 한 번에 다 가져가는 널 보고. 나를 선택하지 않은 벽, 나를 바꾸어 두고 떠난 그 여자, 너에게 어쩔 수 없이 더 쏠리는 관심, 애정…… 무덤덤해 보였지? 자애로워 보였을 거야. 당연히 네 것이라며 담담하게 서 있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겉으로 자애로운 척을 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로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

산도르아의 고백은 미움, 충격보다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나는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쓴 술을 목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야라.”

“응.”

“아버지의 묘 앞에 네가 섰을 때 말이야.”

“응.”

“난 너에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어.”

단순히 산도르아가 혼인 전에 쏟아 내는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도르아의 마지막 말은 나를 그녀의 눈과 마주치게 했다.

“아버지는 네가 오기 전에 나를 진짜 딸이라고 믿고, 자기 전까지 책을 읽어 주고, 사랑한다고 안아 주고, 나를 쓰다듬어 주며 ‘내 딸’ 해 주셨거든. 그건 다 네 것인데, 이 이름조차 네 것인데. 너는 더는 아버지를 볼 수도, 그걸 만질 수도 없는데. 나는 뻔뻔하게 그걸 훔쳐 놓고도 너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산도르아. 그건.”

“그때부터 너에게 다 돌려줄 생각이었어. 원래부터 네 것이었지만, 그래도 더 빠르게 원래부터 네 것이었던 것처럼, 나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이 성에서.”

“…….”

“그러다 보니까 나는…… 점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뭐지? 뭘 위해 태어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애초에 태어나면 안 되는, 하녀와 귀족 사이의 사생아 주제에 뭐를 얻겠다고…….”

산도르아의 말이 점점 작아지다가 한 단어를 기점으로 강해졌다. “키르얀.”

“걔는 그래도…… 이 성의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와 온전히 나를 나로 봐 주는 그런 존재였어. 나는 그 사람만이 나를 제대로 봐 준다는 걸 알았어. 예레카가 되려다가 만 실패작, 위테르발도 가문의 어중이떠중이로 변해 버린 내가 아니라…….”

학원에서 묘하게 섞이지 못했다. 이방인에게만 매달리던 산도르아가 떠올랐다. 나는 그런 산도르아를 그저 사랑에 빠진 것일 뿐이라고, 풋사랑에 과도하게 몰입한 순진한 아가씨일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산도르아는 풋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봐 준, 자신을 따르는 단 한 사람에게 매료된 것이었다. 매료되다 못해,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키르얀이 되었다. 키르얀에게 가고자 감히 이 성벽을 넘어 보려고 했었다.

그런 산도르아의 약혼식이 다음 달이었다. 이 가문에서 위치가 어정쩡해진 그녀가 다른 가문으로 내쳐지는 것처럼. 산도르아는 그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나에게 이렇게 토로하는 것은 산도르아의 마지막 고백이었다.

그녀의 다정함, 차분함은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묘지에 매달려 엉엉 우는 산도르아가 본디 심약하고 발랄한 소녀였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내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벽이 그녀를 다음 대의 예레카로 선택했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이 자리를 물려받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운명은 잔인했다. 산도르아와 나는 끝끝내 친해지지 못할 운명이었다. 우리의 사이에는 벽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영원히 허물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산도르아의 마음의 벽은 내가 만들었으므로.

내가 잘못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산도르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사람은 미워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미워하게 되기도 했다. 산도르아의 마음이 이기적이라기보다는 사람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이기에.

그리고 나약한 줄 알았던 산도르아는 그날 밤 성에서 도망쳤다. 횃불이 동시에 켜지고, 잠자던 나를 할아버지가 깨웠다. 추격할 병사들이 준비되었다. 산도르아의 방을 뒤진 하녀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산도르아가 한 말이 마지막 고백이 아니라, 인사였음을 직감했다.

“당장 말을 꺼내 와라!”

“할아버지.”

“모두 흩어져 찾아라, 내가……!”

그러나 할아버지의 기침 섞인 말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물러나면서 실질적인 집안의 결정권자는 나였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말에 올라탔다. 검은 말에 발을 튕겼다. 내 뒤를 따르는 병사의 수는 스물이 넘었다.

산도르아는 이 계획을 오래전부터 준비했을 것이었다. 나는 남몰래 빛을 뿌려, 산도르아가 떠나간 자리를 추격했다. 빛들은 천천히 뿌려져 산도르아의 뒤를 쫓았다. 그것은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도르아의 뒤를 쫓으며 나는 사람을 계속 분산시켰다.

“서쪽으로 가라.”

반을 서쪽으로 보내고, 나머지 반을 다시 동쪽으로 보냈다. 앞으로 달리는 것은 나와 어떤 병사 하나뿐이었다. 다들 내 결정에 의아했지만 따랐다. 반으로 갈라지는 병사의 무리를 보며 나는 안심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해가 떠오르기까지 한참 남은 달밤이었다. 나는 다급히 산도르아의 뒤를 쫓았다. 나를 쫓아오는 병사는 일부러 나와 거리를 두며 달렸다. 나는 빛의 느낌으로 산도르아의 근방까지 달려왔음을 알아챘다. 나는 뒤를 돌아 쫓아오는 병사에게 소리쳤다.

“너는 다시 뒤로 돌아가 다시 한번 수색해!”

병사는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며 말을 계속 달렸지만, 말없이 쏘아보자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그렇게 계속 달렸다. 나는 홀로서 동산의 등선을 넘고 있는 작은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작 이 정도에 따라잡힐 정도로 산도르아의 계획은 형편없으며 절박했다. 산도르아의 금발을 숨긴 낡은 로브를 건너보았다. 다가갔을 때였다. 말의 발굽 소리에 놀란 산도르아의 등이 돌려졌다. 커다랗게 떠진 녹색 눈이 나를 발견했다. 서글프게 휘어졌다.

저 동산을 넘어가 외벽으로 가고, 바다로 간다면 나는 산도르아를 찾을 수 있을까. 산도르아를 여기서 보내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러나 나는 곧 치러질 산도르아의 약혼식을 떠올렸다. 아무리 실권이 넘어왔어도 나는 산도르아의 약혼식을 막아 주지 못했다. 빌어먹게도 예레카가 가장 내려서는 안 될 결정이었다. 가문에 위해를 주는 결정이었다.

나는 아직 예레카가 될 수 없나 보다. 산도르아가 떠나서 얻을 가문의 피해보다 원망 어린 눈을 달고서 혼인식에 끌려가는 걸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저 작은 등이 낑낑거리며 돌을 넘어가고, 나무 앞에 서서 나를 잠시 바라볼 때. 나는 다급히 눈을 감았다. 산도르아는 인사하는 듯 멀리서 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동산의 굽어진 아래로 사라졌다.

산도르아는 떠났다. 예레카가 되어서, 나는 앞으로도 많은 것을 결정하고,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것이었다.

“예레 하.”

서쪽, 동쪽으로 흩어졌던 병사 중 일부가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멍하니 말 위에 앉은 내게로 모여들었다. 자신들이 다녀온 쪽에 산도르아가 없음을 알렸다. 저 굽이진 곳을 넘어가 외벽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녀왔지만 찾지 못했다.”

“하지만 예레 하.”

“돌아가자.”

나는 말 고개를 다시 성내로 돌렸다. 새벽을 맞아 아무도 없는 길가로 다시 돌아갔다. 내 등 뒤에서 망설이던 말발굽은 조용히 나를 따랐다. 나는 자매와 같은 이를 잃었다. 나는 이것이 첫 번째 이별임을 실감했다.

* * *

산도르아가 사라지고 큰 파문이 일었다. 그중 가장 큰 파문은 할아버지의 건강이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산도르아를 찾겠다고 나서다가 건강에 무리를 일으켜, 자리에 몸져누웠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할머니를 보러 가겠다고 장담하던 할아버지였는데. 당장은 나약하게 산도르아의 이름을 부르며 침실에 누워 있었다.

“그 이방인을 찾아봐라, 이야라.”

“일단 쉬세요.”

“분명 거기로 갔을 거야. 그 이방인이 있는 곳으로.”

할아버지는 약을 먹고 주무시기 전까지 계속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이방인이 산도르아를 데려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산도르아가 제 발로 나갔을 거란 선택지는 아예 부정하고 있었다. 차마 자신이 사랑하는 손녀가 할아버지를 배신함을 알릴 수 없어, 나는 곳곳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산도르아가 치밀하게 돌아다녀도 서부는 위테르발도의 아래에 있었다. 우리의 가신들은 경계, 추적에 더 힘을 썼다. 각지에 이미 소문이 퍼진 산도르아였다. 성내에서 편안하게 북으로 올라갈 수 없으니, 아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험한 외벽의 길을 택했을 것이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을 텐데. 무사히 표를 구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지만 산도르아가 북으로 갔을지에 대한 확신도 내게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닮은 사람에 대한 보고는 항상 내게로 올라왔고, 나는 그것을 잘 보관해 두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었다. 서쪽 바다를 건너면 있는 커다란 섬. 거기는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살았다. 남쪽 바다에 나타나는 해적들이 거진 그 섬의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호전적이고 전투를 좋아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틈틈이 외벽으로 넘어왔다. 안 그래도 힘든 외벽민들을 약탈하고, 이따금 성내로 들어와 외벽 근처 마을을 약탈하기도 한다는 소문이었다.

내가 여자이고,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이렇게 갖가지 문제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와중이었다. 일린저 모르온이 서부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로 서부에 내려왔을 때. 그래서 성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이게 꿈이려니 싶었다.

“왕자님.”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나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일린저는 너무도 근사한 외양이었기에. 완전한 왕자의 위엄을 갖춘 그는 제게 무릎을 꿇는 나를 다급히 일으켰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자지 못하고 업무에 시달린 나를 보다가, 내 옆에서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표정인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예레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네.”

잠시 멍해 있던 어머니는 그것이 이유였냐면서 다정하게 웃었지만, 일린저가 잡은 내 손을 뚫어져라 보았다. 의심스러워하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내려오시기까지 하다니요.”

어머니는 다급한 티가 나지 않게 일린저를 대접할 식사를 차렸다. 그는 편하게 제복의 단추를 풀고 의자에 느슨히 기대었다.

“예레 하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나는 불안했다. 어머니가 일린저의 말에 확신을 가진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잠시 굳었다가,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고 일어섰다. 무릎을 굽히고 돌아선 어머니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나였다. 나는 어머니가 문을 닫자마자 그에게 달려들 듯이 말했다.

“왜 말도 없이 여기를 와.”

“오랜만에 보는 건데 말하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안 보여?”

언제나 그랬듯 장난으로 넘기려던 일린저였다. 화가 난 내 얼굴을 보고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화를 풀라는 듯 주먹 쥔 내 손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일린저. 난 너를 맞을 여유가 없어…….”

“그러니까. 본론만 말하고 떠나라는 건가?”

자세히 보니 일린저의 얼굴도 피곤에 절어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한쪽 손으로 제 피곤한 얼굴을 쓸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작은 핑곗거리라도 생기면 네 옆에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하면서.”

“일린저.”

“보고 싶었다고, 이렇게라도 와줬다고 좋아하면 안 돼?”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때릴 지경이었다. 내 정원에, 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산도르아가 떠나고 할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나는 모든 책임에 짓눌려서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바빠서 널 맞이할 여유가 없는 거였어.”

일린저는 상처받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변했어.”

“일린저.”

“어느 순간부터 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고, 내가 널 볼 핑계를 만들어 뒀다는 말에도 시큰둥하고, 불안해진 내가 이렇게 직접 너를 찾아왔는데도…….”

하필이면 이때, 이 시기에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산도르아가 사라지기 얼마 전이라면, 그에게 조금은 상냥하게 대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셉시스로 갈 수 없고, 너는 서부에 살 수 없어. 우리 둘 다 필연적으로 서로의 땅에 묶인 몸이라는 걸 잘 알잖아. 지금 일이 터져서 바빠. 너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어.”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린저는 무언가를 눈치챈 사람처럼 굴었다. 망설이는 내 입술을 보다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이렇게까지 불안에 젖어 들었다. 이렇게 확실히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알았어. 내가 미안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내 머리는 차가워졌다. 헤어지자는 말을 뱉으려고 하는 것을 아는 듯했다. 일린저는 조심스럽게 나의 손을 붙잡았다.

“신경 안 쓰이게, 며칠만 있다가 갈 거니까. 오래 머물 생각 없어. 잠깐만, 네 얼굴 좀 보여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안 그래도 나를 무시하는 이들이 줄줄이 있었다. 외벽에서 자랐으며, 여자에다가, 자신들을 이끌 통솔력을 길렀는지를 의심쩍어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내게 벽에 대한 안전을 부탁할 이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어떻게 섬에서 건너오는 야만인들을 처치할 것인지 의논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내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내게 기대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앓는 중이었다. 나는 위테르발도 가문 역사상 가장 쓸데없는 예레카가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연인은 나를 더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왕자가 머무는 것을 거절할 용의가 내게는 없었다. 겉으로나마 나는 그가 오면 잘 접대해줘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네가 꿈에 매일 나와서. 섭섭하네, 이렇게 화난 얼굴만 보여 주고.”

태연하게 묻는 그의 얼굴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미워하게 된, 그 오만한 얼굴. 그는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당당한 얼굴을 가지고서 내게로 내려왔다.

“나 안 보고 싶었나.”

그렇게 말하는 일린저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치 아까 내가 삼킨 말의 의미를 그도 느끼는 것을 보니. 그도 점점 실감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끝을.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우선 쉬어.”

“이야라.”

“내가 지금 바빠. 이런 시기에 나한테 언질 한 번 없이 온 네 잘못이니까…….”

“너 다른 새끼 생겼어?”

일린저도 나처럼 왕이 제 업무를 하지 않아 쏟아진 일거리에 시달렸을 터다. 그런 그가 다 내팽개치고 내게로 달려온 이유. 이것 때문이었다. 모로 보나 내가 저를 버리고 다른 남자랑 결혼하게 될까 봐. 그의 탐욕스러운 눈이 자신이 잡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여기에 나 말고 다른 사내가 준 반지를 끼고, 너 그러기만 해 봐.”

“일린저.”

“네 손가락을 자르고, 그와 똑같은 내 손가락도 잘라 버릴 테니까.”

“점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서약한답시고 입을 맞추면 내 입술을 잘라낼 거고, 끌어 안기라도 하면 내 팔도 다 잘려 나갈 줄 알아. 그렇게 알라고.”

“왜…… 내 팔도 아닌, 네 팔을 잘라.”

“네 거잖아. 버려졌는데…… 나 혼자 그거 어디에다가 쓰라고.”

일린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내 손을 끌어갔다. 제 입술에 가져가 붙였다.

“요즘…… 편지에 답장도 잘 안 하잖아. 나한테 무신경해.”

일린저가 보기보다, 아니 내 생각보다 왕자의 직위에, 그리고 왕가의 명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태도를 취하면 문제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포기하는 게 생긴다면 그것은 그일 것이다. 그는 우리의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는 무수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며, 나는 싸움의 한복판에 던져질 것이었다.

“나 네가 보내 주는 짧은 답장에 하루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터라. 답장이 늦거나 내가 보낸 질문에 답해 주지 않거나, 그러면 내가 네 마음을 의심하다 못해 미쳐 버린다고.”

“…….”

“미쳐서 여기까지 왔잖아, 결국엔.”

일린저는 내 손을 끌고 가 제 입술에 눌렀다. 특히 네 번째 손가락에 더욱 입술을 길게 눌렀다.

“사랑해.”

달콤하던 그 말이 내 목을 옥죄고 있었다. 내가 해 줄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방을 내어줄 테니. 나 지금…….”

순간 이명이 들렸다. 요즘 피곤함에 자주 이런 일이 있곤 했다. 나는 머릿속까지 울리는 이명에 약간 휘청거렸다.

“이야라.”

나는 그를 거칠게 뿌리쳤다. 일린저는 미안한 듯 나를 놓았다. 나의 완강한 거부에 일린저는 얼마 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예 서부로 내려온 것이 아니지만 몇 달은 머물 수 있다며, 근방에 있는 일들 때문에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 그래도 그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인사는 아니었다.

일린저를 환대하는 식탁을 차리고, 정작 나는 그곳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성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었으나 일린저는 싫은 듯 했다. 하녀를 통해 언제쯤 내려오는 것이냐는 재촉을 보냈다. 그의 방에 내일 아침이나 찾아가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방으로 내려갔을 때, 눈앞에 있는 것은 일린저의 모습이었다. 그는 창문이 열린 곳 앞에 앉아서, 그가 내게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내가 모아둔 것들이었다. 그걸 천천히 보았다. 나는 살짝 지친 마음이 되어서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를 여기에 두고 내 마음이 오죽 불편했을까. 한 줄의 글도 신경이 쓰여서 잘 읽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일린저. 네 방은 여기가 아니잖아.”

“이렇게 모아두고 있었네.”

그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과거에 써 내린 편지를 보고 있었다. 내가 쓴 것도 아니고 자신이 내게 쓴 것이었다. 그걸 보며 그는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이걸 읽고 있는데 말이야.”

“응.”

“왜 이렇게 슬프지.”

일린저는 달밤 아래에서 자신의 편지를 보다가 그것을 더 읽지 못하게 허벅지 위에 힘없이 올려두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던 걸음이 멎고 있었다. 그는 곱게 접어둔 자신의 편지를 쓰다듬으며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이때도, 지금도 널 사랑하는 마음에 보고 싶을 때마다 매일, 편지를 썼네.”

“…….”

“그런데 난 단 한 번도 이런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어.”

일린저는 자신이 우는 것도 모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에는 커다란 달이 그를 집어삼킬 듯이 떠 있었다.

“처음에는 네가 날 사랑한다는 확신에, 사랑해, 보고 싶어. 갈수록 편지의 끝에…… 나 사랑해? 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묻는 걸 보니까. 단 한 번만이라도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해줬더라면.”

일린저는 천천히 편지 뭉텅이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는 책상을 부여잡고 숨을 크게 골랐다. 크게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그의 등으로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린저는 자신의 뺨을 만져보았다. 눈물이 묻어난다는 걸 그제야 안 눈이었다. 그는 기가 찬다는 듯이 제 손에 묻은 눈물을 바라보았다.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내게 손을 뻗었다.

“네가 이런 거 표현 잘 못하는 여자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내가 봐주는 거야.”

그는 평상시의 그처럼 밝게 돌아왔다. 그러나 일린저의 눈을 보다가 나는 그를 피하고 말았다. 그가 떠나기 전에 헤어지자는 말을 해야 했다. 그게 정답이었다. 그걸 목 끝까지 담아둔 내가 한심스러웠다.

“이럴 때 네가 해야 하는 게 뭔 줄 알아?”

일린저는 서운함을 다 씻어낸 표정으로 내게 팔을 벌렸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동안 내 가슴은 미어지고 무너졌다. 우리 도망갈까, 도망가자, 다 버리고 도망가자.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내 목소리가 속으로 울렸다. 머리끝까지 채워서 울리고 있었다.

“얼른.”

그의 머리부터 내 가슴에 끌어와 부드럽게 안았다. 일린저는 당연하다는 듯이 팔을 내 허리에 둘렀다. 오늘 온종일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며, 일린저를 보러 갈 사치는 없다고. 그러나 하루 종일 그가 이 성에 홀로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자신의 일도 바쁜 왕자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두 의문을 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일린저의 품 안에 있으니 갑자기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나를 귀찮게 했던 모든 것들, 할아버지의 부재, 산도르아의 부재, 나 대신에 여러 업무를 분담해서 같이 나누어주고 있는 어머니, 충직하지만 나를 신용하지 못하는 가신들, 그 위에서 잘 하고 있는 건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나.

그의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짧게 빨아들이고서 나를 서서히 뒤로 밀었다. 나는 밀치고 밀쳐졌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일린저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단추를 뜯을 듯이 풀어냈다. 그의 옷이 스르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여기서 네 냄새가 나.”

그는 살짝 얼굴을 돌려 침구에 얼굴을 묻고서 깊이 숨을 들이마시었다. 일린저는 부드럽게 내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젖가슴을 한 손에 쥐고서 부드럽게 만졌다. 그 손길에 나는 설레었다. 일린저의 손이 너무 오랜만인 것을 느꼈다. 그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것을 뱉을 수 없어서 눈물이 나왔다.

“아파? 오랜만이어서?”

그는 제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다급히 손을 물렸다. 나는 멈추지 말라는 듯이 벗겨진 그의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나는 가장 사랑하는 일린저를 포기해야 했다. 항상 나의 뒤에만 있는 그가 가여웠다. 일린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를 서서히 밀쳤다.

내가 그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일린저는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부끄러운 듯 귀가 빨개진 그였다. 바지춤에 내려가는 나의 손을 보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그의 숨이,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웠다. 어쩌면 나는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그를 자세히 봐두고 싶었다.

“다른 여자랑 이런 거 해 본 적 있어?”

일린저는 툭 불거진 그의 성기 위에 얹어진 내 손을 보고서 갸웃거렸다. 그의 눈에 약간은 황당하다는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바지 위에 올라가 서서히 허리를 흔들었다. 마찰되는 느낌에 내 속옷이 젖어 들어갔다. 그는 제 손등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해 봤냐고 묻는데 왜 대답을 못 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지 몰랐다.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가 이렇게, 나와 똑같은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일린저의 바다 같은 눈, 그의 고운 목선, 그것을 타고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단단한 가슴팍, 조금만 더 내려가면 그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있는 물건이 성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를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몸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다른 여자랑은 이렇게 하지 마.”

참 못난 욕심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설령 그가 나중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하더라도 이 말을 기억하고, 이런 자세로만은 그녀를 안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부푼 그의 성기 위에 젖은 내 속옷을 부드럽게 비볐다. 그가 다급한 손길로 허리춤을 풀었다. 바지를 내리자마자 그의 커다란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직 속옷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내 허리에 있는 끈을 풀고 나신으로 만들었음에도 그 속옷만은 벗지 않았다. 그의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반복했다. 나의 음부와 그의 성기 사이에 얇은 천이 있었다. 그것이 강렬한 자극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하아…….”

일린저가 좋았다. 그는 안타깝게 허리를 들썩였다. 속옷 안에 숨겨진 음부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계속해서 성기의 끝을 속옷에나마 찔러대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들었다. 정확하게 움푹 들어간 곳을 계속해서 찔렀다. 조금이나마 깊게 들어가면 그는 한참을 그 자세로 있었다. 빠져나올 때 젖은 속옷이 보였다. 그는 물기가 흥건하게 된 것을 좋아했다.

점점 그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는 자세가 강렬해져 갔다. 일린저의 위에서 미친 것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홀로 절정에 가까워지려고 할 때였다.

“하, 으……!”

확실히 그의 성기 위에서 비비기만 하니까, 그는 자극은 되면서도 무언가 모자란다는 표정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내 속옷을 벗기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끈을 만지작거리다가도 내가 강렬하게 허리를 흔들며 그의 위로 쓰러지면 ‘이건 이거대로 좋다.’며 말했다. 그래도 모자라긴 모자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점점 지치면서 약해지는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벗지 않은 속옷 위로, 내 허벅지 위로 그는 찔러댔다. 박아넣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는 표정이었다.

“아, 으…….”

우연찮게 속옷과 함께 음부 속으로 성기가 푹 박힐 때가 있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동시에 흔들던 허리를 멈추었다. 젖은 속옷을 사이에 두고서 만난 음부와 성기는 흥분한 듯 연신 액을 흘려댔다. 이제는 속옷의 의미가 없을 때 즈음, 그는 내 젖가슴을 쭉 빨아당기며 속옷 끈을 풀었다.

푹, 찍어 올렸다. 이미 내 속옷 위에 한차례 사정하고 축축해진 성기가 들어오자마자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아…….’ 했다. 눈을 감고서 이를 악무는 표정의 그가 갑자기 돌변하여 내 뺨을 붙잡았다.

나는 두 번의 미약한 절정으로 힘이 빠진 상태였다. 일린저가 내 뺨을 붙잡아 끌어올렸을 때였다. 그는 크게 성기를 두어 번 박아 넣고는, 내 입술에 상처가 날 만큼 강렬하게 키스했다.

“으, 음, 으, 으……!”

그의 위에 엎어져 있었고, 그의 팔은 내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일린저의 입 안에 갇혀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무식할 정도로 나를 안아 들어 올리고, 자신의 허리까지 들어 올린 자세로 미친 사람처럼 박아 넣었다. 분풀이하듯이 성기가 계속해서 짓쳐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어설프게 허리를 흔드는 내 둔부를 꽉 쥐었다. 불쌍하게 벌어져 그의 것을 먹고 있는 내 음부였다. 손가락 하나를 가져가서 심심하게 홀로 놀고 있는 음핵까지 건드려 주었을 차였다. 나는 홀로 또 다른 절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아으!”

그러나 그는 내가 절정을 겪든 말든, 손가락을 계속해서 음핵 위에서 굴려댔다. 그 감각이 어찌나 끔찍스러운지. 나는 일린저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만하라고 애걸복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발을 쳐들고 떨어대는 그 순간에 일린저는 푹 찌르고 올라와 내 젖가슴을 쭉 빨아올렸다.

“오늘, 아…… 여기에, 소문나도록, 네들 주인, 내가 망가뜨리고 있다고, 소문나게…….”

“응, 그, 손가락……!”

음핵 위에서 잔인하게 놀리던 손가락을 내가 떼어내려고 했다. 그는 파고들어 성기를 비벼댔다. 허벅지가 젖었다. 일린저의 허리에 맞추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받아내면서 울었다.

“아, 으……!”

흐느끼면서 그를 받아내었다. 막판에 치달을수록 그는 한계까지 몰아붙이듯 허리를 흔들었다. 젖은 음부에서 민망한 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아, 흐, 아!”

푸욱, 찔러넣고서 멈추었다. 그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옴과 동시였다. 아래에서 주욱 짜내는 씨물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일린저의 성기는 끝을 보았음에도 만족을 몰랐다.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이 싸지른 것을 안쪽부터 바깥까지 묻히고 있었다. 그 탓에 씨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침대 위에 고였다.

“안 해.”

거친 숨을 고르며 그의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게 아까 다른 여자한테는 이렇게 하지 말라는, 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인 것을 알았다.

“네가 하라는 대로 나 말 잘 들으니까.”

그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로 내 관자놀이에 입술을 꾹 눌렀다. 일린저의 입술에 눌린 내가 숨을 고르는 사이였다. 그는 행복하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비볐다.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행복하게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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