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책임의 무게
상위 학년을 마치기 위한 길이었다. 이드리하임으로 가는 마차에는 나밖에 없었다. 항상 에이버넷, 에드리트, 그리고 산도르아가 있어서 복작거렸던 마차였다. 가는 길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에드리트까지 졸업을 하고, 학원에 아는 사람이라곤 폰과 린, 그리고 일린저밖에 없었다. 새삼스레 내 좁은 인간관계에 감탄하고 말았다.
도착한 이드리하임의 학원은 새 학년들로 북적거렸다. 새파란 학원은 신입생과 적당히 나잇살 먹은 학생들의 차지였다. 나는 그보다 위에, 이드리하임의 계단 끝에 세워진 성으로 걸어갔다.
오로지 시험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었다. 이드리하임의 학생들이 얼씬 못하도록 기숙사부터 강의 듣는 곳까지 한곳에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서든 마음먹으면 공부를 할 수는 있게 해 두었지만, 마음 편히 놀거나 휴식하기 위한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침침함, 삭막함이 있었다.
그러나 상위 학년의 장점도 있었다. 개인 기숙사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수가 줄어들다 보니 이곳에 와서는 침대, 책상, 응접실까지 개인이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손님이 오면 주어질 응접실까지 갖춘 방이라니. 웬만한 교수의 방보다 괜찮을 지경이었다.
방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정말로 목적이 뚜렷해서 남은 이들밖에 없을 터고, 졸업 시험을 복습만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무거운 다짐을 가지고 짐을 정리하는 차였다. 뒤편에서 사과를 아짝 깨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내 책상을 주인인 것처럼 앉아서, 떡하니 이름 적힌 책을 들여다보는 옆모습이 보였다. 사과를 사박사박 씹으며, 내 책을 당연하듯 보는 사람. 휴가 내내 목소리나 편지를 주고받았던 일린저였다. 기척 없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일린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안 그런 척했으나 무척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를 보자마자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향해서 달려가듯이 걸어갔다. 일린저는 먹고 남은 사과 뼈를 내려놓았다. 삐딱한 자세로 앉아 나를 보았다.
“나쁘네, 나빠.”
그는 불만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책을 책상에 던지듯이 두었다.
“뭐가?”
“나는 글자 하나도 못 읽었는데 말이야. 누구는 예습까지 한 모양이라서.”
그렇게 말하고는 토라진 듯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일린저는 내가 다가오지 않자 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내게 팔을 뻗었다. 나는 다시 멈추었던 걸음을 걸었다.
“빨리 좀 오면 안 돼?”
일린저는 더 못 기다리겠다며, 먼저 다가와 나를 꼭 안았다. 그대로 멈출 줄 알았으나 일린저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소파 위에 나를 눕혔다. 내가 당황하든 말든, 그의 입술은 곧장 내 목으로 떨어졌다. 내 리본을 푸르고, 다급하게 살 내음을 들이쉬었다.
“삼 일 전에만 보자고, 이틀 전에만, 하루만. 내가 그렇게 애원했는데 안 들어주더라. 대단해.”
“마차가 오는 시간도 있으니까.”
“나만 보고 싶어 해, 나만.”
그는 억울하다며 내 입술을 잡아채어 갔다. 그의 혀는 말과는 다르게 다정했다. 내 입 안을 샅샅이 훑었다. 혀끼리 얽혀서 나누는 입맞춤은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했다. 서로의 숨을 나누고, 빼앗기고, 다시 건네고. 그러는 사이에 내 마음은, 내 손은 이미 일린저에게 둘러져 있었다. 누가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내 방 소파에 누워서 서로를 마음껏 탐했다. 부드러운 혀로 서로의 입 안을 맛보고, 눈으로 달라진 데는 없는지 보았다.
달콤해도 이렇게 달콤할 수가. 내가 약간 몽롱해진 사이, 입술은 떼어졌다. 일린저는 다급하게 빛을 이용해 문을 닫았다. 그가 타이를 푸르고, 내 리본을 잡아 뜯듯이 가져갔다. 아직 짐을 풀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할까. 이미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 후였다.
일린저는 끌러진 리본을 바닥에 버렸다. 아직 새것인 침대에 나를 눕혀두었다. 드러난 내 젖가슴에 코를 비비적거렸다. 냄새를 맡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까르르 웃고 말았다.
서부에 있으면서 차곡차곡 쌓여왔던, 나를 짓누르던 마음의 무게가 빠져나갔다. 일린저의 입맞춤에 걱정이 덜어지고, 야속하게도 나는 산도르아와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어갔다.
“아…….”
내 달뜬 숨소리에 일린저는 맛이 간 듯 보였다. 그동안 그렇게 얼굴 한 번만 보자고 떼를 쓰던 그였다. 여유 없다는 핑계로 단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이유야 차고 넘쳐서 문제지만, 나라고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게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연휴 내내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겨울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 학원으로 돌아오기를.
오늘부로 최상위 학년이 된 우리는 이드리하임의 제복이 아니라 각자 챙겨온 사복을 입었다. 일린저는 멋들어진 재킷의 소매에 금장단추가 놓인 것을 입고 온 모양이었다. 언제 벗어둔 건지 모르지만 내 책상에 그의 재킷이 제멋대로 놓여 있었다. 일린저는 잃어버린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단 한 번의 쉬는 법 없이 입을 맞춰왔다.
“아, 일린저……!”
내 젖꼭지를 물고서 올려다보는 그가 사랑스럽게 보인다니. 이제 내 눈도 맛이 가버린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는 벌이라도 주는 듯 가슴을 희롱했다. 깨물고, 혀로 달랬다. 나는 일린저의 머리를 살짝쿵 밀었다. 젖먹이처럼 빨아 당기며 자국을 내고 다니다니. 그 잠깐 사이에 흉한 자국이 났다. 나는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문 닫았어?”
아까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게 걱정이었다. 혹시 방을 착각하거나 나를, 혹은 일린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다면? 문을 두드리다가 슬며시 열린다면? 이것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러나 일린저는 나의 걱정을 무시하듯 했다. 혀로 내 입술을 핥느라 바빴다.
“운동했어?”
“운동?”
“가슴이 커진 것 같아서.”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운동으로 해결이 된다면 가슴 작아서 고민하는 여인네들은 무어란 말인가. 처음 듣는 얘기에 아리송했다. 내가 몸을 살짝 일으키자, 일린저는 기어이 따라붙으며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일린저의 손이 하는 짓거리가 민망스러웠다. 일린저는 스스로 제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밤마다 자기 가슴을 만지면, 커진다던데.”
나는 순간적으로 눈앞에 뵈는 게 없어졌다. 안 본 사이에 더욱 음탕해졌다. 그의 등에 칼을 꽂듯이 손을 내리쳤다. 등에 빨간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때렸으나 일린저는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아…… 거기 말고, 그 밑에.”
무슨 상상을 하는지 그의 눈알이 벌게졌다. 일린저가 내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명백하게 부푼 남성의 중심 위에 얹어두고, 자신이 직접 내 손을 움직여 짓누른 다음,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일린저.”
창피하거나 수치스러움보다는 신기했다. 일린저의 드디어 해소한다는, 그 간절한 눈이 내 뇌리에 박혔다. 일린저는 아랫도리를 제대로 벗지도 못하고, 허리벨트까지 한 채였다. 내 손을 이용해 성기를 압박하는 것만으로 황홀한 듯했다. 혀를 내밀고 헐떡였다. 그는 때때로 제 입술을 핥으며 내 반응을 구경하곤 했다.
나는 다만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일린저가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내 손가락을 쫙 펴게 해, 제 성기를 한 번 쥐어보게도 해보고, 그것을 살살 흔들어보기도 해봤다. 이럴 거면 그냥 벗으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셔츠의 단추만 겨우 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하……씨, 이거, 맨날, 꿈에서만 하던 건데…….”
그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손을 가지고 위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나는 손에 잡지도 못할 만큼 커진 그의 성기를 조금 세게 쥐었다. 내 손을 자신이 붙잡고 조종하던 일린저는 커다란 숨을 들이마시었다.
“아, 또, 해봐.”
바지 위로 그의 성기의 윤곽이 드러났다. 나는 왼쪽으로 휘어진 그것이 드러난 자국을 따라서, 그의 밑동부터 위로 천천히 쓸어 올렸다. 면에 닿는 감촉 때문인지 더욱 예민하게 느끼는 듯했다. 일린저는 특히 밑동 바로 위부터 귀두까지 한꺼번에 쓸어올리면 좋아했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는 항상 일린저를 이기고 싶었다. 그가 내 앞에서 무릎 꿇는 걸 보고 싶었다. 울고 빌고 하는 모습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린저가 이렇게 뺨이 붉어져, 내 손놀림 하나에 미쳐가는 것을 보면 삐뚤어진 승부욕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사랑한다고 매달리면 정말로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 애태우고 싶기도 했다. 아무리 사정하며 요구해도 나는 절대 사랑을 입에 담지 않았다.
“더, 빨리, 어?”
하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부러뜨릴 수 있는 손목을 잡고서 애걸복걸하다니. 그가 내킬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읏…… 하아…….”
일린저는 이제 아예 내 종아리에 코를 박고 누웠다. 쾌락이 버거울 때마다 침대에 이마를 비볐다.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 땀에 젖은 셔츠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했다. 타락한 천사를 희롱하는 악질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언제쯤…….”
끝을 볼 것 같냐고 물었다. 일린저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쾌락에 홀려 정신 못 차리는 눈이었다. 그의 눈이 술 취한 첫날밤을 떠올리게 했다. 일린저의 첫 여자가 내가 된 그 날. 갑자기 그것을 상기하자 일린저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나 또한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렇게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의 처음이라니. 내가 가져갔다고 생각하자 입맞춤을 멈출 수 없었다.
일린저는 혀가 내밀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입술을 받아먹었다. 목이 많이 마른 듯했다. 혀를 깊숙이 넣어 내 입 안을 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일린저는 키스하는 사이사이 거친 숨을 뱉었다. 그 낮은 신음에 나 또한 동조했다. 그가 선사해주었던 쾌락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아…… 흐, 아…….”
일린저는 의도적으로 내 귓가에 신음을 넣었다. 절정이 가까워졌는지 키스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일린저는 다급하게 혀를 빼내고 눈을 감았다. 그의 허리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지 위로 매만져주는 내 손이 음부라도 되는 것처럼 그랬다. 허리를 느긋이 움직였다. 내 손가락은 젖어가는 기둥을 따라 올라갔다. 성기의 끝을 꽉 쥐고 흔들었다.
“이, 야라, 하.”
가만히 그의 성기를 쥐고 있을 뿐이었다. 정액을 쏟아내는 장면이나 주체하지 못하고 씨물을 뿌려대는 그의 성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일린저는 절정의 순간이 오면 입술을 터뜨리듯 깨물고,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그의 붉은 입술이 더 붉은색으로 변했다.
“예쁘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직 절정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씨물로 더럽혀진 바지를 벗을 생각조차 못 하는 것 보아라. 일린저는 손등으로 제 눈을 가렸다. 아주 잠깐을 누워 있었다. 보이는 것은 숨을 고르고 있는 그의 입술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절정의 여운에 잠긴 그를 내버려 두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자, 손등을 거칠게 내렸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을 이대로 내버려 둘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학원에 온 첫날이니까 조금 더 조신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위로 기어가듯이 올라갔다. 촉촉한 그의 입술을 머금고, 고른 치열을 살짝 훑었다. 곧바로 그의 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중을 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나와 그는 어차피 조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으니까.
* * *
사랑을 하면 짐승에 가까워진다고 하질 않나. 나는 일린저에게 물들어 가며, 그의 야만적인 습성까지 닮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서로의 냄새를 맡거나 아무 데서나 몸을 치대고, 아무리 멀리 있어도 상대가 눈에 들어오는 그런 것들.
상위 학년은 1년 과정임에도 몹시 촘촘하고 세밀하게 짜져 있었다. 게다가 듣는 학생은 한정되어 있었고, 또 서로 몇 년간 보아 온 탓에 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지 말을 섞지 않아도 대충 아는 분위기였다.
나도 일린저가 자주 같이 다녔던 아이들은 눈에 익었다. 그중에서도 에이버넷을 괴롭혔던, 로비오는 일린저와 친하게 지내는 눈치였다. 그가 바로 남쪽의 예레카가 될 이였다. 앞으로 나와 자주 보게 될 사이라는 얘기였다.
서부는 남부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바다로 인해 오는 적을 막는 입장이었고, 그것은 나나 로비오가 앞으로 짊어질 짐이었다. 우리는 만약 서로가 수세에 몰렸을 때 배나 병사를 보내야 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덕이었다. 그의 부모,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서로의 성에 방문해 위문해줘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갑자기 내가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은 학업 때문이었다. 나이를 먹어 철든 내가 할 일을 알아봤다기보다, 상위 학년에 오자마자 배운 것이 이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로비오는 나와의 사이에서 잡음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지난번 에이버넷을 괴롭힌 건 개인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즉 산도르아의 전 약혼자였던 아킨 페네크를 쫓아내 그 자리를 뺏은 것도 그러려니 한 것을, 알고도 뒤로 호박씨 까는 게 재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린저의 친구답게 어딘가 모자란 호탕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와 일린저의 사이를 아는 것처럼 매 수업 시간마다 자리를 양보했다. 다른 것도 아닌 일린저의 옆자리를 말이다.
어차피 다들 관심은 없었다. 우선 수업의 내용이 방대했다. 정치나 대화술, 세 가지의 외국어, 병법이나 지나간 역사를 배웠다. 듣고 따라가는 것만으로 벅찼다. 상위 학년은 누가 누구의 옆에 앉건 말건, 자신에게 매일 쏟아지는 과제를 해나가기에도 바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인 입장이었다. 과제와 시험은 매일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번 가을에 치를 시험을 생각하면 반드시 복습을 철저히 해야만 했다. 그런데 양심 없는 일린저는 수업 시간 내내 틈만 나면 방해였다. 내 손을 잡아다가 주물럭거리고, 쉬는 시간이 오면 내 어깨에 기대어 치대기 바빴다.
그럼에도 억울한 것은 일린저의 성적이 잘 나온다는 것이었다. 매번 같이 자빠져서 서로의 몸을 핥는데. 나는 비상에 걸렸고, 일린저는 그런 나를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억울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화가 치밀었다. 일린저는 교수들의 신임을 얻는 반면, 나는 내어준 과제를 하는데도 벅차다니. 그런데도 일린저는 밤이면 밤마다 내 침대로 들어오려고 애쓰지를 않나. 과연 신이 공평한지를 의심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일린저는 슬금슬금 내 방에 들어왔다. 공부를 봐주겠다는 핑계로 내 침대에 오르고, 내 위에 오르고,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내 옷을 벗겼다. 물론 그 장단에 같이 맞추어서 놀아 준 나도 잘못이지만, 조금만 쉬자면서 그렇게 나를 가지려 드는데. 만약 일린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박수를 보내 주고 싶었다.
“하아…… 잠시만.”
나와 그는 맨몸이었다. 일린저는 내 위에 엎어져 있었고, 나는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일린저는 그 자세로, 그것도 침대 위에서 나를 가르쳐 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미 한바탕 뜨거운 잠자리를 가졌다. 가라앉아야 할 그의 성기가 내 둔부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심히 큰일 날 문제였다. 그는 도통 한 번으로 만족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만 움직이고, 하, 이거나 가르쳐 줘.”
“이거?”
“아니, 이거.”
일린저의 손이 뒤에서 튀어나와 내 책을 함께 넘겼다. 그는 장난스럽게 내가 가리킨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가리켰다. 내가 화를 낼 낌새를 보이자 다시 제대로 알려 주는 척을 했다. 서로 알몸인 상태로 공부를 하기란 여간 우스운 게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그와 침대를 뒹굴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결국 나는 일린저의 자제심에 내 공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일린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말을 붙이면 그는 잠시 동안이나마 훌륭한 나의 선생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제 기준에서 벗어나면 난리였다. 내가 관심을 끊고 공부에 집중하는 게 싫단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 등에 올라타 성기를 비비고 난리였다.
“발음해 봐. 라, 라.”
“라, 라.”
그를 보면서 그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일린저의 눈빛이 싹 바뀌더니, 성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내가 몸을 빼려고 하자, 일린저는 움직이지 못하게 내 몸을 제 아래에 가두었다.
“왜 그래. 어디 가려고.”
“어디를 가긴. 여기만 아니면 돼.”
“가지 마.”
“겨우 한 줄 뗐다!”
미안해, 미안해, 하며 내 등에 아무리 입술을 맞추어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와 그 뒤로도 몸을 섞은 게 벌써 여러 번이니. 일린저는 분명 나를 바르게 눕힐 것이다. 조금만 쉬자고 한 다음, 날이 뜰 때까지 나를 가질 눈이었다. 겨우 눈치가 생겼다.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읽고자 했다. 무시하며 책을 들여다봤다.
“내가 가르쳐 줄게.”
“제발 방해만 하지 마.”
“여기? 아니면 여기?”
“손가락 치워 봐봐.”
일린저의 눈이 변한 것은 그때였다. 내 둔부에 슬쩍슬쩍 비비고만 있던 성기를 서서히 아래로 옮겨댔다. 내가 몸을 튼 그 순간에 푹 꽂아 넣는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미처 내가 대처하지 못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내 속살을 누르며 들어온다. 침입한 성기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안에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당장, 빼…… 하.”
“조금만, 가만히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 허리는 왜 움직이는 것일까.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의 성기 끄트머리가 살짝씩 밖으로 빼내졌다가, 다시 푸욱 꽂으며 들어오는 것을. 나를 서서히 달구어서 침대로 데려갈 속셈이겠지.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다. 나는 책에 얼굴을 박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입으로 중얼거렸다.
“목소리, 하아…… 왜 이렇게 야해?”
“뭐?”
“아, 네가, 발음하는 거. 그 부분, 다시 읽어 봐.”
나는 일부러 그가 말한 곳을 제외했다. 머나먼 딴 곳을 읽었다. 일린저는 킬킬 웃으며 내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미치겠네, 나 미칠 것 같아.”
그것이 신호였다. 내 책은 일린저가 한 손으로 집어 벽으로 날렸다. 잡으러 갈 새도 없었다. 못 가도록 누르며 들어온 성기가 한순간에 치받았다. 머리끝까지 닿을 듯이 들어왔다. 꾸욱, 누르며 내 끝까지 닿은 성기였다. 나는 억울하지만 익숙한 쾌락을 느꼈다. 발끝이 오므라들고, 눈에는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였다. 그가 허리를 움직였다. 끝까지 들어온 그것은 느긋하게 내 안을 휘저었다.
“하지, 하지 마.”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니까.”
“하……응, 응!”
일린저는 곧바로 내 입술을 삼켰다. 그 뒤로는 거친 삽입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푹푹푹, 자신이 인내한 만큼의 시간을 모았다. 세게 치고 들어왔다. 젖은 속살을 유감없이 찌르며, 제 성욕을 마음껏 내보였다. 내 음부를 가르는 것으로 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 안에서 신음을 질렀다. 밑에도, 위에도 놔주지 않았다.
음탕하게 내려온 손이 흔들리는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쥐었다. 허리의 움직임만은 부드러운 게 아이러니였다. 일린저는 수시로 내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거칠게 처박는 아래를 이해해달라는 심보인 것 같았다.
“하, 아, 으!”
나는 떨어진 책이라도 주워보고자 팔을 뻗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오늘은 꼭 저것을 해야만 했다.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쳤다. 앞으로 나아갔다. 내 안에 느긋하게 박아 넣으며 눈 감고 있던 일린저가 목소리를 흘렸다.
“왜.”
“놔…….”
일린저는 나의 손끝이 향한 곳을 알고는, 나를 천천히 일으켰다. 그러나 이 지독한 놈은 절대로 자신의 성기를 빼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뒤로 돌렸다. 그의 성기가 음부 안에서 휘젓는 느낌이었다. 떠는 찰나, 일린저는 나를 꼭 껴안고서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 가.”
일린저가 걸을 때마다 그의 성기도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어보았지만, 아래에서 감질나도록 찔러오는 그의 흉물이 문제였다.
“하으…….”
그는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사람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허리를 조금 숙여 아까 버려진 책을 주웠다. 나를 가뿐히 안고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새삼 내가 지금 책에 파묻혀 살 것이 아니라 다시 뜀박질이라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별 고민이 다 들었다.
“아!”
“이거지?”
“으, 응! 잠깐……!”
일린저는 저에게 매달려 신음하는 내가 귀엽단다. 뺨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는 내 등을 조금 벽에 기대게 했다. 살짝씩 허리를 움직였다. 도망치고 싶어도 내 허리를 그가 붙들었다. 아예 나는 그에게 안겨서 들려있는 꼴인지라 방도가 없었다. 그를 깨물고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음부를 무식하게 짓이기는 성기 때문에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일린저는 한 팔로는 나를 안고, 나머지 한 팔로는 놀리듯 내 책을 펼쳤다. 자꾸만 내 귓불을 깨물다가 달래듯 입술을 쪽쪽 맞추었다. 그는 내가 필기해놓은 부분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물론 밑에서 성기를 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아, 아! 으…… 아.”
나는 울고 싶었다. 서 있는 그에게 매달리듯 안긴 것도 자존심 상해 죽겠다. 그가 허리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나는 꼼짝 못 했다. 그의 어깨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제 성기를 장난이라도 치듯이 지그시 누르며 들어왔다.
악의를 가지고 한 곳만 눌러댈 때면 나는 그의 귓불이든 뺨이든 물려고 애썼다. 불행하게도 일린저는 그것을 더 좋아했다. 내 필체가 사랑스럽다며 숨 막히는 키스와 함께였다. 허리 짓을 하다가도, 내가 절정에 다다를 것 같으면 슬쩍 성기를 빼내었다. 얌전히 책을 읽어줬다.
이 잠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니. 과연 그의 옆에 있을 때 다시는 책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내가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는 시간을 정해두고, 잠잘 시간까지 그것을 붙들고 있으면 경고를 줬다. 다음 날 책을 펼 생각조차 못 하도록 나를 울렸다.
오늘도 공부는 물 건너간 듯싶었다. 매번 자기만 우수한 성적을 얻어내고, 나는 멍청이로 만들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잠시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내 성적이 어떻든 별 생각하질 않았다. 심지어 내가 시험에 떨어질 것 같으면 말하란다. 컨닝을 도와주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해도 문제지만, 만약 했다가 들킨다면? 그와 나는 역사상 최초로 컨닝을 한 왕과 예레카가 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왕자라는 직책에 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기야 예전부터 그런 것에 의미를 두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긴 했다.
* * *
일린저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는 서로의 기숙사 방에 살림을 차렸다. 같이 펜을 맞대고 공부를 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혀를 섞었다. 입술을 아쉬운 듯 쪽쪽 거렸다. 그러고 나면 일린저는 내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재밌게도 성적은 오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차 탄력받듯이 솟았다. 가끔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폰이 나를 볼 때마다 그랬다. 살이 빠지는 것과 성적이 연관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만큼 나는 일린저의 도움을 받고, 방해 또한 만만치 않게 받고 있었다.
“하지 마.”
내가 일린저에게 아마 가장 많이 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일린저가 가장 듣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일린저는 수업 중간에 내 뒤에 앉아 머리카락 끝을 꼬고 있었다. 하도 옆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더니만 뒤로 갔다. 옆자리서 허벅지를 쓸어 만지는 통에 조치한 일인데 의미를 모르는가 싶었다. 이제는 뒤에 앉아서 내 머리카락을 꼬면서 놀고 있었다.
어떻게 교수님들의 눈을 피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린저의 이런 방해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나였다. 나는 수업에 집중해도 따라갈까 말까인데. 이렇게 일린저가 내 뒤에서 나를 신경 쓰이게 한다면 결국 제자리였다. 나는 교수 대신 그에게 받는 수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뭘 배웠지, 하면 일린저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심지어 일린저는 무료로 알려 주지도 않았다.
‘입 맞추면 한 줄 알려 줄까? 안아 주면 두 줄은 알려 줄지 모르지.’하면서 나를 놀리는데 화도 안 났다.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바보 천치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무조건 수업에 집중해야 했다. 잠시간 해독이 필요했다. 일린저에게 중독되어가는 내가 유일하게 정신 차리는 곳이었다. 내가 멀쩡한 사람으로 느껴지도록 해주니까.
“과제를 내주겠어요. 이번 과제는…… 어디 보자, 조를 짜서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교수님의 한마디에 한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나는 유일하게 그 말을 반기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일린저가 없는 과제라면 괜찮을 테니까. 그러나 교수님은 더욱 한숨 나오는 말을 연달아 했다.
“조는 알아서 짜도록. 세 명으로.”
그 말에 일린저는 신이 난 듯 내 머리칼을 휙휙 날렸다. 당연히 자신과 내가 한 팀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예상과도 다르지 않았다. 일린저, 그리고 일린저가 그나마 내 곁에 두는 로비오가 나와 한 팀이 되기 전까지. 이 반에서 나와 팀을 맺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린저의 유난도 유난이지만, 우리가 딱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이야라.”
로비오는 상큼하게 웃으며 내 옆자리가 아닌, 앞자리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로비오는 훗날 긴밀하게 엮인다는 사실 때문에 우정도 아닌 아군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밀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너무 붙어서 떠들고 있으면 어느샌가 일린저가 다가와 앉아 빤히 지켜봤다.
로비오와 나는 대화를 하다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아무 말 안 하는 일린저의 눈치를 보고, 그는 감상이라도 하듯 턱을 괴었다. 불편한 시선으로 우리의 대화를 지켜봤다. 여기서 방심하면 안 된다. 별로 화가 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닌지라. 일린저의 기분이 최악을 찍고 있는 것이었다. 일린저는 오히려 화가 나면 말수가 줄어드는 성격이었다. 그가 내가 묻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적신호였다.
한번은 그런 날이 있었다. 보통 이드리하임 사관이 편지 같은 것을 정리해서 방문 앞에 가져다 둔다. 그날도 내 방에서 살다시피 한 일린저는 편지를 챙겨두었다. 내 방문 앞에 걸린 편지를 제 마음대로 뜯어 보다. 하필 거기에 에이버넷 위드먼이 보낸 편지가 섞여 있던 것은 불행 중 불행이었다.
‘서로 보내고 받고, 그래?’
처음에는 일린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씻고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화가 나 있었다. 에이버넷 위드먼이 보낸 편지는 갈가리 찢겨 조각이 된 상태였다. 고로 나는 편지의 내용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일린저의 일방적인 화만 껴안게 된 꼴이었다.
‘무슨 내용이었는데.’
‘왜 그걸 궁금해해. 우선 찢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에이버넷 위드먼이 보낸 편지가 중요할 리 없었다. 설령 중요한 편지였더라도 분명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한 번 더 언급하시겠지 싶었다. 답 없으면 한 번 더 날아오지 않겠나. 대수롭지 않게 포기했다. 역시 편지자체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는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만약 할아버지가 나와 에이버넷의 약혼을 강행한 내용이었다면 어떤 사단이 일어났을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일린저는 그날 편지를 찢어줬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토라졌다. 에이버넷을 몹시 신경 쓰는 태도였다. 아예 딱 달라붙어서 하루 종일 에이버넷에 대한 얘기만 하는데, 나는 종종 에이버넷을 잊고 살았음에도 일린저 때문에 외울 지경이었다. 식사를 하다가도 그의 이름이 떠오르는 경지에 다다르다니.
‘왜 그래.’
로비오가 우리 둘의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나는 제발 일린저를 말려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일린저는 풀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히려 삐딱하게 스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정부랑 내통하다가 나한테 들켰거든.’
‘와.’
저절로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와! 있는 분이 더 한다더니. 뒷골목에서 제 부인이 옆집 남자와 바람을 피웠어도 이렇게까지 질리도록 추궁하지는 않았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끝내거나 죽이거나 했지. 이건 사람을 뙤약볕에 말려서 죽이는 고문이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쉽게 토라졌다가 쉽게 마음을 풀곤 했는데, 대체로 내가 저를 본체만체도 하지 않으면 풀어지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장난을 걸어오며 내 감정을 다독이려고 했다. 나도 참 복잡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뒷골목에서부터 워낙 먹을 것과 아늑한 잠자리만 바라며 커가다 보니, 이런 사랑에 대해서는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일린저가 화를 풀랍시고 손수 만든 샌드위치를 가져와 먹여주면 끝이었다. 질렸던 감정도 그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여하튼 결론은 그것이었다. 일린저는 어디서 해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능숙하고, 나는 사랑에 서툴렀다. 우리 어머니한테도 사랑한다고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일린저와 사랑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지는데 나는 고여 있는 우물 같았다.
“자, 한번 의논을 해 볼까.”
조 과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로비오였다. 우리는 나무 막대로 적의 배를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 일린저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 딴청을 피웠다. 내 머리칼을 가지고 노는 것에만 집중했다.
“남들보다 점수를 더 얻으려면 어떻게…… 참여 안 해?”
“해야지.”
“그러면 앞을 봐.”
“여기가 내 앞인데?”
로비오는 우리 사이에 끼어들 듯이 나무 막대를 흔들었다.
“그냥 우리 둘이 하는 건 어때, 이야라.”
“로비오.”
일린저는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입술로는 로비오에게 말을 했다.
“우리 둘이라니.”
“아…… 그거는.”
“그딴 재수 없는 말이 어디 있어.”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으나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일린저의 눈은 한 번도 로비오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는 참여하는 나를 바라보다가, 내 말이 길어질 즈음에는 제멋대로 나무 막대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일린저가 원한 것은 나의 무신경이었다. 로비오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서 자신과 대화하는 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과제는 같이 만들고 회의를 한 다음, 발표까지 해야 했다. 일린저는 로비오와 계속 대화를 나누는 내가 짜증스럽다며, 기어코 홀로 배 모양을 완성한 후에 수업 종이 치자마자 나가 버렸다.
“난 잘못 없어.”
로비오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들고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졸지에 회의를 하다가 삐친 일린저를 만나게 된 나는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 * *
수업이 계속 겹쳤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일린저는 내 옆자리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다른 아이들이 말을 걸어오면 정성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것 또한 새롭게 나를 괴롭히는 수법이려니 할 뿐이었다. 어떻게 된 게 처음 만날 때부터 이러는가. 우리는 좋았던 날보다 쌍심지 켜고 으르렁거리는 날이 많았다.
이후로는 역시 내 예상과 마찬가지였다. 일린저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내 침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책상에 앉아 과제를 펼쳤다. 일린저는 드러누워 과제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내 과제에 충실했다.
한동안 깃펜의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먼저 깃펜을 놓은 일린저는 조금 더 편안하게 침대에 누웠다. 타이를 푸르고, 셔츠를 벗었다. 웃통이 벗겨진 그였다. 태연하게 내 침대에 누워 잠이 든 듯했다.
내가 과제를 다 끝냈을 때 즈음에는 이미 달이 하늘 높이 뜬 후였다. 조금밖에 쉬지를 못하겠다. 시험이 오기 전까지 계속 이래야 했다. 앞날을 생각하니 조금 속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학기가 끝나면 더는 이드리하임에 오지 않아도 되었다. 해방감보다는 어쩐지 서글펐다. 그래도 여기는 내 빛나는 과거가 속한 곳이었다. 내 추억이 여기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지 않은가.
나는 갑갑해져, 목에 묶인 리본을 풀었다. 곤하게 잠들어 있는 일린저의 옆으로 갔다. 그가 잠들어 있는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 피곤하여 바로 잠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름다운 일린저의 상반신을 나도 모르게 흘겨보았다. 손가락으로 쓸어 보고 말았다. 일린저는 당연한 듯 눈을 서서히 뜨더니, 그의 옆에 누운 나를 바라보았다.
“안 잤어?”
나도 모르게 민망하여 그렇게 말을 했는데, 일린저는 한쪽 눈을 윙크하듯이 감았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뭐?”
“왜 이렇게 늦게 와, 나한테.”
그제야 일린저가 오전에 한 행동들, 삐친 것처럼 보이고 그랬던 것들이 모두 작전임을 알았다. 일린저는 내가 저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을 독하게 참고 기다린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였다. 한편으로는 고작 이런 것에 다가왔다고 좋아하다니. 일린저를 보면 약간 불쌍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야라. 넌 수줍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내가?”
“네 남자가 이렇게 자고 있는데, 고작 가슴 한 번 쓸어 보는 게 말이 돼?”
그는 보란 듯이 제 가슴팍을 내게 내밀었다. ‘아름답지 않아?’ 하면서. 솔직히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 첫 만남부터 그처럼 오만하고 아름다운 왕자는 처음이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오만하고 아름답지만. 나는 일린저의 이런 능청스러운 면이 볼 때가 좋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시절의 그가 아니라 정말로 내 옆에 있는 연인인 것만 같아서.
“만져보려면 제대로 만지든가.”
그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에 웃음이 터졌다. 하루 종일 과제로 쌓인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일린저는 꺄르르 웃는 나를 끌어다가 제 위에 올렸다. 입을 맞추고,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던 셔츠를 재빠르게 벗겼다. 오늘도 이리될 것 같더라니. 결국 이리되고 말았다.
* * *
요즘 학문에만 치중했더니 몸이 많이 둔해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린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홀로 검술 훈련을 할 참이었다.
그러나 역시 나의 예상대로 일린저는 혼자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침실에도 내가 없으면 들어가질 않는데. 도대체 일린저의 침실에는 거미줄이 얼마나 쌓일 대로 쌓여있다는 말인가. 나는 졸업 시험을 통과하고 짐을 챙길 때를 걱정했다. 그의 짐이 다 삭아 없어지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팔.”
“팔?”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일린저의 검이 내 팔에 닿았다. 일린저는 다른 수업에 대해서는 별말을 하지 않지만, 검만 잡으면 딴사람이 되었다. 그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와 이렇게 검을 나누고 나면 실력이 부쩍 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자존심을 버렸다. 다시 일린저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해.”
한 번이라도 일린저의 손에서 검을 떨어트리는 게 나의 목표였다. 다만 그것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성싶었다. 일린저의 손은 바람처럼 빨랐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어느샌가 왼쪽으로 가 있었고, 내가 그를 쫓아갈까 싶으면 내 뒤에서 검을 내리쳤다. 평생 한 번 이겨 먹어 보고 싶었다. 그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보면 어느새 노을은 져 있었다. 고요한 밤이 오고, 이 넓은 연습실에 나와 일린저만이 남아 있었다.
일린저는 모르겠지만, 그의 품에서 안겨 자는 것만큼이나 이 시간을 좋아했다. 일린저가 드물게 집중하는 얼굴을 가지고서 나를 바라보고, 우리의 검이 맞부딪히고, 그의 목소리 대신 숨소리가 내 앞에 왔을 때. 그의 뒤에 뜬 달 만큼이나 아름다운 일린저. 푸른 그의 눈을 보면 심장이 달음박질했다. 이 검을 휘둘러서인지, 꿋꿋이 뛰어다녀서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시 해.”
“알았어.”
내가 검을 놓치자마자 명령이 떨어졌다. 일린저는 한 치의 온기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냉정한 그의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상처가 아니라 나에게 설렘으로 다가왔다. 항상 내게 홀린 듯이 구는 그도 이런 면이 있었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검에 대해서는 진중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설레고 좋고.
나도 모르게 웃었나 보다. 일린저가 검을 내리고 나를 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다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웃기는 왜 웃어.”
“글쎄.”
“왜.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는 검의 등으로 내 어깨를 살짝 때렸다. ‘그런다고 안 봐줘.’ 하면서 이미 일린저의 눈은 냉정을 잃었다. 아까와 같이 냉정하지 못함을 안 그 순간이었다. 내가 검을 쳐들어 그의 손목을 노렸다. 일린저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일린저의 검 끝이 나의 검 끝에 눌렸다. 한순간 실린 힘에 그가 놓칠 뻔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집중해야지, 학생.”
그가 ‘하.’ 웃었다. 그의 얼굴에 기분 나쁜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 동작, 동작이 이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였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의 미소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일린저는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만, 나는 종종 이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이버넷 위드먼의 이름이 나오면 그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왕자로서 누구보다 이해관계에 빠삭한 터였다. 내가 예레카가 된다면 나의 옆자리에 어울릴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나 어머니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일린저를 당당하게 데려갈 수 없었다. 산도르아가 할아버지와 맞서 싸울 때,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할 때. 나는 걱정스러운 만큼 부러웠다. 한편으로 산도르아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산도르아는 할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에서 키워졌으며, 버려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허름한 뒷골목, 입바람에도 열리는 문을 지나가, 나무로 만든 원형 테이블 아래가 기억났다. 꼬물거리며 자던 열 명의 아이 중 하나. 모두가 엉겨 붙어 서로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애썼던, 그러다가 누구 하나 죽어도 울지 못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그래. 어쩌다가 내가 귀족이 된 꿈도 꿨었구나, 하면서.
만약 산도르아가 벽의 선택을 받았다면, 별의 예언을 하는 여자가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속해서 산도르아만을 길렀겠지. 나는 여전히 내 부모가 누군지, 이렇게 따듯한 가족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할는지 의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일린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없었다. 매번 좋은 성적을 얻어오면 기뻐하던 어머니나 할아버지의 얼굴에 덤덤한 척했어도, 두 분의 따듯한 미소가 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 같은 것임을 알았다. 만약 그 열쇠를 잃어버리면 나는 두 번 다시 성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산도르아는 애초부터 열쇠가 없어도 되었다. 당당하게 성 안에서 살았던 아이였다. 산도르아를 빨리 약혼시키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산도르아를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산도르아를 사랑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어깨에 짊어진 것은 가족의 사랑과 교환해 온 책임감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원하지 않는 척했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을 지나치게 갈망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잘못되면, 이 가문을, 이 성을, 이 벽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 내가 잘못되면 어머니도, 산도르아도 더는 벽에 보호받지 못하고 불행해지리라는 걸.
일린저의 사랑은 가족의 사랑과 달랐다. 그의 사랑은 놀랍고, 얼떨떨하며, 생각만 해도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얼결에 그와 엮였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서 한순간 실수로, 그리고 어영부영 그와 여기까지 왔다고.
그러나 그 결과물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린저의 미소, 사랑, 감히 가져볼 수 없는 것을 가졌다. 그가 좋았다. 이드리하임을 떠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이 시큰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몇 년 후를 얘기하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몇 년이라는 시간까지 허락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책임을 벗어던지고 그의 곁에 갈 수 있을까. 그는 내 곁에 올 수 있을까.
그래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면, 깊은 구렁에 빠지니까.
* * *
“하아…….”
그의 손이 내 머리칼을 감쌌다. 우리는 호수처럼 넓은 탕 안에 있었다. 주로 사내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연습을 끝내고서 땀에 절은 남학생의 전용이었고, 여학생은 기숙사에 딸린 욕실을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처럼 늦은 시간까지 있는 학생은 우리 둘뿐이었었다. 씻는 게 귀찮았던 나는 그대로 자겠다고 했다. 일린저는 여기에서 같이 씻자며 나를 유혹했다. 넘어간 내가 바보였지.
뜨거운 탕 안에서 일린저는 뒤로 들어왔다. 달콤하게 키스를 한 뒤에, 그가 내 음부에 입술을 묻은 게 시작이었다. 일린저는 그곳에 묻은 거품을 걷어내 준다고 했고, 당연히 그곳에 거품은 없었다. 그의 혀가 할짝거리는 소리만 장황하게 울려 퍼지다가, 도망친 내가 향한 곳은 탕이었다. 그에게는 먹잇감이 알아서 탕 속으로 가 주는 꼴이었을 터다.
나는 설마 탕 안에서 그런 짓을 할까 싶었다. 문제는 일린저가 내 상상을 초월하는 놈이란 것이었다. 기어코 쫓아와 뒤에서 내 음부에 깊숙이 성기를 찔러 넣었다. 물 속이라서 그러한가. 합은 더욱 부드럽게 들어왔다. 그 때문에 내가 주책맞게 침까지 흘렸다. 일린저는 좋아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응, 응…….”
일린저의 성기는 내 안을 곳곳 돌아다니며 찔렀다. 방향을 바꾸어 가며 왼쪽을 무참하게 찔렀다가, 다시 오른편만을 은근하게 찔렀다. 그러다가 내 등을 꽉 끌어안았다. 방향과는 상관없이 제 마음대로 박기도 했다.
“하, 아, 아, 응!”
내 허벅지에 물결이 쳤다. 일린저의 성기가 음부 속을 건드리며 꾹 눌러 온다. 질벽은 떨면서 그 성기가 지나간 자리대로 거칠게 파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내 귓가에 추근거리며 속삭였다.
“이러, 다가…… 하으, 여기, 내 좆 모양대로, 바뀌면, 좋겠다.”
“미치, 미쳤어, 넌, 응!”
“내가 들어갈 때마다, 딱 맞게. 어때?”
그러고선 내 동의를 구하지 않겠다는 양, 내 허벅다리 한쪽을 들었다. 갈증 난 사람처럼 허리를 흔든 그였다. 푹푹푹푹. 박히는 소리마다 음부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끄러운 물과 욕탕의 물이 섞이기 시작할 때였다. 일린저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제가 좋을 대로 쑤시고 박다가, 갑자기 쑤욱 빼내어 버렸다.
“아, 안, 싫어!”
못 참겠는 사람처럼 혀로 흘러내리는 물을 죄 받아먹었다. 절정에 몸부림치는 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밀어내 보려 했으나, 오히려 싸는 것이 더 많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가 떨고 있는 가련한 음부를 괴롭혔다. 아랑곳하지 않고서 혀를 내밀었다. 나올 예정에 있던 것까지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나는 눈물인지 습기인지 모를 물방울을 얼굴에서 떨어트렸다. 욕탕에서 나가려 했으나, 일린저는 내 허리를 고쳐 안을 뿐이었다. 다시 성기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내 음부는 야속하게도 환영하듯, 아니 그의 말대로 길들여진 것처럼 그것을 먹어 버렸다.
이제 나올 것은 비명밖에 없었다. 그의 입 안에 그 비명조차 먹혀들었지만. 그는 내 입술을 머금고 허리를 야만적으로 흔들었다.
“일린, 일린저……!”
그의 몸을 할퀴었다. 욕탕의 바닥을 할퀴었다. 몸부림치던 몸이 한순간에 멎은 것은, 그의 성기가 끝까지 다다라서 푹 쏘았을 때였다. 서로 피임약을 먹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생경한 느낌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서로 하고 있다는 느낌. 그의 정액이 내 음부를 가득 채울 때.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비빌 때.
우리가 마치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 * *
일린저와 나는 공부로나 친구로나, 여하튼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린저는 가르쳐 주는 것에는 젬병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내가 보기에 남을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 성적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게 증거였다.
겨울에 온 우리였다. 봄과 여름 내내 뒹굴었다. 서로의 몸을 탐하는 사이, 어느새 여름의 끝물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드리하임은 가을에 학기가 끝난다. 겨울의 초입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자주 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일린저는 내가 저를 홀려서 어느새 이 계절이 왔는지도 몰랐다고 했지만, 나는 시험이 가까워짐을 매일 알고 있었다.
이 시험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요즘 그를 피해 다녔다. 몰래 도서관에 와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그도 쫓아와서 공부를 하겠다며 내 앞에 앉았다. 일린저는 딱히 나를 방해하지 않았지만,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는 있었다. 부담스럽게끔.
내가 눈을 들면 그는 항상 나를 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웃음이 나는 것은, 이미 내가 그와 같은 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느덧 그에게 저리 가라고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비실비실 약해져 있었다.
오늘도 그럴 예정이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일린저는 그런 나를 구경하고. 그런데 일린저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나는 그가 그런 표정을 한 것은 처음 보았다. 그렇게 씁쓸하고, 어딘가 아픈 듯한 얼굴은.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앉은 곳 바로 뒷자리였다. 일린저와 비슷한 흑색 머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깃펜을 돌리며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겨우 2학년이나 되었을까.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앳된 얼굴이었다.
귀족은 거의 아버지의 생김새를 물려받는다. 그는 일린저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아이도 시선을 느꼈는지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는 일린저를 처음 발견한 얼굴이었다. 눈에 띄게 허둥대더니, 어쩔 수 없는 듯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일린저가 기분 나빠할까. 혹은 어딘가 슬퍼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일린저를 보았다. 일린저의 얼굴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의 배다른 동생에게 웃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인사를 해 줬다. 그의 이복동생은, 안심한 듯이 웃으며 귀를 붉혔다.
그 어색한 공부 시간이 끝나고, 침실에 돌아올 동안. 일린저는 제 동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서 일린저의 성에 놀러 갈까 말까 하는 중이었다. 그 약속을 수십 번 말하는 일린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대화를 피하고 싶은 일념이 보였다.
“일린저.”
“왜. 내 사랑.”
저 느끼한 말까지 익숙해진 것을 보면 내가 그에게 많이 물들었나 보다. 그에게 끝내자고 말하자, 사실 그날 우리의 첫 경험은 실수였다, 그렇게 말하고자 했던 나는 어디에 갔는지. 이제는 그가 상처받았을까 전전긍긍이었다. 완벽한 그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아까 도서관에서.”
일린저는 내가 도서관 얘기를 꺼내자마자 알아들은 듯 피식 웃었다. 하기야 내가 모를 리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에 관한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으니 말이다.
“네 동생이라며.”
“그런가.”
일린저는 남의 얘기를 하듯이 대꾸했다.
“이 이야기 불편해?”
일린저는 말없이 내 입술을 찾았다. 다가오는 그의 불안정한 얼굴을 보며, 나는 그가 아까부터 꽤나 불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 멈추자 생각하며 일린저의 입맞춤을 자연스레 받았다.
일린저는 한참을 부드럽게 입맞춤하고 나서야 ‘안 불편해.’ 한마디를 했다. 그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처음 본 게 아니라고 했다. 일린저의 아버지, 그러니까 왕은 틈이 날 때마다 동생을 불러서 맛있는 것을 먹였다고. 일린저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웃어 주지 않은 얼굴로, 손길로, 동생을 만지고 아꼈으니까.
나는 그날은 일린저를 가만히 안아줬다. 이럴 때는 내가 위로에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게 슬펐다. 정작 일린저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했고, 나 혼자 죽상이 되어서 그를 끌어안았다. 누가 누구를 위로해주는지. 그에게 보탬이 되고 싶으나, 또 내가 위로받아 버리고 말았다.
* * *
일린저와 나는 조별로 과제를 할 때나 아닐 때나 항상 붙어 다니는 묶음 같은 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내가 없으면 일린저를 찾고, 내가 없으면 일린저에게서 찾는 모양이다. 일린저는 그게 좋은 듯했다. 내 소식을 자신에게 물어달라며, 아예 공표까지 하고 다니는 눈치였다.
그리고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몇 달 가까이 한 것이라곤 일린저와 투닥거리면서 논 것이나 그것도 아니면 잠자리밖에 없는 듯한데. 시험의 일정을 알려 주는 교수님의 입술을 보며 빌었다. 제발 시험만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부가 부족한 것도 부족한 것이었지만 일린저는 통과하고 나는 통과하지 못한 채로 일 년을 더 다닌다면 어떨까. 그것만큼 끔찍한 것이 없겠다 싶었다.
“발.”
그래서 남아서까지 강의실에서 공부를 했다. 일린저는 앞자리에 앉아 발끝으로 내 종아리를 쓸어 올렸다. 나를 자극시키는 놀이를 하고 앉아 있었다. 간간이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해 주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앞자리에 앉아서 하는 짓이라곤 나를 괴롭히는 게 훨씬 많았기 때문에, 결국 방해물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키스할까.”
“아니.”
“나한테 시험해 보는 건 어때.”
“뭐를.”
내가 귀찮은 듯이 대꾸하자, 일린저가 내 책을 두 손으로 가려 버렸다.
“일린저 모르온.”
“왜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번도 안 해?”
시험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때. 일린저는 뜬금없이 내게 그것을 물었다. 나는 어쩐지 초조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책을 뺏었다.
“왜 그래. 공부하는데.”
“수줍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가끔 보면 넌 전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더라고.”
“그랬어.”
“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꼭 치워야 할 과제처럼 보더란 말이지.”
“왕자님. 저는 최초로 유급하지 않은 예레카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사랑한다고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
“한 번이면 되잖아. 이렇게 질척거리는데 딱 한 번.”
“일린저.”
“가끔 네가 의심스러워.”
고개를 들자, 상처받은 표정을 숨기려 애쓰는 일린저가 보였다. 나는 그의 별별 얼굴을 다 아는 통에, 이런 얼굴까지 알고 말았다. 그가 어떤 감정을 지녔는지까지 다 읽혔다. 입 안이 타들어 갔다. 속이 쓰라려 미칠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정말 일린저를 사랑해? 졸업하고 나서도 일린저를 계속 볼 생각이야? 그러자면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도 산도르아처럼 뭐라도 나서야 하는 건가?
“하지 마.”
일린저는 됐다는 듯 고개를 책상에 묻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적잖게 상처받았음을 소문냈다.
“여인들은 사랑한다는 말 쉽게 안 한다고 하긴 하던데.”
일린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엎드려 자는 것 같은 자세였다. 그리고선 내 공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나를 방에 데려다주고 처음으로 헤어졌다. 그는 자신의 방에 돌아가 잠을 잤다.
나는 밤새 버려진 침대에서 생각했다. 일린저는 왕자고, 나는 예레카가 될 사람이고. 우리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할아버지부터 작은 새까지 모두가 알고 있다. 듣기론 대대로 돔의 후계는 외국의 공주와 맺어져야 한다고 들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돔에서 외국과의 교류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상징의 의미이자, 외교의 의미로.
게다가 나 말고 마땅한 후계가 없는 위테르발도 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부의 예레카가 될 운명이라고 떠들고 다녔지 않은가. 내게 기대를 건 사람들을 전부 저버릴까. 후련한 듯 일린저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이제껏 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나와 일린저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그렇다면 일린저와 나는 혼약자를 둔 채로, 서로를 몰래 만나거나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내 옆에 선 다른 사람만큼이나 그의 옆에 선 다른 사람도 끔찍했다.
* * *
나와 일린저의 사이가 조금 냉담해졌다. 표면적으로는 당장 있을 시험 때문이지만 속으로는 각자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일 터다. 아마 일린저도 슬슬 자신의 처지나 그런 게 떠오르지 않았을까. 진실한 졸업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서로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일린저도 나도, 잠시 학원이라는 늪에서 서로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늪에서 기어 나오자마자 보인 현실을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린저와 잠시 멀어진 덕분이라고 할 수 없지만, 시험에는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어려운 시험이라고 해서 각오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린저가 뽑아 준 문제에서 몇 개가 나왔었다. 덕분에 불합격 커트라인은 간신히 넘은 듯한데. 일단 나는 등수에 상관없이 졸업이 목표였다. 때문에 열심히 푸는 수밖에 없었다.
외국어 세 개를 마치고, 점심시간 이후에는 다시 병법과 역사에 대한 시험이었다. 커다란 시계를 앞에 두고서 시험을 보는 탓에, 시침 움직이는 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기는 학생도 있다고 들었다. 다행히 나는 트라우마고 나발이고 시험 문제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푸른 눈을 매단 잘생긴 얼굴이 마음에 걸리면 모를까.
마지막 시험의 종소리가 울렸다. 다들 여기에 몇 달 동안 갇혀 있었다며 기지개를 켜고, 환호성을 질렀다. 시험지를 머리 위에 뿌리지는 못해도 깃펜을 바닥에 굴렸다. 다들 교수의 말 따위는 무시하고 떠드는 게 보였다.
통과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래도 시험을 어쨌든 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중요했다. 이 학업의 끝이 다가왔다는 뜻이므로. 내가 드디어 이 학원에서 졸업할 수 있다는 뜻이므로. 나는 성심껏 시험에 임했다.
“깃펜을 내려놓으세요.”
시계가 사라지고, 다들 굽혔던 허리를 폈다. 고개를 들고서 앞을 응시했다. 나는 지난 5년간 아등바등하던 학원 생활의 끝이 왔음을 직감했다. 더는 내게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 자유, 공간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서부에 묶여, 서부에서 죽을 것이었다. 졸업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서늘했다. 나의 인생에 또 다른 막을 내리는 종소리였다.
끝을 느끼고 있는 시간이었다. 일린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듯, 시험이 끝난 뒤 무용지물이 된 깃펜을 손에서 굴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빠져나오며 그를 보았지만,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는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 듯 펜을 굴리고 있었다. 나는 등을 돌렸다. 일방적인 회피였다.
그에게서 등을 돌려 떠난 뒤, 시험의 결과는 일찍이 나왔다. 일린저가 수석이었고, 그다음은 이름 모를 애, 그다음이 나였다. 졸업식에서 상을 받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도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와 일린저의 미래가 뻔히 보였다. 이제 곧 헤어지겠구나, 했다.
일린저는 냉담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피해서 기숙사에 돌아왔음을 알았지만, 따로 나를 찾아오거나 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뒤에 함께 놀러 가자며 나를 유혹하던 게 엊그제였는데. 잠잠한 것을 보니, 눈치를 챘거나 아니면 그쪽도 흥미가 식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씁쓸한 졸업 시험의 끝. 나는 혼자서 이름 모를 외로움을 곱씹으며 잠이 들었다.
* * *
이 학원에는 전해지는 전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떨 때는 너무 많아서 누군가 지어내도 모를 정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 내 귀에 그래도 신빙성이 있는 전설은 졸업식에 관한 것이었다. 졸업한 선배들까지 모두 그에 대해 떠들었으므로, 사실 전설이라기보단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깃거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졸업식에서는 모두에게 빛을 담을 수 있는 하얀 검을 나누어 주었다. 그 사람의 이름까지 새긴 이것은 졸업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드디어 한 가문의 가주로서, 또는 어떤 가문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졸업을 옛날 옛적에 한 가주 중에서도, 이드리하임 장인이 만든 검을 허리에 채운 것을 종종 볼 수 있다고, 그 또한 하도 떠들어 대서 이미 안 사실이었다.
졸업식 전날이었다. 나는 설렌다기보다 약간의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짐을 모두 싸 두고 텅 빈 기숙사에는 고요함만이 있었다. 나는 홀로 앉아있었다. 그 광경이 어색해진 것은 모두 일린저 모르온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노골적으로 피해 다니긴 했어도, 일린저 또한 적극적으로 내게 오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원한 결과였으나, 어떻게 졸업이 다가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멀어진 일린저에 대해서도 좋은 마음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나의 마음이었다. 도대체 그가 멀어졌으면 좋겠는 건지 가까워졌으면 좋겠는 건지. 심란한 마음을 가지고 잠이 들었을 때였다. 문 앞에 누군가 똑똑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연히 일린저인 줄 알았다. 설레어서 문 앞까지 달려갔더랬다.
그러나 끼익 소리가 날 만큼 오래된 문을 열었을 때. 나를 기다린 것은 이드리하임의 하얀 검이었다. 문 앞에 걸려 있는 그것을 보다가, 그 검에 걸린 축하 인사 메시지를 보았다. <졸업을 축하해.> 라고 쓰여 있는 그것은 이드리하임의 전통 중 하나였다. 졸업하는 이의 방문 앞에 검을 걸어 두는 것. 나 말고도 여럿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방문 앞에 달린 검을 보았다.
그 검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그것을 받고 긴장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문 앞에 달린 검을 들고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던 기숙사에 아이들의 비명과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이미 자신이 탈락한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방문 앞에 나와 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몇몇은 이 밤이 지옥일 것이다. 나는 재빨리 검을 들고서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서 내게 주어진 검을 쓸어 보았다. 내 신장에 맞추고, 내 이름을 박아 넣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검. 뒷골목에서 부모 없이 자라난 고아인 줄 알았던 내가, 아마 그럭저럭 먹고사는 어른이 될 줄 알았던 내가. 이처럼 이드리하임이라는 명문 학원을 졸업해, 어느덧 서부를 책임질 사람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인생은 결국 한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내 운명은 서부에 있었다는 듯했다. 이 학원에서 주어진 모든 시험을 거치고 서부로 돌아가, 드디어 그들의 위에 서면 된다는 듯. 누가 들어도 매력적인 인생이 아닌가. 예측할 수 없는 나의 인생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이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다. 나는 해가 갈수록 심중에서 커져 가는 일린저 모르온 때문에 아프고, 슬프고, 기쁘고, 행복했다. 그는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일 터였다. 우리의 끝은 아마도 이 학원의 졸업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와닿지 않았던 그 모든 것들이었다. 지금 이 검을 쥔 순간에 깨닫고 말았다. 정말 내일 졸업식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끝이 나겠구나, 했다.
“이야라.”
그래서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을 잡고서 가만히 있다가 들린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서 들어와 있었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선 그를 보았을 때였다. 뛰는 가슴이 머리까지 닿는 줄 알았다. 머리마저 웅웅 울리고 있었으니까.
“끝까지 한 번을 안 져.”
그는 졌다는 듯 두 손을 올리고 내게로 왔다. 그의 왼손에도 이드리하임의 검이 들려 있었다. 검을 받자마자 이리로 온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일린저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한테 수작 건 거지?”
“……무슨 수작?”
“말 먼저 걸어오게 하려고 말이야. 내가 화난 것 같으니까, 일부러 무시하면서.”
나는 도대체 일린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제 목에 매여 있던 타이를 풀었다. 검푸른 타이를 푼 일린저는 그걸 느긋하게 내 검으로 가져갔다. 내 검의 손잡이에 묶었다. 나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으나 일린저는 됐다는 듯 맑게 웃었다.
“내가 봐줄게.”
“…….”
“휴가야 다음에 가면 되지.”
얼마 전에 일린저가 졸업이 끝나고 같이 놀러 가자고 했으나, 나는 할아버지의 병환을 핑계로 거절했다. 일찍 서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일린저는 그것으로 화를 낸다고 낸 셈이었다. 나는 전혀 일린저가 화를 낸다는 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타이가 묶인 검을 바라보다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고 울컥했다.
졸업식 날, 사랑하는 연인의 타이를 검의 손잡이에 묶는 것. 그것은 연인끼리의 기념을 넘어서,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맹세와 가까웠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어울리는가를 따지기 전에, 나는 그것이 너무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내 목에 있는 리본을 끌렀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손잡이를 내밀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면서도 손잡이에 내 리본을 묶었다.
나는 그를 보면 물어보려고 했었다. 우리는 졸업 후에 너무나도 명확하게 관계가 갈라지게 되는데, 과연 우리 둘이 계속 함께하는 게 맞느냐고. 이만 정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러나 일린저의 눈을 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고, 나를 침대에 넘어뜨리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우리의 이별을 꺼내는 건, 내가 아니라 일린저가 될 것이다. 그 밤에 그걸 깨달았다.
졸업식은 일린저의 방해로 늦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의 타이를 묶은 검을 들고서 졸업식에 참여했다. 졸업식에는 우리와 같이 타이를 서로의 검에 묶고서 나타난 이들이 많았다. 거기에는 약혼자,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영원을 맹세한 이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 약혼자가 없지만 약혼할 상대가 일린저가 될 수 없었고, 일린저도 약혼녀는 없지만 상대가 누가 될지 정도는 알고 있을 거였다.
귀족이 되면, 왕족이 되면, 사랑과 혼인은 별개라고 떠들어 대는 게 이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약혼자나 약혼녀가 다른 이와 사랑을 떠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그게 대수냐며, 콧방귀 뀌는 아이들이 태반인 곳이 여기였다.
그러나 졸업을 뜻하는 모자를 쓰고서 하늘에 검을 들었을 때. 이드리하임 학원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 나는 절대로 그 부류의 사람들과 마음 편히 엮일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일린저의 옆에 다른 학생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여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이 일린저의 어깨를 만지고, 웃음을 받고, 또 일린저와 말을 섞을 때. 나는 지독한 외로움과 공허, 그리고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내가 일린저의 약혼녀가 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느낄 감정일 터였다.
졸업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하늘에서 푸른 꽃이 떨어졌다. 나는 그게 꼭 비처럼 느껴졌다.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꽃잎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다가왔다. 나는 더는 일린저를 자유롭게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른이 된 것이었다.
성인식, 졸업식, 식이란 식을 다 마친 내게 기다리는 것은 자유로움이 아닌 구속이었다. 일전에는 구속이라고 느끼지 못한 것들이 구속이라고 다가온 것은, 일린저와 함께 떠나는 휴가가 아니라 서부로 돌아가야 할 마차가 내 짐을 싣고 있을 때였다.
우리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유의 날일지도 몰랐다. 원하는 이와의 휴가도 나는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리고 나보다 자유롭지 못한 산도르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졸업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벌써부터 나를 잡아끄는 것들이 많은데, 과연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편지를 자주 보내라는 말밖에 없는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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