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마지막 자유
“이야라?”
“이야라.”
시험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술이 깨고,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홀딱 벗은 일린저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 상태였다. 정신은 빨랫줄에 걸어 두고, 불길함을 감지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키 큰 그림자를 발견하면 두 배 더 빠르게 뛰기도 했다.
“이야라.”
“어?”
“몇 번을 불렀는지 알아?”
시험의 허기를 달래줄 식사 시간이었다. 축제가 끝나고 풀어진 우리를 배려해 시험을 치르는 대신 과제물로 내라는 교수님들이 있었다. 덕분에 시험을 쳐야 할 과목이 눈에 띄게 줄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종일 벙했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한참 뒤에야 찔끔 답을 하고, 눈앞에 있는 얼굴을 인식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오늘 시험 어땠냐니까.”
“몰라.”
“뭐?”
내 앞에 있던 폰이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녀가 다급하게 내 이마를 쓸어 보려는 때였다. 커다란 손이 중간에서 폰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파?”
그리고선 그의 손이 대신 내 이마를 덮었다. 자신의 할 일을 빼앗긴 폰은 유치한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설마 싶어서 눈을 위를 올렸다. 일린저 모르온.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는 듯 위장하고 있지만 저 올라간 입매까지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안 아픈데.”
그는 아예 접시를 내 옆에 내려놓았다. 의자를 끌어내 털썩 주저앉고는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턱 근처에서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이기까지 했다.
“내 키스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미치겠다. 내가 요즘 정신이 빠져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일린저를 챙겨 들고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접시고, 친구고 죄 내버려 두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내게 입 맞출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깨우치고도 남음이리라.
적어도 모두가 보는 식당가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일린저를 끌고 나갔을 때 쏟아진 시선은 이제 간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쳐다보든, 말든. 그건 깃털로 코끝을 간지럼 태우는 것만큼이나 별일 아니었다. 겪어보니 그랬다.
나는 그날의 첫 경험을, 그러니까 가능한 넘어갈 수만 있다면 넘어가고 싶었다. 일린저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해서 기분이 좋고, 또 파티의 분위기에, 멋모르고 마신 술기운에 저지른 일로만 넘어갔으면. 그날 밤 발가벗고 한 일까지 모조리 기억나지만, 서로 합의 하에 없는 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그날 아침 같은 침대에서 끌어안고 입술을 쪽쪽, 했다.
‘내 사랑, 잠버릇 심하더라.’
일부러 나를 놀리기 위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진심 없는 장난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일린저는 연인처럼 마주 보고 누워 내 입술을 훔치고, 손수 내 아침을 챙기고, 새벽녘에 같이 손을 잡고 학원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문제였다. 마주칠 때마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인사하질 않나, 뒷자리서 내 머리칼을 땋아주다가 교수에게 핀잔을 듣질 않나. 일은 내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일린저.”
지금도 그랬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자 그를 아이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목, 깊숙한 골목으로 데려왔으나 일린저는 이게 기회라도 된 것처럼 내 입술부터 가져갔다. 나를 벽과 그의 사이에 가두고, 포옥 끌어안은 다음에 급하게 입술을 부딪친 것이었다.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턱을 틀어쥐었다. 내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느낌을 알게 된 것이 통탄스러웠다. 그를 멀리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일린저의 말캉한 혀가 내 입 안에 들어오는 기분이 그렇게 싫지 않아서 문제였다. 중간중간 숨을 뱉는 순간마다 잘했다는 듯이 내 뺨을 쓸어 만지는 일린저의 손이 점점…….
“일린저, 이 미친 새끼…….”
상념은 그가 내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을 때 끝이 났다. 내 스타킹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맨살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뿌리치듯 했을 때. 일린저는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너도 참지 못하겠으니까 여기로 불러낸 거 아니야?”
“뭘 참아?”
“사랑하는 사이에 내숭은.”
그는 실실 웃으며, 자신이 한 말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고 있는 눈이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에다가, 서로 몸이 달아올라 있으며, 나는 부끄러워 내숭을 떠는 연인인 것처럼.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일린저는 ‘유혹하는 것 봐.’하면서 중얼거렸다. 얘가 대체 제정신이긴 한 건지 의문이었다.
“아, 맞아.”
내가 입을 열기 전, 일린저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을 했다.
“이번 휴가는 안 갈 거지.”
“뭐?”
“어떻게 떨어져 있어, 우리가.”
일린저는 내 위로 올라타듯 몸을 붙여 왔다.
“서로 알아 갈 것도, 알려 줄 것도, 맛볼 것도 많잖아.”
미치려면 곱게 미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일린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연인 간의 부끄러움이나 튕기려는 것이나, 그따위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돌아간 눈을 보니 답이 나왔다.
“일단. 난 이번 휴가도 서부로 돌아갈 거고.”
일린저는 제어 못 하던 웃음을 거기서 멈추었다. 내 어깨에 두른 팔에도 힘을 주기 시작했다.
“들어 봐.”
“몰트론에 있는 내 성에 가자. 거기서 나랑 있어.”
“할 일이 있거든. 그것도 아주 중요한.”
산도르아의 문제도 있고, 또 일린저의 말대로 우리가 같이 휴가를 보냈다가 할아버지는 뒷목 잡고 쓰러지고, 어머니는 넋이 나갈 것이었다. 조짐도 없던 왕자랑 난데없이 휴가를 보낸다니. 일린저는 대책 없이 내지르고 있지만, 한번 정하면 집요한 구석이 있는 게 문제였다.
“그럼 내가 위테르발도 령으로 가는 건 어때.”
“안 돼. 집안일이라서.”
“그럼 휴가 끝나기 열흘 전에 나랑 만나는 건.”
“안 돼.”
“삼일 먼저 와서 나랑 휴가 끝나기 전까지 뒹구는 건.”
“안 돼.”
“키스해서 나를 달래 주는 것도?”
“안…… 그건.”
‘이건 된다는 말이지.’하며 일린저는 날름 내 입술을 훔쳤다. 말리면 안 되는데. 나는 돌돌 말리다 못해 그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아니라고 난리 치며 너와 연인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애틋하여 가만 내버려 두고 싶은지. 하다 하다 일린저의 목에 팔을 감고서 같이 입술을 나누기까지 하니. 일린저가 좋다고 웃는데, 나도 같이 웃음이 나왔다.
모르긴 뭘 모르는가. 그가 아까 휴가 같이 보내자고 말을 들을 때 심장이 배에 탄 것처럼 철렁철렁 흔들리고 있었으면서. 안 된다고 외치는 이성은 어느덧 칼도 뺏기고, 방패도 뺏기고, 남은 것은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이성이라는 이름을 지키겠다며 외로이 반대를 외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성의 투쟁은 점점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 * *
전체 학년 중에서 2등으로 올 학기를 마무리 지었다. 물론 <제작>과 <전투>로 나뉘어져서 가능한 성적이었다. 그러니까 <전투>로는 2등이라는 말은 내 위에 일린저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는 잘했다며 내 뺨에 입술을 문지르고 떠났다. 내가 2등이라는 성적에 가슴이 뛰는 건지, 아니면 일린저의 기습 입맞춤에 설렌 건지 알 길이 없을 때. 짐을 싸서 내려온 에이버넷과 마주하고 말았다.
“안녕.”
에이버넷은 사방이 막혀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지, 어색하게 인사를 걸어왔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다가, 내가 먼저 말을 걸 때 즈음이 돼서야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년에, 상위 과정에 입학할 거야?”
보통 4학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이들이 반 이상이었다. 더 나아가 깊이 있는 지식을 배우고 싶다면 해당 분야의 스승을 찾거나 5학년 과정에 들어가곤 했다.
“나는 차남이라,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투자하진 않으시지.”
에이버넷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정답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떨 때 보면 몹시 냉소적이고, 이 땅에 환멸을 느낀 듯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내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기회는 너야, 이야라.”
짐을 싸고 떠나는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쳤다. 몇 년을 함께 보내고 대화를 나눴음에도 오늘처럼 진솔한 속내를 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해스 일은, 그래, 인정해. 난 걔를 좋아하니까.”
“……그래.”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야라?”
콕 짚어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일린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이버넷은 내가 떠올린 사람의 얼굴이 누구인지 아는 듯 차갑게 웃었다.
“어차피 너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따로 있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고.”
나는 도대체 에이버넷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에이버넷은 쐐기를 박듯이 내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파트너 아닐까, 이야라.”
“파트너?”
“난 네가 왕자와 수없이 자고, 사랑을 나누어도.”
내가 양미간을 찌푸리자, 에이버넷은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결국 내 곁으로 돌아와 훌륭히 예레카의 노릇을 해 준다면, 아무 말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에이버넷이 말하고 있는 것은 딱딱한 현실이었다. 나는 일린저가 주고 간 설렘이 한순간에 식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어차피 이어지는 건, 우리 둘이니까.”
에이버넷은 잘 지내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치고서 지나갔다. 금방 뿌리쳤지만, 그가 남긴 더러운 기분은 고스란히 내 몸에 남았다. 그것은 작은 씨앗이었다. 언젠가 움트고 나와 나를 괴롭힐 씨앗. 그가 뿌리고 간 것이 오래도록 남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 *
에드리트는 졸업을 하고서 후계에 매진해야 했기에, 매년 휴가처럼 위테르발도 령으로 놀러 올 수 없었다. 에드리트는 아쉬운 듯 내 손을 잡고서, 산도르아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산도르아는 어떤 심정이겠냐며, 그 피부 까만 놈이 증오스럽다는 말을 했다. 불똥이 괜한 곳으로 튄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도착한 서부는 삭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산도르아는 평소처럼 웃으며 마중 나왔지만, 그늘진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못 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서 나는 찻물도 겨우 삼킬 지경이었다.
“그보다 2등이라니. 이야라.”
“음.”
어머니가 먼저 말문을 뗐고, 할아버지는 뒤이어 생각이 난 듯 내게 말을 했다.
“자랑스럽구나. 배움이 늦었음에도 다른 이들보다 앞서가다니.”
“예…….”
나는 차를 마시는 산도르아를 힐끔 바라보며 대답했다.
“산도르아가 없어서 쓸쓸했지만요.”
“그래, 그랬겠네.”
어머니는 내 말에 맞장구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이 감정의 골이 할아버지와 산도르아 사이에 깊게 파여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두 사람이 굉장히 심하게 다투기라도 한 듯, 아예 시선을 마주 보지도 않고 있었다. 산도르아가 단순히 반항하는 것이 아닌, 가문을 떠나려고 한 움직임이 있었음을 앎에도 큰소리를 내지는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야라.”
산도르아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불렀다. 온화한 미소를 띤 채였다. 나는 얼결에 ‘응.’ 대답했다.
“성인식은 잘 치렀니?”
나는 생각이 막혔다. 떳떳하게 대답을 해야 함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발가벗은 일린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말 못하는 귀만 빨개지자, 산도르아는 흥미로운 듯이 더 캐물어 보았다.
“잘 치른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니, 그게.”
이제 스물하나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능청스레 대처하지 못했다. 눈까지 빨개졌다. 뜨거운 찻물을 들이키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하하 웃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러게요.”
“갑자기 캐묻고 싶어지네.”
“저도요.”
어머니와 산도르아의 연속 공격에 당황한 나는 할아버지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성인식 잘 치르셨어요?”
“음?”
세 사람은 처음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다가, 곧 내 말의 의미를 알고는 배를 잡고 뒤집어졌다. 나도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챘다. 옛일이 까마득하실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성인식 얘기를 꺼내다니. 할아버지의 호탕한 웃음, 배가 당긴다는 어머니, 눈물까지 흘리며 웃고 있는 산도르아를 보고 창피했다. 덤불 사이로 숨고 싶었다.
그러나 나쁜 실수는 아니었다. 나는 산도르아의 그늘을 잠시나마 벗겨 내었고, 어머니는 예전처럼 흐무러지게 웃으며, 할아버지는 인자한 낯을 다시 보여 주셨다. 그거면 됐다.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 * *
[내 사랑. 뭐 하고 있어.]
이번 휴가의 또 다른 즐거움은 일린저가 보내오는 빛이었다. 일린저는 새의 발목에 빛을 담아, 제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새가 내 곁에 있는 동안은 우리 둘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저녁 먹었지.”
[메뉴는?]
“대충. 늘 먹던 걸로.”
[나는 안 보고 싶고. 그렇지?]
내가 잠들기 전까지 머리맡 빛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잠이 들 때 즈음에 날아온 새는 깨어나면 없어지고, 다시 깜깜한 저녁이 되면 창문으로 날아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미묘한 할아버지와 산도르아의 신경전. 그 사이에서 조여든 나는 그의 다정함 서린 목소리로 위안을 얻었다.
“가끔 보고 싶기도 해.”
[거짓말 그만해. 매일 내가 그리워서 울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일린저의 넘치는 자신감은 때때로 나를 웃겼다. 잡스러운 생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나와 똑같이 침대에 누워 있을 그를 생각해 보았다.
“얼른 자. 잘생긴 얼굴 축 처지면 어쩌려고.”
[사랑해서 죽을 것 같다고 해 봐.]
“얼른 자지 않으면 죽일 것 같기는 해.”
[부끄러워 말고. 따라 해 봐.]
“나 피곤해.”
[사랑해서 죽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델만큼 뜨거워, 내 앞에 없음에도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 그의 새를 훨훨 내쫓았다. 그러나 새는 오만한 표정으로 침대 머리맡에 주저앉는다. 주인을 닮아 뻔뻔한 새가 아닐 수 없었다.
일린저는 돌림 노래처럼 끝없이 사랑을 강요했다. 내가 아직 흔들리고만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처럼. 나는 일린저에게 속절없이 빠져드는 중이었다. 차마 그에게 연인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상처 주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 되었으니까. 이따금 일린저의 말처럼 사랑이라는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게 착각이라는 사실을 곧 잊을 만큼.
매일이 그 때문에 설레고 있었다.
* * *
[건방진 새가 네 애정을 먹고 자란다는 의심이 계속 자라나고 있어. 매일 나조차 가 보지 않은 침실에 머리를 들이밀더니, 어느새 주인의 손길을 피하고 너에게 기쁘게 날아가고 있던데. 도대체 내 귀여운 새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하기야. 내가 새였어도 네 침실에 하루 종일 머물며 너를 바라봤을 테지만. 너무 예뻐하지는 마. 내가 갑자기 새 구이가 먹고 싶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침부터 도착한 편지는 읽고 있기만 해도 그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연상되었다. 장난기 많고, 짓궂은 그의 목소리. 나는 그가 새를 어여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볼 때마다 살결이 부드러웠고, 깃털은 매끈했다. 애정을 듬뿍 준 새를 잡아먹는다며 협박하다니. 일린저다우면서도 은근히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똑똑. 한창 내가 일린저의 편지를 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노크를 하자마자 들어온 터라, 내가 편지를 숨길 시간은 따로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다급하게 편지를 숨기는 모습을 보고 ‘오호’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저번 성인식을 보낸 그 남자인가 봐?”
“예?”
“누군데. 에이버넷?”
그러나 어머니의 추측에 나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라고 도리질을 쳐도, 어머니는 수줍음 타나보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의심을 거둔 눈초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옆에 앉아 머리칼을 부드러이 쓰다듬어 주는 중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게 무섭기까지 했다.
“에이버넷은 좋은 애야.”
확신하는 듯한 어머니의 말에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에이버넷이 어떤 애인지 미주알고주알 떠들 시간은 없어 보였다. 어머니는 용건이 따로 있는 듯, 내 손을 어루만지며 말을 걸었다.
“네가 잘 해내 줘서, 내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몰라.”
평소 어머니답지 않게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꺼내려는 주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내 남편이 떠나고, 네 할아버지와 단둘이 위테르발도 성을 지켜나가면서.”
어머니는 내 눈앞에 앉아 있지만, 눈은 이미 먼 곳을 떠나는듯한 눈이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쳤어. 이 자리에 앉아서, 남편을 보냈다는 슬픔을 곱씹을 새도 없이 예레카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야 했으니까.”
“어머니.”
“그런데 그게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닌 모양이야.”
어머니의 목소리는 많은 씁쓸함을 담고 있었다.
“네 할아버지. 예레카를 아들에게 물려주자마자, 두 아들이 연달아 죽고, 다시 예레카의 자리에 그 나이까지 앉아 있으시면서…… 네 할아버지도 많이 지쳐 보였어.”
“할아버지가요.”
“너에게 줄 때까지 버티느라 무리도 많이 하셨고.”
어머니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 손을 따듯하게 감싸셨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란 소리를 하는 거야.”
“…….”
“새삼, 네가 우리에게 돌아와 줘서, 이렇게 훌륭하게 해내 주고 있어서.”
그러면서 어머니는 나를 안아 주었다. 뒤늦게 안 소식이지만, 할아버지의 건강이 예전만큼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말마따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서 일하신 할아버지였다. 따로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셨다. 내게 물려줄 날만을 고대한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하실 정도였다. 모처럼의 휴식을 기다리신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일린저에게서 온 편지를 구겨서 이불 밑에 숨기고 말았다.
* * *
할아버지와 산도르아는 겉으로는 평소처럼 지내었다. 그러나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지내다가도, 미풍에 딸려온 돌멩이 하나에 파문이 일었다.
“초대요?”
때늦은 점심이었다. 산도르아의 약혼자가 될 사람을 성으로 초대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강경하게 약혼을 하지 않고서, 가문에서 정해 주는 혼인은 뒤로 미루고서, 일단은 치유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게 산도르아의 입장이었다. 할아버지는 위테르발도의 딸로서, 어쨌든 산도르아는 약혼을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의견은 좁혀질지 모르고, 애석하게도 그 싸움은 산도르아가 불리한 편이었다.
서부는 할아버지의 발아래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산도르아가 날고 긴다고 한들, 그녀는 할아버지의 말이 없으면 서부를 나갈 수 없었다. 작년에 학원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산도르아는 그처럼 무력한 자신에게 환멸이 나다 못해 질린 얼굴이었다.
“저는 이때까지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어요. 예레카가 되기 위해서, 예레카로 살기 위해서. 제가 그 과정에 조금이라도 소홀한 적이 있었나요?”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끔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굳어진 얼굴이었다.
“저는 더 이상 예레 하가 아니에요. 그 의무는 이야라에게 넘어갔어요. 저는 십수 년을 그 의무에 짓눌려 살다가, 이제, 겨우 제가 하고픈 걸 찾았어요.”
“산도르아.”
“절 봐주시면 안 돼요? 왜 저를 이 서부에 꼼짝없이 묶어 두려고 하세요? 묶어서, 아무나 붙잡아 약혼한 다음에 저를 치워 버리고 싶으세요?”
잠자코 듣던 할아버지는 산도르아의 마지막 말에 화가 난 듯이 눈을 뜨셨다.
“나를 손녀 약혼 시켜 이득 보려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마라, 산도르아. 네 약혼은 네가 자초한 일이야. 학원에서, 셉시스에서. 네가 내게 조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 떳떳이 배움을 위해 떠나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그럴 위치가 아닐 터인데.”
나는 거기서 홀로 숨을 들이켰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떳떳한 위치란, 산도르아의 발목을 잡아 둔 할아버지의 말이란, 나의 머릿속에 한 이방인을 떠오르게 했다. 들키지 않으려 했으나 할아버지 손바닥 위였던 것이다. 산도르아는 이내 인정하듯 눈을 감았다.
“보내 주세요.”
“보낼 수 없다.”
“전 할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당연해. 넌 내 손녀딸이니까.”
산도르아는 그때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도 표정이 마냥 좋진 않았다.
“산도르아.”
“네.”
“나는 널 포기할 수 없단다. 넌 레이온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고, 내 손녀고, 내가 키웠어.”
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을 식탁 밑으로 내렸다.
“널 사지로 가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터다.”
어머니가 일어나 말리는 와중에도 산도르아는 단호했다. 의자가 넘어갈 정도로 세차게 일어났다.
“내가 가려는 곳은 사지가 아니에요.”
산도르아는 그 말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부축했고, 나는 발길이 산도르아에게로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달려가는 산도르아를 붙잡았을 때, 그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고 있었다.
“미안해. 이야라.”
얼마 전, 나는 이방인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북쪽 경계로 갈 거라는 그의 말이 담긴 서신이었다. 편지를 읽고 산도르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서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불길한 참이었다.
“뭐가 미안한데.”
“미안해, 그냥.”
산도르아는 내 손등을 두어 번 두드리고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휴가 내내 그 싸움의 반복은 끊이질 않았다. 산도르아는 서부의 밖으로 나가려 했고, 할아버지는 기어코 산도르아를 학원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입 밖에 내셨다. 할아버지의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한숨을 달고 사셨다.
나는 그 싸움에 휘말려 일린저를 잠시 잊고 말았다. 그의 다감한 편지나 목소리는 위안거리였지만, 정작 그에게 내 감정을 보낼 힘은 없었다. 그게 몹시 미안해서, 또 내게 사과하는 산도르아에게 뭔지 모를 아픔이 느껴져서. 스무 살의 휴가는 손댈 수 없이 망가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