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

07. 성인의 날

휴가를 받은 우리는 마차로 돌아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에이버넷은 중간에서 헤어졌고, 에드리트는 할 말을 적어 내게 쪽지로 건넸다.

[아까는 에이버넷 위드먼이 있어서 말을 못 했는데 말이야.]

산도르아는 에드리트가 대놓고 내게 쪽지를 건네줬음에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는 에드리트가 건넨 쪽지에 답장을 적어 건넸다.

[그런데?]

에드리트는 곧바로 답장을 휘갈기듯 써 내려갔다. 산도르아가 관심이 없는 듯하니 숨기지도 않고서 쓰기 시작했다.

[네가 알아봐 달라는 해스라는 애. 알고 보니 위드먼 가문에서 지원을 받는 애더라고.]

내가 에드리트에게 부탁한 내용이었다. 에드리트는 놀란 내 얼굴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도 놀랐지? 입 모양으로 말하면서. 에드리트는 내 표정을 보고서 답을 받았다는 듯이 다음 글을 휘날려 적었다.

[그래서 내가 마차에 타기 전에 떠보듯이 물어봤거든. 그런데 전혀 모르는 애라는 거야.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아?]

위드먼이 후원하여 입학한 애가 해스였다. 어떤 용도로 그 아이를 이 학원에 입학시키고, 제 아들과 알고 지내게 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에이버넷은 그 아이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심지어 존재조차 모른다고 했었다.

사실일 가능성보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해스가 내게 말을 건 사실을 알자마자 눈에 띄게 불안해했던 에이버넷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냥 순진하고 다정한 줄 알았던 에이버넷의 뒷면이란 것이 존재하는 걸까.

사촌인 에드리트는 계속해서 해스의 배경뿐 아니라 산도르아의 연인까지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일개 경비로 있어야 할 그가, 아니면 할아버지의 의도대로 외곽을 전전했어야 할 그가 학원의 숲지기로 있는지는 아마 산도르아밖에 모를 것이었다.

에드리트에게 이 사실을 전하면 에드리트는 당장에 길길이 날뛰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갈 성격이었다. 에드리트는 산도르아의 연인을 거의 벌레만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으므로. 나 또한 깨끗한 척, 에드리트와 다른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을 산도르아에게서 떼어 내고 싶은 마음은 에드리트와 똑같으니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에드리트는 그 사람이 산도르아를 망칠 것이라고 본 것이고, 나는 그 관계의 끝은 결국 산도르아에게 상처만 남길 것임을 안다는 것이었다.

학원으로 떠날 때 설레던 산도르아의 얼굴에는 검은 먹구름이 끼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싫어하게 될 정도로 산도르아는 그 사람이 소중해진 것이었다.

성에 돌아와서 지낼 때,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을 때. 산도르아는 그때만 잠깐 살아났을 뿐이었다. 나와 대화를 하면서 가끔 내가 웃긴 얘기를 했을 때는 잠깐. 웃고선, 다시 이 성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방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나는 허전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다정하고, 할아버지는 내 곁에 있었으며, 나는 이곳이 안락해진 참이었다. 그런데도 느끼는 허전함의 정체는 휴가철마다 나를 괴롭히곤 했던 일린저의 편지였다. 새의 살이 쪽 빠질 정도로 보내대던 편지가 뚝 끊긴 것이었다. 분명히 그가 냉철하게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나는 왜인지 자꾸만 허전함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이야라.”

“네?”

이렇듯 자꾸 정신을 빼놓는 것도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그의 괴롭힘이 없어졌다고 해서 서운해하는 것은 정신 나간 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나는 눈앞에 앉은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성적이 좋아서 자랑스럽다고까지 했었나.”

할아버지의 너털웃음 뒤에 어머니의 교양 있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 과정을 앞둔 게 기특하다고도 하셨죠.”

산도르아는 할아버지의 말에 웃음을 띠고 차를 홀짝거렸다. 4년 과정만 마치면 어쨌든 학원을 정식으로 다니는 것은 마친 셈이었다. 5년 과정은 성적이 좋은 이들만 시험을 통과하기도 하며, 중간에 결혼이나 다른 사정으로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이드리하임 4년 과정만 무사히 견뎌 낸다면 배울 것은 다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위테르발도의 후계, 즉 예레카가 되려면 5년 과정까지 착실하게 해야 했다. 그래도 4년 과정까지 버텨 온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신기하게도 일린저의 도움이 중간중간 기억나기도 했다. 방해라고 할 만한 것도 떠오르고. 이상하게 그와 있었던 추억만이 새록새록한 것일까.

“할아버지, 어머니.”

그때 차를 다 마신 산도르아가 말문을 텄다. 조용히 티타임을 즐기던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산도르아를 조용히 응시했다. 마침내 두 딸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평화를 찾은 정원의 오후였다.

“저, 5년 과정까지 마치고 치유원에 들어가고 싶어요.”

“음?”

“산도르아.”

그건 나로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처음 듣는 결정이었다. 당연히 산도르아와 나의 미래는 5년 과정을 마치고 약혼을 한 뒤, 나는 예레카의 길로, 산도르아는 혼인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리라고 할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바가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자와 약혼하는 거.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5년 과정 동안 자격을 갖춘 후, 치유원에 들어가서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껏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충실하게 예레카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으며,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군소리 한번 없었던 산도르아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흡사 배신당한 듯한 얼굴이었다. 할아버지의 얼굴 또한 그렇게 좋지 못했다.

“산도르아.”

할아버지는 정원을 휩쓴 침묵의 끝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그건 네가 4학년 과정을 마친 후에 다시 논의해 보자.”

산도르아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삼킨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하실 거 알았어요. 놀라실 것도 알았고요. 그런데 어머니, 할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어요. 예레카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고, 훌륭한 약혼녀가 되기 위해 살아왔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 줄 딸로 살아왔어요.”

산도르아의 긴 말끝에서 나는 긴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야라가 나타났죠.”

그 말에 나는 산도르아를 바라보았다. 산도르아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도르아의 눈은 나를 원망하는 게 아닌, 네 잘못이 아니라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건 제 자리가 아니었고, 저는 한순간에 되고자 했던 모든 껍질이 제 것이 아님을 알았어요. 그럼 저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무엇일까.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산도르아의 말끝이 흐려지는 틈을 타서 어머니가 말을 건넸다.

“산도르아. 왜 지금까지…….”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이유요? 두 분께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

“하지만 이제 저는, 저는 괜찮아졌어요. 제가 하고픈 것을 하면서, 제가 있고 싶은 사람과 있을래요.”

있고 싶은 사람. 나는 그것이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내가 아닌, 그 숲지기로 변한 남자임을 알았다. 산도르아는 불길을 떨어트려 놓고 한결 편해진 얼굴을 했다.

“그게 제 대답이에요. 반대하실 거 알아서, 미리 말씀드려요.”

우리에게 떨어진 불길은 산도르아가 지금껏 내내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이었다. 학원에서 고민하는 얼굴로, 말수 없이 다녔던 산도르아. 머릿속에서는 온통 이런 생각뿐이었던 게 분명했다. 내게 자신이 지금까지 강요받았던 모든 걸 넘겨주고, 빈껍데기만 남은 듯한 자신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산도르아를 설득하려고 했다. 산도르아를 설득해서, 결국에는 그 남자를 산도르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산도르아의 얼굴을 보고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자신의 것을 찾았다는 산도르아에게 나는 아무런 공격도, 방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일은 나만이 알고 있었다. 물론 일린저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방정맞게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럴 만큼 이 일에 일린저는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어쩌다가 알게 된 사실을 내게 알려 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에드리트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님에도 결국 숲지기가 된 것도 찾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에드리트는 끝끝내 숲지기가 그 남자인 것을 찾지 못할 것이었다.

고로 나만 입을 다물면, 이 일은 산도르아의 비밀로 남겨질 수 있다는 소리였다.

* * *

할아버지는 예리했다. 곧바로 산도르아의 심경 변화가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고서 나와 에드리트를 불렀다. 나는 그렇다 쳐도 에드리트를 부른 것은 약간의 불안이 동반되고 있었다. 나는 에드리트가 올 것을 몰랐기에 그의 입을 미리 단속해 두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에드리트는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고 있지만 확실하게 산도르아의 남자가 변방을 돌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에드리트, 이야라.”

죄인처럼 불려다 앉은 우리는 장난기 없고, 다정한 웃음이 사라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할아버지는 가족의 얼굴이 아닌, 예레카의 얼굴을 하고 앉아 있으셨다. 할아버지의 눈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우리의 목에 겨누어진 것 같았다.

“숨겨 두는 게 결코 산도르아를 위한 게 아님을 미리 알려 두마.”

할아버지의 벼린 목소리가 향한 것은 첫 번째로 거짓말에 서투른 에드리트였다.

“에드리트.”

“그게…….”

에드리트는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이걸 말해도 돼? 라고 슬쩍 묻고 있는 것을 할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눈은 곧장 내게로 향했다.

“이야라.”

“네.”

“아는 것을 말해 봐.”

한층 부드럽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 일을 할아버지에게 일러다 바친다면 치유원까지 갈 생각을 한 산도르아의 날개는 꺾일 것이다. 내가 말은 하지 않고 고개를 젓자,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알아챈 눈치였다.

“분명 허점이 있었어. 산도르아가 만든 허점, 너희들이 먼저 발견하고 숨긴 허점.”

나와 같은 녹색의 눈이 빛났다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은 아예 나와 에드리트를 향해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침착해지는 편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상대하기가 까다롭다고 할 수 있었다.

“형제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눈을 뜬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형제. 나와 산도르아를 무엇이라고 묶어서 불러야 할지 도통 모르겠는데. 우리를 묶는 것은 형제라는 이름이었다. 할아버지는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 봐라.”

나는 혹시나 말실수한 것이 있을까 손톱을 물면서 나왔다. 에드리트는 아예 오줌이라도 지린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스물하나가 되어 가고, 나는 이제 곧 돌아올 여름에 돔의 성년인 스물이 되어가는 데도 이 난리였다. 할아버지가 평상시에는 부드러워서 몰랐을 뿐이지, 굉장히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 깊숙이 공감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같이 복도를 거닐던 에드리트는 갑자기 그렇게 외치더니 산도르아의 방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게 또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싶어서 나 또한 에드리트의 뒤를 따라갔다. 에드리트는 무척 화가 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산도르아의 방문이 있는 곳까지 뛰었다.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세게 노크를 하더니, 주인의 허락 없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산도르아!”

에드리트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강했다. 할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으로 더욱 쉽사리 흥분에 몸을 내맡기고 초조해했다. 산도르아가 잘못된 길로 빠질까 봐서 걱정하는 마음이 어느새 에드리트를 잡아먹고 만 것이었다.

“산도르아. 얘기 좀 해.”

나는 에드리트가 젖히고 들어간 문을 뒤따라서 들어갔다. 산도르아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치유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학년 <제작>과정을 완벽하게 마친 다음, 5학년 과정에서부터 심도 있게 파고들어야 한다고 들었다.

빛의 <활용>, <제작> 능력이 출중해야 했고, 치유원 자체의 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돔의 치유원은 외국에서도 찾을 정도인지라 날고 긴다는 실력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다.

에드리트는 산도르아의 앞까지 가서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 아직 만나고 있지.”

“에드리트.”

“대체 왜 그래! 치유원에 들어가서 그 녀석 뒷돈이라고 데려고 그래? 왜, 그 녀석이 돈 필요하다든?”

산도르아는 모욕을 받았다는 듯 손을 떨었다. 자신을 잡으려는 에드리트의 손을 뿌리쳤다.

“놔줘.”

하지만 에드리트는 끈질겼다. 더 놔두면 할아버지가 산도르아를 파헤칠 것임을 알기에 에드리트도 만만치 않게 초조한 상태였다.

“얼마를 달라든.”

“에드리트!”

“내가 낼 테니, 너한테서 이만…….”

산도르아의 손이 에드리트의 왼뺨을 휘갈겼다. 아주 큰 굉음이 들렸음에도 에드리트는 낯빛 한 번 바뀌지 않았다. 도리어 때린 산도르아가 더 미안한 얼굴로 변해서 제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빨개질 정도로 얻어맞았는데도 엄살 많은 에드리트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농담 아니야. 산도르아.”

“널 때리려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할아버님이 금세 네 뒷조사를 하실 거야. 넌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할아버님은 벽을 지키는 예레카야. 알고자 하면 모를 게 없으실 거고.”

산도르아는 얼굴이 희게 질렸다. 숲에서 즐겁게 뛰어놀던 산도르아는 차마 이런 것까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설마 할아버지가 거기까지 파고드실까. 그런 얼굴이었지만 에드리트의 말에 점점 불안이 확신으로 바뀌는 모양이었다.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에드리트는 탄식하듯이 말을 이었다.

“예레카 가문의 딸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이방인한테 홀린 게 말이 돼?”

에드리트는 빠른 시일 내에 먼저 할아버님에게 자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서 산도르아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믿는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리트는 등을 돌렸다. 에드리트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산도르아는 주먹을 쥐었다. 누가 보아도 울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산도르아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산도르아.”

“너만은 내 편이면 안 돼?”

나를 돌아보는 산도르아의 눈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산도르아는 내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가슴팍으로 이끌었다.

“넌 훗날 예레카가 될 거잖아, 이야라. 네 말이면 할아버지든, 어머니든 다 들어주시려고 하잖아. 나 하나는 자유롭게 살라고 말씀드리면 안 돼?”

자신이 말하면서도 그렇게 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체념의 어조였다. 나는 산도르아의 등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한 번도 누군가를 위로해 준 적이 없어서 이렇게 하는 것인지 서투르기만 했다.

“그 남자. 이드리하임의 숲지기가 된 것을 알고 있어.”

산도르아는 흐르던 눈물을 뚝 멈추었다. 말로는 산도르아를 그와 떼어 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편이었나보다. 산도르아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차라리 말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우연히 봤어.”

산도르아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자신의 것이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가져 본 자신의 것이라며.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우선시하고, 바라보고, 기다리는 게 너무 좋았다며.

“내가 너무 순진했나 봐.”

적어도 학원만은 전부 졸업하고 할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았을 테지만 그러기에는 할아버지는 이미 산도르아의 약혼자를 점찍어 둔 다음, 이번 겨울에라도 산도르아의 눈앞에 들이밀 작정이었다. 결국 산도르아도 초조한 마음에 벌인 짓일 거였다.

그러나 일은 일주일 뒤에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산도르아에게 학원을 1년 쉴 것을 명하셨다. 성적이 모자란 것도 아닌 산도르아를 유급이라니. 명백히 할아버지께서 치유원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산도르아는 항의하고, 나 또한 가서 할아버지를 설득했지만 할아버지는 돌과도 같았다. 단단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싸늘한 한마디였다.

“산도르아.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부드러운 말씨에 가려졌지만 그랬다. 할아버지는 산도르아에게 마치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스스로 잘 알면서 왜 그러냐는 식의 물음이었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해로 휴가가 끝나고 마차에 오른 것은 나와 에드리트뿐이었다. 마중도 어머니 혼자서 나왔다. 어머니는 착잡한 얼굴로 그나마 1년 동안 할아버지의 화가 풀리면 좋으련만, 했다. 이미 할아버지가 왜 화가 났는지 아는 투였다. 우리가 아무리 숨긴다고 용을 써 봤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구나 싶었다.

* * *

걱정되는 것은 이드리하임 학원의 그 숲지기였다. 우리 기숙사에 1학년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잠시간의 양해를 구한 뒤에 밖으로 빠져나왔다. 기숙사 뒤편에 있는 숲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곳은 숲지기조차 사라진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기억을 되살려 산도르아가 춤을 추었던 장소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나무토막과 도끼가 꽂혀 있었다. 땔감으로 쓰려고 장작을 패던 모양이었다. 내가 도끼 근처로 걸어가자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인기척이 드러났다.

“무슨 일이시죠?”

그의 발음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산도르아가 많이 가르친 태가 났다. 나는 부드러운 그의 인상을 보면서 쳐 죽일 쪽은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품에서 산도르아가 주라고 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이것도 학원에 오기 적전에 급하게 적어 낸 것이었다.

“산도르아는 이번 학기에는 오지 못해요.”

산도르아와 비슷한 생김새인 게 눈에 들어오나 보다. 내가 쉽게 잊힐 인상은 아닌데, 얼굴도 드디어 기억이 난 모양이고.

내 할 일은 이렇게 편지를 전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 구겨지게 쥐든 말든, 할 일을 다 한 나는 돌아서려던 때였다.

“저 때문입니까?”

편지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내려다보는 숲지기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하기야 내 예상대로 사기를 치려면 벌써 치고서 도망쳤을 것이었다. 제 가족들을 흡족하게 먹일 재물을 산도르아에게 뜯어내서 말이다. 그러나 저 숲지기는 오히려 제 가족이나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채 살면서도 산도르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소리에 안심이 됐다.

“복합적인 문제라서.”

차마 그래 너 때문에 산도르아가 오지 못한다고 할 수 없었다. 산도르아가 치유원에 가는 미래를 세운 게 저 숲지기 때문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는 산도르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의 결과로 이어졌다.

더는 내가 어떻게 관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숲지기가 있는 그 숲을 빠져나왔다.

* * *

4학년 과정은 끝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끝을 장식해야 하는 학년이며, 1학년들을 돌봐야 했고, 또 5학년 과정을 진심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정신을 놓지 말아야 했다. 5학년 과정은 대다수의 지도자나 고위 귀족은 반드시 집안에서 통과하라는 압박을 받기에, 5학년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4학년 과정이 중요했다.

4학년부터는 유급하는 학생들도 많고, <전투>와 <제작>으로 확실하게 나뉘기 때문에 교수의 수도 적었다.

“일린저!”

와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폰과 린은 <제작> 과정에 들어갔으므로 나와는 이제 겹치는 수업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나는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된 계획표를 받았는데, 거기에 일린저도 같이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입이 아팠다.

일린저는 휴가 내내 나를 씻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개운한 얼굴이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책상을 내리치고, 발끝을 오만하게 책상 위에 두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저놈의 입맞춤이나 더러운 기억을, 정말 일린저의 말대로 잊지 않고 산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손등으로 무심코 입술을 닦고 있을 때. 아무도 앉지 않던 내 옆자리 의자가 덜컹 꺼내졌다. 헤이즐넛의 머리칼이 주저앉았다.

“늦었지?”

에이버넷은 이번만큼은 마차를 따로 타고서 왔다. 에이버넷의 요청이었다. 나는 에이버넷이 해스를 모른 척했던 일 때문에 지난 휴가 동안 그가 만나자고 여러 번 요청했음에도 무시했었다.

왠지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그게 엄청 기분 나쁠 만한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학원에서 보자고 차일피일 미룬 것은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산도르아의 일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말도 못 하게 험악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에이버넷과 어색하게 인사하며 서로의 휴가 동안의 안부를 묻던 그 순간이었다. 똘똘 뭉친 양피지 뭉치가 날아와 에이버넷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에이버넷은 잠시 멈칫하고 뒤를 돌았다. 나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 차갑게 입매를 올려 웃고 있는 일린저가 보였다.

일린저와 처음으로 두 눈이 마주쳤다. 호수처럼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옭아매려고 들었다. 나는 지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일린저가 아닌, 그의 옆에 있던 애가 사과를 건넸다.

“미안. 조준을 잘못했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이 두 손바닥을 모아서 싹싹 비는 시늉을 하는데 주변의 아이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에이버넷을 바보로 만드는 분위기에 성질이 날 찰나. 두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교수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저 교수는 이 학원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사람일 터였다. 빛으로 검, 활, 창 모든 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천재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정신이 산만하며, 좋아하는 게 보이면 조금 경박스럽다는 점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능을 준 대신 정신머리를 앗아간 것 아니냐는 혹평을 받는 교수이기도 했다.

“자. 이번 수업은 말이지. 아주, 아주 간단해.”

보통 첫 수업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먼저임에도 교수는 발랄하게 수업을 이어 나갔다. 교수는 손바닥을 신이 난 듯 두드렸다. 교수의 뒤편에는 어른 백 명은 세워 둘 정도의 공활한 공간이 있었는데, 교수의 손바닥 소리에 그곳에서 검은색의 그림자가 살아났다. 건성으로 듣던 아이들도 다들 눈을 비비며 허리를 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말이야. 일대일로 싸우는 걸 배웠단 말이지.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 봐. 특히 여러분은 말이야. 지휘자가 될 가능성도 높고 말이지.”

교수는 말이 많이 서툰 것 같았다. 본인 스스로도 말하는 행위가 답답한 것인지, 아예 허리춤에 찬 검부터 꺼내 들었다.

“우선은 우리가 올해 배울 건 이거야.”

그것은 지금껏 일린저를 통해서만 볼 수 있던 광경이었다. 빛이 나의 말을 듣지 않고 홀린 듯이 교수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갑자기 엄청난 수의 빛들이 광신도처럼 교수의 검에 달라붙었다. 그 엄청난 이동 속도에 다들 경악을 하는 찰나, 교수는 힘껏 팔을 휘둘러 전방에 선 그림자에게 빛의 무더기를 보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기에는 그저 검을 휘두른 것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빛이 우수수 쓸려 나왔다. 불, 바람, 흙 같은 것으로 변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검 안에 들어 있던 빛들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와 그림자를 향해 가는 것이었다.

갈대밭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빛의 이동이 뚜렷하게 보이는 때. 그림자들은 그 빛의 파도에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땅에 녹아내리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백 개의 그림자가 있다면 백 개가 전부 스러졌다. 다소 엉뚱하고 정신머리가 없어 보이던 교수의 인상이 달라 보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다들 손뼉을 치고 박수를 보냈다. 교수는 씨익 웃으며 검을 허리춤에 다시 꼽고, 마치 서커스 관객을 대하듯 허리를 과장되게 숙였다.

“올해 시험은 저걸 몇 개 쓰러뜨렸느냐, 그거야.”

환호 섞인 박수를 보내던 이들의 손이 과하게 움츠러들었다. 나 또한 과연 저걸 해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골 아픈 제작 과정보다는 낫지 싶었다. 그래도 올해는 노력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으려나 싶은 마음에 잠시 들뜨기도 했던 것 같다.

아주 잠시지만 말이다.

* * *

폰과 린은 제작하는 것에 꽤 흥미를 붙인 듯했다. 걸어 다니는 인형을 만들어 내게 선물해 주길래 기쁘게 받았더니, 얼마 안 가서 인형은 실이 끊긴 것처럼 축 늘어졌다. 아직 하루 종일, 몇 달을 걸어가게 만들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나저나 산도르아는, 참 아쉽게 됐다.”

“그러게. 우리보다 더 잘하는데 말이야.”

학원에 와서도 재밌고 신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산도르아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나랑 한 번이라도 미리 상의했더라면 적어도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들다가도 그만큼 서로에게 믿음이 없던 우리의 관계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편지 하나 전해 주는 것밖에 못 하는 나도. 말만 예레 하, 예레 하, 그러지 실상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학업 정도이지 않은가.

한숨을 쉬며 스푼을 입 안에 물고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입 안에 든 수저를 떨어트릴 뻔하였다. 일린저가 여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부드러운 외양의 여자가, 똑 닮은 얼굴을 하고서 우리 테이블을 지나쳐 갔다. 아마 이번 1학년으로 추정되는 듯싶었다. 저렇게 일린저와 똑 닮았는데 소문이 안 났으면 이상했을 테니. 놀란 내 눈을 따라가던 폰은 그 여자애를 보고서 ‘아.’ 했다.

“공주잖아.”

“뭐?”

돔의 공주. 나는 어설프게 머릿속에 채워 넣었던 왕실 가계도 따위가 다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머릿속에 억지로 채워 넣고 외워도 현실에서는 마주치기만 해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데.

그러고 보니 일린저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는 배웠던 것 같았다. 다른 귀족들의 이름을 외는 것보다 가장 앞서서 외웠던 것이었는데. 나는 너무도 신기해 다른 친구들과 조잘거리며 테이블에 앉는 그 공주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린저 왕자님은 심란하시겠어.”

“그러게.”

나는 입 안에 든 스푼을 빼고서 물었다.

“왜?”

“동생이 둘이나 들어왔잖아.”

“그러니까.”

동생이 둘? 내가 아무리 곰곰이 떠올려도 분명 왕실의 자식은 일린저와 저 공주님뿐이었다. 둘이서 나를 놀리는가 싶어서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폰과 린은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 공금 by Jira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전투에 완전히 집중하게 된 나는 친구라고 할 것이 별로 없어, 가끔 얼굴을 아는 이들과 같이 앉거나 에이버넷과 함께 앉기도 했다. 그런데 에이버넷과 함께 다니면 꼭 짓궂은 일에 휘말리곤 했다. 내 착각이라고 하기엔 벌써 이런 일이 세 번째였다.

누군가 에이버넷의 뒤통수를 치고 가거나, 그 아이가 앉을 자리에 끈끈한 껌을 붙여 놓거나. 그것도 아니면 에이버넷이 부르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씹고 가거나. 내가 곁에서 목격한 일만 벌써 여럿이었다. 나는 그저 인내하는 듯한 에이버넷의 얼굴을 보다가 의아해져서 물었다.

“왜 참고 있어?”

“장난이잖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이드리하임 상가에서 파는 구린 냄새가 나는 토마토즙을 흠뻑 던져대었다. 대상은 에이버넷 혼자였다. 다 같이 장난을 쳤다고 하기에 에이버넷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토마토를 맞은 흔적이 없었다. 에이버넷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고 있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에이버넷의 얼굴을 닦았다. 에이버넷은 자기가 하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피하고 있는 그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에이버넷은 약간의 반항을 접고서 가만히 내 손에 자신을 맡겼다.

“에이버넷!”

얼굴을 거의 다 닦았는데. 다시 뒤에서 토마토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내가 빛을 던져서 날아오는 토마토를 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빛이 토마토를 잡아채자, 던진 상대방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미안!”

아마도 일린저의 곁에 있는 아이 중에 한 명일 것이다. 나는 점점 이게 일린저의 소행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 갔다. 1층에서 가볍게 손을 흔든 그 아이는 이게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사라졌다.

나는 빛으로 잡은 토마토를 천천히 내 손 위로 가져왔다. 그때 때마침 저 멀리 복도, 일린저가 어떤 여자애와 다정하게 웃으면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일린저는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그 여자애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가 내 손에 든 토마토, 손수건, 잔뜩 젖은 에이버넷을 차례로 빠르게 훑었다.

그냥 우리를 지나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일린저는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 말을 흘렸다.

“잘 어울리는데, 에이버넷.”

그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에이버넷의 눈이 원망스럽게 자신을 쏘아보든 말든. 일린저는 무시로 일관하며 나를 지나쳐 갔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손에 든 토마토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 * *

과제가 눈처럼 쌓여 가고 있었다. 산도르아에게 편지를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일부러 할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게 암호 비스무리하게 보낸 편지였는데도.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따금 답장을 보내왔지만 그것마저도 산도르아의 소식을 보내 주지는 않고 있었다. 산도르아에게 여기가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돌아오지 않는 편지를 보면서 내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학원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4년 과정은 힘이 들고 재미가 없었다. 축제의 꽃이라고 불리는 연극을 4학년이 도맡아 함에도 나는 계속해서 겉을 맴돌고만 있었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닌 듯싶은 느낌이었다.

4학년 과정은 연극을 위해 사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기에 온 신경이 몰려 있었다. 5학년 과정으로 가는 이들만 공부에 치중할 뿐, 5학년 과정이 아닌, 4학년 과정만 마치고 떠날 이들은 연극에 더욱 목숨을 거는 모습이었다.

매번 수업이 끝나고 넓은 휴게실에 모여서 연극에 대해 토론하고 연습을 해야 한다. 제작을 선택한 아이들의 수업이 더 빨리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당연한 순서처럼 휴게실에 들어가 벽난로에 불을 넣고, 넓디넓은 소파나 의자를 차지했다. 전투를 듣는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땀에 절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기숙사에 들러 몸을 씻고서 다시 들어오는 데까지 시간이 필히 걸릴 수밖에 없었다.

교수의 말대로 그림자를 넘어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빛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 내보내는 것은 그나마 쉬운 편이지만, 빛 자체를 그렇게 넓게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상상 없이, 내 의지로 빛을 내보내야 했다. 그리고서 바로 다시 빛을 채우고, 내보내고, 채우고, 내보내고. 그 반복에서 진이 빠지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교수는 미천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이었다.

일린저는 그 와중에 벌써 그림자를 서른 개나 쓰러트렸다. 그것도 교수가 지목하여 시범 삼아 해 본 것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일린저는 왕실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 교육 덕분에 평범한 재능을 가진 자일지라도 인재로 만들 수 있다고. 약간의 시기가 섞인 듯한 그 아이의 말이 귓가에 유독 남은 것은, 그런 교육이 있다면 나도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자, 우선 연극의 대본을 누가 쓰느냐가 중요해.”

연극에 대한 주도권은 주로 제작을 맡은 이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배우도, 구성도, 하다못해 뒤에 넣을 배경 그림까지 자기들 멋대로 이미 정해 둔 후였다. 그러나 뒤늦게 참가하고 끼어들기에 이미 검을 휘두르고 들어온 우리는 힘이 없는 상태였다. 피곤하고 지쳐 눈가를 누르고 있는 애들에게 아무리 의욕을 내보라고 해 봤자 의견에 동의, 비동의나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폰과 린이 저렇게 열성적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인지 처음 알았다. 내 친구라고 하는 것들은 저 둘뿐인데. 이번에 새로 사귄 제작 반 아이들과 잘 지내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 씁쓸했다. 그렇다고 다가가서 다 같이 어울려 놀 수도 없고. 의견을 내라고 나누어 준 종이에 낙서만 끄적거리다가 돌아가는 게 내 하루의 마무리였다.

새삼 내가 이 학교를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의지하고 지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에이버넷은 왠지 요즘 나를 피하고 다니는 분위기라서, 게다가 내가 에이버넷과 해스라는 애의 관계를 알아 버린 후로 대하기가 껄끄러워졌고, 폰과 린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 중이며, 일린저와는 원수가 나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하다 하다 일린저를 그리워하게 될 정도이니 내 마음이 어느 정도로 연약해졌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는 고개를 힐끔 들어, 벽난로 앞에 앉아 쿠키를 먹고 있는 일린저를 훔쳐보았다. 그는 소파 밑에 등을 기대어 눕듯이 있었다. 다리를 한쪽 꼬고서, 저 앞에서 이걸 하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는 이들을 남 일인 양 구경했다.

이따금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 때만 잠시 표정이 살아날 뿐, 곧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표정이 사라지고 눈은 냉철해졌다. 사실 모두가 쾌활하고 친절하다고 말하는 일린저는 저렇듯 오만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가 나에게 가졌던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아니라고 거부한 이상 우리는 더는 예전만큼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에 서운한 것인가. 내가 적잖이 외로운 모양이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의견을 적으라고 준 종이는 텅 빈 채였다. 어차피 내가 낸 의견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음을 알았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나 또한 주인공이 될 생각은 없었다. 얼른 졸업하고만 싶었다. 여기에 다니는 게, 빛에 대해서 배우는 게 재밌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뭘 위해서 학원에 다니는지도 잘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다.

할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일까. 아무것도 아닌 내게도 재능이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일까. 홀로 다니게 된 날이 늘어난 요즘, 나는 왠지 아무도 나를 주워 가지 않는 곳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무얼 해도 의욕이 나질 않고 힘이 없었다. 산도르아도 도울 수 없고, 그렇다고 당장 쏟아지는 시험을 능숙하게 헤쳐 나가지 못해서 아등바등 수업을 따라가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가만히 있었던 일린저의 목소리였다. 이 수많은 사람이 떠드는 중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한 번에 찾아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찰나. 내 몸 위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덮였다. 눈을 떠보니, 내 위에 담요 같은 것을 덮어 주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애였다.

“아, 이거 추워 보여서.”

나는 내 몸 위에 덮인 담요가 아까 일린저의 발치에서 나뒹굴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잠드는 것 같아 이런 배려를 보이는 것은, 그러니까 일린저 또한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일린저에게 눈을 돌렸을 때, 그는 이쪽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담요가 내게 주는 온기만큼 서운함이 덮쳐 왔다. 어쩌면 아까의 그 목소리는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자기랑 붙어먹기 싫으면 무시를 당하라는 건가. 아까까지 서운하기만 하던 작은 마음이 못나게 뾰족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나는 지기 싫어하는 성미가 강했다. 저가 나를 무시한다면, 나도 저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고개를 팩 돌렸는데, 저 멀리 나와 동떨어져 앉은 에이버넷이 보였다. 쟤는 또 왜 저러는 걸까. 설마 내가 남자들이 싫어하는 향수라도 뿌려 둔 것인가 싶었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아 에이버넷을 추궁했더니 이제는 아예 나를 피해 다니고, 자리도 따로 떨어져 앉기 시작했다.

생각할 것도 많은데, 나는 이제 더는 골 아픈 것을 생각하기가 싫었다.

* * *

[산도르아는 잘 지내고 있단다. 그보다 곧 학원 생활의 꽃인 축제가 다가오는구나. 그러면 또 드레스를 보내 줘야 하겠지? 이번에는 어떤 색이 좋으니?]

어머니의 답장은 간결했다. 좋은 소식만 전하려고 애쓴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차마 구길 수는 없었다. 나는 그걸 고이 접어 책상 서랍에 넣어 놓았다.

“이야라!”

“어.”

폰은 내 방문을 불쑥 열고서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얘기 좀 괜찮을까?”

“괜찮아, 들어와.”

폰은 요즘 과제보다 연극 준비에 열성이었다. 무얼 물어보려고 하는지 벌써 얼굴에 티가 잔뜩 났다.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오는 폰의 양피지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거기 이름 옆의 칸이 비어 있었다. 서명이라도 하라는 뜻인가 보다.

“이게 뭔데.”

“네 역할.”

“내 역할?”

폰은 자랑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아이들한테 물어보니까,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만. 너하고 일린저가 일등과 이등을 다툴 정도로 빛을 잘 다룬다면서.”

거기까지만 들어도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나는 뒤에 이어질 내용을 더 듣고 싶지 않았지만 폰의 눈은 너무도 기대감에 차올라 있었다.

“두 사람이 연극에 나올 빛을 담당해 주는 게 어떨까 해서.”

연극에는 꽤 많은 빛이 필요했다. 주인공을 하늘로 띄워 주거나 불을 내뿜거나 뒤에서 갑자기 꽃이 핀다거나 하는 것들. 한마디로 뒤에서 뒷받침을 해 달라는 뜻이었다. 폰은 나와 친하다는 이유로 이걸 떠맡았다면서, 만약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크게 혼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너랑 친하다고 얼마나 어깨가 높아졌는데.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지?”

“일린저와 단둘이 해야 하는 거잖아.”

“두 사람 친한 편 아니야?”

근래 들어 많이 서먹해 보이기는 하지만, 하며 폰이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폰의 눈에 보일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다 눈치를 채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폰은 다시 한번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내게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하는 거지?”

“일린저만 아니면 할 수도 있고.”

“두 사람 싸웠어?”

“글쎄.”

싸웠다기보다는 관계가 끝났다는 게 맞을 것이었다. 나는 그를 원수나 어쩌면 라이벌로 보고 있었고, 그는 그런 의미를 우리 관계에 부여하지 않았으니, 서로의 의미가 달라 관계는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긴 사정을 말해 봤자 폰은 눈을 빛내며 ‘고백을 받았다고?’라고 할 게 분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일 터니 말이다.

“연극은 우리 4학년의 수준을 보여 주는 거라고. 왕자에, 훗날 서부의 예레카께서 있으신데 초라한 연극을 보여 줘야 되겠어? 외부인도 얼마나 많이 오는데.”

외부인에게 파티 준비랍시고 입장료를 받아, 축제 비용을 메꾸는 데에 쓰는 학원 입장에서는 무조건 연극은 크고 화려하게 여는 게 좋을 것이었다. 그러하니 학생들이 공부 말고 연극에 힘을 쏟는 것에도 별말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나는 차라리 매달 시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번 연극이 싫다 못해 끔찍스러웠다.

“생각해 볼게.”

“정말?”

어차피 하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면 조금 이따가 벌어질 모임에서 얼마나 나를 씹고 물어뜯을지 예상 가는 바였다. 엊그제도 연극에 초라한 양치기 따위로 등장하기 싫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 녀석이 어떻게 매장을 당했는지 두 눈 똑똑히 지켜본 바였다. 연극에 미쳐 있는 사람이 많은 이때. 말 한마디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나 또한 연극에서 더욱 힘든 일을 맡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연극에서 가장 힘든 일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걸 돕는 역할이었다. 자리를 안내해 주고 마실 것을 나르는 일이 보통 고된 게 아니라, 모두가 그것만은 기피하고 싶어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나 또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실실 웃으며 음료를 날라 줄 성격은 되질 못 하니, 차라리 뒤에서 주인공이나 하늘로 띄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아. 맞다, 폰.”

“응?”

“요즘……에이버넷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솔직히 에이버넷을 향한 괴롭힘은 눈에 띄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폰과 린은 내 약혼자라는 입장으로 에이버넷과 몇 번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으니, 아마도 이런 이상한 변화쯤은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었다.

더 웃긴 것은 에이버넷이 이런 부당한 대우에 화를 내기보다 그저 인내할뿐더러, 오히려 내가 가해자인 것처럼 나를 피해 다니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설마 일린저가 이 일의 주동자인가 싶었지만 일린저가 나서서 괴롭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또 에이버넷을 괴롭힌다고 교수에게 이르기에는 장난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의 장난이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음, 지나가면서 우연히 들은 건데…… 에이버넷이 남자애들 사이에서 조금 겉도는 편이라나 봐.”

“겉돌아?”

“그렇게 들었어.”

폰은 이 주제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확실히 나조차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답답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애를 붙들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기에는, 다들 이 사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남자애들은 원래 짓궂잖아, 이야라.”

그렇지. 그러나 그렇다고 넘어가기에는 에이버넷의 얼굴이 너무도 불행하게 보였다. 나는 에이버넷과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 * *

빛으로 꽃을 만들어 내는 수업이었다. 꽃의 향, 잎의 결, 잎의 색. 모든 것을 머릿속에 입력한 후에 흙이 담긴 꽃병 위에서 피워 내야 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정교한 작업이지만 이것은 빛을 바다나 불로 바꿀 수 있다면 은근히 쉬운 단계였다. 이 수업은 에이버넷도 듣는 고로, 나는 구석 자리에 있는 에이버넷의 옆자리에 앉았다. 에이버넷은 내가 앉자마자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에이버넷.”

“응.”

마지못해 대답하는 게 보였다. 마침 교수님이 들어와 책을 펴라기에 폈지만, 책에 적힌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는 내용이고, 할 수 있는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에이버넷에게 가까이 붙어서 작게 속삭였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이야라.”

“네가 말한 대로…….”

우리가 약혼할 사이라면 적어도 서로에게 속이는 것은 없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수업을 깨트리고 손을 들었다.

“교수님.”

나와 반대편에 앉은 일린저 모르온이 손을 들었다. 무심한 표정의 그가 교수를 부르자, 교수는 책을 읽다가 말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수업에 집중할 수 없게 떠드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리고 일린저의 차가운 눈이 나를 향했다. 교수님의 시선이 일린저를 따라서 내게 붙었을 때, 나는 책 끝을 구겨지게 쥐고 말았다. 그간 얌전히 있어서 아예 서로를 무시하는 건가 싶었더니 이제는 나까지 괴롭히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교수는 나에게 눈짓으로 경고를 주하고, 다시 책의 처음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린저에게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일린저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나를 향해 있었다. 이번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를 본 것이지만, 그간 데면데면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뜨겁고 따가운 시선이었다. 일린저는 내가 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노려보는 게 우스운지, 아예 비웃듯이 입꼬리만 올리고 앉아 있었다.

싸움은 저쪽에서 먼저 건 것이었다. 에이버넷은 그 이후로 더욱더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있다가, 책 끄트머리에 작게 메모를 해 내게 보여 줬다.

[친구끼리 싸운 거야.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에이버넷은 매일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해심이 많다고 생각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나는 에이버넷이 오히려 무언가를 숨기려고 애쓸 때마다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4년을 같은 학원에 다니고, 약혼자라는 이름을 거들먹거리면서도 서로를 제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뜨거운 벽난로 앞에 늘 그렇듯 일린저가 자리 잡았고, 나는 그보다 멀리 떨어진 소파에 늘 그렇듯 자리 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제부터 이어진 신경전 이후로 일린저는 나를 무시하기보다 노려보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 듯했다. 이따금 다른 이들이 찾아와 내게 일린저와 다툰 것이냐 묻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우리의 싸움은 학원 곳곳에 이미 퍼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신경전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회의를 할 때까지도 이어졌다. 일린저는 불량스럽게 앉아 나를 노려보고,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난가을 입을 맞췄던 사람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편함이었다. 우리 둘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는지, 아예 우리 둘을 제외하고서 얘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 일린저는 눈을 먼저 깜빡이는 사람이 지는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저런 놈 때문에 내가 속을 끓이고 애태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일린저는 비열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주인공을 들어 올릴 역할 말인데.”

갑자기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나와 일린저는 노려보던 눈을 잠시 거두고, 우리를 힐끔대는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속이 조금 편해진 것인지 이 연극에서 가장 많은 일을 맡은 도시라는 아이가 말문을 열었다.

“일린저 모르온과 이야라 위테르발도로 하려고 해. 두 사람은 저번에 따로 이야기 들은 게 있었지?”

우리 학년에서 가장 빛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잖아. 그렇게 말하고서는 우리 두 사람의 동의를 구하듯이 바라봤다. 솔직히 거부할 게 있나 싶었다. 이걸 거부하면 쟤는 몰라도 나는 꼼짝없이 음료를 나르게 생겼다. 끄덕거릴 찰나, 일린저가 무릎을 세우고 앉으며 입술을 열었다.

“꼭 내가 해야 해?”

차가운 일린저의 목소리에 양피지를 끌어안고 있던 도시가 안쓰럽게 굳었다. 일린저가 거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당연하기도 하지. 일린저는 평상시 이렇게 거친 모습을 보여 주는 놈이 아니었다. 내 앞에서만 그러지, 내 앞에서만. 저 재수 없는 자식.

“자신 없나 봐.”

이건, 그러니까 일종의 도발이었다. 솔직히 지 고백을 거절했다고 저렇게 나오는 놈이 더 웃긴 것이었다. 그를 향해 있었던 서운함이나 서먹함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내가 그를 보면서 비웃듯이 말하자, 일린저는 당황함 없이 곧바로 받아쳤다.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말을 듣는데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축제날 음료를 맡으면 되겠네, 모르온.”

일린저가 왕자라고 애들이 눈치를 보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일린저가 이 일에서 한발 떨어져 여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무도 그에게 힘든 일을 강요할 수 없음이 컸다. 그것을 알고 오만하게 군림하는 듯한 녀석이 재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일린저는 비웃음을 벗어 던지고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하하하, 하면서. 미친놈이었다.

“어떻게 할래?”

이 휴게실에 사람이 꽉 차게 앉아 있어도 어쩐지 있는 사람은 나와 일린저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일린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쁠 것 없지.”라고 했다. 나와 일린저가 박살 낸 분위기는 고대로 책임자인 도시에게 돌아갔다.

“어, 그러면, 두 사람이 맡는 걸로 알아도 되는 거지?”

연극이라는 주제를 맡고 처음으로 자신이 없어진 도시의 목소리는 웃기기도 했다. 내 속은 엉망진창에다가 기운도 하나 없으면서, 나는 여유로운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일린저 역시 아무 말이 없자, 도시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로 양피지에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 갔다.

내가 만들어 낸 어색한 공기는 금세 뒤바뀌었다. 스물의 시작, 이제 성년이 되어 겪을 수 있는 마지막 축제는 꽤나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으므로. 축제의 주인공이 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 * *

“자세 잡고.”

교수는 삐딱한 자세로 서서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검에 힘을 싣고서 앞을 바라봤다. 그림자 백 개가 세워져 있는데, 온 힘을 실어 봤자 그중에서 열 개가 고작일 것이다.

그래도 날마다 늘어 가는 개수에 즐거워해야 하는 건가. 교수는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더, 무언가 더욱더 커다란 반응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 그나마 이번 연도에 매달리고 건질만 한 것이 이것뿐이었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얻는 것. 내 능력을 인정받는 것. 내가 당장 느낄 수 있는 기쁨은 그것뿐이었기에.

그런데 주야장천 빛을 모아서 날려도 일린저에 비해 개수가 한참 모자랐다. 아무리 내가 일린저 다음이라며 다들 칭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하는 칭찬에 불과했다. 나와 일린저의 차이는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우연히 들은 그놈의 왕국식 특별 교육인지 무언지를 나도 받고 싶었다. 만약 일린저의 재능과 나의 재능이 비슷한데 일린저만 그런 교육을 받아 나보다 한 수 위가 된 것이라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자, 시작.”

주변에 있는 빛을 모아다가 검에 담았다. 이걸 크게 휘두르며 전방으로 보내야 하는데 빛들이 나가고 싶지 않아 검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마치 맨몸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손끝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결국 약하게 휘두르고 말았다. 지난번보다 적은 아홉 개가 쓰러졌다. 교수는 별말을 하지 않고서 양피지에 나에 대한 기록을 적었다.

“잘했어.”

그리고 뒤돌아서는데 일린저가 나를 지켜보는 게 보였다.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어쩐지 다시 한번 하게 해 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이야라 위테르발도.”

“네.”

교수는 지난번에 내게 그만하면 잘했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해 주었다. 이번에는 그보다 나쁜 평가가 내려오겠지 싶어서 묵묵히 있었는데, 교수는 의외의 말을 내게 건넸다.

“너무 조급해하는 게 보여. 조금 더 느긋하게.”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내 다음 차례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교수님께 매달려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애석하게도 없는 듯싶었다. 거기서부터 이미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나와 눈을 마주친 에이버넷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에이버넷의 뒤에 앉은 토비오인지 로비오인지가 킬킬 비웃는 게 보였다. 저 고수머리를 한 로비오라는 자식은 이번 학기 내내 에이버넷을 괴롭히고 있었다. 에이버넷은 그래도 바예레카 가문의 아들이라서 웬만하면 트러블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약점이라도 잡힌 게 아니고서야. 수업시간 내내 좋지 않았던 기분은 로비오가 지나가는 에이버넷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지나갔을 때 밑바닥에 닿았다. 나는 다음 수업을 위해서 신나게 이동하는 로비오의 뒤를 따라갔다.

로비오, 일린저, 그리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세 명의 남자애. 다섯이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다들 얼굴이 익숙한 게 늘 일린저의 곁에 같이 다니는 그 무리 같았다. 그중에서 로비오라는 녀석은 제일 에이버넷을 괴롭혔던 놈이었다. 나는 계단을 빨리 내려가 로비오의 어깨를 잡았다.

“저기.”

“어?”

로비오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갈색 고수머리를 한 그는 내가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에 놀란 것 같았다. 걸어가던 네 명의 아이들도 멈추어 서서 나를 보았다. 물론 일린저도 포함이었고.

“얘기 좀 할까.”

“얘기?”

로비오는 당황했던 낯을 숨기고 “아아” 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붙잡았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로비오.”

그때 일린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로비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일린저를 돌아보았다. 일린저의 얼굴은 눈밭에 파묻힌 것처럼 차가웠다.

“안 가?”

로비오는 중간에 껴서 난감하다는 얼굴로 양옆을 보았다.

“가야지, 가야지.”

결국 일린저 쪽에 손을 든 로비오였다. 나는 떠나려는 로비오의 팔목을 잡아서 내 쪽으로 끌었다.

“얘기 잠깐 하는 게 어려워?”

나도 로비오의 얼굴이 아닌, 일린저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일린저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내가 잡고 있는 로비오의 손목을 보았다. 일린저는 냉랭하게 말을 씹듯이 뱉었다.

“놔.”

“내가 왜.”

“손목 부러뜨려 버리기 전에.”

누구의 손목을 부러뜨려 버린다는 건지 알 수 없으나, 로비오는 다급하게 제 손목을 내게서 가져갔다. 일린저는 싸늘하게 나를 바라보고 다시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가 내려가자, 그 뒤에 멀뚱멀뚱 서 있던 셋 또한 따라서 내려갔다. 로비오는 굳은 표정으로 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에이버넷에 대해 묻는 거지?”

로비오는 에이버넷을 괴롭혔다는, 그 사악한 면모가 없는 것처럼 아주 다정했다. 원래 이렇게 야비한 놈들일수록 여자들에게는 예의니 뭐니 하는 놈들이 있었다. 로비오는 제 뒷머리를 긁으며 아쉽다는 얼굴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개인적인 감정 같은 거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개인적인 감정?”

“뭐, 난 기본적으로 그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

“에이버넷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로비오는 더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계단을 힐끔 바라봤다. 아마도 거기서 일린저와 그 무리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로비오는 “더 말해 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라고 한 뒤에 계단을 내려갔다. 내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렇게 보면 또 멀쩡한 것 같은데. 정말 에이버넷에게 문제라도 있어서 이따위 괴롭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게 저들의 작전일까. 여하튼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역시 에이버넷은 사내들끼리 장난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 항상 거기서 질문은 끝이 나버리고 만다.

* * *

작년에 쓴 무대는 올해 쓸 수가 없다고 이미 결론이 났다. 작년은 너무도 뻔한 왕자의 이야기라서 밝은 분위기인 데다가 우울한 용사의 일대기를 담은 이번 연극과 색감 자체가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휴게실에 모이는 게 아니라 야외무대에 모여 그 무대를 뜯어고치는 일에 전념했다. 극 중 연기를 맡을 사람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옷을 제작하는 사람, 특수한 무대 용품을 만드는 사람, 거기에 손님들에게 제공할 음료를 만드는 이들까지 모두 모여서 축젯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무대를 꾸미다가도 각자 자신의 역할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일린저와 단 둘뿐이었다.

우리 둘은 무대를 고치고, 각자 회의하는 시간이 다가와 삼삼오오 모여들면, 가장 구석진 무대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린저는 거기에 드러눕듯이 앉아 눈을 감고 잠을 자고, 나는 옆에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아무 말이나 끄적거리다가 회의를 종료했다. 어떤 색감의 바다를 만들 것인지, 어떤 색감의 빛으로 배경을 비출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야 하지만 일린저는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일이 삼 일째 반복되자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해야 할 과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여기에 끌려 나와 무대 바닥을 하얀색으로 칠하는 것에 온 시간을 할애했는데, 나머지 시간마저도 일린저와 벙어리 흉내를 내며 있는 것에 지친 참이었다.

거기다가 책임자인 도시는 왜 아직까지 논의한 게 없냐며 우리 두 사람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일린저는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점점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어나.”

우리의 자리는 이 무대 뒤편이었다. 주인공이 날고 싶으면 밑에서 받쳐 주는 한이 있더라도 해내야 했다. 얼마 후면 리허설을 할 텐데 그전까지 얘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는 네가 할까, 내가 할까.”

일린저는 그제야 눈을 떠서 내가 내민 양피지를 흘깃 보았다.

“너.”

나는 드디어 협조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찬찬히 할 일을 적어 나갔다.

“그럼 그다음은. 용사가 바다 위에서 뛰어다니는 부분.”

“너.”

“이것도 나. 그러면 그다음 장면은 너겠지?”

“네가 해.”

나는 참지 못하고 깃펜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면 넌 뭐 하려고. 여기서 그날도 빈둥거리며 놀고 있게?”

“나랑 하고 싶어서 안달한 건 너 아니었어? 난 네가 다 도맡을 줄 알았는데.”

나는 이제야 일린저가 일부러 이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화를 알아 달라고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였다. 나는 기가 차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네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은 게 그렇게 죽을죄야?”

왕자라더니 왕자병 걸린 것도 아니고. 제 마음 하나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날부터 아주 못되게 구는데 누구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네가 이렇게 나올수록 그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린저의 눈은 고요하게 나를 담았다. 그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나를 비웃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나를 빤히 바라보듯이 그렇게 보았다. 나를 잔뜩 괴롭힐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눈빛을 보내는 것은 반칙이었다. 화가 나서 나는 지금껏 심중으로만 의심하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하나만 묻자. 에이버넷. 왜들 그렇게 괴롭히는 건데.”

나를 잡아갈 듯이 바라보던 일린저의 눈이 에이버넷의 이름이 나오자 어그러졌다. 다시 차가워지다가 이내 분노를 담았다.

“알 게 뭐야.”

“네가 시켰어?”

일린저는 누워 있던 몸을 거칠게 일으켰다.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그는 짜증 난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서 무대 뒤편을 걸어 나갔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일린저는 대답하지 않고서 저 멀리 가는 게 보였다. 화가 난 그의 뒷모습이 하루 종일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가 이런다고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할까 싶었다. 이럴 바에는 그냥 혼자 다 하고 말지.

* * *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하루를 버텼다. 폰과 린이 이따금 일린저는 같이 하지 않는 거냐고 물어올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검을 들고 혼자 연습을 한 다음, 가장 먼저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기다렸다. 교수가 들어오고, 수업을 하고, 오늘치 과제를 내주면 꼼꼼하게 적어 간다.

그리고 다음에는 반복이었다. 다음 과목 교수, 이어지는 과제. 5년 과정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에 내가 점심까지 거르자, 폰과 린은 아예 샌드위치까지 사 와서 내게 전달해 줬다. 쉬엄쉬엄하라며. 왜 내가 이것에 매달리는지도 모르고 매달리던 하루였다.

무대는 나 혼자 도맡았다. 일린저에게 미리 얘기해 둔 후였다. 다음날 마찬가지로 앉아 있는 그에게 넌 손 하나 까딱하지 말고 앉아 있으라는 말을 했다. 일린저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었다.

나는 일린저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리허설을 도왔다. 낮 수업시간에 빛을 그렇게나 많이 다루고도 또 다루려니 살짝 현기증이 일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일린저의 도움 없이 해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꾸역꾸역 하루를 버텨 왔다. 어느새 시험이 다가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길을 걷다가 코피를 쏟았다. 빛을 다루려면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한데 요사이 내 한계를 넘는 양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몸이 보내고 있는 위험신호에도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잠시라도 멈추어 서면 다가오는 생각이나 기분이 나를 가라앉게 만들었기에 차라리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나았다. 산도르아도, 에이버넷도, 일린저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서 내 하루만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코피를 멈추기 위해 잠시 서 있을 때였다. 왼편에서 익숙한 까만 머리칼에 푸른 눈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코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미 막다른 곳이라서 갈 데가 딱히 없었다. 네가 아는 척하면 어쩔 거냐 싶은 심정으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가만히 코를 누르며 서 있는데 일린저인 줄 알았던 사람이 점차 다가와 나를 그저 스쳐 지나갔다.

가까이서 보니까 일린저가 아니긴 했다. 일린저라고 보기에는 그보다 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일린저의 눈은 왕가에서만 나타난다는 푸른색의 겉 테두리가 조금 더 진한 남색의 눈이었다. 그것은 흔한 다른 푸른 눈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빛들이 사랑하는 눈이라고 하였던가. 여하튼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눈을 하고 까만 머리칼을 한 남자애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내가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도 일린저를 닮은 그 애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제 친구로 보이는 녀석과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며 떠나갈 뿐이었다.

“아, 만났구나.”

1학년들의 질문에 답을 해 주던 폰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부의 아들이잖아. 유명한.”

‘유명한.’을 얘기할 때 폰은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누가 들을까 무서운 눈치인 듯하면서도 얼굴에는 이런 소문에 흥이 난다는 얼굴이었다.

“정부.”

“왕의 첫사랑이 낳은 아들이라던데.”

북부에 흔한 귀족 중 하나인 폰이 아는 사실이라면 이미 모두가 다 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만난 그 아이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얼마 전에 일린저의 동생 두 명이 입학을 했다고 했는데. 한 명은 공주고, 한 명은 내가 오늘 만난 그 아이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왕의 첫사랑이자 누구나 알고 있는, 사생아의 어머니는 유부녀였다. 그것도 동부 예레카의 아내였다. 사생아는 동부 예레카 가문의 둘째로 자라고 있으며, 그것을 모두가 앎에도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돔은 사생아나 정부에 대해 관대한 나라였다. 역대의 왕들은 후처를 들이지 못하는 대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신의 가신 중 한 명과 결혼시킨 후 정부로 들였다. 결혼은 외국의 공주들과 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왕의 상대가 동부 예레카 가문의 안주인이었던 것. 왕과의 사이에서 사생아가 태어난 것. 그리고 동부의 예레카는 이에 대해 묵인한 것. 모두가 소문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다들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이야기. 왕이 정비에게서 낳은 두 자식보다 정부의 사생아를 더 아낀다는 풍문도 있었다.

올해 들어서 급격하게 어두워진 것은 나와의 사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말수도 적어지고, 더 차가워진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일린저 또한 나처럼 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분노로 하루를 태우고 있던 내가 식어 가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어설픈 동정심에 발목이 잡히고 만 것이었다.

* * *

아침부터 몸살 기운이 약간 있는가 싶더니 기어코 수업시간에 졸고 말았다. 교수가 그렇게 피곤하면 듣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쫓아낼 때에도 큰 충격이 없는 것을 보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결국 교수에게 양해를 구해 수업을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회복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왜 그렇게 나 자신을 학대하듯 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물이 뭐인지도 모르겠고. 힘없이 계단에 앉아 있는데 머리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더니 처음 보는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디같이 초록색의 머리칼을 짧게 깎은 남자였다.

“날 기억할지 모르겠어.”

전혀 모른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볼일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나는 용건이 무어냐고 물었고, 상대방은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혹시 파트너 자리, 비었나 해서.”

그놈의 파트너. 다시 지겹도록 구해대는 시기가 온 것을 보니까 축제 준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만 알겠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상대방은 쉬이 나를 포기했다. 아마도 여기저기 찔러 보고 다니는 부류인 것 같았다. 파트너를 구할 생각이 있는 이들은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자신과 같이 가 줄 사람을 구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마 나는 이번에야말로 에이버넷과 가게 될 것이었다. 에이버넷에게 지은 죄도 있었고.

오늘도 연습이 있으니까 내려가서 일을 해야 했다. 과제를 대충 기숙사에서 끝내고 무대로 내려가려던 때였다. 내 앞을 유유히 지나치는 여자애가 나를 힐끔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해스?”

그 아이는 나를 마주쳤음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그 뒤를 쫓았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겠지 싶었는데 하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해스를 쫓아서 걸었다. 그녀는 나를 유인하는 것처럼 후미진 곳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해스가 나를 데려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해스는 검술 연습을 하는 곳 뒤편, 물을 먹을 수 있게 해 둔 펌프 앞으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목이 마른 듯 펌프를 상하로 움직이고 쏟아져 나오는 물을 입가에 대고 있는 사람. 내 약혼자가 될 에이버넷이었다.

에이버넷은 운동을 하고 난 것처럼 땀에 젖어 있었다. 갈색 머리끝에 펌프에서 흘러나온 물이 묻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가 곁에 다가온 해스를 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곧장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확인한다. 나는 다행히 기둥 뒤에 있어서 시야에 잡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이버넷이 해스의 팔뚝을 잡았다. 해스를 모른다는 말은 거짓말로 판명 난 셈이었다.

여기서 말소리는 다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버넷의 가문에서 후원받는 여자애. 그 후원받는 여자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에이버넷. 두 사람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점점 얼굴을 서로에게 가까이 붙였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을 감아 버렸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가 예상한 장면과 다르지 않은 게 보였다.

유독 나에게 날카로웠던 해스라는 아이를 기억했다. 처음에 일린저를 좋아하는가 했던 해스에게는 이미 마음이 통하는 상대가 따로 있음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과 해스를 바라보는 에이버넷의 눈이 확연하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좋아하면서 왜 나에게는 전혀 모르는 척을 했던 것일까.

뛰쳐나가서 따지는 것도 우스웠다. 나와 에이버넷이 대체 무슨 사이라고.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러면 어떻겠냐는 어른들의 말이 전부인 사이였다. 바깥에서 자라 온 나는 모르지만, 성내에서 자란 귀족들의 사고방식은 나를 종종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저들에게 평범한 것일지도 모른다. 약혼할 사람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그 길로 돌아섰다. 더 볼 것도,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저 장면을 내게 보여 준 의도가 무엇이든, 아픈 탓인지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다만 어딘가 귀가 먹먹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앞이 흐릿했다. 그 상태로 무대까지 온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면 겨우 고개만 끄덕이는 상태였다. 습관처럼 내 자리를 찾아서 무대 뒤편에 주저앉았다. 소리가 윙 울리는데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때 구원처럼 차가운 무언가가 내 이마를 쓸었다. 내 뺨을 어루만지고, 목까지 쓸어내렸다. 내 열을 뺏어 가는 듯한 그것을 무심코 잡아챘다. 너르고 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기다란 손가락이 만져졌다. 기대감 없이 눈을 떴는데, 푸른 보석 두 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태가 왜 이래.”

냉정했던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바쁘게 내 얼굴을 돌아다니던 손은 이내 내 팔 밑으로 내려갔다. 한순간에 몸이 들어 올려지고, 안락한 등에 몸이 쓰러졌다. 향긋한 냄새가 맡아짐과 동시에 눈이 감겼다.

내가 찾아 헤매던 곳에 도착한 것처럼 온몸의 긴장이 다 풀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왜 내가 웃었는지. 왜 거기서 다른 곳에서는 찾지 못한 안도를 얻었는지. 아쉽게도 깊은 어둠 속에 빠져 버려 고민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 * *

눈을 떠보니 내 기숙사 천장이 아니었다. 하얗고 불길한 천장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일으켰으나, 누군가 내 몸을 눌러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아직은 일어나지 마요.”

그저 환자를 대하듯 무심한 눈길이 나를 훑었다. 하얀 두건을 머리에 쓴 그는 몇 가지 사항을 내게 묻고서는 누런 양피지에 적었다. 여기가 어딘지, 왜 쓰러졌는지. 내 이름 따위를 기억하는지를 묻고선 별 관심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식사는 잘 챙겨 먹고 있나요?”

“바빠서.”

“그렇군요.”

의원으로 보이는 이는 단순히 피로가 누적된 결과라고만 말했다. 내가 과도하게 빛을 다루는 데에 온 신경을 쏟느라 다른 몸 상태는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분간 빛을 다루는 일은 수업을 제외하면 쓰지 말 것을 권고했으며, 이를 어기고 다시 한번 여기에 들어왔을 때는 가문에 연락을 넣을 수밖에 없다는, 다소 협박으로 들릴 법한 말까지 덧붙였다.

“그럼 쉬세요.”

의무적으로 말을 마친 그가 커튼을 치려던 그때였다. 나는 닫히기 직전에 커튼 너머로 의자에 앉은 일린저를 보았다. 내 착각인가 싶어서 의원이 떠나자마자 나는 잠깐 숨을 죽인 다음, 조용해진 뒤에 커튼을 살짝 젖혔다.

시간대로 보면 새벽이었다. 나는 의원의 발소리가 사라진 바닥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보통은 보호자들이 앉아 있곤 하는 의자에 일린저가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딱 보아도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준 이가 일린저 모르온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곤히 잠이 든 일린저의 앞까지 살금살금 걸어왔다.

팔짱을 끼고 잠이 든 그의 앞에 조용히 쪼그려 앉았다. 제 고백을 받아 주지 않아서 성질부리던 사람치고는 마음씨가 좋은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변덕인지. 나를 업어 여기까지 데려온 것만으로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어디 가지 않고 내가 깨어나길 기다린 것처럼 여기서 잠이 든 것도.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가 그의 뺨을 살짝 건드리게 된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손가락에 닿았을 때.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그의 눈이 떠졌다.

일린저의 눈은 항상 그랬다. 나에게 박혀, 다른 곳으로 떠나갈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짓궂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순간 에이버넷이 해스를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지금 일린저의 눈과 다를 바 없던 눈이었다. 새벽녘의 푸르름이 창밖으로 넘어오는 이 순간. 나와 일린저는 조용히 서로를 눈으로 탐하고 있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일린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나를 본 뒤,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잡았다. 손은 미끄러져 내려와 내 허리를 안고, 들었다. 순식간에 위로 들려진 내 몸은 그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졌다. 그가 내 머리를 끌어안고,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일린저의 입술이 내 뺨 위로 내려와 앉았다. 눌리고, 비벼졌다.

“넌 왜 져 주는 법이 없어.”

일린저는 제 입술을 내 뺨에 붙이고서 그렇게 말했다. 내 머리를 더욱 끌어안아 아예 숨도 못 쉴 정도로 만들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감히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서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 또한 전염될 것만 같은 소리였다. 일린저는 낮은 목소리를 내 귓가에 흘려 넣었다.

“개 같이 굴면 쫓아와서 화를 내거나 왜 그러냐고 물어보던가.”

자신의 태도가 개 같았다는 것은 인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다른 것보다 그의 심장 소리와 비슷하게 떨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기어코 너를 문 걸 미안하게 만들어서.”

일린저는 제 품에 파묻혀 있던 내 뺨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다급하게 내려와 온 곳에 입을 맞췄다. 턱 끝, 코끝, 눈가, 입술 위, 뺨에. 정작 입술은 훔치지 않고 그 주위만 애타게 입술을 부딪치고 있었다. 일린저는 막 깨어나 몽롱한 나를 가지고 별별 것을 다 했다. 나는 살짝 그의 어깨를 밀었다.

“왜 물었는데.”

한번 물어나 보자 싶어서 낸 목소리를 그가 덥석 물었다. 억울하다는 듯 눈가가 찌푸려졌다.

“갖고 싶으니까.”

일린저는 어처구니없어서 웃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린애 같은 발상이었다. 갖고 싶으니까 내 앞에서 화를 내던 거라니. 하지만 화를 낼 의욕도 다 사라진 새벽이었다. 힘이 빠져서 다시 눕고 싶었던 찰나, 그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 품으로 데려간다. 아까와 변한 게 없었다.

나는 그의 팔에 갇혀, 이게 지금 무슨 꼴인가 싶었지만. 차가운 병상의 침대보다 일린저의 품이 더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일린저의 품에서 깊은숨을 내쉬자, 그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내 자세를 고쳐 안았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잠이 쏟아졌다. 그가 편하게 내 등을 두들겨 주는 손길에 마음이 다독여지는 듯했다. 목적 없이 달려온 지금까지의 나날이 그의 손안에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그는 누구보다 나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도록 만들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그 벼랑 밑으로 떨어진 것처럼 마음이 평온했다. 어차피 떨어질 거, 예전에 떨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 *

눈을 떠보니 나는 병상 침대 위였다. 어느 정도 회복했으면 수업으로 돌아가라는 의원의 말에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는, 내가 잠시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새벽에 겪은 일들이 꿈만 같았다. 내가 아침에 기숙사로 돌아온 것을 본 폰과 린이 같이 난리를 피우지 않았다면 내가 실려 갔다는 이야기를 정말 믿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린저가 나를 업고 간 것 또한 사실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마주치는 이들마다 그 이야기로 시끄러웠으니까. 특별히 나를 무대 꾸미는 것에서 제외시켜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한 번 정도는 쓰러져 볼 만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꽤나 떠들썩한 아침에 나는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과도할 정도로 내게 관심을 표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수업을 듣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나는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교수들이 안부를 묻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다들 안부를 묻는데 에이버넷만은 내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 매번 우리가 약혼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듯이 말했던 그의 낯빛은 이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에이버넷의 무관심은 크게 상처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은, 그래도 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무대 준비에 들어갔을 때였다. 무대 뒤편에서 색종이를 접고 있을 때. 커다란 손이 나타나 내 손에 들린 색종이를 뺏어 갔다. 내가 놀라지 않을 만큼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인 양 가져간 그 손의 주인은 일린저 모르온이었다. 그는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을 다 포기한 사람처럼, 내 옆에 앉아 친근한 척 붙어 앉았다.

오후에 있을, 거의 얼마 남지 않은 연습도 모두 나 대신에 일린저가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새벽의 일이 내 꿈이 아니고, 일린저가 예전처럼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뭐든 잘하는 줄 알았더니. 색종이를 꽃 모양으로 접는 손만은 굉장히 서툴렀다. 일린저는 내가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오해했는지 엉뚱한 말을 뱉었다.

“잘생겼다고 너무 그렇게 보진 마.”

“…….”

“아직 네 거 아니잖아.”

할 말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사람 얼이 빠지게 만들어, 웃음 나게 하는 것은 그가 독보적이었다. 나는 웃음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다시 색종이를 뺏어 왔다. 조금도 봐 줄 만하지 못한 꽃 모양을 보면서 그에게 말했다.

“이쪽으론 소질이 없구나.”

일린저는 인정하듯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내 손에서 다시 재탄생하는 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깨끗한 색종이를 집어서 내가 한 대로 따라서 접었다. 여전히 거기서 거기인 솜씨인지라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일린저는 무표정하게 있다가, 내 웃음에 전염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다시 해.”

“어디.”

“위에.”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의 손가락 끝을 집어서 제대로 된 위치에 옮겨다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실수를 연발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이렇게?” 그러면 답답해진 나는 다시 그의 손끝을 들어서 맞는 위치에 옮겨 주고, 내가 하는 양을 보여 줬다. 일린저는 수재 소리 듣던 아이답지 않게 계속해서 나의 관심을 요구했다. 우리에게 정해진 양만큼을 접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설픈 것을 보여 주기 싫어서 그를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얼마큼 했어?”

내게 종이 꽃바구니를 건네준 아이가 얼마만큼 남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반이 겨우 담긴 바구니를 보여 줬다.

“얼른 해야겠는걸. 이제 곧 마무리 단계야.”

“알았어.”

결국 일린저를 다른 곳에 보내고 나 혼자서라도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일이 급해진 것을 들은 일린저는 갑자기 색종이 열 묶음을 제 앞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꽃 모양으로 접는데, 아까 전 서툴던 그의 솜씨가 아니었다.

집중하는 그의 손에서 나온 종이꽃은 내가 만든 것보다 근사한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일린저가 아까부터 나를 놀렸던 것임을 알아챘다. 일린저는 내가 저를 쏘아보는 것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씨익 웃었다. 열이 받는 한편, 할 일은 많아서 참고 주저앉았다.

우리 둘은 말없이 종이꽃을 접었다. 이따금 종이를 더 꺼내기 위해서 바구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일린저의 손가락과 엉키는 것을 빼면, 내 생각보다 수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린저는 제 몫으로 가져간 종이를 다 접고 나서, 내 옆에 쌓인 것까지 반을 해내었다. 바구니에 가득 찬 종이꽃을 보고 내가 한숨을 돌릴 때. 내 어깨 위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기대왔다.

“겨우 끝났네.”

일린저는 쉬기라도 하는 자세로 내게 기대었다.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뱉은 그가 아예 달라붙듯이 내 어깨에 붙었다. 살짝살짝 밀어내면 더 가까이에 몸을 붙여 왔다. 큰 소리를 내었다가 다른 아이들이 혹시라도 관심을 가질까. 나는 가만히 몸을 풀고서 그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가을이 다가오는 듯한 바람. 나의 스물을 보내고 있는 이때. 성인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나는 처음으로 일린저 때문에 마음과 몸이 불편했었다.

불편했다. 그가 기댄 머리 하나에 꼼짝 못 할 정도로. 마음이 세차게 뛰는 게 너무도 불편했다.

* * *

어느덧 가을의 색이 나무에 입혀졌다. 이번 가을 축제의 밤은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날이었다. 그래서 특히 4학년, 우리 스물의 소녀들에게 중요하다는 말을 귀에 못에 박히듯 열두 번쯤 듣고 나면 아무 생각 없던 사람도 슬그머니 이상한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도착한 편지 하나 때문이었다. 산도르아가 열로 앓고 있다는 어머니의 편지에, 나는 마냥 없는 처지라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산도르아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답도 없이 자신이 구해줘 숲지기가 된 남자에게.

그것은 산도르아에게 떨어진 난제였고, 내게 떨어진 죄책감이었다. 산도르아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다가 그 남자에게 마음을 뺏길 동안,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빠져서 노느라 그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산도르아가 사랑의 열병으로 앓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며, 산도르아를 도와줄 형편도 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 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산도르아와 그 남자의 접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산도르아도 기를 쓰고 치유원에 들어가 집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할아버지가 그렇게 손쉽게 속아 주실 위인이 아니었음을 산도르아도 나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수업에 임하고 있을 때. 검을 쥐고 있는 내 곁으로 일린저가 다가왔다. 그는 한참을 턱을 괸 자세로 서서 나를 바라보다가, 내 등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시 잡아 봐.”

“뭘?”

“이렇게.”

그는 허술하게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부터 지적해, 내 자세, 내 어깨의 틀어짐 정도를 꼼꼼하게 돌봐 주었다. 주변에서 우리를 힐끔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계속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다가 며칠 전에는 쓰러진 나를 그가 업고 가기까지 했으니까. 우리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아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전처럼 그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의 시선보다 내 눈앞에 있는 일린저의 시선에 집중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천천히 자세를 바꾸고, 그가 놀리듯 하는 말에 웃고, 그러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 앉아 있던 고민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있었다.

“저게 나라고 생각해 봐.”

일린저는 그림자를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거기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저를 그만큼 싫어하는 것을 잘 안다는 투였다. 나는 그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너라고 생각하고 쓰러트리란 말이지.”

“그래.”

“넌 그게 기분 나쁘지도 않고.”

그는 “전혀.”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그림자를 일린저라고 생각하기보다, 지금껏 내 안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다는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청소하겠다는 일념 하나에 집중하여 검을 휘두르자, 내 예상 밖으로 엄청난 수의 빛이 쏟아져 나와 그림자를 꺾어가기 시작했다. 장난삼아 그의 말대로 따라 한 것인데. 옆에서 딴청을 피우던 교수가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많이 연습한 모양인걸.”

그럴 리가. 계속 쓰러져서 빌빌거린 것이 엊그제인데. 그러나 예상치 못한 행운은 내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줬다. 나도 모르게 뒤돌아서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일린저는 검에 기대어 선 자세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자 웃음은 사그라들었지만, 그의 눈에 선명하게 솟아난 감정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감정을 읽고 말았다. 늘 장난기가 어린, 그의 짓궂음을 담은 시선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에서는 그의 또 다른 감정이 내 눈에 잘 읽히고 말았다. 애정, 기쁨…… 그런 것들. 내게 자꾸만 이상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그의 시선에서 나는 눈을 돌렸다.

어쨌든 산도르아와 내 감정과는 다르게 일상은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요령을 깨닫자 그림자를 쓰러트리는 일은 나날이 갈수록 쉬워졌고, 일린저는 나날이 갈수록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린저는 식당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지나쳤고, 나는 그런 그의 뒤를 쫓아가 발을 걸었고, 일린저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것을 뛰어넘어 갔다.

일린저가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은 내게 와서 그의 위치를 물었다. 반대로 내가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이 일린저에게 묻고 있는 것을 내가 목격했다. 일린저는 능청스럽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잠시 어디 갔다고 말을 했다. 내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르면서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할퀴는 대신, 이런 불필요한 장난과 유머로 서로를 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린저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윙크를 해, 내가 질색하는 얼굴을 좋아했고. 나는 그가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점차 나쁘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그가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이 어색하게 다가온 적도 있었다. 정작 올겨울부터 본 그의 얼굴은 바로 그 무표정한 얼굴이었음에도 말이다.

일린저는 주변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금세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가도,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가 없으면 표정이 사라졌다. 내가 보는 순간에 항상 그랬다. 그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면, 그때는, 그의 눈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그다음에 수줍게 웃어 준다. 그때에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야라.”

너무 오랜만에 들려온 목소리에 잠시 마음이 놀랐다. 휴게실에서 남은 과제를 하던 중에 내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 에이버넷 위드먼의 것이었다. 나는 그가 말을 걸었음에 놀라는 중이었다. 에이버넷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내게 고개를 숙여 왔다.

“잠시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책을 덮었다. 그간 잊고 있었는데. 에이버넷에 대한 기억이 책장을 넘기듯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번은 말을 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번 학기가 끝나고서일 줄이야.

내가 에이버넷을 따라 걸을 때. 일린저의 표정은 다시 무의 상태로 돌아갔다. 수줍게만 보이던 그의 눈가나 입술이 그렇게 냉랭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불편해져 자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일린저는 다시금 나를 제대로 보았다. 아까의 수줍음은 없지만 그래도 차가움은 많이 가신 얼굴이었다.

“이야라.”

내가 일린저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한적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생각 없이 에이버넷의 뒤를 따라간 결과였다. 곧 통금 시간이었고, 휴게실과 기숙사는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 되었으며, 여기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창고의 복도라는 걸.

“할 말이 뭐야.”

이런 장소에 남겨졌음에 화가 난 것일까. 나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나가고 말았다. 에이버넷은 약간 당황한 눈치로 걸음을 멈춰 섰다. 나의 사나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는 말을 버벅거리기까지 했다.

“내게 화났어?”

“아니.”

에이버넷은 날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가 약혼하게 될지도 모르며,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뉘앙스만 풍겼을 뿐이었다. 그걸 내 멋대로 우리가 좋은 사이로 발전해 나간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었다.

“이야라. 내가 몇 달간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무엇을?”

“로비오나 다른 아이들이 내게 짓궂게 대하는 거.”

내가 그에 대해 걱정하고, 몇 번이나 말을 건 것을 알면서도 에이버넷은 지금에 와서야, 학기가 끝나가고, 연극 준비를 마치고, 가을 축제를 앞두고 나서야 말을 했다. 이것은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태울 대로 태운 다음, 마무리 지을 때 진실을 꺼낸다는 건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그래. 말해 봐.”

“로비오나 다른 녀석들이 휴가 기간 동안 내게 앙금을 품은 모양이야. 알다시피 원래 예레카가 될 사람의 약혼자 자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잖아.”

나는 유급한 것이 창피해 더 이상 학원에 나오지 않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산도르아의 약혼자였던 녀석.

“그 아이의 친구였던 모양이야. 그래서 너와 약혼한다는 얘기가 도는 것 같으니, 나를 조금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나 봐.”

왠지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버넷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그동안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게 설명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에이버넷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도, 설령 그가 얘기를 꺼낸다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래. 무엇보다 에이버넷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화났어?”

“아니야.”

“다행이다.”

에이버넷은 안심된다는 얼굴로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장된 그의 몸짓에서 나는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을 주울 수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에이버넷이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이야라.”

“응.”

“이번에는 나와 같이 파티에 가 줄 수 있는 거지?”

에이버넷이 왜 이제야 이 말을 꺼냈는가 하는 이유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그는 파티에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어쩌면 누군가에게 나와의 사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이러고 있었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해스는?”

“어?”

에이버넷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소리치듯이 대답했다. 이내 자신의 목소리가 컸음을 깨닫고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가면이 깨어진 진짜 에이버넷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해스, 라는 아이가 갑자기 왜 나와.”

“그 아이. 너희 가문에서 후원하는 아이라던데.”

“그런데?”

에이버넷은 갑자기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의 얼굴에서 당황함이 사라지고, 공격할 거리를 찾는 야수처럼 얼굴이 변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이야라.”

“너희 둘이 키스하는 걸 봤어.”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였다.

“넌 저번에 분명 모른다고 했었고.”

“이야라, 그건…….”

변명을 하려던 그의 입술이 멈추었다. 에이버넷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눈을 위로 떴다.

“로비오가 너에게 그렇게 얘기해 줬어?”

“아니.”

에이버넷이 그 말을 하는 순간에 알았다. 로비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이버넷을 협박하고 있었고, 그 협박의 원재료는 해스였다는 걸. 해스의 존재를 나에게 숨기기 위해서 에이버넷이 그간의 괴롭힘을 군말 없이 견디었다는 것도. 에이버넷은 이번 학기 내내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어 한 게 나인지, 해스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에이버넷은 모욕을 참아내는 듯한 얼굴로 계속해서 이 말의 끄트머리를 잡고 늘어졌다. 주제가 이상한 데로 튀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일린저와 둘이 재미 보고 있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았어?”

재미를 본다, 라.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분노가 에이버넷을 삼켰다. 그는 몸을 파들거리며 말했다. 쌓인 게 많은 얼굴이었다.

“어차피 뻔한 거 아니까 나도 터놓고 얘기할게. 해스는 곧 정리할 거고, 그 문제로 우리 둘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거야. 따지고 보면 나만 한 상대, 어디에 가서 찾기도 힘들 테고.”

그러니까 에이버넷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약혼자 자리였다. 에이버넷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것에 관해 몹시 초연한 태도를 취해 왔었다. 자신이 약혼자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난 후에도 내게 오히려 괜찮은 것 같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온 터였다.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것처럼.

그 모든 게 사실은 엄청난 욕망이 깔려 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꼴 보기도 싫어졌다. 기억도, 사람도.

“해스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에서 후원한 아이에 불과해. 아버지께서 그 아이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라…….”

“에이버넷.”

“나도 무수히 너와 왕자의 사이를 참아 넘겼어,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이러지?”

“뭐?”

에이버넷은 흥분해서 꺼낸 말을 그만 뚝 멈추었다.

“약혼을 한 것도, 그렇다고 정식으로 어른들끼리 만난 것도 아니잖아. 그저 네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 그거 하나로 우리 둘이 친해졌던 것뿐이야.”

“이야라.”

“이렇게 연인이었던 것처럼 구는 건, 기분이 나쁜데.”

이번 학기에 나는 여러모로 에이버넷에게 실망한 것이 많았다. 많다 못해, 아예 그를 영영 보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비워진 차였다.

나는 멍하니 서 있는 그를 지나쳐서 걸었다. 학기 초만 해도 이번 가을 축제를 떠올리면, 내 옆에 있을 사람은 당연히 에이버넷이었다. 저번 축제에 대한 부채감을 씻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나는 에이버넷을 떨쳐낸 후, 비로소 함께하고픈 파트너가 누구인지 명확해졌다.

* * *

이번 드레스도 역시 푸른색이었다. 다만 기장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물결 같은 느낌의 드레스였다. 따로 리본으로 묶을 필요도 없어서, 그저 입고 어깨의 끈만 살짝 조절하면 되었다. 폰과 린은 이번에도 작년과 같은 파트너를 골랐다. 산도르아가 성인식이 도래한 이 축제를 즐기지 못해 아쉽다는 폰의 말에 나는 열병으로 앓고 있을 산도르아를 떠올렸다.

그래서 축제가 시작했을 때. 연극을 하기 전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었다. 대다수가 자신의 파트너와 손을 잡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3학년들이 만든 물건을 사러 가거나 이드리하임 상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그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토끼들의 숲으로 향했다. 숲지기는 저번에 만났던 그곳으로 가서 쉬이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준비해 놓은 것처럼 자신이 써 놓은 편지를 전해 주었다. 올해 숲지기를 그만둘 거라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계속 산도르아를 만날 건가요?”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그가 상처를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숲지기는, 아니 키르얀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변방으로 떠날 거라는 말을 했다. 그곳에는 용병이나 힘쓰는 사내를 구하는 이들이 많다고.

“산도르아에게 전해 주세요. 저를 잊고, 그저 행복하라고.”

꽤나 묵묵한 편인 사내는 산도르아가 자신 때문에 학원에 나오지 못하게 된 것 같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귀한 산도르아에게 흠집이 되는 것 같다며. 꽤 과묵한 편인 그는 그 몇 마디를 남기고서 깊은 숲 안으로 사라졌다.

변방으로 간다고. 서쪽은 종종 외곽을 약탈하러 오는 섬 주민에, 남쪽은 드넓은 바다와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해적에, 북쪽은 커다란 산맥에 사는 괴상한 짐승들 때문에. 갖가지의 이유로 돔의 끝으로 갈수록 힘쓰는 사내에게 일거리는 쏟아졌다. 한 명 한 명의 검이 중요한 그곳에서 사내의 피부나 출신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어차피 사내는 위테르발도 령이 있는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그러하니 남은 선택지는 북쪽이 아니면 남쪽이다. 동쪽은 우리의 교역국들과 많이 붙어 있어, 부유하며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찾지 않았다. 산도르아에게 준 편지에 자신의 목적지를 써 두었을 것 같지 않았다. 과연 산도르아가 그의 말대로 잊고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물론 시간이 많은 걸 잊게 해 주고 낫게 해 주겠지만, 그 시간 동안 산도르아는 이별의 아픔에 시달릴 터였다. 가문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던 그녀가 다 던지고 치유원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만든 사내였다. 나는 산도르아가 꽤 오랫동안 아프고 그리워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런 무거운 소식을 안고서 내가 다시 축제의 장으로 돌아왔을 때. 물건을 볼 시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불 꺼진 무대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파트너도 없는 내가 홀로 볼 것도 없고, 또 미리 가서 준비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모여든 사람의 수가 제법이었다. 나는 로브를 걸친 채로 미리 연기 연습을 하고 있는 배우들을 뒤로하고 무대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로 볼 필요도 없이 사회자의 신호에 따라서 빛을 다루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익숙해진 무대 뒤편의 자리에 앉자마자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연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십 번은 들어서 지겹게까지 느껴지는 대사들을 듣다가,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안녕.”

내게 낯선 이처럼 인사를 하며 다가온 일린저는 의자를 끌어다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산도르아에게 전해 줄 편지 때문에 무거워진 내 어깨가 그를 보자마자 한결 가벼워졌다. 시종일관 나의 웃음을 되찾아주려는 그를 보니까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일린저는 미소 짓는 내게 놀리듯 말했다.

“오늘은 대접이 좋은데.”

“반가워서.”

“반가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것을 보면 얘도 자기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야라!”

책임자인 도시의 얼굴이 쑥 내밀어졌다.

“있었구나!”

도시는 옆에 있는 일린저를 보며“두 사람 다 축제도 제대로 즐기지 않고서 여기에 있었던 거야?” 하며 놀라워했다. 그러고 보니 일린저 또한 아직 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지 않은가. 도시는 우리 두 사람의 열정을 칭찬하며, 곧 무대가 올라갈 테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나는 도시가 사라지자마자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일린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네가 없어서.”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손님들이 입장하기 시작한 듯했다. 그의 말 때문일까. 손님들의 목소리 때문일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긴장감이 나를 덮쳐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일은 일린저와 함께 한다지만 만약 내가 실수라도 해서 일린저나 연극에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거리로 남을 것 같았다. 오늘 잘 해내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주세요! 책임자 도시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연극이 시작됨을 알리는 커튼은 잠시 뒤에 올라갔다. 사회자는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앉아 있던 나와 일린저는 곧장 일어서서 환한 빛을 불러 모았다.

주인공이 등장할 때는 빛을 뭉치고 뭉쳤다가, 주인공이 괴물을 물리치거나 능력을 보여 줄 때 한꺼번에 터뜨렸다. 가끔은 물로, 가끔은 불로, 가장 화려하고 싶을 때는 빛 그 자체를 주인공의 몸에 휘감았다. 나 혼자서 하면 벅찼던 것들이 옆에 있는 일린저와 함께하자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연극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내 마지막 축제였다. 이제 5학년 과정에 이르면 이드리하임을 떠나, 그 위에 있는 건물에 틀어박혀 시험을 준비하게 될 터였다. 시험은 실기보다 필기가 많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필히 많은 양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우리의 나이대의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축제였다. 내 눈앞에서 빛이 번질 때마다 나는 그것을 상기했다.

용사가 바다 위를 뛰어가 마침내 세상을 구할 때. 나는 연극이 끝났음을 아쉬워했다. 마지막 연극의 막이 내리고, 모두가 빛을 하늘로 던져 올릴 때. 까만 하늘에서 색색으로 물들인 빛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축제가 끝나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나의 성인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스물이 된 우리는 이 축제를 기점으로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한마음으로 이 축제를 기다렸다. 과제는 제출했고, 마지막 축제인데다가, 학원 측에서 허락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오늘은 통금도 없었다. 오늘날까지 기다린 것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먹고, 마시고,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고.

하늘에 뜬 축제를 보면서 멍하니 있을 때. 내 드레스 위에 덮여 있던 로브가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아니라, 일린저의 손이 살짝 내 로브의 끝을 당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로브를 벗은 연미복 차림으로 나를 기다렸다.

와아아! 파티를 향해 달려가는 청춘들의 함성이 들렸다. 한 번도 저 파티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나를 향해서 일린저가 손을 내밀었다. 서로 파트너를 하겠다고 말을 한 적은 없어도, 나도, 그도. 내심 서로를 파트너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손을 마주 잡는 내가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이끌리듯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꽃들로만 가득한 파티장에는 들어가자마자 피처럼 빨간 술을 손에 쥐여 줬다. 거부하는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모두가 손에 술잔을 들고 다녔다. 아직 파티는 제대로 시작하기 전임에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받아 든 술을 홀짝이며 마셔 보았다. 씁쓸한 맛 끝에 살짝 피어오른 단맛이 나름 먹을 만했다. 일린저는 그런 나를 보며 웃으면서 자신도 술을 입가에 댔다.

“나쁘지 않지.”

“뭐, 나름.”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 가서야 안 사실이었다. 파티장에서 서로의 파트너를 데리고 마주친 폰과 린이 나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기에. 부끄러움에 빼려고 하였으나 일린저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빼내려고 할 때마다 손을 흔들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듯했다.

이윽고 음악이 흐르고, 다들 제 파트너의 손을 잡고서 파티장 한가운데로 나섰다. 일린저와 나는 흐름에 끼어들지 못하다가, 그가 장난치듯이 나를 끌고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춤을 잘 추지 못하는 것에 걱정스러워 나가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 안에서 제대로 격식에 맞추어 추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한층 마음이 편해졌다. 다들 제 파트너와 음악에 맞추어 빙글 돌고, 서로 귀엣말을 나누고, 이 혼란스러운 장에서 빠져나가기도 했다.

나와 일린저는 어색해서 견딜 수 없는 몸짓으로 중앙에서 삐걱거렸다. 일린저는 장난스럽게 내 구두를 밟을 듯이 위협적으로 스텝을 밟았다. 나는 또 약이 올라 그의 구두를 밟을 것처럼 발을 들어 그를 쫓고, 그러다가 보니까 어느새 우리가 춤이라는 걸 추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일린저는 처음부터 그것을 의도한 듯, 내 허리를 끌어안은 자세로 부드럽게 파티장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기대보다 잘하는데.”

술기운이 돌아서일까. 내 몸이 그의 손에 의해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일까. 어지러운 머리에 그의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이나 널따란 어깨, 향긋한 그의 냄새를 맡고 있으니까 마음까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띠고, 취한 듯한 발음으로 그에게 몸을 붙였다.

“오늘 나랑 추려고 한 건 맞아?”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물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파트너 따위는 없는 것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는데. 무얼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린저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내가 아닌 에이버넷하고 왔다면.”

“응?”

“가만 안 두려고 했는데.”

노래가 끊겼다.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 전, 잠시 쉬어 가는 그 짧은 타임에 모두가 춤을 멈추고 파트너와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갈까.”

성인식에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근래에 이처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반쯤 술에 취해서 겪는 이상한 감정일 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라 할지라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일린저는 다음 음악이 시작함과 동시에 부드럽게 파티의 한가운데에서 빠져나갔다.

파티장의 뒤로는 수많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달밤, 아무도 없는 이 밤에 일린저는 파티장에서 술병 하나를 훔쳐서 손에 들었다. 익살스러운 미소로 그걸 자신의 손에 들고 흔드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린저와 함께 모두 파티장을 빠져나와 조용한 길을 걸었다.

외부인이 출입하기에 이드리하임은 길고 긴 계단을 하나 만들어 둔 터였다. 일린저는 내 손을 잡고 학원의 가로수 길을 지나쳐, 그 긴 계단을 끌고서 내려갔다. 연극을 보고 나서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이 내려가는 그 틈에 끼어, 우리는 이 학원의 학생이 아닌 것처럼.

분위기 좋은 성인식의 밤이었다. 수도인 셉시스도 이드리하임의 축제 날에 맞추어, 오늘이 성인식임을 알리듯 여기저기서 기념할 만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연인들끼리 하기 좋은 목걸이라든지, 팔찌라든지, 여인들이 홀릴만한 것들을 매대에 두고 열심히 장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셉시스의 광장을 가로질러, 가장 맛있는 안주를 준다는 곳으로 들어갔다. 특이하게 우리에게 방을 내주고, 그 방 안에는 침대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보다는 가지고 온 술과 어울릴 안주가 차려진 식탁에 더욱 집중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와 셉시스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창문이 보이는 곳에 의자를 가까이 두어 앉았고, 일린저는 긴 다리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앉아 있었다. 막상 우리 둘이 여기에 내려와 술을 마시는 것 외에 할 것이 없었다.

원래부터 우리 둘은 아웅다웅 다투는 것 외에 이야기를 많이 해 본 편이 아니었다. 일린저는 거만한 자세로 술을 마셨고,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술을 홀짝였다.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 같았다. 그와 파티에 참석하고, 춤을 추고, 또 셉시스로 내려와 여기에 들어온 것이.

그와 어색한 것은 별개로, 사람이 별처럼 많은 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이 창가에 앉아서 축제를 즐기는 누군가를 훔쳐보는 기분. 술이 들어가서인지 모든 게 낭만적으로 보였다. 처음 셉시스의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무섭고 냉정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축제를 즐기는 저들이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보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그때 익숙한 향기와 함께 일린저가 다가왔다. 창가에 걸터앉은 그는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특별한 감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이 셉시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셉시스에서 한참 걸어가면 커다란 성이 나온다. 거기서 그는 이런 풍경을 지겹게 봤을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내가 대단한 사람들과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골목에서 남의 지갑이나 훔치던 애가 언제 이런 드레스에, 이런 호화로운 장소에, 대단하신 남자랑 술을 먹어 볼까. 분명 대단하고 즐거워야 하건만. 왜 내 마음은 아직도 어린 시절처럼 초조하고 불안한지 모르겠다.

“일린저.”

“응.”

“너 산도르아가 그 숲에 가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내내 궁금했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물어보자, 양 뺨이 살짝 붉어진 일린저가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넌 줄 알았거든.”

학원에서 일린저의 눈은 항상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 눈을 돌리면 우리 둘의 시선이 섞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냉정해졌다는 것을 처음 안 것도, 그가 나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음을 느낄 때였다. 그때 나는 서운했었다. 그가 진저리나게 싫으면서도 나를 지켜봐 주길 바랐던 걸까. 그때의 서운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한테 냉랭하게 굴 땐 언제고. 요즘은 또 왜 이렇게 잘해 줘?”

“냉랭하게 군 걸 알긴 아네.”

“서운했으니까.”

그가 미안하길 바라서 한 말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기뻐하는 눈을 한 그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붉어진 제 입술을 손등으로 가렸다. 눈은 놀라서 커지고, 뺨은 상기된 것처럼 빨갛다.

“서운해?”

“조금?”

“서운했단 말이지. 서운했어? 정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가 싫증일 날 즈음, 일린저가 내 앞으로 왔다. 앉아 있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하듯이.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서운했냐고.”

“미친 사람처럼 그만 물어봐. 그랬다고 했잖아.”

“왜?”

“왜냐면.”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까지 미워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의 어색함이 남겨져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학원에 입학해서부터, 아니 그전부터 우리는 알고 있던 사이니까. 이 학원에 내가 아는 사람은 손에 꼽는데, 거기서 일린저가 나를 배제하는 듯한 기분은, 다시 생각해도 서운함에 그치지 않을 정도였다.

“넌 다른 사람한테는 말만 잘하다가 내가 가니까 뚝 끊고, 내가 하는 말에 비아냥거리듯이…… 이건 맨날 하는 거였나? 여하튼…….”

“아, 이야라.”

이야라, 이야라, 이야라. 아주 닳을 정도로 내 이름을 연달아 불러 댔다. 알딸딸한 기운에 슬쩍 그를 째리듯 보니, 일린저가 다시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지 좀 마.”

차이가 너무 심했다. 무표정하게 나를 노려볼 때하고 지금하고. 이런 얼굴에 익숙해지다 보면 또 냉정하게 바뀌었을 때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검이라도 빼 들어 그에게 휘두를지도 몰랐다. 일린저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이름을 노래처럼 부르다가 서서히 손을 올렸다. 누가 보아도 쟤 지금 취했다. 문제는 나도 만만치 않게 취기가 올랐다는 것이었다.

일린저의 손끝은 분홍색이었다. 그 역시 취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일린저는 풀린 눈으로 나를 훑으며 보다가, 내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하는 손으로 내 뺨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이 요동을 쳤다. 그의 상체가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내 앞까지 당도했다. 서로의 코끝이 스치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런 걸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이렇게 될 것만 같았다. 일린저와의 두 번째 키스였다. 그러나 첫 키스만큼 거친 것이 아니었다. 일린저는 부드럽게 내 아랫입술을 물고서, 혀를 조심스러운 듯이 밀어 넣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으로 내 입 안을 맛보듯 돌아다닌다. 중간중간 입술을 떼고 내가 숨을 쉬게 해 준 다음, 내가 안정을 찾으면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사탕을 녹여 먹는 듯한 입맞춤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가 나에게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여하튼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 준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알 듯 말 듯 하게 내 앞에서 장난스럽게 넘어간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에 탁월해 보였고, 나는 이따금 그의 심중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입술을 맞대고, 그의 눈을 보니까 알겠다. 나를 향한 정염이 일렁이는 눈을 보니까, 그가 그렇게 나를 괴롭혀댄 이유가 애정에 가까웠던 것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딘가 헤매던 그의 심중이 내 손아귀에 잡힌 느낌이었다. 속이 후련하고, 후련한 만큼 짜릿한 무언가가 발끝부터 찌르르 올라왔다.

“하아…….”

그의 눈가가 연분홍색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내 입술을 맘껏 머금었다가, 내뱉으면서 슬며시 눈을 떴다. 내가 좋은지, 별로인지 확인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나는 처음에만 눈을 감았지, 나중 가서는 계속 그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가 흥분해서 뱉는 숨이나 간간이 떠는 것 같은 손가락. 그런 걸 구경하는 게 왜 그렇게 재밌는지 모르겠다.

부드럽게 내 입술을 훔치던 일린저의 혀가 턱 끝을 타고 내려가, 내 목에 닿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간지러움보다 짜릿함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술이 문제였다. 이래도 되는 건지 안 되는지에 대한 생각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일린저는 내 목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기며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의지하듯이 감싸 안았다.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는 순간이 돼서야 알아차렸다. 그의 의도가 처음부터 이것이었든, 아니었든. 우리는 오늘을 기점으로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입에서 똑같은 맛이 났다. 달콤한 포도주의 맛. 성인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이 달달하면서도 끝에는 씁쓸한 맛. 나는 이날을 떠올리면 이 단어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성인식, 첫 경험, 포도주, 그리고 연분홍빛 뺨.

일린저는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사람처럼 있었다. 수시로 내 뺨을 잡아당겨 입술을 맞대고, 나를 눕히며 드레스의 리본을 푸는 그때까지.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멍하니 누워서 옷 벗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손바닥이 근질근질했다. 그가 내 어깨끈을 풀고 있을 때, 나는 그의 목에 걸린 타이를 끌렀다. 단추가 서로의 손에서 쏙쏙 빠지고, 셔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린저는 수시로 내 입술, 뺨,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그에 대한 감정은 별개로 그 느낌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몽롱한 기분으로 내게 전해진 감각을 느끼다가 보면, 어느새 일린저와 내가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린저의 입술이 내 가슴께를 향할 때, 나는 그의 등을 쓸어 만지고 있었다. 어깨에 튀어나온 그의 뼈나 근육이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부드러운 그의 살결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졌다. 너무 좋아서 내가 미소를 띠고 있자, 일린저는 무얼 착각한 얼굴이었다. “이게 좋아?” 물으며 내 귓불을 살짝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일린저의 눈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마다 내 마음속은 부정적인 쪽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나를 녹여 먹을 듯이 부드러웠고, 당장이라도 내 앞에 꿇을 수 있을 것처럼 온순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었던 그에게 달콤함을 한가득 받자, 나는 도리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일린저의 입술이 내 목을 스칠 때마다 간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칼을 쓸어 만지면서 등으로 내려갔을 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조차 이미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일린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드레스는 너무도 손쉽게 일린저의 손에 의해 벗겨져 내려갔다. 나신이 되었다는 것은, 찬 바람이 맨살에 닿았을 때가 돼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일린저의 벗은 상체를 보고, 내 봉긋한 가슴을 보고 부끄러워서 눈을 돌리는데, 일린저의 귀가 붉은색으로 칠이 된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도 만만치 않게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일린저의 뺨을 살짝 어루만지자, 그의 두 눈이 내 목을 지나쳐, 가슴으로 향했다. 뜨거운 입술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내 가슴의 정점을 살며시 머금었다.

“하아…….”

등까지 오싹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일린저는 내 붉은 정점을 문 채로 눈을 들었다. 내 얼굴을 살피며, 살짝 입술을 벌린다.

“아파?”

아프냐고. 전혀. 고통이 아니라 이상한 기분에 지고만 느낌이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일린저는 다시금 뜨거운 혀로 내 가슴께를 핥듯이 감쌌다. 기분이 좋다거나 쾌감에 몸서리치는 기분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의 혀가 그곳에 닿고, 내 가슴살을 물고서 쭉 빨아 당기는 기분이 이상할 뿐이었다.

일린저는 풀어진 눈으로 내 가슴을 맛나게도 먹어 치웠다. 잇자국이 날 듯 말 듯 하게 물었다가, 금세 달래 주듯 혀로 이가 문 곳을 쓸어 주거나. 왼쪽 가슴에 달라붙어 부족한 사람 마냥 빨아 젖히다가도 오른편 가슴에게 사과하듯 돌아와 부드러이 입술을 문대기도 했다.

“좋아…….”

내 가슴골 사이에 가만히 코를 묻고서 일린저가 속삭였다. 취한 듯 빨간 그의 뺨이 들어 올려졌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지만, 장난기는 가득했다.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허리를 붙들어 조금 들어 올렸다. 그의 팔뚝에 갇힌 나는 고개를 흔들었으나, 일린저는 그 상태로 자신의 상체를 기울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봐도 일린저뿐이었다.

“아……!”

자꾸 도망치는 게 거슬렸던지. 일린저는 내 턱을 단단히 붙잡고 입 안으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허리가 붙들려 있어서 몸부림칠 공간도 없었다. 수줍기만 하던 그는 갈수록 제 본성을 드러내듯 거칠고 난폭해졌다. 처음에 내 입 안을 노크하듯 살피기만 하던 혀는 온데간데없고, 제 소유를 주장하듯 온갖 곳을 맛보는 혀밖에 남질 않았다.

겨우 뱉는 숨마저 훔쳐 가는 그의 입술이 미워질 때 즈음, 지금까지의 놀람은 아무것도 아닌 양, 그의 두툼한 하반신이 내 음부에 밀착했다. 그도, 나도 맨 살갗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굵다란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일린저의 허리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아주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내 목에 처박혀 있었고, 허리는 부드러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커다란 성기는 내 음부 위에서 놀고 있는 중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꼿꼿이 일어선 그것을, 내 음부에 정성껏 문지르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도 없는 눈치였다.

일린저는 힘겨운 듯 눈살을 찌푸리고, 한 손으로는 내 가슴을 움켜쥐고선, 주체 못 하는 허리를 마음껏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 끔찍하게 부드러워…….”

따위의 말을 내 귓가에 박아 넣으며 수시로 내 목이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던 손을 내려, 내 둔부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다부진 어깨를 함께 어루만지다가, 일린저의 손이 내 허벅지로 왔을 때는 놀래서 밀치고 말았다.

“너무 빨라.”

“응?”

“빠르다고.”

일린저는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것 같지 않았다. 흐트러진 그의 시선이 내 허리부터, 종아리까지 음탕하게 훑을 뿐이었다. 일린저는 붉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시선은 내 음부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서 말했다.

“한 번만.”

첫 시작은 허벅다리 안쪽에 입술을 붙이는 것이었다. 거기서 뜨거운 숨을 내쉬며 내 종아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내 허벅다리에 붙은 입술은 점차 안쪽으로,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위치를 옮겨 갔다. 옮기면서 끈적거리게 입맞춤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린저는 한 손으로 내 손깍지를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잡아 넓게 벌렸다. 자연히 드러나게 되는 광경에 내가 허리를 들려고 하면, 그가 부드럽게 안심시키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안심이 될 리 없었다. 나는 그제야 이게 굉장히 큰일임을 깨달았다. 단순히 서로의 상반신을 만지작거리거나 입술을 맞대거나 하는 게 아닌, 서로가 남자와 여자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곳을 보여 주고, 마주 비비고.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와 더운 숨을 뿌렸다.

그 숨은 전하고 전해져 내 예민한 부위에까지 닿았다. 내가 슬쩍 둔부를 빼내려고 하자, 그가 더욱 얼굴을 가까이했다. 지금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감각이 나를 덮쳐 왔다. 창피하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일인가 싶고. 그러나 일린저는 황홀한 듯 혀를 내밀었다. 살금살금 내 갈라진 틈새에 혀를 가져다 댔다. 그는 키스하듯 고개를 꺾어, 내 말캉한 살에 입술을 얹었다.

“일린……!”

눈이 절로 감겼다. 일린저는 입술을 얹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를 달래듯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한 번도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았던 곳을 혀로 맛보고, 즐거운 듯이 그 아래서 웃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의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거친 웃음 뒤에는 수줍음을 벗은 혀가 길게 음부를 핥았다. 그리고 곧장 안쪽의 살을 파내듯이 먹는다.

“아…… 으.”

나를 달래 주던 손까지 일린저는 내려 버렸다. 대신에 반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게 움직이는 허벅지조차 마음에 들지 않은 양, 제 두 팔로 봉쇄하듯이 안아 버렸다. 그리고 양옆으로 벌렸다. 벌려진 만큼 드러난 음부에 제 혀를 꽂아 넣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탐구하는 것처럼, 단순히 맛이 궁금하다는 눈으로 혀를 안에서 움직였다. 안을 긁듯이 길게 핥고, 끝까지 닿을 수 없는 게 분하다는 듯 멈추어 서서 할짝거리고.

난데없는 침입에 당황한 음부가 어찌할 수도 없는 사이에 주르륵 무언가가 흘렀다. 일린저는 그걸 노린 모양이다. 곧바로 혀를 빼낸 다음, 우아하게 그것을 제 입 안으로 가져가 삼켰다.

“하, 으, 아.”

안 돼, 안 돼. 후르릅, 자꾸만 그의 입 안으로 빨려가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미칠 듯이 괴롭다는 것. 괴로운 만큼 이성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린저는 내가 둔부를 뒤로 뺀 만큼 쫓아와 더욱 혀를 밀어 넣었다. 더 닿을 곳도 없는데 샅샅이 내 속살을 물고 빨고, 민망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러워서 그래, 이해해.”

“으, 아!”

내 음부를 양 손가락으로 벌렸다. 더 벌어질 곳도 없는데. 그 위로 툭 튀어나온 음핵을 혀로 살짝 누르자 미칠 것 같았다. 저절로 나오는 신음은 이제 상관없었다. 일린저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도 그는 사랑스럽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를 할퀴고 벗어나려고 하는데 사랑스럽다니. 일린저의 정신이 제 곳이 아닌 딴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하지……!”

아예 제 입 안에 넣고 과일의 즙을 짜 먹듯이 먹었다. 나는 울먹이며 뒤돌아 나가려 했으나, 결국엔 뒤집어진 채로 그에게 먹히는 중이었다. 빨리고 빨리다가, 이상한 기분의 끝에 다다랐다.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애쓸수록 일린저의 혀가 더욱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추잡한 소리를 내었다. 번들거리는 일린저의 입술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자꾸만 그의 턱에 묻는 무언가도. 일린저는 침대 머리맡을 잡고 기어가려고 애쓰는 나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혀는 무참하게 놀리면서 말이다.

“하…… 좋아, 아…….”

일린저는 입술을 떼는 중간중간 좋다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눈을 감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제 성기를 한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머지 손으로는 내 허리를 붙들고, 그의 손안에 쥔 성기는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음부를 곳곳마다 맛보며, 제 손으로 성욕을 푸는 중이었다. 혀로 날름거리며 먹는 그의 입술이 반짝거릴 때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린저는 내가 눈을 감고 회피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종종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마다 자신이 핥고 있는 음부에 손가락을 후벼 넣었다. 그러면 놀란 내가 저를 쳐다보는 게 좋은지, 웃으며 손가락을 휘휘 돌리는 것이다.

“여기 봐야지.”

내가 수음하는 저를 몰래 훔쳐본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일린저는 달아오른 뺨과 핏줄이 보일 정도로 우직하게 선 성기, 그걸 훔쳐본 나를 제 머릿속에서 어떻게 굴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혀는 내 음부에 두고 아주 열심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결국 수탈당하는 것은 나였다. 일린저의 입술에 음부는 먹혔고, 그마저도 저를 보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속살을 꾹꾹 눌렀다. 이따금 그것으로 더 많은 물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창피한 내가 그만하라고 외치면, 그는 종아리에 입술을 묻고 놀리듯이 문질렀다. 내 음부에서 나온 물이 보이냐는 것처럼.

“아, 하…… 아, 이야라, 이야라…….”

그의 손이 조금 빨라졌다. 일린저는 아예 내 음부에 대고 말을 하듯이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난잡해지고 있을 때 즈음, 일린저의 허리가 무언가를 원하듯이 앞뒤로 움직였다. 결국엔 그의 손에 파정한 성기가 흰 정액을 쏘아 대고, 일린저의 손에 그것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일린저는 파정하는 순간만큼은 눈을 감고, 느린 발음으로 내 이름을 혀에서 굴렸다.

“아……!”

더는 못 참겠는 모양이다. 일린저는 파정하는 순간에 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내 몸 위로 쏟아진다고 느꼈을 때 즈음, 아까 내 음부 위에서 움직이기만 하던 성기가 위용을 갖추고 밑에 가 있었다. 맞닿은 성기는 내 눈치를 보지 않는 것처럼 음부에 살짝 담가지다가, 내가 그에게 말을 건네려는 순간에 훅 들이찼다.

“아!”

“아…….”

나는 비명에, 일린저는 한숨에 가까웠다. 일린저는 제 성기를 우악스럽게 박아 넣었다. 한걸음, 한걸음 들어올 때마다 일린저는 무너졌다.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서 “미치겠다…….” 한 마디를 흘렸다. 부드러워, 어떻게 사람이 이렇지. 이따위 말을 내 귀에 흘려 넣은 다음에 무작정 입술부터 겹쳤다. 내가 고통에 찬 신음조차 뱉을 수 없도록.

일린저의 허리가 앞뒤로 움직였다. 부드럽게, 그러나 천천히. 여전히 그는 콧노래와 비슷한 숨을 내쉬며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배려 많은 상체에 비해 아래쪽은 어찌나 욕심이 많은지. 내가 힘들다며 그의 팔뚝을 만지작거려도, 그의 입술만이 나를 달래려 할 뿐, 무식한 하체는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 바빴다.

“하…… 읏.”

“응…… 나도 좋아…….”

이런 말이나 지껄이며 좋아서 죽는 것이다. 일린저는 아까의 붉어진 뺨보다 더 붉은 귀를 가지고서,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프다고 그를 밀어내면 도리어 내가 미안할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사랑스럽다는 말을 연신 뱉으며, 내 입이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붙이는데. 당장 꺼지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좋아, 좋아, 이야라…….”

일린저는 아예 나와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푹 찔러 넣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저렇게 말을 계속해서 뱉고는, 다시 빠져나가고, 다시 들어오고. 그다음에 눈을 감고서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일린저는 첫 경험인 게 분명한 서투른 몸짓으로 내 음부에 성기를 짓쳐 박았다. 그러나 내 반응을 살피는 눈은 전혀 첫 경험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좋아할 만한 자세를 찾듯이, 내가 아파하면 멈추고, 내가 신음을 내면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곤 했다.

“너도 좋지…… 응, 알아……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 봐.”

“아니, 하, 야, 아니…… 응!”

그러나 그의 배려는 점차 옅어져 갔다. 내 반응이고 나발이고. 일린저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한 듯, 나를 아예 제 품에 가둔 다음 멋대로 쑤셔 박고 난리였다. 그 거친 움직임에 동조하듯 젖어 가는 음부가 어이가 없었다. 일린저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면서 좋아 죽으려고 했다.

“흐, 아!”

느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린저의 팔에 갇혀, 쏟아지는 쾌락을 감내하기만 하다가 보니 요령이 생기고 말았다. 그의 동작과 맞추어 둔부를 움직이면 은근한 쾌락이 피어오른다는 것과 일린저가 좋아서 신음을 보낸다는 것. 학습하는 것처럼 나도 허리를 어설프게 움직이다가 보니, 우리는 몇 해 묵은 연인처럼 배를 맞춰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억울한 학습이었다.

“아, 여기를?”

“아니…… 그, 아…… 옆에, 아흐!”

나도 일린저처럼 좋아서 한 번 저런 표정이 되어 보고 싶었다. 일린저가 찌르면 나도 조금은 찌릿한 곳에 은근히 둔부를 움직이니 일린저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내게 물으며, 나는 답하며, 우리는 어설픈 동작에서 거친 동작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반 이상이 일린저의 흥분 탓이었다.

“나를, 애타게, 하고…… 아…….”

내가 좋다고 한 곳을 모르는 듯,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일린저는 입술을 뜯어갈 듯이 마구 물다가, 내 목에 진하게 들러붙었다. 필히 자국을 남기는 혀의 놀림이었다. 그 상태로 무참히 박혔다. 눈물이 고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일린저의 거친 허리 짓에 나는 밀려나고, 그는 나를 끌어 내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박혔다가, 내려오면서 쑤욱 뱉었다가. 울면서 그에게 매달린 그 순간이었다.

“아, 아아!”

“아…… 하아…….”

일린저가 내 어깨에 숨을 뱉은 그 순간. 그가 내 위에서 잔뜩 찌푸린 그 순간. 나는 하얀 별을 보았고, 일린저는 까만 어둠에 잠겼다. 우리는 서로의 세상에서 잠시 헤매다가, 잔뜩 싸지른 서로의 밑을 보면서 차츰 현실을 알아 갔다.

“멍청아!”

다리가 달달 떨려서, 고작 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술을 마시고 끝낸 첫 경험의 끝에서 일린저는 기쁜 듯이 나를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

찝찝한 기분에 당장 그의 정액을 빼내려고 손을 뻗은 순간, 일린저는 홀린 듯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를 째려보았으나, 일린저는 맛이 간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해 줄게.”

“안 돼.”

“해 줄래.”

“안…… 흐, 아!”

일린저의 손끝이 내 음부로 파고들었다. 그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어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온 것처럼 부드럽게 정액을 긁어내다가, 장난기가 돋은 듯 다시 깊숙한 안으로 살금살금 손가락을 옮겼다.

“빼, 당장.”

일린저가 그 말을 들었을 리 없었다. 아니, 들어줄 리 없었다. 내 첫 경험은 그로써 욕설과 술 냄새와 나를 가지고 노는 일린저. 그 셋밖에 기억나지 않는 밤이 되어 버렸다.

[다음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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