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열아홉의 날
장작불의 냄새, 추위의 아릿함을 태운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즈음. 하녀들은 짜둔 것처럼 분주했다. 봄부터 여름까지의 옷가지, 책들을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드리하임에서 쓸 만큼의 금화를 챙겨 주시고, 할아버지는 직접 만든 간식거리를 마차에 넣어 주셨다.
3학년 과정부터는 유급이 많다고 들었다. 1학년과 2학년 때는 <빛의 활용>에 대해 배웠다면, 이제는 <빛의 제작> 단계로 올라간다. 재능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거기서부터 드러난다고 배웠다. 할아버지는 예레카가 돼야 했기 때문에 기를 쓰고 통과했다고 들었다. 위테르발도 가문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유급한 예레카는 없었기 때문에.
“내가 최초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하도 겁을 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콧방귀 뀌었고, 할아버지도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어른들은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양어깨에 부담을 얹고 떠나는 길.
“둘이 붙여 놓으니까 그림이 따로 없네. 응?”
산도르아는 시집을 읽고 있고, 에드리트는 그 옆자리에 있었다. 나는 반대편 창가에, 중간에 합류하게 된 에이버넷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에드리트는 심심한지 에이버넷에게 말을 걸어왔다.
“3학년 과정으로 가면 아마 둘 다 죽을 맛일 거다. 난 작년에 겨우 유급을 면했어. 빛을 가지고 무얼 제작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빛의 힘을 녹여서 만든 상품들이 있었다. 특수한 만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물건을 만드는 장인은 떼돈을 버는 셈이었다. 예레카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빛을 다루는 것에 무리가 없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압박을 주지 않았지만, 벽의 선택을 받은 내가 잘했으면 싶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이야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몰라.”
학 학년 위라고 에드리트는 지나치게 까불었다. 작년에 얼굴도 못 볼 정도로 발발거리며 공부를 했던 걸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에드리트는 쳇, 하며 에이버넷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에이버넷은 귀찮은 기색 없이 에드리트를 상대해 줬다. 에드리트의 수다는 마음씨 좋은 산도르아도 못 이길 때가 있었는데. 에이버넷의 인내심은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였다.
“아, 그리고. 이제 학기 중에는 셉시스로 내려갈 수 없나 봐.”
그 말에 내 눈이 떠졌다. 셉시스의 거리로 데이트 나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드리하임에서만 놀기가 지겹다면서. 덕분에 산도르아도 밀회를 즐길 수가 있지 않았던가.
산도르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다만 손에 들린 시집은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조치를 취하는 이유가 뭘까.”
“누가 항의라도 넣었나 보지, 뭐.”
에이버넷의 물음에 답하는 에드리트를 보며, 나는 이게 에드리트의 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항의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에드리트는 남몰래 윙크를 보냈다. 잘했으니 칭찬해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모르겠다. 처음에는 산도르아를 막아서고, 가능한 떼어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도르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산도르아의 눈이, 탐스러울 만큼 사랑을 담고 있던 눈이. 나는 자꾸 그게 마음에 걸렸다.
산도르아는 이미 책을 덮은 후였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산도르아도 그러고 보니 이번에 가면 약혼자를 만나겠네.”
에이버넷은 처음 듣는 소식에 상체를 곧게 폈다.
“좋은 소식이네. 상대가 누구야?”
“크로슨. 졸업반인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에드리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산도르아의 허리를 찔렀다.
“학원에서 데이트 같은 것도 많이 해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산도르아는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에드리트에게 돌렸다. 일견 싸늘하다고 느낄 법한 눈이었다.
“에드리트.”
“응.”
“조용히 갈 순 없겠니.”
에드리트는 구석에 몰린 쥐처럼 조용해졌고, 덩달아 우리의 입도 뻥긋 못하게 생겼다. 그만큼 산도르아는 이 약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산도르아는 성을 떠나올 때도 할아버지에게 형식적인 인사만을 했을 뿐이었다. 과연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약혼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에드리트는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었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붙들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산도르아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구름 계단을 오르려던 그때, 불길한 예감 중에 하나가 들어맞았다. 토끼의 손을 잡고 떠오르려는 차였다. 산도르아가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왔다며 이탈한 것이었다. 에드리트나 내가 말릴 새도 없었다. 에이버넷은 어리둥절해 보였고, 사정을 아는 우리 둘만 표정이 굳었다.
“많이 중요한 물건인가 봐.”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구름 계단은 대기자가 길었다. 계속 서서 산도르아를 기다릴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면서 이드리하임 상점가를 걷고 있을 때였다. 에드리트는 산도르아가 걸리는지 찾으러 떠났고, 어쩌다 보니 나와 에이버넷 둘만 남았다. 에이버넷은 내 짐을 들어 주겠다고 성화였다.
“겨우 두 개야.”
“괜찮아. 내가 들어줄게.”
기숙사로 가는 길이었다. 내 얼굴을 아는 몇몇이 곁눈질하며 슬쩍슬쩍 쳐다봤다. 아마 에드리트가 말한 대로 이미 소문이 파다할지도 모른다. 소문이 아니더라도 서부의 예레카, 바예레카 가문의 남녀가 붙어 있다면 뻔한 거 아니겠나.
약혼, 애인에 대한 얘깃거리가 뒷말 나오기 좋았다. 실제로 보지 않았는데도 말을 얹는 것은 기본이요, 전해지면서 크기는 점차 부푸는 터라, 막상 당사자가 들었을 때 자기 이야기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내가 들게.”
괜히 그들에게 토실한 먹잇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에이버넷은 손을 물리면서도 옆에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드리하임의 상점가를 지나칠 때였다. 털옷을 껴입은 이드리하임의 주민들이 가게 앞으로 나와 환영했다. 손을 흔드는 이도 있었고, 신통한 맛이라며 시식회를 열기도 했다.
유혹에 약한 신입생들은 미끼를 덥석덥석 물었다. 나만 해도 저런 것에 눈길이 가곤 했으니, 한심하다며 비웃을 주제는 아니었다. 허술한 신입생들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고작해야 몇 살 차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추억에 취해 있을 때였다. 계단에 첫발을 올린 순간, 열 칸 위로 아는 얼굴이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지켜보던 것처럼. 그는 시선을 섞었음에도 당황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일린저였다. 안 본 사이에 키가 자랐다. 그는 싸늘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나였다.
“이야라.”
걸음이 늦어지는 것에 의문을 품은 에이버넷이 내 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도 위를 향했다. 일린저는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먼저 들어가 볼게. 짐은 들어주지 않아도 돼.”
“그래도…….”
나는 말이 길어지기 전에 짐을 어깨에 들추어 멨다. 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여자 기숙사였다. 일린저나 에이버넷이나 따라올 수 없을 터였다.
계단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오르고 있는데, 저 끝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쌍둥이 폰과 린이었다. 다행이다 싶어서 빨리 오르던 그때였다. 뒤로 몸이 훅 쏠려 갔다. 낚시 고리에 내 옷깃을 걸어, 위로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계단에서 구르게 생겼다. 눈을 질끈 감은 차였다.
뎅뎅 종이 울리고, 비누 거품의 향기가 아련히 풍겼다. 다부진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딱딱한 무언가에 뒷머리가 부딪혔다. 넘어가던 몸은 계단에 안정적으로 올라갔다. 살짝 들린 듯한 느낌에 눈을 떠 보았다. 붉은 입술이, 푸른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웃거나 떠드는 소리는 덤이었다. 일린저 모르온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인사도 안 하고 가?”
이 몹쓸 녀석이 빛을 이용해 잡아당긴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구하는 척하며 놀리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일린저는 순순히 팔을 놓는 듯하다가, 짐 가방 든 손을 휘어잡았다.
“손가락 부러졌나 했는데. 열 개가 다 멀쩡하잖아.”
주변의 시선은 멈추어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일린저를 밀어냈다. 대피하듯 계단을 한 칸 위로 올라갔다.
“그만 다가와.”
“왜?”
더 이상의 대화는 나의 손해였다. 짐 가방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위로 뛰어올라 갔다. 반면 뒤에서 추적하는 그의 발소리는 천천했다. 내가 느리게 올라가면 저도 느리고, 내가 두세 칸씩 올라가면 저도 그랬다. 그런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내가 호통을 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린저는 무시가 답이었다. 올라오는 것을 보았는지 폰과 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다가도, 내 뒤에 쫓아오는 녀석 때문인지 머뭇머뭇했다.
기숙사 앞에 다다랐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찼다. 폰과 린은 ‘천천히 와!’ 했지만 그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야라.”
“천천히 오라니까.”
인사는 생략하자는 뜻으로 두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낑낑거리며 기숙사 쪽으로 끌었다. 폰과 린은 벙벙한 표정으로 끌려오고 있는데. 나의 다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뒤쪽을 곁눈으로 보았다.
“이야라. 저기.”
“너한테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나와 뒤편을 힐끔거렸다.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확인차 돌아본 게 실수였다.
일린저는 삐딱하게 서서 한쪽 팔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다들 신기해서 눈이 갈 만했다. 역시나 보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었다. 내가 표정을 구기자, 일린저는 몸이 단 얼굴이었다.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인가?”
폰이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째려보자 입을 앙다물기는 했지만, 쌍둥이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나는 뒤에서 일어나는 난리를 모르는 척, 두 사람의 어깨를 잡고 떠나갔다. 기숙사 안에서도 나에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내 표정이 썩어가고 있는 것이 보일 텐데 징그럽게도 물어온다.
“아니야.”
만인의 연인 납시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한 번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몇 번씩이나 되묻는 이들도 있었다. 첫날부터 이 난리다. 일린저와 거리를 둔다는 것에서, 아예 생판 남처럼 대하기로 마음을 바꾸어먹었다.
* * *
확실히 열아홉은 달랐다. 지난봄부터 심상치가 않더니만 여기저기서 약혼 소식에, 서로 애인 소식에. 듣도 보도 못한 기막힌 얘기들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이번에도 좋은 성적을 얻고자 야심 차게 계획서를 작성한 참이었다. 웬일로 졸업에 가까워진 나타리아가 나서서 교수님을 추천해 준 덕에 나와 쌍둥이는 한결 수고로움을 덜었다. 물론 끔찍하게도 <빛들의 목소리를 해석>이라는 과목에 잘못 걸려들었지만. 이 정도면 준수한 계획서라고 볼 수 있었다.
산도르아는 힘이 쪽 빠져, 말이 없었다. 푼수데기인 폰과 린이 걱정할 정도였으니. 폰이 닭 날개를 산도르아의 접시에 올려 주며 장난을 걸어 봤지만, 산도르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결국 내가 먼저 산도르아에게 다가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3학년 과정에서는 <제작>과 <성향 테스트>가 중점이었다. 지난번에 아슬아슬한 성적을 받은 산도르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교수보다 과제를 들쑥날쑥 내준다는 교수를 택했다. 덕분에 시간표가 많이 어긋났다. 나는 식당가를 나서는 산도르아의 팔뚝을 붙들었다.
“산도르아.”
산도르아가 붙들린 팔을 보고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천천히 산도르아의 팔을 놓고 걷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요즘 별일 없어?”
내가 묻기에도 싱거운 안부였다. 조금 떨어져 있는 기숙사이긴 하지만 산도르아와 오가며 마주친 적도 꽤 됐다. 그동안은 아무 말을 안 하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니 산도르아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산도르아 픽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별일 없지.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이야라?”
역시 돌려 말하는 것은 내가 젬병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요건만 간단히, 능청스레 캐물을 수 없었다. 네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할까. 목구멍까지 오다가 걸렸다. 광장에서 본 산도르아의 행복한 얼굴, 식탁 밑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산도르아의 손. 나는 괜히 산도르아의 등짝을 쳤다.
“너.”
“시험 못 보면 안 되니까. 과제 열심히 하라고.”
“응?”
산도르아는 걸음을 늦추더니, 굉장히 달뜬 얼굴로 웃었다. 산도르아가 저렇게 웃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나 때문에 웃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밝은 웃음을 보며,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이야라.”
우리는 말을 아꼈다. 열아홉이 되고 느낀 게 있다면, 곧 성인식을 앞둔 나이라 그런지 자신의 앞날을 점쳐보고, 성적에 신경을 쓰는 이들이 많았다. 철없는 선배처럼 느껴졌던 나타리아도 부쩍 어른의 흉내를 낸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다들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넣을지, 뺄지를 결정하면서.
나는 산도르아와 복도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나는 오른쪽이고, 산도르아는 왼쪽이었다. 내가 위로가 되었을까. 산도르아의 분위기는 음울함이 걷히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결국 산도르아의 선택을 돌릴 수 없을지 있을지, 그건 내 영역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은 그런 나이니까.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면 칼부터 빼 들 나이였다.
* * *
3학년 과정은 이를테면 선택의 과정이었다. 빛은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뉠 수 있었다. 불이나 물로 바꾸어서 상대와 대련하는 빛으로 쓰거나, 제작이나 치료하는 용도로 쓰이거나.
사람은 각기 재능을 드러내는 분야가 달라, 3학년 때 이를 확실히 알아 둔 뒤에 4년 과정부터는 자신이 선택한 분야만 파고든다. 그리고 5년 과정으로 갈지, 말지를 선택한다. 5년 과정은 필수가 아니며, 대개 증명이 필요한 사람만이 진학했다. 예레카, 바예레카, 혹은 왕족, 혹은 가문의 후계자거나.
보통 5년 과정에서는 졸업시험을 준비하느라 서로 대화할 시간도 없다고 했다. 학원 내에서도 5년 과정을 준비하는 이들을 잘 볼 수 없었는데, 그것은 건물이 따로 분리가 되어 있을뿐더러,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자들과 성인식을 치른 자들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한 번에 졸업시험을 통과하는 자들은 드물며, 예레카나 바예레카의 후계들은 최소 2년 안에 졸업장을 따낸다고 들었다. 이런. 내가 학원의 역사를 새로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4학년 과정은 <대련>과 <제작>으로 나뉜다. 빛으로 무언가를 제작할 줄 아는 사람은 4년 과정이 되었을 때 한 단계 높은 빛 다루기인 <치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제작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치료>에 가서는 상당히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했다.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졸업도 힘들다는 소리였다.
물론 빛을 이용해 <치료>도 하고 <대련>도 잘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인재이며,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수준이라고 했다. 분명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인데.
“잘했어요, 모르온.”
<제작>을 맡은 레이스 교수님은 동그란 얼굴에 살집 없이 배리배리한 몸매를 지녔고, 곁에 가면 달달한 사탕수수 냄새가 나는 분이었다. 수업에 대한 열정은 가히 학원 최고이며, 중요한 것은 낙오자까지 끌어안는 아량이었다.
<빛의 제작>에서 죽을 쒔다는 나타리아가 적극 추천한 교수님이었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나 또한 <제작> 쪽은 완전히 형편없었다.
“다른 이들도 모르온을 지켜보도록 해요. 저게 바로 내가 말한 기초 단계니까.”
재수가 없으려니. 사기를 치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겹치는 과목이 많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저놈은 그 살면서 몇 번 보기 힘들다던 일을 해내고 있었다. 나무토막에 빛을 담아서, 상상력을 발휘해 흙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이게 기초였다. 그러나 기초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쉽지 않았다.
일린저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내 자리 바로 뒷줄이었다. 그는 재수 없는 미소를 만면에 띠고는, 딱딱한 나무토막을 흙처럼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재미 삼아 하늘 위로 높이 던지고, 다시 제 손에 받고서는 뒷자리에 넘기기도 한다. 일린저의 장난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교수님은 한시라도 빨리 모두가 해내기를 바랐다.
“빛의 축제에서 내가 말한 목표 금액을 채워 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알죠? 이렇게. 내가 마치 나무가 아니라 흙을 만진다는 느낌으로, 부드럽게 주무르면서.”
1년 과정이나 2년 과정까지는 학원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가할 수 없었다. 묘하게 아이들이 들뜬 것도, 애인 사귀기에 목매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축제는 3학년 과정과 4학년 과정, 그리고 이따금 5학년 과정에서 즐기러 내려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일단 축제는 학원 사람이 아닌 외부인들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넓디넓은 공원을 개조해서 축제 장소로 사용했다.
그러나 3학년 과정은 축제에서 애달플 수밖에 없었다. 축제임과 동시에 과제였다. <제작>의 시험은 축제 내에서 치러졌다. 빛으로 만든 신기한 물품을 얼마나 팔아 올 수 있는지. 수익이 높을수록, 판매 실적이 좋을수록 점수가 오르는 구조였다.
부정행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인이 구매한 것은 제외, 오로지 학원 학생들이 구매한 것만 점수에 반영할 수 있었다. 교수님이 꼼꼼히 체크하기 때문에 꼼수라는 것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제작>에 능력이 없어도 4학년 과정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평균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나의 나무토막은 그 수업이 끝나는 내내 딱딱한 나무토막일 뿐이었다.
“이야라.”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에이버넷은 강물처럼 흐르는 나무토막을 보여 줬다. 지금 누구를 놀리는 건가. 터득 못 하고 우는 사람 앞에서 자랑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에이버넷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주겠다는 듯, 내 옆자리로 이동하려고 했다.
“두 사람 뭐야? 응?”
폰은 일부러 말꼬리를 음흉하게 올리며 물었고, 에이버넷은 귓가를 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딱딱한 나무토막이 짜증 난 상태라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나무토막을 분해할 것처럼 쳐들자, 에이버넷은‘워, 안 돼.’하며 뺏어 갔다.
“너는 빛으로 대련하는 것에 더 두각을 나타내서 그래, 이야라.”
“그럼 뭐해. 이번 시험은 떨어질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게.”
사실 물건을 만드는 것도 기막힐 노릇인데, 축제에서 팔려야 한다니. 버거운 일이었다. 지금부터 미리 생각해 두라는 교수의 말에는 울컥 화가 치밀 정도였다. 나무토막을 가져다가 팔 수도 없지 않은가. 기초부터 막히는데 내가 팔 물건들이야 뻔했다. 벌써 재능이 있는 이들은 나무토막을 둥글게 굴려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나와 몇몇은 딱딱한 나무토막만 들고 앉아 있었다.
“괜찮아. 내가 도와…….”
그때 설명하던 에이버넷의 상체가 위쪽으로 들렸다. 높이가 높지 않지만, 추락할 경우 엉덩이가 쓰라릴 정도는 되었다. 에이버넷의 몸은 들어 올려졌다가 잠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에이버넷이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범인을 알 것 같았다. 몸을 돌리자, 얼굴에 웃음을 거둔 일린저가 건너보고 있었다.
“너지?”
일린저는 자신을 가리킨 다음 ‘내가?’ 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부여잡더니 책상에 엎어진다. 나는 짜증 났으니 더 보태지 말라며, 그에게 경고를 넣었다.
에이버넷은‘난 괜찮아, 이야라.’했다. 다시 마음을 진정하고 들으려는 순간이었다. 에이버넷이 제작은 상상력이 중요한 분야라며, 이 나무토막을 엄지로 누른다는 생각을 하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따라 하려고 한 순간, 에이버넷의 머리가 아래로 떨구어지고, 함부로 책상에 짓눌려졌다. 교수님은 잠시 출타한 상황이었다.
“잠, 깐!”
에이버넷은 숨쉬기가 곤란한 것처럼 책상을 쳤다. 도저히 눈 뜨고 못 봐주겠다. 냅다 의자를 차고 일어나 뒷자리로 향했다.
“안 멈춰?”
여기까지 왔는데도 일린저는 시치미였다. 빛은 주변에 없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주위를 휙휙 저었다. 일린저 주변에 앉은 아이들이 그를 두둔하듯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교수님께 말하지 그래.”
“위테르발도. 이럴 시간 있어? 빨리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려야지. 이러다가 수업이 다 끝나겠어!”
키득거리는 무리를 보고서 주먹을 쥐자, 그제야 팔짱을 끼고 방관하던 일린저가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나는 나무토막으로 일린저의 머리를 후려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일린저는 갈기든, 던지든, 짙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위드먼과 나란히 앉아?”
일린저는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질문의 답은 내가 아닌 그의 옆자리에서 튀어나왔다. 마버드가‘에이버넷과 사귄다던데.’했다. 일린저는 그 말에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그는 남이 아닌, 내게 답을 구하고 있었다. 내 혀로 마음껏 지껄여보라는 눈이었다. 나는 나무토막을 쥔 손의 힘을 풀었다. 일린저와 똑같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들었지? 무슨 사이인지.”
일린저는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진짜?”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린저가 빨랐다.
“왜 거짓말을 해.”
일린저의 발밑으로 미소, 여유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남은 게 없는 그는 인정 없이 차가웠다. 주변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말을 걸었지만 그의 표정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주변 무리는 말을 걸다가 말고 손가락만 꼼지락꼼지락 댔다. 나는 일린저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까처럼 웃어보지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앞에서 에이버넷이 나를 불렀다.
“이야라.”
나는 그에 화답하듯 찬찬히 걸음 했다.
“이야라.”
내가 뒤로 돌자마자 일린저가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듣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마침 출타한 교수님이 돌아왔을 때였다.
“오늘 못 했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요. 천천히 하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니까요.”
희망찬 말에도 나의 진도는 진전이 없었다. 나무토막은 연습용으로 줄 테니 잘 들고 다니라며, 연습이 생명이라고 했다. 기숙사에 들어가 나타리아든 누구든 붙들고 얘기를 해 볼 작정이었다.
수업이 끝났다. 교수님이 책을 챙겨서 나간 뒤, 하나둘씩 짐을 챙겨서 다음 수업으로 이동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에이버넷과는 여기서부터 수업이 갈라지기 때문에 나와 폰이 그만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분위기가 땅 밑으로 치받는 느낌이었다. 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 걸어온 일린저가 에이버넷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일린저가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자, 에이버넷은 벌을 받는 학생 같아 보였다. 나는 책을 챙겨 나가려다가 말고 일린저를 지켜보았다.
“있잖아, 에이버넷.”
에이버넷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일린저를 바라보았다.
“네 여자 친구하고 내가 춤을 춰도 될까?”
흥미진진한 광경을 구경하던 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어떤 이들은 여기가 파티라도 되는 것처럼 손뼉을 치고, 일린저의 친구라는 것들은 휘파람을 불었다.
열아홉이 되자 애인을 만드는 이유. 아마도 축제 때문일 것이다. 애인이 없는 사람들은 파트너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축제에는 4년 과정 선배들의 연극이 끝나고서 서로의 파트너와 춤을 추는 시간이 있었다. 모두가 이 축제에서 고대하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하니 일린저의 말은, 나를 자신의 파트너로 데려가겠다는 말이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에이버넷에게 물어본다니.
이렇게 보는 이들이 많은 곳에서 주목을 받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사교성이 밝은 게 아니라, 저 녀석은 관심에 목마른 녀석이었다. 한때는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무언가. 생각할수록 아니다. 나는 저 녀석의 유희 거리에 불과했다.
“일린저 모르온.”
에이버넷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내가 대답을 하자 좌중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나무토막을 쥐고서 일린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걸 에이버넷한테 묻는 걸 보니, 내가 아닌 에이버넷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
주변의 정적이 깔렸다. 일린저는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난 네 사랑을 응원해.”
내가 주먹에 쥔 나무토막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관중을 지나쳐 나가자, 뒤에서 야유 아닌 야유가 쏟아졌다.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짐작이 갔다. 빠르게 복도로 뛰듯이 나갔다. 그러자 나를 따라오는 발도 뛰듯이 온다. 나는 머리 풀고 뛰었다. 교수가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무작정 뛰어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달려갔다.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달려오는 나, 내 뒤에 달려오는 것, 번갈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올해는 무사히 보내는 것을 포기해야 할 성싶었다. 내가 멈추지 않고 달리자, 뒤에서 따라오는 목소리가 ‘하하!’ 웃어젖혔다. 소름이 끼쳤다.
학생이 거의 없는 복도 앞이었다. 교사들의 지름길 정도로만 쓰이는 그곳에 멈추었다. 내가 멈추어 서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도 느긋하게 멈추었다.
뒤로 돌아보니 예상한 인물이 있었다. 내가 자신을 꾀어낸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일린저가 타이를 풀어헤치며 셔츠를 팔락거렸다. 더워, 하며 웃었다. 나는 딱딱한 나무토막을 들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달렸더니 배가 고프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코앞까지 걸었다. 그는 다가오는 얼굴이 싸늘하든 어쨌든, 두 팔을 벌리며 나를 환영했다.
“저녁에 나랑 나가지 않을래?”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내가 갖고픈 걸 사 주고 싶다는 둥, 미친 소리는 씹어 삼켰다. 나는 일린저의 어깨에 딱딱한 나무토막을 올려 뒀다. 그걸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일린저.”
“왜.”
“날 좋아하기라도 해?”
일린저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고민하듯 턱을 만지다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한순간에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이대로 두면 큰 화가 되어서 굴러오리란 것을 알았다. 피하면 끝까지 쫓아오는 것 보아라. 당당하게 눈을 보고 밀어내는 게 나을 녀석이었다.
“말해 봐.”
일린저는 갑자기 제 팔목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을 팔목으로 가리고, 긴 팔로 표정을 가리는 자세였다. 확실히 담판을 지으려는 내 눈앞에서 일린저는 뺨이 붉어졌다.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땅에 박혀 있었다. 변하는 그의 모습에 넋을 놓고 말았다. 나는 여차하면 내려치려던 나무토막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그의 어깨에 얹은 손도 떼었다.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면 부끄럽잖아…….”
어울리지도 않았다. 일린저는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린저는 서서히 팔을 내렸다. 그의 불그스름한 뺨은 아직 그대로였다.
“이 밑에 레이플 스튜를 맛있게 하는 곳이 있다는데.”
일린저는 검지로 내 손목을 툭 밀었다.
“내가 사 줄게.”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일린저는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내 주먹을 커다란 손에 가두고 만지작거렸다. 내가 쥐고 있는 나무토막을 빼내고, 이렇게 쥐면 상처가 난다면서 입바람을 호호 불었다. 나는 얼이 빠졌다. 하나도 내 예상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잠깐만.”
나는 그가 만지작거리는 손을 어렵사리 빼냈다. 일린저는 아쉽다는 듯이 내 손가락을 떠나보냈다.
“일린저. 난 널 좋아하지 않아.”
“알아.”
일린저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자신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아까 내가 손을 얹은 그 부위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무능하게 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반격에 박차를 가했다.
“들었는지 모르지만, 에이버넷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에이버넷의 이름이 나오자 일린저의 낯은 다시 침잠했다. 푸른 눈동자는 시리고 건조했다.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칼에 벼린 듯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까 그거, 날 골리려고 한 말인 거 알아.”
“내 말은.”
“아, 그래!”
일린저는 눈알을 굴려, 광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내려다보았다.
“연인이신 위드먼 군께서 나랑 한 번 나가지도 못하게 해? 아닐 텐데.”
속아 줄 테니 그만하라는 투였다. 일린저는 표정을 갑작스레 풀고서, 부드럽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식사 한번 같이해 주는 거, 어렵지도 않잖아.”
일린저는 회유하듯 말했다. 잡고 있는 내 손가락 마디를 부드러이 밀며 문질렀다. 간질간질한 떨림이 손목까지 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당겨 빼냈다. 안 된다. 하마터면 저놈의 분위기에 같이 휩쓸릴 뻔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나는 일린저를 그의 왼편에 섰다.
“나는 널 좋아하지 않고, 네 그런 관심이 불쾌하다는 소리야.”
일린저는 내 얘기에 귀 기울였다.
“그런 말 말고 다른 건 없어?”
일린저는 찬 서리 같은 얼굴로 내 입술만 직시하고 있었다. 그 눈이 꼭 더 해, 더 해, 내게 주문을 거는 것 같았다. 목 끝까지 불편한 감정이 치받았다.
더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싶어서 그의 어깨를 지나쳤다. 또 쫓아오면 어쩌지 싶어서 빠르게 걸었는데,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없었다. 이건 이거대로 이상했다. 뒤가 근질근질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가 패배하여 애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속되게 웃는 얼굴이 아닌, 그의 상처 받거나 얼이 나간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의 기분은 곤두박질하는 중이었다.
일린저도 다음 수업이 있을 것이다. 그와 겹치는 수업이 한두 개가 아닌데, 저렇게 서서 여유 부릴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뒤를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일린저를 보게 된다면, 달려가서 끌고 올 것 같았다.
그때 한번 돌아볼 것을 그랬나, 싶은 것은 오후가 돼서였다. 일린저는 모든 수업에 불참했다. 어디가 아픈가 보다고, 들르는 수업의 교수마다 걱정할 정도였다.
한번 돌아볼 것을 그랬나. 자꾸 그 생각이 들어 아까 그곳에 잠시 들렀지만.
일린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 공금 by Jira
* * *
다음날 일린저는 정상적으로 수업에 나왔다. 가벼운 감기였다는 그의 말을 훔쳐 듣고서 어찌나 안심을 했는지. 잠 못 들 정도로 걱정한 내가 바보였다. 어쨌든 일린저와는 어제부로 끝이었다. 최악의 결말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다행이라고.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일린저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항상 내 주위를 맴돌던 그가 나와 멀찍이 떨어져 앉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벌써 그의 관심이 식은 것이냐면서, 누군가 내 등 뒤를 지나갈 때 노골적으로 말했다. 폰과 린은 누군지 이름을 기억해 뒀다고 했지만 나는 별 상관이 없었다. 며칠간의 평화였다.
“일린저랑 너 말이야.”
“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니면 싸운 거니?”
오랜만에 산도르아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굉장히 유쾌한 것처럼 말했다.
“뭘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음.”
산도르아는 스푼을 들고 스튜를 휘적거리다가 내게 상체를 기울였다.
“아직 널 바라보고 있어서 묻는 이야기였어.”
일린저는 내 등 뒤에 앉아 있고, 산도르아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산도르아의 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지만, 이 복잡한 식당에서 한두 번 시선이 섞이는 것 정도는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쪽에 잠깐 시선을 둘 일이 생겼나 보지.”
“글쎄.”
나는 자꾸만 나와 엮으려는 산도르아를 보다가 우연히 팔목에 난 상처를 보았다. 내 눈이 그곳으로 향한 것을 안 산도르아가 다급하게 셔츠의 소매를 내렸다.
“어디서 다친 건데.”
“넘어졌어.”
“넘어져?”
걸음걸이가 귀부인 뺨치는 산도르아가. 달리는 것도 싫어해,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허우적 뛰는 애가 어디서 다쳤나 싶었다. 나는 설마 싶어서 산도르아에게 물었다.
“대련 연습하다가 다친 건 아니지.”
빛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대련> 수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서로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금지가 돼도, 겨루다가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나만 해도 엊그제 파도를 만들어 상대의 몸을 흠뻑 적셔 버리지 않았나. 교수님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건만. 상대방은 차라리 다치는 게 나았다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선 뛰쳐나갔다. 그 덕분에 실력이 얼추 비슷한 사람으로 짝이 바뀌었는데,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일린저 모르온에게 걸렸지 무언가.
“내가 조심성이 없어서 그런 거야.”
산도르아는 끝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짐승한테 물린 것처럼 보이는데.”
“짐승은 무슨.”
산도르아의 고집은 꺾기 힘들었다. 그게 아닌 건 쟤도 알고, 나도 알지만 모른 척하는 수밖에. 결국 그릇이 비워질 때까지 겉도는 대화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의자를 빼는 동시에 산도르아가 내 뒤를 빤히 보는 것 아니겠나.
무심결에 시선의 자취를 따라서 뒤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린저와 눈이 마주쳤다. 일린저는 요 며칠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간의 싸늘함은 농담이었다는 듯, 그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 없이 부드러운 미소였다.
나는 낯선 기분에 빠졌다.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목을 긁으며 식탁에서 멀어졌다.
반갑다니. 미열이 오려고 그러나.
산도르아와 같이 식당가를 빠져나왔다. 빈 접시를 반납하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올린 접시 위에 깨끗하게 비워진 하얀 접시가 올려졌다. 상대의 손은 내 손등을 의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안녕.”
이런 식의 인사는 오랜만이었다. 우리가 <대련>에서 조로 묶였을 때에도, 눈이 마주쳐도 서늘하기만 할 뿐이었는데.
나는 그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일린저는 예전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대신, 순순히 어깨를 치워 길을 내줬다.
산도르아는 뒤로 물러나서 지켜보았다가, 우리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말했다.
“아직 너를 좋아하나 봐.”
“알아서 하겠지.”
더는 그와 엮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전처럼 친절한 만인의 왕자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이겼다. 그로부터 자유를, 나의 평범한 생활을 쟁취한 것이었다.
* * *
오후 9시였다. 뎅- 종소리가 울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보통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는 편에 가까웠다. 폰이나 린이 잉크를 빌리려고 하나 싶어서 문을 열었다.
“나타리아?”
그런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나타리아였다. 4학년 과정에 올라와서 성숙해졌다고는 느꼈지만, 요사이 나타리아는 딴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타리아는 나를 빤하게 바라보더니,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보여줬다. 갑작스럽게 건네지는 편지가 당황스러워 그녀를 바라봤다. 나타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나타리아의 사정은 그랬다. 나와 같은 학년에 있는 남학생 하나를 짝사랑하는 중인데, 그 애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나타리아는 졸업을 앞둔 약혼자가 있었다. 나는 ‘약혼자가 있는데 이런 것을 전해 줘도 괜찮아?’ 물었다. 나타리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애인과 약혼자는 별개지.’했다.
이 학원에 다니는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가 그것이라고 했다. 결혼할 상대는 어차피 가문에서 정해 주는 것이고, 여기서 눈 맞은 사람끼리는 졸업 후에도, 심지어 혼인 후에도 관계를 이어 나가는 편이 많다고 했다.
나타리아는 놀라는 네가 순진한 것이라며 웃고는 편지를 부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한 학년 위라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다며.
나타리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그래도 나의 수업 계획서에 잔잔한 도움을 줬기 때문이었다. 고작 편지 하나 전해 주는 게 힘든 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에이버넷을 불러, 잠시 그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알아?”
“아는 애야. 같이 고대학 수업을 들어.”
“잘됐네. 그러면 네가 이걸…….”
중간에 새가 물어간 듯 편지를 강탈당했다. 사라진 편지의 행방은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일린저!”
그는 나무에 기대앉아, 나타리아의 편지를 펼쳐서 읽는 중이었다. 중간쯤 읽다가 내가 쓴 것이 아닌 것을 알았나 보다. 죄가 없는 것처럼 에이버넷에게로 걸어왔다.
“뭐 하는 짓이야.”
“미안, 착각했나.”
속내를 감추고 있는 일린저의 미소에 나는 속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거칠게 편지를 뺏어 에이버넷에게 건넸다.
일린저는 그러든 말든,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걸어갔다.
“쟨 진짜 어디 아픈 사람 같아.”
에이버넷이 맞장구치듯이 말을 받았다.
“며칠 잠잠한 것 같았는데.”
아닌 척하던 에이버넷도 사실은 속에서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제 나타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대다수의 귀족이 애인과 혼인할 상대를 따로 둔다는. 나는 그게 보편적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에이버넷.”
“응.”
“애인과 결혼 상대를 따로 두는 게 흔한 일인가?”
에이버넷은 걸음을 멈췄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은 그걸 왜 묻느냐는 듯했다. 아까 일린저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가 그런 게 아니고. 그 편지를 부탁한 나타리아가 한 말이야.”
에이버넷은 ‘그렇구나.’ 했지만, 아까처럼 걱정 없는 미소는 아니었다.
“흔한 것은 모르지만, 없는 일은 아니야.”
그리고 에이버넷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고.”
그와 얘기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주제였다. 혼인할 수 있는 상대를 두고 할 말도 아니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에이버넷은 괜찮다며, 수업이 있다고 하고선 떠났다. 나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너를 두고 애인을 둬도 괜찮은 거냐는 물음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그게 흔한지 아닌지 확인받고 싶은 듯. 나의 실책이었다.
* * *
축제 준비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문양이 화려한 등불이 수레를 타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한적한 공원에 긴 가판대가 깔렸다. 자리는 뽑기로 정해졌으나, 목이 좋은 자리는 웃돈을 붙여 파는 사람까지 있었다.
폰과 린은 정혼자가 없어, 이번 축제에 파트너를 미리 정해 두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준비할 게 많다면서 일찍이 재단사를 불러서 천을 고르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폰과 린뿐만이 아니라 여자 기숙사에 속한 모두의 일이었다. 수십 명의 재단사가 계속해서 기숙사를 들락날락거렸다. 기숙사 복도에는 옷을 재단하고 남은 천 쪼가리가 쌓여갔다. 앞을 보지 않고 걷다가 천을 밟고 미끄러져, 앞니 두 개가 부러진 신입생도 있었다.
며칠 전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왔다. 이맘때쯤에 축제가 열리는 것을 기억하셨는지, 나와 산도르아를 위해 재단사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축제에 큰 기대가 없었다. 아직 <제작>의 기초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무토막을 팔게 될 지경이므로 드레스가 한 벌이고 두 벌이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작> 수업에서 사용하는 나무토막은 알고 보니 ‘점토’ 같은 것이었다. 빛을 이용해 온갖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기본 점토. <제작> 수업을 듣는 학생의 반 이상은 흙처럼 변형시키는 것에 성공했고, 이제는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서 물건을 제작하는 단계에 있었다. 아직까지 돌덩이처럼 굳은 내 나무토막만 빼면.
교수는 나를 보고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재능이 한쪽에만 쏠려 있는 것 같다며, 다른 학생의 판매를 도와주면 점수를 주겠다고 말했다. 나타리아가 제대로 된 교수님을 추천해 준 것 같다. 내가 흙을 기는 지렁이일지라도, 레이스 교수님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데려가려고 하셨다.
내 손에서 유의미한 물건이 탄생하기는 글렀고, 나는 폰이나 에이버넷의 상점을 도와주려고 했다. 같은 교수님의 수업의 학생을 돕는 것이 좋을 테니까.
“이야라. 이리로.”
그러나 천사 같은 레이스 교수님은 나를 일린저 모르온에게 붙여 놓았다.
일린저가 만든 제품은 상점가에 있는 것과 비슷했다. 입 안에 넣으면 혀가 꼬이는 알사탕. 나무토막을 떼어내서 색을 입힌 다음, 다양한 약초나 설탕을 첨가한 사탕이었다.
제작자의 능력에 따라서 사람이 하늘로 튀어 오를 수도 있고, 그저 달달한 사탕에 불과한 것을 만들 수도 있다고는 들었다. 일린저는 우수한 성적을 지녔으므로 이번 축제에서 인기가 많을 것을 대비해 벌써 만들기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교수님은 축제 전날에 급히 만들지 말고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일린저를 도와 사탕을 만들고 판매까지 하라는 것이었다. 일린저의 규모가 사탕 가게처럼 큰 것을 보고 내리신 결정 같았다.
지렁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굴욕을 안은 채로 수하 노릇까지 해야 했다. 일린저는 교수님의 말을 무덤덤하게 듣고서‘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죠.’ 했다. 배포가 큰 학생처럼 나를 떠맡았다. 자신이 도와주겠노라는 그의 선한 눈빛에 교수님은 이미 넘어간 눈치였다.
실상은 전혀 아니지만.
“계피는.”
“가져왔잖아.”
“아까 넣었어야 하는데. 내 말, 집중 안 하지?”
나는 수업이 끝나면 교수가 준비해 준 공방으로 갔다. 일린저의 지시대로 심부름을 하고, 포장을 하고, 긴 막대로 솥을 휘저었다. 나는 사탕을 만들면서 과제를 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린저 또한 쉬는 시간마다 과제를 쓰고, 먼저 끝내는 사람부터 노예처럼 솥에 달려들었다.
덕분에 온몸에서 단내가 진동을 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면 폰과 린이 내가 온 걸 알아차릴 정도였다. 나는 쭉 인식하지 못하다가 방 안 가득 설탕을 뿌려 놓은 듯한 냄새를 맡고서 알았다. 일린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머리칼, 셔츠에서 똑같은 단내가 났다.
나는 얼른 이 지겨운 축제가 끝났으면 싶었다. 드레스를 고를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루 종일 일린저의 사탕 가게에서 일하다가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하필 과제가 많이 걸린 날은 기숙사가 아니라 그냥 솥 앞에서 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야라.”
내가 고개를 처박고 포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부르는 일린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린저는 동그란 눈알사탕 하나를 흔들었다.
“먹어봐.”
우리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일린저는 과거를 잊어먹은 것처럼 행동했다. 오히려 내 쪽에서 일린저를 오해한다고 느낄 정도로 그는 얌전하게 사탕을 제조할 뿐이었다. 심지어 가끔은 내 과제를 도와주고, 대련할 때 조언해주는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깜빡 넘어갈 뻔했다.
요즘 들어 일린저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낮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예전처럼 나를 날리거나 굴리지 않아서 까먹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초식 동물도 아니고 사사건건 털은 곤두세우기가 어디 쉽냐는 말이다.
나는 의심 없이 일린저가 만든 눈알사탕을 받았다. 새로운 맛을 개발했나, 했다. 혀에 사탕을 올리고 포장 작업을 계속했다.
콧속에서 라일락 향이 났다. 사탕은 신기할 정도로 빨리 입 안에서 녹았다. 어떻게 나무토막으로 이런 사탕을 만든 것일까 싶었다. 향긋한 단맛에 기분이 좋아진 차였다.
어둠 속에서 일린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입매가 저절로 벌어지고, 눈물이 고였다. 솥이, 바닥이, 포장지가 우스웠다. 빨간 포장지를 내려놓고 나는 바닥을 굴러다녔다.
“하하! 하하하!”
정신 빠진 사람처럼 바닥을 닦고 다닌 그 순간, 나는 이 미친놈이 사탕에 무슨 짓을 한 걸 깨달았다.
일린저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있었다. 일린저의 평온한 얼굴마저도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옆구리가 아려올 정도로 웃는 것이 괴로웠다. 양발을 허공에 찌르자, 다가온 일린저가 고요히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야, 우, 안, 멈춰?”
“멈춰 줄까?”
“빨리, 그만, 하하!”
그가 기다린 순간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내 입술 위에 올려 두었다. 벌어진 내 입술 위, 아래에 그가 있었다. 내 아랫입술을 조심조심 쓸어본 뒤, 과감하게 윗입술을 엄지로 눌렀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물고자 달려들었다. 내가 괴로워하며 손가락을 무는데도 일린저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을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다. 온종일 사탕을 만들어서인지 단맛이 났다. 익숙한 라일락의 향이 내 입 안으로 넘어온다. 나는 크게 입을 벌리며 옆으로 굴렀다.
“하아!”
숨이 부족해져, 가슴에 큰 통증이 일었다. 웃음이 잦아드는 동안 일린저는 깨물린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가 의도한 게 이것이었다. 나는 무능하게 걸려든 거고.
“야, 뭐야.”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 기어가 그의 멱살을 잡아 끌어왔다. 작전을 바꾸어서 나를 죽이려고 계획한 게 아닌 이상에야 이 미친놈이 이럴 이유가 없었다. 일린저는 내가 멱살을 잡는데도 표정이 없었다.
“아!”
내 손목을 꺾을 듯 잡고, 제 뺨으로 가지고 올라간다. 멱살을 흔들고 몸부림을 쳤다. 끌려간 손이 그의 뺨을 눌렀다.
“그냥.”
“안 놔?”
“너 웃는 거 보고 싶어서.”
오늘치 할 일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한 시도 이 미친 새끼와 있을 수 없었다.
“놔.”
그가 나의 손을 놓았다. 끝내 둔 과제를 챙기고 떠나려는 몸짓을 보내자, 일린저는 기다란 숨을 뱉어 냈다.
“불쾌해?”
“그럼 좋아 보여? 웃는 걸 보고 싶다고 그딴 사탕을 처먹이는 건, 너밖에 없어. 이 멍청한 새끼야!”
이 좁은 공방에서 그와 단둘이 사탕을 만드는 것도 내게는 고역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사탕을 포장한 사람한테 이따위 행동을 하다니.
일린저는 상반신을 움직여 일어나 앉았다. 짐을 챙겨 든 내가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그가 뒤에서 손을 내뻗었다. 문이 닫혔다.
“이야라.”
“넌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뭐가 문제인 거야?”
“나랑 춤만 춰.”
나는 대답 없이 문고리를 흔들었다. 그의 손에 눌린 문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일린저는 빛을 불러와 내 몸을 문에 고정시켰다. 예전이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와 나는 말없이 빛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내 몸을 누르려고 하고, 나는 불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설마 제 구두가 타들어 가는데 나를 막아서겠는가.
그러나 검이 없는 상태에서 빛 모으기 훈련이 덜 된 상태였다. 검은 그곳에 빛을 모으고, 파도나 불꽃을 만들어내기 쉬웠지만,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빛을 불이나 물로 바꾸는 것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다.
겨우 작은 불씨만이 일린저의 구두 주위에 튀어 올랐을 뿐이다. 이를 악물자, 일린저는 손가락을 들어 내 뺨을 쓸어 만졌다.
“나랑 처음으로 춰. 그러면 더는 불쾌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난 그날 아무와도 춤 안 추고, 축제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을 거야.”
생각나는 대로 뱉었지만 그 계획이 무척이나 괜찮게 느껴졌다. 얘한테 시달리느니 연극도 보지 않고, 춤도 추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일린저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을 두고 그의 입술이 멎었다.
“더 불쾌하게 해줘?”
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굴복하지 않고 대들어서?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나는 일린저가 나만큼 못되게 구는 대상을 본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일린저는 미남이었고, 모자람 없는 체격에, 대외적으로는 쾌활하고 사교성이 좋았다. 나한테 모나지만 않았다면, 나도 어쩌면, 그를 나쁘지 않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일린저에게서 멀어지는 방법은 그를 받아 주는 척하는 것인가. 그러나 첫 춤을 춘다는 것은 일린저와 함께 입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말인즉슨 파트너는 일린저 모르온이 된다는 얘기였다. 얘도 그걸 아니까 요구하는 것이겠지마는.
그러나 에이버넷이 있었다. 그는 다정하며, 어쨌든 나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는 게 보였다. 선뜻 일린저의 마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일린저는 왕이 될 사람이었다. 그가 왕이 되고, 내가 예레카가 되면 우리는 군신 관계일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까짓것, 하며 수락할 수 없었다. 그의 춤을 받아 주면 쉽겠지만, 그의 춤을 받아 줌으로써 생기는 모든 일이 나는 환멸 났다. 그걸 다 감수할 만큼 얘를 좋아하는 편도 더더욱 아니었고.
나는 문을 막고 있는 일린저의 팔목을 할퀴듯 움켰다.
“자꾸 이러면 교수님께 말씀드려서 너를 돕지 못하겠다고 할 거야.”
“이야라.”
“두 번 안 말해.”
“어떻게 하면 내가 불쾌하지 않은데.”
“왜 그렇게…….”
이렇게 매달리듯이 얘기하면 독하게 말하지를 못하겠다. 그는 문에 이마를 대었다. 그의 그림자가 내 온몸에 씌워졌다. 그의 팔목을 놓자, 빨간 자국이 남았다. 나의 등 뒤는 문, 앞은 일린저, 양옆은 그의 팔. 실망스러움이 푸른 눈동자에 사무쳐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상하고 있었다.
이게 설령 그의 농간이라고 할지라도 솔직한 게 나았다. 백 번을 망설이다가, 나는 깨물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네가 토악질 나올 만큼 싫고…… 불쾌하지는 않아.”
그는 혀를 내밀어, 인내심을 제 입술에 묻혔다. 그의 붉은 입술이 젖어 들었다.
“널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일린저는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아닐걸.”
“그게 네가 할 소리야?”
“나 그만 상처 주는 게 좋을 텐데. 나중에 어쩌려고 이래. 저번에 불쾌하다는 말 듣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순진하게 눈꺼풀을 내린 일린저를 보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그를 받아 준 것처럼 된 분위기지 않나. 아니, 그걸 넘어서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의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종이 뎅뎅- 두 번 울렸다. 세 번 울리면 문이 닫힌다.
일린저는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스르르 문고리를 놓으면서 실수인 듯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지나갔다. 내가 그의 몸을 밀치며 나가자, 그가 순순히 내 뒤로 물러났다. 다른 어떤 난제보다 쟤가 어려웠다.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일린저가 데려다주듯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모르는 척 걷고, 그는 다 알면서 나를 따라오고. 이제 막 책을 챙기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틈에 끼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나는 금방 다시 뒤로 돌아서 기숙사로 들어갔지만 어쩐지 이를 닦는 중에도, 머리를 감는 중에도,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그를 떠올렸다. 분노, 경멸, 혼란, 여러 비위 상하는 감정으로 인해서였다.
그가 달밤 아래에서 우는 꿈을 꾸었다. 이건, 좋지 못한 신호였다.
* * *
안 좋은 예감이 예감으로 그치면 좋으련만. 아침부터 기분이 영 좋지 않더니, 일은 작은 것부터 터져가기 시작했다. 늦잠을 잔 덕에 급하게 일어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질 않나, 스타킹의 올이 나가고, 그날 강의실이 바뀐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급하게 바뀐 강의실로 뛰어가니 수업은 이미 시작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무수한 시선이 내게 박혔다. 교수의 짜증스런 눈빛도 물론이었다. 나는 올이 나간 스타킹을 신은 채로 어정쩡하게 문을 닫았다. 교수는 들어오는 나를 보면서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수업 시간을 고지하지 않았나?”
교단 중앙에 서서 질책을 받는 상황은 끔찍했다. 교수는 손가락 끝을 까닥였다. 앞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오늘 마침 대련 연습을 하려는데, 좋은 지원자가 나왔군.”
<대련> 수업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대련>의 이론에 대해서만 배웠으나 오늘로 그마저도 끝난 듯했다. 수업 진도가 꽤 많이 나간 것인지, 교수는 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는 검을 내게 전했다. 나는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검을 받았다.
“대련 상대로는 누구를 지목할 건가.”
한 번도 검을 사람에게 휘둘러본 적은 없었다. 아니다. 일린저에게는 해 본 적이 있긴 있었다. 교수가 상대를 고르라는 말에 일린저가 두 눈을 반짝였다. 일린저 모르온은 걸터앉은 의자를 삐걱삐걱 흔들고 있었다. 그의 신호 아닌 신호였다. 그의 옆에 있는 남자애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교수는 ‘호오.’하며 제 턱수염을 매만졌다.
하나둘 시선이 일린저에게 모였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놈이 저러고 있으니 다들 신기하긴 신기할 터였다. 나는 일린저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에 앉은 이름 모를 사람을 찍었다.
“상대를 고른 건가?”
“네.”
그러나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들 난장을 피웠다. ‘우우.’하며, 교수에게 항의하듯 사인을 보내는 녀석까지 있었다. 일린저가 내게 파트너 신청을 한 후부터 노골적으로 엮으려고 안달이었다.
“상대를 바꿔도 됩니까?”
그 재수 없는 낯짝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아주 잘됐다 싶었다. 내가 검을 바로 잡고, 일린저 옆에 있는 놈을 가리켰다. 교수는 의외라는 듯 눈을 밝혔다. 내가 점찍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놈은 당황한 눈치였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는 성적도, 생김새도 맹탕이었다. 가시리온인지 게리온인지 하는 이름이었을 거였다. 교수는 덩치 큰 녀석에게 손짓했다. 더 이상 떠들면 내가 지목하리라 생각했는지 많이 잠잠해진 후였다. 찍힌 녀석만이 잔뜩 굳은 얼굴로 중앙에 걸어 나왔다.
“모두 검을 들고.”
검을 통해서 무언가를 불러낼 수준 정도는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린저의 수준까지는 모두 되지 못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불, 물을 끌어낼 수 있었고, 그것은 검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천재라고 칭송하는 녀석을 제외하면 나의 적수는 없었다. 녀석도 그걸 아는지 얼굴이 긴장된 채였다.
“검을 마주 대고.”
서로의 검을 치켜들었다. 빛을 담지 않은 하얀 검 끝을 마주 대었다가, 떼어낸 순간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먼저 검을 뗀 자가 선공을 하고, 남은 사람이 막는 식이었다. 상대는 겁을 먹었는지 교수가 따로 언질을 주기 전에 벌써 검을 떼고서 빛을 불렀다. 바닥에서 일어난 초록빛이 녀석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상대의 빛을 뺏어 왔다. 도망치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마음으로 빛을 불러 모았다. 달려가던 빛들이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힘의 물살을 타고 나의 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대도 빛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침을 삼켰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느낌이 왔다. 내가 이기고 있었다. 빛이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빛이 가득 찼다. 허한 마음이 한순간 지펴진 불에 의해 물러지는 느낌. 상대의 검은 창백했다. 나의 상상처럼 검 주위로 불꽃이 뛰어다녔다. 주위가 뜨거워지며, 상대는 겨울바다에 빠진 것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불을 날린다면 녀석은 통구이가 될 터였다. 교수는 거기서 중재를 했다.
“승부는 난 것 같군.”
상대는 분한 듯이 검을 놓았다. 그가 애써 쥐고 있던 한 줌의 빛이 흩어졌다. 나도 서서히 손의 힘을 덜었다. 불꽃이 사그라들자마자 교수가 내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훌륭한 재원이 있었는지 몰랐는걸.”
그러고는 내게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까닥거린 후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앉자마자 뒷자리에서 내 어깨를 찔렀다. 고개를 뒤로 했다. 낯선 인상의 여자애였다. 교수의 감시가 소홀할 때 내게 말을 건 듯싶었다.
“일린저하고 춤을 출 거라면서?”
그 황당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교수가 금세 앞을 돌아보고, 여자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나 홀로 그 아이가 남긴 질문을 속으로 우려내야 했다. 어째서 춤 신청을 받았다는 소문만 파다하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소문은 먼지만 휘날리는가. 나는 깃펜의 깃이 뽑힐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불편한 시선이 이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고, 돌리면 바라보고. 영 못된 취미들을 가지고 있었다.
일린저는 어김없이 ‘바빠?’하며 나의 의자 뒤로 왔다. 수업이 끝났음에도 놓지 못하는 나의 깃펜을 앗아갔다. 나는 불현듯 어젯밤을 떠올리고 말았다. 무심코 일린저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깃펜의 깃을 제 손바닥에 쓸어보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이따가 해.”
아무래도 나와 일린저를 단단히 엮을 모양새인가 보다. 평소 관심 없던 녀석들까지 그와 나를 엮으려는 행태가 수상스러웠다. 설마 일린저가 시킨 것일까. 평소 그와 함께 다니는 녀석들이 유독 말썽이기는 했다. 지금도 내 쪽을 흘끔거리며 속닥거리는 놈은 일린저 주변에서 자주 보였던 녀석이었다.
문을 닫고 나와서 걷는데 속이 쓰렸다. 나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눈을 들었다.
“일린저.”
이름을 부르자, 촘촘한 그물에 잡힌 것처럼 그가 멈췄다.
“네가 부추겼어?”
“어떤 것을.”
“애들. 자꾸만 너랑 나랑 엮으려고 하잖아.”
“내가 시킨 거 아닌데.”
일린저는 무심하게 뒷덜미를 쓸어 만졌다. 자신을 추앙하는 놈들 하나도 단속 못 하는 게 무슨 왕을 한다고. 화가 치솟았지만, 일린저에게는 힐난이 통하지 않았다.
“가서 아니라고 말해.”
“뭐를?”
“걔들이 오해하는 거.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거.”
“아무런 사이도, 아무런 관계도 아닌 건 아니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닿았다가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체념이 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가 무슨 사인데?”
“글쎄.”
“이제 보니까 자주 뭐를 잊어먹나 본데. 어제 한 대화를 잘 상기해 봐.”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고 뒤로 돌자마자 일린저는 내 옆에 따라붙어 걸었다.
“어떻게 하면 나랑 춤출 건데?”
“아무것도 하지 마.”
일린저는 내가 퍽 차갑게 말했음에도 눈살을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그가 계속 붙어 있느라 소문은 한참 더 커지게 생겼다. 일린저는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곳이 있으면, 저도 뚫어져라 보고. 내가 멈추어 서면 저도 멈추어 섰다. 우리의 이상한 행동에 시선이 주목되는 것은 당연했다.
수업도 하필 겹치는 것투성이였다. 일린저는 내 옆자리에 앉거나 여의치 않으면 뒷자리에 앉아서 자꾸만 나를 건드렸다. 내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에 휘감아 가지고 놀거나, 내 팔꿈치에 제 팔꿈치를 가져다 대거나.
종잡을 수 없는 일린저의 행동에 나 또한 발맞춰 이상해져 갔다. 화를 내야 하는데 자꾸만 참게 되었다. 화를 내면 얘가 더 좋아하겠지 싶어서.
정점은 식사 시간이었다. 튀긴 감자를 내 접시에 담고서 걷는데, 일린저는 기어코 말린 사과를 집어 와서 내 접시에 올려 줬다. 폰과 린이 먼저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리다가 내 옆에 딸려 있는 일린저를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그 앞자리에 앉은 산도르아도 마찬가지였다. 셋의 표정이 건반 ‘미’를 치고 있었다.
나는 산도르아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린저도 빈 테이블의 의자를 당겨 내 옆에 놓으며 앉았다. 제 친구들이 저 멀리서 앉아 있음에도 내 옆에 딸린 것처럼 있었다. 나는 사나운 눈초리로 ‘정말 가지 않을 거야?’ 물었다. 일린저는 씨익 웃으며 포크를 찍고, 면을 돌돌 말았다.
“이야라. 대련을 잘했다면서?”
“차기 예레카께서 실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이 파다해.”
폰과 린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입을 분주히 놀렸다. 아마도 일린저가 앉아서 망가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대충했는데 이겼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린저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다가, 이따금 ‘이거 맛있는데. 안 담아왔어?’ 하며 내 접시에 음식을 덜어줬다. 내가 먹지 않고 한곳에 치워두면 포크로 물 잔을 두드렸다.
“린. 파트너는 정했어?”
보다 못한 산도르아가 린에게 화제를 돌렸다. 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던 린이 시선을 들었다. 물어보나 마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우리 중에 이제 파트너가 없는 사람은 나와 산도르아뿐이었다.
“산도르아는? 파트너 신청 많이 들어오지 않아?”
린의 발랄한 물음에 산도르아는 미소를 비췄다.
“아니. 보기보다 인기 없어. 난 장사만 끝나면 곧장 연극만 보고 들어가려고.”
산도르아의 무심한 말에 폰과 린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그러고 싶다고 말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폰과 린은 이번 파티의 중요성에 대해 귀가 따갑게 말하곤 했었다.
“거짓말. 열아홉의 파티라고. 성년이 되기 전 마지막 파티.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말도 안 돼. 파트너 문제라면 우리가 도와줄게.”
폰과 린의 외침으로 주위에 앉은 테이블에서까지 우리를 힐끔거렸다. 일린저가 앉은 것만으로도 주목되는 시선이었는데. 일린저라도 가만히 있어 주면 모르련만, 그는 한술 더 뜨듯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나도 동의하는 바야.”
“응?”
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상체를 뒤로 물렸다. 린 또한 당황한 눈치였다. 얌전히 식사를 하던 왕자가 난데없이 끼어들다니. 그는 제 하고픈 말을 이어 갔다.
“이야라를 설득해 봐.”
“이야라를?”
“파티에 참석하는 게 좋다고, 나랑 같이.”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내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일린저의 셔츠 카라를 쭈욱 당겼다. 상체를 테이블에 바싹 붙였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자꾸 헛물켜는 왕자를 처리할 방법이 없을까. 그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내버려 두었던 건데, 얘는 내버려 두면 내버려 둘수록 애를 먹였다.
“난 파티에 가지 않을 생각이야.”
“뭐?”
“이야라!”
파트너도 아직 없고, 목적 없고, 어쨌든 가기 싫은 곳을 가야 할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더군다나 일린저가 저렇게 눈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니 갈 맛이 뚝 떨어졌다. 일린저는 내 말에도 ‘나랑 같이 안 가면 되지.’ 한마디를 하고 태평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그의 식사는 끝이 났다. 접시가 비어 있는데, 아직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일린저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충견처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나는 짜증을 섞어 일리저를 재촉했다.
“다 먹었으면 먼저 일어나지그래.”
일린저는 영문 모를 미소를 달고서 내 접시를 가리켰다. 아직 튀긴 감자 따위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내 접시를.
“다 먹고 와.”
일린저는 빈 접시를 챙겨 들고 의자를 밀어젖혔다. 그런데 멀쩡히 지나가면 될 것을, 찬 손가락으로 내 등을 쓸고서 지나갔다. 등을 반사적으로 움츠린 사이, 걸어가던 일린저가 갑자기 툭 멈추었다. 뒤를 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그런데 산도르아.”
일린저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턱을 매만지는 제스처를 했다.
“네가 파트너가 없었던가?”
일린저는 진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고 장난이라는 듯이 싱긋 웃고서 걸어가 버렸다. 그가 걸어가자마자 뒤 테이블의 의자가 나뒹굴 것처럼 밀어졌다. 까만 뒤통수 여럿이 그를 쫓아나갔다. 폰과 오른쪽에서, 린은 왼쪽에서 산도르의 손목을 붙들었다. 일린저의 헛소리에 껌뻑 넘어간 눈이었다.
“뭐야. 있었어? 산도르아?”
“그러면 그렇지. 있는 거지?”
그런데 산도르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린저가 그저 멋모르고 찌른다고 생각했는데. 산도르아는 변명도 안 나오는 것처럼 혀가 굳어 있었다. 그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본 나는 뭐가 있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도르아가 숨기고 있는 것. 일린저는 알고 있었다.
“폰.”
“응?”
폰은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싱글벙글하며 대답했다.
“해스라는 애. 무슨 수업을 듣는지 알아?”
“해스?”
폰은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였다.
“음, 잘 모르겠는데. 워낙 혼자 다니는 애라.”
“걔는 아마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걸.”
산도르아와 접점이 있는 애였다. 산도르아에 대해 아는 듯이 말하고. 일린저가 무언가 아는 듯이 말하고. 알아보겠다던 에드리트는 소식이 없었다. 남의 손에 맡기고만 있을 순 없겠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자, 폰은 그제야 정보를 하나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나타났다가 안 나타났다가 하는 애들은 보통 후원자를 업고 들어오는 경우던데.”
“후원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째 해스의 소식을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가 했더니, 귀족이 되어서 정식 입학 허가를 받은 게 아니라, 어떤 귀족의 후원을 받고서 뒷구멍으로 들어온 사례일 수 있다고 했다.
“수업도 우리랑 많이 다르고, 어쩌다 겹치는 게 있어도 말을 잘 섞지는 않을 거야. 산도르아와 수업을 핑계로 붙었던 것은 우연이었지.”
“맞아. 그 이후로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일은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사실 간단한 것은 산도르아를 추궁하는 일이었다. 내가 먼젓번에 본 것과 해스의 묘한 태도, 방금 일린저의 말까지 합쳐서 수상한 것투성이니까.
산도르아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애가 침착한 만큼 성깔이 있는 편이었다. 이렇게 작정하고 숨기고 있는데 내가 아는 체를 한다면 밝히겠는가. 밝히려면 진즉 밝혔을 것이다.
그래도 일의 전말은 알아야지 무슨 일이 터져도 산도르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산도르아를 보았다. 산도르아는 예의 그 무표정으로 돌아와 무심히 스프를 떠먹고 있었다.
그야말로 침묵 속의 전쟁이었다.
* * *
학원 내에서 사촌인 에드리트를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애초에 구조 자체가 다른 학년은 마주칠 수 없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찾아간다 하더라도 서로 수업이 있어 만남이 어긋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창 바쁜 4학년 과정의 그에게 쪽지까지 보낸 것은, 그만큼 의지할 곳이 에드리트뿐이라서였다.
“알아볼게.”
“부탁해.”
에드리트에게 후원 입학자 중 해스가 있다면, 걔에 대해 면밀히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사교성이라곤 젬병인 나보다 에드리트는 쓸 만한 인맥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다. 발이 넓고, 뒷돈을 찔러주면 정보를 물어다 줄만 한 사람도 두엇 알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가 내게 보낸 묘한 적개심을 넘긴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내내 무언가 찜찜했었는데. 설마 별일인가 싶어서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오늘도 그날이 그날인 수업을 듣고서, 나는 일린저의 공방으로 향했다. 축제 준비는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었다. 일린저와 사탕을 만드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거의 다 만든 사탕을 포장하고, 어떻게 진열할 것인지를 의논하여 계획서를 제출하면 과제는 끝이었다. 물론 수익 분배의 문제도 의논해야 했다. 거기에 이번 학기 <제작>의 점수가 달려있었다.
공방에 도착도 전에 달콤한 냄새가 복도에 퍼져 있었다. 마지막이랍시고 제비꽃 향의 사탕을 만들려나 보다. 설명을 듣자 하니 그 사탕을 먹으면 계절이 어떻든, 사탕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제비꽃이 핀 날씨로 보인다고 했다. 새삼 빛으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어디까지인지 놀라웠다. 내가 그런 쪽에는 영 재능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린저는 작은 유리병에 만든 것을 옮겨 두는 중이었다. 일린저의 손놀림을 구경하면서 안으로 들어간 나는 인사차 말했다.
“거의 다 했네.”
일린저는 혼자 나머지 일까지 착착 진행했다. 동그란 사탕이 데구르르 구르는 것을 보며, 나는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앉아서 정성스레 사탕을 만드는 일린저를 구경했다. 평상시에는 장난기만 가득한 것 같다가도 저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면 정상인 같아 보였다. 속까지 진중하고 조용한 남자였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장지는 어디에 있어.”
계속 가만히 앉아 있기가 심심한지라 일어나서 두리번거렸다. 일린저는 “여기.” 하면서 내게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던졌다. 갓 만들어 따끈따끈한 사탕부터 보라색 포장지에 돌돌 말아, 끝을 리본으로 묶었다. 하도 만들어 대서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일린저는 내 손놀림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뭔가 또 재미난 게 생각난 얼굴인데, 나는 그것이 몹시도 불안했다.
“시험 삼아 하나 먹어 보는 게 어때.”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 나는 매정하게 고개를 젓고 포장하는 일이나 계속했다. 일린저도 두 번 권할 생각은 없었는지 얌전히 앉아서 사탕을 포장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공방에서 우리 둘이 허리 한번 못 펴고 쪼그려 앉아 포장을 하는 모습을 보니, 이 과제가 얼마나 고된 과제인지를 알 수 있었다.
왕자라고 예외는 없는 학원의 모습에 신뢰를 느껴야 할지 빡빡함을 느껴야 할지. 내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자, 일린저는 느긋한 발음으로 나를 밀어냈다.
“남은 게 별로 없는데. 손이 네 개까지 필요할까?”
“무슨 소리야.”
“쉬라는 소리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댔다. 하루 종일 수업 들으랴, 대련이랍시고 빛을 모으랴, 이래저래 삭신이 쑤시도록 힘든 일이 많았다. 벽에 몸을 기대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불평 없이 포장을 도맡은 일린저를 지켜보다가 까만 세상이 도래했다.
잠든 것인지도 모르고 잠들었다. 한 자세로 잤는지 어깨와 목이 결렸다. 몸을 옆으로 뒤집고, 다시 자리를 잡아도 편하지가 않았다. 두 번 정도 좌우로 움직이고 나서야 머리 밑에 무게가 받쳐졌다.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을 베고 숙면을 취했다.
나도 모르게 산도르아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었나 보다. 꿈에서 산도르아와 신명 나게 싸우는 꿈을 꿨다. 말로 끝나지 않자, 처음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산도르아의 손이 내 머리칼을 잡았고, 나도 산도르아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바닥을 구르고 굴렀는데 산도르아가 어느새 저 밑에 낭떠러지에 가 있었다. 나는 다급히 싸우며 엉켜 있던 몸을 풀고서, 산도르아의 치마 끝을 잡았다.
산도르아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락 말락 한 그때. 뎅뎅뎅.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알았다. 차가운 벽, 사탕 껍질이 뒹구는 바닥, 그리고 내가 반쯤 몸을 의탁한 어깨. 머리를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떨어졌다. 나는 일린저에게 등을 기대고 앉아, 그의 어깨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몸을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 하나가 튀어나와 내 머리를 눌렀다. 나는 다시 원상태로 일린저의 어깨에 눕고 말았다.
“추워.”
일린저가 눈을 감고 있는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내 머리를 누르고 있는 그의 손목을 떨쳐 내려 했다.
“종이 울렸어.”
그러나 일린저가 담담히 뱉은 말에 동작이 멈추었다. 종이 울렸다는 건, 이미 당직 교수, 기숙사 사감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돌아다닐 수 없었다. 기숙사로 지금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으며, 만약 들킨다면 같은 방을 쓰는 이들 모두가 벌을 받았다. 나 때문에 폰과 린, 나타리아가 강제로 이 밤에 끌려 나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다행히 이쪽 공방은 이미 사람이 빠져나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나와 일린저가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통금 시간이 풀릴 때 돌아간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무진장 불편하고, 피곤할 거란 것이었다. 더군다나 공방은 춥기도 추웠다. 나는 일린저와 꼭 붙어 앉은 자세에 경악을 경악했지만, 이내 춥다는 그의 말을 조금이나마 납득할 수 있었다. 자기 혼자 이 많은 사탕을 포장하고 내 옆에 앉아 온기를 탐하는데, 같은 사람으로서 동정이 들었다.
나는 그를 떼어내려던 손을 내리고, 그의 어깨에 기댄 머리만 살짝 들었다. 내 허리에 둘러져 있는 그의 손을 모른 척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나도 이내 여기가 꽤 춥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는 수 없이 일린저의 이불 노릇을 하며 온기를 나누고 있다가, 문득 든 생각에 몸을 슬쩍 움직였다.
“왜 그래.”
일린저는 잠기운이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눈을 비비며 일린저에게 대답했다.
“불을 피울 줄 알잖아.”
솥 밑에 장작이 있었다. 불을 피울 준비물까지 모자람 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당장 빛을 이용해 불을 피울 작정이었으나 일린저는 일어서려는 나를 와락 껴안을 뿐이었다.
“불 피우면 들켜.”
너무 찰싹 붙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거름 없이 내다 꽂혔다. 잠기운 섞여, 느리고 탁한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불을 피우는 시도는 그의 말 한마디에 일단락되었다. 섣부르게 불을 피우고 난동을 피웠다가 정말 들킨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 안 그래도 소문이 무성한데 얘와 밤을 새웠다는 사실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더군다나 그것으로 인해 벌을 받는다면. 생각만 해도 입맛이 떨어지는 상상이었다.
생각에 빠질 수도, 그렇다고 속 편히 잠들 수도 없었다. 그가 내 허리를 꼭 껴안은 탓에, 나는 거의 한 몸처럼 안긴 채였다. 그의 곧은 날숨이 넘어와 내 목덜미에서 그쳤다. 자린 것처럼 목부터 지르르했다. 애꿎은 손등만 긁고 앉아 있었다.
꼴에 사내는 사내라고, 한 번 작정하고 안고 있으니까 힘이 셌다. 빛을 다룰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일린저와 맨몸으로 맞붙었다간 쥐어 터지는 건 내 쪽이었다.
일린저는 잠투정을 부리듯이 나를 힘주고 잡아당겼다. 내 등에다 코를 박고 비비적거렸다. 머리칼 끝에 붙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향을 맡는 것이라고 착각할 법했다. 자는 건지, 안 자는 건지. 선잠이 깨 가는 나는 그를 밀어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뒤돌아 곤하게 자고 있는 얼굴을 보면 맥이 빠지곤 했다. 더욱이 그가 예쁘게 포장까지 마친 수많은 사탕을 보면 마음이 비실비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 식은 솥을 설거지하려고 물을 담아두었다. 잠이 들어 설거지는 못 했고, 솥 가득 찰랑찰랑 찬 물에 달이 떴다. 나는 부엉이처럼 눈이 동글고, 그는 기름먹인 듯 결 좋은 머리칼을 내 등에 누르며 잤다. 이불처럼 덮고, 베개처럼 안고. 혼자 잠을 아주 잘 자고 있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지만 기왕 참은 것 끝까지 참았다.
차라리 뜬눈으로 밤을 새우자 싶었다. 절대 잠이 오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고서 새벽을 넘겼는데. 동이 떠오를 때 즈음 눈꺼풀이 닫혀 있었다. 색색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내 잠을 불러일으킨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잠드는 것도 모른 채 잠들었다. 새벽 공기가 나를 감쌌음에도 춥지 않았다.
무언가가 내 코와 입가를 쓸었다. 부드럽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거기서 우습게도 내 어머니도 아닌, 돌아가신 가짜 엄마의 꿈을 꾸었다. 늘 지겹게 보았던 그 뒷모습. 단맛이 나는 쿠키를 구워 주던 뒷모습 말이다. 달달한 사탕 냄새 때문에 기억이 착오를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눈을 뜬 것은 아침의 새소리 덕분이었다. 아침을 맞아 울어 대는 새소리에 짜증이 일었다. 어슴푸레 잠결을 벗어나는데 손목이 무거웠다. 아래를 확인해 봤다. 이불처럼 덮인 검정 재킷이 보였다. 재킷의 주인은 일린저일 터였다. 일린저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홀로 덩그러니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온몸이 불편하고 피곤해야 정상이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개운하고 온몸은 따뜻한 곳에 누웠던 것처럼 노곤했다. 어설프게 기지개를 켜고, 일린저의 재킷으로 추정되는 것을 들고서 일어났다.
일린저에게 돌려줘야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척 입을 닫고 있을까. 고민하면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구석에 무언가가 웅크려있었다. 아니. 웅크려있다기보다, 벽에 온전히 등을 기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린저 모르온이었다. 일린저는 거기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게 재킷을 벗어 준 모습으로, 약간의 인상을 찌푸리고서. 그냥 나가려다가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저쪽 벽에 두고서, 불편하니까 이리로 온 것일까. 어처구니없는 마음 반, 왠지 자꾸 신경 쓰이는 마음 반. 나는 들고 있던 재킷을 조심스럽게 그의 위에 올려 두었다.
그의 어깨에 올려 주며 떠나려던 그때였다. 창으로 볕이 들어왔다. 해가 뜬 것이다. 일린저의 속눈썹 위로 햇살이 주저앉고, 인상을 찌푸린 콧잔등, 덮인 눈두덩이 조금씩 열렸다. 물결치고, 내려 덮이는 파도가 생각났다. 눈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떠나는 바다의 색이었다. 나를 발견하고서 부드럽게 휘어졌다. 갈라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야라.”
구름이 해를 가렸다. 작은 그늘이 졌지만, 왕자는 깨어났다. 나는 부름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의 재킷을 덮어 주던 손이 멈추어, 멍하니 일린저의 입술을 들여다봤다. 내 이름을 부르건 말건, 아침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급하게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허리를 굽힌 채로 서서 일린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울리는 목소리가 갈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끝 무렵에 남은 부드러움이 심장 언저리를 찔렀다. 별거 아닌 목소리, 눈길이었다. 그럼에도 머리는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멍했다.
“수업 가야 해.”
겨우 내 입에서 정상적인 말이 나왔다. 내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일린저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일린저는 내가 긴장한 얼굴이 된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 얼굴이었다.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니, 일린저가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얼굴인데.”
부정해야 했다. 당장 일린저의 어깨를 치고 일어나 화난 모습으로 걸어 나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바짝 몸이 굳어, 입술만 뻐끔거린 다음,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았다.
뒤에서 일린저가 내 이름을 반복하여 불렀다. 이야라, 이야라. 불렀지만 나는 무시하고서 복도로 튕겨 나갔다. 덮어 주고 나가려 했는데 일린저가 눈을 떠서 놀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불길한 악몽에 쫓기는 것처럼 도망쳤다. 일린저는 다행히 따라오지 않는 듯했다.
나의 비행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막 기숙사 입구가 열렸고, 폰과 린은 꿈나라에, 나타리아는 나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내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충분히 잠을 잤음에도 침대에 패잔한 듯 쓰러졌다.
* * *
일린저는 그날 이후로도 큰일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제 친구들과 즐겁게 웃고, 다가오는 밑 학년에게 친절히 대해 주고, 수업에서는 칭찬을 들었다.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혼자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를 피해 다녔다. 일린저가 가끔 나를 보며 “오늘도 도망가?”라면서 웃을 때. 나는 정곡에 찔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문을 뚫듯이 뛰쳐나가고 말았다.
내가 그를 열심히 피한 덕분인지, 축제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학생들의 관심은 나와 일린저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보다 자신의 파트너를 찾는 것, 그리고 곧 보게 될 연극에 대해서 호들갑 떨며 기대했다.
그리고 그 주제는 곧 나도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절대 춤 따위를 추지 않을 것이며, 파트너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내 주변에서는 이미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에는 내가 이 드레스를 입는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과 함께, 어머니가 손수 지었다는 드레스 하나가 도착했다. 푸르른 색에, 목에서 가슴골까지 자잘한 보석이 수놓아진 옷이었다.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길이에 놀랐지만, 그게 요즘 유행이라는 주변의 말에 겨우 수긍하고 있었다.
참석하지 않으려던 마음은, 파트너 없이 혼자 조용히 있다가 나오겠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머니가 손수 지어 준 드레스를 계속 박아 두기가 아까울뿐더러, 이걸 입길 기대하며 몇 달을 고생해서 지어 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할 재능이 없기 때문이었다.
춤을 추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파트너도 없다던 산도르아도 어머니에게 드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 오전에는 어차피 물건 판매를 위해 나와야 하니, 그때만 잠깐 입을 예정이라고 산도르아는 말했다.
“파트너는?”
“응?”
“정말 없어?”
“그럼.”
산도르아는 그날 파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없다고 했고, 나는 산도르아의 의사를 존중했다. 우리 둘이 파티에 대해 싱거운 태도를 보이자 폰과 린은 난리가 났지만, 겨우 드레스를 입고 몸을 흔드는 것에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오후, 수업을 끝내고 판매대를 만들 때였다. 나는 일린저의 판매대에서 판매를 도맡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일린저가 지정받은 곳에 가서 먼저 사탕을 올려 두고, 가격대를 적은 팻말까지 만들어 둔 후였다.
나보다 수업이 하나 더 있는 일린저가 오기 전에 끝내 두었다. 서로 마주칠 것 없이 내가 먼저 끝내자는 마음이었다. 필사적으로 피하는 건 나 혼자였지만. 나는 고용된 사람처럼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하고 떠났다. 내일 축제에서는 사람이 많이 오기 때문에 일린저와 대화를 나눌 시간도 얼마 없을 것이다.
미친 듯이 바쁜 사람처럼 일을 마치고 시끄러운 축제 준비의 현장을 빠져나왔다. 각자 주어진 구역을 꾸미느라 여념이 없는데, 물건으로 눈길을 끌지 못하면 저렇게라도 판매율을 올리려는 속셈이었다. 아예 이드리하임 상가에서 주민들을 불러다가 자신의 물건을 사면 이드리하임 상가에서 쓸 수 있는 금화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판매 실적이 곧 성적이기 때문에 다들 혈안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공터를 빠져나오고, 이제 편히 쉬기 위해서 숙소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최악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건 아닌 모양인가 보다. 숙소 앞에 잔뜩 긴장한 얼굴의 에이버넷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버넷.”
내가 그를 부르자, 에이버넷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약간 상기된 것이 보였다. 손에 든 꽃도 막 핀 듯 싱싱했다. 나는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에게로 가는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그러나 에이버넷은 다 안다는 듯이 내게로 성큼 걸어왔다.
“이야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데 뜬금없이 일린저가 떠올랐다. 요사이 맥락 없이 뒤엉킨 머릿속은 무얼 꺼내도 결론은 일린저에 다다랐다. 피해야 해서, 그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 쓴 탓일까.
“잠시 얘기할 수 있지?”
에이버넷이 그렇게 말하며 내 손목을 그러잡았다.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눈초리가 우리를 향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기숙사 뒤편에 한적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이따금 비밀을 나누는 사람이나 수업을 피하고 싶은 이들이 숨어들곤 했다. 나는 새빨간 벽에 둘러싸인 그곳으로 에이버넷을 이끌었다.
예상은 했지만 에이버넷은 꽤 초조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알고 있고, 심지어 그에 대한 답변은 미리 준비해 둔 터였다. 그래서인지 긴장감이 없었다. 에이버넷이 등 뒤에 숨긴 장미 다발을 보았음에도 마음은 움직이질 않았다.
으레 약혼자와 약혼녀가 이런 행사 때마다 붙어 다니듯, 에이버넷이 다른 파트너를 구해 두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의상이라도 받아 줘야 한다는 폰의 말이 떠올랐다. 혼자 파티를 떠돌고 있을 약혼자가 불쌍하지도 않냐면서.
“이야라. 먼저 얘기하기 전에, 주고 싶은 게 있어.”
에이버넷은 이미 제 손에 든 것을 들켰음을 모르고 있었다. 내게 수줍게 건넨 꽃다발을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몇몇이 우리가 숨은 골목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내 파트너가 되어 줄래?”
바로 내일이 축제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건 늦은 인사였다. 보통은 일주일 전이나 빠르면 한 달 전부터 청해 두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아마 에이버넷은 나의 거절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싶었다.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꽃을 받아 든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에이버넷은 당연히 수락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에이버넷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응.”
“미안하지만 난 춤을 출 생각이 없어서.”
에이버넷의 미소는 점차 얼굴에서 사라져 갔다. 내 손에 든 장미가 초라해질 만큼 그의 얼굴은 비어갔다. 에이버넷은 거절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눈을 굴리다가, 바닥을 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다른 사람이랑 가기로 했어?”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에이버넷은 다급한 것처럼 다시 물어왔다.
“일린저 모르온과?”
그는 평상시에 신사적이고 배려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차분하게 기다려 주던 성품은 끓여 먹은 듯, 그는 무척이나 다급한 얼굴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은 없어.”
“그러면? 이유를 자세히 알고 싶은데.”
오늘따라 에이버넷은 집요했다. 그의 장점으로 꼽은 여유로움과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그의 어깨를 밀치고서 입술을 열었다.
“이유는 없어. 내가…… 춤 같은 걸 잘 추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자리를 한 번도 안 가 봐서 어색하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춤을 춰야 한다는 사실이 퍽 부담스러웠다. 평소 생각해 왔던 이유를 줄줄이 말했지만 에이버넷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야?”
에이버넷은 제가 뱉어 놓고 자신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생각 못 했다는 듯이 입술을 가렸다. 신경질적인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에이버넷은 잠시 후에 진정한 듯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알겠어.”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에이버넷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하지만 입장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아?”
내 굳은 표정에도 에이버넷은 설득을 이어 갔다. 나와 함께 입장한다고 주변 이들에게 모두 말을 해 두었고, 또 내가 거절할 줄 몰랐기에 따로 파트너를 만들어 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조곤조곤 말하고는 있으나, 내가 수락하기 전까지 절대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지금까지 내게 보여 줬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는 눈을 보아하니, 에이버넷은 자신이 목표한 바가 있으면 꽤나 집요한 편인 것 같았다.
“나는 네 약혼자가 될지도 모르잖아. 아니, 나 말고 그 자리에 올 사람도 없고, 어른들도…….”
결국 내가 끝끝내 말을 하질 않자 에이버넷은 그 말까지 꺼냈다. 우리가 서로 약혼할 가능성이 아주 크고, 그런다면 그가 곧 내 남편이 된다는 말.
에이버넷의 말은 하나하나 일리는 있었다. 알기는 알겠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춤 솜씨가 서툴러,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표했음에도 자꾸만 자신의 위신을 내세우는 에이버넷의 태도에 질린 찰나. 알았다는 말이 떨어질 때가지 그는 계속할 눈치였다.
“같이 입장만 하면 되는 거지.”
그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던 계획은 전면 수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지어 주신 드레스를 입고 연극만 보려고 했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에이버넷은 제 목표를 이루자마자 표정을 바꾸고, 예의 바른 약혼자처럼 내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고마워. 이야라.”
불쾌함을 남긴 수락을 뒤로하고, 에이버넷은 나를 다시 기숙사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내가 조심히 들어가는 것을 보겠다고 버티는 통에 나는 에이버넷을 두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축제를 맞이하여 들뜬 기숙사에서 나는 섞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서로의 드레스를 칭찬하며 보내는 축제의 전야. 나는 물 위에 기름처럼 그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축제 날은 수업이 없었다. 그 점 하나는 완벽하게 좋았다. 학년에 상관없이 모두가 일찍이 일어나 분을 빌리고, 드레스의 끈을 여며 주었다. 하녀가 따로 없는 학원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하녀 노릇을 해 주고 있었다.
물건을 팔아야 하는 신세인 나는 생략하려고 하였는데. 폰과 린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의 드레스를 꺼내 보이고 말았다. 푸른 드레스를 나보다 먼저 꺼내어 거울 앞까지 가져간 린은 방방 뛰면서 아주 좋아라 했다.
“별생각 없다더니!”
이 나이 먹고 어머니가 어쩌고 하기는 조금 그래서 아무 말 않았다. 린은 내숭쟁이라면서 내 머리칼을 빗고, 폰은 내 드레스의 끈을 여며 주었다.
이걸 입고 어떻게 물건을 파나 싶었는데. 여학생과 남학생은 드레스와 연미복을 입고, 그 위에 기다란 망토를 둘러 옷을 감춘다고 한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면 긴 망토를 벗었다. 축제가 시작되길 기다렸다가, 파트너의 앞에서 망토를 벗는 게 룰이었다.
“가끔 짓궂은 남자애들은 먼저 보려고도 해.”
“절대 보여 주면 안 돼. 노을이 지고 나서야 벗는 거라고.”
두 사람은 쫑알거리면서도 열심히 꾸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 또한 수다를 들으면서 폰의 드레스 리본을 묶어 주고, 린의 머리를 시키는 대로 땋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라서 나타리아에게 부탁했다. 내 덕에 고백을 성공한 나타리아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며 린의 머리를 대신 땋아 주었다.
“오늘 밤은 나 안 들어와.”
나타리아는 따로 묻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말했다. 폰과 린은 음흉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맞지 않는 구두를 억지로 욱여넣는 중이라서 잘 듣지 못했다.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타리아가 밖으로 나갔다. 폰과 린은 기다렸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어쩌면 좋아.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
“나는 부끄럽기보단 부럽다. 얼마나 낭만적이야.”
폰과 린이 달라붙어서 호들갑을 떠는 동안에 구두를 마저 신었다. 뒤꿈치가 아려오는 기분에 구두를 내던지고 싶었지만, 이 역시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것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야라는 어때?”
“오늘 안 들어올 거야?”
“뭐?”
두 사람이 입을 모아서 “에이버넷.”이라고 했다. 에이버넷과 내가 오늘 파티에 같이 입장하는 것을 모두가 아는 바였다. 이미 장미 다발을 들고 온 날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지만.
내년이면 모두 눈치 볼 것 없는 성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보통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파티 도중에 은밀히 연인들끼리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든가 기숙사 통금 시간에 걸리지 않고 들어오는 법 따위를 공유하고 있었다.
정숙해 보이는 폰과 린도 내년을 기다린다고 말할 정도니. 이 학원이 유독 음탕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이 나이대의 평균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오늘 늦어도 아무 말 안 한다는 쌍둥이의 등짝을 때렸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준비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물건 판매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구두를 신고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미리 장사 전에 준비를 해 둘 생각이었는데, 그 걱정은 도착하고 난 후에야 하지 않아도 됐음을 알았다.
까마귀처럼 긴 망토를 둘러쓰고 돌아다니는 와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남자애가 있었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망토를 입은 일린저의 근처에는 아직 장사를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의 유려한 글씨로 적어 놓은 사탕의 설명을 보고서 지갑을 든 여인들이 말을 붙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끼어들기도 애매한 분위기에 내가 주춤거릴 때. 나를 발견한 일린저가 턱 끝을 까닥거렸다. 당장 제 뒤로 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뛰어가 예전에 말을 맞추어 둔 대로 정리했다. 물건을 사면 담을 선물 상자를 가지런하게 놓았다. 바쁠 것을 대비해 미리 꺼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외부인을 받지 않았음에도 지갑을 열고 싶어 안달 난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박한 물건이 있다면 벌써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외부인들이 들어왔을 때 아예 구매하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 둔 것이었다.
일린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네. 아니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판매 실적이 더욱 올라감을 느낄 수 있었다. 홀린 듯 그의 목소리에 예약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성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도 일린저의 비정상적인 면만 보아서 그럴까. 저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일린저를 처음 본 것이 아님에도 나는 왠지 그의 낯선 얼굴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일린저가 사탕 한 알을 들어 어떤 여자의 눈앞에 가져가 설명할 때는, 뭐랄까, 심지어 약간의 충격을 받기도 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저렇게 다정하고 정상적으로 굴 수 있는 녀석이 왜 나한테만 그럴까. 차별당하는 듯 억울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장사 준비는 그럭저럭 순조로웠다. 어쨌든 아직 외부인이 들어오기 직전이고, 하늘에 달린 등의 불이 전부 켜지기 전까지 판매는 금지였다. 붉은색 등이 들어오면 까마귀 같은 우리는 깍깍 소리 지르며 손님을 끌어야 했다. 성적이 반영된 일이라서 그런지 다들 열심인 게 눈에 보였다.
특히 식물에 뿌리면 일주일 만에 식물의 성장을 끝낼 수 있다는, 개중에서도 신박한 물건을 만든 녀석은 아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 손님들에게 일단 사 가시라고 말하는 말투부터가 글러 먹은 듯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물건도 변변치 않고, 호객 행위에도 자신 없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일린저는 행운아로 보였다. 물론 그의 곁에 앉은 나도 행운이라고 말한다면 행운이겠지만, 적어도 일린저가 불편한 지금의 내게는 빨리 끝내고 싶은 과제에 불과했다.
“궁금하네.”
선물 상자를 거의 다 정리할 때 즈음이었다. 사탕 앞에 놓을 팻말을 전부 적은 일린저였다. 그는 무심하게 깃펜을 굴리더니 나를 건너다보았다.
“안에 어떻게 입었어.”
“안에?”
그러더니 자신의 망토를 집어서 들추었다.
“공평하게. 서로 보여 주는 건 어때.”
상대의 옷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자는 파트너여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 빨간색 등이 꺼지고 나면 서로의 파트너를 찾아가고, 노란색 등이 켜지면 서로의 파트너 앞에서 까만색 망토를 벗었다. 그렇게 서로의 옷을 확인한 파트너는 손을 잡고 연극을 보러 간 다음, 같이 파티에 입장하는 것이 평범한 순서였다.
“일이나 해.”
내 말에 일린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그 불길한 웃음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일에만 더욱 집중했다. 내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덮쳤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팔뚝이 잡혔다. 위로 들어 올려지는 팔뚝에 몸이 이끌려 갔다.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방심한 사이에 일린저의 손가락이 리본에 걸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당기며 풀었다. 푸른색의 원단과 목을 감싼 보석 장식이 그 사이로 드러났다. 일린저는 아까의 그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예쁜 거 입었네?”
모두가 자신의 장사에 집중하느라 이 장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로 손을 들었으나, 일린저가 먼저 내 손목을 잡아서 아래로 내렸다.
“지금은 즐거운 장사를 해야 하니까. 이런 건 둘이 있을 때 해.”
신이 일린저를 도우시는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의 등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까만 망토를 뒤집어쓴 이들은 하나같이 기다린 듯 자신의 물건을 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물밀듯이 쏟아지는 외부인을 보고서 나는 혀를 찼다. 내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치자 일린저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린저가 제자리에 서자마자 아까부터 근처를 배회하던 무리가 먹어 치울 듯이 왔다. 그가 왕자라는 걸 알고 줄을 선 외부인들도 여럿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기다리며 떠드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궁금하지 않은 남의 사정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의 인연이지만 평범한 귀족은 만나 볼 수조차 없을 왕자이니, 이렇게라도 안면을 트겠다는 심보가 여기까지 보였다.
덕분에 한 명 한 명의 응대가 늦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오래 끌기 위해서 굳이 적혀 있는 사탕의 효능에 대해 한 번 더 묻고, 일린저가 나긋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다른 사탕을 주문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런 손님만 한가득이니, 우리 줄은 점점 더 길어지고만 있었다.
“뒤에 분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판매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다가 기다리다 지친 손님들이 다른 가게로 갈 가능성이 있었다. 계속 기다린다고 해도 문제였다. 이런 손님만 계속 이어진다면 붉은 등이 꺼지기 전까지 우리는 얼마 팔지도 못할 것이었다.
내가 옆에 서서 뒤의 손님을 부르자, 눈에 띄게 기분이 나빠진 어떤 아저씨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회색의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온 것을 보면 단순히 축제를 구경한다기보다 어떤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가끔 나이 많고 돈도 많고, 이것저것 많은데 머리숱만 없으신 사내들이 축제라는 기회를 통해 학원에 방문하곤 했다. 그러고선 이렇게 학생들의 장터나 연극, 파티를 두루두루 관람하면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걸출한 인맥도 쌓을 겸 해서.
폰에게 들은 말이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쪽은 이런 이들에게 팔려 가듯이 혼인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들었다. 웃긴 것은 돈 많은 귀부인이 그랬다가는 욕을 들어먹고, 돈 있는 사내라면 그러려니 한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기준도 기준이거니와 저 음흉하고 물색에 찌들어 있는 눈빛은 영 보기가 껄끄러웠다. 지금도 일린저의 앞에서 알랑방귀를 뀌며 사탕을 사고 싶은 눈치인데, 내가 공연히 끼어들어 다 망쳤다는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원하시는 사탕이 있으면 말하라는 말을 한 뒤에 그 늙은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친절히 설명해 달라는 말에는 앞에 있는 글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데라면 손님 떨어질까 봐 억지로 웃었겠지만 여기는 손님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있으니. 오히려 빨리빨리 이상한 손님은 보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다 고르신 건가요?”
싸늘한 눈초리로 물어보자 머리가 양심만큼 벗겨진 늙은이가 대충 손가락으로 사탕 몇 개를 골랐다. 나는 그가 스치기라도 한 곳은 놓치지 않고서 상자에 예쁘게 담았다. 포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내가 두 손을 모아 상자를 건네자 늙은이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의도가 모두 빗겨 나간 모양이었다.
“다음 손님.”
일린저의 줄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눈치 싸움을 하다가 한 명을 밀었다. 그렇게 내 앞으로 와 똥 씹은 얼굴로 사탕을 구매하고, 다음 희생자가 그 뒤에 줄을 서고. 정말로 사탕이 목적인 사람들은 일부러 내게서 구매해 가기도 했다.
“일린저.”
내가 그를 부르자, 사탕 한 알을 맛보게 해 달라고 조르던 손님을 응대하던 일린저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충해. 대충.”
일린저는 알았다는 듯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나를 괴롭힌 구두 때문에 발꿈치를 가만두지 못하고 있는 발을 본 것이 분명했다. 일린저의 눈이 잠시 그쪽으로 향하더니, 갑자기 응대하고 있는 손님에게 새 물건을 꺼내주겠다며 웃어 주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놀란 내가 멈칫한 사이 일린저는 그대로 몸을 숙였다. 가판대와 떨어진 손님들에게서 아예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나는 상자라도 떨어진 것인가 하고, 무성의하게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때 발에 무언가가 스쳤다. 소름 끼치는 기분에 발을 땅에서 떼었더니, 일린저가 내 발목을 유심히 보는 게 보였다. 나는 앞에 있는 손님에게 눈짓하며, 입으로는 일린저를 불렀다.
“뭐 하는 거야.”
“다 까졌는데.”
그의 손이 쑤욱 내 구두를 벗겼다. 순간 시원했지만 일린저가 구두를 한쪽에 팽개쳐 버리자 실소가 나왔다. 하도 기가 막히면 사람이 웃음이 나오는가 보다. 사탕이고 나발이고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려고 할 때. 일린저가 뜬금없이 제 신을 벗었다. 코끝이 반짝한 구두를 내 앞에 가지런히 두고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허리를 폈다.
일린저는 여태껏 기다려 준 손님에게 웃어 준 뒤,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놀란 내가 잠시 버둥거리는 사이 몸이 띄워졌다. 나를 놀리려고 이러는 건가 싶은 생각은 일린저의 구두를 신은 순간부터 사라졌다. 커다란 구두에 발이 쏙 들어가자마자 일린저는 한쪽 팔을 거두었다. 아무런 문제 없는 것처럼 포장한 사탕을 손님에게 건넸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서, 또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다수는 모르기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손님의 눈빛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문제였다. 일린저의 손은 한참 전에 떨어졌음에도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고 땀이 났다. 쓰라렸던 뒤꿈치도 일린저의 구두 속에 들어가자마자 거짓말처럼 아프지가 않았다.
“제비꽃 맛과 호박 맛 두 개요.”
나는 감정 없이 실에 묶여 조종당하는 것처럼 사탕을 집었다. 포장하고 건네고 돈을 받고. 그 과정을 해내 가는 동안에 머릿속은 온통 구두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힐끔 바라본 그의 양말에도 시선이 갔다. 까만색 일린저의 양말이 잔디 위에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일린저는 신발 없이 맨땅을 밟으면서도 하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맨들맨들한 얼굴에 속아 사탕을 사는 사람을 보다가, 그의 발을 보다가, 여기가 어딘지 잊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손님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대신 사탕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다행이었다. 제아무리 줄을 서 있어도 물건이 없으면 팔 수가 없으니 말이다. 맨 뒤에 있는 손님은 초조한 표정으로 줄어드는 사탕의 개수를 세고 있지만, 한 사람당 하나씩 사 가는 것이 아니라 기본 단위가 수십이었다.
맛별로 사 가는 사람도 꽤 있었다. 사탕의 맛뿐만이 아닌, 효능 자체가 축제와 어울리기에 사가는 이들이 많았다. 행복해지고, 꿈꾸는 것 같고, 잠이 든 것처럼 몽롱해지는 사탕이라니. 일린저의 수완이 좋았다.
내 앞에 있는 손님, 그리고 일린저의 줄에 선 두 명이 마지막 손님이었다. 내 예상에 맞게 사탕은 바닥을 보였고, 빈 판매대에 흥미가 떨어진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일린저 자체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줄이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서성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린저를 열렬히 바라보던 여인 중에 한 명이 튀어나와 매대 앞에 섰다. 비어 있는 사탕 바구니를 아쉽게 쳐다보던 여자는 하얀 머리가 구름 같았다. 사랑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녀는 빈 사탕 바구니를 정리하는 일린저에게 다가가 괜한 질문을 던졌다.
“사탕은 더 없나요?”
일린저는 시종일관 지었던 그 웃음을 버리지 않았다.
“보다시피.”
“그러면, 저.”
이게 본 목적이라는 듯,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같이 연극 보러 가지 않을래요?”
빨간 불이 꺼지고 나면 연극으로 사람들이 몰릴 터였다.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쏜살같이 달려갈 이들을 생각하니. 나도 에이버넷을 만나면 그래야 하나 생각하던 중이었다.
“파트너 있어요.”
일린저가 웃으며 하는 대답에 여자는 아쉬움을 표했고, 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린저의 파트너가 된 사람이 누구냐고 며칠 전부터 물으며 다녔던 사람이 꽤 있었는데, 우리 기숙사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이 파트너라고 나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나서면 죽을까 봐 그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빈 사탕 바구니를 마저 치웠다. 불티나게 팔릴 것을 예상했지만 이것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성적은 이미 따 놓을 대로 따 놓았다. 올해도 괜찮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음에 약간 기뻤다. 어차피 시간도 남았겠다. 폰과 린이 하는 상점으로 가 볼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마무리하던 와중에 일린저의 신발이 보였다. 나는 일린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뒤를 돌았다.
“누가 사 줬어?”
그가 내 구두를 손가락에 끼워 덜렁덜렁 들고 있었다.
“에이버넷 위드먼?”
보통 그런 걸 파트너가 사 주는 것인가 고민하는 새에 일린저가 바로 말을 이었다.
“네 사이즈도 몰라? 그 멍청이는.”
“에이버넷 아니야.”
“다른 남자라도 있어?”
“어머니.”
일린저는 몰랐다는 듯 손가락에 끼운 구두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래. 너한테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고르신 것 같네.”
그의 태도에 내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일린저도 이 상황이 재밌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둘이 빈 상점에서 그러고 있으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그의 구두를 벗어, 그가 한 것처럼 손가락에 끼우고 흔들었다.
“가져가.”
“이걸 신게?”
“뒤에 구겨 신으면 돼.”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앞에 가지런하게 구두를 놓아주었다. 나도 바닥에 그의 구두를 내려놓았다. 일린저는 가뿐하게 제 신을 돌려받았다. 나도 구두를 아까처럼 억지로 신으려 하지 않았다. 뒤를 구겨서 신었다.
그래도 일린저 덕분에 뒤꿈치에서 피가 철철 나지는 않았다. 이따금 보면 애가 괜찮은 것 같다가도 또 어떨 때 보면 이상한 것 같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에 내 감정만 이상하게 변해 가는 것 아닌가.
“이제 서로 갈 길 가면 되지?”
“갈 길?”
“사탕 다 팔았잖아.”
일린저는 그 말에 제 주머니를 두드려 보았다.
“내가 혼자 차지해도 괜찮겠어?”
얼마 벌었는지는 세야지. 일린저는 가려는 내 손목을 잡아다가 제 주머니로 이끌었다. 금화가 두둑하게 만져졌다. 할 일이 아직도 남았다니. 얼른 세어 보자고 했다. 그러나 일린저는 금화를 하나씩 꺼내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빈 사탕 바구니에 자기가 금화를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일부러 그러는 태도에 내가 열받은 얼굴을 하자, 일린저는 콧노래까지 더해갔다.
“하여간 성격도 이상해서.”
나는 이를 악물고 주저앉아 금화를 세었다. 혹여나 나중에 딴말할까 봐 종이를 꺼내 얼마인지를 세세하게 적기까지 했다. 한 번에 꺼내 두고 같이 세면 좋으련만 그가 늑장부리는 바람에 축제는 즐기지도 못하고 끝나가는 중이었다. 손님들은 두 손 가득히 상자를 들고 돌아다니고, 어느덧 비워진 상점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었다.
일하다가 끝난 것 같은 축제였다. 일린저의 손에서 떨어진 금화를 적어 놓느라 시간을 보내는 새에 까만 망토를 쓴 이들이 제 파트너를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모든 불이 꺼지기 전에 제 짝을 찾아야 하는 터였다.
일린저의 주머니에서 나온 마지막 금화를 끝으로 우리의 정산은 끝이 났다. 이걸로 이제 더는 할 일이 없겠지 싶은 순간이었다. 하늘에 붉은 별처럼 떠 있던 등들이 저 뒤에서부터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제 머리 위에 꺼지는 불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서 짝을 찾기 시작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손님들. 망토의 리본을 풀며 제 파트너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 사람들의 발에 채고 채는 선물 상자. 나와 일린저는 오히려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소란들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었다. 일린저는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불이 꺼질락 말락 했다. 일린저는 자연스럽게 제 리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건 내가 볼 것이 아니었다.
“일린저. 네 파트너는?”
그가 부드럽게 리본을 잡아당기자, 빨간 등이 꺼지고 말았다.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망토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다가오는 손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일린저의 하얀 손이 내 리본을 자신의 것처럼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새하얀 셔츠, 그 셔츠에 어울리는 잿빛 연미복, 그 위에 까만 재킷, 그의 눈과 똑같은 푸른색 타이. 연미복이 늘씬하게 어울리는 일린저를 훔쳐보다가 내 망토가 흘러내리는 것을 몰랐다.
노란 등이 켜졌다. 별처럼 노란 그것이 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자신의 파트너 손을 잡고서 그 모든 등이 켜지길 기다리는 이때. 나는 일린저와 서로의 망토를 벗은 채,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내 주변이 뭐라고 떠드는지도 듣지 못하고서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어느새 망토는 내 발밑에 고였다. 일린저의 망토도 마찬가지였다. 일린저는 가만히 앉은 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내 파트너는 일린저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노란 등을 바라보며 하하호호, 웃는 사람들 사이로 일린저의 손을 잡고서 빠져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에이버넷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했다. 일린저는 가볍게 내 손목을 흔들면서, 간간이 뒤로 돌아 나를 확인하곤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일까 생각하다가도 일린저가 뒤를 돌아 나를 보면 생각하는 것을 잊었다.
우리는 연극을 하는 곳도 아닌, 계단을 올라갔다. 학원 건물 바깥을 에워싸고 있는 계단에 일린저가 발을 올리고, 나는 끌려가듯이 그 뒤를 따랐다. 땋듯이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일린저의 재킷이 내 팔목에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차가운 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그 바람을 뚫고서 위로, 위로, 계속해서 위로 향하기만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가는 것일까 싶을 때 즈음에 끝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는 마치 우리를 위한 듯이 자그마한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일린저는 내 손을 놓고, 그곳으로 가서 먼저 앉았다. 나는 바람이 부는 꼭대기에서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노란 등들이 연결되어 있고, 그 밑으로 사람들의 머리통이 개미만 하게 보였다. 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곳, 그 앞에 연극하는 무대도 보였다. 굳이 저 사람들 틈에 끼어 앉지 않아도 연극을 구경할 수 있을 터였다.
학원에 있는 마지막 학년이니만큼 배운 것, 그리고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 만든 연극이라고 들었다. 그 연극이 어찌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처음 본 사람은 넋을 놓고 본다고 들었다.
나 또한 내심 기대했던 것이 그 연극이었다. 그래서 굳이 어머니가 주신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자면 연극에서 끝낼 참이었다. 사람들 속에서 치여서 앉아야 한다는 게 유일한 걸림돌이었는데. 이렇게 환히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소이기는 했다.
나는 나를 여기로 끌고 온 장본인을 돌아보았다. 일린저는 별생각이 없는 듯 재킷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타이를 느슨히 한 뒤, 목의 단추를 몇 개 풀어 두고 있었다. 여인의 드레스만큼은 아니지만 은근히 답답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데려왔냐고 말하려고 한 그때. 화려한 불빛이 하늘에 쏘아 올려지며 연극의 막이 열렸다. 커튼이 양옆으로 벌어지는 광경에 나는 모든 집중을 그쪽으로 쏘았다. 일린저는 의자에, 나는 난간에 앉아 연극을 구경했다.
연극은 평범한 이야기였다. 기사가 붙잡힌 공주를 구하고, 사실은 마왕이 문제가 아니라 왕비가 문제였고, 주인공은 곤란해지지만 공주의 도움을 얻어 무찌른 다음,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하품이 나올 만큼 뻔한 이야기였지만 눈은 즐거웠다. 용이 불꽃을 내뿜을 때, 정말로 불이 나는 것처럼 화려한 붉은빛이 온 무대를 덮었다. 배경, 대사, 음악. 하나도 빠짐없이 어우러져 관객의 시선을 이끌었다. 그 연극을 보는 동안은 모두가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이야기에 빠지기보다 그 세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잊은 채 연극에 몰두했다. 예상대로 왕자와 공주가 키스하고 막이 내릴 때 즈음, 나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에이버넷을 생각해 낼 정도였다. 그만큼 나는 연극에 온 신경이 뺏겨 있었고, 나를 찾느라 에이버넷은 이 연극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처음 일린저가 내게 신겨 준 구두부터 잘못이었다. 노란 등불이 켜졌을 때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일린저의 눈. 서로의 망토가 벗겨지고 오로지 이 세상에 둘만이 남겨져 있었던 것 같은 기분. 그 이상한 기분에 홀려서 나는 일린저의 손을 잡고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자다가 일린저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던 것이 엊그제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수가 없었다.
일어서서 이만 일린저와 작별하려던 때였다. 늦더라도 에이버넷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파트너로 맞이하겠다고 말해 놓고서 이렇게 퇴짜를 놓으면 에이버넷은 망신을 당할 것이었다. 그렇게 못난 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일린저는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내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자신도 일어났다. 내게로 다가와 점점 가까워지는데 속에서 북소리가 났다. 주체를 못 하고 울리고 있었다. 일린저는 내게 손을 뻗었다. 이제 막 가려고 발을 뗀 내게 웃으며 말했다.
“한 곡 출래?”
그때 아래에서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둘 입장을 하고 있고, 파티의 음악은 끊이지 않고 흘렀다. 그 음악은 벽을 타고 올라와 우리가 있는 꼭대기에도 닿았다. 나와 일린저의 귓가에 명확히 박히고 있었다. 일린저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한쪽 무릎을 굽혔다.
“무릎이라도 굽혀야 하나.”
일린저의 동작에서 나는 그가 이런 춤을 춰 봤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창피함에, 또 남들 앞에서 그걸 들키기 싫다는 자존심에 계속해서 이 파티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능숙하게 내 손을 이끌고 춤으로 이끄는 일린저의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 대신 설렘을 느꼈다.
정말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우쭐하기까지 했다. 일린저는 상대방에게 충분히 그런 감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곡도 어렵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말솜씨가 제법이었다. 고작 한 곡도 내게 할애하지 못해, 했다. 일린저의 말에 내 손은 저절로 들려져 있는 그의 손바닥 위에 얹어졌다. 그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넓은 손에 갇혀, 앞으로 이끌려 갔다.
내가 모르는 곡이었다. 애초에 아는 곡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일린저가 내 허리를 잡고 선율을 타듯이 빙 돌았다. 곡이 느리고 무거웠다. 우리는 알 것 다 아는 어른처럼 몸을 찰싹 붙여서 꼭대기를 누비고 다녔다. 일린저의 한 손은 내 허리를 휘감고, 내 한 손은 일린저의 어깨에 얹어졌다. 딱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아주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일린저의 리드에 따라서 우리는 춤을 췄다. 일린저의 발이 밟은 곳을 뒤따라 내 구두가 밟았다. 일린저는 가끔 곡이 멈추면 내 허리를 잡아 하늘에 살짝 띄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커지는 내 눈이 재밌는지 일린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약간 멀어지는 듯했다가 붙을 때는 아까보다 가까이. 서로의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이목구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가까웠다. 이따금 일린저의 숨이 내 머리 위에 엉키기도 했다.
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춤을 췄다. 달이 떠오르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선율에 의지해 춤을 추는 게. 곡이 끝나 가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 동작 사이사이에 마음이 많이 뺏겼음은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린저에게 반쯤 홀려 있었다. 이 분위기, 그의 향, 그의 목소리, 눈짓, 그 모든 것에. 일린저는 나를 작정하고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윽고 곡이 끝났음에도, 나는 일린저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고, 일린저는 내 뒤통수에 제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춤을 추느라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일린저의 조금 긴 듯한 숨소리도 함께 섞였다. 다음 곡이 아래에서 올라왔지만 우리는 두 번째 춤을 추지 않았다.
“이야라.”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며칠 간질간질했던 우리의 사이를 끝낼 무언가가 왔음을.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일린저의 눈과 마주치고, 웃음기 빠진 그의 눈이 천천히 내 코, 입술, 턱 끝을 훑었다. 그리고 다시 나의 눈으로 돌아왔다.
“나는 매일 너를 의식하고 있어.”
“…….”
“네가 어디에 앉아 있든, 어디를 지나가든, 누구와 말을 하든.”
“……그래서?”
“더는 구걸하기 싫은데.”
그는 구걸이라는 표현을 썼다. 달콤한 말과는 다르게 그의 눈은 냉정해 보였다.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따르리라는 단호함이 보였다. 일린저의 손은 내 손을 잡아끌어 제 입술 위로 가져갔다. 내 손등 위에 그의 입술이 눌렸다.
“넌 어때.”
일린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린저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부르려고 애를 썼다. 안 좋은 감정, 안 좋은 추억, 그런 것이 우리 사이에는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 있었다.
그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이 누워서 케이크를 먹는 것보다 쉬웠던 나였다. 입술을 열고서 나는 너와 같은 마음이 아니며, 너를 싫어한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내 입술은 계속 망설였으며, 내 머릿속은 가져오지 않아도 될 추억을 가져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얌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일린저에게 대답을 하는 순간. 우리의 사이가 어떻게든 달라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었다. 내가 싫다고 하든, 좋다고 하든, 우리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기 글렀다.
“나는 네 마음과 같지 않아.”
차가운 이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심장은 왜 따끔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차가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일린저는 입술을 깨물더니, 내 입술 가까이에 제 입술을 붙일 듯 데려왔다.
“정말?”
“정말.”
두 번이나 확인하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일린저는 집요하게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을 그래도 유지하더니, 손을 놓았다. 일린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우리의 거리를 벌렸다.
“좋아.”
그는 천천히 걸어가 벤치에 놓인 자신의 재킷을 들어 올렸다.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손길로 들더니, 가벼운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쳤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그렇게 냉랭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될 관계는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예레카로 저는 왕으로 만나게 될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되지 못할 것이었다. 앞으로도, 지금도.
나는 왠지 가슴께가 아려 왔다. 이상한 느낌에 꾸욱 누르는데, 성급한 발소리가 아래에서부터 다시 올라왔다.
그 딱딱한 구두 소리가 끝나자마자 내 어깨가 뒤로 돌려졌다. 내 위로 일린저의 향기가 덮쳤고, 그의 입술이 내 입을 벌렸다. 성급히 들어오는 혀가 내 혀를 부드럽게 휘감은 다음, 쪽 소리와 함께 빠졌다. 일린저의 혀는 당장 쫓기는 사람처럼 나를 헤집고 가졌다. 내 얼굴을 단단히 붙든 손은 꿈쩍도 못 할 만큼 힘이 셌다. 나는 팔을 휘두르다가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럼에도 그의 혀는 기쁜 듯이 내 입술을 빨아 당겼다.
“하, 이야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잠깐 입술을 떼고서 말한 뒤에, 다시 다가와 말캉한 입술을 부딪쳤다. 키스가 이런 것인지 몰랐다. 그것도 내 첫 키스였다. 이렇게 날강도처럼 도둑질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린저는 내 버둥거림을 한 손으로 차단하고 남은 손으로 양껏 나를 끌어안았다. 혀는 제 마음대로였다. 내 입술을 머금었다가 반항하는 혀를 제 마음대로 얽었다가. 거친 입맞춤을 참다못한 내가 제 혀를 깨물자 그제야 하하하 웃었다.
“좋은데.”
“미친 새끼.”
“한 번 더 깨물어 줘.”
“잘라버린다.”
“정말, 날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여자애. 첫 키스 하나쯤은 나로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는 깨물듯이 내 귀를 살짝 물었다.
“잊지 말라고.”
내가 진저리를 치든 말든, 그는 제 할 일을 끝낸 것처럼 가뿐하게 떨어졌다. 엉망이 된 제 입술을 미친놈처럼 웃으며 어루만졌다. 내게 깨물려서 피가 나는 입술인데도 좋다고 웃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입술을 벅벅 닦는 중이었다. 그는 퇴장하는 신사처럼 약간 허리를 굽힌 다음, 금세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 걷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손을 들었다.
“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여기서 밀어 죽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노려보는데, 그는 얼굴을 돌려 씨익 웃었다.
“네 자매도 아니고, 걜 뭐라고 불러야 할까.”
갑자기 엉뚱한 주제로 튀어 버린 이야기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산도르아.”
이 미친 입맞춤 뒤에 왜 갑자기 산도르아가.
“첫 키스에 대한 답례로 알려 줄까.”
“내가 첫 키스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
“다른 새끼랑 했을 리가 없어 보이던데,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토끼들의 별장으로 가 봐. 거기서 네 친구의 비밀을 알 수 있을 테니. 일린저는 그렇게 말하고 제 입술을 한번 엄지로 쓱 쓸었다. 피가 묻어 나오는 제 엄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밑으로 내려갔다.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끝나지 않는 동안에 내 심장은 불길하게 뛰었다. 여태껏 나를 지배했던 일린저의 존재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맥이 풀린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달밤 아래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산도르아. 토끼들의 숲. 일린저가 놀리는 것이라고 하기엔, 그는 그저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도 일린저의 그런 부분은 믿고 있는 내 자신에게 환멸이 나지만.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나는 안 움직이려고 하는 다리를 겨우 일으켰다.
파티장으로 떠나가 버리고 아무도 없는 길이었다. 뛰며 내려온 나는, 인기척이 없어야 할, 토끼들의 숲으로 걸어갔다.
토끼들의 숲은 매일 이드리하임 정문까지 데려다주는 토끼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거기는 토끼들을 돌봐 주는 숲지기 하나와 토끼 굴밖에 없었다. 이따금 거기서 유령이 나오기도 한다는 소문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토끼들은 눈이 빨개서 유령을 볼 수 있기에, 외로운 유령들이 신나서 그곳으로 찾아가곤 한다는 소문이었다. 여자애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고, 기숙사 뒤편 너머에 있는 숲에 대한 관심은 매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런 곳과 산도르아가 연관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감이 자꾸만 이상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 가면 산도르아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처럼. 나는 빛을 발에 실었다. 빛이 길을 만들고, 나는 빛을 밟고서 뛰어서 토끼들이 사는 숲까지 날듯이 갔다.
토끼들이 사는 숲은 연두색의 풀로 뒤덮여 있었다. 토끼풀이 나기도 하고, 하얀 꽃이 피기도 했다. 숲에서 부드러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티에서 쓰일 법한 부드러운 노랫소리였다. 토끼들이 춤을 추고 있으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나는 밟고 있던 빛을 흐트러지게 하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노랫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나무 뒤에 숨어서 인기척을 없앴다. 조용하게 숲 안쪽을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노랫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자, 일린저가 홧김에 나를 속였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한 곳에 다다른 나는 그가 거짓말한 것이 아님을 두 눈으로 보고 말았다.
그 사내였다. 피 칠갑을 하고 쓰러져, 산도르아가 구해 주고 가르쳐 주고, 산도르아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얼마 전에는 광장 골목길에서 산도르아와 마주 안고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허름한 숲지기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키가 더 커서, 그의 등치에 가려 산도르아가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산도르아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물결처럼 굽이치는 금발을 늘어뜨리고, 기쁜 듯이 숲지기와 춤을 추고 있었다. 산도르아의 기쁨은 이곳이었다. 산도르아의 비밀은 저것이었다.
하지만 일린저가 알 정도로 허술한 비밀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에게 들켜 버릴 정도로 어설픈 숨김이기도 했다. 첫 번째부터 해스라는 아이에게 들킬 정도로 잘 감추지 못했다. 그러하니 과연 두 눈 시퍼렇게 뜬 할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들킨다면 산도르아는 물론 저 사내까지 다칠 게 분명했다. 이방인은 외벽에서도 배척을 받는데, 성내에서, 그것도 위테르발도 령의 예레카 앞에서는 더욱이나 심할 것이었다.
산도르아가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는 저 사내를 산도르아에게서 조용히 떼어 놓을 수 있어야 했다. 산도르아가 오지랖이라거나 네가 무언데 나서냐고 하는 말을 듣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어쩌면 평생 산도르아에게 미움을 받고 살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강제로 뜯겨져 평생 남을 상처가 생기는 것보다 나처럼 산도르아에게 아무런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 떼어 놓는 것이 나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내버려 두고 싶었다. 저렇게 행복하게 저 숲지기가 된 사내와 춤을 추고 있는 산도르아가. 학원을 다니는 내내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 같던 산도르아가 저렇게 모두 벗어던진 듯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감히 둘을 떼어 놓으려고 마음먹은 내가 싫어질 정도로 그 둘의 춤은 아름답고 안타까웠다.
달밤 아래, 꼭대기에서 일린저와 춘 나의 춤처럼.
* * *
축제는 끝났어도 시험은 이어졌다. 나는 계속 과제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느라 잠을 통 자지 못했다. 걱정했던 <제작> 시험에서는 일린저 덕에 좋은 성적을 얻었다. 덕분에 유급하지 않고 다음 학년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대련> 수업은 큰 시험 없이 지금까지 보아 온 교수의 평가를 바탕으로 점수가 매겨졌다.
나는 A를 받았으며, 그건 일린저 다음 가는 성적이었다. 점수를 짜게 주기로 유명한 교수였는데, 그는 내 가능성에 대해 아주 후한 평가를 내렸다.
그 밖에 신경 쓰이는 것들이 많았다. 나를 자지 못하게 하는 것도 많았다. 나는 잠이 계속 오지 않는 눈으로 시험을 보고, 침대에 누워서 멀뚱멀뚱 생각에 잠겼다. 일린저의 거친 키스 뒤로 이어지는 산도르아의 춤 장면. 그 모든 게 이어지면서 나의 잠을 방해했다.
결국 모든 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가 돼서도 나는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큰 혼란을 떠맡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린저는 쾌활한 얼굴로 학원을 다녔다.
예전과 다름없이 제 친구들과 놀고, 까불고, 장난을 치고. 그러나 더는 내게 말을 걸지도, 아는 척을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될 줄을 알았음에도 무언가 서운했다. 이렇게 될 줄을 알았음에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일린저가 잊지 말라고 했던가. 그 말은 저주처럼 남았다. 달이 뜬 밤이면 그의 키스를 떠올리게 했다. 좋아서도, 나빠서도, 설레서도 아니었다. 정말로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 밤에, 그 입맞춤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나는 일린저의 무시가 오히려 잘됐다고 싶으면서도, 화가 났다가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돌아가는 날까지 길을 잡지 못한 감정은 나를 망가뜨렸다. 정상적으로 해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야라. 밖에…….”
짐을 싸고 나가려는데 폰이 나를 불렀다.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에이버넷이었다. 알고서 혀를 깨물 뻔했다. 그간 복잡한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사이에 나는 그를 잊고 만 것이었다.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짐과 함께 걸어 나가자, 에이버넷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축제가 끝나고서도 표정이 좋지 않자, 폰과 린은 내가 에이버넷과 크게 다툰 것으로 생각했다. 파티장에도 나타나질 않았으니 말이다. 나와 에이버넷, 그리고 일린저 셋 다. 그것은 잠깐 이야깃거리가 되어 아이들 사이에서 말이 돌았다고 했다. 나를 두고 에이버넷과 일린저가 주먹다짐을 하느라 파티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다음 날 멀쩡한 일린저와 멀쩡한 에이버넷이 나타나 이야기는 유야무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말을 거는 일린저가 나와 에이버넷만 빼놓자, 폰과 린은 눈치채고 만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노라고. 거기에 심각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에이버넷을 보며, 쌍둥이는 이렇다 할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고 내게서 떠나갔다.
에이버넷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내가 짐을 든 손을 가만히 내려놓을 때까지 이어진 침묵은 복도가 조용해질 때에 끝이 났다. 에이버넷은 아무도 없는 순간을 기다린 듯했다.
“그날, 계속 기다렸어.”
나는 챙기다가 만 짐을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지금 짐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미안해.”
“어디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그건.”
“아니, 누구랑 있었는지부터인가.”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에이버넷의 분노는 정당했다. 나였어도 화를 냈을 것이었다.
“일린저와 있었어.”
에이버넷은 속이 시원하다는 것처럼, 또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비웃음을 입가에 올렸다. 그를 기다리게 했을 그 시간이 미안했다. 그 시간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뭐에 홀린 것처럼 일린저를 따라갔는지를 알면 더욱 비웃었을 터였다.
“에이버넷.”
“응.”
“이제 더는 엮일 일 없어. 그날은…… 정리하려고 한 것에 가까워.”
에이버넷은 내 말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는 듯 내게 되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계속 널 쳐다보던걸. 모르온은.”
“우연이겠지.”
나는 불신이 떠오른 에이버넷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미안해.”
“그렇게 사과해주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에이버넷은 정말 기쁜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 씩씩하게 코를 긁으며 웃던 에이버넷은 앙금은 모두 풀린 듯 바닥에 떨어진 내 짐가방을 대신 들었다.
“내가 들어줄게.”
“그래.”
내 열아홉 살의 가을, 마지막 학기. 나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길 하나를 접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