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4)

05. 열여덟의 날

“지금 널 이 책상에서조차 내리지 못하는데, 나보고 널 넘어뜨리라고?”

일린저는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도와줘?”

제 할 일을 마치고 물러서는 노을이 창가로 들어왔다. 일린저의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어두워지는 계단 한가운데 선 나는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내가 널 넘어뜨리면 소원을 들어주는데, 넌 그걸 도와주겠다는 거지.”

나는 사탕을 한 주먹 쥐듯 손가락을 굽혔다. 어처구니없는 심경 위로 분노가 뛰어다녔다.

“대체 왜? 너한테 좋을 게 없잖아.”

“대신, 네가 지게 된다면.”

드디어 꾸밈없는 본심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소원 들어줘야지.”

“그거였어? 나를 대강 도와줘서 지게 만든 다음, 소원 하나를 가져가시겠다.”

“대강 아니고, 성심껏. 네가 만족할 만큼.”

“제발 거짓말 그만해.”

일린저는 비웃듯 말했다.

“뒷골목에서 속고만 살았어?”

일린저가 놓은 덫에 휘말릴수록 불리해지는 건 나였다. 나는 에이버넷의 재킷을 손에 들고서 뒤돌았다.

“안 할 거야?”

나는 약 오른 악당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죽이고 싶다며.”

그건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오만한 선포였다. 분명 먹이가 붙기를 기다린 거미줄처럼 계획해 둔 판일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는 게 옳았다. 왕자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것은 한두 번이면 족하지 않은가.

그런데 오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가지고 놀던 개미에게 물려, 땅에 벌러덩 넘어지는 꼴을 보면 얼마나 통쾌할까. 왕자는 울고, 개미는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 테지. 나는 문을 나서기 전에 한마디 했다.

“그래, 해.”

일린저는 관상용 화초였다. 온실에서 길러진 탓에 눈과 비, 추위를 몰랐다. 화초는 정원사 손에 들린 연장이 자신을 헤치지 못하리라 자신할 만큼 오만했다.

개미에게 갉아 먹혀 너덜너덜해진 화초가 보고 싶었다. 내 앞에서 너덜너덜해져 우는 화초를.

* * *

테이블 위는 부산스러웠다. 산도르아는 식사 시간 내내 박자가 엉망인 콧노래를 흥얼댔다. 폰과 린은 혹시 왕자가 조언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아침부터 열댓 번은 들었던 소리였다. 나는 쓰게 웃었다.

“걔는 미쳤어.”

“이런.”

“세상에.”

폰과 린이 동시에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주변을 살피는 쌍둥이를 보며 나는 코웃음 쳤다. 일린저는 내가 저를 반으로 가르겠다고 해도 오냐오냐해주는 중이었다. 뒷말은 일상이려니 할 터였다. 그나마 뒤끝이 긴 쪽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정말 팀으로 할 생각은 없대?”

“팀으로 하면 후회할걸.”

“왜?”

차마 기대하는 얼굴에 대고 악담을 퍼부을 수 없었다. 왕자가 너를 흙 위에 굴린 다음, 공중에 띄워서, 다시 흙에 던질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일린저는 겉보기엔 말쑥한 왕자였다. 남학생 중에서는 일린저의 장난에 당한 몇몇이 거리를 두는 눈치지만(대표적으로 에드리트가) 대다수는 왕자의 지척으로 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기야 뒷골목 코흘리개조차 왕의 이름 앞에서는 정숙해지는데, 이 학원에서 누군들 그를 무시할 수가 있겠냐마는.

일린저의 가시 돋친 그물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는 나뿐이었다. 그를 적대하고, 질시하고, 경계하는 것도 나뿐이었다. 나머지 물고기들은 온순했다. 그물에 걸려,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길 자처했다. 그가 숨긴 뾰족한 가시에 찔려도 찔린 줄을 몰랐다.

나는 첫 만남부터 나무랄 곳이 없는 그가 싫었다. 짐작하건대 감이라든가 본능이었다.

나는 평소의 두 배를 먹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를 시종처럼 불러댈 놈이었다. 포크에 양고기를 줄줄이 끼워서 입 안 가득 넣었다. 경악한 폰이 삶은 완두콩을 가져다줄 정도로 육식에 치중한 식사였다.

“많이 먹어둬.”

순간, 재수 없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지나가던 일린저가 머리를 끔찍하게 헤집고 떠났다. 방심하다가 당한 일이었다. 약빠른 일린저의 뒷모습을 보며 포크를 칼처럼 쥐었다.

“내 친구가 왕자의 연인이라니.”

황홀한 표정의 폰이 헛소리를 꺼냈다.

“미쳤어?”

“말짱해.”

폰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손수건을 펼쳤다.

“만난 건 언제부터였어, 이야라?”

폰은 린과 마주 보고 웃었다. 나를 골리는 것에 재미 붙인 얼굴들이었다. 아무튼 짓궂다고 해야 할지, 내가 얼굴이 벌게져 화낼 때였다.

한 여자애가 우리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나를 힐끔댔다. 어쩌다가 눈을 마주칠 때는 그 애가 웃었다. 뺨에 패는 볼우물이 인상적인, 꽤나 준수한 얼굴이었다.

“산도르아.”

그러나 입가에 점이 난 여자애의 용건은 내가 아닌 산도르아였다.

“아.”

종일 헤실거리면서,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산도르아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연습할 시간 말이야, 언제가 좋을까?”

그 애는 그렇게만 말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 대신에 산도르아의 파트너로 정해진 아이였나 보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이름이 뭐니?”

폰과 린의 궁금증이 그 애를 향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쏠린 관심이 부담스러운지, 그 애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해스, 라고 해. 다들 그렇게 불러.”

앞뒤가 생략된 소개였지만 무례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해스는 산도르아와 구두로 약속을 잡은 뒤 식당을 빠져나갔다. 자연스러운 퇴장이라기보다 흡사 도망이었다. 린은 ‘우리와 말하기 싫은가 보네.’ 하며 투덜거렸다.

나는 린의 말을 한 귀로 넘겨듣고 산도르아의 접시를 두들겼다.

“산도르아.”

“응?”

그제야 산도르아가 반응을 했다. 고개 든 산도르아의 눈이 밤이라도 샌 듯 충혈되었다.

“네 방에서 금괴라도 발견했어?”

나는 우회적인 표현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만 산도르아니까. 어째서 정신이 빠졌냐고 물을 것을, 특별히 귀족적으로 써본 것이었다.

“얘는. 그런 거 없어.”

못 미더운 대답이었지만 따질 시간이 없었다. 시계 침이 째깍째깍 가고 있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기숙사에 둔 과제를 가져와야 했다.

“왜. 궁금한 거라도 있니?”

산도르아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연습 잘해.”

나는 빈 접시를 들며 일어났다. 폰과 린은 손을 흔들어 줬고, 산도르아는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묘한 의문은 다음으로 미뤘다. 별일은 아니겠거니 했다.

* * *

북서쪽의 끝, 학원의 변두리라고 불릴 만한 곳으로 가면 나무가 삼렬한 숲이 나타난다. 숲의 나무는 사슴뿔 모양의 가시가 나고, 바람에 나부끼는 잎은 푸르께했다. 그곳은 가꾸지 않은 잡초마저 새파랬다. 갈 때마다 한 뼘씩 자라나 있으며, 어떨 때는 내 신장을 훌쩍 넘는 녀석까지 있었다. 사람에게 버려진 변두리의 숲이었다. 나는 매번 일린저를 그곳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따금 그 숲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기숙사는 도난당할 위험이 있다는 핑계까지 품고서였다.

나는 밀봉된 편지를 뜯을 때마다 손마디가 간질거렸다. 첫 문장을 읽을 때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 편지에는 아름다운 문장이나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내 안부를 물었다. 생활은 어떤지, 괴롭히는 애는 없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짧게 적혀진 그 편지는 답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가끔은 할아버지의 근황만 전하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빠르게 휘갈겨진 어머니의 필체에서, 물레바퀴 돌듯 도는 어머니의 삶에서 의미를 건졌다. 어머니가 잠시 숨 돌릴 겨를에 편지를 썼다는 의미, 똑같은 일상이나마 내게 전하고 싶다는 의미. 그 의미가 나의 빈 부분을 채워나갔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편지에 작은 선물을 동봉했다. 내가 할아버지의 집무실에서 자주 꺼내 먹었던 자두 사탕, 당신이 직접 반죽했다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쿠키 등이었다. 욕심쟁이처럼 그것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나누어 먹지도, 내가 먹지도 못했다.

그것이 두 분의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받은 사랑이었다. 좋은 성적을 얻고, 훌륭한 후계자처럼 보이고픈 욕심이 자라났다. 답장이랍시고 깨끗한 양피지를 꺼내어 썼다가 문장이, 내용이, 필체가 신경 쓰여 북북 찢어 버리기 일쑤였다.

“날 죽이려고 열심인데.”

그날 나는 먼저 나와서 연습하고 있었다. 일린저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나무에 묶인 사람처럼 기대서 나를 지켜봤다.

“왜 이리 굼떠? 얼른 와서 가르치기나 해.”

그를 쓰러뜨린 다음, 절절매게 할 소원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목표는 확실했다. 일린저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됐다. 나는 손에 달라붙은 검을 내려놓았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 박수를 치면서 걸어 나왔다. 연극 같은 그의 몸짓에 나는 이를 갈았다. 일린저는 그러거나 말거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내 앞까지 걸어와 버려진 검을 주웠다.

그의 손가락이 검에 닿자마자 사위가 변했다. 잠자코 웅크려있던 빛이 일어나 그의 주위로 모였다. 내가 불러낸 빛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그마한 연두 알갱이가 일린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일린저는 기다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열기를 품은 숨이 내 이마까지 닿았다.

빛으로 가득 찬 검의 끝에서 파도가 쳤다. 그 파도는 해일이 되어 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서로를 덮치고, 덮쳐 큰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이내 검의 날을 따라 파도가 일었다. 만지면 곧바로 휩쓸려 갈 것 같은 그의 파도였다. 나는 검이 불러낸 바다에 손을 가져갔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울까. 아니면 빛의 온기처럼 따스하기만 할까. 그러나 내 손끝이 닿기 전, 그가 눈을 떴다.

나는 일린저의 한발 앞에 있었다. 그때 그가 검을 쥔 채로 다가왔다. 뒷걸음질하려던 찰나, 그의 걸음은 나의 뒤로 향했다. 일린저는 내 뒤에 섰다. 차가운 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재빠르게 내 손에 검을 쥐여 줬다. 마치 그에게 안겨, 함께 검이라도 잡는 듯했다.

일린저와 마주 닿은 등에서 열이 올랐다. 피부로, 열기로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일린저는 내 귓가에 말을 흘려 넣었다.

“눈 감아.”

일린저는 진지했다. 나를 놀리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맞서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푸르른 숲의 중심에서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눈을 감고, 검을 들고, 내 손목에 포개진 그를 느꼈다.

“푸른 바다를 상상해 봐.”

푸른 바다라. 바다는 까마득히 높은 벽 위에서 내려다본 게 전부였다. 상상에 진전이 없자 일린저가 물었다.

“본 적 없어?”

“아마도.”

일린저의 숨이 잠시 길어졌다. 내 긴장을 읽은 그가 다시 물었다.

“내가 아까 보여준 건, 기억할 수 있지?”

나는 말 없이 끄덕였다. 일린저는 바로 이어서 말했다. 자신이 보여 준 파도가 숲 위로 덮쳐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그 말에 나는 일린저의 파도를 생각해냈다. 흰 거품을 문 파도가 치고, 그보다 커다란 파도가 덮쳐와 삼키고, 모두를 포용할 해일이 밀려와 숲을 뒤덮는 상상. 검을 쥔 손에서 땀이 났다.

같이 검을 잡았다. 일린저의 손이 나의 손등을 덮었다. 그의 맥이 뛸 때마다 울림이 전해져, 떠도는 빛의 속삭임까지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빛들이 환호한 적 있었나.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내 검은, 내 검이 아니었다. 내 발밑에 파도가 쳤다. 흙에서 태어난 빛은 한데 모여서 바다가 되었다. 빛들이 모이고, 모여 바닷물을 만들고, 저 멀리서부터 다가와 파도를 일으켰다. 내 검은 물빛으로 변해 있었다. 일린저는 천천히 제 손을 떼었다. 오로지 나만이 검을 들었다.

“놓아 봐, 이야라.”

뒤에 서 있는 그가 느린 목소리를 건넸다. 나는 홀린 듯 그의 말을 따랐다. 놓친 검은 바다 속으로 퐁당 빠져버렸다. 반사적으로 튀어 올라온 물방울이 바람을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저마다의 종착지에서 만나 몸집을 키웠다. 물방울은 순식간에 늠름한 파도가 되어 내 손 위로 들이닥쳤다.

“봤어? 이거 보여?”

일린저는 흥분한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두었다.

“물론이지.”

“내 손 위에 바다가 있어.”

그가 바닷물에 잠긴 나를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 순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내 손에서 파도가 놀고, 발밑에 꽃과 바닷물이 엉킨 이 순간을. 마침 잔디도, 꽃도 푸르렀다. 이곳은 나만의 바다였다.

“아름다워.”

나는 빛이 좋았다. 살아 있길 잘했다고, 가족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때였다. 벽 안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빛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손안에서 노니는 빛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가만히 바닥에 흘려보냈다.

빛은 내 손을 따라서 놀았다. 내가 올리고 싶으면 올라오고, 내가 내려가라고 하면 바닥으로 내려가 파도가 되었다. 신기한 놀이에서 헤어 나올 무렵, 나는 함께 바다에 잠겨있는 일린저를 돌아보았다.

일린저는 셔츠의 팔을 걷어붙인, 낮에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타이가 흐트러지고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정도 풀어져 있었다. 게다가 빛에 홀려서 얼빠진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빛들이 왜 저런 재수 없는 놈을 따르나 했는데, 그는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같이 검을 잡았을 때, 그때 그가 빛을 부르는 느낌으로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빛을 사랑하고 있었다.

“다음은 뭘 배워?”

그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굽이치는 파도에 발목을 담그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물어본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는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린저.”

나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일린저는 약간 넋을 빼놓은 얼굴이었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딘가 한 군데 빠진 미소였다.

“뭐 해.”

“아니, 별거 아니야.”

“뭐?”

“뭘 물어봤지?”

그는 제 입술을 한 손으로 가렸다. 그의 얼굴 중에서 눈만이 드러나 있었다. 그가 굉장히 환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입술을 가리자 그의 눈은 건조하고 차가웠다. 그 사실에 놀랄 것은 없지만, 나는 새삼스레 놀라고 있었다.

“다음은 뭘 배우냐고.”

“다음에 가르쳐 줘야지. 미리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싱거운 녀석이었다. 나는 김이 빠졌지만, 발목을 적시는 빛들을 보고 모든 걸 용서할 기분이 되었다. 내가 가볍게 빛과 놀며 웃는 그때에, 어느덧 여름은 찾아오고 있었다.

* * *

푹 찌는 더위에 다들 진도가 안 나간다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 들어 누구보다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빛과 친해지는 방법을 알고, 일린저의 도움 없이도 짙푸른 바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내 종아리에 살짝 젖는 정도지만.

매일 밤, 자기 전에 빛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 말을 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혼자 종알거리다가 잠이 들면 이불을 끌어다 주고, 내 등을 토닥거리는 게 느껴졌다. 또 하나의 장점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을 들여보내 달라며 우는 악몽이었는데. 이상하게 일린저와 수련을 하고 난 후부터는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

다른 수업을 듣는 중에도, 계속 머릿속으로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과제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폰과 린은 이드리하임 상점을 쏘다니고, 산도르아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빛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홀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야외 테이블에서 과제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뙤약볕 아래 쪄 죽어가는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올려보니 헤이즐넛 색깔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에이버넷.”

“열심히 하네.”

그는 내게 사과 주스를 마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내려갔다 오기 귀찮다고 말하자, 에이버넷은 알았다고 웃으며 달려갔다. 내가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려도 그는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불편한 느낌에 목을 긁고, 다시 숙제에 코를 박았을 때였다. 다시 그림자가 졌다. 설마 에이버넷이 지갑이라도 놓고 간 것인가.

“저기.”

해스였나, 해시였나. 산도르아의 파트너였다. 산도르아와 함께 있어야 할 아이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내게 볼일이 있어 보였다. 나는 입에 든 샌드위치를 삼키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고마워.”

나는 혹시 모를 불안감에 한 번 더 확인했다.

“해스였나?”

“맞아. 기억해 줬네.”

다행히 이름이 틀리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성싶었다. 내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해스라는 아이는 말을 트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디 아파?”

해스는 무더위에 약한 건지, 탈이 난 건지, 안색이 희멀거니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손수건을 찾으려고 품을 뒤적거렸으나, 평소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했다. 심지어 해스는 내가 꺼내지 않자 자신의 것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민망한 일이었다.

“저기, 이야라.”

“응.”

“일린저 모르온하고, 그러니까…… 왕자하고 연인 관계인 거야?”

해스는 느리지만, 아주 정확한 어조로 그렇게 물어왔다.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와 일린저는 매우 늦은 시간까지 있다가, 종이 치기 직전에야 들어오니까. 그것도 인적이 드문 숲 깊숙한 곳에 가서.

그래도 면전에서 물어보는 애는 없었다. 알고 보니 일린저만큼이나 내 소문이 흉흉하지 무언가. 외벽 뒷골목에서 행패 부리며 다녔다나 뭐라나. 더군다나 아킨에게 물을 부은 것은 맞지만, 꼴 보기 싫다고 으름장 놓으며 발로 깐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라는 둥, 보기보다 엄하다는 둥 떠돌고 있지 않은가.

덕분에 엔간한 사람은 용건이 있을 때 말고는 물세례를 받을까, 잘 오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무뚝뚝한 내 인상이 한몫했다고 했다. 은근히 편해서 내버려 두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쪽은 신선했다. 나는 경쾌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

그러나 해스는 의문이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흑색 꼬리가 긴 깃펜을 내려놓았다. 첫 만남부터 의뭉스러운 그녀를 마주 보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이야라.”

“그래.”

“산도르아하고 사이가 좋지 않니?”

산도르아의 친어머니가 하녀인 데다가 몰래 우리 둘을 바꿔치기했다는 소문에, 악랄한 내가 산도르아까지 괴롭힌다는 말이 있긴 있었다. 그것에 대해 둘이 한 번 얘기했다가 웃으며 뒤로 넘어갔었다. 우리의 사이는 뭐랄까 자매라고 하는 것도 애매하고, 친구라고 하는 것보다는 끈끈한 사이였다. 할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비슷하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데.”

나는 이 해스라는 아이가 궁금해졌다. 내게 민감할 거라고 생각한 질문을 서슴없이 날리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해스는 이전에 본 적 없던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이 조그마한 입술에서 뭐가 나올지를 기대했다.

“산도르아가 너에게 숨기는 게 있어.”

“그래?”

“나는 처음에 네가 아는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모르는 것 같아서.”

묘한 적의였다. 해스는 내게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산도르아를 걱정하는 척 내게 말을 걸고 있지만, 실상은 거기서 내게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깃펜을 집었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 아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 이야기였다.

“알았어, 가 봐.”

“궁금하지 않아?”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선을 넘을락 말락 하다가 해스는 뒤로 물러났다. 내가 고개를 들자, 곧장 의자에서 일어난다.

“궁금하면 나한테 와. 내가 알려 줄 수도 있어.”

어째서 내 주변에 내기하듯 제시하는 사람들이 부쩍 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비웃듯이 입술을 비틀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사이 내 위를 감돌던 그림자는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멀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갑자기 시야가 가려진 것은 그 뒤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온 에이버넷이 내 시야를 가렸다. 계단을 한껏 뛰어 올라온 게 분명한 그 얼굴은 살짝 그을려 있었다. 순하던 인상이 한순간에 혼탁해 보였다. 에이버넷은 사과 주스 병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무슨 얘기를 했어?”

“뭐?”

“쟤. 방금 쟤, 말이야.”

에이버넷은 숨이 벅찬 듯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숨을 고르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마치 해스가 들쑤시고 다니는 용건을 아는 듯, 그 아이에 대해서 짤막하게 얘기했다.

“어딘가 이상한 애야.”

“이상하긴 해.”

“엮이지 마. 야라.”

웬만하면 말도 걸지 말고, 듣지 말고. 처음에는 그저 그렇게 넘겼던 해스의 말이, 에이버넷의 말 한마디에 색달라졌다.

산도르아가 숨기는 것. 이상한 애. 엮이지 말라는 에이버넷.

깃펜이 만들어 낸 잉크가 책 한 귀퉁이에 번지고 있었다.

* * *

산도르아는 요즘 들어 매일 웃는다. 예전에도 그렇게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히 요즘 들어 많이 웃는 것 같다. 이것은 폰과 린도 보장하는 사실.

산도르아는 해스와 연습을 하지 않는다. 둘은 더 이상 대화도 하지 않는다. 그때, 식당에서의 대화가 마지막인 것 같다.

해스는 단지 산도르아와 다투고, 그 아이를 음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산도르아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 말을 흘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산도르아는 수상쩍었다. 혹시 몰라 룸메이트에게 살짝 물어봤더니, 요즘 산도르아는 연습을 하느라 늦은 시간에 들어온다고 한다.

산도르아는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건 확실했다.

* * *

에이버넷은 나와 기본 과목을 수강하는 교수도 다르고, 또 해스는 수업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아이였다. 두 사람 다 행방이 묘연했다. 거기다가 쌍둥이에게 이것을 툭 털어놓기에는 산도르아의 명예가 걸렸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산도르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고로 나 혼자 알아봐야 하고, 은밀해야 할 문제였다. 고민이 깊어졌다. 오랜만에 과제를 때려치우고 한가롭게 성을 거닐었다.

에드리트.

그래. 에드리트가 있었다. 에드리트라면 내 말을, 또 산드로아의 일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줄 것이었다. 나는 그 생각에 뛰어 올라가 3학년 교실을 찾았으나, 에드리트는 현재 <제작>을 배우는 중이어서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2학년 과정과 3학년 과정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시간도, 만남도 내기 어렵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이드리하임 상가를 홀로 거닐었다.

어디서부터 단서를 찾아봐야 할까. 우선 산도르아는 지금, 우아한 말씨로 유명한 교수의 <산수>를 듣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내가 기피하고 싶은 과목인 데다가 대뜸 찾아가기도 그랬고, 증거 없이 말부터 꺼낸다면 산도르아가 회피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대략이라도 내가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할 텐데.

“오늘은 혼자네.”

그때, 서늘한 손이 내 등을 쓸어 만졌다. 나를 생각의 구렁에서 기어 나오게 만드는 그 손짓의 주인.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만지지 마.”

일린저는 주위에 친구들을 달고 서 있었다. 매일 일린저를 따라다니는 멍청이 마버드와 시웬이라는 여자애 하나였다. 나는 그들에게 가보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지만, 일린저는 팔랑거리는 내 손을 가볍게 쥐었다.

“같이 놀러 갈까?”

“무슨.”

“넌 촌스러우니까 이런 데, 한 번도 구경 안 해 봤지.”

그때, 시웬이라는 여자애가 조그맣게 항의하듯 말했다.

“아까는 안 간다고 했잖아.”

일린저는 곧바로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억울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웃는다.

“내가?”

사람을 바보 만드는 저 화법에 당하면 화딱지가 나기 마련인데, 오히려 시웬은 일린저에게 기억이 안 나냐는 말까지 다정하게 덧붙였다. 너희들끼리 놀라고 하고 그냥 가려던 차였다. 문득 산도르아의 룸메이트 말이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안 들어왔다던 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린저와 가장 마지막에 들어가고, 우리가 들어갈 즈음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을 만한 곳도 없다. 그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을 것도 아니고.

갈 데가 없었다. 이드리하임 상가에 무슨 단서가 있을까.

“잠깐!”

내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일린저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계단을 빠르게 세 칸씩 뛰어 내려가는 그의 손에 끌려가고, 그 뒤를 시웬과 일린저의 부하인 마버드가 따라왔다.

* * *

고양이 꼬리 맛이 나는 푸딩과 이드리하임의 명물이라는, 흐물거리는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서야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아니, 풀려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해 봐.”

일린저는 눈알이 튀어나오는 해괴망측한 모자를 사서 내 머리에 씌웠다. 나는 곧장 벗어, 그에게 던지려다가 부숴버리고 말았다. 그 값을 물어준 것은 일린저였다. 그즈음 나는 단서 찾는 것을 포기했다. 어쩌다 보니 일린저와 상가를 쏘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끈질기게 쫓아온 시웬과 마버드는 상가에서 유명한 케이크 가게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성의가 대단하다 싶었다.

나도 적잖이 지쳤으므로 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시웬의 눈이 나를 뾰족하게 바라봤다.

아. 눈치가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일린저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냄새나는 마버드의 옆자리에 앉아 줬다. 마버드는 내게 눈인사를 했고, 나는 받아 주지 않았다. 마버드는 머쓱한 눈치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했다.

유명한 케이크 집이라더니. 이곳 주민이 손수 밀가루 묻은 손으로 내온 것은 말 그대로 반죽 모양의 케이크였다. 영 손이 가지 않아서 내버려 두고 있을 때, 케이크를 한 입 먹은 시웬이 상큼하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처음 말해 본다, 그렇지?”

“그러게.”

오늘 이드리하임 상가로 내려온 것은 최악의 결정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고, 이딴 반죽 케이크나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다니. 과제를 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겠다. 곧 시험인데 준비를 얼렁뚱땅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야라.”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는 거지?”

특히 시웬은 점점 나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시웬은 일린저를 좋아했다. 아무리 바보를 가져다가 데려다 놓아도 그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웬의 입장에서야 내가 싫을 게 당연하지만, 그건 나한테까지 당연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일린저와 그런 식으로 엮이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린저와 불 만드는 것을 배울 시간이었다. 피곤하니까 하루만 쉬어 가자고 말하려고 하는데. 고개를 든 순간 살짝 놀라고 말았다. 포크를 입에 문 일린저가 의자에 드러누울 듯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민하는 내 얼굴을 즐겁게 훔쳐본 얼굴이었다. 나는 한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이야라, 내 질문을 듣지 못했니?”

슬그머니 열이 받는 와중에, 시웬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포크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

내가 일어서서 걸어가자마자 뒤따라서 의자를 빼내는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금방 나를 못살게 굴 줄 알았던 발소리는 나를 뒤따라올 뿐이었다. 그 이상한 작전에 뒤를 돌아보자 계단 밑에 선 일린저가 보였다. 약간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의 웃음이 헤펐다. 내가 헛웃음을 치는 사이, 시웬과 마버드가 계산을 마치고 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따라오지 마.”

“분부대로.”

의외로 말을 듣는 모습이었다. 나는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은근히 ‘더 놀지.’ 하며 책망하는 목소리가 내 등에 닿으려다가 말았다. 무시하고 나아가려는 찰나였다. 빛 하나가 날아와 내 어깨에 부딪혔다.

[이따가 봐.]

까먹었다. 오늘은 그만 쉬자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걸 잊은 죗값은 어리석은 몸뚱이가 치러야 했다.

* * *

나는 결국 산도르아의 비밀을 손톱만큼도 캐내지 못했다. 일린저는 나를 돕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한 번 파도를 일으키니 다음번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더 쉬웠다. 사랑하는 빛을 내 마음대로 만드는 것. 밤마다 연습하고 연습한 성과였다. 아직 원하는 만큼의 화력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좋은 성적을 받고 3학년 과정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 내가 며칠 쉬겠다고 말했다. 그러하니 일린저는 답지 않게 단호히 나왔다.

“대강은 안 하기로 약속해서.”

나랑 한 약속인데 참 융통성이 없다 싶다가도 그래, 결국은 네 손해지라는 생각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산도르아의 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날 나는 식사 시간에 산도르아를 만났다. 눈치를 보다가 ‘왜 해스와 같이 연습을 하지 않아?’ 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나랑 성격이 맞지 않는 것 같아.”

산도르아는 남에 관한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산도르아의 말은 끝이었다. 그러나 산도르아는 여전히 들떠 보이고, 반대로 빛의 힘을 가꾸는 데에는 열심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어봐야겠다, 물어봐야겠다, 마음만 먹은 지 며칠째. 이상하게 결심을 하면 일이 터지고, 결정을 하면 일린저가 지칠 때까지 나를 몰아세웠다. 피곤에 절여서 어영부영, 그렇게 지나가는 날이 늘어가다가 어느새 휴가 떠나는 날에 ‘알고 있었어.’ 하며 물어 보자로 바뀌었다. 어차피 내가 증거를 찾아도, 무엇을 해도. 산도르아가 거부하고 입을 다물면 끝이었다. 산도르아와 단둘이, 이 학원을 떠났을 때. 그때 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 *

오늘은 바람을 배웠다. 파도, 불. 그것들은 잘 해낼 수 있었지만 유독 바람이 내게 어려웠다. 날카로운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는 일린저의 말에도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결국 검을 휘날릴 때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었으나, 그것은 저기 멀리 있는 과녁을 흔들기만 할 뿐, 과녁을 적중하지도 부수지도 못했다.

세 시간을 그러고 있었나 보다. 과녁을 흔드는 바람을 지켜보다가 일린저는 나무에 기대고 앉았다. 곤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칼날 같은 바람을 상상하면서 용을 써도, 부드러운 실바람이 눈꺼풀만 간지럽혔다.

그때 일린저가 손을 내밀었다. 그건 자신에게 검을 가지고 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일린저에게 다가가 그의 손 위에 검을 올려 두었다. 돌아서려는데 일린저가 내 손목을 잡아다 끌었다. 제 옆에 앉혔다. 끌어 앉혀진 내 옆에서 일린저가 손목을 휘둘렀다.

그의 주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검 주위에서 바람이 빛무리의 색으로 불었다. 일린저는 과녁이 있는 방향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바람은 날아가며 땅을 갈랐다. 냉정하고, 첨예하게 날아가 과녁을 부쉈다. 날카로운 바람이라는 것은 스치기만 해도 사지를 찢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린저는 조용하게 덧붙여 말했다.

“무언가에 베였을 때 없었어?”

“베였을 때.”

많았다. 하지만 고통을 빛과 접목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에, 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을 채우고자 바닥에 드러누웠다. 일린저는 누운 내 팔뚝을 흔들었으나 나는 꿈쩍 안 했다. 고개를 흔들고 잠을 잘 듯이 몸을 말았다.

나무 아래에 앉고, 누워 있는 우리에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이처럼 부드럽고 순하고, 한편으로는 따스하기까지 하다. 이것으로 무언가를 벨 상상을 해 본 적은 아직까지 없었으므로, 나는 바람에 관한 것은 차일피일 미뤄 두기로 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그래도 빛들과 많이 친해져, 내 생각만큼 따라주는 게 어디란 말인가. 예전에는 일린저에게 모두 붙어 있는 게 서러웠는데.

빛을 쓸 수 있다는 것, 빛을 다루고, 그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 그것만큼은 하루에서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고, 나는 배우는 목적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 밤에, 이 숲속에서 단둘이 이러고 있는지를.

기억난 것은 수고한 빛들을 기특해하고 있을 때였다. 예전에 일린저와 흙바닭 뒹굴며 싸울 적, 심술 나도록 그를 편애하던 빛을 떠올린 그때. 불현듯 우리의 내기가 벼락 꽂힌 것처럼 기억이 나고 말았다.

이대로 있으면 나는 졌다. 그는 시험 끝나기 전이라고 명시해 둔 상태고, 그전까지 일린저를 넘어뜨리지 못하면 나는 꼼짝없이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 했다. 이렇게 삶의 명운을 건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나는 힐끔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린저는 제 손에 오는 빛들을 다정하게 받아 주고 있었다. 일견 천사로 보일 법한 그 모습에 나는 속지 않았다. 아직도 일린저는 나보다 강하고, 또 시험은 코앞이고. 결국에는 치사한 방식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반칙이 안 된다는 말은 없지 않았던가.

“일린저.”

내가 누워서 그를 불렀다. 앉아 있던 그가 눈을 내려 나를 바라본다. 그는 눈으로 왜 부르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봐.”

“내가.”

“네가.”

일린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소를 지을 듯 말 듯한 그의 얼굴이 가까이 왔다. 평소에 떨어져, 꺼져, 사라져만 했음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일린저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한 뼘 가까이 온 순간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다렸다.

“더 가까이.”

그때 일린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재밌으면서도 묘하게 아리송해하는 얼굴, 이걸 잡을까 말까 하는 얼굴. 그러나 그는 아까의 망설임을 지웠다. 내게로 무너지듯 왔다. 우리의 얼굴이 거의 맞닿은 순간이었다. 나는 재빨리 소매치기하던 솜씨를 발휘했다.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잔뜩 모아 놓고 있었던 빛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그의 어깨를 내 양손으로 짓눌렀다. 당연히 반격하리라 생각했던 몸짓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배운 대로, 빛을 움직여 그의 다리를 눌렀다. 그의 상체가 땅에 닿자마자 그 위에 올라탔다. 그의 어깨를 누르고,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일린저 모르온이 내 밑에 깔려 있었다. 양팔은 내 다리에, 어깨는 손바닥에 짓눌려 있고, 양다리는 빛에 제압되어있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일린저 또한 이 내기를 잊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꿈꿔 왔던 대로 그의 위에서 시원하게 웃었다. 눈물을 뺄 정도로 웃으며 그의 패배를 축하해 줬다.

갑자기 낸 생각이었지만 성공했다. 그 짜릿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의 위에서 조롱하듯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일린저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면 패배감을 곱씹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좋았다.

“어쩔까. 이제 내가 왕자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해도, 알겠습니다, 해야 할 텐데.”

거짓말이었다. 그런 소원을 빌어서 어디에다가 써먹겠는가. 다만 나는 아주 그를 비굴하게 만들 곳에다가 써먹을 예정이었다. 상상만으로 통쾌해서 웃음이 멈추지 않는 무렵, 내 밑에 깔린 패배자가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아.”

내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나는 이놈이 정신 나간 얼굴로 누운 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너무 세게 눕혀서 머리가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어디 한군데 부러진 것은 아닐까.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그의 뺨을 한 번 두들겨 보았다.

“정신 차려. 어디 아파? 혹시 머리?”

일린저는 제 뺨을 두드리는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렇게 보다가, 자신의 뺨을 내 손바닥에 살짝 문질렀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제 위에 내가 있든 말든, 무리해서 일어나다가 우리의 입술이 스쳤다. 나는 고개를 다급히 뒤로 뺐다. 그리고 확실하게 판단했다. 이놈이 머리를 다쳐 정상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의 몸을 부축하듯 일으켜 앉혔다. 일린저는 내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일어났다. 얼굴에 구멍이 날까 무섭게 나를 본다. 나는 그 혼몽한 눈빛조차 걱정이 되었다. 자꾸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혹시라도 왕자를 바보로 만들었으면 어쩌지. 나를 불길에 태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앞에 손가락을 마구 흔들었다.

“이거 보여? 몇 개 같아.”

일린저는 가볍게 웃었다. 약간 정신이 돌아온 건가. 그는 헝클어진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세 개.”

다행히 바보는 되지 않았다. 나는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재깍재깍 대답해. 사람 놀래키지 말고.”

“응.”

여전히 이상하긴 이상했다. 나는 혹시나 책임을 물을까 봐, 일린저의 손을 잡고 급하게 일으켜 줬다. 신장은 배로 큰 녀석이 내 손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그는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섰다. 어디 망가진 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그에게 당부를 해 두었다.

“나 그렇게 세게 안 밀쳤어. 어디 피 한 방울도 안 났고.”

일린저는 내 입술을 보다가 내 눈으로, 내 코로 갔다가 다시 내 입술로. 정신없이 눈알을 움직이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알아.”

이례적으로 나는 그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줬다. 혹시나 잘못될까 싶어서 계속 지켜보는데, 이 속 답답하게 만드는 놈이 가질 않고 기숙사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얼른 들어가라고 손을 휘젓자 일린저가 웃었다. 내가 발을 구르며 종이 치기 직전이라고 난리를 쳐도 물끄러미 있기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그를 보고서 그만두었다. 참지 못하고 먼저 등을 돌렸다.

땀나게 뛰어서 간신히 종이 울리기 전에 나는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워낙 놀래서 그런가.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분명 내가 이겼는데. 무언가 찜찜한 기분. 나는 아까 따지지 못한 기억 하나를 생각해냈다. 내 입술을 스친 그의 입술을 떠올렸다.

아니다. 그건 키스 축에도 못 드는 것이다.

나는 기억을 지우듯 황급하게 몸을 흔들었다. 스친 적 없는 것처럼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 * *

부디 내 착각이기를 빈다. 시험이 시작되고 나는 이 시험을 보랴, 저 시험을 보랴. 지금까지 준비한 과제를 제출하고, 또 평가를 들으랴. 여하튼 이 학원 학생으로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에. 시종일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면, 과연 내 착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선은 식사를 할 때 가장 강렬했다. 오죽하면 폰과 린이 시선을 느끼고 두리번거리다가 흠칫 놀라기를 반복할까. 그것은 비단 우리 테이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당에 앉은 이마다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은색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도 안 먹혀서 토마토나 굴리고 있는데, 저 뜨거운 시선 때문에 그조차 먹히지가 않는다. 나는 조금씩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청색의 눈이 좋아서 죽는다. 얼굴을 제 팔에 묻고 웃는다. 무엇이 그렇게 신나는지 마구 웃는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린저 모르온은 그날부터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공부하고 있어도,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보고 있어도, 그는 득달같이 쫓아와 내 앞에 앉는다.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쳐다본다. 저 거지 같은 시선으로 나를 하루 종일 보느라 주변 사람들도 슬금슬금 ‘뭔 일 있어?’ 하며 물어왔다.

내 시선을 받고 깊어진 그의 미소였다. 당황스럽게 보다가 주춤주춤 일어섰다. 폰과 린은 드디어 마음 편히 식사하는 눈치였고, 산도르아는 밀린 숙제를 내느라 자리에 없었다. 마침 다행이었지. 이 자리에 산도르아까지 있었다면 머리가 얼마나 복잡할까.

“이야라.”

“악!”

나는 빈 접시를 올려 두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 기척이 없던 그가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내가 망가트린 일린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한번 내리깐 뒤에 다시 올려서 나를 보았다.

“토마토 좋아해?”

“뭐?”

“토마토만 많이 먹길래.”

아니. 나는 짧게 대답하고 불순한 시선이 가득한 식당을 빠져나왔다. 일린저는 내 기대와 다르게 다 먹지도 않은 제 접시를 내려놓고 따라나섰다. 이상했다. 우리가 마주치면 말을 주고받는 사이긴 했어도 이렇게 하루 종일 보지는 않았다. 그도 그의 수업이 있고, 나도 나의 수업이 있으니까.

“어디 가.”

따라오는 일린저의 목소리 때문에 두 귀를 막고 싶었다.

“시험 보러.”

“시험 하나밖에 안 남았잖아.”

‘그것도 나랑 같이 듣는.’ 일린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발을 우뚝 멈추어 섰다. 식당가에서 야외 테이블로 가는 길은 항상 사람이 넘쳐났다. 몇몇이 우리를 보고 쑥덕거리는 게 느껴졌다.

“일린저.”

일린저는 제 이름이 불리자 환하게 웃었다. 대답할 생각도 없어 뵈는 얼굴에 나는 마음이 선득해지고 말았다.

“열나는 건 아니지.”

“응. 건강해.”

일린저는 갑자기 내 손을 훔쳐 갔다. 제 이마 위에 올려 두었다. 기겁할 만한 행위에 재빨리 손을 내렸지만 이미 주변에 들키고도 남았으리라.

“너 왜 이래.”

“내가 왜?”

“이상하잖아. 지금.”

“모르겠는데. 난 지금 기분이 너무 좋은 것뿐이야.”

이 답답함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가슴을 쿵쿵 내려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말았다. 뒤따라오는 녀석의 앞으로 가서 발을 멈췄다.

“따라오지 마.”

“어디 가는데.”

“미쳤어? 내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해?”

“미치지 않아도 말해 주면 안 될까. 내가 궁금하거든.”

지금의 일린저는 가시덤불에 찔려도 해실거릴 것 같았다. 나는 의욕을 상실하고 조그맣게 ‘기숙사.’라고 답했다. 일린저는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내려올 거지?”

일린저는 아직도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답했다.

“그래.”

당연히 내려갈 생각은 없다. 오늘 아무리 나타리아가 덥다고 난장을 피워도 벽난로 앞에서 숙제를 마쳐야겠다. 웬만하면 밖에 잘 나오지도 말고.

아무래도 이놈의 상태가 정상에서 한참 멀어진 듯하니.

* * *

피해 다니길 며칠. 어느 날 창문에 하이얀 새가 쪽지를 꽂아 두고 떠나갔다.

[언제쯤 볼 수 있어?]

필체와 말투로 일린저인 것을 알았다. 아직도 안 나았다. 아니면 혹시 그러한 전략인가. 내가 소원을 빌지 못하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전략. 이렇게 질려 버린 내가 저를 피하고 다니게.

일리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시험이고, 평생 그를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 * *

기본 과목 시험은 제일 마지막에 치러진다. 중요한 시험을 치르고 며칠 뒤에 휴가를 떠나는 식이었다. 시험에 대한 걱정은 이미 사라졌다. 내 걱정은 다른 놈에게 쏠려 있었다.

“다음.”

파트너 둘이 서서, 한 명씩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다행히 시험장에는 천막이 처져 있었고, 철저히 파트너와 교수님만이 지켜보는 시험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다음 순서는 미리 복도에 나와서 기다리는 게 룰이었다. 내 얼굴을 태울 것 같이 바라보던 일린저는 차례가 오자마자 곧바로 복도에 나가 버렸다. 그 복도로 따라 나가는 내 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얼마나 지옥을 걷는 죄수 같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디에다가 토로할 수도 없는 내 가련한 신세여.

일린저는 천막이 쳐진 곳에 들어가기 전, 푸른색의 벽돌에 기대어 서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의 옆으로 끌려가듯 걸어가 섰다. 약간의 거리는 유지한 채였다.

“답장도 안 하던데?”

그의 편지 같지 않은 편지를 나르는 새가 불쌍했다. 빛을 날려 보내면 될 일이지 구태여 새는 왜 괴롭히느냔 말이다.

“할 말도 없잖아.”

“왜 할 말이 없어.”

“할 말이 있는 게 신기하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웃음기가 빠진 그의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서운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의 팔목을 나도 모르게 붙들었다.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처럼 굴지 좀 마.”

“나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대잖아.”

“그래. 너는 관심 없는데…… 내가 오해를 받는 게…….”

말을 잘 하다가 나는 ‘응?’했다. 잘못 들은 귀를 후비고 싶었다. 중간에 이상한 말이 섞여 있었다. 일린저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나는 그의 손목을 스르르 놓았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숙이며 다가왔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웠다.

“내가 신경 쓰는 게 싫어?”

나는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나를 먼지 구덩이처럼 흙에 굴렸잖아. 그것도 아니면 나를 밀짚 나르듯이 날려 버렸잖아. 아니면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군 것은 다 뭔데. 하도 많은 말들이 내 입에 엉켜서 나오지 않을 때였다. 그의 보드라운 손가락이 나의 입술 언저리를 만졌다.

“왜 대답이 없어…….”

그의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이에 왔다. 코를 스치며 입술을 가까이 붙이려고 할 때. 나는 사고가 멈췄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손이 내 뺨을 붙들려고 다가온 순간이었다. 교수의 냉정한 목소리가 우리를 찾았다.

“다음.”

일린저는 내 입술 위에 한숨을 부드러이 보냈다. 그의 눈이 아쉬운 듯 나를 훑고서 천천히 천막 안으로 걸음 했다. 나는 한참을 있다가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렇지를 못했다.

교수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눈인사를 했다. 나도 가볍게 목을 수그렸다. 일린저가 검을 잡으려 하자,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봤는데 또 봐서 뭐 하나.”

내게 검을 집으라고 유연하게 손짓했다. 나는 준비된 검을 집었다. 교수가 다리를 꼬고 지켜보는 가운데, 그 수많은 기억 중에서 파도만이 선명했다. 내가 빛을 끌어 올려서 물살을 일으켰다. 검 끝에 몰아치는 파도를 보고 교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일린저도 인정할 만큼 배움의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해괴한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차지했다.

나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대잖아.

선택한 기억을 도려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나는 무심코 파도를 앞에 던져 버렸다. 검을 내려놓으려다가 휘둘러 버린 것이다. 한 번도 던져 본 적은 없었다. 내 안의 날뛰는 감정을 잠재우려고 하다가 생긴 일이었다.

굉음이 들렸다. 치마가 젖고, 간신히 눈을 떠 보니 주변이 휑했다. 과녁은 물론, 교수가 애써 준비한 천막까지 파도의 흔적을 따라서 젖은 천막과 움푹 파인 바닥이 보였다. 날아가 버렸다. 바닥은 물로 흥건했다.

“죄송합니다.”

한참 후에야 천막을 주워온 교수는 애매하게 웃었다.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겉으로 웃으면서 판단하는 눈치였다. 교수는 끝끝내 나가기 전까지 평가하는 것을 함구했다. 아무래도 결과는 나보다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먼저 아실 듯했다.

이 창피한 시험마저도.

* * *

겨우 2학년 과정을 다녔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졸업을 앞둔 사람처럼 칙칙했다. 아니 사실은 졸업을 바라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깊이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맥없이 짐을 챙기면서도 ‘휴가 잘 보내!’ 하는 쌍둥이에게 인사했다. 쌍둥이는 편지를 쓰라고 당부하면서도 내게 말할까 말까 하는 눈짓을 보냈다.

“휴가 잘 보내.”

“응.”

“이야라도.”

하지만 내가 막았다. 분명 일린저의 이야기일 터였다. 그는 그 창피한 시험이 끝난 후에 노골적으로 나에게 붙어 왔고,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미 온 학원에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다. 곧 왕자가 서부의 예레 하를 좋아한다는 소식이 온 돔에 뻗을 것이다.

“이야라! 세상에!”

그 소식을 듣고 뺨이 홀쭉해질 만큼 놀란 건 에드리트였다. 3학년 과정이 잘 맞지 않았는지 부쩍 추레해진 에드리트는 내 짐을 들어주며 캐물었다.

“정말 아니야? 응? 소문으로는 이미 둘이 그렇고 그런…….”

“아니야.”

“그러면 왕자가 짝사랑을 하는 거라고?”

에드리트는 필요할 때는 없다가 참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났으니 산도르아의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당장은 머리 맞대고 논의할 기분이 아니었다. 얼른 이 학원을 벗어나기를 바랄 뿐.

“그나저나 산도르아는?”

“먼저 내려가서 마차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산도르아는 발칙하게도 그 소식을 린을 통해서 전해 왔다. 오늘은 기필코 물어볼 예정이었다. 도대체 내게 숨기는 게 무언지. 내가 산도르아에 대한 의리로 해슨인지 해스인지는 찾아가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애는 에이버넷의 말대로 어딘가 찜찜한 면이 있기에.

나는 짐을 실어다 주는 사람에게 마지막 옷상자를 건넸다. 에드리트의 입은 쉬지를 않았다. 시험을 보는 동안 닫혔던 입을 실컷 놀렸다. 토끼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동안 나는 수없이 에드리트를 이 밑으로 밀어 버릴까 고민했다.

“내가 말이야. 생각을 해 봤어. 우리 이야라는 약혼자도 있고. 그러면 이제 짝사랑하는 왕자까지 있잖아. 나는 에이버넷 쪽에 손을 들고 싶지만…….”

그의 꼬리를 물고 빙빙 반복되는 말을 듣다가 정신이 나갈 것 같아, 나는 토끼에게 조금 더 빨리 가 달라고 재촉을 했다. 여기에 일린저까지 합세했으면 뛰어내리고 싶었을 텐데. 다행인 점은 일린저는 예외 없이 휴가철에 가장 먼저 이드리하임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곳 수도인 셉시스의 성에서 살고 있기에, 이드리하임 측에서 특별히 배려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일린저를 보지도 않고 떠나갈 수 있었지만 그 녀석은 그렇게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편지해.]

그렇게 적힌 쪽지를 다름 아닌 룸메이트인 나타리아의 손에 들려 보냈다. 나타리아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입은 가벼운 쪽이었다. 밤낮 떠들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일까. 나는 일린저가 보낸 그 편지를 깔끔히 태웠다.

그럴 리 없지만, 설령 그의 진심일지라도 거절할 것이다. 그건 당연했다. 그러나 학원에 있을 때는 일린저를 마주쳐야 하기 때문에 나는 서부에 가서 정중하게 편지를 보낼 예정이었다. 녀석도 편지를 보낸다니까 답장을 하는 형식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

마차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구름계단을 밟으며 내려온 뒤, 나는 토끼에게 짧게 손을 흔들었다. 토끼는 마지못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점점 친해지는 게 보이지만 오늘따라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생각이 많아 감정이 억압당한 기분이었다.

마차가 일렬로 세워진 곳을 보았다. 익숙한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내려간다던 산도르아가 없는 분위기였다. 하녀가 마차 앞에 마중 나온 듯이 서 있고,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오지 않았다 치더라도 산도르아의 시중 때문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텐데.

결국 하녀의 눈이 내게 닿지 않는 사이, 나는 돌아서 광장으로 달려갔다. 직감이었다. 멀리에 가진 못했을 것이었다. 셉시스에 있을 테고, 셉시스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 광장 쪽으로 달려가다가 골목길 사이사이를 꼼꼼히 살폈다.

내 감을 지표 삼아 달리고 있었다. 작년 이곳에서 이방인의 그림자를 보았다. 잘못 봤다고 생각한, 한쪽으로 미뤄두었던 기억이 선명해져 가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증명하듯, 내가 뒤를 돈 그사이에, 분수대가 뿜어지는 그 광장에서. 나는 구슬 같은 물줄기에 가려진 골목길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키가 그사이에 더 컸다. 낡지만 단정한 재킷을 입고 있었다. 경비병도, 외곽으로도 나가지 않은 듯싶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산도르아였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인지, 손을 잡고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는 눈치가 바닥이어도 알 수 있었다. 산도르아는 애달픈 사랑에 빠져있었다. 남자 쪽은 모르겠다. 산도르아를 어루만지지만 저 남자는 사랑에 빠진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산도르아를 이용하려는 건지. 내가 그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산도르아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사랑에 빠진 척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내가 이 비밀을 산도르아에게 물어도, 그 아이가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 * *

[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아? 식사를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심지어 누군가와 대화 중인데도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내 머릿속을 열고서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그리고 내 머리통 속에서 이렇게 외치지. 나 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머릿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나는 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지.

어때? 너는 그런 경험이 없을까. 나는 요즘 매일 겪고 있는, 일종의 병이야.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네가 계속 보고 싶지 않냐고 묻기에, 너무 보고 싶다고 답해 버렸어. ]

[ 어제 머리가 아프도록 내 머릿속을 방문해서 꿈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꿈에 나와서 내게 부드럽게 웃어 주는 거야. 네가 내 위에서 행복하게 웃었던 그날처럼. 답장을 한 번도 받지 못하는 지금을 생각하면, 그때가 마치 꿈같아. 네가 빛과 함께 내 위로 쏟아져, 내 위에서 웃으며 뒹굴었던 것. 그때 네가 입맞춤을 허락해 줬으면 더 행복한 날이었을 텐데.

PS. 꿈에 나온 네가 무엇을 했는지는 영원히 말해 주지 않을래. ]

[ 엊저녁에 끔찍이 앓았는데. 왜 한 번도 답장을 해 주지 않는 거지? 손가락이라도 부러졌어? 내 편지가 잘못 가고 있는 건가? 설마 이게 다 내 망상이라든가, 네가 사실은 없는 사람이라든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걱정이 돼서 네 이름이 정말 위테르발도 가문에 올라가 있는지 확인하고 왔거든. 분명히 있던데. 왜 답을 안 해 주는 걸까. ]

[ 짧은 답장이라도 좋으니까 보내 봐. 숨 막혀서 내가 죽을 수도 있잖아. 날 죽이고 싶다더니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 거야? ]

나날이 쌓여 가는 편지의 두께만큼 나의 한숨도 깊어졌다. 우리 성에는 새벽마다 새 두 마리가 날아온다. 하나는 가엾은 일린저의 새고, 한 마리는 이방인과 아슬아슬한 사랑에 빠져 있는 산도르아의 새였다. 말로는 북부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다고 하지만, 실상을 다 아는 나한테는 그것은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다.

일단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손가락 사이에 깃펜을 꼈다. 나는 더운 이마를 누르면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다. 더는 이 편지가 내게 돌아오지를 않길 바라며, 우리의 관계가 예전처럼 적당한 거리가 있기를 바라며.

[ 일린저 모르온.

나는 네가 내기를 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내기는 내가 너를 넘어뜨리는 것이었고, 나는 그날 그것을 해내서 이겼을 뿐이야. 거기서 네가 무슨 특별한 감정을 느꼈든,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에 불과해.

나는 지금도 내 문제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 돌려 말하는 것을 못 하니까 그냥 얘기할게. 혹시라도 내게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이라면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학원에서 말하지 못한 것은 네 체면을 생각해서고. 혹시 그것으로 네가 착각할까 봐 덧붙여서 쓴다. 잘 지내기를 바라. 남은 휴가도 잘 보내고.]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먹겠다 싶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새의 날갯짓 소리만 들려도 잠이 홀딱 달아났다.

“편지 써?”

“아니. 별거 아니야.”

에드리트에게 산도르아의 일을 의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 섞인 사촌밖에 없었다. 산도르아를 내버려 둬야 할지, 아니면 무슨 제재를 가해야 할지에 대해. 솔직히 후자는 내가 나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산도르아의 그 눈은, 내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에드리트는 몇 번이고 어머니와 할아버지께 이르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일을 은밀하게, 빠르게 처리하고 싶어 했다. 산도르아에게 해충이 붙어 있다며, 아주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새삼 나는 산도르아가 이래서 우리에게 의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내가 알아 왔어. 아주 은밀히.”

그나마 우리 중에 자유로운 건 에드리트였다. 그는 위테르발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어느 정도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있어서 알아볼 능력은 조금 됐다. 정확히는 알아내지 못하겠지만 어떻게 셉시스 광장에 드나들게 되었으며, 그것도 성내에서 뭘 먹고 사는지부터 알아 와 달라고 했다.

에드리트가 가져온 조사서에 의하면 키르얀, 이 자는 경비병이 아니라 외곽으로 차출될 예정이었다. 그러다가 당사자끼리만 아는 이유로 대기 상태가 되었다. 외곽도 경비병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셉시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문이었고, 그건 에드리트도 마찬가지이지만 정확한 사정까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잔심부름 같은 것을 해 주며 빌붙어 있나 봐. 가끔 윗사람들 눈에 띄면 외곽으로 보내는 대신에 제 밑에 두고 수족처럼 부리는 이들이 가끔 있거든. 그것도 아니면 밉보여서 쫓겨난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운이 좋은 거네.”

여하튼 이것으로 키르얀이 셉시스에 있고, 산도르아가 또 그를 만나기 위해서 매번 셉시스 광장에 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보통 이드리하임의 학생들은 학원 내 상점가에서 놀지, 구태여 하늘 밑에 셉시스까지 가질 않는다. 토끼의 손을 붙잡고 매번 내려갔다 오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점가는 기숙사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지만, 셉시스에서 올라오는 구름 계단은 시간 관리를 잘해야 했다. 삐끗하다가는 못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귀찮게 시간을 계산할 바에는 차라리 이드리하임 내에서 놀자는 사람이 다수였다.

늦게까지 외출하는 산도르아, 그리고 셉시스에 남게 된 키르얀, 딱 맞아떨어지는 산도르아의 행적들. 산도르아는 심지어 성적까지 떨어졌다. 과제를 미루고 미뤄서 낸 적도 있고, 작년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법한 성적을 받아왔다.

그러니까 문제였다. 산도르아를 뒤바꾸어 놓을 정도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마음에 칼침을 꽂는다면, 산도르아와 영영 데면데면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단숨에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엊저녁 성적이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천막을 무너뜨렸음에도 흡족한 성적을 받았다. 기타 과목보다 기본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어머니나 할아버지나 눈에 띄게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는 시중드는 것처럼 내 접시에 음식을 옮겨 주었고, 어머니는 당연한 것을 해냈다는 말투였지만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예레카가 될 아이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할아버지는 나와 산도르아,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 산도르아의 성적은 모두가 말을 아꼈다. 어머니는 학원에서 늘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나는 산도르아의 성적 하락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키르얀인지 뭔지. 처음 봤을 때부터 영 불안하더니.

그렇다고 함부로 말을 꺼낼 순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은 산도르아가 눈을 속여 가면서까지 만나고 있는 상대였다. 걸리면 자신의 평판은 물론, 키르얀이 위험해질 것까지 알면서도 말이다.

“산도르아, 이야라.”

생각에 빠져 접시에 칼질만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할아버지의 눈은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지만 긴히 할 말이 있으신 얼굴이었다.

“이야라.”

“네.”

“위드먼은 만나 봤니?”

“네?”

어머니는 입가에 냅킨을 찍으며 말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부담 가지진 말고.”

위드먼이라는 이름이 단박 떠오르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중요 순위 열 번째쯤으로 밀려난 에이버넷 위드먼을 기억해냈다.

“만났긴 만났죠.”

생각에 잠긴 어머니가 냅킨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떻든?”

“글쎄요.”

거기서 그만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내가 무언가를 말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요 며칠간 묻어두었던 에이버넷 위드먼에 대한 기억을 쥐어짜 냈다.

“착한 것, 같은데.”

“착해?”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나이프를 쥐었다. 결 좋은 등심살을 썰며 눈치를 보는데,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얼굴이었다. 특히 할아버지가 그랬다. 눈썹이 축 늘어져, 기대와 다르다는 반응이었다.

“특별한 감정은 없는 거로구나.”

“서두르지 않아도 좋아요. 겨우 2학년 과정을 지냈을 뿐인데.”

할아버지의 실망한 목소리 뒤에 어머니의 반박이 들어왔다. 이쯤 되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위드먼이랑 나랑 친해져야 하는 거구나. 고기를 씹으며 무심결에 눈을 돌렸는데,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에드리트가 보였다. 에드리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었다.

에이버넷 위드먼이 약혼자로 물망에 올랐으며, 이미 어른들끼리 얘기가 되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잿가루를 삼킨 것처럼 목이 탔다. 축이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나이에 약혼자. 귀족 사회는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지 몰라도, 약혼이나 혼인이나 아직 모르고 싶은 주제였다.

적어도 졸업 후에나 나누어봄 직한 얘기였다. 애를 낳고 사는 내가 실감이 안 났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장작을 넣듯 하나를 더 얹었다.

“모레쯤 위드먼을 초대할 생각인데.”

육즙이 퍼져 나오던 고기가 모래로 변한 것처럼 퍼석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산도르아는 그즈음 나이프를 놓았다.

“이번 시험을 잘 못 봐서 죄송해요. 다음 시험에는 더 노력할게요. 위드먼이 온다니까 좋아요. 재밌고 자상한 사람이라서. 저는 다 먹었는데, 이만 올라가도 될까요?”

다들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 산도르아가 황당한 눈치였다. 산도르아를 바라보면서, 할아버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산도르아.”

산도르아는 식탁 밑에서 손톱을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불안하다는 감정이 바로 옆자리인 내게 전해졌다. 눈치 빠른 에드리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색해지는 찰나,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말문을 텄다.

“아킨 페네크와의 약혼이 불발된 것이 안타깝구나, 산도르아.”

“안타깝긴요. 자기가 벌린 일인데요. 바예레카 가문의 사람이 자신이 모실 예레카에게 대들다니.”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말에 비아냥대듯 말했다. 아킨 녀석은 돌이킬 수 없는 눈도장이 박힌 것이다. 할아버지도 인자한 미소로 어머니의 말을 받아 줬다. 할아버지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거린 뒤, 천천히 포도주로 입술을 적셨다. 그러고는 잔을 내려놓는 순간에 산도르아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산도르아.”

산도르아는 땀 흐른 손을 치마에 닦고 있었다.

“네.”

“새 약혼자는 4학년 과정을 밟고 있는 크로슨 가문의 장자야. 혹시 본 적이 있니?”

에드리트가 의자에서 튕겨 나듯이 일어났다.

“크로슨이요?”

“에드리트는 아는 모양이구나.”

배워둔 가문이었다. 크로슨은 바예레카, 예레카의 가문은 아니었다. 남부에 자리 잡은 귀족으로 알고 있었다. 몇 달을 영향력 있는 가문 이름만 외웠으니, 명예가 빠지는 가문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산도르아의 얼굴은 질려있었다. 밀치면 가루가 묻어날 것처럼 하얬다.

“너무 이른 결정을 하셨어요, 할아버지.”

처음으로 산도르아가 화를 담았다. 산도르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아는지, 어머니도 얼굴을 굳혔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에드리트는 숨이 막혀 죽겠는지 헛기침을 했다. 나는 연이어 떨어지는 불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에이버넷에 이어 이번에는 산도르아의 약혼자라니.

“아킨 페네크와 약혼을 깬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사람들이 분명 수군거릴 거예요. 적어도 졸업을 하고 나서야…….”

“졸업을 하고 나면 늦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니. 디아.”

“그래도 너무 성급하셨어요.”

할아버지가 몇 마디 더 하기도 전에 산도르아는 의자를 밀었다. 인사 없이 벗어나려는 산도르아의 몸짓은 일견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에드리트도 그런 산도르아가 걱정되어 같이 일어나려는 차였다. 의자를 빼내는 에드리트를 보던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물었다.

“에드리트.”

“네, 네?”

“앉아라.”

산도르아는 이미 문을 열고서 빠져나간 후였다. 에드리트는 일어서려는 것도, 앉으려는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를 취했다. 할아버지의 눈빛에 금세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쫓아 나가고 싶어 안달 난 눈이었다. 할아버지는 식탁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산도르아, 학원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있어 보여요. 성적이 떨어진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날카로운 시선이 잠시 나를 향했지만, 곧 네가 뭐를 알겠냐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타깃은 내 옆에 앉은 에드리트로 변했다. 앉은 두 분의 표정은 산도르아가 나가자마자 급격할 정도로 바뀌었다.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했다는 듯, 산도르아에 대한 것을 서슴없이 물어왔다.

“에드리트. 네가 보기엔 어떠니. 잘 적응하는 것 같아?”

“아…… 음, 그게.”

“학년은 달라도, 산도르아는 너와 친하잖니.”

에드리트는 난감하다는 눈치였다. 목 뒤로 손을 넣어서 긁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불안해진 것은 나였다. 저러다가 까딱하면 산도르아의 비밀을 다 풀게 생겼다. 나는 달싹거리는 에드리트의 입술을 보고, 식탁 밑에서 그의 구두를 짓밟았다. 에드리트는 헛기침을 더욱 세게 했다.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별문제 없어요.”

결국 내가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먼저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아무래도 나와 에드리트에게 무언가를 파내기는 글렀다는 얼굴이었다. 어머니나 할아버지는 깔끔하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식사는 여기서 끝이었다. 나도 똑같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살벌한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어머니는 평소처럼 내 머리칼을 쓰다듬은 뒤에 침실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또한 별말씀은 없으셨고. 그래도 나의 염려증은 녹이 슬었다. 에드리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바르르 떤 그는 할아버지가 사라지자마자 목소리를 냈다.

“아마 곧 들키겠는데.”

내 침실까지 쫓아와서 에드리트는 걱정을 흩뿌렸다. 안 그래도 무럭무럭 자라는 걱정을 에드리트는 수확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몸을 푹신한 의자에 완전히 내맡겼다. 에이버넷이 모레면 이곳에 당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와 연관된 기억의 끝에서 의문점이 걸려 나왔다.

“에드리트.”

“응.”

“해스, 라는 애. 알아?”

“해스?”

일린저와 연인이냐고 묻고, 산도르아와 별로 친한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산도르아의 비밀을 약 올리듯 말했던 그 아이. 이 일의 시발점은 해스의 말이었다.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도 모르고, 유령처럼 숨어다니는 애. 에드리트도 생판 처음 듣는 이름이란다.

“알아봐 줘?”

“아니.”

모레 오는 에이버넷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분명 해스가 이상한 애라고, 어울리지 말라고 그랬었나.

과연 그 아이는 무엇일까.

* * *

자존심, 양심을 내다 판 일린저 모르온의 편지로 시작됐다. 새가 홀쭉해지도록 편지를 날려 보내다니. 나는 익숙한 한숨으로 편지를 열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마음을 품었는데?]

짤막한 말로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구겨서, 쓰레기처럼 버렸다. 교묘하게 말을 돌리고 있지만, 녀석은 깐죽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화가 났다. 호감보다 녀석의 새로운 장난이란 것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예레 하.”

하녀가 문을 빼꼼 열고 들여다봤다. 한 시간만, 두 시간만 하던 내가 나오지 않으니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구겨진 편지를 주워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예레 하. 따로 필요한 준비는 없으신가요?”

나는 없어, 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일린저의 편지가 올 것만 같아 준비를 다 했음에도 침실에 확인차 들어가 봤던 것이었다. 역시나 부리에 편지를 물고 온 새가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누가 볼까 봐 얼른 그걸 숨길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하녀가 정원에 꽃이 지기 시작했다며, 안으로 모실까 밖으로 모실까 고민했다고 했다. 나는‘그래?’라는 대답으로 넘겼다. 오랜만에 입은 치렁치렁한 옷이었다. 구두 끝으로 종아리를 긁으며 내려가자, 뒤따르던 하녀가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영 숙녀의 자태는 아니지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숙녀의 자태고 뭐고, 밑단이 바닥까지 늘어진 옷은 활동이 불편한 데다가, 등과 종아리가 따갑고 간지러웠다. 허리는 두 번 졸라매는 바람에 숨쉬기도 불편했다. 내가 손을 등으로 돌려 리본을 느슨하게 한 그 순간이었다. 이마 위로 그림자가 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예레 하.”

손님인 에이버넷 위드먼이었다. 그가 온다고 했던 모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리본을 푸르던 손을 급하게 내렸다. 정원에 있다던 사람이 왜 문 앞까지 나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으니, 나도 대강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 줬다.

에이버넷은 머리칼과 엇비슷한 밀밭 색의 재킷을 입었다. 그가 팔짱을 끼도록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못 본 척 앞서서 걸었다. 에이버넷이 내 민망스러움을 아는 것처럼 웃었다. 나는 준비된 정원 테이블을 보자마자 뛰듯이 걸어가 앉았다.

“예레 하. 제가 의자를 빼 드렸어야 하는데.”

“그냥 앉아.”

에이버넷은 미소를 숨기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앞에 놓인 찻잔 같은 것을 보아하니 어머니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두 어른께서 자리를 비켜 주신 것을 보건대 에이버넷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것 같은데. 나는 따져보는 듯한 시선으로 에이버넷을 보았다.

다정함이 스며든 눈과 입매, 눈이 편안한 연한 갈색의 머리칼. 얼굴도 준수했으나 사랑까지는 모르겠다. 그가 다정하고 여러모로 장점이 있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왜 혼인을 앞에다가 가져다가 붙이면 거북한 것일까. 아직 반려의 의미, 혼인의 의미를 모르는 철부지라 그러한 것인가.

“예레 하.”

“편하게 불러.”

“그래도 될까?”

학원에서 야, 너, 하다가 밖에서는 딴청부리듯 높이는 게 어색했다. 나는 앞에 놓인 쿠키를 한 움큼 집어서 입 안에 넣었다. 아침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이야라.”

진지한 표정을 씌운 에이버넷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내 손목 근처에 왔다가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 내 손목이 아닌, 애초부터 주전자를 집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손이 우아하게 주전자를 들고, 비워진 내 잔에 검은 찻물을 따랐다.

“천천히 먹어.”

우리 안에 돼지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입맛이 떨어져 찻잔을 쥐고 흔들었다. 에이버넷은 콧잔등을 긁으며 웃었다. 이쯤이면 해스에 대해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었으나, 적절한 틈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에이버넷이 오자마자 약혼에 대해 아는지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약혼에 관한 것이 아니라도 그가 사뭇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올 줄 알았다.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살갑게 다가오리라 생각했는데.

에이버넷은 그저 초대받아 놀러 온 손님처럼 디저트를 몇 입 하거나, 추위에 시든 정원을 칭찬하거나 익히 아는 학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그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어차피 약혼은 어른들의 선에서 정리되는 일일 테고, 우리는 군말 없이 따르는 게 당연한 수순일 테니. 나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득이 될 것이 없으리라 판단한 걸까.

에이버넷이 찻물이 비워질 때마다 따라 준 덕분인지 갈증은 없었다. 디저트도 원하는 만큼 먹어서 배가 부르고, 바람은 선선하며, 둘이서 휴가다운 휴가를 즐기는 기분이었다. 잠시 우리에게 정적이 찾아왔을 때였다. 둘 다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라 말의 흐름이 끊길 때가 자주 있었다. 나는 지금에야말로 적기라고 생각했다.

“저기.”

“이야라.”

그건 에이버넷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서로 할 말이 따로 있었던 듯,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듯, 나와 동시에 말문이 트였다. 서로의 눈을 보며 억지로 입매를 올렸다. 속내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이버넷은 다정하게 내 쪽으로 손을 들었다.

“먼저 말해.”

나는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해스라는 애, 지난번에 아는 듯이 말하던데.”

에이버넷의 엄지가 찻잔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약삭빠르게 숨긴다고 숨겼지만, 의젓한 자세는 깨진 후였다. 인지하지 못한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그는 분명 해스라는 아이를 알고 있었다. 나는 진실을 기다렸으나, 미소를 띤 에이버넷은 건조한 말의 부스러기만 흘렸다.

“글쎄. 나도 소문으로 들은 게 전부라.”

진실을 쏙 빼어내, 건조하고 말라비틀어진 말.

“소문?”

“별로 좋은 소문이 아니라서. 그저 너한테 조심하라고 일러둔 것뿐이야.”

에이버넷은 그 외에는 해 줄 말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무언가를 숨기는 게 분명한데, 그 무언가를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캐물을수록 더 철저하게 숨기리라. 도대체 뭘까. 사적인 호기심이 불길한 생각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위험한 아이인가. 그런 아이가 산도르아의 비밀을 지니고 있어도 되는 건가.

“이야라.”

고민에 빠져 있는 내게, 자신의 차례라는 듯 에이버넷이 말문을 열었다.

“나도 물어도 될까.”

“말해.”

“왕자와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

하나씩 주고받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일린저는 정체 모를 감정이 있고, 나 또한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일린저의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나는 그에게 지속적인 분노와 황당함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이변이 없는 이상 내가 네 정혼자가 될 거야. 나는 우리가 끈끈한 연인이 될 수는 없더라도, 같이 서부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신뢰를 말하는 사람치고 숨기는 게 많아 보였다. 그래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내가 에이버넷이 싫다고 떼를 써도, 어머니나 할아버지는 다른 약혼자를 물색할 것이다. 어제 산도르아만 보아도 그랬다. 아마 아킨과의 약혼이 깨지자마자 후보감을 찾아두셨을 터다.

내가 후계자가 된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쯤은 누가 언질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괴롭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 일 같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애초에 먹고사는 게 중요했던 사람이었다. 혼인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야라.”

나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렸다. 에이버넷이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서부를 이끌어 나갈 때, 나는 뒤에서 너를 돕고 싶어. 자라는 내내 그렇게 배웠고.”

“그래서.”

“모르온 왕자와 특별한 사이인 것은 아니지?”

예비 약혼자로서 미리 단속해두려는 것일까. 하얀 장갑을 낀 에이버넷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까닥거렸다.

“아니야.”

에이버넷은 대답이 끝나자마자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다.”

나와 일린저는 사이가 진전될 일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다정해 보이는지는 모르지만, 일린저는 나의 괴로움에 집중을 두고 있고, 나는 복수하는 것에 집중을 둔 관계였다.

그럼에도 일린저와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일린저의 편지, 약혼자, 그리고 소문을 타고 늘어난 시선까지. 나의 부정은 힘이 없었다. 일린저에 관해서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어디 한두 개인가.

“왕자가 널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학원으로 가면 보통 피곤한 게 아닐 터였다. 휴가 내내 편지를 보낼 정도의 열성이 식을 리 없었다.

나는 찻물을 마저 들이키면서 말했다.

“소문은 소문이지.”

일린저와는 내기 때문에 부쩍 가까워졌다. 더불어 왕이 될 사람이며, 내가 모셔야 할 군주였다. 그래서 쓸데없이 마음만 무거운 거라고 생각했다. 책상 서랍 속에 쌓여 가는 그의 편지도 그렇고. 더 나쁘지도, 더 좋지도 않게. 일린저의 현란한 독주가 멈추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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