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드리하임
나는 줄곧 창가에 이마를 기대고 갔다. 커튼 밖으로 보는 겨울 풍경이 아름다웠다. 바람 때문에 양 뺨이 붉어진 사람들이 입김을 하, 호 불었다. 맨손바닥을 비비며 어디론가 바쁘게 걷고 있었다.
나는 수도인 셉시스로, 이드리하임으로 간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돔의 수도는 말로만 들었을 뿐더러 학원이라는 장소는 부담스러우리만치 낯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위테르발도의 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꽉 맨 푸른색 리본이 갑갑했다. 무엇보다 이 지루한 여행은 울적한 산도르아와 함께였다. 할아버지의 엄포를 들었으니 오죽 속상하겠는가마는, 나는 어른들의 결정이 마냥 나빴다고 볼 수 없었다.
산도르아는 펄펄 뛸지도 모르지만, 나의 기준에서 그녀는 물정 모르는 아가씨일 뿐이었다. 조막만 한 소매치기 아이들의 눈에도 매력적일 먹잇감이, 청년에 가까운 이방인 눈에 맛없어 보일 리가 없었다.
“곧 도착이네.”
며칠간 데쳐놓은 시금치처럼 시들하던 애였다. 별안간 트인 산도르아의 입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
“응, 사람들의 옷차림부터 달라지니까.”
산도르아의 말대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치렁치렁하거나, 거리낌 없이 담뱃대 끝에 불을 붙였다. 부랑자나 이방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길바닥에는 그 흔한 사탕 껍질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인들은 굽이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사내들은 깜장 지팡이를 끌며 걸었다.
“이야라.”
곧 마지막 숙소에 들리기 전이었다. 산도르아는 담담하게 책 한 권을 전했다.
“이게 뭔데.”
“내가 정리한 책. 글을 배우는 데에 도움이될 거라고 전해줘.”
직감적으로 내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주변에는 할아버지가 심어둔 사용인뿐이었다. 산도르아가 직접 뒷마차에 탄 녀석에게 접근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산도르아는 내게 그것을 부탁했다. 내가 거절한다면 산도르아의 미련은 풀 길이 없어졌다. 미련이 질겨지기 전에 받을 건 받고, 줄 것은 주는 게 나았다.
오랜만에 마차에서 내렸다. 뻐근한 허리를 돌리며 뒤에 선 마차로 걸어갔다. 그 마차에는 짐을 싣고 온 하녀 두 명, 호위처럼 보이는 이가 셋, 그리고 병사로 자원한 이방인이 끼어있었다.
“이거.”
이방인은 반응이 느렸다. 내가 내민 책을 물끄러미 보더니 받지 않았다. 그가 주춤하며 물었다.
“나한테 주라고 하던가요?”
말솜씨가 많이 늘었다. 예의의 싹이 잘린 이방인이 아닌, 그 나이에 봐줄 만한 청년 같았다. 이제 와 말투가 유창하든 어눌하든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받아.”
비극을 전달하는 비둘기 노릇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방인이 책을 받자마자 돌아섰다. 숨이 꼴까닥 넘어갈 만큼 절절하든 괴롭든, 여기서부터는 끝난 인연이었다.
멀미가 날 만큼 피곤했다. 빳빳한 리본을 풀면서 마차에 오르자, 산도르아가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전해줬어?”
“어.”
“다른 말은 없었고?”
“없었어.”
산도르아는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고작 물건 전달 비둘기였냐는 눈빛이었다. 그러면 내가 끌어안고 따독따독 달래줬어야 했나.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마차는 오른편으로 꺾어 들어가 셉시스의 성문으로 진입했다. 두 개의 마차는 여기에서 갈라졌다. 우리는 성내로 들어가고, 뒤따라오던 마차는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산도르아는 그때 잠시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셉시스의 상징물은 소의 머리를 하고, 새의 날개를 달고, 사자의 등과 말의 발굽을 지녔다. 그 흉한 동상이 셉시스 중앙 광장에 있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셉시스에는 더러움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깨끗이 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비슷한 생김새로, 비슷한 겉옷을 걸치고, 비슷한 머리 모양을 했다. 정교하게 수치를 계산해서 만든 돌바닥은 모난 곳이 없었으나, 나는 셉시스에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마음이 식어갔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도시였다. 기대가 나가 죽었다. 내가 마차 의자에 등을 푹 기대앉자, 앞자리 산도르아가 갸웃거렸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어?”
“응.”
“우리 성이 더 나아.”
학원에 대한 기대감도 많이 나자빠진 차였다. 산도르아는 마차의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이드리하임은 다를 거야.”
“왜?”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아.”
예언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산도르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는 우리 사이에 말이 없을 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하녀가 어깨에 쌓인 흰 눈을 털며 재촉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목소리에 나와 산도르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마차의 안으로 눈이 들이쳤다. 바깥을 보았다. 우리의 앞부터 뒤까지 마차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입학을 위해 몰려든 모양이었다. 저 안까지 들어가는 데만 해도 진종일 걸린다고 하니, 짐마차는 뒷길로 들어오고, 우리는 먼저 숙소에 가서 쉬라는 얘기였다.
우리는 하녀의 의견에 따랐다. 냉혹한 셉시스의 겨울, 정체된 마차에서 얼어 죽는 것보다 눈사람이 되는 게 나았다. 내가 서둘러 내리고, 뒤따라서 산도르아가 내렸다. 마부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거대한 오크나무의 속을 파내어 만든 가게가 즐비한 거리였다. 사잇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골목골목에 아담한 소품점도 보였다. 유리창에는 사탕이나 계피 과자, 땅콩 초콜릿, 막대 사탕이 진열되어 있고, 기름 먹인 가죽 구두를 신은 아이들이 거기에 다닥다닥 붙어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굴뚝이 연상되는 가게는 신사용 파이프를, 주황빛이 흘러나오는 옆집 가게에서는 구두 모양의 간판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구경하는 중간 같은 제복을 입은 아이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 일부는 눈인사를 해왔고, 일부는 저들끼리 붙어 쑥덕쑥덕 귀엣말을 나누었다. 시비를 거는 모양새에 주먹을 쥐었지만, 산도르아는 구경이나 하자며 나를 이끌었다. 산도르아는 평온해 보였다. 호시탐탐 지갑을 노리는 유혹도 곧잘 뿌리쳤다. 갓 구운 케이크를 시식해 보라는 곳에서 발이 멈추긴 했어도, 계산을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쇼핑한 물건을 자랑하듯 안고 다니는 모두가 화기애애했다. 나는 들뜬 분위기에 한껏 취해 여러 가게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산도르아는 그런 나를 위해 잠시 발을 늦추어주다가, 내가 유독 관심을 가지는 곳에서는 함께 멈추어 구경해 주기도 했다.
내 마음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푸르른 등불이었다. 이거라면 하나 구매해봄 직했다. 조그마한 네모 유리 안에 갇힌 불은 요정의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가, 뛰어다니는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 네모난 등에 갇힌 불이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새의 모양, 나비의 모양, 새싹의 모양 등으로 변했다.
“빛의 힘을 이용해 만든 거야.”
낯선 목소리가 나타나 설명을 했다. 나는 창가에 붙었던 얼굴을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같은 제복을 입었다. 하얀 셔츠에 푸른 타이, 달라붙는 진회색의 바지, 연한 갈색의 눈과 머리칼.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인상이었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 남자애는 부끄러운 양 웃었다.
“불편했다면 미안해. 보통 학원에서는 존칭을 쓰지 않으니까.”
“네가 누구였지?”
“음?”
눈에 띄게 당황한 그 애는 귀까지 빨개졌다. 소개를 하지 못하고 한참 갈팡질팡했다. 한심한 모습에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타난 산도르아가 아는 체를 했다.
“위드먼. 여기서 보는구나.”
위드먼. 들으니까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서부의 바예레카 중 하나. 만찬에서 산도르아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애.
“다들 이쯤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모양이야. 우리 계속 길이 겹쳤었는데. 몰랐지?”
“그랬구나. 우리는 숙소에 가기 전, 잠시 가게를 둘러보는 중이라.”
“레이디는 입학 전에 준비할 게 많지. 이해해.”
구경 조금 한 것 가지고 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 내가 그냥 지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위드먼이 앞을 막아섰다.
“저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가게의 간판이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지만 한곳에 오래 서 있으면 손발이 시렸다.
“할 말이라도 있어?”
위드먼은 민망해하며 가게의 창문을 가리켰다.
“괜찮다면 내가 사 주고 싶은데.”
“네가?”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묘지기가 아니고서야 등불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내가 뚱한 얼굴로 있자, 위드먼은 한층 더 얼굴이 빨개졌다. 그나저나 뺨이 홍당무 색일 정도로 수줍어하다니. 내가 아킨의 뺨을 후려갈기는 모습을 봤음에도 수줍어한단 말인가.
“사주지 않아도 돼.”
“어, 응.”
“가자, 산도르아.”
산도르아는 ‘그럼 입학식 때 봐. 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위드먼도 맞추어서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를 해 주었다. 우리는 짧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눈 내리는 셉시스의 골목은 생각보다 좋았다. 겨울이 오면 언젠가 다시 한번 오고 싶을 만큼.
* * *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불 때문인지 잠을 설쳤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가누기 힘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방 밖으로 나왔다. 산도르아도 눈 아랫부분이 거무스름했다. 숙소의 상태가 영 별로인 게 맞나 보다. 우리 둘은 꾸벅꾸벅 졸면서 제복을 입고, 숙소를 나갔다. 날씨는 기분과 상관없이 좋았다.
우리는 퀭한 눈으로 안내된 길을 따라 걸었다. 가는 중에도 똑같은 흰색 셔츠에, 푸른 리본에, 종아리를 덮는 회색 치마를 입은 아이가 여럿이었다.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와.”
그러나 나의 심드렁함은 구름계단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털 단장을 한 토끼 한 마리가 사람 둘을 맡았다. 토끼는 차례가 오면 뒷발을 구르다가, 신호에 맞추어 하늘로 도약했다. 토끼는 떨어지며 구름계단을 사뿐히 밟고, 다시 하늘 위로 뛰어오르고, 양옆에 사람을 끼고서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안개에 가려진, 하늘 위에 뜬 섬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손가락에도 보송한 털이 닿았다. 성질 사나워 보이는 토끼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끼의 반대편에는 산도르아의 손이 잡혀 있었다. 토끼는 우리 두 사람의 손을 잡아서 앞으로 끌었다. 산도르아와 나는 토끼의 손에 이끌려 하얀 구름을 밟았다.
구름은 의외로 단단했다. 폭신폭신한 구름이 구두 밑에서 통통 튀었다. 토끼의 튼실한 뒷발이 땅을 밟고서 날아올랐다. 자연히 나와 산도르아가 딸려갔다.
“하하!”
높이 날아오르다가 금세 땅으로 꺼지고, 다시 구름을 밟고 위로 날아오른다. 두 활개를 크게 휘저을 만큼 신이 났다. 토끼가 팔을 잡아끌며 째려봤다.
“토끼가 왜 나를 저렇게 보지?”
“시끄러운가.”
우리는 시선을 나누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산도르아도 그간의 그늘을 날려버린 듯, 명랑하게 웃으며 구름을 밟았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금장으로 장식된 문이 환영하듯 열려있었다.
땅에 닿자마자 토끼는 우리의 손을 놓았다. 근처 벤치에 토끼들이 일렬로 줄지어 앉아 뒷발을 두들기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 준 토끼도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 토끼의 안내는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신입생이지?”
그때 한 명의 뚱뚱보가 알은체를 했다. 때구루루 구르는 알사탕처럼 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을 문지기라고 소개했다.
“뒤쪽으로 가렴. 딴 길로 새지는 말고. 아마 표시가 다 되어 있을 거야.”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음 차례 학생들에게 달려갔다. 말하는 내용은 똑같았다. 뒤쪽으로, 딴 길로 새지는 말고.
섬은 하나의 마을 같았다. 학원이라기보다 저마다 독특하게 생긴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인, 소박한 시골 마을을 옮겨둔 모양새였다. 몸체는 다람쥐만 한데 귀는 나귀처럼 큰 동물을 입양하라는 문구가 써진 가게, 양의 울음소리가 나는 그림을 걸어둔 가게, 얼굴보다 큰 쿠키를 저글링하며 파는 주인. 취향에 따라 가게를 색칠하고, 특이한 문구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시간마다 꽃이 피어나는 망토, 코피가 날 정도로 진한 향수, 살아있는 실뱀을 엮고 엮어서 만든 귀걸이까지. 심지어 커다란 별 모양 사탕가게 밑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나만 먹어도 별을 보게 되는 맛! 상상해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문지기의 경고를 잊은 듯 신입생은 꿀 따는 벌처럼 지나치지 못하고 있었다. 구경하는 이들은 대개 신입생, 무심한 얼굴로 상점가를 빠져나가는 이들은 재학생. 나는 비웃음 어린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하여 눈으로 구경했지만, 오리 날개 모양의 망토를 발견했을 때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산도르아는 밑에 달린 주의 문구를 읽었다.
“이걸 달면 태양 위로 올라가게 해 준다니. 그러면 죽는 거 아니야?”
나 같은 얼간이를 꾀려고 만든 것 같은 그 가게의 주인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외양이 특이한 사람이었다. 생김새도 그렇지만 내 허리에 올까 말까 하는 키에, 보라색 코는 벌에 쏘인 듯이 부풀었다. 눈매 또한 범상치는 않았다. 얼굴 면적의 반이 눈이요, 동공은 평범한 사람의 세 배였다.
갑자기 산도르아는 소책자를 꺼내 훑었다.
“안내서에 적혀 있었잖아. 여기에 사는 주민들이야.”
“안내서?”
동봉된 것을 본 것 같기는 했다. 산도르아는 짐을 들춰보지도 않은 거냐면서 놀라고 있었다. 창피한 나는 딴청을 피웠다.
“잃어버렸어.”
“당당해서 좋아. 응?”
산도르아와 소소한 말다툼을 하는 사이, 나는 이곳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보게 되었다. 어떤 한 학생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지갑을 꺼내자, 여러 가게에서 주민들이 튀어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산도르아의 추측으로는 모든 학생이 휴가를 떠나서 한창 수익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금화 냄새를 맡게 되자 기뻐서 저러는 것 같다나. 안내서를 얼마나 닳도록 읽은 것인지, 산도르아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마다 조곤조곤 설명할 수 있었다.
“되도록 주민들 심기를 거스르지 말랬어. 학원을 편하게 다니고 싶다면 말이야.”
거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였다. 외상을 하고 갚지 않는 것, 그들의 신장에 대해 놀리는 것, 보라색 코가 얻어맞은 것이냐고 묻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산도르아는 손톱자국으로 밑줄을 그었다.
“이야라, 특히 넌 조심해야 할 거야. 가끔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는 경우가 있으니까.”
“안 가면 될 일이지. 일일이 따져서 갈 정도로 매력적인…….”
매력적인 가게를 몇 개 보기는 했다. 거기에 주인들이 전부 저렇게 생겼으리라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나는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뒷말을 삼켰다.
우리는 상점가를 빠져나와 물빛 계단을 올라갔다. 알고 보니 이드리하임이라는 명칭은 이 섬의 이름이었고, 학원은 그저 무명이었다. 이드리하임 섬에 있는 학원이라서 그저 그렇게 부른다나. 하늘에 떠 있어서 보안 하나는 끝내준다는 말을 지나가던 아이에게서 들은 참이었다.
푸른색을 굉장히 좋아하는 곳이었다. 아까 길거리의 바닥도 푸른색이었고, 가게는 노랑, 빨강, 주황, 초록 등 주인의 취향에 따라 달랐지만, 학원이라고 불리는 성은 온통 푸르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문고리 하나마저도 하얀색을 한 방울 떨어트린 푸른색이라니. 건축주의 취향인지, 설립자의 취향인지가 궁금했다. 아쉽게도 안내서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집회장 안에 일렬로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양옆에는 신입생을 통솔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나이와 성별이 제각각이며, 심지어는 이곳의 주민같이 생긴 사람도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뜯어보듯이 관찰했다. 올해 들어온 신입생들이 어떤 수준인지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무언가를 받아간 다음, 집회장의 뒤로 빠져나갔다. 무엇을 들고 나가는지는 내 차례가 되어서 알았다. 황금 열쇠에 푸른색의 리본이 달려 있었다. 내 이름을 말하자마자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열쇠를 받고 행렬을 이탈했다. 내 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열쇠가 인도하고 있었다. 열쇠는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 내려가게 만들고, 오른쪽으로 꺾자마자 냅다 달려갔다.
푸른색의 잔디가 깔린 정원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의 차지였다. 그들은 열쇠에 끌려다니는 신입생을 보며 남 일처럼 웃었다. 푸른 잎을 바람에 떠나보내는 나무 그늘에 앉아 우리의 환영식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나는 두 팔로 열쇠를 잡고 멈추어 세워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열쇠는 몇 곱절 강한 힘으로 잡아끌었다. 산책을 거부하는 개처럼 끌려가는 게 우스꽝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힘을 놓았다. 열쇠는 반항한 대가라는 듯 빠르게 나를 끌어 갔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도착한 곳에 계단이 있었다. 문 앞에 드레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곳으로 보아 여학생들만 모아 놓은 기숙사 같았다.
그 반증으로 들어서자마자 케이크가 날아왔다. 꽃 그림을 걸어둔 벽에 하얀 생크림이 흘러내리고, 반대편에서는 고막을 찢는 굉음이 들렸다. 신입생을 환영한다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환영식 절차에 따라서 이마에 딸기 크림 하나, 종아리에 끈적끈적한 커스터드크림, 정신없이 올라가는 내 등에는 계란 물이 쏟아졌다.
같이 희희낙락하는 신입생, 얼굴이 빨개져서 화내는 신입생, 개중에는 아프다며 우는 신입생도 있었다. 나는 네 번째 부류였다. 화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식욕이 도는 부류. 나는 뺨에 묻은 크림을 반쯤 먹으면서 들어갔다.
열쇠는 지친 것이지, 그것도 아니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지, 점점 뭉그적거리며 데려가다가 302호 앞에 멈췄다.
열쇠는 스스로 구멍에 들어가 몸을 돌렸다. 딸칵- 하는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안락한 소파 네 개와 달콤한 초콜릿을 쌓아둔 테이블, 장작은 없지만 안이 새까맣게 그을린 벽난로가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페트는 예상대로 푸른색이었다. 커튼은 하얀색이었지만, 대체적으로 모든 소품은 푸른 계열에 가까웠다. 입이 달린 벽걸이 시계, 더러워지면 털을 부풀리는 양탄자의 기이함은 둘째치고, 열쇠는 아직 제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쪽에 문이 네 개가 있었다. 나는 왼쪽에서 두 번째 방 앞으로 끌려갔다. 열쇠는 역할을 마친 것처럼 동작이 그쳤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의 방이었다. 서부에서 챙겨 온 짐들이 내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드레스는 색깔별로 가지런히 걸려있고, 여벌의 제복 또한 바르게 개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딸려 보낸 장신구는 유리함에, 필요할 것이라며 사댄 책들 또한 책장에 꽂혀 있었다. 사용감이 보이는 책상 위에는 금으로 만든 촛대, 그리고 잉크병만이 올려져 있었다.
그때 신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들어오세요, 했다.
노크를 한 사람들이 아마 나머지 세 방의 주인이겠거니 했다.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안녕. 바쁘니?”
방문한 둘은 나와 동갑이었다. 방문하지 않은 나머지 한 명은 한 학년이 높았다. 스물한 살까지 다니는 5년 과정의 학원이었다. 302호에는 나까지 포함한 1년 과정 세 명, 2년 과정 한 명이 묵는 것 같았다. 아마 대다수의 기숙사가 신입 셋과 선배 한 명이 같이 쓰는 듯한데.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 들어온 2년 과정은 전혀 우리를 보듬을 생각도, 정보를 알려줄 생각도 없는 여자였다.
일단 통성명은 없었다. 우연찮게 식사 도중 여자의 이름이 ‘나타리아’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나타리아는 벽난로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손톱을 들여다보는 게 일상이었고, 입이 달린 시계가 일정을 말해 주면 곧장 일어나 제 수업을 들으러 갔다. 1년 과정에서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어떤 교수가 점수를 잘 주는지, 듣자 하니 다른 기숙사 방에서는 잘만 알려주는 것을 나타리아는 본체만체 무시했다.
나머지 두 명은 그에 비하면 정상이었다. 각각 린과 폰이라는 쌍둥이였다. 나는 두 사람을 점의 위치로 구별했다. 린은 왼뺨에 점이 있었고, 폰은 손등에 갈색 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북부에서 왔고, 예레카나 바예레카가 아닌 평범한 귀족이었다. 거기까지는 문제없이 대화를 한 셈이었다.
이 쌍둥이의 단점이라고 하자면 퀴즈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내 방으로 쳐들어와 누가 폰이고 린인지 맞혀보라는 말을 한 다음, 틀리면 다음 날 내 몫으로 떨어진 푸딩까지 들고 튀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취향도 별났다.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면 노래 부르는 인형이 양탄자 위에서 빽빽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다. 쌍둥이가 재밌어 보인다며 이드리하임 상가에서 구매해온 인형이었다.
“안 꺼?”
그걸 본 내가 화를 내면 옳다구나 퀴즈를 냈다. 내가 맞추면 끄고, 틀리면 밤새 시끄러운 인형을 세워두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타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오면서 한마디를 한다.
“한 번만 더 내 과제 시간을 방해하면, 사감에게 일러서 너희를 독방에 두게 하겠어.”
나타리아가 말을 걸 때는 이렇듯 협박할 때,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이 학원에서 인기가 많은지를 자랑할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랑하고 다닌 것에 비해 나타리아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거울을 보며 시간을 때우다가 수업 가기 일쑤인 사람이었다.
이렇듯 나의 룸메이트는 어정쩡했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쌍둥이는 친화력이 좋아 이 방 저 방에서 알아 온 게 많다는 거였다.
“일단, 이 교수님은 필수로 들어야 한다고 했어. 시험 문제를 잘 집어내신대. 부드럽게 가르치시고.”
“이 사람도 꼭 들어야 한다고. 뚱뚱하지만 그만큼 너그럽댔어. 특히 여학생에게 점수를 높게 주신대.”
다른 학년은 이미 수업 계획서를 제출하고 어제부터 자신들이 택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신입생들은 내일까지 수업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참고하라고 지급한 안내서에는 교수, 과목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우리 셋은 야외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정보를 조합해봤다.
“확실해?”
“확실한 정보야.”
“우리를 믿어, 이야라.”
폰과 린은 서로의 머리칼을 허리까지 땋아주며 말했다. 나는 한 손에 든 지팡이 사탕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첫 번째 선택부터 난관이었다. 쌍둥이가 알아 온 것처럼 위를 선택해야 할지, 나의 직감대로 아래를 선택해야 할지를. 하나는 <크로탄티스어> 라는 듣도 보도 못한 과목이며, 하나는 교수가 괴짜라는 소문이었다.
그때 칼같이 단추를 채운 소매가 튀어나왔다. 가지런한 손톱을 한 검지가 한 곳을 짚었다.
“이거.”
등 뒤에서 뱀의 비늘처럼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이 정수리에서부터 갈비뼈까지 타고 내려오는 것일까.
“안녕.”
일린저 모르온이었다. 겉보기에는 말쑥한 차림에, 단정함을 위해서인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맨 듯 만 듯 끌러진 넥타이나 채우지 않은 목 단추로 그의 품위를 엿볼 수 있었다.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숨기지 못할 이중인격자란 소리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야외 테이블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며 중얼중얼 쏙살거리는 사람들, 일린저의 뒤꽁무니만 보는 남자 셋, 여자 둘, 그들은 정답게 모여서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학원의 제1원칙은 모든 이는 신분의 고하, 성별을 막론하고 한 사람의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치졸하게 신분으로 내리누르려는 이들은 없지만, 암암리에 저들끼리 위아래를 나누고 있는 것까지 막을 방도가 있는가. 만약 내가 일린저의 등짝을 후려친다면 게거품 물고 죽이자, 살리자 할 것이었다. 착한 내가 참자, 했다. 성질을 반 토막 낸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꺼져.”
그러나 일린저는 싱겁다는 듯이 씨익 웃기만 할 뿐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은 척, 너그러운 척 내숭 떠는 얼굴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속으로는 나를 짓밟고도 남았다는 것에 일 년 치 푸딩을 걸 수도 있었다. 일린저는 친절한 표정으로 나의 뒤에 섰다. 굳이 상체를 기울여, 그의 가슴팍이 뒤통수에 닿았다. 기다란 팔이 나를 에워쌌다. 이 또한 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내가 노려볼 때마다 상체를 붙여왔다. 맞붙고, 맞붙고, 안 그런척하며 무게를 실었다. 여기서 되는대로 성질부리면 지는 건 나였다. 주위의 기록하듯이 지켜보는 눈알만 수십이었다.
“비켜줄래?”
“왜? 누가 좋은지 추천해 주려고 하는데.”
“필요 없으니까…….”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폰이 머리를 들었다.
“필요 없지 않아. 추천해줘!”
일린저는 나와 동기였다. 같은 1년짜리 과정을 듣는 중이었다. 비슷한 입장이었고, 구태여 나서서 녀석의 조언을 떠받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이야라, 여기 봐.”
일린저가 정도를 모르고 상체를 기대고 있기에, 나는 몸을 거칠게 틀며 자리를 옮겼다. 일린저는 ‘이런, 불편했어?’라며 내 옆자리를 꿰찼다. 자연스럽게 나의 계획서를 그가 가져갔다.
일린저의 새까만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깃펜의 끝을 물고‘음.’하더니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 뒤 테이블, 시시콜콜한 수다로 보내던 이들까지 하나둘 이쪽으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빙 둘러 에워싼 머릿수만 일곱이 되었다. 일린저의 정보와 자신의 정보를 비교하려는 자, 우리처럼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얻어가려는 자, 조금의 틈이 나면 끼어들려고 야단이었다.
“이건 최악. 이건 별로, 이것도 별로.”
“정말? 분명 로사린느는 이 교수가 최고라고…….”
일린저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건 줄 알라는 뜻이었다. 거의 모든 교수의 이름에 가위표가 쳐졌다. 야멸차게 그어지는 가위 표시에 쌍둥이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러면 들을 게 있나?”
일린저는 무수한 가위표를 치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일린저가 떠나자 줏대 없는 관중도 떠나갔다. 그는 뒤편의 테이블로 무대를 옮겼다. 썰렁한 그의 말에 상대방은 배가 아프게 웃었다. 또 다른 무리가 일린저에게 합쳐졌다.
의외의 모습이긴 했다. 나는 그가 타인에게 몹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관중의 중심에서 대화를 주도했으며, 스킨십도 매너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옆자리와 어깨동무를 하거나 끊길락 말락 하는 상대의 말도 스스럼없이 받아쳤다.
하하, 호호 재밌어 보이니까 그쪽으로 사람이 구름 떼처럼 모였다. 단번에 4인용 테이블이 모인 야외 사교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곁다리처럼 앉아 있던 쌍둥이는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난 진즉에 일어선 참이었다.
일린저는 벼락같이 나타나 우리의 장소를 빼앗았다. 흡사 벼락을 동반한 비구름이었다. 벼락이 내리치고, 따라다니는 비구름은 합세해 빗줄기를 퍼부었다. 뻔뻔스럽게 일린저가 빌린 곳인 것처럼 모여들어 떠들어대다니.
“재수 없는 자식.”
“누구? 왕자가?”
같이 복도를 거닐던 폰과 린은 엮이기 싫은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자신들은 못 들은 소리라며 귀를 탈탈 털기에 당황한 참이었다. 뒷돈을 쓴 것인지, 술수를 쓴 것인지 일린저의 학원 내 평판은 나쁘지 않은 것을 넘어, 신실한 신앙심 수준이었다.
나는 그가 유독 가위표를 많이 쳐 놓은 교수만 골라서 수업 계획서에 적었다. 폰과 린은 모조리 일린저의 추천대로 교수를 적었다. 덕분에 기본 수업 외에는 겹치는 항목이 한 가지도 없었다. 안타까운 쌍둥이였다. 일린저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가위표를 쳐둔 것이라고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굳이 찍어 먹어봐야겠다면 말릴쏘냐. 나중에 혀를 뽑아버릴 정도로 맵다면서 꺼이꺼이 울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주위에서는 쌍둥이의 계획서를 참고하면 반이라도 갔을 텐데, 했다. 나는 그의 진면목을 알기에 믿지 않았다. 녀석이 추천해 준 대로 따라가다가 끓는 기름에 튀겨지려고? 그러나 계획서를 본 나타리아가 나를 동정하고, 식당에서 만난 산도르아마저 나의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엉망이야?”
첫 수업을 맡은 교수의 이름을 뱉자마자였다. 산도르아의 표정이 썩은 생선을 먹은 듯했다.
“3학년 과정을 듣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많이 거칠다고 그랬어. 게다가 소문도 별로고.”
당장 오늘부터 수업이었다. 산도르아는 지금이라도 바꾸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건 실현될 리 없는 이야기였다. 계획서를 벽걸이 시계의 입에 넣은 후부터는 변경할 수 없었다. 시계는 수업시간에 맞추어 알림을 할 뿐인 데다가 이미 출석부에 이름을 올린 상황이었다. 시계를 부여잡고 바꿔 달라고 애걸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스푼을 이로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가르친다고 있는 사람인데, 거칠어 봤자 우리 스승보다 더 거칠겠어.”
스승은 휴일이라서 늦잠을 잔다며 마중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휴가 때마다 오는데 마중은 무슨 마중, 했다. 괴팍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할머니였다.
“산도르아. 그러고 보니 네 룸메이트는?”
나는 포크로 양의 갈비를 썰고 있다가, 문득 혼자서 식사하는 산도르아가 의아해졌다. 나중에 가서야 여러 이유로 갈리겠지만, 보통 신입생들은 자신의 룸메이트들과 붙어 다녔다. 셋, 넷씩 모여 앉은 신입생이 흔한 이유였다. 그런데 산도르아는 내가 오기 전까지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수업을 개발새발로 적은 바람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산도르아는 나처럼 특이한 수업만 골라 들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시간이 안 맞아서.”
산도르아는 그렇게 말하고 식사를 마쳤다. 몇 술 뜨지도 않은 스푼을 놓았다.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더 캐물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다음 수업이 십 분 후였다. 마시듯이 후르릅 먹고서 안내서에 적힌 대로 강의실을 찾아갔다.
1년 과정의 기본 과목 두 개는 빛의 활용, 빛의 소통이었다. 같은 과목이지만 교수는 두 명, 세 명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잘 가르친다고 입소문 탄 교수는 선착순이며, 그저 그런 교수는 신청자 순으로, 나머지 교수는 뒷돈을 받아도 안 가는 게 상책이란다. 나는 마지막 경우의 교수를 고른 셈이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들어갔건만.
같은 과목인데도 누구는 <빼앗기의 중요성>, 누구는 <빛의 이해>였다. 내가 고른 것은 전자였다. 빼앗기의 중요성, 이라. 강의실의 뒷문을 열자 삐익- 소리가 났다. 강의실 안은 제법 시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며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다.
음울한 얼굴에, 기력이 없어 보이는 교수가 유리병을 닦고 있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생이 들어오나 마나 한 얼굴로 중얼중얼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물발이 일어, 비옥한 육지를 덮친 해일 같이. 내가 여기에 오리라고 예상한 듯 자신만만한 미소. 이것이 내게 덮쳐 온 문제였다.
일린저가 중앙에 앉아 있었다. 일행도 있었다. 옆자리에 인상이 사나운 남자애 하나, 앞자리에 윤기 나는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는 여자애 하나. 그녀는 목이 돌아가라 뒤를 돌아보며 일린저와 담소를 나눴다. 수업은 이미 시작된 듯한데 나한테 여기에 앉아라, 저기에 앉아라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악 지르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아무 자리에나 정신없이 앉았다.
일린저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고 앉았다. 내가 가위표를 선택하리란 걸 알기라도 한 양, 재수 없는 얼굴로 웃었다. 어금니가 아득바득 갈렸다. 눈앞의 교수는 앉은 이들이 떠들든 말든 홀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빛은 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고. 원래 사람처럼 빛도 마찬가지인 거니까. 자신을 아껴주는 이들에게로 가, 더 많은 힘을 나누어주기를 원하는 거고. 아, 우선은 옆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내기라도 하는 양 늘어가는 수다가 강의실을 채웠다. 지적 않는 교수의 목소리까지 삼키는 중이었다. 나와 옆자리에 앉은 사람만 조용했다. 한숨지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도 나를 보았다. 우리는 긴 숨을 뱉었다. 답답해서 뱉은 것이 아닌, 놀라서 저절로 뱉어진 것이었다.
이건 이거대로 최악이었다. 저 옹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목구비가 똑똑히 기억났다. 이름은 아킨 페네크, 산도르아의 전 약혼자였으며, 내가 양 싸대기를 후려쳐 버린 녀석이었다. 아킨도 기억은 새록새록 한지 입술을 씰룩거렸다. 마주 보기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은 자리를 옮겨야지 하는 차였다. 갑자기 책상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가로로 긴 유리통 같은 것이었다. 양쪽에서 손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있었다. 교수는 ‘자 다 같이 손을 넣어, 넣어볼까요?’ 했다.
점수가 걸린 것인지라 따르기는 잘 따랐다. 아킨은 반대쪽에서 손을 집어넣으며 앞니를 딱딱 부딪쳤다. 나는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넣었다.
유리통 안이 반짝였다. 손바닥에 반응한 빛이 피어올랐다. 초록의 빛이 나의 손바닥과 아킨의 손등 위를 산책했다. 빛은 열, 백, 천으로 늘었다. 그러나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일 년 동안 두 사람은 짝으로 이어지고…… 또…… 시험도 마찬가지로…….”
이게 무슨 염소와 고래가 애정 행각 벌이는 소리란 말인가. 나와 아킨의 얼굴은 흙색이 되었다. 이드리하임은 겨울부터 여름까지 수학하고, 가을에 시험을 치른 뒤에 휴가를 맞이한다고 들었다. 그러면 나는 꼼짝없이 이놈과, 이 과목을, 가을 시험까지 칠 파트너로 정해졌다는 말이었다. 내가 난색을 표하는 것처럼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교수는 가르칠 것이 없었다. 유리통 하나 놓고 날로 먹는 것이다. 빛을 누구의 손에 더 많이 끌어모으느냐는 단순하고 잔인한 이치였다. 나는 일전의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기에, 그 의미를 뼈로 통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슬플 정도로 잘 알았다. 일린저는 빛을 끌어모으는 데에 타고났으니.
나도 모르게 그가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쳤다. 일린저는 ‘기억나?’ 하면서 입 모양으로 물어왔다. 나는 그의 눈을 파낼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수업이 끝났다. 다음 수업에 들어갔을 때 다행히 일린저는 없었으나 대단한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본 과목인 빛의 소통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가르치는 것은 소통인데, 정작 본인은 말이 빠르고 발음이 새는 통에 이 나라 말을 하는지, 옆 나라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뒤에 기타 과목으로 고른 것을 나열해 보자면, 쓰는 사람이 하나 없는 죽은 언어를 외국어랍시고 가르치는 과목이라든가, 별을 이용해 미래를 보는 술사처럼 별을 읽는 과목이라든가, 춤을 이용해 빛을 유혹한다는 충격적인 과목까지. 전부 듣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린저 모르온은 내게 정확히 짚어줬다. 그가 가위표 친 것은 그쪽 방향으로 기침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기가 차는 것으로는 제일이었다. 눈빛으로 사람의 위에 주둔하는 방법. 제목부터 망했다는 직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그 전의 교수들은 그래도 가르친다는 행위를 했다. 일단 유리통 교수에게 날로 먹는다고 한 것은 사과하고 싶었다. 여기에 비하면 유리통 교수는 참된 교수였다. 하는 거라곤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어디를 오다가다 교수가 됐는지 의심스러웠고, 무엇보다 일린저 모르온이 나의 옆자리였다.
“재밌지.”
사람의 기선을 제압한 뒤, 그들을 굴복시켜 마음을 얻어내라는 말의 반복이 주된 내용. 앞으로의 일 년이 캄캄할 때였다. 수업 중 일린저 모르온이 대놓고 자리를 옮겼다. 나의 옆자리로 왔다. 제지할 줄 알았던 교수는 오히려 잘 됐다고 했다. 짝으로 묶어 시켜볼 게 있다면서. 우리는 빌어먹을 짝이 되었다.
깃펜의 끝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내게 일린저는 속삭였다.
“자도 돼.”
“자라고?”
그러면서 제 어깨를 두드렸다. 기대서 자라는 정신 나간 뜻인가 싶었더니, 진짜였다. 그는 ‘침 흘릴까 봐 무서워서 그래?’ 했다. 참자, 참자 싶었다. 그런데 계속 무시하자 종아리로 툭툭 쳐왔다. 나는 시선을 앞에 고정해두고, 몸을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한 번만 더 내 옆자리에 앉으면 네 종아리를 물어 뜯어버릴 줄 알아.”
일린저는 겁을 먹기는커녕 내게 몸을 붙여왔다.
“왼쪽? 오른쪽?”
“양쪽 다.”
나를 놀리는 데 도가 튼 자식이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 좋아 죽겠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웃어 젖혔다. 교수가 우리 쪽을 주시하는 건 당연했다. 교수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더니 일린저를 호명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나?”
일린저는 모자란 사람 마냥 흥분한 목소리였다.
“수업이요. 종아리가 저릿할 정도로 흥미진진해서.”
일린저는 당황하는 바 없이 그렇게 대답했고, 교수님은 어느 지점에서 마음에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평생 가도 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린저에게 거울을 들라고 말했다. 일린저는 거리낌 없이 거울을 들었다. 그곳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무엇이 보이는가?”
“제 잘생긴 얼굴?”
그의 발언에 여기저기서 박수를 쳤다. 교수는 키가 자그마하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부인이었다. 갑자기 교수는 일린저의 앞에서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흡족하다는 듯이 다시 수업을 이어 나갔다. 나는 이 수업의 의의, 성취, 목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선 제압이 아니라 저 잘난 듯 오만하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이야라.”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왕자 병에 걸린 왕자가 쫓아 나왔다. 나는 바로 식당가로 달려갔다. 일린저는 쫓아오는 듯하더니 뒤에서 ‘내일 또 보자.’라며 소리쳤다. 언젠가 저놈을 반죽하듯이 뭉쳐서 장작에다가 구울 계획이었다.
* * *
나의 삶은 드리워진 어둠에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일단 일린저 모르온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단 말인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나타리아가 왕자와 강의 시간에 얘기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없다고 하자 그럼 그렇지, 했다. 어조가 나를 무시하는 투였다. 폰과 린도 나의 망한 수업 계획서를 부러워했다. 바꿀 수 있으면 바꾸자며 난리였다. 하루는 하도 이해가 가질 않아서 물었다.
“왕자잖아.”
“잘생겼고.”
“교양 있고.”
백번 양보해서 생김새야 그렇다 치더라도 교양이라니. 거기서 나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땅에 나를 꼴아다 박은 교양도 교양이라면 인정한다.
“게다가 재밌잖아. 같이 있는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해줘.”
차라리 머릿속 환상에 빠져있을 때가 낫지. 모르는 게 약이었다. 힘없이 고개를 젓는 내게 쌍둥이는 되지도 않는 말을 했다.
“너. 왕자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강렬한 부정은 오히려 좋아해서”
나는 베개를 쌍둥이에게 집어 던졌다. 그걸 맞고서 나가떨어진 두 사람은 합동으로 공격해 왔고, 나는 털이 빠지도록 베개를 휘둘러야 했다.
내가 홀딱 벗어도 그러려니 할 것 같은 수업에, 매일 옆자리에 앉는 왕자에, 상식을 벗어난 교수들의 편애에, 매번 죽을 둥 살 둥 버티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정신이 돌아온 것은 여름이 올 무렵이었다. 봄볕이 세지고, 쌍둥이가 심어둔 화분에서 싹이 났다.
“이야라!”
“에드리트?”
고학년인 관계로 소식을 알지 못했던 사촌이 산도르아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산도르아의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고, 에드리트의 앞에는 식기가 없었다. 지나가던 에드리트가 잠시 들린 모양새였다. 나는 그들 곁에 자리했다.
“요즘 바쁘다던데. 아주 특별한 수업만 골라 듣느라고.”
“상기시키지 마. 떠올리기만 해도 짜증 나니까.”
산도르아는 앉자마자 투닥거리는 우리 둘을 보며 웃었다. 수심이 깊어진 그 얼굴에서 나는 의문을 찾아냈다. 이제 다들 수업에 익숙해지고, 학원의 분위기가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달라져 갔다. 기본적으로 룸메이트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내서 친분을 나눴다. 나만 해도 서부의 귀족들이라며 인사를 걸어오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어느 때는 예레카와 바예레카는 필수적으로 들어와야 하는 모임이라면서, 5학년 과정을 듣는 사람이 찾아와 내게 시간을 비울 것을 요구했다. 나는 괴상한 교수를 만난 죄로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이 북부의 예레카 집안사람인 것을 뒤늦게 들었다.
그런데 산도르아의 주변은 깨끗했다. 룸메이트와 시간이 겹치지 않는다지만 하다못해 같이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있을 텐데. 산도르아는 매일 고독한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제 수업으로 갔다. 룸메이트라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 마침 가려운 곳을 에드리트가 긁어줬다. 에드리트는 수업을 가겠다고 일어난 산도르아를 보냈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할 만한 이야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애매해진 거지.”
“뭐가 애매해?”
“태어날 때부터 예레 하라고 떠받들었던 사람들이 애매해진 거지. 새로운 예레 하가 될 네 눈치도 보이고, 약간은 고소해 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산도르아는 학원 생활이 편치 않을 것을 미리 짐작했으리라고 본다. 에드리트는 ‘예레 하가 되지 않을 나머지 자식들은 재빨리 결혼을 시킨다고들 하니까.’라고 했다. 어차피 졸업하고 난 뒤에 혼인할 처지에 놓인 게 산도르아라라며, 나보고 산도르아를 잘 챙겨달라며.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식당을 떠났다.
느껴본 적 있는 기분이었다. 산도르아는 당연히 내 것인 것처럼 내어 주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당당한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기분. 산도르아가 일궈놓은 것을 거저 얻는 기분. 나는 위테르발도 성에 처음 온 날처럼 잠이 들 수 없었다.
산도르아는 나보다 어른스럽고, 매사에 침착하며, 순간순간의 감정을 잘 감추었다. 이 학원에서 길러내고 싶은 예레카 또한 그런 사람일 터다.
그에 반해 나의 감정은 들쑥날쑥하며, 앞날보다는 당장 처한 상황이 중요했다. 내가 처한 상황, 감정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고, 그로 인해 산도르아의 약혼자와 대차게 싸우고, 양 집안의 껄끄러운 빌미를 만들었다. 그는 내가 다스려야 할 바예레카의 사람이었다. 벽이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차지한 자리였다. 과연 산도르아를 희생시키고, 내가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을까.
* * *
가지고 태어난 성품을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더 이상 감정에 치우치지는 않기로 했다. 감정은 튀어나오지 않게 누르고, 미소를 짓지는 못해도 화내지는 않고, 특히 함부로 적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적이 된 녀석은 안타까울 따름이다만.
그런고로 일린저에 대한 증오는 잘 감싸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내가 예레카가 되면 녀석은 내가 모실 왕이었다. 이미 척을 지었지만, 그래도 더는 엮이지 않는 게 나았다.
“머리 아파.”
“꺼…….”
일린저의 머리가 차츰차츰 내 어깨로 떨어졌다. 다가오는 일린저의 대가리를 후려치려다가 말았다. 어깨만 비스듬히 떨어트렸다. 일린저는 혀가 따끔한 분노에 길들여진 놈이었다. 내가 슬쩍슬쩍 피하기만 하자 그건 그거대로 재밌었나 보다.
“때리기 아까워서 그래?”
“제정신이 아니야, 넌.”
교수의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어깨에 달라붙은 일린저의 머리를 밀었다. 수업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때였다. 교수가 귀찮은 주문을 넣었다.
“옆에 앉은 사람과 마주 보세요.”
나는 책의 한 페이지를 구겨버린 다음, 억지로 눈을 돌렸다. 일린저는 준비한 듯 두 팔까지 벌리고 있었다. 짜증이 나서 다시 앞을 보았다. 일린저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교수님.”
“질문은 나중에.”
“그게 아니라, 이야라가 저를 보는 게 부끄러운가 봐요.”
교수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뒷짐을 지었다. 나는 문제 있었냐는 듯 녀석에게 돌아앉았다. 그제야 만족한 듯 일린저는 이를 드러냈다. 교수는 싱겁다는 얼굴로 수업을 이어 나갔다.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눈빛의 기세를 전달해…….”
저 푸르른 눈알을 도려내고 싶었다. 일린저는 눈을 마주치는 동안 제 혀를 가만두지 않았다. 빨간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쓸고, 토 나오는 눈짓을 했다. 왕자의 악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는 계속 눈빛의 기세 타령을 했다. 나는 먹히지도 않을 눈웃음 지으며 ‘잘생겼지.’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 했다. 결국,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교수님.”
“네.”
교수는 의외라는 듯 땋은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빈 강의실을 가리켰다.
“짝을 바꿔 주세요. 잘못 걸려서…… 아니, 짝이 너무 못하는 것 같아요.”
“이런, 학생.”
교수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게 바로 기세에서 지고 만 것이야. 기세를 키워야지 빛을 자알 끌어모을 수 있고, 상대방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거고. 지지 말아야 해.”
“네?”
“이길 수 있어. 이번 수업은 그것을 목표로 하고 열심히 듣는 것으로 하면 되겠다. 오히려 짝을 잘 만난 것일 수도…….”
“예. 알겠습니다.”
나는 중간에 교수의 말을 끊었다. 설득당한 표정으로 목을 수그렸다. 교수는 나의 등 뒤에서 ‘문은 잘 닫고 가.’라는 말이나 덧붙였다. 일말의 기대가 바스러졌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런데 일린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를 지나쳤다. 일린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건 바로 기세에서 지고 만 것이야. 지지 말아, 학생.”
칭찬하고 싶지 않지만 교수의 말투를 잘 따라 했다. 일린저는 묵묵부답인 나를 쫓아왔다. 나는 속으로 어머니, 할아버지를 찾았다. 무시하고, 참으려고 노력했다. 망할 수업도 끝났으니 기숙사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린저는 포기를 모르는 놈이었다. 오늘의 수업이 입맛에 맞았는지 아주 신이 나셨다.
“너하고 내가 잘 만났다니. 우리, 교수님이 인정한 짝이 된 기념으로 같이 연습이나 하러 갈까?”
남자는 반응하면 할수록 좋아한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나는 기숙사로 뛰듯이 걸어갔다. 일린저는 옆에서 긴 다리로 성큼 따라왔다. 나의 팔꿈치에 그의 셔츠가 닿을 듯 말 듯했다. 그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얘기 좀 하고 가.”
드디어 도착했다. 나는 기숙사 안으로 뛰어 들어가 계단에 올라간 뒤, 녀석에게 작게 주먹을 보였다. 무표정하던 일린저는 내 주먹을 보고 나서야 환하게 웃었다. 내게 손을 방방 흔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찬물을 들이켰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무시. 나는 불 난 가슴을 다독였다.
* * *
여름의 절정이었다. 제출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였다. 겨울은 얼떨떨하고, 봄이 적응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과제의 계절이었다. 요령이 쌓인 3년 과정부터는 과제를 마치자마자 제한 없이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토끼 모양의 케이크를 먹고, 무지개색의 차를 마시면서 과제를 한 아름 안고 다니는 우리를 조롱했다.
그러나 그 조롱에 화답할 새도 없이, 가을에 치를 시험 때문에 이가 빠질 지경이었다. 하필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과목만 수강한 게 아닌 터였다. 나를 도와줄 이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 친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난감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망했다.”
산도르아와는 그즈음부터 매일 같이 야외 테이블에서 저녁을 보냈다. 폰과 린도 함께였다. 산도르아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식사를 마치자마자 무조건 밖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과제를 했다. 나를 도와 달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워낙 독특한 과목들이기 때문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산도르아는 기본 과목 정도를 도와주고 있었다.
제일 문제인 것은 기본 과목 중 하나인 빛의 소통이었다. 빛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말을 전하는 과목인 것은 눈치껏 알았다. 산도르아는 그걸 찬찬히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으고.”
“이렇게?”
“그래. 그다음에, 이 사이로 말을 집어넣는 거야.”
산도르아는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산도르아의 손가락에서 빠져나온 빛이 뭉쳐, 조그마한 원형이 되었다. 원형의 빛이 내게로 달려왔다. 원형의 빛은 팔에 닿자마자 동그랗게 흩어져 사라지고, 산도르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전해져 왔다.
[할 수 있겠지?]
“아니.”
내 단호한 대답에, 옆에서 과제를 하던 쌍둥이들이 웃었다.
“안 돼, 우리도 여러 번 알려 줬는데 말이야.”
“이건 교수님의 수업을 들어야 해. 그 느낌을 아주 잘 설명해 주시는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뇌가 여기서 꺼내 달라고 두드리는 것 같았다. 못 외우겠다는 우는 뇌를 초콜릿으로 달래보았다. 나는 해보기는 해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부터 배우기 위해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빛의 활용은 어떤 식으로 시험을 보기로 했어?”
산도르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빼앗고, 겨루는 수업이라고 했나. 그것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려는 찰나였다. 내 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아킨이 보였다. 마침 <빼앗기의 중요성> 수업의 파트너로 정해진 참이었다. 아킨과는 만찬 이후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아킨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나를 피하는 중이었다.
“모르겠다.”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 그때였다. 창백한 얼굴로 지나가는 아킨의 뒤로 남학생 두 명이 쫓아갔다. 그들은 진흙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킨의 친우들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아킨에게 일방적으로 그 진흙이 쏟아졌다.
바깥 테이블에는 새처럼 생긴 불들이 날아다녔다. 파랑, 보라, 빨강 색의 불이었다. 테이블 사이를 비행하며 여름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저녁 오후를 도서관에서 보내는 것은 고학년이고, 대다수는 친우끼리 모여 기숙사에서 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과제를 하고, 그것도 심심하면 이드리하임의 상점가를 쏘다니면서 놀았다.
그리하여 웬만한 1학년 과정을 다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킨은 어떻게 된 게 수업을 제외하면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서부는 서부끼리, 남부는 남부끼리, 동부는 동부끼리, 지역에 따라 모이는 것도 심심찮게 보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서부의 1학년 과정 중에 아킨을 알은체하는 이가 없었다.
설마 나 때문인가.
“이야라, 무슨 일 있어?”
“아니.”
신경 쓰이는 게 더 늘어났다.
* * *
일주일을 관찰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킨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아킨은 식사 시간에도 혼자 앉아 있었고, 그건 수업이 끝난 오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이상한 물건으로 아킨을 괴롭혔다. 아킨은 바예레카 가문의 아들이었다. 차남이고 훗날 바예레카가 될 일이 없다지만, 그래도 아킨은 서부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왜 아킨이 따돌림을 당할까.
아킨은 같은 파트너 수업을 빼고서는 눈을 섞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어도 금방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대화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기야 내가 저한테 물을 뿌리고, 나와 싸우는 바람에 고대하던 약혼까지 깨졌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보다 내가 더 싫을지도 모르겠다.
* * *
<빛의 소통> 시험이 가장 먼저였다. 여름이 끝나간다고 느끼기도 전에 통보받은 소식이었다. 하필 먼저 날짜를 알려온 것은 정신 사나운 <빛의 소통> 교수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이드리하임의 상점가의 건너편, 푸른 들판이 바다 같은 공원으로 갔다. 가지가 휘어진 나무 밑에 앉아 빛의 원형 만들기 연습을 했다.
종이 세 번 치기 전까지만 들어가면 오후는 자유 시간이었다.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 이 말 저 말 하면서 연습하는 중이었다. 나무 그늘 같은 그림자가 졌다. 쌍둥이, 혹은 산도르아가 아닐까.
그러나 나를 덮은 그림자는 그보다 길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일린저 모르온은 무릎을 구부렸다. 앞에서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수업 시간이 겹치는 때마다 그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내가 털 뽑힌 개처럼 으르렁거리고, 일방적으로 놀리고 놀림 받는 관계. 우리는 그것뿐인 사이였다.
사적인 시간에 일린저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 시간을 침범하는 그가 불쾌했다.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못하던데.”
“네 할 일이나 하란 말이야.”
그때, 일린저가 동그랗게 만든 손가락 사이로 빛을 모았다. 동그랗게 말아서 나에게 보낸다. 나는 피하려고 했으나, 그 빛은 주인만치 끈질겼다. 쫓아와 내 어깨에 달라붙었다.
[싫어.]
더 반응하면, 더 좋아할 뿐이다. 나는 보란 듯이 책을 펼쳤다. 다시 한번 닳도록 본 소통 부분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저를 무시하는 만큼 일린저는 계속해서 빛을 보내왔다.
[지루해.]
무시했다. 사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를, 귓가를 벅벅 닦아 지워냈다.
[내가 도와줄게.]
한 번만 더 참자 했는데
[부끄러워서 그래?]
그어둔 선을 넘었다. 나는 결국 책을 덮고 말았다.
“내가 왜 부끄러워하는데.”
“나랑 단둘이 있으니까.”
“미치려면 다른 데에 가서 미쳐. 마지막 경고야. 한 번만 더 방해하면 가만 안 둘 테니까.”
이쯤 하면 흥미가 떨어질 만도 했다.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일린저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지난번에, 기억해?”
나는 한숨 내뱉듯이 대답했다.
“뭐를.”
“내가 엉망으로 망가뜨려 줬잖아.”
나는 반사적으로 책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런데.”
“그때를 기억해봐.”
“내가 왜 기억해야 하는데. 이 재수 없는…….”
일린저가 나의 손목을 잡았다. 커다란 손에 힘을 잔뜩 실었다. 내 손목을 위로 들어 올려, 제 입술로 가져갔다. 그의 손이 내 손을 덮고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가운데 뚫린 틈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일린저의 간지러운 숨에 빛의 힘이 실렸다. 그러자 옛 기억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텅 빈 검에 빛을 실려 보냈을 때, 꽉 채운 그것을 들었을 때. 만약 흐르는 저 바람에 빛을 실어 보내면 어떨까.
“좋아?”
“뭐?”
“이렇게 하는 거.”
그는 놓을 생각은 않고 슬쩍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잡혀 있는 나의 손에 바람을 후 불었다. 살아 있는 나비를 손에 가둔 느낌이었다. 나는 간지러운 느낌을 털고자 일어섰다. 제자리에서 뛰며 몸을 털었다. 일린저는 잔디에 드러누워 킬킬 웃었다. 그 사악한 웃음소리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한 번만 더 이딴 짓을 하면 그때는.”
“그때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입술을 물고 발을 굴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지키라면서 굴러다닐 놈이었다. “두고 봐.” 한마디만 겨우 남기고 떠났다. 일린저는 기대된다면서 제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다.
진심으로 미친놈.
* * *
그런데 억울하게 시험은 잘 보고 말았다. 빛은 완벽한 구의 형체를 갖추어, 교수에게 날아가, 교수가 적어준 말을 전했다.
이건 절대, 그놈의 도움이 아니었다.
* * *
<크로탄티스어> 시험은 망쳤다. 한 글자도 못 썼다. 사실 쓰긴 썼는데, 시험지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답지에 옮겨 적었을 뿐이었다. 듣는 학생이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일 정도로 쓸데도 없고, ‘안녕’ 한마디 배우기도 힘든 언어였다. 예상했다. 말끔하게 0점이었다.
다음 시험인 <눈빛으로 기세를 제압>하라는 시험은 의외로 간단했다. 교수의 앞에 나가 눈빛으로 제압하면 된단다. 그 말을 듣고서 내년에 다시 이 수업이 개설되면 항의를 넣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음, 별로야. 하나도 기세가 느껴지지 않아. 우리 세블의 눈곱보다도 못해.”
‘세블’은 교수가 키우는 종달새의 이름이었다. 채점 기준이 엉망이었다. 어김없는 0점을 예약한 가운데 일린저가 시험에 나섰다. 그는 나서서 교수를 빤히 보고, 교수는 머리카락 끝을 배배 꼬았다. 이건 눈빛이 아니라 편애 시험 아니던가. 나는 두 손, 두 발을 놓은 상태였다.
교수는 잠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좋지 못해.”
그러나 마음에 쏙 드는 평가였다. 의외로 교수는, 아니 교수님은 냉철한 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수업에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기선을 제압하라고 했지. 누군가를 유혹하라고 한 게 아니지. 너무 노골적이어서 기분이 나쁠 정도였어.”
그리고는 거친 필체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일린저는 내 쪽으로 걸어오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속삭였다.
“이상한 사람 같아.”
이상하기로 따지자면 제일 이상한 것은 너였다. 나는 만점을 향한 의지가 살아났다. 반드시 저것보다 시험을 잘 보겠다. 의지로 가득한 몸뚱어리로 나아가 교수를 마주했다. 교수는 내 이름을 간단히 적더니, 위로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어. 시작해.”
일린저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교수가 아니라 일린저였다. 기세를 제압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깔아뭉개고 싶었다. 교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시선을 받았다.
“학생, 나를 미워해?”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몰입감에서 벗어나 교수를 마주 보았다.
“내가 말한 건 그런 기세가 아니라…… 음, 이런.”
교수는 아주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내 이름 옆에 무언가를 적었다. 보지 않아도 알겠다.
이것도 망했다.
* * *
유급제가 있는 줄 몰랐다. 기타 과목은 0점에 속이 쓰릴 뿐이지만, 기본 과목에서는 평균 점수 이하로 나와선 안 됐다. <빛의 소통>은 그럭저럭 치렀고, 나머지는 <빛의 활용>에 달려 있었다.
시험은 파트너가 필요했다. 의도적으로 빛을 불러내고, 교수가 준비해둔 검을 집었다. 그리고 상대보다 많은 양의 빛을 담는 자가 우수한 성적을 가져갔다. 못 담는 자는 가장 낮은 성적을 가져갔다. 위험 부담이 큰 성적 매기기였다.
아킨은 매우 초조해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보고 고개를 팽 돌리기는 했지만. 나는 그래도 옆에 앉아 한 마디를 건네 보았다.
“준비는?”
무시하던 아킨은 고개를 팍 돌리고 인상을 썼다.
“뭐?”
“준비는 잘했느냐고.”
“허.”
아킨은 군청색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머리끝까지 화난 얼굴을 했다.
“이제 와서 나를 아는 체하지 마.”
말을 걸지 말 걸 그랬다. 더는 신경 쓰는 게 아니라는 판단이 든 찰나, 아킨이 눈을 위험하게 빛냈다.
“너 때문에 인생이 다 망가졌어.”
“안타깝게 됐네.”
비꼴 의도는 없지만 아킨의 태도가 짜증이 나는 참이었다. 나도 저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불려가 혼나고, 스승에게 호되게 훈련을 받고, 일린저에게 걸려 바닥을 쓸고 다녔었다. 애초에 산도르아의 약혼자답게 행동했으면 될 일이었다. 비극을 자초한 건 본인이었다.
“어디, 뒷골목에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계집을 가져다가 예레 하라고.”
질척거리던 동정심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아킨은 재킷을 위협적으로 벗어던지며 내게 소리쳤다.
“그쪽에서는 열 살만 넘어도 몸을 판다던데. 그 반반한 낯짝으로 어떻게 굴러먹다가 눈에 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킨.”
그의 말이 맞았다. 외벽은 병사가 없었다. 법이 없었다. 열 살에 끌려와 몸을 파는 아이들도 있었고, 나도 개중에 하나가 될 뻔했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팔을 잘릴 각오를 하고 소매치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성과를 보이고, 쓸모를 보였다. 그렇게 끌려간 아이들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뒷골목에서 가장 비참한 이들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레카가 되면, 너는 절대 서부에 돌아오지 못하게 해 줄게.”
허세 섞인 거짓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없을뿐더러, 그게 어떤 책임을 지는 일인지도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이 아킨을 겁먹게 하리란 것은 알았다. 아킨은 어쨌든, 처음에는 내게 잘 보이려고 했으니까. 저런 뒷골목 거미줄보다 더러운 생각을 품고도.
이윽고 마주 보며 검을 쥐게 되었을 때 아킨은 눈을 사납게 번득였다. 검을 내 쪽으로 겨눴다. 한편으로는 그의 초조한 기색이 눈에 보였다. 지금까지 누구를 때려눕히고는 싶었던 적은 있지만, 잘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내가 검을 집어 든 순간 느꼈다. 나는 잘하고 싶었다. 쟤 앞에서 잘해 보이고 싶었다.
“준비.”
교수는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발밑으로 불러낸 빛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천의 빛이 우리의 발밑에 깔렸다. 아킨은 먼저 빛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살을 타듯 빛은 그쪽으로 흘러들어 갔다.
“시작.”
그러나 느낌이 달랐다. 노오란 달밤 아래, 일린저는 한꺼번에 저 많은 빛을 빨아들였다. 내가 고작 검 안에 넣을 빛을 가져간 것이 다행일 정도로. 그를 사랑한 빛들이 구애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빛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리 아킨이 불러도 가지 않으려는 빛도 있었다. 망설이며 아킨의 검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나의 빛을 서서히 불러냈다. 모았다기보다는 마음으로 빌었다. 간절히 빌고, 검의 손잡이에 힘을 줬다. 숨을 내쉬고, 숨을 먹었다. 빛이 숨결을 따라서 하나둘 끌려오기 시작했다. 빛은 내 손등 위를 타고, 하얀 검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제 친구를 따라서 손을 잡고 들어왔다. 하얀 검이 빛의 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 느낌이 기억났다. 한꺼번에 빛을 가져가 받고, 검을 들고 달려갔던 그때의 느낌이.
그 순간 빛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하나의 기둥을 완성하듯이 내 검을 메웠다. 검을 쥔 손바닥부터 박동이 울렸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율이 퍼져 나갔다. 따듯하게 호응하는 빛이 차오른다. 주위를 충만히 밝히는 빛들이 다가왔다.
“그만.”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내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아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발끝을 봤다. 내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온전한 초록빛이었다. 열매처럼 짙은 그것이 내 검을 이루고 있었다. 교수가 멍해진 나를 일깨웠다.
“이야라 위테르발도…… 승자의 점수를 가져가고, 또 반대로…….”
교수의 말을 듣다 말고 아킨이 등을 돌렸다. 강의실의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나갔다. 앉아 있는 아이들이 웅성거렸지만, 교수는 눈썹 털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태도 점수를 더 깎아야지…….”
교수님은 아킨의 이름 옆에 무언가를 더 적었다. 아킨은 그날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 기숙사에 처박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러나 재시험을 치러 오라는 말에도 듣지 않더니, 결국에는 유급 결정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완연한 가을, 시험의 계절. 승자와 패자는 명확하게 나뉘었다.
* * *
폰과 린은 북부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부모님이 그리웠다며 떠나는 그 걸음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겨울에 다시 보자며, 나의 등을 끌어안았다. 가을이 막 들어설 무렵에 시작된 휴가는 겨울에 들어서 끝이 나고, 또 겨울이 되면,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겠지.
하녀들은 우리의 짐을 실어서 날랐다. 나는 에드리트와 함께 서서 산도르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가 내 머리끝을 치고 지나갔다. 바람이라기에는 가볍고, 아프다기보다는 간지러웠다.
“잘 있어.”
내 머리 위를 지나간 손의 주인이 웃었다. 에드리트는 장난기 가득한 일린저의 모습을 처음 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주먹을 들어 흔들었다. 일린저는 더욱 좋아하며,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 환하게 웃으면서 손 흔들기. 열이 받아서 씩씩거리는 내 옆에서 에드리트가 놀라운 듯 물었다.
“왕자랑 언제부터 저렇게 친했어?”
“친해? 저건 날 놀리는 거잖아.”
에드리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신 목을 가다듬으며‘친한 것 같은데…….’따위의 소리를 냈다.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그때, 맞은편 기숙사에서 상기된 표정의 산도르아가 나왔다. 학원에 다니는 내내 어두웠던 얼굴이 처음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기분이 풀렸다. 나는 산도르아에게 물었다.
“좋은 일 있어?”
“응?”
산도르아는 책을 손 대신에 흔들었다. 보송한 토끼털이 묻은 책이었다.
“아니야, 없어.”
우리는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토끼의 손을 잡고 내려갔다. 우리를 데려다줄 때의 그 토끼였다. 똑같은 토끼가 데리러 온 것을 신기해하자, 문지기처럼 보이는 이가 말했다. 토끼들은 각자 맡은 학생이 있으며, 졸업할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리는 그 말에 귀엽다며 토끼를 쓰다듬었으나, 토끼는 성질을 냈다. 우리를 땅에 내려주자마자 뒤도 안 보고 뛰어 올라갔다.
“왜 저러지. 토끼라는 말을 들을 때가 아니면 화를 내지 않는데.”
그 말에 나와 산도르아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토끼가 데려다주네.’ 하며 신기해했던 게 기억난 것이다. 토라진 토끼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는 마차 안에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토끼라는 이름은 우리만의 별명으로 간직했다. 다음번에 올 때는 토끼가 좋아할 양배추를 많이 가져오기로 하며.
웃으면서 창밖을 보다가 멈칫했다. 언뜻 익숙한 이를 보았던 것 같다. 아주 잠시,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었지만.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이방인이었다. 이드리하임의 입구에서 잠시 본 듯했지만, 셉시스 성의 외곽이나 한미한 지방으로 갔을 그가 왜 여기 있겠는가. 나는 피곤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 * *
이드리하임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지난 일 년의 성적이 담긴 편지였다. 우리가 서부로 돌아오자마자 열어볼 수 있도록 날짜를 딱 맞추어 보냈다.
짐을 풀고, 정원으로 내려간 나는 잔뜩 긴장한 채였다. 과목을 잘못 선택한 죄로 0점짜리가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정원에는 맛있게 차려진 저녁과 어머니, 그리고 가운데에 앉아 우리의 성적을 읊고 있으신 할아버지가 있었다.
“기본 과목은 두 사람 다 통과했고, 이야라는 활용에, 산도르아는 소통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구나.”
잘 다녀왔냐는 말 대신에 할아버지는 나를 놀렸다. 장난스럽게 성적이 적힌 양피지를 흔들었다.
“이야라.”
“네.”
“기선을 어떻게 제압했니? 네가 아주 무서웠다고 하면서 교수가 점수를 깎았구나.”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웃고, 할아버지는 다 되었다는 얼굴로 성적이 담긴 편지를 내려놓으셨다.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성적에 대한 분노보다 흥미로운 것을 본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앉아. 너희 온다고 아주 성대하게 차렸으니까.”
어머니는 성적은 신경 쓰지 않는 양, 우리에게 두 팔을 벌렸다. 산도르아는 걸어가다가 어머니의 손목에 잡혀, 그대로 품으로 끌려 들어가 안겼다. 할아버지의 시선, 어머니의 비어있는 왼팔이 나에게 향했다.
“이런, 나머지 한 팔이 자유로운걸.”
어머니는 날갯짓하듯 왼팔을 움직였다. 나는 쭈뼛쭈뼛 걸어가다가 어머니의 팔에 조심스럽게 안겼다. 꽃잎을 빻아서 몸에 바르면 이런 냄새가 날까. 내 등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손이 이상했다. 잘게 떨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어머니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말했다. 어머니의 손이 머리부터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 그리운 손길에서, 그 포근한 향기에서. 어릴 적 누군가 쿠키를 구워주던 흐릿한 기억을, 내 삶의 유일한 온기였던 것을 놓아주었다.
여기가 내 집이었다. 정처 없이 배회하던 내가 돌아올 곳이었다. 나를 위한 어색한 파티에서 다시금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 *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휴가의 끝물이었다. 휴가 내내 내가 할 것이라곤 할아버지를 따라서 성을 한 바퀴 둘러보거나, 어머니의 유려한 필체를 따라 하며 놀거나. 그러다가 내가 심심해 보일 때면 할아버지가 밖으로 불러내었다.
“디아!”
할아버지가 제안은 머리 위로 공을 던지며 노는 것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공이 아닌, 빛을 담아야지만 들 수 있는 공이었다. 그 공을 던지며 노는 것은 보통의 집중력으로 할 수 없었다. 공을 가장 먼저 놓친 사람이 지게 되는 게임. 열에 아홉은 할아버지의 승리로 끝났다. 열에 한 번은 나와 산도르아가 번갈아 가며 이겼다.
어머니는 티 테이블에 앉아 우리의 공놀이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해 질 녘까지 공을 쫓는 우리를 보다 못해 한 소리 하셨다.
“그만 하세요. 해가 떨어지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을 듣는 기색이 없으면 어머니는 손을 뻗어 빛을 불러왔다. 어머니가 이끈 빛은 중간에서 공을 납치해갔다. 실컷 쫓다가 맥이 풀린 나는 흙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양말까지 땀에 전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혀를 찼다.
“머리카락 다 엉켜서.”
할아버지의 장난에 놀아나고, 다음은 어머니의 차례였다. 어머니는 땀을 흘리면서 노는 것이 숙녀답지 못하다고 했다. 손수 욕탕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서 물을 부었다. 젖은 옷을 벗기며 거품 물을 쏟아부었다.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어머니는 산도르아의 젖은 옷을 받고, 그다음으로 내 것을 받았다. 그런데 뻗어오던 어머니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차 싶었다. 내 몸에는 아직까지 뒷골목의 상흔들이 옅게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서 줘.”
옷을 건네자 어머니는 말없이 받으셨다. 하녀를 시켜 빗을 가져오게 한 후, 산도르아와 내 등 뒤로 가셨다. 그리고 산도르아의 곱슬머리, 곱슬기라곤 없는 내 머리칼을 빗질했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이 똑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빗질하는 어머니, 근육을 풀어주는 뜨끈한 물속. 할아버지와 종일 놀아 주느라 피곤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등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느꼈다. 눈이 떠졌다. 잠들어 있는 산도르아는 빗질이 끝났으나, 나의 머리칼은 아직도 빗겨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등 뒤로 차가운 물이 떨어졌다. 나는 작은 물방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입을 틀어막은 어머니가 흐느끼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이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자꾸만 어머니를 아프게 했다. 산도르아, 어머니,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말도 안 되게 엉망으로 커왔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엉망인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를, 어머니, 할아버지에게 어울리는 딸이 될 수 있을지를. 엉망으로 자라난 내가 그들의 상처가 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되고 싶었다.
* * *
휴가의 끝은 에드리트의 방문으로 알 수 있었다. 에드리트는 에스코트하러 온 신사 흉내를 냈다.
“가실까요, 아가씨.”
“느끼하니까 그만해.”
산도르아는 설레설레 머리를 가로젓고는 마차에 올랐다. 신입생일 때에 비해 짐이 간소했다. 무얼 챙겨야 하고, 무얼 챙기면 안 되는지 명확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에드리트와 같은 마차를 탔다. 원래 타고 가기로 한 마차에는 짐을 실었다. 배웅 나온 두 분을 끌어안고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이번 성적도 기대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한 뒤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요 며칠 잠을 설쳤다. 쉬지 않고 떠드는 에드리트의 수다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웬일로 밝아진 산도르아가 에드리트의 말에 맞대응을 했다. 에드리트는 휴가 동안 어지간히 외로웠나 보다. 말벗 노릇을 해주는 산도르아의 사려가 깊었다.
“그렇다니까. 내가 확실하게 알아 온 정보라고!”
“거짓말.”
갑작스레 산도르아와 에드리트는 다투고 있었다. 에드리트는 믿어달라며 조바심을 냈다. 겨울의 나른한 오후였다. 나는 겨울 볕을 베개 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에드리트가 내 정강이를 잡고 흔들어댔다. 무시하려고 하자 기어이 뺨까지 꼬집었다.
“이야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에드리트는 잠이 덜 깬 내 얼굴을 슬쩍 살펴봤다.
“지금까지 못 들었어?”
나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괜찮은 것 같네.”
“정말로?”
마차 안에 기약 없는 침묵이 떨어졌다. 그게 에드리트의 어수선한 수다보다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나는 황당해하는 산도르아와 숨이 넘어가게 웃는 에드리트를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내가 미리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어?”
“뭐를.”
“이야라!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답답해진 나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똑바로 말해.”
“네 약혼자 말이야. 에이버넷 위드먼!”
나는 황당하다는 산도르아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나는 발끝으로 가볍게 에드리트의 종아리를 쳤다.
“걔랑 약혼을 해? 그런 소리 들은 적도 없는데.”
“우리 아버지가 들었거든. 예레카 하께서 두 사람을 이어 주려고 한다고.”
예레카면 할아버지였다. 에드리트의 입은 금화 한 닢 무게만큼 가볍지만 실없는 소리를 하는 쪽은 아니었다. 에이버넷 위드먼이라. 나는 흐릿한 작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눈 내리는 입학 날, 내게 등불을 사줄까 묻던, 우유에 담근 초콜릿색의 남자애를 말하는 것이었다. 학원에 다닐 때 딱히 기억에 남지 않는 인상이었던 것 같다. 몇 번 오며 가며 인사를 했을까.
“너는 예레카가 될 거니까. 바예레카의 차남인 걔가 딱 맞긴 하지. 아, 우리 아킨만 불쌍하게 됐네.”
에드리트는 제 일이 아니니만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까불댔다. 나는 촉새같이 얄미운 그의 종아리를 한 번 더 쳤다. 에드리트는 아픈 시늉을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괜찮아, 이야라?”
산도르아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나는 눈으로 대답했다. 무엇이 괜찮으냐고. 산도르아는 식탁보같이 생긴 장갑을 벗으며 되물었다.
“정말 사실이라면,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말했다면 그건 진짜 약혼이잖아. 에이버넷과 혼인해도 괜찮은 거니?”
“글쎄, 와닿지가 않아. 그렇게 말해도, 실감도 나질 않고…… 내가 혼인한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산도르아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게 실감 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거야.”
나는 산도르아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실감 나는 약혼. 어렴풋한 에이버넷 위드먼에 대한 인상을 돌이켜보았다. 그래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게 생겼다. 풋풋한 청년에, 초콜릿색의 동공도 마음에 들고, 다정한 성격 같았다.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을 조합해 보면 그랬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말이라면, 어머니의 말이라면 따르고 싶었다. 상처 주거나 실망시켜 드리기 싫은 마음이 컸다. 더 이상 엉망인 나를, 엉망인 채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으니까. 할아버지가 에이버넷 위드먼과의 약혼을 지시한 거라면, 따르는 수밖에.
나는 성에가 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내 안에 미묘한 불안의 싹이 튼 것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부옇게 흐릿해지는 에이버넷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셉시스 가까이에 정차했다.
지긋지긋하기만 하던 여정도 익숙해지나 보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는 생각을 하고 문을 열었는데, 내내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에이버넷 위드먼의 얼굴이 떡하니 나타난 게 아닌가. 처음에는 실제가 아닌 줄 알고 놀랐지만, 그건 살아 있는 에이버넷이 맞았다.
같은 학년이지만, 내가 이상한 과목을 선택해서 듣는 바람에 에이버넷과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가끔 눈인사를 했을 뿐, 그마저도 까먹고 생략한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만약 에드리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에이버넷과 퍽 심심한 부부가 되겠구나.
생각에 빠져서 마차의 문을 열지도, 닫지도 않고 있었다. 마차의 열린 문틈으로 보인 에이버넷의 귀가 당근색으로 물들어 갔다.
“미안해, 내가 너무 일찍 마중을 나왔나 봐. 놀라게 한 것 같아.”
1학년 때와 달리 기숙사가 정해져 있어, 따로 밖에서 묶지 않고 곧바로 학원에 올라가도 괜찮았다. 나는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세게 문댔다. 정신을 가다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왔다.
“아…… 괜찮아.”
잡아 주려던 에이버넷의 손을 무시한 꼴이 되었다. 뒤따라 내려온 에드리트가 혀를 찼으나, 산도르아가 주먹으로 에드리트의 등을 내리쳤다.
“우리 예레 하가 이렇게 거친 면이 있으신데. 감당할 수 있겠어?”
“에드리트.”
나는 에드리트의 구두 앞을 지그시 밟아 눌렀다. 에드리트는 나 좀 살려 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나선 것은 에이버넷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저. 야라, 라고 불러도 될까?”
에이버넷은 에드리트의 발을 터지든 말든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말을 할 때마다 귀는 빨개지고, 손끝은 떠는데. 이건 나를 두려워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수줍음이 과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렇게나……원하는 대로 불러.”
만약 약혼할 사이라면 나쁘게 보여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에드리트의 배려 아닌 배려로 셉시스의 거리를 에이버넷과 걸었다. 산도르아와 에드리트는 뒤에서 산만하게 쫓아오는 중이었다. 산도르아는 계속 에드리트를 혼내고 있고, 에드리트는 바짝 수그려 낑낑거리는 중이었다.
저번에 왔던 등불 가게를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작년과 똑같이 시선을 뺏기고 있는데 갑자기 에이버넷이 길을 막아 세웠다.
“잠시만, 야라.”
“왜.”
에이버넷은 대담하게 내 손을 잡았다. 손의 감촉은 평범했다. 적당히 딱딱하고, 말랑할 부분은 말랑했다. 에드리트는 손을 잡아끌더니 상점의 문을 열었다. 에이버넷의 눈이 빠르게 그곳을 훑고, 연분홍 꽃처럼 생긴 불이 담긴, 가장 화려한 등불을 가리켰다.
“이것으로 드릴까요?”
“네.”
상인은 등불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안 달아도 될 리본까지 잔뜩 달았다. 상인은 나름 정성스럽게 포장한 그것을 넘겼고, 에이버넷은 망설임 없이 값을 치렀다. 우리는 상자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산도르아와 에드리트는 사라진 후였다.
“선물이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쁘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나는 어정쩡한 손길로 그것을 받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가 볼까.”
에이버넷은 앞서서 걸어갔다. 나는 부담스러운 포장지에 쌓인 선물을 들고서 걸어갔다. 약간의 사이를 두고서, 이것이 같이 걷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한 거리를 두고 걸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하얀 토끼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토끼는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고, 다만 나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에이버넷의 담당인 토끼도 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나의 듬직한 토끼도 옆에 섰다.
또다시 돌아온 올해의 겨울. 나는 구름을 밟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 * *
기숙사는 커튼이 노란색으로 변한 것을 빼면 그대로였다. 만약 누군가가 302호를 쓰기 싫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올해 입학한 1학년들과 같이 쓰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3학년 과정이 된 나타리아도, 폰과 린도 302호를 쓰겠다고 전한 참이었다. 그러니까 재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양옆에서 십분 째 달라붙는 이 쌍둥이들이 과한 것이었다. 쪄 죽을 것 같아서 몸부림치는 나와 친밀한 인사를 하자며 붙는 쌍둥이들, 그리고 여전히 까칠한 나타리아가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어린 애들처럼 붙어 있기는.”
이번 학년에는 역할을 바꾼 모양이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여학생 역할에 심취해 있던 그녀가 올해는 학원의 고독한 양치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수다가 길어지면 눈치를 주고, 친구라는 것은 학업에 방해만 될 뿐이라며 혀를 찼다. 쌍둥이들은 저래서 친구가 없는 거지, 했다.
나타리아는 우리가 신입생이었을 때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으니. 나는 망한 수업만 골라 들었고, 쌍둥이들은 발품을 팔아야 했었다. 머리가 굵어진 쌍둥이의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타리아가 그렇게 밉진 않았다. 어쨌든 작년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끔찍하다고 볼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크로탄티스어를 제외하고) 기억이 미화된 것인지, 한 번 더 교수님들을 보고 싶은 감정까지 들었다. 물론, 올해 수업 계획서는 작년과 완전히 다르지만, 1학년들이 다가와 물어보면 최악까지는 아니라고 전할 수도 있었다.
“저기, 안녕.”
그리고 생각만 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2년 과정의 기본 과목은 <활용의 심화>였다. 1년 과정에서 배운 것을 심화한 것이 2년 과정이었는데, 인기 높은 교수의 수업에 선착순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공했다. 에드리트의 조언대로 아예 안내서를 받자마자 학원에 곧바로 편지를 써서 부친 것이었다.
언어다운 언어를 배우고, 괜찮다고 소문 난 수업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게 그렇게 기쁠 일인가? 생각하다가도 작년을 떠올리면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물구나무서서 보아도 신입생이었다. 여기에서 겨울, 봄, 여름, 가을을 보내다 보면 엔간한 얼굴은 눈에 익었다. 그런데 전혀 못 보던 얼굴에, 뺨에 살이 올라 앳된 얼굴, 신입생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여학생 둘이 내 앞에 왔다.
“뭔데.”
체구가 아담한 여자아이 두 명은 수줍은 듯이 수업 계획서를 내밀었다.
“서부에서 온 사람들인데. 아무래도 예레카가 되실 분의 추천을 받고 싶어서.”
왜 나인가 했더니 서부의 귀족들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수업 계획서를 받았다. 웬만히 인기 있는 것에 동그라미 쳐 놓은 것을 보고, 나는 대충 그걸 들으면 된다고 끄덕였다.
“그거 들어.”
“예레 하께서는 뭘 들었어요?”
갑작스레 존칭을 섞으며 물어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겉으로나마 평등을 추구하는데, 아무래도 신입생이다 보니까 서투른 모양이었다. 내가 들은 <크로탄티스어>,<눈빛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을 구태여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 없는 대답을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내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커다란 손이 등까지 감싸 안더니, 들고 있던 수업 계획서를 납치했다.
“다 별론데. 이거 말고 데니스 교수님 수업이 제일 재밌어.”
잠긴 듯 낮은 목소리였다. 내 고막을 찌르고 들어와 자신을 인식시켰다.
“안 놔?”
나는 일린저의 손을 밀치고 떨어졌다. 학원에 다닌다는 것은, 어쨌든 저 녀석과 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욕설을 삼키는 듯하자, 씩 웃은 일린저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자세히 알고 싶어?”
그는 얼굴을 붉힌 1학년들에게 다정히 물었다. 녀석의 실체를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아야지 별수 있겠나. 나는 뒤로 돌아서려 했다. 그때, 일린저의 엄지가 내 손목뼈를, 커다란 손이 손목을 휘어잡았다. 황당함에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수업 계획서를 보며 1학년들에게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한 손으로는 나를 붙들고 있었다.
놓으라는 말이 순순히 먹힐 상대인가. 발을 높이 들어 그의 구두를 밟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린저는 한 발 일찍이 피하고, 나는 애먼 바닥만 찧는 신세였다. 그는 손힘을 풀지 않았다. 나는 모이 쪼는 닭처럼 그의 발을 노렸다. 1학년들은 그의 다정한 설명에 취해 이쪽에서 전쟁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콧잔등에 안경을 낀 교수 둘이서 수다를 떨며 오다가 이쪽을 보았다. 나는 인사를 하려고 입술을 열었으나, 교수의 눈은 인사보다 잡힌 손목에 가 있었다. 허허, 하면서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했다.
“놔.”
“이 교수는 수업이 힘든 대신에 숙제는 간단하거든. 차라리…….”
일린저는 모르는 척 대꾸하다가 내 목소리가 높아지자 잡힌 팔을 흔들었다. 말썽 없이 있으라는 의미였다. 힘은 어찌나 센지 흔들어도 빠지지가 않았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많은 참고가 됐는데.”
1학년들은 분노로 달아오른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일린저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 수업 계획서를 받아 갔다. 일린저는 1학년들이 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내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일어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몸을 굴리듯 빠져나왔다.
“한 번만 더 해 봐. 손모가지 부러질 테니까.”
“휴가 가 있는 동안 보고 싶었어. 잘 지냈나 봐?”
치마 두른 사람만 보면 수작질하는 게 일상이었다. 말문이 막힌 내가 자리를 뜨려는데 복도로 인파가 쏟아졌다. 그 속에 섞여서 나가려는 나를 일린저가 붙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으나, 흥미 어린 시선 한둘을 모은 후였다.
“일린저.”
일린저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무리가 걸어왔다. 일린저의 친구라는 기준은 굉장히 모호했다. 어느 기준으로 둔 지는 모르겠으나, 개중에 예레카나 바예레카의 가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어제 만난 애도 친구, 친구의 친구도 친구였다.
왕자라는 사람이 친구를 가려 사귈 줄 알았으나, 일린저는 제게 다가오는 이는 누구도 개의치 않았고,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왕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스스럼없이 대했다. 평상시 공식적인 자리에서라면 얼어서 말도 붙이지 못할 이들이 학원이라는 보호 아래서 왕자의 좌우를 차지하고 다녔다.
그중에서 가장 맹목적인 것이 마버드 벨레가였다. 내가 이름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덩치가 있고, 험악하게 생긴 것을 떠나서, 아킨 페네크에게 진흙을 던지며 놀았던 애이기 때문이었다.
아킨은 결국 올해에 학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유급한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학원을 졸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킨도 자존심이 보통 아닌 녀석이니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한 에드리트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었다.
나는 마버드 벨레가가 그렇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그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일린저도 덩달아 마찬가지였다. 왕자라는 사람이, 곧 왕이 될 사람이, 오면 오는 대로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에 약간의 의문이 들 정도였다.
됐다. 학원의 친우가 백이든 천이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마버드가 내 앞을 막았다. 기분 나빠서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기 직전이었다. 입을 연 것은 일린저였다.
“왜 막아?”
마버드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나는 일린저의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지나치게 싸늘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뭔가,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서.”
“가게 해. 가고 싶다고 하잖아.”
정작 나를 지금까지 막아선 것은 자기면서.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일린저는 표정의 변화 없이 윙크만을 했다. 나는 급하게 마버드를 밀치고 걸어갔다.
‘저런 표정이 미치게 좋아.’
무리에 둘러싸인 일린저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그 말을 듣고서 한참 분노를 삭여야 했다.
나를 지 심심함 달래 줄 장난감으로 본다 이거지.
* * *
1학년 과정과 다르게 2학년 과정은 직관적이었다. 빙빙 둘러서 말하는 법이 없고, 시험에 나올 것, 참고만 할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내가 지금껏 받았던 수업이 엉망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수업의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은 꽤 재미난 경험이었다.
그 값진 경험은 나를 도서관에 앉히고, 과제를 미리 해두는 쾌거까지 이루게 했다. 이번 학년부터 기본 과목은 하나이기 때문에 부담이 많이 줄었다. 마음이 편해짐과 동시에 좋은 성적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기대까지 차오른 차였다.
도서관에만 박혀있던 내 눈앞에 갈색 병 하나가 놓였다. 초콜릿 맛 우유였다.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보니 초콜릿색의 눈이 있었다. 에이버넷은 내게 입 모양으로 ‘잠시 쉬어.’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에이버넷은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 내 앞자리를 차지했다. 자신도 할 일이 있는 듯 책을 꺼내고 읽는다. 서로의 할 일에 집중하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에서 나는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다른 이들과 있을 때 느꼈던 묘한 긴장감이나 날섬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만족스러울 만치 과제를 마치고 시간을 봤을 때는 종이 울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었다. 나는 다급히 책을 챙겨 들고서 일어나는데, 앞자리에 앉은 에이버넷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봤더니 쌔근쌔근 졸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일어나.”
에이버넷은 잠에 머무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내가 걸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책을 챙기고 돌아서는 학생을 보다가 에이버넷은 다급히 일어났다.
“미안.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
우리는 불이 꺼진 이드리하임의 상가 거리를 걸었다. 많은 학생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서 그곳을 지나오고 있었다. 도서관은 규모가 컸지만 이드리하임 상가의 뒤편에 있고, 또 오고 갈 때마다 상가를 반드시 지나쳐 가야 했다. 그래서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상인들이 그렇게 설계하도록 힘을 쓴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
종이 치기 전이면 상가는 모두 닫을 시각이었다. 불이 꺼진 거리를 걷는 몇 명의 구두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조용한 상가의 거리를 걷고, 계단을 올라가 기숙사로 걸음을 틀었다. 얌전히 따라오던 에이버넷은 그제야 말을 걸었다.
“야라, 숙제는 다 했어?”
“응.”
“대단하다.”
“종일 거기에 앉아 있었는데 못하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
말을 막 뱉자마자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산도르아가 항상 조금만 더 부드럽게 말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내가 입 안의 침을 삼키고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어느새 여자 기숙사 앞이었다. 남자 기숙사는 그러고 보니 반대편이었다. 나를 데려다준 모양인데. 에이버넷은 이 야밤에도 귓가를 붉혔다.
“조심히 들어가.”
코앞인데 여기서 더 조심할 게 무엇이 있을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에이버넷과 약혼할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바예레카의 자식과 이어지는 게 보통이라고들 하니까.
아킨은 물 건너갔으니, 적합한 상대는 에이버넷만이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드리트는 과장이 심하기는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계획해 둔 것이 맞을 것이다.
“너도.”
에이버넷은 그 말만으로도 기쁜 듯 활짝 웃었다. 혹시 종이 칠까 봐 바쁘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손에 남은 초콜릿 우유는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 * *
빛은 사람을 따랐다. 빛은 어디에나 있고, 빛을 다루는 자라면 설령 황무지에 있더라도 빛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것은 사람마다 천지의 차이여서, 누가 다루냐에 따라 빛은 불이 될 수도, 물이 될 수도,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었다.
빛의 활용은 그것을 검이나 활이나 창에 담는 것이고, 이제는 그 빛을 검에 담고 어떻게 휘두르느냐의 문제였다. 빛을 담은 검은 물론 일반 검보다는 강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검의 끝에서 불을, 물을, 대지를 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구현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빛을 다루는 능력은 사람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것이 내가 2학년 과정에 들어와서 배운 것이었다. 빛을 무언가로 바꿀 수 있는 능력. 빛을 불로, 물로, 또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로.
“대단한걸.”
2학년 과정의 기본 과목 <빛 활용의 심화>를 맡은 교수는 대단히 친화적이고, 유머러스하며,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약자에게 친절하고, 차별을 혐오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그도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는 박수를 치며 애정을 드러냈다.
“일린저 모르온. 학생은 따로 가르칠 필요도 없겠어.”
일린저는 왕이 될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모든 과정이 그에 맞추어져 있었다. 예레카가 된다고 길러진 산도르아도 만만치 않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재능을 타고난 일린저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으니, 우리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린저는 하얀 검에 빛을 모은 다음, 그것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먼 과녁이 불에 타고, 얼려지고,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졌다. 일린저는 빛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이제 막 검의 끝에서 촛불을 피워낼까 말까 하는 우리의 수준과 비교하기가 우스운 지경이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그를 환호하는데 나는 왜 이리 심통이 나는지 모르겠다. 빛나는 천사를 축하해 주지 못하는 악역이 된 기분에 성의 없이 박수를 쳤다.
입 안에 아무것도 없음에도 바람을 씹는 듯 씹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일린저가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간 찾았던 사람이 나인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아주 꼴 보기가 싫었다.
내가 눈을 휙 돌리든 말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 옆은 아니고 앞자리에 앉았다. 단상에 올라간 교수는 일린저가 자리에 앉자마자 연설하듯 손을 흔들었다.
“자, 방금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라. 우리가 목표할 것은, 아주 가벼운 불꽃이고. 우선 오늘은…….”
교수님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손가락 두 개를 추어올렸다.
“두 명씩. 파트너를 만들어 볼까.”
그 말에 다들 우왕좌왕이었다. 세 명씩 친한 사람은 누구를 떨굴 것인가 고민하고, 나는 산도르아와, 폰은 린과 하기로 결정했다. 수업 시간도 마침 넷이 비슷비슷해서 연습하기가 좋았다. 미리 휴가 때 짜 놓은 수업 계획서 덕분이었다.
그러나 우리 같은 경우가 오히려 드물고, 다들 제짝을 찾고, 서로 소개를 받고 난리도 아니었다. 교수님은 단상에 서서 한참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도무지 안 되겠는지 십 분의 휴식을 갖자고 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 십 분 동안 짝을 찾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십 분이면 제짝을 찾을 거라는 기대와 다르게 일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짝을 찾은 사람끼리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교수님이 파트너로 지어준 것이, 분명 시험과 연관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교수님은 별생각 없어 보이던데.
“우리도 파트너끼리 같이 연습할까?”
“괜찮을 것 같은데.”
덩달아 쌍둥이들도 불안해져, 나와 산도르아와 팀을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난잡한 때에 앞자리 일린저가 뒤를 돌아보았다. 계획을 짜는 쌍둥이 사이에 있던 나와 눈길이 맞닿았다.
“이야라.”
무언가 불길한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듣지 않으려 했으나, 일린저는 항시 내 불안을 뛰어넘는 놈이었다.
“나랑 하자. 파트너.”
그 말에 서서히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일린저의 말을 들은 사람은 귀엣말로 옆 사람에게 옮기고, 옆 사람은 또 옆 사람에게 옮겼다. 그렇게 한창 떠들던 이들까지 이쪽을 주목하게 하고 나서야 일린저는 쐐기를 박았다.
“나랑 하자. 잘해 줄게.”
나는 산도르아의 손목을 들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있어.”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린저는 산도르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산도르아, 양보해.”
“응?”
이번에는 시선이 산도르아에게 쏟아졌다. 산도르아는 주목되는 시선을 기피하는 아이였다. 주변의 눈초리에 목소리가 죽더니, 이도 저도 아닌 미소를 지었다. 내 입장이 곤란할까 봐 대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린저 모르온.”
나는 나름 진지하고, 상냥하게 그를 불렀다.
“우리는 파트너가 정해져 있으니까. 네 파트너를 따로 찾아보는 건 어때?”
이 말도 다듬고 갈아서 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이렇게 나한테 치대고 난리냐면서 머리털을 뽑고 싶었다. 내가 확실히 거부하자, 일린저의 곁에 있던 아이들이 기회를 잡았다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그럼, 이야라. 내가 대신해도 돼?”
그걸 나한테 묻는 게 웃겼다. 내가 ‘예, 하세요.’ 하면 일린저가 수긍하는 줄 아는 것인가. 본인한테 물어볼 입은 어디에 두고 나한테 그러는 걸까. 나는 상관없다는 얼굴로 으쓱했다. 일린저는 허리를 틀어 뒤돌아보았다.
“난 너랑 하고 싶은데.”
“난 너랑 하기 싫어.”
순간 갈아두지 못한 진심이 내보내졌다. 주변에서 헛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다시 웅성거림이 커져 갔다. 밖에서 손을 닦고 온 듯, 손수건을 들고 들어온 교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직도 못 정했나?”
교수의 물음에 누가 속 시원히 나서서 대답하겠는가. 파트너는 대강 정해졌으나, 떠든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게 다 차례가 아닌데도 튀어 나간 진심 때문이었다. 불안함에 손톱을 뜯고 있을 때, 교수가 일린저를 콕 집어서 물었다.
“학생은. 결정했고?”
역시 가장 궁금한 것은 일린저의 파트너였나 보다. 그가 파트너를 맡아 준다면 실력이야 오르겠지. 다만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은 면치 못할 일이었다. 앞니도 열댓 번은 깨질지 모르고. 그는 성과가 나올 때까지 흙에다가 묻어둘 인간이었다.
“하고 싶은 사람은 있는데…….”
턱을 괸 일린저가 중얼거리자, 교수가 따로 묻지 않았음에도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던져졌다. 깨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교수의 시선도 당연히 나를 향했다.
“이름이?”
나는 웅얼거리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이야라 위테르발도입니다.”
“오호. 미래의 왕과 예레카의 만남이라.”
교수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재미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미동 없는 내 표정을 본 교수가 머쓱한 듯 허리를 폈다.
“학생의 파트너는 누구지?”
산도르아가 분위기를 타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교수는 손을 든 산도르아를 향해 말했다.
“강요할 생각은 없네만. 양보해 줄 수 있나?”
강요할 생각은 없다지만, 이미 물어보는 것 자체가 강요였다. 교수님은 괜히 민망스러운지 최고의 학생이 도와줄 학생을 직접 고른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굉장히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썩은 표정을 유지했다.
“양보하겠습니다.”
산도르아도 거기서 더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짝이 없어진 산도르아는 누구를 찾을까 헤매다가 마침 짝이 없는 아이 하나와 짝을 이루었다. 그 또한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듣는 내내 새까만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 * *
파트너끼리 모여서 수업 시간을 맞추고, 자투리 시간에 모여 연습을 한다고 했다. 팀을 이뤄서 연습을 할 정도로 난도가 있는 과목이니, 어쩌면 나는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었다.
상대는 최고라고 칭송받지만 실상은 최악이었다. 그 오만한 표정도, 비스듬한 미소도, 뻔뻔하게 붙는 몸짓도 싫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제 파트너를 찾아서 야외 테이블이나 도서관 뒤편의 공터, 혹은 푸른 잔디의 들판에서 연습 중이었다. 나 홀로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생각 없이 긁고 있는데, 누군가 긁고 있는 내 손을 잡아챘다.
“에이버넷.”
“그러다가 피 날 것 같아서.”
나는 빨개진 다리를 보고 단숨에 창피해졌다. 에이버넷은 웃으며 재킷을 벗었다. 무얼 하나 했는데, 그 까만 재킷을 내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곧 봄이 지나가지만, 꽤 쌀쌀한 날이니까.”
돔의 봄과 가을은 짧았다. 겨울은 길고, 여름도 길었다. 긴 겨울을 지나서 맞이한 봄이 떠나려는 시기는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에이버넷의 핑계라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이라면, 이게 너는 춥냐면서 재킷을 바닥에 버려두었을 텐데. 지금은 왠지 에이버넷의 상처 입은 얼굴이 그려져 망설이게 된다. 왜 내가 망설이는지 알 수도 없는 그때, 내 등에 원형의 빛이 닿았다.
[어디야.]
기분 나쁜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일린저의 목소리였다. 빛은 하나가 더 왔다.
[빨리 와.]
이 미친놈은 어딘지 정해 놓지도 않았다. 아니, 정했었나? 그러고 보니 여기서 기다릴 테니 빨리 다녀오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각자의 수업을 마치고 다시 그 강의실에서 만나자는 소리였나. 나는 한숨지으며 난간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 할 것 같아.”
“모르온 왕자에게 가는 거야?”
나는 그에게 재킷을 건넸지만, 에이버넷은 받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일이…….”
“들었어. 이미 다들 이야기가 많던걸.”
에이버넷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와 물었다.
“혹시, 관심이 가고 있는 건지, 내가 물어도 될까.”
“누구를?”
“모르온.”
나는 기가 막혀서 입술을 떡 벌리고 말았다.
“내가 왜.”
“저번에 보니까 친근해 보이던걸.”
나는 이 기가 막힌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에이버넷은 자신의 재킷을 내 어깨에 둘러 줬다.
“아니라면 됐어.”
그가 쓴 걸 먹은 것처럼 웃었다. 왠지 처연해 보이는 웃음에 나는 시선을 돌리고만 싶었다. 그러나 에이버넷의 시선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재킷 또한 내 몸에 제대로 걸쳐주었다.
“공부만 하고 와.”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뒷골목에서 들은 것은 훨씬 적나라한 남녀의 사생활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후의 고즈넉함 같은, 할아버지의 집무실 같은, 그런 에이버넷의 목소리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가슴 언저리가 불편했다.
약혼에 대해 어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당사자들은 암암리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서로를 이미 혼인할 사이로 보고 있을 터다. 나는 이미 그러고 있었고, 에이버넷도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 * *
빈 강의실이 줄지어 있었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상가를 활보할 무렵, 공중에 뜬 성을 홀로 지킨 왕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에이버넷과의 만남을 끝내고 강의실로 돌아왔다. 일린저는 예상대로 책상을 깔고 앉아서, 빈 단상을 멍하니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문을 일부러 소리 나게 닫았다. 일린저가 나를 돌아보았다.
“누구랑 있었어.”
일린저의 눈이 내가 아니라, 어깨 위 재킷에 있었다. 일린저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에이버넷의 재킷을 벗어 아무 의자에나 걸어두었다. 그리고 일린저가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앞으로는 장소 좀 정확히 알려. 그게 여기 오라는 이야기인 줄 어떻게 알아.”
일린저의 무표정한 얼굴이 갑자기 미소를 그려냈다. 그는 발을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거 못 알아먹을 정도로 머리가 모자라 보이진 않았는데.”
“정확하게 하란 소리야. 머리 모자란 사람처럼 여기서 혼자 기다리지 말고.”
“에이버넷?”
뜬금없이 나온 이름이지만, 전혀 뜬금없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일린저는 ‘아.’ 하면서 깨달은 것처럼 외치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가 왼손을 들었다. 갈퀴라도 달린 것처럼 에이버넷의 재킷이 날아가 일린저의 손끝에 걸렸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걸까.”
“장난쳐?”
내가 손을 뻗자, 일린저는 재킷을 높이 들었다. 내가 그의 팔을 쫓아서 손을 뻗자, 제대로 일어나 버렸다. 그의 발등을 찍으려고 구두를 들어 올릴 때였다. 일린저의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이마는 그의 셔츠 카라에, 뺨은 쇄골에 닿았다. 어설프게 안기고 만 나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죽이기 전에 이거 놔.”
“드디어 반역을 계획할 마음이 생긴 거야? 나는 네가 진즉에 그런 줄 알았지.”
“이 미친 새끼가.”
내가 유급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하고 파트너는 안 한다. 나는 몸을 미친 듯이 털어낸 다음, 틈이 생기자마자 바로 빛으로 몸을 감쌌다. 하늘로 튀어 올라, 그의 손에 든 재킷을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땅에 내려앉는데, 어디서 가당찮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가 반하겠어.”
“입 닥쳐.”
“그게 내 재킷이었다면 더욱 감동했을 텐데.”
더는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강의실 문을 향해서 뛰었다. 내 발이 하늘에 떠올랐다. 뛰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낮고, 비열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도 할 줄 아는데, 한번 볼래?”
아까까지는 나를 포근하게 감쌌던 빛들이 몸을 옥죄였다. 그 빛은 나를 끌어당겨, 농락하듯 천천히 날아갔다. 나를 포박하고, 그의 무릎 위로 나를 안내했다. 일린저의 무릎에 앉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목 졸리기 싫으면 이거 풀어.”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자 일린저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등을 토닥였다. 일린저의 무릎에 이렇게 걸터앉았다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일린저는 튀어나온 내 등뼈를 쓰다듬은 다음, 귓불 가까이에서 뱀처럼 유혹적인 목소리를 냈다.
“우리 내기할까.”
“안 해. 네가 내기 조건으로 네 나라를 건다고 해도 안 해.”
“나를 죽이고 싶다며. 벌써 포기하는 거야?”
이 미친 새끼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정상인인 척 잘만 하면서 왜 나한테만 이 난리를 피우는지. 나는 차분하게 화를 가라앉히고, 이 미친 새끼의 팔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모색했다.
“네 팔에서 풀어주는 게 조건이야?”
“아니지. 그런 시시한 걸 내걸면 어떻게 해.”
“우선 그러면 내려놔.”
“내기해 줄 거야?”
“내려놓으면.”
그는 내가 말을 지킬 것이라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러나 내가 땅에 발이 닿자마자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손을 들었다. 그대로 내리쳐 그의 뺨을 때렸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돌아갔다.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찌 보면 더 화나는 일이었다. 그는 마치 화난 아이를 달래주려는 듯, 옜다 한 번 맞아주자 한 것이었다. 제 힘을 이용해 멋대로 굴어 놓고는, 이딴 식으로 봐주는 것도 끔찍이 싫었다.
그의 고개가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왔다. 화가 담기지 않은 눈이 나를 향했다.
“이제 말해도 돼?”
“한 대 더 맞고 얘기하든가.”
배시시 웃는 꼴이 역겨웠다. 팔짱을 끼고 들어나 보자는 자세를 취하자, 그가 다시 몸을 바로 했다.
“나를 한 번이라도 넘어뜨리면, 네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줄게.”
“뭐?”
“단, 기한은 시험 전날까지야.”
나는 해괴한 소리를 뱉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다음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