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소년들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외로운 밤이면 나는 빛을 부른다. 빛은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저녁이 되면 기어 나와 책을 꺼내왔다. 내 무릎에 책을 펼치고, 귓가에서 사근사근히 읽어줬다.
저녁마다 침대로 꾸물꾸물 올라오던 외로움이 가셨다. 내 안색이 밝아지자 어머니는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우리 둘이 손을 잡고서 저택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는 말할 게 무어가 있을까. 최고의 답을 얻었다며 우리에게 상을 내렸다.
덕분에 나와 산도르아는 성내로 나가볼 기회를 얻었다. 호위가 붙고, 하녀가 붙겠지만 좀처럼 외출하기 어려운 환경을 생각하면 대단한 포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당분간 우리가 빛을 다루는 것에 푹 빠져 지낼 것이라고 했다. 빛을 본 사람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며. 그래서인지 나는 밖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이불 밑에 숨어서 빛을 불러낸 다음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나는 외출은 보류시켰지만, 산도르아는 외출에 사활을 걸었다. 덕분에 외출하기 위해 준비시킨 마차는 산도르아가 독차지했다. 아마 안에서 자란 산도르아와 바깥에서 자란 내 차이일 것이다. 나는 바깥에 흥미가 없었고, 산도르아는 벽 안에 흥미가 없었다.
나는 나날이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골칫거리는 자신이 가장 안락한 순간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안팎은 골칫거리로 변할 만 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끌고 온 것도 있었고, 안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우선 바깥에서 골칫거리를 끌고 온 자는 산도르아였다. 후회하지 않을 외출을 하겠다고 다짐한 산도르아가 저녁노을이 지기도 전에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혼자 나간 그 아이는 둘이 되어 돌아왔다.
“제 눈앞에서 죽어가게 둘 수는 없었어요.”
온통 피범벅이 된 이방인 하나를 마차에 실어 왔다. 산도르아의 그 한마디에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경악을 감추었지만, 이윽고 산도르아의 호위가 흘린 말에 신음을 삼키셨다. 산도르아가 데려온 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려 외벽을 주름잡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외벽에 살았던 나는 잊을 만하면 마주쳤던 이들이었다. 이방인은 대체로 피부가 갈색이었고, 떼로 몰려다니며 악행을 저지르는 데 능했다.
산도르아가 데려온 이방인도 물건을 훔치다가 저 꼴이 된 것이었고, 우연히 산도르아의 마차로 피신한 뒤 기절했다고 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산도르아는 쓰러진 이방인을 주워왔다. 산도르아는 단순한 동정심이며, 그 이방인의 치료가 끝나면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일단 그 사건은 자비로운 산도르아의 마음을 어른들이 이해하는 것으로 일단락된 듯했다.
다음 골칫거리는 나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성내가 요 며칠 떠들썩했다. 어머니는 치맛자락이 닳도록 분주했고, 할아버지는 자주 나타나 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많아졌다. 덕분에 나는 덩달아 소란스러워졌고, 할 일은 태산같이 늘었다. 기본예절이라면서 배울 게 늘어났다. 이거를 다 배우다가는 열흘 밤을 꼴딱 새우게 생겼다.
“왕자가 온다고 해요.”
이게 다 빌어먹을 왕자의 방문 때문이었다. 오든지 말든지, 하는 나와 달리 들뜬 하녀들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촌인 에드리트가 서 있었다. 쟤는 자기네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나를 성가시게 굴거나, 할아버지와 체스 내기를 하는 한량이었다. 할아버지 말로는 어차피 왕자가 이곳으로 오니, 에드리트도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아서 되물었다.
‘저 얼뜨기가 있는 게 어째서 좋은 일인데요?’
‘세상에! 들으셨죠! 저렇게 말을 밉게 한다니까요?’
할아버지는 그저 웃었다. 에드리트는 억울하다며 두 손을 들었다.
‘너, 내가 도와주나 봐라.’
‘그러니까 대체 뭘.’
할아버지는 에드리트의 잔에 붉은 차를 따르며 진정하라고 한 뒤, 내게 조언하듯 말했다.
‘앞으로 네가 모셔야 할 분이잖니.’
할아버지의 말은 다정하나 뭔지 모를 힘이 있었다. 에드리트는 할아버지를 방패 삼아 나를 놀렸다.
‘왕자 앞에서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인데 말이죠.’
에드리트는 이 모임, 저 모임을 다니다가 왕자를 만났다고 했다. 왕자는 돔의 왕좌를 가질 자였고, 할아버지의 말대로 언젠가 내가 모셔야 할 사람이었다. 나는 책에서 본 왕자를 떠올렸다. 죄다 말수가 없고,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길 즐기고, 다정한 편들이었다.
‘말수가 없기는!’
에드리트는 내가 생각해온 왕자에 대해 말하자, 튕기듯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처음 왕자한테 인사를 했을 때 말이야. 그때가 아마 재작년이었을 거야. 왕자가 너랑 동갑이니까…… 그렇지, 고작 왕자가 열넷일 때, 나는 열다섯일 때. 남부에 왕자가 왔다고 어찌나 떠들썩한지 우리 아버지도 가서 인사나 하라고 등 떠밀었는데…….’
‘제발 짧게 좀 말해.’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거야. 누가 내가 앉을 의자에 살아있는 뱀 수십 마리를 집어넣은 거야. 앉자마자 뭐가 꾸물거려서 보았더니 노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지 뭐야.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났는데 다들 날 이상하게 쳐다봐. 그래서 다시 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한심해서 말이 안 나왔다.
‘그 왕자가 빛을 다루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거든. 아무리 둘러봐도 고만고만한 우리 사이에서 그런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돼? 그것도 왕자를 보는 자리에서. 심심한데 내가 잘 걸린 거지, 뭐.’
‘할아버지.’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얘기했다.
‘얘를 믿어요?’
할아버지는 눈 한쪽을 찡긋거렸다.
‘들었잖니. 위기의 상황에 나타나는 왕자처럼 우리 에드리트가 네 몫의 장난을 다 당해줄 거란 얘기였다.’
‘예?!’
할아버지의 장난에 심기가 상한 에드리트는 그날로 할아버지의 집무실에 나타나질 않았다. 며칠을 삐쳐서 나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는데, 성격상 모질지 못한 그는 저렇게 창밖을 서성이며 나를 기다렸다. 내가 풀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열흘은 넘겼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저 수다쟁이랑 눈이 마주쳐서 좋을 게 없으니 커튼을 치려던 차였다. 갑자기 에드리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는 더러 삐치기는 했어도 화를 내진 않았다. 나는 에드리트의 분노에 관심이 갔다. 그가 화를 낸다면 심각한 일이 틀림없었다. 내 창문에서 보일 정도면 가까이에 있단 소리였다. 혹시라도 구경을 놓칠까 싶어서 달려간 곳에는 에드리트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여전히 화를 내는 중이었다. 벌이 제 입에 들어갔다 나와도 모르고 있었다.
“산도르아!”
그런데 상대가 의외였다. 평소 에드리트가 죽고 못 사는 산도르아였다. 산도르아 또한 방어적인 자세였다. 팔짱을 끼고, 허리가 굽어져 있었다. 산도르아의 손에는 목검이 들려있었다. 에드리트의 손에도 마찬가지로 목검이 들려있었다.
“제정신이야? 가문에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넣어놓고, 심지어 검술까지 가르치다니!”
“내가 말했잖아, 에드. 단순한 놀이라고.”
“내 말은, 왜 저런 자식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느냔 말이야.”
“내가 데려온 내 사람이야. 어머니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을 왜 네가 나서서 이래?”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봐주고 계신 거겠지. 나는 내 사촌이 저런 더러운 것하고 같이 있는 꼴 못 봐.”
“더러운 것?”
“그래! 더러운 것!”
각오한 것보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나는 걸어가 에드리트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느라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틈에 나는 에드리트가 말한 더러운 것을 보았다.
산도르아의 뒤에 선, 어깨가 축 늘어진 사내애였다. 나이는 열다섯을 훌쩍 넘어 보였다. 나는 외벽에 있을 때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었다. 대부분 어딘가 정신이 나가 있거나 외벽 사람들조차 하지 않는 더러운 일을 했다. 뒷골목에서 소매치기로 먹고사는 아이들조차 갈색 피부를 가진 이방인은 동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밑바닥의 밑바닥이었다.
“당장 예레카 하께 말씀드리겠어. 넌 지금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으니까.”
내가 사내애 구경을 끝낸 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왜 내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데?”
“넌 지금 그저 도피하고 싶은 것일……!”
에드리트는 말을 하다가 말고 제 입을 막았다. 거칠게 입술을 만지며 ‘제기랄.’하고 뱉어냈다. 에드리트는 실수라며 산도르아의 눈치를 보았다.
“여하튼 이건 아니야.”
에드리트는 목검을 가볍게 집어 던졌다. 목검이 구르고 굴러 사내애의 발끝에 닿았다. 산도르아는 침묵하고, 에드리트는 씩씩거릴 때였다. 사내애는 평온한 얼굴로 굴러온 목검을 주웠다. 그는 주변의 소란에 무신경한 듯 보였다.
“쟨 뭐야.”
나의 목소리에 산도르아와 에드리트가 동시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윽고 나의 등장을 기다린 듯, 양쪽에서 두 사람이 한 팔씩 끌어당겼다. 서로 내가 자신의 편이 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야라. 넌 지금 저게 말이 된다고 봐?”
에드리트는 내 왼팔을 흔들었고,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산도르아는 내 오른팔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팔을 뽑아낼 듯이 당기는 통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양팔을 털었다.
“둘 다 달라붙지 마.”
나는 집 나간 목적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다시 숨을 고르고, 흥분한 두 사람 사이에 선 놈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뭐가 문제인데.”
내가 뒷골목 냄새를 많이 맡아봐서 안다. 에드리트의 말처럼 더러운 것까지는 몰라도 충분히 수상쩍은 냄새를 풍겼다. 저 피부를 가진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들끼리 우애가 아주 끈끈했다. 다른 사람하고는 말을 섞지 않으며, 개중 하나가 다치면 열이 가세했다. 그래서 이방인 중에는 고아가 없었다. 있더라도 양아버지, 양어머니를 자처하는 족속이라고 들었다.
“다쳐서 데려온 사람이야. 이야기해보니 마땅히 갈 곳도 없는 것 같아서 일단 성에 둘까 하는 것뿐이야.”
“쟤랑 ‘이야기’를 했다고?”
에드리트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내애가 턱을 들었다. 나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이름은.”
산도르아는 얘 이름도 몰랐던 모양이다.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이 사내애를 쳐다봤다. 사내애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그를 올려다보는 산도르아에게 머물렀다.
“키르얀.”
“키르얀.”
산도르아는 그 키르얀인지 코르얀인지의 이름을 다정하게도 불렀다. 에드리트보다 한 뼘 더 큰 사내애는 물끄러미 산도르아를 내려다보았다.
에드리트는 산도르아의 손목을 확 잡아 이끌었다.
“에드리트!”
에드리트는 눈을 마주치고 있는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눈치를 말아먹은 사내애는 산도르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 돼.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어딘가 기분 나쁜 놈이야.”
확실히 저렇게 생긴 놈 중에서 착한 놈은 못 봤다. 어쩌다가 산도르아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은 떼로 몰려다니면서 나쁜 짓을 하니까. 나 또한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코르얀?”
방금 들었는데도 잘 기억이 안 났다. 산도르아에게 꽂혀있던 사내애의 눈이 빙글 돌려져 내게 왔다.
“부모는?”
사내애의 눈이 잠시 어두워졌다. 잠시지만 매우 짙고 분명한 어둠이었다. 사내애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없어.”
“없어? 어디서 말투가 그따위야?”
에드리트는 정말 이놈이 싫은가보다. 사사건건 시비를 틀기 위해서 준비된 도사견 같았다. 그러나 사내애는 에드리트의 도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희는 떼로 몰려다닐 텐데. 양부모가 없다는 거야, 친부모가 없다는 거야?”
내 말에 산도르아와 에드리트가 조용해졌다. 무심하던 사내애의 눈도 달라졌다. 위험한 빛을 띠었다. 사내애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알아?”
“알다마다. 아마 내가 오다가다가 본 것 중에 네 부모도 섞여 있을걸.”
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꺾었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놈이었다.
“산도르아. 미안하지만 네 편을 들어줄 수 없겠는데.”
“이야라.”
산도르아는 산도르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놈을 감싸고 있었다. 저놈이 아양을 떨었거나 산도르아가 넘어간 거였다.
“역시 내보내야겠어.”
“에드리트!”
에드리트는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산도르아는 나의 배신에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같은 뒷골목 출신이라고 부둥켜안으며 감싸줄 줄 알았나. 적어도 나는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저놈들은 떼로 덤벼들어 사람 하나를 죽이는 놈들이었다.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산도르아가 데리고 다니게 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에드리트와 산도르아는 그러고도 한참을 싸워댔다. 할 숙제들이 생각 난 내가 돌아가기 직전까지 옳으니 그르니 하며 삿대질을 했다. 갈라진 것은 해가 지고 나서였다. 에드리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내 뒤에 따라붙고, 산도르아는 성질이 난 걸음으로 문을 닫았다.
크게 걱정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도르아만큼 처신을 잘하는 이는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 * *
산도르아와 틀어진 에드리트는 내 침실에서 살았다. 제 딴에는 편을 들어줬다고 생각한 건지 내가 면박을 줘도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욕을 해도 나가지를 않으니 나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가끔씩 내 옆에서 공부를 도와주는 것만으로 이놈의 수다를 참아주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쓸 만한 정보를 물어다 주기도 했다.
“그게 뭔데.”
“조용히. 얌전히 있는 거.”
며칠 내면 왕자가 도착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에드리트의 고자질에 넘어가 그 찝찝한 사내애를 도의적으로 치료해준 뒤, 왕자가 오는 날에 맞춰서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 산도르아가 우리와 말을 섞지 않았다. 나는 상관없지만 에드리트는 굉장한 배신이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에드리트는 그래서 그놈의 험담을 하다가 험담하고, 또 험담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서 내가 소리를 빽 질렀더니 바꾼 화제가 왕자였다. 근래 들어 왕자에 대해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스승도 왕족의 앞에서는 이걸 하지 말아야 하고, 저걸 해야 하고, 토하기 직전까지 달달 볶는 통에 진이 빠졌다.
에드리트는 거기에 한 몫 더했다. 왕자의 장난에 걸려들지 않는 법이라나.
“나도 학원에 가서 배운 거야. 거기에는 이미 왕자에게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도사리고 있더라고. 거기서 얻은 정보야. 어차피 올겨울부터 넌 왕자와 같이 입학할 테니까.”
“고기는 썰어 먹으면 그만이지 팔의 각도는 또 뭔데. 왕자의 팔보다 높이 들면 안 된다고?”
나는 예법서를 집어 던졌다. 도착하기 전부터 왕자가 별로였다. 그놈 때문에 갑작스럽게 외워야 할 게 몇 가지고, 어렵기는 쓸데없이 어려웠다. 에드리트는 킬킬 웃으며 내가 버린 책을 주워왔다.
“괜찮아, 어차피 긴장해서 다들 그런 거 신경 안 써.”
“몰라. 머리 아파.”
“사촌. 내가 말한 거나 명심해. 너는 예레카가 될 사람이라서 한 번은 왕자한테 소개가 될 거야. 게다가 소문도 이미 파다해서, 거기에 모인 모두가 너를 주목할 거라고.”
왕자가 서부에 온다는 소식에 벌써 자신도 참석하겠다고 한 귀족 가문의 수만 오십을 넘어간다고 들었다. 각 지역에서 오는 데다가 서부의 귀족이라면 자신의 자식들은 다 보내는 모양이니, 그것도 추리고 추려서 그 정도라고 에드리트는 말했다. 나는 참석 명단에 써진 귀족 가문들의 가계도를 외우느라 또 머리가 터졌고.
“그나저나, 사촌. 준비는 했어?”
에드리트가 내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뭐를.”
“어머니 선물.”
“뭐?”
처음 들었다는 내 표정에 에드리트는 ‘안쓰러운 우리 고모…….’라고 했다. 그런 게 있다면 진즉 누군가 나한테 알려줬을 것이다. 더군다나 할아버지도 그런 낌새가 없으셨다.
“원래 공식적인 생일은 여름이시긴 한데. 실제로는 내일이지. 가족끼리 선물 주고받는 것만 간단히 하는데…….”
에드리트는 ‘아무래도 정신이 없으신가 보다. 요즘 왕자가 온다고 이것저것 신경 쓰시느라 제일 바쁘신 분 아니냐.’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후로 글이 외워지지 않았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그곳에 둔 브로치 하나를 꺼냈다. 내가 빛을 처음으로 본 날, 그리고 할아버지가 상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어본 그 날, 혼자서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어머니가 다가왔다.
‘바쁘니?’
‘아니요.’
어머니는 건성건성 책장을 넘기고 있던 내 앞에 앉았다. 진도가 영 나가지 않는 나를 보며 살포시 웃으시고는, 위로하듯 당신의 경험에 빗대어 말했다.
‘나도 이런 책은 제일 싫어.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울지 마라, 화내지도 마라…….’
노래하듯 이어지던 어머니의 말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빛을 봤다며?’
‘네.’
어머니는 ‘그래.’하며 내 가슴팍에 브로치를 꽂았다. 포개진 여러 장의 나뭇잎 위에 루비가 올려진 브로치였다.
‘내가 볼 때는 빛이 그 색이야. 너는 다르겠지만.’
감상을 말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내 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브로치를 바라봤다. 어머니의 머리칼처럼 붉은 브로치. 감히 만질 수가 없어서 빼내자마자 책상에 넣어놓았다. 나는 손수건에 감싸진 브로치를 엄지로 만져보았다.
나는 깨끗한 양피지를 꺼냈다. 잉크를 잔뜩 묻혀 그 위에 마음을 적었다. 그림이 이상해서 수십 번을 찢었다가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완성이 되었을 때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흡족하다고 할 만한 것을 겨우 써내기는 했지만, 이걸 늦은 저녁에 전해드려도 될지 난감했다.
내일이 되면 모두가 어머니에게 준비한 선물을 줄 것이다. 그 틈에 껴서 주기에 내 것은 너무 초라했다. 이 밤에 몰래 드리고 오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결정은 빨랐다. 잉크가 덕지덕지 묻은 손은 손수건에 닦고, 양피지는 곱게 접어 손에 들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계단을 올라가, 문 세 개를 지나쳤다. 길을 외워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붉은색 융단으로 된 문 앞에 섰다.
똑똑. 노크를 하자마자 안에서 반응이 나왔다.
‘들어와요.’
아무래도 기다리던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자지 않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한 손에 붉은 술잔을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부터 뱉었다.
“할 말이 있다고 내가 아침부터 떠들어댔는데. 이제 와?”
기다리던 사람에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저예요.”
어머니가 단박에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어머니가 작게 기침을 했다.
“이야라?”
내가 절대 이 시간에 올라올 일이 없는 애라는 걸 나도 안다. 어머니의 당혹스러움도 이해가 갔다. 이건 나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탄신일이라는 말을 듣고, 또 그 브로치를 보니까, 가만히 앉아서 날을 보내기 싫었다.
“드릴 것이 있어요.”
어머니는 내가 뒤로 숨긴 것이 무엇일지 추측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별것 아닌 걸로 촐랑거린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어머니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리 줘.”
어머니는 눈치가 빠르신 편이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내 탄신일에 대해 들었나 보네. 에드리트겠지?”
어머니는 편지라도 써온 것이냐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 접은 양피지를 올려두었다.
“비슷해요.”
어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양피지를 펼치려고 했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나중에 보는 게…….”
“이게 뭐니.”
어머니의 눈은 양피지 중앙에 있는 그림에 가 있었다. 눈코입이 달려 있는 사람을 그렸으나, 부족한 솜씨다 보니 사람인 걸 알아보기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너니?”
“…… 저 어릴 때요.”
“뭐?”
“어릴 때 얼굴 못 보셔서 억울하다면서요.”
나도 내가 어릴 때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거울을 보고 엇비슷하게 따라 그렸다. 여백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그밖에 궁금해할 만한 것을 적었다.
“아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은 쿠키일 거다……. 왜?”
“처음 기억이 그거였으니까. 아마도.”
그때 팔이 당겨졌다. 강한 힘이 내 팔목을 잡아다가 침대로 이끌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린 나는 향긋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머리 위로 비가 떨어졌다. 나를 옥죈 팔은 떨리고 있었다.
“아가…….”
내 머리칼 속으로 들어온 어머니의 손가락은 가늘었다. 어머니는 소녀처럼 울었다. 빈틈없던 어머니가 허물어져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헐떡이며 울었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뺨에 눈물을 묻혔다. 어머니는 연신 나를 아가라고 불렀다. 어머니의 가슴에 짓눌린 코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갑갑함이 싫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뺨을 만질 때마다 잊고 산 갈망이 샘솟았다. 있었는지도 몰랐던 그리움이 자기도 알아달라며 내 손을 조종했다. 명령대로 나는 어머니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동화책에서 보던 어머니의 품이었다. 나는 영영 가질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어머니는 그날 나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알았다. 나는 감히 이런 것을 바랬었다.
* * *
왕자는 예정보다 빠르게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덕분에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하녀들의 손에 빨아지고, 입혀지고, 빗겨졌다. 한바탕 난리 아닌 난리를 피웠다. 벌써부터 왕자가 일주일씩이나 머무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사람들한테 들볶여지며 살아야 하다니.
왕자는 맨 처음 어른들이 맞이한다고 들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인사하며 대접한 다음, 마지막이 나와 산도르아였다. 그렇다고 방 안에서 틀어박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왕자를 보기 위해서 올라온 또래 애들과 마주 앉아 기다려야 했다.
산도르아는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이방인이 오늘 날짜로 떠나게끔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산도르아는 늦여름을 지나 가을이 오는 동안 정이 들 대로 든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키르얀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야. 걔도 바깥 생활이 지긋한 애라고.’ 하며 그 애를 두둔했다. 그러나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어른들의 결정이었다. 산도르아가 손대볼 사항이 아닌 것이다.
반면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나타난 에드리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긴장할 것 없어, 레이디들.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날렵하게 막아설 테니까.”
나나 산도르아나 그 말에 큰 신뢰가 가질 않았다. 고작 애들끼리 모여 있는 곳에 큰일이야 있겠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산도르아와 나는 비슷한 드레스를 입었다. 화사한 노란색에 허리는 초록색 리본으로 묶었다. 재단사가 우리의 머리칼과 눈 색을 표현한 거라며 유난을 떨던 옷이었다. 두 개의 드레스가 자로 잰 듯 똑같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면 쌍둥이로 오해할 만한 했다.
장소는 때아닌 라티너스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배경으로 한 곳이었다. 사실상 까다롭기로 유명한 라티너스를 틈 없이 관리한 정원사가 이번 만찬의 숨겨진 주역이었다.
사흘 전만 해도 만찬 장소인지 꽃밭인지 분간이 안 갔는데, 정성스레 차려놓은 테이블을 보아하니 그럴싸했다. 가을바람이 작정한 듯 씽씽 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지만, 만찬을 앞두고 빠짝 긴장한 어머니가 한숨을 돌릴 정도는 되었다.
산도르아는 만찬이 다가올수록 냉랭하게 굴었다.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산도르아는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내 일에 나서지 말아줘.”
결국에 가서는 정면에서 숨김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 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야.”
애석하게도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 전에 나의 발은 긴 테이블 앞에 멈췄다. 참석한 오십 명 중에 우리가 가장 늦었다. 상석에 있는 의자는 왕자의 자리라 비워뒀고, 상석 양옆의 의자 두 개가 우리의 자리였다.
백 개가 넘는 눈이 나를 훑었다. 그런데 내가 의자를 빼내기 전, 갑자기 앞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 하나가 일어섰다.
“예레 하.”
그러자 모인 참석자가 일제히 기립했다. 만찬에 익숙한 그들은 멀뚱히 서서 나의 차례를 기다렸다. 여기서 실수를 했다간 몇 년을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적어놓은 항목을 성실히 이행해야 했다.
“앉아.”
앉자마자 첫인사말을 떼야 했지만 그것만큼은 생각해둔 바가 없었다. 때때로 여의치 않으면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고 배웠다. 다행히 참석자들은 내색하지 않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큰 문제 없이 지나가려던 참이었다.
“예레 하.”
내 옆자리에 찰싹 달라붙어 앉은 사내애였다. 군청색 머리칼을 느끼하게 올리고 온 그는 어제오늘 본 사이처럼 말 걸었다.
“페네크의 아킨입니다. 예레 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페네크, 같은 서부의 바예레카였다. 서부의 오른편인지 왼편인지 헷갈렸다. 이것저것 떼어놓고 보아도 중요한 참석자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나이도 엇비슷한 사내애가 말본새는 수십 년을 앞질러 가 있었다. 어울리기보다는 기름기 낀 것처럼 느끼했다. 나는 대꾸하는 대신 물 잔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싶을 때마다 물을 들이켜라고 충고했다.
“예레 하를 정말로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요.”
맞은편, 산도르아의 옆자리를 차지한 사내애였다. 온순한 인상, 단정한 갈색 머리칼이 인상에 남음직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일어나 인사를 주도한 것도 얘였다.
“예레 하. 메뉴는 직접 준비하신 건가요?”
“식사가 끝나면 정원을 구경시켜 주세요.”
한 번에 한 놈만 덤벼들어도 벅찬 와중, 떼로 몰려들어 왈왈거렸다. 진땀을 훔치며 대답하는 나를 옆자리가 알아챈 듯했다. 갑자기 그가 스푼으로 유리잔을 딩딩 쳤다. 물 흐르듯 흐르던 식사의 흐름이 대번에 끊겼다. 이목은 나의 옆자리로 기울어졌다.
“예레 하께서 불편해하시는 게 안 보입니까.”
그러는 당신이 가장 불편했다. 아킨 페네크는 눈치를 싼값에 판 게 분명했다. 버터 칠을 한 아킨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정말 적게 드시는군요. 입맛이 없으십니까?”
나는 배운 대로 해 보려 했다. 육류를 과하게 탐하지 않고 코딱지만큼 썰어서 맛보았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맛이었다. 텅텅 빈 위장은 더러운 성질머리를 불러왔다.
“이런. 식어서 그러한가. 다시 데우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죠?”
“아니.”
입을 꿰매고 싶은 상대는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놈의 입 안에 사과 한 알을 처넣고 싶었다.
그때 레몬주스 잔을 든 여자애가 웃음소리를 높였다.
“페네크, 약혼녀가 눈앞에 있는데 서운하겠어요. 너무 노골적으로 예레 하만 챙겨드리는 거 아닌가요?”
나는 닭 날개에 포크를 꽂아두고 아킨을 쳐다봤다. 정곡을 찔렸는지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윽고 아킨은 산도르아에게 떠듬떠듬 말했다.
“그렇네요. 제가 생각이 짧아서. 불편했습니까?”
아킨이 산도르아의 약혼자라는 건 충격이었다. 산도르아는 별안간 벌어진 일에 능숙히 대처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예레 하를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산도르아의 말이 끝마쳤을 때 테이블에는 침묵이 밀려들었다. 옆자리에서 나불거리던 아킨은 시선을 요리조리 피했다.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은 고의였다. 악의인지, 눈치를 볼뿐인지 모르겠다.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다섯 번째 의자에 앉은 에드리트였다.
“그나저나. 우리 예레 하께서 벌써 빛을 다룬다는 건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네?”
에드리트가 불을 붙인 만찬은 새로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산도르아의 존재는 묵살하는 것처럼 그랬다. 아킨의 입도 살아났다. 방금 소란이 있기는 있었냐는 듯한 태도였다.
생선을 덮은 양념이 고소한지 아닌지를 따지는 수다 속에서 나는 환멸을 느꼈다. 나와 산도르아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갓 들어온 사용인마저 소식을 아는 체를 하는데 소문에 죽고 사는 이들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침묵의 목적이 산도르아의 추락을 즐기는 데에 있다는 것이 역겨웠다.
“예레 하.”
그중 아킨 페네크의 비겁함은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그는 의리를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가 하는 비열한 위인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염소가 되새김질하는 여물처럼 씹었다. 굳이 분노를 무릅쓰고 상대해줘야 할 가치가 없었다.
“체하시겠어요. 물을…….”
그러나 아킨 페네크는 철갑옷을 면상에 두르고 온 듯했다. 철저한 나의 무시를 빈틈없는 대화로 맞서고 있었다.
“세상에, 페네크. 누가 보면 예레 하와 약혼하신 줄 알겠어요?”
시비를 멈추지 않는 여자애는 페네크한테 감정이 쌓인 모양이었다. 만찬에 나타난 것도 이것을 위해서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킨도 손 놓고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잔을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서 그 여자애를 노려봤다.
“말조심해.”
“그러면 우리 불쌍한 약혼녀 좀 챙겨주세요. 내가 다 안쓰러워서 그래.”
작정하고 온 여자애는 지지 않았다. 고소하다는 듯이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약혼녀가 바뀌기라도 했어요?”
“비시아.”
산도르아가 중재에 나섰다. 참여할 생각 없는 당사자는 빼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비시아는 코웃음 쳤다. 산도르아의 의견은 잘근잘근 칼질해도 해가 없음을 안 것이었다.
“예레 하께 그만 들이대요. 보기에 부끄러워…….”
“앞날은 모르는 거지.”
아킨은 비시아의 말을 매정하게 잘랐다. 출처 없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페네크의 눈이 내게 닿았다. ‘실례합니다.’ 한마디를 하고나서 산도르아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애초에 나는 예레 하와 약혼하기로 결정된 거였으니까.”
산도르아는 야비한 약혼자의 배반을 정면으로 받았다. 피할 이유가 없으므로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거저 일궈놓은 무덤덤함이 아니었다. 산도르아는 견디고, 인내하고, 달려진 빚을 갚는 것처럼 버텼다.
산도르아는 왕자가 서부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각오한 눈치였다. 사람 심리가 순조로운 비상보다 땅바닥으로 꼬꾸라지는 타락에 열광했다. 원래 남을 떠받들던 손가락이 무거우니까 얼른 내려와라, 내려와라 하는 것이었다.
“산도르아.”
아직 활시위를 놓지 않은 아킨 페네크가 물었다.
“예레카 하께서는 이 약혼에 별말이 없으십니까?”
예를 갖춘다고 애는 쓰지만 ‘나 사기당했는데 왜 너희들은 아무 말이 없느냐.’라는 의미였다. 아킨은 예레카의 반려 자리에 목매단 듯 보였다. 그런 작자가 제 자리가 불안불안 하니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곧 말씀하시겠죠.”
“언제요?”
아킨은 비열했다. 그는 산도르아를 단단히 망신 주려고 작정한 모양새였다. 참석한 이들은 귀를 쫑긋거리며 싸움을 부추기고 있을 거였다.
“아킨.”
“네.”
“나와 약혼을 빨리 무르고 싶은 건 알겠지만, 직접 나서서 예레카 하께 말씀드릴 용기가 없다면 처분을 기다리세요.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드리트는 나서서 산도르아에게 힘을 보탰다.
“비굴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퍽 자존심이 상하는 거였나 봐? 산도르아가 아니란 것이 밝혀지자마자 이렇게 차가운 태도라니.”
산도르아의 옆자리 사내애도 거들었다.
“아킨. 그만 좀 해.”
그러나 아킨은 그어진 선을 인식하지 못했다.
“착한 척하지 마.”
“뭐?”
구석에 몰린 아킨은 냉정을 잃었다.
“좋아죽겠지? 위드먼. 여기가 네 자리가 될 것 같아서.”
산도르아를 두둔한 사내애는 위드먼 가였다. 아킨과 마찬가지로 서부의 바예레카이며, 나를 성내로 데려온 귀부인의 아들이란 소리였다. 위드먼은 입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지 한발 물러섰다. 아킨보다 훨씬 현명한 남자였다.
아킨의 화살은 공격할 곳을 잃었다. 풀 데 없는 분노는 기어코 사방을 찌르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더러운 거미줄에 걸려서…….”
휘몰아치던 가을바람조차 슬금슬금 피할 만큼 싸늘해졌다. 아킨은 예의, 신의, 사람까지 버린 셈이었다.
“이게 무슨……!”
나는 손목을 꺾어 물이 담긴 잔을 쓰러트렸다. 빳빳하게 다린 아킨의 연미복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예레 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실수였어.”
아킨의 손에 든 잔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킨을 붙든 마지막 이성에 가위질을 했다.
“아까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아킨의 흰자위에 빨간 핏줄이 섰다. 굴종하지 못한 분노는 이성을 백지로 만들었다. 그가 손에 든 물 잔을 내게 뿌렸다.
“아킨 페네크! 아무리 바예레카라지만 어떻게…….”
방관자들이 아킨 페네크의 무례함을 지적할 때였다. 테이블에서 ‘합!’ 소리가 났다. 나의 손이 아킨의 뺨을 후려갈겼다. 얼빠진 아킨의 고개가 돌아갔다.
“야.”
“이야라!”
산도르아는 수습을 위해 달려왔다. 에드리트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눈을 사박스레 치뜬 아킨이 손 올리는 걸 본 것이다.
“안 돼. 아킨!”
만찬은 개도 안 물어갈 만큼 엉망이 되었다. 아킨은 에드리트가 막고 산도르아는 나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참석자는 편을 갈라서 한바탕 대거리를 벌였다. 흥분한 누군가의 팔꿈치가 소스 그릇을 건드렸다. 그릇은 하얀 테이블 보 위에 엎어졌다. 진득한 갈색의 소스가 흘러나와 테이블 중앙을 뱀처럼 기었다.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렸다.
“와.”
하하하! 경쾌한 웃음소리였다. 단숨에 흥분된 시선이 집중됐다. 드르르륵, 가장 상석의 의자가 끌어졌다. 만찬의 손님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테이블에서 열 걸음 떨어져, 벌어진 난장판을 관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의 왼쪽 다리가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얹혔다. 그는 그 자세로 고개를 비틀었다.
“계속해.”
뒤늦게 참석한 그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턱을 쓸어 만지며 나와 산도르아를, 그리고 위드먼과 아킨을 번갈아 봤다. 그의 푸른 눈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옮겨 다니는 그의 시선에서 푸른 잉크가 묻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젖은 얼굴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내 꼴을 훑어내렸다.
모두들 왕자의 등장에 얌전을 떨었다.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참석한 자리이니만큼 분란이고 나발이고 모른 척이었다.
왕자의 첫인사는 에드리트의 차지였다.
“오랜만이야. 에드리트.”
지목당한 에드리트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숙였다.
“내가 왔는데 계속 서 있을 거야?”
산도르아가 내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왕자가 온 이상, 여기서 얼렁뚱땅 만찬을 그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산도르아는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는 눈치였다.
다행히 아킨의 이성은 왕자를 보자마자 새순만큼 돋아난 듯했다. 아킨은 뺨 한쪽이 벌게진 꼴로 착석했다. 산도르아와 위드먼도 제자리에 앉았다. 남은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화를 참듯이 긴 숨을 내쉬었다. 거칠게 의자를 뺄 때였다.
“안녕.”
고개를 기울인 왕자와 시선을 맞댔다. 나는 예의상 가볍게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왕자는 손가락 사이에 잔을 끼우고 위로 들어 보였다. 그 뒤에 천천히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물을 삼키는 왕자의 시선은 나를 둘러매었다. 발끝을 들어 올려 잘못이 나올 때까지 턴 다음, 제 눈동자에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매어두었다. 네 죄를 안다는 듯 업신여기는 눈이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나였다. 그의 시선이 비위 상할 만큼 거북했다.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분란이 지나간 테이블 위는 기침 소리만 가득했다. 왕자는 입 안의 물을 느릿느릿 삼켰다. 물이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왕자는 시선 피하기 놀이를 하는 좌중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나랑 눈 마주치는 사람은 사 년은 재수가 없다는 소문이 기어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구나.”
“네?”
걸려든 것은 아킨이었다. 뺨 한쪽이 부풀어 오른 그를 보고 왕자는 눈을 빛냈다. 왕자는 아킨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제 뺨 주위에서 뱅글뱅글 돌렸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뜻이었다. 아킨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지나가던 벌레에 물려서.”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아킨을 비꼬듯 바라봤다.
“저런. 굉장히 큰 벌레였나 봐.”
왕자는 아예 등받이에 느긋이 기대고 앉아 관전했다. 아킨의 비열한 눈자위가 번뜩거렸다.
“바깥에서 자라 독이 많은 벌레여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아킨의 비꼼을 알아들은 자가 수십이었다. 한 번이 어렵고 두 번은 쉽기가 손바닥 뒤집기였다. 내 손이 빠르게 날아갔다. 이번에는 성한 아킨의 반대쪽 뺨이었다. 짜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예레 하.”
위드먼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왕자의 앞이니까 자중하라는 의미였지만 오히려 왕자는 손끝만 까닥거렸다. 어쭙잖은 참견 말고 구경이나 하란다. 왕자는 말릴 생각이 소 등에 난 터럭만큼도 없어 보였다.
아킨은 한 대 더 맞은 순간 고삐가 풀렸다. 그가 달려들어 나를 식탁 위로 넘어트렸다. 식탁보가 등판에 밀려 끌어내려지고, 식기들은 한쪽에 쏠리다가 흙바닥 위로 내려갔다. 점잖은 척 헛기침하는 대다수가 열여섯도 되질 않았다. 말릴 사람을 불러오기보다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 구경에 정신 팔릴 나이였다. 내가 위에 올라탔다가 아킨이 다시 우위를 점했다. 그의 셔츠 칼라는 소스 범벅이었고, 나의 치마 밑단은 위로 찢겨 갈라졌다.
식탁 위를 뒹굴다가 의자로 떨어졌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킨을 깔아뭉갠 내가 하늘 높이 손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싸늘한 고함에 머리털이 삐쭉 섰다.
“이야라 위테르발도!”
나는 멈칫한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다가오는 건 성난 할아버지였다. 쪼르르 일러다 바친 이가 있었나 보다. 하기야 트레이를 가져다 나른 사용인만 열둘이었다. 언제 할 것 없이 닥칠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불량한 자세로 차를 홀짝거리는 왕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가벼이 웃은 왕자는 어서 가보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아킨을 짓누르고 있던 나는 천천히 그 위에서 내려왔다. 할아버지의 엄한 눈초리는 나의 단정치 못한 차림새나 흠뻑 젖은 머리칼을 향해있었다. 할아버지는 참기 힘든지 나의 어깨를 손수 끌어내렸다.
묵은 흙먼지가 망가진 테이블 위로 가라앉았다. 아킨은 침침한 노인이 앞을 더듬듯이 바닥을 쓸고 다녔다. 분개한 할아버지의 호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방관자 역할에 충실하던 왕자가 엉뚱스레 끼어들었다.
“예레카 하.”
자기를 봐달라는 손짓에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며칠 더 묵어도 됩니까?”
그때 나와 눈을 맞춘 왕자는 윙크를 했다. 그러는 본인이 재미스러운 줄 아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벌주듯 왕자의 체류를 허락했다. 나는 표정이 까맣게 죽었다. 왕자는 짊어지고 있기 불편한 객이었다. 며칠 짊어지면 내 허리가 휠지도 몰랐다.
만찬은 싱겁게 파했다. 나를 서부의 주요 귀족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첫 관문이었으나 말아먹었다고 할 수밖에. 하녀 중에 누군가가 그래도 어른이 아닌 소년소녀들이라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저 소년소녀가 본 것은 곧 그들의 부모가 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뒷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참석한 이들에게 약소한 선물을 쥐어서 돌려보내었다. 다행히 뒤끝 있게 나오는 이들은 없었으나 아킨만은 빈손으로 가버렸다고 들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불려가 된통 혼이 났다. 게다가 애꿎은 에드리트가 가장 연장자라는 이유로, 망나니 같은 나를 말리지 못한 죄로 열흘간 근신이었다. 제 방에서 남은 휴가를 보내게 생긴 그가 가여웠다. 아마 순진한 나의 사촌은 주먹다짐을 보고 넋이 나간 게 아닌가 싶었다. 주먹다짐이야말로 윗분들보다 아랫것들의 해결 방식이 아니겠나.
에드리트는 단 한 번도 만찬에서 주먹을 흔드는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방에 갇히기 전, 절대 나를 약 올리면 안 되겠다는 에드의 중얼거림을 떠올리자 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이번 잘못의 열에 하나 정도가 내 몫이고, 아킨 페네크가 나머지 아홉이었으나, 그래도 앞으로 에드리트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할아버지에게 불려가 혼이 난 다음, 어머니의 핀잔을 듣고 스승에게 벌을 받았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지 말고 몰아서 해 주면 좋았을 터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참았어야 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보다 교묘한 방법을 썼어야 했다고 한탄하며, 눈이 쪽 찢어진 스승은 욕을 했다.
그렇다고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내 몸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아킨 페네크의 약혼이 깨진 것이다. 나도 눈물 쏙 빠지도록 혼났지만 그놈은 제집에서 조각날 정도로 깨지고 있을 터였다. 그나마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왕자는 며칠 더 머무르겠다고 하지, 나는 사용인들까지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고를 쳤지, 이래저래 봐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그르친 눈치였다. 나는 살살 눈치를 보다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나를 똑바로 보았다.
‘벽을 지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가르치기 전에. 넌 인내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구나.’
두 달 동안 꼼짝없이 방 안에 가둘 생각인가.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할아버지가 나오라고 한 장소에는 스승이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스승이 내 먹는 것, 입는 것, 씻는 것까지 관리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덧붙여 나는 침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스승의 숙사에 같이 지내게 된 것이다.
스승은 ‘네 명을 네가 앞당긴 거지.’라며 말했다. 스승은 내게 검 한 자루를 건넸다. 손잡이까지 하얀 검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손바닥 위에 얹어지자마자 나는 힘없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검이 아니라 몇 날 며칠 말린 흙을 굳힌 것 같았다. 내가 검 밑에 깔려 끙끙거리고 있자 스승님은 기다란 줄을 구해왔다. 그리고 검과 나의 종아리를 한데 묶었다. 반대편 다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는 다리에 검을 매단 채로 뛰었다. 열 바퀴를 빙 돌지 않으면 저녁은 물 건너간 셈이다. 매일 성내를 두루두루 돌아다녔다. 사실 뜀박질도 말이 뜀박질이지, 가재가 배로 기는 것과 비슷비슷했다.
빵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면 별수 있나. 원래부터 내 삶은 투쟁과 쟁취의 역사였다. 아침마다 열 바퀴를 채우고, 스승의 숙사에 가서 식사를 받았다. 포크를 들 힘이 없어 흰 빵을 잘게 뜯어서 먹었다. 삼일 연속으로 뜀박질만 했더니, 세상에,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특히 뺨이 아주 홀쭉해져 버렸다.
스승은 내 발목에 묶여있는 검이 평범한 검이 아니라고 했다. 이처럼 하얀색으로 물들여진 무기는 사람의 근육으로 드는 게 아니란다.
그 말의 의미를 일주일이 되었을 때 배웠다. 스승은 달리기는 제쳐두고 검이나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 아무리 내가 체력이 늘었기로서니 번쩍번쩍 들 수가 있을까.
“이런. 이드리하임에 가게 되면 가장 먼저 이것부터 배울 텐데.”
예상대로였다. 나는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검을 들지 못했다.
“이 안은 비어 있어. 비어 있기 때문에 더 무거운 거야.”
호리호리한 스승은 땅에 떨어진 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면 비어 있는 안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
스승은 검의 날을 엄지로 쓸며 물었다. 혹시 물이냐고 물으려다가 얻어맞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는 스승이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아무거나 답했다.
“빛이요?”
스승은 웃어 주었다. 배꼽 잡고 허허허, 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크나큰 찬사였다. 저 사람이 여간하여서는 콧방귀도 안 끼는 사람이었다. 스승은 내게 다시 검을 건네줬다. 나는 요령있게 바닥으로 던지듯 받았다. 스승은 땅에 떨어진 검을 보며 말했다.
“들어 올리면 돌아와라.”
“예?”
숙사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눈앞에서 식탁으로 가는 다리가 댕강 끊겼다. ‘뭘 어떻게 하는데요!’ 목청껏 소리 질렀으나 그런다고 저 사람이 돌아볼 사람인가. 나는 검의 주위를 마려운 개 마냥 어슬렁거렸다. 발로 차보고 주먹으로 때려도 보았다.
나의 손, 발만 무참히 깨졌다. 땀을 뻘뻘 흘리다가 정신이 아찔했다. 드러누우니 별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 밤이었다. 달이 쯧쯧 혀를 차는 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빛을 불러 모았다. 땅 밑에서 잠자고 있던 빛이 하늘로 떠올랐다. 손톱 끝에 앉거나 팔뚝에서부터 미끄럼 타며 까르르거렸다.
요것들을 어떻게 검 속으로 집어넣을까. 들어가 볼래, 물어보았더니 갸웃거리며 양옆을 오갔다. 유괴하려고 꼬드기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조심해.”
시리게 내리꽂힌 목소리였다. 나는 튕겨 나가듯 상반신을 일으켰다. 놀란 빛의 무리가 머리 위로 떠올랐다. 초록, 노랑의 빛이 어우러져 덩어리가 되었다. 시야가 확보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통이 여유 있는 회색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서, 까닥거리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날이 추워.”
빈둥빈둥 눌러살고 있는 왕자였다. 부는 바람에 까만 앞 머리칼이 흔들려, 체온을 앗아갈 듯 새파란 동공이 드러났다. 그는 친근하게 ‘이야라.’ 했다. 나를 언제 봤다고 뱀의 비늘처럼 매끈매끈한 태도라니.
“무시하는 거야?”
이건 형용할 수 없이 오싹한 기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이었다. 첫 만남부터 나는 왕자가 석연치 않았다. 소름 끼치게 나를 요모조모 훑어보던 놈이었다. 그가 며칠 더 머무른다는 말에 잠자리가 뒤숭숭했을 정도였으니.
나는 목과 허리를 구부렸다. 이만하면 아는 척은 됐겠지 싶었다. 그런데 검을 집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을 배회하던 빛이 비가 내리듯 내렸다. 고개를 든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빛의 머리가 산봉우리처럼 뾰족해져, 일어선 나에게 무차별로 덤벼들었다. 어깨를 밀치고, 배를 밀치고, 다리를 밀쳤다.
고운 흙이 코로 들어왔다. 내 몸은 구르고 굴러 흙에 발렸다. 머리칼 사이사이에 흙이 끼었다. 귓불로 들어오는 흙을 골라낼 정신이 없었다. 입 안에도 이미 한가득이었다.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굴러온 자국이 저 멀리서부터 이어져 있었다.
입에서 흙이 뭉텅이째로 흘러나왔다. 가래를 뱉자 작은 돌까지 섞여 나왔다. 입가를 닦으면서 주저앉았다. 등은 쑤셨으나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때 계단에 앉은 인영의 어깨가 잘게 흔들렸다.
“너.”
나는 흙투성이가 된 꼴로 일어났다. 달빛이 진실을 밝혔다. 그는 콧날은 쨍끗하며 눈웃음 지었다. 범인은 순순히 죄를 인정했다. 달밤에 내가 데굴데굴 구른 이유가 있었다. 저 정신 나간 왕자의 수작이 분명했다. 주먹을 쥐고서 달려갔다.
그러나 계단을 밟자마자 나의 몸은 뒤편으로 던져졌다. 아까와 같은 일이 반복됐다. 구르고 굴러, 아예 흙과 하나가 되었다. 기침을 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구르던 몸을 곧바로 일으켰다.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녀석은 검지 하나로 빛을 조종하고 있었다. 내가 달려오든 말든 여유로웠다. 다시 누군가 뒤로 잡아끌었다. 체격 좋은 사내가 어깻죽지를 붙든 느낌이었다. 빛들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내가 알던, 순수하던 빛들이 아니었다. 공격적이고 빨랐다. 적이라도 된 듯, 저자의 말만을 따르고 있었다.
네 번째로 바닥을 굴렀을 때는 토악질을 했다. 엎드려 헛구역질을 하며 울먹였다. 녀석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손을 떨면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아까보다 걸음이 느려진 게 느껴졌다. 뛰듯이 걷지만 몸의 기력은 다 빠져나갔다. 식사를 부실하게 한 탓이 컸다.
왕자는 빌어먹게도 하품을 했다. 빛 무리는 그의 어깨에 앉아서 의기양양했다. 내 주위에는 고작 몇몇이 남았다. 나는 검의 앞까지 쩔뚝쩔뚝 걸어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가증스러운 입술로 휘파람을 불었다.
“너무 열렬하게 쳐다보니까 부끄러워.”
돌아도 한참 돌은 새끼였다. 부드득, 어금니 갈렸다. 왕자고 나발이고 욕이 튀어나왔다. 저게 왕자가 맞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왕자의 탈을 뒤집어쓴 망령이 아니던가.
일단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속을 가라앉혔다. 또 대책 없이 달려들면 아까처럼 날려버릴 것이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나의 어깨에서 노니는 빛은 그 수가 현저히 적은 데에 비해, 저놈의 주위로는 꿀이라도 발라둔 듯 모이고 있었다.
“질투 나지.”
“친한척하지 마. 역겨우니까.”
왕자는 기분이 잡치게 웃었다. 터무니없이 쾌활한 미소였다. 그가 피해자처럼 물었다. ‘나를 패려고?’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미친 새끼.”
저놈을 엿 먹일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복수로 눈이 멀었다. 흙에 쓸린 두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가 제 입술에 엄지를 대고 문질렀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왕자랍시고 우쭈쭈 어르고 달래서 키운 것인가. 아니면 정신이 회까닥 돈 것인가. 장난의 질 나쁜 수준이 도를 넘었다. 녀석이 왕자라고 믿느니 차라리 내가 왕자를 자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입 안에 돌아다니는 흙을 한데 모아 계단에 뱉었다.
왕자는 부드러이 엄지를 입술에서 떼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굽혔다. 오른손은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흠씬 두들겨 패고픈 기분이었다. 건방진 왕자의 앞까지만 갈 수 있다면 간이라도 내어줄 판이었다.
검의 손잡이에 분노를 담았다. 그때였다. 나를 배반한 빛 무리가 날아올랐다. 내 날개 뼈에 붙어, 뒤로 뽑아낼 듯이 끌어당겼다. 나는 요령이 생겨 뒤꿈치로 바닥을 끌었다. 빛들이 뒤로 끌어당기기를 잠시 멈췄다. 기회였다. 잽싸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검의 손잡이를 쥐려는 순간 뒤로 밀쳐졌다. 거친 흙먼지가 일었다.
밤바람이 내 머리를 식혀주진 못했다. 죽더라도 저 앞까지 가서 죽어야겠다. 점차 검을 쥘 때의 힘이 달라졌다. 나의 분노가 검에 고인 것 같았다. 뼈마디마다 우묵하게 모인 피를, 검이 날름날름 훔쳐 먹은 것처럼.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의 날이 달라져 있었다. 하얗게 질린 검이 조금씩 초목의 연둣빛으로, 봄볕의 노란 색으로. 잠깐 처한 상황, 감정을 잊었다. 색을 입는 검이 뇌리에 콕 박혔다.
“아름답지 않아?”
나는 검의 손잡이를 들고서 일어섰다. 가뿐히 검의 무게를 들었다. 녀석은 내가 검을 들었는데도 날리지 않았다. 그는 저지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공허한 파도가 치는 그의 눈동자는 재미, 흥미, 즐거움, 그따위를 놔뒀다. 나는 심판하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왜 그랬어.”
그의 앞까지 왔다. 아래로 비치는 달빛이 나의 등에 가려졌다. 그늘에 갇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바뀐 게 없었다.
“힘들어 보여서 도와줬는데 대우가 별로네.”
“도와줘?”
“왕실에서는 이렇게 하거든.”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재수가 없었다.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사과부터 해야 했다. 나는 흙이 묻은 손으로 셔츠의 목 부분을 잡아챘다. 흙을 묻히자 약간은 만족스러웠다. 나는 검을 놓았다. 떨어진 검이 계단의 굴곡을 따라 내려가며 맑게 울었다.
“말해 봐.”
“무얼?”
“내가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이렇게 굴리면서까지 해 달라고? 네가 뭔데 나서서 나를 이 꼴로 만들어.”
“앞으로는 꼭 물어볼게.”
“뭘 물어?”
“이렇게 화내니까 목소리가 더 예쁘네.”
하! 아주 염병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너무 화내지는 마. 나쁜 의도는 없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힘 실은 주먹을 내다 꽂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 둔 손이 제멋대로 들어 올려졌다. 그의 명을 따르는 빛에 의한 것이었다. 막으려고 몸을 흔들다가 맥이 빠지고 말았다. 나의 주먹 쥔 손이 재수 없는 뺨에 닿았다. 다독이듯이 뺨을 툭툭 건드렸다. 하늘에 맹세코 나의 뜻이 아니었다.
“알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녀석은 흙가루가 떨어지는 주먹에 뺨을 문댔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손을 뒤로 물렸다. 빛에 감싸인 손을 휘젓는 사이, 녀석은 할 일을 했다는 듯 일어났다. 휘파람 불며 계단을 밟는 여유까지 있었다. 그 녀석의 뒷모습만 죽어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계단의 끝자락에서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게 첫 만남처럼 찡긋 윙크를 했다.
빛은 녀석이 사라지고 나서야 온순해졌다. 야밤을 틈타 외출한 망령에게 시달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똑똑히 안다. 망령이 아닌, 손가락 열 개 달린 사람의 짓이었다. 분한 마음에 계단을 발로 찼다.
죄 없는 계단 대신, 녀석의 정강이를 까주지 못한 게 억울해서. 불의의 변을 당한 달밤,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 * *
비가 그치고 선선해진 바람, 입김이 하얘지는 아침. 이곳에 겨울이 왔다는 증거였다. 새삼스레 놀라웠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막 봄비가 내렸었는데 어느덧 겨울이라니.
그즈음부터 나는 이드리하임으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스승과 검을 다루는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스승은 내가 유달리 빛을 다루는 능력이 좋은 것 같다며, 처음으로 칭찬다운 칭찬을 했다. 쑥스럽게도 배우는 속도가 남다르단다.
스승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이따금 산책을 하다가 녀석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인사하거나 에드리트를 불러내 즐겁게 대화를 나누거나 했다. 왕자가 그냥 그렇다던 에드리트도 점점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이게 바로 사내들끼리의 대화라나 뭐라나, 여하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랬다.
하녀, 스승, 어머니, 산도르아, 그게 누구든, 하루 한 번씩은 꼭 왕자의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나는 앉아서 정보를 수집했다. 호화로운 독채를 차지한 녀석의 이름은 일린저 모르온이고, 수도인 셉시스의 성에서 잘 먹고 잘 산, 고귀한 모르온 왕가의 하나뿐인 왕자였다. 딱히 미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미쳤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끌고 가 팰 수도, 남들 앞에서 대놓고 화낼 수도 없고. 적당히 남들 앞에서는 인사하는 척하다가 뒤돌아서면 침을 뱉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일린저인지 뭔지는 눈치챈 것처럼 살가워지는 게 아니겠나.
그래, 그날은 백번 양보해서 나를 도와줬다고 치자. 그래서 나한테 사과를 하길 했나 아니면 미안한 기색이라도 비쳤나. 오히려 저가 도와줬다고 뻔뻔하게 구는 놈이었다.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려 해도 헤아려지지가 않았다.
무시하고 살려고 했다. 며칠만 참으면 그만이었다. 에드리트의 말로는 학원에서 만나겠거니 했지만, 더군다나 그런 데에 가면 주위 눈치 볼 필요 없이 저놈을 무시하면 되니까.
그런데 웬일인지 녀석이 조용했다. 내가 훈련받는 순간마다 나타나서 속을 뒤집기 일쑤였던 녀석이 제 독채에 처박혀 나오질 않는다는 거다. 갈 날이 얼마 안 남아서 자중이라도 하는가 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분수대에 모인 새들의 먹이를 주기 위해서 마구간에 들러 모이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근처가 그놈의 별채라서 빨리 지나치고 싶었는데, 안에서 고막이 아릴 정도의 비명이 들렸다. 한둘이면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족히 다섯은 넘어 보였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들리는 비명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뛰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발을 들이자마자 본 것은 쌩하니 날아가는 하녀였다. 하녀는 미끄러지듯이 복도 끝에서 끝으로 내려갔다. 뒤따라 나온 하녀도 마찬가지였다. 중심을 잡아보려고 복도에서 휘청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곧장 문밖으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 미끌미끌했다.
“워!”
소리는 등 뒤에서 났다. 큼지막한 손이 나의 등을 밀어버렸다. 새 모이를 놓칠 것 같아서 손을 뻗다가 그만 앞으로 쏠려버리고 말았다. 발에 미끌미끌한 것이 닿았다. 그대로 미끄러졌다.
“예레 하!”
벽장을 짚고 서 있던 하녀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휘청휘청하며 계단 앞까지 미끄러졌다. 새 모이를 버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다가 계단 난간에 이마를 부댈 상황까지 처했다. 못해도 머리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난간이 아닌, 말캉한 손에 이마를 박았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손가락이 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걸 쳐냈다. 올려다보지 않아도 알았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었다. 열이 뻗쳤다.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녀석이 금세 뒤로 물러나갔다. 조금만 더 뻗으면 잡힐 것 같았다.
바닥이 미끌미끌하지만 이겨낼 수 있었다. 생선을 잡으려고 번드러운 얼음 위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아까는 중심을 못 잡았을 뿐이었다. 다리를 조심조심 옮기면서 손을 뻗었다. 일린저는 부드럽게 다리를 교차하며 물러갔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약을 올렸다.
“가만히 안 있어?”
“너 같으면 가만히 있겠어?”
일린저는 내 말투를 따라 하면서 뒤로 쓰윽 발을 밀었다. 이따위 것에 지고 싶지 않았다. 일린저가 한 그대로 따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녀석은 뒤도 보지 않고 잘만 도망쳤다. 균형감각 하나는 타고 난 녀석이었다.
일린저는 뒤로 가고, 가고, 가다가 문 앞에 당도했다. 도착하자마자 뒤로 숭 내뺀다. 일린저의 발이 매끈한 바닥을 지나 흙에 이르렀다. 그는 빛을 불러내, 자신의 몸을 위로 떠올렸다.
“안 내려와?”
일린저의 주변으로 빛들이 날아들었다. 이건 끝나지 않는 추격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잡아봐, 잡아봐, 하면서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깨닫고 나자 성질이 났다. 손에 든 모이는 알맞은 무기였다. 아직 일린저의 발이 땅과 멀지 않은 때였다.
“일린저 모르온.”
경어를 쓰지 않아 벌을 준다면 달게 받겠다. 지금 ‘왕자님 갑니다.’ 할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일린저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새 모이를 던졌다. 노란색 알갱이가 흩어져, 일린저의 가슴팍까지 날아갔다. 그 밤에 복수를 해냈다. 나는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 번만 더 이따위 장난질을 하면 다음에는 말똥을 네 머리 위에다가 부을 줄 알아.”
자신이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나는 발을 들어 공중에 뜬 그의 발목을 내리쳤다. 몸이 휘우듬할 만큼 정확한 타격이었다. 일린저는 뒤늦게야 제 발목을 감싸 쥐고 ‘아야.’ 같은 소리를 했다. 욕심에 비해 고통은 미지근했나 보다. 저렇게 거짓으로 엄살떠는 얼굴이라니.
보복을 해올까 봐 안전한 장소를 물색했다. 재고 따져 봐도 할아버지의 집무실만한 곳이 없었다. 설마하니 할아버지의 앞에서 나를 뒤집어 까지는 않겠지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린저는 제 별관에서부터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나 혼자 달리고 달려, 할아버지의 집무실에 헉헉거리며 도착했다.
할아버지의 집무실에는 어머니도 있었다. 두 분이서 무언가를 의논 중이었나 보다. 땀이 줄줄 나는 나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이야라. 달려왔니?”
어머니는 다가와 나의 머리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줬다. 할아버지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분주하게 노는 철부지 취급을 받아 울컥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말했다.
“왕자는 언제 떠나요?”
“왕자?”
어머니, 할아버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뱉은 질문이 가관이었다.
“왕자가 떠나는 게 싫어서?”
“무슨 그런 끔찍한.”
내 비명 같은 대답에 어머니가 작게 웃었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있지만 다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걸 무슨 투정쯤으로 여기나 보다.
“너무 싫어요. 지금 별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이르고 싶진 않지만 나를 바닥에 굴리기까지 했다니까요.”
어머니는 뒤로 넘어가는 허리를 잡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할아버지도 만면에 가득히 미소를 머금었다.
“왜 웃으세요?”
“아니.”
어머니는 힘을 주어 나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어머니의 품 깊숙이 감추어졌다. 어머니의 어깨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수천 번을 맡아도 그리운 향이었다. 머리꼭지에서 놀던 분노가 서서히 아래로 추락했다.
“정말 내 딸 같아서.”
고즈넉한 집무실에서는 나무의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사각거리는 깃펜을 놀렸다. 양피지를 사각사각 긁는 소리, 통나무 장작이 그득한 벽난로, 봄철 동산에 핀 꽃 같은 어머니의 향기. 죽기 직전까지 안고 사는 기억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 날, 그 집무실을 떠올리면 나는 한기가 몰아치는 과거를 메울 수 있었다.
* * *
이튿날 에드리트는 제 부모님이 계신 성으로 돌아갔다. 에드리트는 섭섭해하지 말라며, 나와 산도르아의 등을 두드렸다. 마차에 오르기 전에는 서로 포옹도 했었다.
“이드리하임에서 봐, 사촌들.”
“조심히 가. 에드리트.”
에드리트는 쓰고 온 모자를 벗고, 우스꽝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잘 가.”
에드리트는 ‘그게 다야?’ 하며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행동이 자연스러운 에드리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에드리트는 팔을 풀기 전, 내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널 만나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안심하고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에드리트는 떠나기 전에 손가락으로 산도르아를 가리키며 잘 감시하라고 했다. 에드리트가 온전히 떠나고, 산도르아와 둘만 남았을 때였다. 나는 뒷짐을 지고 걸으며 물었다.
“산도르아.”
“응?”
“걔는 나갔지?”
나는 진즉 떠나가고도 남았을 이방인에 대해 물었다. 여러 일이 겹치는 통에 신경 못 쓴 주제였다. 산도르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 듯 말 듯 했다. 나갔다는 건지 안 나갔다는 건지 모르겠다. 산도르아의 얼굴은 불안한 티가 역력했다. 얼버무린다는 게 수상쩍어 몇 번 더 추궁했다. 산도르아는 괜한 걱정하지 말라며, 계단으로 총총 올라가 버렸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꽃이 핀 정원을 지나는데 발목이 벌에 쏘인 듯 따끔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꽃의 줄기가 내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구두 끝을 파고들려는 꽃이 괴상쩍었다. 앞을 바라보자, 웃는 낯의 범인이 손을 흔들었다.
일린저 모르온이었다. 분수대에 가벼이 기대고 앉아 모이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분명 내가 모이를 뿌린 것에 대한 복수일 터였다.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발버둥 치는데 그럴수록 이 줄기, 저 줄기가 합세해 양발을 묶었다.
일린저는 분수대에 앉아 나의 반항을 지켜보았다. 내가 욕을 하면 맛있다는 듯이 혀를 내밀었고, 손가락질을 하면 똑같이 돌려주었다. 사람들이 오면 풀어주고, 사라지면 다시 묶어뒀다. 해 질 녘까지 그러고 있었다.
노을이 지자 일린저는 하품한 다음 기지개를 켰다. 분수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별관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나는 점심, 저녁, 간식을 건너뛰었다. 어머니가 왜 식사 시간에 안 내려왔냐니,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왕자의 버릇을 고치거나 쫓아내는 건 무리였다. 당사자인 내가 손봐줄 문제였다.
싸움을 걸어오는데 피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무시하고 봐주자 했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재만 남았다. 이제는 잿더미를 말썽쟁이 얼굴에 발라줄 차례였다. 산도르아에 대한 일은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나는 새벽에 눈을 떠, 고운 진흙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퍼내어 빈 그릇에 담아둔 참이었다. 일린저가 쓰는 침실은 별관 삼층에 있었다. 나는 빛을 타고서 떠오른 다음, 벽에 얌전히 붙어있었다. 곧 하녀가 들어와 커튼을 열어젖혔다. 햇볕이 일린저의 침실을 밝혔다. 엉망인 자세로 잠을 자던 녀석이 눈가를 비볐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녀는 옆에서 물을 따르고, 일린저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한 손으로 진흙을 뭉쳤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때였다. 나는 빛의 힘을 실어 진흙을 날려 보냈다.
“어머!”
아쉽게도 목에 맞추고 말았다. 또 하나를 똘똘 뭉쳐서 일린저의 얼굴에 가격했다. 그러나 눈치챈 일린저가 한 손으로 받아내고 말았다. 물론 진흙으로 인한 피해까지 받아내진 못했다. 일린저의 침의로 진흙 뭉치가 떨어졌다. 녀석은 창문 밖의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실실대는 웃음기도 없었다.
나는 녀석의 기분이야 어떻든 만족스러웠다. 진흙이 잘 어울리는 왕자님이었다. 그날 아침은 평상시의 두 배로 먹었다. 통쾌해서 포크를 물고 깔깔 웃었다.
“어디 아프니?”
산도르아가 나를 보고서 걱정 어린 눈을 했다. 나는 기쁘게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러나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일린저 모르온은 다시없을 지독한 새끼였다는 것이다. 응수를 해 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비겁한 수까지 쓸 줄은 몰랐다.
한 걸음 내딛는 단계의 나와 그의 차이는 욕이 치밀 정도였다. 그런데 그놈은 기어코 내가 연습하는 곳으로 와 스승에게 대련을 청했다. 스승은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내가 거부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꺾일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었다.
일린저는 ‘설마 다치기야 하겠어요?’말한 뒤에, 맞선 나의 검을 박살 내놓았다. 내가 무엇에 길길이 뛰는지 아는 놈이었다. 그가 가볍게 쳐내는 것만으로 나는 번번이 검을 놓치고 있었다. 빛을 다루는 것에는 상당한 집중이 필요한 터였다.
더군다나 생명이 뿜어내는 빛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한정된 빛의 개수를 가지고 대련하는 것이다. 상대보다 약한 자는 적은 수의 빛을 가져온다.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대련이었다.
일리저는 떠나기 전날까지 매일 같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빛을 모으는 연습을 하면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질렀고, 화가 난 검을 휘두르면 손쉽게 제압했다.
일린저는 검을 빼 들지도 않았다. 몸으로 피하거나 수련용 목검을 쥐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내가 발을 구르면 그는 ‘항복하는 거야?’물었다. 그럴 리가. 나는 다시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아침에, 밤에, 새벽에. 일린저는 대중없이 나를 찾아와 검을 겨눴다. 하루는 꼭두새벽부터 시작해 달이 기운 밤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날은 침실 근처까지 가지도 못하고 계단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그 녀석의 재킷을 덮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던지. 심술이 난 내가 구멍을 내어 돌려주자 일린저는 도리어 설레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 하면서.
몸서리치며 그 녀석과 맞붙은 칠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악몽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녀석이 떠나는 당일에 푹 잠을 잤다. 모두가 배웅한다고 나간 자리에는 열이 오른다는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다들 의심하기보다 결국엔 몸살이 났구나, 했다.
일린저가 없는 하루는 아침 공기부터 달랐다. 푹 자고 일어나서 개운함을 만끽하는데 하녀 하나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일린저를 모시던 하녀였다. 떠나기 전에 주고 갔다는 그 편지에서 라티너스 향이 났다. 내용은 단순하고 짧았다.
[또 놀자.]
나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였고, 일린저에겐 그저 놀이였다. 나는 편지를 찢어서 쓰지 않는 서랍 안에 버려두었다.
- 공금 by Jira
* * *
이드리하임 학원에서 제복을 보내왔다. 재단사가 방문하여 꼼꼼히 산도르아와 나의 치수를 재갔다. 이틀이면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어머니는 기꺼이 값을 치렀다. 나머지 준비물은 이미 챙겨두어서 따로 확인할 필요가 없는 정도였다.
“이야라.”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그 자식 얼굴 볼 생각에 입맛이 떨어져.”
산도르아는 울고 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흥미가 가실 테니, 한 번 깔끔하게 져주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산도르아의 말에 파르르 떨었다.
“너도 혹시 당했어? 울고 봐달라고 한 거야?”
“아니.”
성격의 뿌리부터 글러 먹은 놈이 나한테만 그랬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상세히 말하라고 다그쳤더니 산도르아는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할아버지의 호출이 있었다. 며칠 뒤면 이드리하임으로 떠나는 손녀에게 지지 말라는 말이라도 하시려는 걸까. 할아버지는 보던 책을 덮으시고 우리를 맞이했다.
“제복이 도착했다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네. 산도르아 것도요.”
“그래. 우선 앉아라.”
똑같은 크기의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나는 왼쪽 의자에 걸터앉았다. 할아버지는 책을 아예 옆으로 치워두고,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꼈다.
“디아.”
“네.”
목표는 내가 아닌 산도르아였다. 할아버지는 맨손바닥을 보였다. 의중을 알아차린 산도르아는 그 위에 포개듯 손가락을 올렸다.
“나를 원망하니?”
“네?”
산도르아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할아버지를 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마음이 다쳤거나.”
산도르아는 미궁을 헤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시시나 내가, 너에게 서운하게 굴었을 텐데.”
그제야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감을 잡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오고부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산도르아는 짜둔 것처럼 말했다.
“서운하지 않았어요. 저보다는 이제 막 들어온 이야라에게…….”
“산도르아.”
“……네.”
“네 어머니나 나나. 너를 한 번도 가족이 아니라고 여긴 적이 없어. 그건 이야라가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야.”
문득 보았을 때 산도르아는 짧게 자른 손톱을 뜯고 있었다.
“다 아는 얘기를 왜 하시는 거예요?”
“다 아는 얘기지만 반드시 한 번은 해야 하는 얘기잖니.”
산도르아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부모라고 여긴 이들이 사실은 부모가 아니라는 것, 예전처럼 투정 부리며 안길 수 없는 것, 응석받이 손녀처럼 굴 수 없는 것. 산도르아는 일찍이 조숙해졌다. 그건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나는 네가 이야라와 잘 지내주어 고맙다고 생각한다. 다른 성격에, 다르게 자라 온 아이지만. 또 그렇기에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네.”
“다만 네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산도르아는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감 없는 입술이 웅얼거렸다.
“엉뚱한 곳이라니요?”
“그 이방인 말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끝에 헛기침을 했다. 너무 오랜만에 들은 단어였다.
“그 아이라면 진즉 나갔지 않아요?”
얼마 전 대답을 적당히 얼버무린 산도르아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차분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바쁜 일이 연달아 오는 바람에 모두 잠시 그 아이를 잊고 있었지.”
산도르아는 의외로 표독스럽게 맞섰다.
“해가 되는 짓을 한 적은 없잖아요.”
“첫 만남에 네 마차로 숨어들었다고 들었는데.”
“살려고 그런 거예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결정을 내린 얼굴이었다. 산도르아는 겁먹은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성 안에서 일하게만 해주세요.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키르얀은 바깥으로 나가길 원치 않아 하고 있어요. 이제 겨우 사람답게 산다며 좋아하는 애를…….”
“안 좋은 사정을 가진 이들은 얼마든지 있어. 그때마다 주워다가 우리 성에 들일 작정이냐.”
할아버지의 표정은 점점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산도르아의 감정은 격해졌다.
“얼마든지 있지만 나는 키르얀의 이름을 알아버렸어요. 걔가 어떻게 생겼는지, 목소리가 어떤지, 다 기억한다고요. 걔를 내쫓으면 내가 어떻겠어요?”
할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의 푸른 핏줄이 선명해지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의 입술이 열린 것은 한참 뒤였다.
“네 어머니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디아.”
“무엇을요?”
“밤마다 그 이방인이 네 방에 드는 것. 네가 하녀의 숙사에 그 이방인을 숨겨주고 있는 것.”
황당한 나는 눈만 끔뻑끔뻑했다. 이방인 사내애가 산도르아의 방까지 들락날락했다니. 그간 검술 연습에 코빼기도 안 비췄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나.
“그저 글을 가르쳐줬을 뿐이에요.”
“디아.”
“그런데 이렇게 아시면서…….”
“산도르아.”
할아버지는 다시 산도르아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천천히, 조심히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 이야라에게도. 너에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까. 그 어떤 문제에서도 너희 둘을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
“네.”
“디아. 네가 외로워서 그 아이에게 집착하는 걸 알고 있단다.”
외로움. 집착. 할아버지는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봐준 것이었다.
“너는 위테르발도다. 바다가 메마르는 그날까지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알아요.”
“거기서 끝내라. 더 깊어지기 전에.”
“할아버지. 저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어쩔 때는 사랑보다 무서운 게 정드는 거란다.”
할아버지는 산도르아의 손을 놓으시고, 작은 서랍을 여셨다. 거기서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나왔다.
“곧 셉시스에서 병사를 모집한다더구나.”
“병사요?”
“추천서를 써주마. 그 이방인의 이름으로.”
할아버지는 사전에 준비해 둔 것을 내밀었다. 산도르아가 빠져나갈 수 없이 치밀한 그물망이었다.
“네 외로움을 달래주었으니까. 그간의 이방인이 저지른 무례는 묻지 않는다. 대신.”
“…….”
“두 번 다신 너에게 접근할 수 없고, 말을 걸어서도 안 되고, 위테르발도 령에 돌아올 수 없다.”
수도의 병사로 들어가도 알찬 자리는 쟁쟁한 가문의 차남, 삼남이 꿰차고 있었다. 집안이 한미한 자는 수도 경비병이라도 되면 다행인 신세였다. 하물며 애초에 집안이랄 게 없는 이방인은 대접이 어떻겠는가.
“네 약혼자 자리도 학원을 다니는 동안에 다시 물색할 생각이고.”
할아버지는 기왕 칼을 뽑은 김에 쐐기를 박으려 했다.
“받아들이겠니?”
키르얀은 이제 서부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이리 내쫓기든, 저리 내쫓기든, 하나라도 건지려면 할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산도르아는 낮은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선택지가 없었다.
“사랑한다, 디아.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할아버지는 인자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성 안에, 자신의 선 안에 든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겨울답지 않게 푹한 날에 우리는 셉시스로 가는 마차를 탔다. 짐꾸러미를 정리해줄 하녀와 키르얀이 탄 마차도 같이 출발했다. 그러나 두 마차의 목적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