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02. 사촌의 방문

요 며칠 날씨가 계속 화창했기 때문에 나는 자주 밖을 나다녔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벽에 기대 눕거나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감정에 취하다 못해 배가 잔뜩 불렀다. 하도 나에게 ‘예레 하, 예레 하’, 그러니까 우쭐한 기분이 되어서, 벽을 지켜야 한다 어쩐다 하니까 책임감이 들어서, 충동적으로 스승이라는 자에게 찾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숙제를 더 내놓으라고 했다. 배움이 부족하다며, 두 배를 요구했다.

‘더?’

산도르아를 가르치다가 나온 스승은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깐깐한 스승은 거절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돌아갔어야 했다.

‘지금 주는 숙제의 양도 충분히 부담되었을 텐데.’

나의 심보가 고약한 건지, 거절당하면 오기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내게 해 준 말을 떠올렸다. 넌 내 손녀야. 그 말은 오기를 부리는 데 보탬이 되었다. 말로 주절주절 떠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 한 번 꾹 감고 혀를 놀렸다.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고, 했다.

‘그래?’

그러더니 두께가 팔뚝만 한 책을 내줬다. 스승은 농담처럼 내일까지 외워오랬다. 그런데 확인하겠다는 걸로 보아 농담이 아니었다. 덕분에 글의 의미를 해석 못하는 머리가 깨지고, 머리가 깨지니 재미가 달아났다. 오기는 슬금슬금 발을 빼버렸다. 뒷감당을 해야 하는 나만이 남았다.

초장에는 스승의 콧대를 팍 눌러버릴 생각이었다. 까짓것 종일 매달리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적어가며 외웠다. 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입에 넣기까지 해봤다. 식사 시간까지 건너뛰고 매달렸다.

“때려치울까.”

그러나 외우고 또 외워도 진도는 달팽이처럼 느렸다. 아예 책을 삼킬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루를 다 보내버렸다. 하늘에 달이 떴는데 아직 반도 해치우지 못했다. 외운답시고 쓴 잉크가 아까웠다.

어째서 공부만 하면 몸은 낮잠 한 번만 자자고 꼬드기는지.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새벽이 지나고 올빼미가 울 즈음 깨어났다.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르게 생겼다. 아직 반도 못 외운 책을 보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아프게 갈고서는 책을 덮어버렸다. 어차피 종 친 거, 뭐 하러 더 보겠냐는 생각이었다.

아픈 척해볼까.

아니다. 그 독한 스승인지 독사인지는 훤히 알 것이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냐며 나를 놀릴 게 뻔했다. 방법은 없었다. 스스로 부린 오기의 대가를 치러야지 별수 있겠나. 한숨을 푹 내쉬다가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래도 분한 것은 분한 것이고, 내 주제에 여기까지 한 거면 아주 잘한 거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나 자려는데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났다. 해도 뜨기 전인데 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녀인가. 설마 벌써 내 아침 식사를 들고 오는 것인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온 방에 퍼지는 소리를 듣고서 침입자가 킬킬 웃었다. 킬킬. 하녀 중에 저렇게 걸걸한 목소리는 없었다.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문가를 바라봤다.

“깜짝 놀랐지!”

키가 멀대같이 큰 사내애였다. 그것도 어머니처럼 붉은 머리칼에 괴상한 들꽃을 꼈다. 그는 내 코앞에 꽃을 들이밀었다. 그러면서 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얼결에 꽃을 받아버렸다. 그러자 사내애가 헤벌쭉 웃었다.

“이 에드리트가 네 기분을 풀어주려고 밤새 말을 타고 왔단 말이지. 꽃을 받았는데 반응이 영…….”

에드리트인지 뭔지는 드디어 눈을 떴다. 노란 눈이 나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엉뚱한 침입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누구세요?”

철부지 같은 얘는 또 뭐란 말인가. 안 그래도 공부도 안 되는데 짜증이 나 죽겠다.

“내가 할 소리야. 너 누구야.”

“나? 나?”

“말도 제대로 못 해?”

빨간 머리 사내애는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일어나 그를 밀쳤다. 덮은 책을 한쪽에 치우고, 잉크병의 마개를 닫았다. 남한테 널브러진 책상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방을 착각했나.”

볼일은 산도르아한테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방.”

“어?”

“귀 막혔어?”

사내애는 얼굴이 빨개져서 콧김을 뿜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저가 더 화내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어이가 없었다.

“말. 너무 무례하게 한다.”

“나가.”

“세상에.”

사내애는 경악하는 표정으로 제 입을 막았다. 나는 이따위로 밍밍한 녀석들이 제일 싫었다. 말귀 못 알아먹고,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사람. 얼른 가주었으면 했지만 그는 내 앞에서 뱅뱅대며 알짱거렸다.

“너, 내가 누군지 알면 후회하게 될 거야.”

가라는데 안 가는 녀석들은 흠씬 두들겨 패줘야 한다. 내가 주먹을 올리자 깜짝 놀란 녀석이 뒷걸음질을 쳤다.

“정말로 후회할 거야!”

“안 꺼져?”

줄행랑을 치면서도 ‘두고 보라고!’라는 말 따위를 흘리고 갔다. 아. 이건 오늘 하루가 재수 없으리라는 징조인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나는 내 방에 침입한 녀석의 이름이 에드리트이며, 어머니의 형제, 즉 현재 란테 가문 수장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다. 산도르아의 절친한 친우이자 편하게 속 터놓는 형제나 다름없단다. 근래 들어 퍽 우울해 뵈는 산도르아를 위로할 겸, 내게 소개시킬 겸, 할아버지가 그를 초대했다고 들었다.

“줘 봐.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 배웠어?”

“내놔.”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잘 들어. 여기서는 말이야…….”

“안 내놔?”

에드리트는 나를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으면서도 꽤나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 이렇게 친밀하게 지내본 경험이 없었다. 에드리트는 시시때때로 나타나 나의 책을 뺏으며 놀렸고, 나는 득달같이 쫓아가 그의 배를 발로 찼다.

“악!”

과장되게 배를 잡고 굴러다닌 에드리트는 나를 어린 동생 놀아주듯이 놀고 있었다. 쫓아다니며 이를 드러내는 내가 재밌나 보다.

“어!”

내 책을 들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에드리트가 산도르아를 발견했다. 내 책을 덮고서 그대로 그 아이에게 달려갔다.

“디아!”

빨간 머리 사촌. 에드리트는 산도르아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라며, 안고 뛰기까지 했다.

되도록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에드리트가 던지고 간 책을 주워서 다시 꼼꼼히 읽어보고 있었다. 옆에 사전도 끼고 앉아 어려운 게 있으면 스스로 찾아봐야지 싶었다.

“쟤 웃긴 애야.”

“응?”

에드리트가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게 들렸다. 산도르아는 당황한 눈치였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기도 했다.

“저걸 반을 외웠다기에 일주일은 걸린 줄 알았는데. 믿겨져? 하루 만에 저걸 반을 외웠대!”

뻔히 내가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그렇게 떠들어댔다. 아니, 에드리트가 일방적으로 떠들어댔다. 산도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드리트의 칭찬 아닌 칭찬은 은근히 기뻤지만, 엉터리로 외웠기에 내용은 반쯤 까먹은 상태였다. 그건 나만이 안고 갈 비밀로 해 두었다.

에드리트는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무 구절이나 집어서 물어보는 말에 버벅거렸지만 외우긴 외우더라고. 에드리트는 그때부터 내게 흥미가 생긴 듯했다. 그래서 한두 번 놀리려던 게 재미가 붙어서 눌러앉아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산도르아는 별로 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얼쩡거리는 것도, 껄끄러운 것도 나 혼자인 듯했다. 멀리서 서서 떠들던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버렸다. 망아지 같던 에드리트가 하도 못살게 굴어서 그러한가. 자연스럽게 찾아온 고요함이 달갑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이럴 때마다 느끼곤 했다. 나의 세상은 작디작았으나, 산도르아의 세상은 다채로웠다. 그 아이는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자신을 위로해줄 사촌도 있었다. 오기로 삶에 맞서던 나와 달랐다.

창문 너머로 산책을 하는 산도르아와 에드리트가 보였다. 두 사람은 친밀해 보였지만, 여전히 산도르아의 얼굴은 울적했다. 에드리트 혼자서 떠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이유 없이 차오르는 슬픔에 커튼을 닫았다. 왠지 오늘은 책을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 * *

스승은 외국어가 약한 내게 시비 걸듯이 말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닌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돌이나 다름없구나.”

“이름이 꼬불거리잖아요. 어려워요.”

“다른 이들은 다 외워. 외우기 싫으면 뒤돌아서 나가.”

스승님의 냉정한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코를 책에 박았다. 귀족의 가계도였다. 각부의 예레카부터 그저 그런 나부랭이 귀족까지 적어놓은 책이었다. 이걸 배워야 훗날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스승님.”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던 스승의 눈이 산도르아를 향했다.

“디아?”

오늘은 나 혼자만의 수업이었다. 산도르아는 에드리트의 방문 때문에 수업을 며칠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다. 어머니 말로는 손님을 외롭게 둘 수는 없다나 뭐라나.

“오늘 수업은 없다고 전달을, 아…….”

스승은 까먹었다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산도르아를 보았다. 나였다면 옳다구나 할 것을, 산도르아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나는 산도르아의 슬픔을 해석할 수 없었다. 왜 손을 떨고 있는지, 밀치면 울 것만 같은지.

“스승님도 실수하실 때가 다 있네요. 안 그래도 오늘 힘들었는데. 잘 됐어요.”

그러나 산도르아는 금세 미소로 얼굴을 덮었다. 아차 싶은 스승님이 뒤에서 불렀지만 그 아이는 뛰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서야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다. 내가 자주 가는 곳에 산도르아가 서 있었다.

내가 외톨이처럼 기대곤 하는 벽이었다. 그 아이는 벽 앞에 서서, 내가 했던 것처럼 귀를 대고 있었다. 그러나 평온을 찾는 나와 달리 산도르아는 슬픔을 딛고 있었다.

일전에 할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를 정말 손녀라고 생각하느냐고. 그저 머리칼이나 눈의 색이 닮은 아이일 수 있지도 않으냐고. 산도르아가 진정한 후계자일 수도 있지 않으냐고.

‘이야라.’

‘네.’

‘산도르아는 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단다.’

예레카가 될 예정이었던 산도르아가 후계의 자리에서 손쉽게 끌어내려진 것도, 애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벽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후계자는 없었으므로.

그 뒤는 뻔한 얘기였다. 할아버지는 예언자를 찾았다고 했다. 예언자는 산도르아가 후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렸다. 무려 작년의 이야기였다. 진실을 알자마자 아랫사람을 닦달하여 수소문했으며, 아이가 뒤바뀐 것을 알아채고, 우연찮게 위드먼 부인이 나를 찾아냈고, 할아버지는 나를 이곳에 두었다.

벽의 소리는 직계의 후손만이 들을 수 있었다. 벽이 택한 게 산도르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을까.

내가 산도르아를 지켜보고 있을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 건 우연이었다. 두 분은 벽의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도르아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산도라아 근처에 있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웅얼거리듯 들렸던 말소리가 한 걸음씩 나아가자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눈치껏 나무 뒤에 숨었다.

“벽의 소리를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아마 그 아이뿐일 거야.”

“이 소리를 좋아한다고 하나요?”

“그럼. 아주 이 앞에 붙어살 작정이더구나. 여기 있으면 파도가 치는 소리, 새가 노래 부르는 소리, 떨어진 사과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린다고.”

할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는 밝게 웃으신 다음,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아예 감정이 없는 아이는 아니야. 원망이라니 당치도 않아.”

“저였으면 원망할 법도 한데요.”

“너였어도 원망하지 않았을 거다. 너만큼 그 아이는 마음씨가 좋은 것 같으니까.”

뒤이어 할아버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불같은 성격은 너를 닮은 것 같긴 하다만.”

그 말에 어머니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가 나를 신경 쓰고 있었는지 몰랐다. 늘 서먹하고, 둘만의 자리를 피하는 듯한 어머니였다. 말도 제대로 섞어본 적 없었다. 가끔 식사는 했니,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내가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던 걸까.

왠지 이곳에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그건 산도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두 분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용히 덤불 사이에 숨어 있다가, 비로소 세 사람이 사라졌을 때 걸어 나왔다. 벌떡 일어나 벽으로 향했다. 나는 벽에 귀를 대었다. 손을 내리고, 아까 전 어머니의 다정한 음성을 간직한 벽에 마음을 기댔다.

산도르아는 이곳에서 무엇을 듣고 싶었을까. 내 물음에 벽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 * *

포크라는 것은 생각보다 성가신 물건이었다. 구태여 이걸로 찍어서 먹는 것보다 바로바로 손에 집으면 편한데 말이다. 그러나 짐승처럼 살고 싶으면 계속 그러라는 스승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벽이 뒤집혀질 일이네.”

내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호호, 웃었다. 비가 그치고 여름 볕이 쨍쨍한 날이었다. 어머니의 머리칼이 더욱 붉게 보였다.

“선생이 호되게 가르치나 봐.”

나는 부끄러워져 포크로 굴러다니는 토마토를 푹 찍었다. 어머니는 턱을 괴고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승은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내기를 걸어왔다. 좀처럼 거부할 수 없는, 자존심을 건 내기였다. 네가 뒷골목 출신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라며, 내가 하는 행동은 교육 덜된 짐승이나 할 법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니라고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러지 못했다.

따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거슬렸다. 거슬려서 하나둘 따르다 보니까 어느새 내가 제법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배우는 게 늘어갈수록 보이는 것도 많아졌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어머니의 머리, 경박스럽지 않게 웃는 얼굴, 나이프를 유연하게 쓰는 할아버지의 손, 모든 게 완벽한 산도르아…….

산도르아는 보면 볼수록 배울 게 많은 애였다. 배운 것을 복습하다가 보면 가끔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는데, 산도르아는 그것을 이미 코 풀듯이 배우고 저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분하다기보다는 대단하다는 쪽이었다.

산도르아에 대해서는 날이 갈수록 감상이 달라졌다. 내 상상 속에만 머무는 귀한 아가씨 같다가도, 자신의 선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냉철함을 보이다가도, 또 나름대로의 유약함이나 따뜻함을 보기도 했다.

그 아이가 내 것을 빼앗아갔다는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이다. 다만, 사무치게 부러울 때는 있었다. 티끌 없는 어린 시절이 걸린 초상화를 보거나 나는 알아먹을 수 없는 추억얘기가 들려올 때, 나는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근사근 말을 걸을 때, 나는 가지지 못한 부드러움을 보았을 때, 그 부드러움이 사랑으로 키워진 것을 알았을 때.

내게는 뾰족함밖에 없었다. 왜 다들 내게 안쓰럽다거나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소매치기가 한순간에 신분이 바뀌었는데 오히려 내 쪽에서는 감사해야 할 것 아니던가. 그러나 얼마쯤 배우고 나서야 알았다. 안쓰럽다는 것은, 스승의 말을 빌리자면 못 배워먹은 태도나 말투를 자기들의 잘못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창피해졌다. 죄책감을 느낄 만큼 나의 태도가 써먹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못 배워서 잘못했다고 말하고 다닐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가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피를 나눈 가족의 의미를 모르고,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 내게 적응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성미가 까칠하며, 할아버지를 비롯한 누구와도 친근한 표현을 나누는 법이 없었다. 매사 바쁘고 외출도 잦았다. 스승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교성이 넘친다고 했다. 예레카의 반려라면 안팎으로 사람들을 주무르고 신경 써야 하는 법이라며, 원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하는 바람에 바빠지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누글누글한 편인 것 같았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가주가 되었고, 어머니의 배로 바빠 보이지만, 은근히 성내에서는 자주 마주치는 편이었다. 어떤 음식이 내 입에 가장 맞는지, 혹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는 목소리에는 염려가 깔려 있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내 어머니, 할아버지라고 해서 우리가 하하호호 손을 마주 잡으며 웃은 적은 없지만. 나는 저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나와 닮은 눈매라든지, 웃을 때 찌푸려지는 콧잔등이라든지, 그런 닮은 구석이 보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전까지 사람은 제각각 생긴 줄 알았었다. 부모와 자식이 닮아봤자 얼마나 닮았겠어, 했다.

“산도르아.”

어머니의 시선이 산도르아에게 닿아있었다. 나는 그제야 물만 마시고 있는 내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입맛이 없니?”

“네.”

산도르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황당한 시선이 쏠렸지만 산도르아는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걸어갔다.

“산도르아.”

“괜찮아요.”

산도르아는 할아버지의 말이 식기도 전에 대답했다. 머리 위에 우중충한 구름을 몰고서 나가버렸다. 산도르아의 빈자리에는 침묵이 남았다. 어머니는 안 그래도 안색이 좋지 않았던 애가 그렇게 나가버렸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이야라.”

나는 씹어 먹던 풀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내게 물었다.

“산도르아가 불편하니?”

겨우 한술을 뜰까 말까 하던 할아버지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시시, 천천히 하기로 했잖니.”

“얼마나 천천히. 일 년 뒤에요?”

보면 볼수록 안 맞는 사이였다.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성격은 극과 극을 달렸다. 어머니는 차근히 설득하듯 말했다.

“웬만하면 너에게 맞추어줄 거야. 산도르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대로 같이 살아도 되는지. 솔직하게 말해 줄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했다. 돌리지 않고 내게 곧장 말을 꽂았다. 나는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별생각 없어요.”

“별생각이 없어?”

“네.”

오히려 나는 두 분의 생각이 궁금했다.

“어머니는요?”

내가 오기 전에 산도르아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근래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나에게 배정된 하녀들이 원래 산도르아의 하녀였단 것이었다. 정식으로 재단사를 부르기 전, 내가 빌려 입었던 옷도 산도르아의 것이었다. 그 아이는 그걸 내 거라고 생각해서 얌전히 있었는지, 아니면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명확하게 이 감정을 설명할 순 없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미안한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는 산도르아가 싫어요?”

도도하게 앉아 있던 어머니는 한순간 말을 잃었다. 정곡을 찌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머니의 눈언저리가 붉어졌다. 가면이 차차 뭉개지고서 드러난 얼굴이다. 내가 빵 한 점 얻지 못하고 얻어터진 뒤 잠이 들 때. 서러워서 저런 표정을 짓긴 했었다.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니.”

순간 나는 손이 굳었다. 어머니의 말보다 어머니의 뺨을 가로지른 눈물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우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허둥대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아이의 첫 신발은 내가 만들었어. 엄마, 소리도 내가 듣고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처음 걸었을 때도, 처음 글을 배웠을 때도, 처음으로 그 아이가 벽 앞에서 좌절했을 때도. 나는 또렷이 기억해. 사랑할 수밖에 없지. 그 기억들을 너무도 사랑해.”

어머니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울고 있었다. 그 노란 눈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넌 어때.”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어머니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네가 처음 무얼 말했는지, 무얼 좋아했는지, 하다못해 어린 시절에 네가 어떻게 생겼을지 하나도, 단 하나도 몰라…….”

어머니는 작게 ‘그게 억울해. ’ 라며 중얼거린 뒤, 물을 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이키고선 일어섰다. 뒤돌아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다 보여준 마당에 저런 일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나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다.

“별생각이 없다니 다행이네. 까다롭지 않아서 좋아.”

어머니는 금세 멀쩡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여유 있는 미소까지 띠고서였다.

“난 캐소릭스 부인과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아무리 봐도 다소 서투른 퇴장이었다. 산도르아와 어머니가 비워진 자리에는 할아버지와 나의 어색함이 대체됐다. 나는 혼자서 어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내 어린 시절, 좋아하는 것, 내가 처음으로 뱉은 말.

“이야라.”

“네.”

갑자기 토마토가 싱거웠다. 언 것처럼 코끝이 시렸다.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대했다. 할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 얼굴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으신 게 분명했다.

“우리도 일어날까.”

할아버지는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로 걸어왔다. 식탁 위에 올려 진 내 손을 잡고서 끌어올렸다. 나는 맥없이 잡혀 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상냥하게 웃어 준 후에 손을 잡고서 걸었다.

“오늘은 무엇을 할 예정이니.”

“숙제요.”

“선생이 네게 숙제를 많이 내주는 것 같던데.”

“모자란 게 많은가 보죠.”

우리는 천천히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만하면 놓아줄 줄 알았으나 할아버지는 복도를 걷는 내내 내 손 하나를 품었다. 나는 손톱 밑이 근질근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중이었다. 귀 뒤가 가렵고 발바닥이 뜨거웠다.

“네 어머니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사람이야. 그렇게 배웠고, 자랐고, 알았으니까.”

계단을 지나쳐, 홀이 나오자 할아버지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모자라면 채우면 되는 거니까. 초조해하지 말고.”

나는 입 안을 혀로 굴렸다. 보일 듯 말 듯 끄덕였으나 할아버지는 알아들은 것처럼 웃었다.

“그래.”

그대로 일어서 떠나려는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손이 내 머리통 위에 얹어졌다.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칼을 한번 쓸어내렸다. 그 손길의 여운이 귀 끝까지 전해졌다. 간질간질한 목으로, 어깨로, 가슴으로 왔다.

그 느낌은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나를 옥죄였다. 귀찮고 성가시게 할 감정이 나를 채찍질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 * *

뙤약볕에 튀겨 죽일, 망할 스승 같으니라고. 칭찬 한번 해주는 법은 없으면서 번번이 내게 배운 양의 두 배나 되는 숙제를 내준다. 아무래도 초반에 잘못 찍힌 것 같았다. 미운털이 박히면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던데. 나는 순조롭게 망하고 말았다.

결국 간식까지 포기하면서 나는 침실에 틀어박혔다. 피곤하면 침대에서 졸다가 다시 일어나 머리맡에 둔 책을 펼쳤다. 나를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공부를 시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 년이 지나면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공부의 무료함에 지쳐갈 때 즈음, 나는 색다른 소식에 직면해 있었다. 내 방 촛대에 불을 밝히러 온 시녀가 전한 소식이었다. 산도르아가 기어코 탈이 난 모양이었다. 엊저녁부터 식사를 계속 거르더니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신경 쓸 주제는 아님에도, 숙제하는 내내 그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아가씨들은 장미 가시에만 찔려도 호들갑 떨며 기절하지 않나? 어떻게 탈이 나고 나서야 애가 아프다는 걸 아는지, 여기 사람들도 매정한 구석이 있었다. 계속 식사를 거부했을 때부터 애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불붙던 공부와 밍밍한 사이가 된 건지, 며칠째 지렁이 기듯이 나가는 진도에 질린 것인지, 자연스레 나는 산도르아에게 신경을 쏟고 말았다. 어머니가 잠시 들렀다고 했으니 괜찮긴 한 것 같다만, 같은 층에 사는 사람으로서 입 싹 닫고 무시하기도 조금 그런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책을 내팽개치고 잠옷 차림으로 복도를 활개 치게 된 건 온전히 오지랖 때문이었다. 무료하다는 핑계로 안 하도 될 짓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뒷골목에서는 하도 아픈 아이들이 많아 자랑거리도 못 된다지만 저렇게 가냘픈 아가씨는 조금 더 주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막상 방문 앞에 다다르자 고민이 되었다. 산도르아는 내가 오는 것을 절대 반길 리가 없었다. 병에 걸려 나약해졌다고 어서오세요, 할 리가 없는 애였다. 들어갈까 말까. 그 앞에서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난리를 피웠다.

“이야라?”

그때 뒤에서 향긋한 냄새가 찔러댔다. 뒤돌아보니 꽃을 무더기로 뽑아온 에드리트가 서 있었다. 그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괜히 왔다 싶어서 돌아가려는 찰나, 에드리트의 손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워워, 어디 가려고. 기왕 왔으니까 같이 들어가자.”

“뭐 찾으려고 온 거야.”

“뭐를?”

“있어. 그런 게.”

사실대로 말하면 혀가 말리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내가 저 아이랑 딱히 병을 돌봐주고 할 사이가 아니라서 그러한가. 예전에 부엌에서 대판 싸운 후로는 말을 제대로 섞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고.

그런데 무식하게 힘만 좋은 에드리트가 나를 질질 끌고 갔다. 안 가겠다고 버티는 것이 오히려 산도르아를 깨우는 꼴이 될 터였다. 얌전히 따라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은 한참 뒤였다. 에드리트는 옥신각신하던 내가 조용해지자 진즉에 그럴 것이지, 라며 혀를 찼다.

“조금 친하게 지내자, 응?”

“너랑 친하게 지내서 뭐 하는데.”

“가끔 네 돌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내가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실실 놀리는 꼴에 짜증이 팍 일었다. 에드리트는 내 약을 살살 올리며 침실의 문을 열었다.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어서 따라 들어가 버렸다. 처음부터 나를 유인하려고 약 올린 게 분명했다.

나는 말없이 에드리트의 발을 밟았고, 에드리트는 상관없다는 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기 고양이 울 듯 얇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에드리트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에드리트는 표정을 굳히고 침대로 다가갔다. 나 또한 머뭇거리며 그 앞으로 갔다. 눈물 자국이 가득한 산도르아가 얼굴을 마구 가로젓고 있었다. 악몽 속에서 쫓기는 듯했다. 보는 이의 마음까지 아프도록 서럽게 울어댔다.

“디아. 일어나 봐.”

에드리트가 산도르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평소에 까불까불하던 놈이 미소조차 비치지 않았다. 산도르아는 입술을 꾹 물며 눈을 떴다. 눈물 고인 산도르아의 눈동자가 에드리트를 담았다.

“에드…….”

막 울음을 쏟아내겠다고 생각한 때였다. 산도르아의 눈길이 약간 돌려져, 그 뒤에 있던 나에게 닿았다. 산도르아는 다급히 잠옷을 추어올렸다.

“네가 왜 여기에.”

에드리트 대신 꽃을 들게 된 나는 할 말을 찾았다. 데면데면하던 우리가 갑자기 병문안을 자처하는 것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건 산도르아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에드리트를 대하던 부드러운 낯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나를 동정하니?”

산도르아는 내 손에 들린 꽃을 밉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 울음기 가득한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동정하지 마. 네 동정 받을 정도로 슬프지 않아. 괴롭지도 않고.”

듣기만 하던 에드리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가벼운 열 감기였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디아. 왜 그렇게 날을 세워. 네가 걱정돼서 문 앞을 서성이던…….”

“누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산도르아는 나를 쏘아보았다. 명백히 내게 나가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아픈 사람이니까 이해하자 했다. 원래도 반갑지 않던 사이, 갑자기 추레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싫을만 하지. 원래 편한 모습은 편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법이었다. 나라도 그랬다.

“나갈게.”

“잠깐. 이야라.”

에드리트가 말리든 뭐든, 더는 여기에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협탁 위에 꺾어온 꽃만 두고 나가려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가져가. 필요 없어.”

골이 당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열이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쟤 잘못이었다. 나가려던 발이 우뚝 멈춰서, 다시 뒤로 돌아갔다. 파리한 얼굴로 누워있던 산도르아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나가는지 아닌지 지켜보려고 그랬던가.

“뭐 하는 거야.”

나는 하녀가 둔 것으로 보이는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 있는 꽃을 전부 뽑아서 바닥에 버린 다음, 에드리트가 가져온 꽃을 넣었다. 그리고 그걸 침대 옆에 당당히 두었다.

“꼬옥. 나아라, 응?”

산도르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내가 준비한 화병을 보았다. 이쯤 하면 되겠거니 하며 뒤돌았던 순간이었다. 와장창, 소리가 났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산도르아!”

기어코 몸을 일으킨 산도르아가 나를 도발했다. 바닥에는 깨진 화분, 에드리트가 꺾어온 꽃이 애석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못된 마음을 그간 잘 다스려왔는데, 다시 삐쭉삐쭉 일어나 내 성질을 건드렸다.

“그거 네 사촌이 준비해 준 거다?”

화병 깨지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무슨 일이 있냐고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방에서 자던 하녀들까지 깨운 것이다. 에드리트는 중간에 끼어서 난감한 얼굴이었다.

산도르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네 사촌한테 물어봐. 거짓말인지 아닌지.”

“왜. 이젠 에드까지 네 편으로 붙였니?”

“편?”

나는 그 아이에게 달려들었으나 에드리트가 중간에서 튀어나왔다. 달려드는 내 몸을 안고서, 한 손으로 일어나려는 산도르아까지 막아냈다.

“그래, 다 가져가. 다 필요 없어. 원래부터 내 것도 아니었는데, 뭐.”

“산도르아! 너 정말 왜 이래, 오늘!”

에드리트는 달려드는 나를 막아서는 것도 벅차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아이의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질질 짜고 있어야 하는 게 누군데.

“왜. 아까워? 주기에?”

“이야라!”

그때 산도르아의 눈이 뾰족해졌다. 비틀비틀 일어나 내 손을 쳤다. 아프지는 않지만 기분이 아주 더러워지는 동작이었다.

“안 아까워, 가져가! 대신에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보지 마. 동정하지 마. 재수 없어. 네가 뭔데……!”

“산도르아, 그만!”

에드리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그의 어깨를 물었다. 에드리트는 나를 놓쳤고, 나는 산도르아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산도르아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난 그 아이의 멱살을 잡았다. 서로 붙은 상대에게 마구 손을 날렸다. 산도르아의 손은 내 뺨에, 어깨에, 광대에, 아주 고루고루 갈겼다. 삐쩍 마른 애가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제 눈가를 때리면 악을 질렀다.

“제기랄! 산도르아! 그만!”

산도르아의 입에서 나온 피인지, 내 입에서 나온 피인지, 베갯잇에 새빨간 피가 묻었다. 우리가 구르고 굴러 바닥에 떨어졌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여러 발소리가 들렸다. 들렸어도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했다. 더 깨질 곳은 없는지 찾는 손이 간악스러웠다.

붕, 벌의 날갯짓 소리 같은 게 났다. 초록의 반딧불이 갑자기 눈에 보였다. 그게 내 발을 들어 올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서 뒹굴던 내 몸이 하늘로 부유했다. 나는 피의 비릿한 맛을 느끼며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눈앞에 산도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의 사지도 초록색 빛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우리 둘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야라. 산도르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경악한 표정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있는 어머니와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그 뒤에서 하녀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 빛은 할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손과 연결된, 자그마한 초록색 빛 수천 개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우리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눈에는 새빨간 멍이 들고, 입 안은 터졌다. 땅에 닿자마자 발목이 아리는 것을 보니 삐끗한 모양이었다. 사정은 산도르아도 다르지 않은지 땅에 닿자마자 주저앉았다. 침묵은 짧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노여운 목소리가 우리 둘을 다그쳤다.

“말로 하지 못할 싸움이었나 보구나.”

잽싸게 무어라 말할 줄 알았던 산도르아는 훌쩍거리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산도르아를 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할 말은 더 없느냐는 얼굴이었다.

“한 명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다니.”

나나 쟤나 바닥만 노려보았다. 우리 둘을 보다 못한 에드리트가 나섰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습니다. 오해가 생겼어요. 잠깐 말싸움이 거칠어진 것뿐이고요.”

“사촌의 입을 빌어서 말할 정도로 비겁한 손녀들은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항상 웃으셔서 몰랐다. 할아버지의 화난 얼굴은 맨눈으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다. 원래 허허 웃던 사람이 더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발톱으로 바닥만 파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이 나를 지나쳐 산도르아에게 닿았을 때였다. 가만히 있을 줄 알았던 그 아이가 입술을 열었다.

“내 잘못 아니에요.”

어머니의 숨소리와 할아버지의 눈빛이 산도르아에게 몰렸다. 할아버지는 눈썹 끝을 올렸다.

“그럼 이야라의 잘못이니?”

“네.”

저 못된 계집애가 진짜. 나는 뒤에 엎어져 있는 그 아이를 흘겨보았다.

“저도 잘못 없는데요.”

할아버지는 말씀이 없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의 에드리트는 침대에 철퍼덕 앉으며 눈을 감았다. 그 후 침묵의 빈틈을 파고든 건 어머니였다.

“사내애들도 아니고…….”

어머니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끝나자 더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녀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저들끼리 눈치만 보고, 할아버지는 변명이 계속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산도르아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고, 나는 발톱으로 땅굴을 팠다.

“잘못한 사람이 없다면, 잘못한 사람을 가려내야지.”

할아버지답지 않게 비장한 목소리였다. 할아버지는 서느렇게 말씀하시고는 나와 산도르아의 사이로 걸어왔다. 내 한쪽 팔을 잡고, 산도르아의 한쪽 팔을 잡았다.

“아버님.”

어머니가 말리려고 했으나 할아버지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침실 밖으로 끌고 갔다. 따라오거나 나서서 막아주는 이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그만큼 단호했다.

“너희 둘은 서부의 앞날을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다. 싸울 수도 있고, 서로 때릴 수도 있어.”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끌려가면서도 서로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싸늘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고 말하는 자는 내 가문에 둘 수 없다. 잘못을 모르기에 반성이 없고, 반성이 없으면 인정이 없어. 인정이 없는 자들은 가문을 불 속으로 끌고 감에 주저함이 없지.”

할아버지가 우리 둘을 데리고 가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 둘도 할아버지가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따라갔다. 사실 끌려갔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지만, 무서움과 후회가 섞인 얼굴을 하면서도 우리는 잘못했다거나 죄송하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게 할아버지를 더 화나게 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의 주위로 초록빛이 피어올랐다. 바람은 우리의 다친 상처를 쓸어 만지고, 알아들은 것처럼 발을 받쳐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걸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초록색 빛이 나의 발에 깔리고, 산도르아의 발에 깔렸다. 우리는 천천히 그것을 밟으며 하늘을 걸었다.

할아버지가 이끄는 초록빛은 우리를 벽의 너머로 안내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감탄했다. 하늘이 들판을 갈아서 만든 듯한 초록의 빛은 내가 벽을 넘게 해줬다. 밤하늘이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별 박힌 하늘이 손만 뻗으면 닿을 천장 같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까지 보고 싶은 광경이었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곧 보였다. 작은 오두막이었다. 온통 사방에 작은 벽이 쳐져 있고, 그 둥그런 양지에는 오두막 한 채가 외따로이 있었다. 출구는 없어 보였다. 벽을 기어오르지 않는 이상 불가했다.

그 중앙에 우리가 놓였다. 오두막 한 채가 달랑 있고, 사위는 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아마 성 외곽에 따로 둔 곳인 것 같았다. 푸르른 들판에 주저앉은 우리는 할아버지만 올려다보았다.

“둘 다 잘못한 게 없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주저앉은 우리의 시선에 맞게 무릎을 굽히셨다.

“이야라. 산도르아. 한 사람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거나.”

“…….”

“먼저 빠져나오거나.”

할아버지의 마지막 기회였다. 잘못했다고 하지 않으면 여기에 두고 갈 심보였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산도르아의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주름이 깊어졌다.

“생각이 없구나.”

할아버지는 한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의 시선은 오두막을 향해있었다.

“웬만한 먹을 것이나 필요한 건 갖추어져 있을 게다.”

할아버지는 초록색의 빛을 다시 불러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할아버지의 발만 감쌌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 떠오르는 할아버지를 지켜만 봤다.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씩 사람을 보낸다고 했다. 그 말만 남겨두고 떠난 이곳에는 나와 산도르아의 불편한 공기만 남았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까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그 작은 점이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산도르아는 참 독한 계집애였다. 혀가 저절로 차였다.

“그래서.”

“네가 사과하든, 내가 여기서 나가든, 그 둘밖에 없을 거야.”

“대단하네. 평생 여기에 갇혀있겠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다니.”

산도르아의 눈은 팅팅 부어있었다. 입술은 피딱지가 앉았다. 내 몰골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서로를 매섭게 보다가 더 이상의 싸움은 손해라고 판단했다. 밤이 오자 날이 쌀쌀했다. 서로 말 한마디 않고 비틀비틀 걸어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마침 침대는 두 개였다. 오른편에 하나 왼편에 하나. 나는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걸어가 누웠다. 머뭇거리던 산도르아는 오른편 침대에 누웠다. 우리는 등을 돌리고 누워서 앓는 소리를 냈다.

이 빠지는 거 아니야.

살짝 흔들리는 어금니를 느끼고 결심했다. 내가 먼저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 공금 by Jira

* * *

오두막 천창을 열어보니 각종 잼이나 빵이 종류별로 있었다. 그 외에 채소나 과일 같은 것들도 용케 상하지 않고 올려져 있었다. 비를 맞아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이것도 이상한 짓을 해둔 게 분명했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포도잼을 빵에 발라서 먹었다. 오른편에 침상은 이미 비어 있었다. 산도르아는 벌써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열어진 창문으로도 다 보였다. 바깥에서 그 아이가 헛짓거리하는 게.

딱 보아도 짚고서 올라갈 곳이 없는 반들반들한 벽이었다. 남의 집 담벼락을 쟤가 넘어가 봤어야 알지. 저렇게 기름칠한 것처럼 반들반들한 벽은 아무런 도구 없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조금 뾰족하고 단단한 게 필요했다.

우리 둘 다 사과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이제 남은 것은 결국 서로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막다른 데에 몰려, 서로의 무릎을 꿇리기 위해 덤비는 것이다. 처음에는 산도르아에게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저 아이의 독기 품은 눈을 봐라. 마치 내가 지 인생에 나타난 오점인 것처럼 째려보는데, 과연 여기서 내가 한 잘못이 무엇이란 말인가.

빵을 열두 번 더 씹어보아도 내 잘못이 아니란 결론만 나왔다.

동정하지 말라고? 그럼 불쌍하게 다니질 말든가.

나는 남은 빵을 마저 입에 털어 넣고 밖으로 나갔다. 기를 써서 올라가도 주욱 미끄러져 내려오는 산도르아가 보였다. 나나 쟤나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잠옷 신세였다. 허벅다리까지 말려 올라간 저 아이의 잠옷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나는 오두막 주위를 계속 돌아다니면서 뾰족한 돌을 찾았다. 그걸 벽에 박고서 올라가려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내 돌을 빤히 보는 산도르아였다. 나는 코웃음 치며 돌을 흔들었다.

“역시 배워두면 쓸데없는 일은 없어. 그치?”

남의 집 담을 넘어봤어야 이 맛을 알지. 그걸 자랑이라고 한 나는 벽에 힘껏 돌을 박았다. 그러면 흠집이라도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벽은 매끈했다. 벽 또한 돌처럼 단단하기만 할 뿐, 대단한 광물로 지어진 게 아니지 않은가. 얘도 돌이고 쟤도 돌인데 흠집 하나 나지 않다니.

“너.”

그때 내 꼴을 보던 산도르아가 비웃듯 말했다.

“벽이랑 대화한다더니 일단 찍어버리고 보는구나. 네 벽이 아프다고 하지는 않니?”

“네 속바지나 내려.”

“내 속바지는 내가 알아서 해.”

싸우는 거 반. 벽에 풀을 발라봤다가 풀을 엮어봤다가 돌을 던졌다가 긁어도 보았다가 하는 거 반. 우리는 해가 지기도 전에 나가떨어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와중에 입은 살아서 맥 빠진 얼굴로 서로를 할퀴었다.

네 멍이 크니, 내 멍이 크니. 네가 사과하라느니, 내가 사과하라느니. 서로의 굴복을 앉아서 받아내고 싶은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낸다는 사람은 지쳐버린 우리가 입마저 닫아버렸을 때 방문했다. 푸른 들판에 앉아 별이 촘촘히 달린 밤하늘만 늘어져라 보고 있을 때였다. 위에서 빛의 도움을 받으며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에드리트?”

“쉿!”

에드리트는 반가워하는 산도르아의 부름을 묵살했다.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쉬쉬 한다. 나는 다른 것보다 에드리트의 품 안에 든 바구니가 신경 쓰였다. 맛있는 냄새가 여기까지 솔솔 풍기는 바구니였다.

“두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사과하면 돼.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 거야?”

“긴소리 말고.”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에드리트에게 재빠르게 손짓을 했다.

“가져온 것부터 보여 봐.”

에드리트는 질렸다는 얼굴로 내 앞에 바구니를 던졌다. 나는 재빨리 바구니를 덮은 손수건을 치우고 눈앞에 보이는 햄부터 꺼내 들었다. 포크고 나발이고 필요 없었다. 맨손으로 햄을 잡고 뜯으니 이제야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리트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너희한테 딱 하나만 물어오라고 하셨어. 잘못했다고 할 생각이 있는지.”

“없어.”

산도르아는 단숨에 대답했고, 나는 게걸스럽게 햄을 뜯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드리트는 골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쌌다.

“미치겠네.”

“할 말 끝났으면 가도 좋아.”

에드리트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나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에드리트는 삐친 얼굴로 하늘로 올라가려다가,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내려왔다. 이제 보니까 쟤도 할아버지처럼 하늘을 날 수가 있었다.

“그런 거였구나!”

지친 산도르아와 식사 중인 나는 에드리트의 환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에드리트는 기쁜 표정으로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기회에, 아주, 두 가지를 다 이루시려는 모양이야.”

나와 산도르아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안달하는 건 에드리트였다.

“생각해 봐. 고작 너희들 다툼에 왜 이렇게까지 하시겠어!”

나는 햄을 끝장내자마자 바구니를 뒤적였다. 에드리트는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바구니를 빼냈다.

“그만 먹고 말 좀 들어 봐.”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에드?”

에드리트의 호들갑에 드디어 반응해주는 이가 나타났다. 에드리트는 신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싹싹 비볐다.

“그러니까. 여기가 원래는 굉장히 교육적인 공간이란 말이지.”

에드리트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였다. 내가 들은 것 중 쓸모 있는 것만 뽑아서 요약하자면 그랬다. 할아버지나 에드리트가 날기 위해 빛을 불렀던 것처럼, 여기는 일종의 빛을 불러내기 위한 훈련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원래 가문마다 이런 곳이 하나씩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가 거기인 것 같다고.

“그래서 벽을 넘어오라고 하신 거야. 둘 중의 빛을 먼저 깨우친 사람이.”

에드리트는 극적인 효과라도 내듯 손가락을 튕겼다.

“승자가 되는 거지.”

승자. 그 말을 들은 나와 산도르아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지만 눈에서 황당함과 두려움, 그리고 미약한 경쟁심을 읽었다. 문제는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는 거고, 산도르아 또한 별로 아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거였다.

“어차피 이번 겨울에 학원을 가잖아. 그 전에 깨우치도록 하게 하실 모양이야. 어때? 내 추리가. 완벽하지 않아?”

에드리트의 잘난 척은 끊이질 않았다. 나와 산도르아는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빠져나오라는 게, 무식하게 기어오르지 말고 무언가를 배워서 올라오라는 건데.

나는 옆에 있던 돌을 발로 찼다. 하루 종일 멍 들고 쑤신 몸으로 개고생했던 게 떠올랐다.

에드리트가 내일은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했다. 우리의 희망이 초라하게 줄어들었다. 오늘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들른 거라던 에드리트가 떠나고, 우리의 사이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평화가 찾아왔다. 입을 다물고, 하릴없이 밤하늘을 봤다.

다행스럽게도 밤하늘은 예뻤다.

* * *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온 오두막을 뒤졌다. 뭐 하나라도 단서가 나올까 싶어서였다. 한 손에 빵을 들고 집안을 계속해서 뒤적거리자, 보다 못한 산도르아가 한마디 했다.

“정신 사나워. 그리고 이런 데에 단서를 두셨을 리가 없잖아.”

산도르아는 잼 바르던 나이프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쟤도 몸은 쑤시지, 잠은 못 잤지, 나처럼 예민하긴 예민할 것이다. 그래도 나보다 팔은 덜 아프겠다. 나는 어제 하루 종일 못질하듯이 벽을 돌로 찍은 탓에 왼팔이 못쓰게 됐다. 무식해서 벌어진 일이니 어쩌겠는가. 나는 허리를 두드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야라.”

먼지를 뒤집어쓴 나를 본 산도르아가 곧게 앞을 응시했다.

“너도 사과할 생각은 없는 거지.”

“어.”

산도르아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산도르아는 침대를 빠져나와, 내 앞에 서서 말했다.

“훈련이든, 단서든. 나는 너보다 빛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이 있어.”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줄게.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해.”

솔깃한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이 불안하던 참이었다. 내가 불신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산도르아는 고개를 숙였다.

“대신 어제 에드리트의 말대로 이건 경쟁이야.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그래서.”

“지는 사람은 이긴 사람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기로.”

무엇보다 재수 없는 것은 너에게 질 리가 없다는 산도르아의 확신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산도르아의 가녀린 손목을 잡았다.

“나중에 딴말하기만 해.”

“그럴 리가.”

경쟁의 불에 몸을 던진 우리는 첫날보다 의욕적으로 바깥에 나갔다. 모든 걸 다 알려준다던 산도르아는 물소처럼 걸어가 들판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처럼 하라는 듯이 쳐다본다. 미심쩍지만 나도 따라서 앉았다.

“너도 겨울에 학원을 가게 될 거야.”

“학원?”

“이드리하임이라는 곳인데. 수도인 셉시스 하늘에 떠 있는 학교야. 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별별 것이 다 있다고 들었어. 매일 책으로만 보아서 거기에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거든.”

“좋아 보이네.”

“일단. 이드리하임에서는 빛을 다루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해. 그걸 모르는 학생은 없으니까. 나도 이번 여름부터 할아버지께 배우기로 되었었는데. 네가 나타나서 일정이 앞당겨진 거야.”

산도르아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산도르아의 차분하면서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왠지 지는 것 같아서.

“여하튼 그래. 그래서 나도 많은 걸 알지 못한다는 소리였어. 그래도 책으로 읽어서 안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산도르아는 말하다가 말고 아무렇게 자라나 있는 풀의 끄트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으로 향했다.

“이런 하잘것없는 풀에도 빛이 깃들어 있다고 했어.”

“풀?”

“그래서 그 빛을 느끼면 된다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개소리에 머리가 차가워졌지만 나는 인내심을 길렀다.

“그리고.”

“끝이야.”

“뭐?”

뭐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하나 했더니 고작 그거였다. 나는 기가 차서 산도르아의 손을 풀에서 툭 밀어냈다.

“그게 뭐야. 그럼 하루 종일 이 풀만 만지작거리고 있자고?”

“하기 싫어?”

“다른 방법은 없어?”

“맹세했잖아. 있으면 나도 너한테 알려줬겠지.”

또 언성이 높아지는 느낌에 우리는 서로 딴 곳을 쳐다봤다. 어젯밤에 또 하나 약속한 게 있었다. 우리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되도록 언성 높이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자고. 아주 잠시간의 휴전이었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풀을 뜯어서 요리조리 바라봤다. 산도르아는 말없이 풀들을 강아지 만지듯 쓰다듬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 명은 풀을 왕창 뽑아다가 눈에 들이밀고 있고, 한 명은 멍한 시선으로 풀을 쓰다듬는다. 쨍쨍한 햇볕 아래서, 주위에 아무도 없이. 우리 둘이 그러고 앉아 있는 꼴을 생각하자 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산도르아의 표정이 너무 웃겼다. 입은 살짝 벌리고 눈은 감고. 뭐 대단한 보물이라도 만지듯이 풀을 조심조심 쓰다듬는데, 옆에 있는 나나 얘나 어디 아픈 사람들 같았다.

“흐.”

결국, 터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배를 잡고 뒤로 누웠다. 참아야 한다고 다짐할수록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옆에서 있던 산도르아도 나를 괴상하게 보더니, 내가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걸 보고서 따라 웃었다. 얘도 웃음을 참으려고 했나 보다. 얼굴이 이상하게 구겨지고, 입술만 씰룩거렸다.

산도르아는 입술을 틀어막으며 끅끅거리고, 나는 풀밭을 나뒹굴며 웃었다. 둘 다 눈에 하나씩 푸른 멍을 달고서 그러고 있기를 한참, 할아버지가 보낸 하녀가 그런 우리 둘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떠났다.

여전히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앙금은 이미 사라졌고, 우리 둘에게 남겨진 것은 숙제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였다. 우리 둘이 해결하고, 또 경쟁해야 할 숙제. 처음처럼 곤혹스럽지만은 않았다. 반드시 해결하고자 하는, 일종의 바람만이 남았다.

* * *

하루에 한 번 목욕을 하는 게 습관이 들었다. 우리 둘은 오두막 근처에 작은 호숫가에서 몸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나뭇가지 위에는 우리의 잠옷이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서로의 알몸을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등은 가렵지만 다정하게 닦아줄 사이는 아닌지라.

구석구석 꼼꼼히 씻지는 못했다. 아직 몸 상태가 별로였다. 저번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등을 긁으려고 했다가 근육이 조여지는 고통을 얻었다. 저쪽도 사정은 다르지 않은지 씻는 내내 앓는 소리를 냈다.

등을 못 건드리니 씻어도 씻은 것 같지 않았다. 빠르게 호숫가에서 빠져나와 물기를 닦았다. 그런데 하필 잠옷을 걸어둔 곳이 산도르아의 근처였다. 벗자마자 대충 나무 위에 던진 결과였다. 나는 민망함을 무릎 쓰고 산도르아를 불렀다.

“나 저것 좀 던져 줘.”

산도르아는 내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었다. 내 잠옷이 잡히자마자 손만 뒤로 돌려 마구 흔든다. 나는 한숨을 쉬며 산도르아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성질 급한 산도르아가 그사이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뭐 해. 빨리 가져…….”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던 산도르아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눈이 보름달처럼 동그래졌다. 내 벗은 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잠옷을 휙 가져가며 물었다.

“왜.”

산도르아의 시선이 내 배꼽 근처로 가 있었다. 거기에 난 화상 자국을 본 것이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옛날에 다친 거야. 네가 한 거 아니야.”

“당연하지. 불 때문에 난 상처 같은데.”

역시 곱게 자란 아가씨라서 그런지 흉한 상처는 처음 본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 몸을 처음 씻겨주던 하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는 얼른 잠옷을 입었다. 산도르아의 눈은 그럼에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먼저 호숫가를 빠져나갔다. 잠깐 멍을 때리고 있던 산도르아도 곧이어 호숫가를 나왔다. 그래도 씻은 게 씻은 거라고 간지럽던 몸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젖은 머리를 불어오는 바람에 말리며 걷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소심한 발이 자꾸만 걷다가 말다가 했다.

“왜 그래.”

내 지적에 산도르아가 눈치를 봤다.

“뭐가.”

오늘도 우리는 허탕을 쳤다. 풀을 자르고 찧고 별 난리를 쳐도 우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결국 해가 질 때 즈음이 돼서야 씻을 필요성을 느꼈고, 이제 지친 우리의 입에 뭐가 좀 들어가야 할 시각이 된 것이다. 배가 고파진 나는 쭈뼛거리는 산도르아를 두고 먼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먹고 나간 잼과 빵이 그대로 있었다. 급하게 식탁에 자리하고 앉아 빵에 잼을 발라 먹었다. 나를 따라서 들어온 산도르아는 조심스레 오두막의 문을 닫고서 살금살금 옆으로 왔다. 조용히 의자를 빼내어 앉는다. 나는 남은 빵을 그 앞으로 밀었다.

“고마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삼켰다. 산도르아는 나를 힐끔 보다가 제 몫의 빵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우리 둘 다 퍽퍽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하도 말이 없기에 내가 먼저 말을 텄다.

“우리 뭔가 방법이 잘못된 건가. 풀이 아니라 다른 것일 수도 있잖아.”

“글쎄. 일단 서적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어. 어디서든 느낄 수 있다고. 풀은 예시일 뿐이야. 그처럼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빛이 깃들어 있다는.”

“머리 아파.”

“어렵지.”

그래서 제 나이에 학원을 못 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걸 깨우치지 못하면 아예 받아주지를 않는단다. 위테르발도 가문에서는 이제껏 제 나이에 입학하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제아무리 망나니라도 금방 깨우쳐, 학원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 다 못 가면.”

“역사를 새로 쓰는 거지.”

우울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우리는 그만 잠자리에 들었다. 이대로 이 벽 안에 갇혀, 썩어빠진 잠옷만 입고 있는 우리를 상상해보았다.

됐다, 잠이나 자자.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데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아직 잠들지 못한 모양이다.

“저기.”

구불거리는 금발을 늘어뜨린 산도르아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마주 보며 누워서 대답했다.

“왜.”

산도르아는 붉은 입술을 앞니로 물었다가 놓았다. 물어보기 힘든 질문이었나 보다.

“바깥에서 입은 상처야?”

역시 물어볼 줄 알았다. 왜 내 상처를 자신이 신경 쓰는지 모르겠지만, 호기심 많은 아가씨가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

“어쩌다가.”

어째서 꼬치꼬치 캐묻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그걸 묻는 거야.”

“그냥.”

여전히 솔직하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냥. 거기서는 도둑질하다가 걸리면 팔이 잘리는데 불로 지져진 거야, 뭐. 오히려 다행인 편에 속하지.”

처음 도둑질을 배웠을 때였다. 당시 나는 일곱이었고, 몸을 팔 준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둑질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처음부터 행인의 뒷주머니를 털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소매치기를 막 배운 아이들에게는 식료품을 훔쳐 오라고 지시한다. 하필 고른 상대가 불에 달구어진 꼬챙이를 들고 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식료품을 훔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가 나를 때려눕힌 다음 배를 지졌다.

벽이 둘러싸인 곳이 아닌, 그 바깥을 외벽이라고 부른다. 이유 모를 병에 걸려 버려진 사람들, 고아, 도망자, 탈영병, 사연 있는 모두가 그곳으로 모였다. 나는 그런 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앞니가 썩은 할아버지에게 몸을 팔지도 않았고, 구걸하면서 빌어먹지도 않았다. 어쨌건 내 힘으로 살아남은 셈이었다.

내 짤막한 이야기를 들은 산도르아는 몹시 충격을 먹은 듯 했다. 산도르아는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서글프게 물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네가 먹고 자고 누린 것, 네가 배운 모든 것, 네가 받고 자란 사랑, 다 내 것이었어야 했는데 왜 내놓으라며 떼를 쓰지 않느냐고. 산도르아가 말하는 원망이란 그런 것이었다.

“원망하지 않아.”

산도르아는 나를 봤을 때부터 모든 걸 내어줄 준비를 마친 표정이었다. 자신은 끝이 났다고 여긴 얼굴이었다. 만약 산도르아가 표독스럽게 나를 괴롭혔다면 모르겠다. 제발 빼앗아가지 말라며 빌었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조금은 속이 뒤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산도르아는 포기하는 얼굴로 성을 배회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끝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미 끝을 봤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 원망보다 동질감을 느꼈다. 내 것이라고 받은 것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을 때, 나도 그 아이와 같은 표정을 했다. 그래서 죽일 듯이 밉진 않았다. 뺨을 후려갈길 때는 미웠지만.

“내일 내가 할아버지한테 말할게.”

“뭐?”

“내가 사과한다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산도르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저런 심정이 뭔지 알고 있다. 나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쳐, 자기 혼자 연민의 동굴에 몸을 말려고 하는 것이다.

“싫어.”

이번에는 산도르아가 몸을 일으켰다.

“우리 둘이 아무리 머리 맞대고 있어봤자 되지도 않아. 감도 안 잡히는 걸 계속해봤자 뭐해.”

“그러면 넌 가.”

“뭐?”

“난 힘든 것보다 창피한 게 더 싫어. 이러고 벽 안에 갇혀있다가 어쩔 수 없이 사과한 것 같잖아.”

산도르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식의 사과는 받지 않아. 널 제대로 무릎 꿇릴 거야.”

“뭐라고?”

“입 안에 난 상처 때문에 빵도 제대로 못 먹는데. 넌 그냥 말로 퉁치려고?”

나는 일부러 비웃듯이 웃으며 베개를 벴다.

“너 질까 봐 그러냐?”

아까까지만 해도 고분고분하던 눈이 바뀌었다. 산도르아는 입술을 물고 이불을 덮었다. 도로 누워, 내게서 등을 돌렸다.

“방금 그 말 없었던 걸로 할게.”

“그러시던지.”

산도르아는 일부러 코 고는 소리를 냈다. 뻔히 보이는 수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눈을 감고 조금 더 침대에 몸을 묻었다. 어쩐지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말을 거는 것 같은, 그런 서늘한 밤이었다.

* * *

“안녕?”

산도르아가 미쳤다. 내가 건 도발에 열심히 하리라 생각했지만 돌아버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산도르아는 내가 차려놓은 아침도 마다하고서 나가 들판에 엎드렸다. 나는 빵을 씹으며 그 꼴을 지켜보다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넌 참 색이 예쁘다.”

엊그제 신나서 뽑던 풀에다 대고 말을 건다. 색도 거기서 거기인 풀을 아주 사랑스럽다는 것처럼 어루만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배꼽을 잡았으나 저쪽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그러든, 말든 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이 미친 짓에 합류해야 할까 말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빛의 의미를 먼저 떠올리고자 했다. 저번에 봤던 그 초록빛이 허접한 풀에도 들어가 있다고 하니, 이번에는 엎드려서 뽑지 않고 관찰했다.

산도르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한 놈만 잡고서 매달렸다. 나는 배를 깔고 누워 가만히 풀을 바라봤다. 옆에 있는 놈이나 이놈이나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놈은 잎이 세 개고 이놈은 잎이 네 개였다.

“덜 먹었나.”

잎이 세 개인 놈을 무심결에 손톱으로 밀쳤다. 살랑살랑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풀이 간지럼을 타는 것 같았다. 하도 풀만 들여다봐서 미쳤나 보다. 나는 간지럼을 태운다는 생각을 하고 풀을 건드려보았다.

지루하고 심심해서 그랬다. 다섯 살배기가 생각할 법한 생각이지만, 바람은 나를 재워주기 위한 자장가, 풀잎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나다니는 무당벌레를 잡아다가 이파리 위에 올려두면서 놀았다.

뜨거운 해가 구름에 가려지고, 우리의 땀도 조금은 식었다. 빨갛게 익은 산도르아는 여전히 하나의 풀만 가지고 놀았다. 어느덧 나도 푹 빠져, 작은 벌레를 관찰하거나 손톱으로 풀을 치면서 놀았다.

똑같이 생긴 풀은 없었다. 조금 더 옅은 청록색, 진한 청록색. 잎의 모양이 어떤 것은 뾰족하고, 어떤 것은 둥글었다. 그 차이를 안 순간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풀에게 세 개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잎이 세 개여서 얘는 세 개였다.

세 개에게 나도 가끔 이 말 저 말을 했다. 네 가족은 어디에 있는지, 뿔뿔이 흩어졌는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에 불과한지. 내가 계속 말을 걸자 풀은 대답하듯 바람에 제 잎을 흔들어 보였다. 마치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앞에서 졸다가,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가, 다시 눈을 떴다. 두 번째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밤하늘 아래였다. 바람이 이불이 되어 우리를 덮어주고 있었다. 산도르아 또한 내 옆에 누워서 잠을 잤다. 풀물이 든 손을 한 채였다.

그때 바람이 산도르아의 입에 들어간 머리칼을 빼주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무형의 바람이 아니라, 손 모양 같은 것이었다. 신기한 광경에 발가락이 굽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내 손가락을 잡았다.

풀이 나의 손가락을 감고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우연 같지가 않았다. 그 풀이 감싼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흔들자, 풀이 조금 더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해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나는 비로소 이곳을 제대로 보았다.

인기척 없는 까만 밤하늘 아래, 나와 산도르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이곳. 회색의 벽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고, 짙푸른 풀들은 바람의 이동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가 폈다. 그리고 그 위에 수십만 개의 빛이 있었다. 세어 볼 수 없이 가득 찬 빛은 옅은 노랑이었다가 짙은 파랑이었다가 다시 연초록으로 바뀌었다. 조용히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손가락에 앉았다. 무엇을 원하니,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초목이 간직한 빛을 하늘로 띄워 올리고 있었다. 나무는 수천의 빛을 품었다. 호수는 물결마다 빛을 지녔고, 토지는 은은한 붉은 빛으로 빛났다. 모든 것은 생명을 지녔다. 그들은 우리에게 빛을 뽐내고 있었다.

“산도르아, 일어나 봐.”

산도르아는 내 목소리를 듣고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산도르아의 뺨에 작은 빛이 앉았다. 산도르아의 풀이 보낸 빛이었다. 산도르아는 간지러워하며 웃다가 드디어 눈을 떴다.

“와.”

산도르아의 구불거리는 금발을 바람이 쓸었다. 우리의 몸에서도 빛이 나지 않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밤하늘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이곳에 정착한 것 같았다. 우리는 별무리 같은 빛들의 한가운데서 웃었다. 빛들은 자신들을 구경하는 게 좋은지 우리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아름답다.”

산도르아가 나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옮았다. 빛을 손바닥 위에 올리며 놀다가 서로의 손끝이 닿았을 때, 우리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겁이 나 산도르아의 손을 맞잡았다.

빛이 모이고 모여 우리 발밑에 고였을 때가 돼서야 이것이 계단임을 알았다. 빛들은 이따금 우리의 발목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며 벽으로 이어진 수만 개의 빛을 밟았다. 밟고서 올라가 균형을 잡으며 걸었다. 서로의 손은 상대를 이끌어주는 밧줄이 되었다.

빛의 계단은 벽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오두막을 뒤로 한 채 우리는 그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아름다운 빛들은 우리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축제를 벌이듯 밤하늘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자기들끼리 춤을 추고 몸을 흔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몸짓에 나도 산도르아도 마음껏 웃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빛이 있었다. 그 밤, 우리는 겨우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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