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4)

01. 벽 안의 가족

나의 처형을 기리듯 비가 내렸다. 곧 도끼가 팔뚝 위로 내리쳐질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외벽에서 자란 아이라면 한 번쯤 겪게 될 일이라고들 했다. 어른들은 ‘그때부터 외벽 인생이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라며 으스댔다. 이것을 통과 의례, 어른의 훈장, 진정한 의식 등 내키는 것으로 불렀다. 소매치기 처형치고는 근사한 이름들이었다.

“과묵한 편인가 봐요.”

입술을 뗀 순간 마차가 흔들렸다. 마부는 별일 아니라며, 돌부리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편히 기대앉은 귀부인이 웃었다. 그쯤은 너그러이 봐주겠다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귀부인은 대화의 목줄을 잡고서 흔들었다. 마차에 깔린 침묵을 기피하는 듯 했다.

“당신의 이름부터 시작할까요.”

소매치기의 이름은 써먹을 데도 없었다. 보기보다 마음씨 여린 귀부인인가. 보통의 윗분들은 팔만 썰어가거나 썰었다는 기억마저 잊고는 했다.

“이야라입니다.”

귀부인의 표정은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에는 듯한 슬픔 같기도, 경멸 없는 웃음 같기도 했다. 그녀는 물고 있던 찻잔을 허벅지 위에 내려두었다.

“독특하네요. 보통 돔에서는 쓰지 않는 이름인데.”

귀부인은 심심풀이 삼아 건드린다는 듯 물었다.

“누가 지어주었나요?”

나는 그녀의 흰 피부와 살집 있는 몸, 흥미에 걸쳐진 표정을 살폈다. 내가 훔친 물건은 안중에 없어 보였다. 팔을 썰어보자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선해주러 온 귀족 취급을 할 순 없었다. 외벽에서 버틴 햇수가 십 년이었다. 훔친 물건이 나를 붙잡을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면 따로 원하는 게 있을 터였다.

“부인. 정보라도 원하시나요?”

“정보요?”

부인의 얼굴에 변화가 일었다. 동정은 가시고 흥미가 살아났다. 곱게 자라나 그쪽으론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정보도 파는가 봐요.”

“부인께서 바라신다면요.”

운이 진창에 빠진 하루였다. 날벌레가 스튜에 알을 까질 않나, 기껏 빨랫줄에 널어둔 속옷은 비를 맞았고, 코 파듯 하던 소매치기는 덜미를 잡혔다. 하필 지지리 재수도 없이 상위 귀족인 바예레카의 귀부인에게 잡힐 게 무언가. 무슨 사정으로 바예레카의 사람이 뒷골목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팔 하나만 썰리면 감지덕지였다. 수틀리면 양다리도 썰겠다고 덤벼들지 모르겠다.

귀부인의 흥미는 갈수록 식어가는 게 보였다. 그녀는 다시 입술에 찻잔을 물고 예리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대놓고 악쓰는 부류보다 성가신 성격일 수 있었다. 사람을 심리적으로 몰아세우는 고문을 즐긴다든가, 희게 질리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쾌락을 느끼는 부류라든가.

“부인.”

그렇다면 협상보다 애원이 먹힐 법했다.

“자를 거라면 오른팔을 잘라주세요.”

귀부인은 양미간을 흉하게 찡그렸다. 어째 말하는 족족 예상을 비껴가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침묵은 퍼부어지는 빗소리를 부각시켰다. 나의 처지는 마차에 부딪히는 빗방울 같았다. 원치 않은 곳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 버릴 터였다. 그러나 차이는 있었다. 비는 감정이 없고, 나는 입을 벌린 두려움에 굴복하리라.

“왜 오른팔이죠? 보통 왼팔을 잘라 달라고 하지 않나요?”

다행히 부인의 얼굴은 오뉴월 봄볕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에 능한 여인이었다.

“팔이 다 똑같은 팔인데 왼팔 오른팔 할 게 있겠어요. 그래도 오른팔이 없으면 뒷골목에서는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덜 부려먹을 거고, 구걸하기에도 그편이 불쌍해 보일 테니까요.”

어차피 외벽에는 외팔이, 외눈박이가 즐비하다 못해 시시했다. 윗분한테 잘못 걸려서 삶이 두 동강 난 사람쯤이야 발길에 챌 듯 흔한 것 아니겠나.

내게도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예감은 늘 있었다. 그것이 어제든 오늘이든,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할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그래도 팔 하나 잘리면 더는 도둑질을 시키지 않을 테고, 외팔이는 구걸이 낫겠다며 처박아 둘 터였다.

“이야라.”

이 귀부인의 손아귀에서 살아나간다면 말이다.

“나는.”

귀부인은 허벅다리에 올려두었던 찻잔을 발밑으로 치워두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본격적으로 대화에 임하는 자세였다.

“당신의 팔을 자르지 않아요.”

‘그러면 고문하시게요?’ 그 말이 혀 밑까지 차올랐지만, 다행히 뱉지는 않았다. 나도 위인지 아래인지 구분할 만한 눈치는 있었다. 이 귀부인은 독특했다. 어쩌면 색다른 놀이가 하고픈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놀이인지를 파악하지 못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귀부인은 쌍수 들고 반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내 질문에 답해줄래요?”

소박한 바람은 그것뿐이라는 듯했다. 감히 반항할쏘냐. 저 밑바닥 하룻강아지가 꼬리가 흔드는 것 말고 무얼 할 수 있겠나. 나는 며칠간 씻지 못한 목만 긁었다.

“예.”

귀부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다리 한쪽을 꼬았다.

“부모님이 있나요?”

“아니요.”

“왜요?”

남들 다 있는 거 왜 없겠습니까. 시큼 떨떨한 세상 맛보기도 전에 뒈졌으니까 없겠지. 하지만 내 목숨을 주무를 수 있는 사람 앞이었다. 나는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아버지는 뭐 하는 놈인지 모르고, 어머니는 기억은 안 나지만…… 쿠키 같은 걸 구워주셨던 기억밖에는.”

나는 네 살 때부터 외벽 뒷골목에서 자랐다. 가족에 관한 기억은 어렴풋했다. 곱씹고 추억할 만큼 가짓수가 많지도 않았다. 거미줄 쳐진 테이블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린 나. 군침 돌 정도로 단내 나는 쿠키를 굽고 있던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테니까 얌전히 앉아 있으라며, 희끄무레한 여인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때마다 루펜은 이렇게 말했었다. 고아원마저 거부해 뒷골목에 온 너희라고. 다들 마땅한 보호자가 없으니 네다섯 무렵부터 거기서 도둑질을 배운 게 아니겠나.

“어머니의 성함이 혹시 시나인가요?”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귀부인은 진열장 유리 속 인형 같았다. 드레스를 차려입고 나란히 앉아 행인들을 구경하는 인형. 유리알 눈은 일정하고 머리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귀부인은 시종일관 상냥한 말씨를 쓰는데 내가 저러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겠다. 검정 물 묻은 얼굴에 머리칼은 두건으로 묶어둔 지가 보름이었다. 윗도리도 해어져 팔 부분은 쥐 파먹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태생부터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귀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바예르의 내성에 살았을 것이고,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독한 외벽인생인 것을 보면, 각자 타고난 장소라는 것이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 아니겠나.

“이야라.”

“네.”

“글은 읽을 줄 아나요?”

“조금요.”

귀부인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환해졌다. 그녀는 가져온 가죽 가방 속에서 책을 꺼냈다. 내 손바닥도 안 되는 크기의 책이었다.

“읽어볼래요?”

나는 귀부인의 손과 내 거뭇거뭇한 손을 번갈아보았다. 겉면이 검정색으로 물들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럽힐 것 같아요.”

“더럽혀도 좋아요.”

“왜요?”

“음?”

아버지라고 부르라던 루펜은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 돈을 가져오면 뺨을 후려갈겼다. 칼로 쑤셔버릴 거라며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흔히 내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어른이었다.

나는 나를 낯간지럽게 만드는 사람이 싫었다. 대개 그런 이들은 더 큰 어둠을 품고 살았다. 혀는 달고 눈은 차가운 사람들. 음습한 욕망으로 나를 짓누르려고 들었다. 차라리 때리고 윽박지르는 어른이 나았다.

“왜 내가 더럽혀도 괜찮은 건가요?”

어서 내 팔 따위를 자르면 좋겠다. 이곳이 불편했다. 내가 누릴 수 없는 삶을 엿보는 기분이라, 나의 처지가 밑바닥을 뚫고 내려간 애벌레라도 된 듯했다. 평생 이 마차 밑에서 기어야 할 애벌레 같았다.

귀부인은 잔혹하지 않았으나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 삶이 잔혹했다.

“이야라.”

“네.”

“눈이 참 아름답네요.”

형편없이 망가진 나를 두고 품평하는 것인가. 루펜이 가끔 눈알을 뽑아다가 경매에 올리겠다고 한 적은 있어도 아름답다니. 고개를 들기가 민망했다. 눈길을 둘 곳이 없어 창밖을 향했다. 나를 나무랄 줄 알았으나 귀부인은 말없이 찻잔을 꺼내 들었다.

옛날에 누군가 하늘이 울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오늘의 하늘은 슬픈 일이 쌓였나 보다. 눈물 콧물 짜면서 우는 하늘이 내 앞날을 예견해주는 것 같았다.

혹시 나를 아예 하녀로 쓸 요량인가. 남의 밑에서 허리 굽히기는 싫었다. 그것도 이런 천진난만한 귀부인의 수발을 들으며 살 생각은 없었다. 뒷골목은 자유가 있었다. 할당량만 채우면 그날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언제 팔이 잘려 내쳐질지 모르는 곳에서 하녀라니. 살얼음판 위에서 뜀박질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묵묵히 비를 가로지르던 마차가 멈췄다. 마부는 정중하게 마차를 두드렸다. 툭툭, 쏟아지는 빗줄기에 묻힐 뻔한 소리였다. 귀부인은 나를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도착했네요.”

그때 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웅장한 나팔 소리였다. 성벽을 타고 넘어와 땅을 울렸다. 커다란 문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맹세코 나는 벽인 줄 안 것이었다. 하늘을 우롱하듯 높이 올려진 성벽에, 목이 휘도록 올려다보아도 끝없는 문이었다. 회색빛의 문은 마차를 삼킬 듯이 입을 벌렸다. 마차는 닫히기 전에 그 안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신기하죠?”

빗줄기가 창문을 깰 듯이 달라붙었다. 나는 슬슬 입 안이 까끌거리기 시작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을 건드린 게 아니었다. 잘못되면 팔 한 짝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녀라도 시켜주면 넙죽 절해야 할 판이었다.

내 빙빙 돌아가는 머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귀부인은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요, 예레 하.”

내가 아무리 배운 것 없는 애지만 말이다. 예레카와 바예레카가 무슨 뜻인지는 안다.

“예?”

바예레카는 각 부의 둘밖에 없는 지위며 예레카는 그런 바예레카까지 통솔하는, 그야말로 왕의 바로 밑, 나라에 넷밖에 없는 지위였다.

웬만한 귀족입네 하는 이들도 골 아픈 와중에 예레카가 웬 말인가. 가는 길목만 막아도 썰려 나간다고 들었다. 네 고개가 부러져라 조아려야 할 위인들이라며, 만사 무서울 게 없는 루펜마저 알짱거리지 말라는 당부를 했으니. 목숨 귀한 줄 아는 이들은 금테 두른 마차를 전염병 보듯 했다.

한데 하필이면 바예레카의 문장을 달고 다니는, 맛이 가도 한참 간 귀부인에게 걸렸다. 내내 미심쩍더라만 머리가 고장 난 분이었다.

“내릴까요?”

그 말에 선택권이 있는지 되묻고 싶었다. 마차의 문을 연 마부는 비를 막아줄 로브를 건넸다. 하나가 아니고 두 개였다. 흑색 로브 끝에 금실이 수놓인 것이었다.

“덮으세요. 예레 하.”

설마 역할극 놀이 같은 건가. 나를 받들어 모셔야 할 취급을 한 다음, 이래저래 꾸미며 노는 부류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귀부인의 지시대로 머리 위에 로브를 덮어썼다. 역할극이든 뭐든 죽기보다 더하겠나.

“먼저 내리십시오.”

마부가 내게 손을 뻗었다. 껑충 뛰어내리면 될 것을, 구태여 늙은 할아버지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을까. 나는 뚱한 표정으로 주름 진 그의 손을 잡았다.

“예레 하.”

어느새 내린 귀부인이 내 옆에 섰다.

“같이 걸어도 될까요.”

그러고 보니 이 귀부인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존칭을 썼다. 하도 긴장을 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아니면 원래 귀족은 예의를 혓바닥에 바르고 사는 건가.

귀부인의 뾰족 구두가 물웅덩이를 밟았다. 퉁퉁 부은 나의 맨발도 뒤따라 그 웅덩이를 밟았다. 주변에 사람이라곤 하나 없었다. 마차만 덩그러니 이 초원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 왔다면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꽃 한 송이도 허락하지 않은 청록색의 들판이었다. 풀들의 높낮이가 일정한 것으로 보건대 날이면 날마다 꾸준히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들판 한가운데로 난 길에는 돌 부스럼조차 없었다. 외벽에서는 관리된 들판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먹을 만하면 뿌리째 뜯어가는 와중에 자라날 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길의 양옆으로는 횃불이 놓여있었다. 비가 내림에도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귀부인은 내가 마음껏 구경할 수 있도록 걸음을 늦추었다. 과분한 배려였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예레 하.”

이윽고 당도한 곳은 또 다른 벽이었다. 책을 엎어놓은 것 같이 생긴 벽에는 문이라고 할 게 없었다. 비를 받아먹는 높은 벽 앞. 나는 한 마리 개미에 불과했다.

“위테르발도 령으로, 서부의 예레카가 계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시구나’ 할 수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귀를 후볐다. 귀부인은 상관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 걸음 물러나시겠어요. 예레 하.”

이 가당찮은 놀이도 익숙해지는 찰나, 벽으로 보이던 것이 신음을 뱉었다. 돌끼리 부딪치면서 내는 굉음 같았다.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벽 중앙에 금이 갔다. 그 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두 걸음 물러났다.

금이 간 곳으로 흘러나온 빛이 손짓했다. 빛은 갈수록 커졌다. 벽을 삼키고, 커다란 문 하나를 토해냈다. 문은 양옆으로 열렸다. 그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단둘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만,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초조하면 다리를 떨었다. 내가 퍽 가여웠는지 귀부인은 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설명이 부족한 점을 용서하세요. 예레 하.”

“예.”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르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입에서 흙 맛이 났다. 빗물이 입 안으로 들이친 것인지, 손에 묻은 흙의 맛인지 모르겠다.

문은 양옆으로 찢어질 수 있을 만큼 찢어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왼편에 한 줄, 오른편에 한 줄, 일렬로 곧게 서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를 내가 지나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사내들의 손에 들린 것은 깃발이었으나 내 눈에는 그것이 창이나 검으로 보였다.

“예레 하.”

귀부인이 망설이는 나를 두고 먼저 발을 떼었다. 가운데로 당차게 걸어 나갔다. 여기에 가만히 서 있을 수도, 냅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온 참인데, 맨발인 내가 뛰어봤자 벼룩 아니겠나. 나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따라갔다.

먼 곳은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다. 양옆에 선 사내들은 꼿꼿이 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대놓고 쳐다보는데도 지적을 한다거나 뱃가죽을 갈라 죽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자세가 꼿꼿한 사내들을 구경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갈수록 지루해져 초조함은 덜했다. 벽 안쪽은 생각보다 길었다. 사내들도 끝이 없었다. 돔의 사내들을 전부 다 잡아다가 여기에 세워둔 것 같았다.

“아.”

발이 시릴 정도로 걸은 참이었다. 빛이 내 위로 쏟아졌다.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벽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귀부인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벽의 그늘 안에 서성이며 머물렀다.

주황색 불빛이었다. 불꽃을 유리잔에 옮겨 담아 엎어둔 것 같은 등불. 그것이 길게 세워둔 창끝에 달려있었다. 길의 양옆에는 불꽃이, 바닥에는 따스한 연노랑 빛이 올라왔다. 돌이 열을 품고 있는 듯했다. 비에 젖은 발이 후끈해지고 있었다.

오후인지 오전인지도 모르겠다. 비구름에 갇힌 하늘이 어두웠다. 저 먼 곳에 성이 하나 보였다. 지붕은 산을 깎은 듯 뾰족하며, 몸체는 팔을 벌리고 앉은 모양새였다. 끝까지 가면 저 성에 닿는 것일까.

나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벽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멈춘 것을 안 귀부인이 제자리에 섰다.

아니. 나 때문에 선 것이 아니었다.

귀부인의 앞에 세 명의 그림자가 져 있었다. 각기 다른 크기였다. 어른 두 명과 아이 하나였다. 귀부인은 마중 나온듯한 그림자 앞에 무릎을 굽혔다. 정체 모를 세 명은 고고하게 서 있었다. 바예레카의 문양을 단 귀부인을 꿇어 앉힐 수 있는 자. 이 벽 안에 사는 자들.

“예레 하.”

세 명의 그림자가 이쪽을 봤다. 대차게 망하고 말았다. 그전까지는 귀부인의 정신 나간 머리를 탓했으나, 이제는 닥쳐온 불행을 설렁설렁 넘긴 나를 탓해야 했다.

나갈까. 끓는 물에 삶아진 개구리가 될 지도 몰라.

그러나 퇴로는 없었다. 뒤에는 갑옷 입은 사내들이, 사방은 벽으로 둘러싸였다.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갈까. 아니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까. 둘 다 살아 나갈 가망은 적었다.

그때 장신의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백발의 늙은이였다. 뒤로 곱게 머리를 넘긴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나는 나를 때리려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목을 움츠려도, 내가 기다리던 고통은 소식이 없었다. 슬쩍 눈을 떠 보았다. 손을 날려야 할 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는 무릎을 굽힌 늙은이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다정하게 포장된 목소리였다. 낮고 중후했다.

“널 혼내려는 게 아니란다.”

그의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앞만 힐끔거렸다. 귀부인과 두 명의 그림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이름을 뱉었다.

“이야라요.”

“이야라.”

늙은이가 눈을 휘며 웃었다. 고생을 몰라 주름질 일이 없던 얼굴처럼 보였는데, 이 늙은이는 많이 웃고 산 모양이었다. 웃을 때마다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저쪽으로 가볼까. 이야라.”

아마 내 나이가 열여섯일 거다. 그건 루펜이 어금니를 걸고 보증했다. 그런데 늙은이는 눈이 침침한지 나를 예닐곱 아이처럼 대했다.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 안고 걸었다. 그의 손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걸음걸이 또한 절도 있고 묵직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끌고 가는데 망아지처럼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대책 없이 끌려갔다.

다가갈수록 사람을 가린 어둠이 걷혔다. 나와 같은 금발에 연두색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는 청록색 망토를 늘어뜨리고, 까만 레이스 치마에, 새의 깃털 같은 셔츠를 입었다. 아이의 눈동자는 나와 비슷했다. 그러나 결이 다른 연두색이었다. 별이 박힌 것처럼 고귀했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기쁨보다 슬픔이, 희망보다 절망이 익숙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따로 확인해 볼 것도 없겠어.”

아이의 옆에 선, 붉은 머리의 귀부인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이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입은 옷가지의 느낌이 비슷했다.

“제 할머니를 똑 닮았지 뭐니.”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으나 부담스러웠다. 나는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예레카 하.”

나를 데리고 온 귀부인은 신나 보였다.

“위드먼 부인. 이 은혜는 내 잊지 않으리다.”

“별말씀을요. 서부의 후계를 찾았다는 영광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레카 하.”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 귀부인은 뒤로 물러섰다. 대체 자기들끼리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홀로 이 대화에서 제외된 느낌이었다. 뭘 알아야 도망을 치든, 빌어보든 할 텐데.

그러나 나의 혼란스러움은 이 고귀한 아가씨보다 덜했다. 아이는 벌 받듯 떨고 있었다. 물론 그 아이의 손을 훔쳐본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야라.”

내 어깨를 감싸 쥔 손이 로브를 벗겼다. 그들과 같은 금발에, 연두색 눈이 드러났다. 하지만 내 것은 저들보다 칙칙했다.

“네 어머니란다. 이야라.”

나는 입술도 뻥긋하지 못했다.

“아버님.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붉은 머리의 귀부인은 노여움 대신 안타까워했다. 이곳의 분위기, 말, 사람들, 다 어딘가 붕 떠 있었다. 실재 같지가 않았다. 이 가련한 귀족들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거나 미쳐버렸거나.

“무언가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나의 목은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입을 열자, 늙은이가 밝게 웃었다.

“목소리가 네 할머니와 똑같구나!”

늙은이의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처음에 느낀 위엄은 날개 달고 날아가 버렸다. 내 앞에 두 사람은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선 늙은이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나마 냉철한 듯한 붉은 머리의 귀부인이 말했다.

“이 아이의 어머니라는 자는요.”

붉은 머리의 귀부인의 눈이 옆을 돌아보았다. 나를 데리고 온 귀부인은 다시 무릎을 굽혔다.

“예레 하의 어린 시절에 죽었다고 들었으나 따로 사람을 보내 알아볼 참입니다.”

“살아 있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 붉은 머리의 귀부인이 입술을 열었다.

“살아 있다면 손톱, 발톱, 그 어떤 것도 상하게 하지 말고 내게 데려와요.”

이 자리에 누구보다 한 수 위인 성품이었다. 주변을 냉하게 얼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신이 난 늙은이만 나를 앞으로 끌고 갔다.

“이야라.”

키가 나만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을 마주쳤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산도르아, 란다.”

그때 붉은 머리의 귀부인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먼 곳을 보는 부인의 눈이 붉었다.

부인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뒤돌아 가버렸다. 내 옆의 늙은이는 한숨을 쉬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산도르아.”

산도르아라는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이야라.”

나는 늙은이를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들은 크나큰 실수를 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진실이 밝혀졌을 때는 내 목만 날아갈 것 아닌가.

그러나 내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백발의 늙은이는 딴소리를 했다.

“끌어안고 울지 않는다고,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란다.”

“사랑이요?”

나는 차 찌꺼기를 먹은 듯한 표정을 했다. 개풀 뜯어먹을 사랑이라니.

그때의 나는 멀어져가는 어머니와 가만히 서 있는 산도르아, 그리고 그린 듯이 웃고 있는 할아버지를 괴상스레 여겼다. 저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것보다, 이 아가씨가 나랑 연관이 있다는 사실보다, 이 모든 건 저들의 착각이고 나는 발가벗겨져 내쫓길 거라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그게 가장 두려웠다. 내가 혼날 것, 내가 다칠 것.

“만약 내가 아니면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닌 거죠.”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늙은 손이 멈췄다. 우리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나마 물렁물렁해 보이는 인사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다.

“이야라.”

“네.”

“발밑을 보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온통 연노란 빛의 돌이 깔린 이곳에서, 내가 딛고 선 돌만 주황빛이었다.

“벽이 너를 환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네가 우리의 아이가 아닐 수 있겠니.”

옆에 선 귀부인과 내 앞의 아이는 발밑이 노랬다. 나와 그 늙은이의 발밑만 주황빛이었다. 빗물 먹은 발가락 사이사이가 따듯했다. 젖은 내 몸을 덥히는 빛, 나를 안심시키듯 토닥거리는 손, 울락 말락 하는 산도르아의 눈.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돔에서 빛을 본 날이었다.

* * *

아침부터 먼지 털듯이 나를 털어댔다. 부드러운 천으로 내 이를 구석구석 닦고, 하얀 거품을 머리에 끼얹었다. 양옆의 여자들은 내 팔꿈치를 박박 문질렀다. 거기에 가장 거뭇한 게 많다나 뭐라나. 어린애처럼 코를 풀게 하고, 한 명은 뒤로 가서 머리칼을 빗었다. 따듯한 물에 몸이 풀릴 무렵, 난데없이 머리 위에 찬물을 쪼르르 떨어트렸다. 결 좋은 피부를 위해서란다.

물기를 닦는 것도 자기네들이 알아서 할 테니 나 보고 가만있으라는 식이었다. 나는 팔을 벌리고 서 있기만 하면 저들이 알아서 물기를 짜고 천을 비비댔다. 어느 정도 닦았다 싶으면 다시 머리 위에서 향긋한 기름을 묻혔다. 눈을 꼭 감고 있으라고 말한 뒤에, 다시 지겨운 물기 짜기를 반복했다.

“예레 하. 제대로 된 침실이 없어 밤새 불편하셨죠.”

여기 사람들은 불편의 의미를 모르나보다. 평생 딱딱한 바닥에 엉덩이 문지르던 나는 까무러칠 뻔하였는데. 다 알고도 면박을 주는 건지 아니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간지러운 코나 긁었다. 그러자 머리를 빗겨주던 여자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제가 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잠을 잘못 잔 건 저쪽인 것 같다. 나는 여자의 손가락을 피해, 굼벵이처럼 등을 구부렸다.

“코를 대신 긁어준다고요?”

내가 아픈 사람 보듯 쳐다보자, 그 여자를 비롯한 모두가 웃었다.

“그게 일이라서요. 예레 하께서 손쓰실 일 없도록 하는 게.”

“으.”

“예. 잘하셨어요. 방금처럼 하대해주세요, 예레 하.”

내 입술이 부르텄다며 끈적거리는 걸 펴 발랐다. 향긋한 꽃 내를 맡으며, 머리끝을 땋아 올리는 손길에 자다 깨다 했다.

“일어나셨어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누군가 턱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깨기 전까지 이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섯 명이 그러고 서서 내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니.

“곧 일어나실 시각이었는데. 예레 하께서는 감이 좋으신가 봐요.”

엊저녁에 나를 씻겨줄 때부터 이렇게 단 말을 해댔다. 이러다가 내가 볼일만 제때 보아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려나 걱정이었다.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갔다.

치마에서 마른 검불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버석거리고 빳빳했다. 살갗에 닿는 레이스는 까슬까슬했다. 나는 비웃든 말든 걷다가도 멈추어 서서 종아리를 긁었다. 뒤에 선 여섯 명은 그래도 입 한번 놀리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할 곳만 단호히 제시했다.

오른쪽입니다, 예레 하.

왼쪽으로 꺾으세요, 예레 하.

내가 선택할 사항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라면 내려가고, 방향을 틀라고 하면 틀었다. 여자들은 치마를 추켜 올린 것을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맞은편에 사람이 올 때는 저들이 앞서 걸어가 나를 가렸다.

“예레 하.”

길 끝에 있는 문은 하나였다. 그 앞에 선 여자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문을 열어줬다. 각자 알아서 하면 될 일도 대신해 주는 이가 있었다. 놀라워해야 하는 걸까 사치스럽다고 혀를 차야 하는 걸까.

그래도 그 안에서 나를 반기는 건 아주 즐거운 것들이었다. 사람보다 식탁 위 차려진 것에 눈이 갔다. 때깔이나 풍기는 냄새부터가 내 위장을 비틀어댔다.

식탁에는 산도르아라는 여자애, 그 앞에는 어머니와 할아버지라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눈치껏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산도르아의 옆자리였다.

배가 너무 고팠다. 내가 살던 곳의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픈 아이들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먹을 게 던져지면 승냥이처럼 달려들었다. 비굴해도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했다.

“이야라. 잠은 편하게 잤니?”

누가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먹을 게 보이면 손부터 나갔다. 나는 대강 새처럼 생긴 것의 다리를 뜯었다. 입으로 가져가서 욱여넣은 다음, 묽은 스프를 그릇째로 들어 목 안에 들이부었다. 달콤한 육질의 살을 씹으면서 생선의 대가리를 집었다. 생선의 종류는 몰랐다. 어떤 맛이 나는 지도 몰랐다. 일단 입 안에 넣고 씹고 삼켰다.

어금니가 잘게 생선의 살을 부술 동안, 질긴 새의 등살을 뜯어냈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 다음, 갈색으로 구워진 고기를 양손에 들었다. 막 뜯고서 우물거리는데, 문득 주변이 조용한 걸 알았다.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대낮에 담을 넘다가 걸린 아이들보다 절망적인 낯이었다. 할아버지라는 사람은 콧등을 찡그렸고, 어머니라는 사람은 손수건을 든 채로 멈추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겼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서 웃는데, 씹던 고기가 입안에서 떨어졌다. 다급하게 그걸 주워서 입에 넣었다.

“하, 하하…… 하하하.”

앞에서 나와 똑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라는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식탁 주변에 서 있던 그 많은 사람이 온데간데없었다.

“아버님.”

웃음을 멈춘 귀부인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그 여자를 찾는 걸 그만두자는 게. 전 이해가 안 가네요.”

“어차피 죽은 여자였다.”

“죽었어도, 나는 그 시신이라도 찾아야겠다니까요?”

나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싸움 구경이 무릇 제일 재미난 구경 아니겠는가.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누군가 내 손에 잔을 들려줬다. 옆을 돌아보니 산도르아라는 여자애였다. 걔 접시는 비어있었다. 식탁 위의 것을 하나도 손 데지 않았다.

“내 딸은 짐승 새끼로 키우게 하고, 본인 딸은 여기서 공주로 키우게 하고. 저의가 뭐든, 무슨 사정이 있든. 그 여자의 친척이나 조카나 누구도 상관없어요.”

“시시.”

내가 다시 엎어진 새의 살을 뜯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 의자가 드르륵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붉은 머리의 귀부인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기가 찬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걸어 나갔다. 나는 괜히 집었던 날개를 내려놓았다.

“이야라.”

잠시 눈두덩을 덮고 있던 할아버지의 손이 내가 놓친 날개를 집었다. 그리고 내 앞에 건넸다.

“많이 먹어라.”

나는 받아든 날개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배가 부른 것이 느껴지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들 본체만체하는 식탁에서 내 손만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이것을 집었다가 다시 저것을 집고,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스프 그릇을 들어 마시고.

나조차도 정신이 없는 식사를 할아버지만이 끈기 있게 지켜봤다.

“할아버지.”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와 함께 산도르아가 일어섰다. 그 여자애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걸었다.

“곧 수업 시간이라서요.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요.”

할아버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산도르아를 향했던 그의 눈이 곧바로 내게 돌아와 꽂혔다. 양념 묻은 손을 쪽쪽 빨고 있는 나를 훑었다.

“이야라.”

“네.”

“너도 따라가려무나.”

“네?”

나가려던 산도르아의 걸음이 멈췄다. 나는 양념 묻은 입술을 하얀 소매로 닦아냈다.

“어디를요.”

“수업에.”

나는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씹으며 산도르아를 흘깃 바라봤다. 그 아이는 하얗게 질려있었다.

“꼭 해야 해요?”

뭘 배우는 건 질색이었다. 사기를 쳐야 한다고 글을 배울 때도 얼마나 징징거렸는지 모른다. 그것도 어느 정도 읽을 줄만 알게 되자 때려치웠다.

그러나 인자해 보이던 할아버지의 인상이 냉정하게 변했다.

“꼭 해야 해.”

거절할 수 있던 입장인가 내가. 나는 아직도 네가 아니라 다른 아이였다며 내쫓길 것만 같은, 풀 끝에 앉아버린 종달새 신세였다. 따지고 보면 닮은 거라곤 눈이랑 머리카락 색밖에 없지 않은가. 행복에 취하다가 보면, 그걸 잃었을 때는 곱절로 아픈 법이었다. 나는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산도르아는 내가 일어서자마자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나는 간격을 두고 그 아이를 뒤따라갔다.

더 먹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일은 바리바리 싸서 올라가야겠다.

* * *

수업 시간은 고정되어 있다고 했다. 스승이라는 사람이 아주 엄해, 정해진 시간보다 늦으면 발도 못 붙이게 한단다. 그래서 나는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이곳에 끌려와 앉았다. 입술은 남들이 닦아주었으나 문제는 양념이 물든 소매였다.

새삼스레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아까부터 알아먹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꼴은 산발에, 입술은 붙어버렸다. 첫 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스승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은 산도르아만 앵무새처럼 대답하고 있었다. 사실상 어제 온 내가 무슨 대답을 유창하게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엉덩이를 스치지 않고 돈주머니를 뺄 수 있을지, 에 대한 내용이면 모를까.

“이야라라고 했나.”

스승은 머리칼 한 올까지 꼼꼼하게 틀어 올려, 딱 보아도 사납다는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스승님.”

그때 산도르아가 나서서 스승을 막아 세웠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예요.”

고불고불하게 늘어진 산도르아의 머리칼은 고혹적이었다. 저렇게까지 고울 수 있으려나 싶을 만큼 고왔다. 손가락이나, 말투나, 피부나, 저렇게 하나같이 가냘픈 아가씨가 마음까지 좋다니. 배알이 꼴릴 만큼 불공평한 거 아닌가.

“산도르아.”

그쯤이면 넘어갈 줄 알았던 여자가 산도르아를 앉혔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모르는 채로 두는 게 과연 저 아이한테 좋은 일일까. 정말 네 가족을 위한다면 때리고 가르쳐달라고 해야지.”

그 말에 나는 벙했다. 나를 위해서 때리고 가르친다는 말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스승이 제대로 파악한 안 것이 하나 있다면 내 머리가 그다지 똑똑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스승은 내 머리보다 태도를 지적했다. 내가 아무런 의욕도, 욕심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있는 것부터 어색한 사람이었다. 하루아침에 끌려와 영문도 모르고 대접받고 있었다. 이게 까무러칠 만큼 좋은 행운이니 문제인 것이다. 내가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다. 기대했다가 무너지면? 사랑했다가 증오를 받으면?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뒷골목에서는 고만고만했다. 다 같이 배 긁고 누워 이걸 훔쳤니, 저걸 훔쳤니 자랑하는 게 다였다. 비교의 대상이 없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산도르아의 옆에만 가면 쥐구멍 찾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스승은 내게 상당한 양의 숙제를 매일 내줬다. 물론 결과물은 해 본다고 해 봐야 엉망이었다. 역사나 수학 따위를 배우는 것에 아무런 흥미가 없지마는, 나는 꽉 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던 분위기, 무섭게 다그치는 스승, 그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산도르아의 눈을 수시로 떠올렸다. 그 수치스러운 기억이 나를 책상 앞에 앉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나는 망상에 가까운 답을 쓴 숙제를 내면서, 막힘없이 대답하던 산도르아를 떠올렸다. 그날 스승의 흐뭇한 얼굴을 독차지한 산도르아가 부러워서일까. 아니면 나도 진즉 배웠으면 스승의 미소를 얻어냈으리란 질투심 때문일까. 여하간 그렇게 아름다운 감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먹고 사느라 잊고 산 열등감으로부터 끌어낸 부러움이었다.

* * *

진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눈을 뜨고 싶지 않지만 습관이라는 게 나를 깨웠다. 풀벌레가 진절머리 나게 우는 새벽녘이었다. 보름째 뒤척이며 잠을 설치다가 이 시간에 눈을 뜨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나를 짐승 보듯이 보는 시선을 깨닫고, 오후 내내 눈치 보면서 먹은 탓인가. 잠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하녀를 부르려다가 그냥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빈 배를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주방은 위치를 몰랐다. 불 꺼진 하녀들의 부엌을 뒤질 참이었다.

아무래도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가기는 그렇지 않은가. 하녀들이 자주 쓰는 뒷문으로 들어가 빵 몇 개를 가지고 나올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성공의 고지가 코앞이었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밖으로 나갈 뒷문이 있었다.

‘산도르아 때문이에요?’

복도 끝,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에서였다. 그 아이의 이름만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지나쳤을 것이었다. 생쥐처럼 엿듣는 짓 따위 하지 않았을 터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벽 가까이에 붙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발음이 뚜렷했다.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이 그 도둑을 비호하는 이유가 산도르아 때문이라면, 그것 역시 잘못 짚었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시시.’

‘내 딸을 납치했어요. 내 딸을 뒷골목의 비렁뱅이로 키우고 그 아이가 배워야 할 모든 걸 산도르아에게 줬어요.’

귀가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담았다. 나는 신음 새는 입을 틀어막았다. 찬찬히 주저앉아 어머니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꼴에 아주버님의 여자라서? 그래서 감싸주시는 거예요?’

‘일을 키워봤자 좋을 게 없다는 소리를 하는 거다. 시시.’

‘내가 그 여자 시신을 분지르는 게 어째서 일을 키우는 게 되는 건데요.’

다른 이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소개시켜주어도 산도르아에 대해서만 애매하게 굴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걔가 나의 여동생도 언니도 아니었다. 그 아이와 어떤 관계인지, 우리가 자매가 아니면 도대체 무언지, 이따금 내가 엉망으로 쓴 숙제를 들고 다니면 왜 어머니의 시선이 산도르아를 향하는지. 나는 이 성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무지는 나의 상상력을 키우기만 할 뿐이었다. 요사이 낸 결론은 나를 산도르아 대신에 쓰려고 데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아.”

무심결에 뒤돌아본 나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났다. 내 뒤에 나타난 그림자가 한 걸음 물러났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산도르아는 울고 있었다. 손에 든 물 잔을 보니 목이 말라서 내려왔나 보다. 산도르아는 다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산도르아는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상냥하게 나를 대하는가 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날카로운 자신을 드러냈다. 나를 창피 주려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스승이 구태여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나서서 대답하곤 했었다. 단순히 대답을 잘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산도르아가 일부러 자신을 뽐냈던 거라는 걸, 내가 눈치채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산도르아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아이의 머리칼이나 바른 자세, 우아한 걸음걸이가 부러웠다. 무뚝뚝한 나와 달리 누구에게나 상냥한 것도, 흉내 낼 엄두도 내지 못한 말씨도.

그런데 그랬던 아이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어머니가 계신 방에서 멀리 끌고 가, 하녀들의 부엌에 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분노 어린 목소리로 나의 꼴을 지적했다.

“그건 하녀들이나 먹는 거야. 이 새벽에 그걸 꼭 가져가야겠니?”

산도르아는 나의 품에 든 빵을 도로 바구니에 던져버렸다. 산도르아가 왜 화를 내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도 산도라아의 얼굴처럼 엉망이 되었다. 창피하니까 화가 났다.

“먹으면 안 돼?”

“아무나 먹으라고 둔 거 아니야. 하녀들 몫이야. 거기에다가 너는 아까 식사까지 했잖아.”

“내 거잖아. 다.”

산도르아를 동경한 만큼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은, 우리는 처음부터 친해질 수 없는 사이란 것이었다. 나도 눈치가 있었다. 어머니의 대화와 산도르아의 태도를 섞으면 답이 나왔다.

“나 들었어.”

나는 산도르아가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했다.

“뭐를.”

“누가 너랑 나랑 바꾼 거지?”

나는 눈을 빛내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또 네가 내 여동생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그 아이는 한걸음 물러났다. 산도르아는 빵이 후두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부엌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아이의 등에 벽이 닿고, 나는 빵을 전부 놓쳐 빈손이 되었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산도르아의 눈은 온순한 양처럼 힘이 빠져있었다.

“너 되게 곱게 자랐나 보다.”

매일 손톱을 가지런히 다듬는 귀족 가의 아가씨가 싸워본 적이 있으려나. 여기가 나의 것이었든, 그것을 이 아이가 훔쳤든, 당장은 그에 대한 분노보다 창피스러울 뿐이었다. 흉내 낸답시고 새 모이만큼 주워 먹더니 몰래 내려와 빵을 훔친 나를, 아무리 가꿔도 소매치기인 걸 숨기지 못하는 나를 들킨 게.

“부럽네. 고생 안 하고 커서.”

그래서 손톱 빠진 양에게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었을까. 나의 서늘한 목소리가 그 아이의 어깨를 치고 갔다. 나는 그게 할 말의 다였다는 듯이 부엌을 나갔다.

산도르아는 찍소리도 못 냈다. 항상 살얼음판 위에서 발끝을 들고 다니는 것 같던 아이였는데. 뒤돌아봤을 때 그 아이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삼일 후 우리의 관계는 명확해졌다. 우리는 사촌이었다. 산도르아는 할아버지 큰아들의 딸, 나는 작은 아들의 딸이었다. 산도르아의 어머니는 하녀였다. 나의 큰아버지 되는 사람에게는 하룻밤 잠자리였겠고, 하녀인 그녀에게는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의 아버지가 후계위에 오르고, 나와 산도르아가 동시에 태어났을 때.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핏덩이에 불과한 제 딸을 나와 바꾼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불행히도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산 사람들은 뒤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사고 속에서 나는 형편없이 자랐으며, 산도르아는 죄인의 딸이 되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겪은 고통은 앞으로 다가올 산도르아의 눈물에 비례한다는 걸.

나는 그날 조금 더 다정했어야 했다.

* * *

나는 한 번도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고아로 자란 내가 가족에 관해 접할 수 있는 것은 동화뿐이었다. 그런 책에 환장하는 아이들이 훔쳐 온 것을 밤새 읽으며, 서로 네 부모는 마녀처럼 들창코였을 것이라는 농담을 했다.

동화에서도 부모 같지 않은 부모는 나왔다. 마녀에게 팔아버리거나 산기슭에 두고 가거나 양부모가 구박을 한다든가. 뒷골목 아이들은 대부분이 고아였기 때문에 그런 동화책은 인기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부모가 애타게 찾았다거나 사실은 부모가 이웃나라 왕이라던가 하는 것들, 우리를 잠시나마 단꿈에 젖도록 만드는 동화책이 인기였다.

어떻게 보면 나는 개중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나의 삶은 동화에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니던가. 딸을 바꿔치기하고, 원래 공주님이 돼야 했을 아이는 구걸을 하고 살고, 원래대로 돌아가서 가짜 흉내를 낸 딸을 죽이는 것은 하지 않았지만, 뭐, 그런 종류의 동화와 비슷했다.

그런데 동화 속 공주는 생각만큼 기쁘지가 않았다. 물론 몸은 편했다. 가만히 있어도 씻겨줘, 재워줘, 입혀줘. 내가 말만 하면 따박따박 식사가 나오고 옷도 기분 따라 날씨 따라 입었다.

그러니까 내가 우울한 것은 일종의 배부른 투정이었다. 나는 왜인지 공주가 아니라 여전히 그 빌어먹을 거지인 것 같았다. 아무리 좋은 옷을 둘러도, 어머니,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러줘도, 땟국물 묻은 과거는 도려내지지 않았다.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 산도르아가 공주에 걸맞았다. 그 나이에 벌써 할 줄 아는 외국어만 네 개란다. 함부로 흥분하는 법이 없고, 사용인들도 진심으로 그 아이를 좋아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아기 때부터 보아온 인연들이었으니까.

우연히 지나가다 본 초상화에는 어머니, 나는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양옆에 두고 앉아 행복하게 웃는 소녀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6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랬다. 어머니, 할아버지도 낯설어 죽겠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라니. 그 사실에 슬퍼지지가 않는 게 슬펐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얻기가 쉬웠다. 그러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의 목소리, 표정, 손길은 돌려받을 수 없었다.

요즘 나는 밖으로 나와 산도르아의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걸을 때 목을 똑바로 하고, 거북이처럼 구부러진 등을 폈다. 그러다가 그날의 산도르아가 떠올랐다. 빵을 훔치던 나를 신랄하게 비난하던 눈과 입술, 뒤따라 등신같이 쏘아붙였던 나까지.

몇 걸음 걷다가 멈추었다.

“에이…… 씨.”

왜 그렇게 아득바득 상처를 주려 했을까. 그날만 생각하면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빈대였다. 어른들도 곧 알아차릴 것이었다. 진짜라고 데려온 게 어디에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는 도둑이라는 걸 말이다.

“이야라.”

분수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뒷짐 지고 선 할아버지였다.

“내가 좋은 거 보여줄까.”

“좋은 거요?”

“그래.”

할아버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잡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손을 뻗었다. 할아버지는 단번에 나를 쑥 일으켰다.

“이리로.”

할아버지는 ‘등이 결려 산책 나왔어.’ 했다. 나는 ‘그러세요.’ 했다. 우리는 자줏빛 꽃이 정답게 모여 있는 길로 갔다. 길은 두 사람이 붙어 다니긴 비좁았다. 아무래도 정원사가 물을 주기 위해 지나다니는 길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앞서 걷고, 할아버지는 뒤에서 걸었다.

“걸음걸이가 많이 우아해졌구나.”

내가 엉덩이 빼고 걷는 것을 봤나 보다. 나는 거칠게 코를 닦은 후에 허벅지를 긁었다. 민망스러워서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누구 따라 한 거 아니에요.”

“누굴 따라 했구나!”

“아니라니까요.”

“누구였을까. 네 어머니 시시? 디아?”

디아. 아마 산도르아의 애칭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애칭을 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네 걸음걸이도 좋단다.”

껄렁껄렁하게, 술 취한 사람처럼 걷다가 몸을 부딪치고, 그 틈에 안주머니에서 금화를 훔쳐 갔다. 그 습관이 걸음걸이에 배었다. 아무리 다리를 뻗어도 백조를 시기하는 닭 같았다.

걸음걸이 얘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그 아이와 나의 차이가 어디 걸음걸이뿐이랴. 나는 혀를 차고선 빠르게 걸었다.

“이야라.”

“네.”

“앞을 한 번 볼래.”

긴 벽이 나타났다. 위를 올려다보자, 구름을 가린 벽의 끝이 보였다. 아마 이 벽을 넘으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리겠다. 오르려면 오를 수 있겠지만, 발을 삐끗하기라도 하면 시신도 건지기 힘들었다. 끝까지 올라가는 건 웬만한 담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터였다.

“보여주겠다는 게 이거에요?”

“그럼.”

무엇일까. 벽 밖으로 나가는 건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인가. 내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찌푸리자, 뒤에서 할아버지의 큰 손이 툭 튀어나왔다.

“이야라.”

할아버지는 벽에 손을 올려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당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던 나는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한쪽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와보렴.”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에 속는 셈 쳤다. 하루하루가 꽃밭인 귀족은 이런 것을 즐기려니 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손.”

기대라는 것을 죄다 빼고 벽에 손을 올렸다. 돌덩이 벽이려니 했는데 겉이 보들보들했다. 보드란 양털을 한껏 쥔 것 같았다. 손바닥 밑에서 벽의 박동이 느껴졌다. 둥둥, 했다. 전달받은 손가락 마디부터 저릿해졌다. 메마르기만 한 벽이 숨을 쉰다는 뜻이었다.

“살아 있나요?”

“살아 있지.”

“어떻게요?”

할아버지는 벽에 귀를 대 보았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눈으로 나를 재촉했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사르르르, 흙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새의 지저귐, 보얀 흙바람이 부는 소리, 아기를 재우는 자장가 소리, 들판 위 양 떼가 우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이 벽은 돔의 온 땅을 감싸고 있단다.”

벽이 온 땅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내게 전하는 것 같았다. 거칠게 뛰는 심장을 이고 이 땅, 저 땅으로 뛰어다니는 것 같이. 볼 수 없는 바깥을 전해주고, 다시 오라면서 속삭였다. 그 소리는 내 혼란스러움까지 가져가 버렸다. 가져가, 나를 벽 안에 빠트렸다. 나는 귀를 뗄 수 없었다.

“이 벽은 온 돔에 연결되어있어. 예레카는 이 벽을 지키는 자라는 뜻이란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서쪽의 벽을 맡고 있는 위테르발도의 후손들이고.”

할아버지는 찬찬히 벽에서 귀를 떼고, 손을 떼고, 자세를 바로 했다. 대신 할아버지의 손은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넌 내 손녀야.”

바람이 할아버지의 머리칼을 흔들고 내게로 숨어들었다. 바람을 맞이한 풀이 일렁이듯 흔들렸다. 내 마음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할아버지는 나를 향해 웃었다.

“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벽을 알았다. 할아버지를 알았고, 따듯한 손을 알았다. 벽이 내게 전한 소리, 심장 소리, 그리고 할아버지가 나를 손녀라고 할 때의 눈빛까지. 그날 난 처음으로 알아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벽의 위로 데려가셨다. 이곳의 후계들만 아는 곳이라며 인도한 곳은 작은 계단이 난 길이었다.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힘들이지 않고 벽의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두꺼운 벽의 위는 황량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서서 할아버지는 밑을 보여줬다. 서쪽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고, 이곳은 서쪽의 끝이었다. 나는 정착 없이 흐르는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바다를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는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벽을 집어삼킬 것처럼 손아귀를 펼치다가도 온순한 짐승처럼 가라앉길 반복했다.

“이야라.”

“네.”

“이제 이 벽은 네가 지켜야 한다.”

“무엇으로부터요?”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나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그곳에 올라가 벽에 닿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 성에서 찾은 안식처였다. 그 파도는 듣기 좋게 떠들썩했으므로, 나의 어지러운 마음을 훔쳐 가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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