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왕세자와 헤어진 뒤.
나와 데클란과 로지에, 그리고 유리나는 마차를 타고 인페르나 영지로 향했다.
마차를 몬 사람은 키오였다.
“정말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키오는 인페르나 영지로 가는 여정 내내 계속 사죄했다.
“괜찮으니까 사과는 이제 그만 해.”
로지에가 웃으며 키오를 달랬다.
왕세자와 협상을 마친 뒤, 키오는 우리들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데클란은 로지에처럼 순순히 키오를 용서하지 못했다.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잠깐만. 한 대만 치면 화가 풀릴 것 같아.”
“데클란!”
“폭력은 그만둬, 데클란 군!”
데클란이 키오를 한 대 치려던 걸 나와 로지에가 급히 말렸다.
물론 키오의 자세한 사정을 들은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울먹이던 키오는 우리가 그를 한참 어르고 달랜 뒤에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결혼식 때 남작가로 편지하도록 해. 저택가 요리사들에게 연회를 돕도록 할 테니.”
로지에가 키오에게 말했다.
“네, 소남작님!”
키오는 로지에를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데클란은 마차에서 내리기가 돌아가기가 무섭게 격렬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사샤야! 데클란! 우리가 많이 걱정했었단다!”
나와 데클란은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부모님의 품에 안겼다.
“켁.”
어찌나 열렬히 나를 반겨주시던지 갈비뼈가 부서질 지경이었다.
데클란의 어머니도 나와 데클란을 꽉 끌어안으셨다.
우리는 간만에 만난 가족들과 밤새 회포를 풀었다.
데클란이 인페르나 남작의 명령을 받아 수도로 떠나게 된 이야기.
내가 특수 부대에서 고생을 하며 구른 이야기.
왕궁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신기한 이야기.
그렇게 밤새 웃고 울고 떠들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그 생각은 정확히 사흘 뒤에 깨졌다.
데클란의 집 앞에 난데없이 마차 한 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세련된 최신식 마차가.
“와아…….”
반짝반짝거리는 신형 마차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내 거야.”
깨끗한 천으로 마차 바퀴를 닦으며, 데클란이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네 거라니? 어디서 난 거야?”
“어느 귀족 집안 도련님 한 명 호위해주고 보수로 받은 거야.”
“어?”
“그런 게 있어.”
그런 미스터리한 말을 남긴 데클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차를 정돈했다.
맹세컨대 나는 데클란이 그렇게 잘 웃을 수 있는지 몰랐다.
마차를 닦는 내내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 로지에와 유리나는 함께 인페르나 남작가로 들어갔다.
로지에가 안전하게 돌아온 덕분에 영지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안 그래도 지난 몇 달 동안 있었던 일 때문에 영지가 뒤숭숭했었다. 거기다가 남작 작위 후계자가 출타한 상태였다.
그러니 영지민들의 불안이 드높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로지에가 돌아온 것을 본 영지민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무사히 귀환한 로지에를 보고 인페르나 남작은 ‘잘했다’라고 짧게 칭찬하고는, 별도의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뒤로 일주일 내내 로지에 앞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만찬이 준비되었다고 했다.
“남작님이 요즘 너무 많이 먹이셔.”
공무를 보다가 우연히 우리 집 근처에 들리게 된 로지에가 나와 데클란에게 털어놓았다.
데클란은 ‘뭐 어쩌라고요?’라는 표정으로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급히 싸늘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많이 먹으면 좋죠! 도련님도 앞으로 남작 작위를 이어받으시려면 더더욱 건강해지셔야지요!”
“그래, 사샤 양의 말이 맞아! 앞으로 많이 먹고 건강한 영주가 되어야지!”
내 화담에 기분이 좋아진 로지에는 씩씩하게 마을 시찰을 나섰다.
“……저 도련님, 지금 자랑할 게 없어서 고작 밥 많이 먹은 거 뻐기러 온 거야?”
“쉿! 조용히 해!”
나는 데클란의 등짝을 장난스럽게 때렸다.
데클란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로지에가 더더욱 건강해지는 건 좋은 일이었다.
이는 유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로지에로부터 유리나의 사정을 전해 들은 인페르나 남작은 수소문을 통해 성형 마법에 능한 마법사를 찾았다.
유리나는 마법을 통해 붉은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바꾸었다.
듣자 하니 나와 똑같은 머리 색을 하고 싶다나 뭐라나.
‘나도 원래 사실 붉은 머리카락인데…….’
나와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유리나를 보며, 나는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오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애인과 드디어 결혼을 한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결혼식은 내후년 봄에 연다고 했다.
나는 꼭 내 일처럼 기뻐하며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결혼식을 꼭 참석하겠노라며 답장을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을이 찾아왔다.
“올해도 옥수수 농사가 풍년이네!”
“노랗게 잘 익은 이 알 좀 보세요!”
나는 부모님과 함께 옥수수 수확에 나섰다.
물론 데클란도 도와 나섰다.
우리 부모님은 이제 데클란을 완전히 집안 식구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데클란에게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가 너 입양해서 내 남동생으로 삼겠데.”
그러자 데클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안 돼. 그러면 우리 결혼 못 하잖아.”
“어머, 어머! 세상에!”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엄마가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아빠가 데클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네 이놈! 너에게 내 딸을 줄 수 없다!”
저기요, 아빠……?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반면 데클란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제가 뭐가 부족해서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에 아빠는 주눅이 들었다.
“아…… 장난이란다, 데클란. 이 아저씨가 언젠가 저 말을 해보고 싶어서 그냥 해본 말이다…….”
“……그럼 다행이네요. 결혼 반대하시면 야밤에 사샤 들고 도망칠 생각도 했거든요.”
“어?”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어, 데클란…… 방금 그거 장난이지?”
“…….”
“저기요, 데클란 씨?”
“……옥수수나 마저 수확하러 가자.”
데클란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옥수수밭으로 먼저 향했다.
“…….”
뒤에 남은 나와 부모님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을을 뒤로 겨울이 찾아왔다.
“와! 눈이다!”
펑펑 내리는 흰 눈을 보며 나는 방방 날뛰었다.
나와 자기 집 앞에 눈을 삽으로 퍼내던 데클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뭐가 좋다고?”
“예쁘잖아! 눈사람도 만들어야지!”
“만들 거면 집 앞에 만들지 말고 뒤에 만들어! 나중에 녹으면 미끄러워진단 말이야!”
데클란은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날 위해 눈사람을 굴려주었다.
“이거 너 닮지 않았어?”
완성된 눈사람을 보며, 내가 데클란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못생겼어?”
“으음? 아니, 아니! 너 잘생겼어!”
당황한 나는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다가 내 손이 눈사람의 머리를 퍽, 하고 쳐버렸다.
순간 휘날린 눈이 내 얼굴 위를 덮쳤다.
“으앗! 차가워!”
“사샤, 조심해야지.”
데클란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덮은 눈을 닦아내려 주었다.
“헤헤…… 데클란 네 손은 따뜻해서 좋네.”
데클란을 올려다보며 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
데클란은 그대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
“어?”
“예쁜 건 계속 보고 싶은 법이잖아.”
그 말과 함께 데클란은 천천히 내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입술을 어루만지던 데클란의 손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온기가 끊임없이 입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데클란에게 내 숨결을 내어주었다.
“……봄에 결혼할래?”
가쁜 숨 사이로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데클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응!”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나와 데클란은 간만에 찾아온 따스함을 만끽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즐겼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마을을 거닐며, 우리는 서로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클란, 우리 나중에 마차 가게 열까? <데클란 & 사샤 마차 대여소> 어때?”
“……됐어. 그건 나만 좋아지는 일이잖아.”
“네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
나는 배시시 웃으며 데클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데클란은 나를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음? 뭐가?”
“괜히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나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고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야 넌 아카데미도 졸업했고, 왕실 기사였기도 했었잖아. 그러니 앞으로 어딜 가든지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아…….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데클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난 좋은 대우 받고 싶지 않아.”
잠시 속으로 말을 정리하던 내가 데클란에게 말했다.
“난 네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아.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네 옆자리를 바꾸고 싶지 않아.”
“사샤…….”
“그리고 내가 널 너무너무 좋아해서 이렇게 고생을 자처하는 걸 알면, 날 앞으로 더더욱 좋아해 줘.”
내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데클란의 볼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데클란은 그대로 내 손목을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널 지금 이 이상으로 더 좋아하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은데.”
“어…… 그거 좀 무섭다. 그럼 적당히 좋아해 줘!”
나는 웃으며 데클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때마침 새벽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오묘한 새벽하늘을 도화지 삼아 요정들이 보석 한 알 한 알을 세심하게 박아 넣은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별들을 본 나는 무심코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별이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아.”
“그래.”
내 손을 잡은 데클란이 대꾸했다.
“네 말이 맞아, 사샤.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별이 제일 아름다워…….”
그 말을 하는 데클란의 시선은, 새벽 별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