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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76)화 (176/177)

176화

‘돼, 됐다!’

점점 멀어지는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성공했다.

데클란과 유리나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대로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탈출했다!

나는 마차 안에 있는 모두에게 외쳤다.

“저희가 해냈어요! 이제 이대로 인페르나 영지로 가면 돼요!”

“잠깐만! 난 아베라 자작가에 내려 줘!”

마차 중간에 끼어 앉아있던 크레스가 항의했다.

“아, 맞다. 미안해.”

최종 목적지가 인페르나 남작 영지가 아닌 크레스를 잊고 있었다.

나는 로지에에게 부탁해 마차를 중간에 세웠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크레스!”

나는 크레스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표현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연막탄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작전을 사용하지 못했을 테다.

크레스와 키오가 각각 연막탄과 폭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주었기 때문에 집무실 건물 안을 배회하는 게 훨씬 더 수월했다.

나는 크레스에게 감사의 의미로 보석 하나를 건네었다.

당연하지만 출처는 로지에의 가방 안이었다.

크레스는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래. 난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에 휘말릴지는 몰랐는데…… 근데 나 이러다가 왕세자 전하에게 잡혀서 사형당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넌 얼굴 안 팔렸으니까.”

나는 웃으며 크레스를 격려했다.

사실이었다.

크레스는 줄곧 모자를 눌러 쓴 채 사람들 사이에 숨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게다가 연막탄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리라.

“그래. 나도 이제 더 의심받기 전에 아베라 자작가로 돌아가야겠다.”

크레스가 아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데클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하튼…… 너희 둘이서 앞으로 행복해라.”

이에 데클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벌써 행복한데.”

나는 데클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기서 염장질은 안 돼!

그렇게 크레스와 헤어진 뒤, 키오는 자신이 마차를 몰겠다고 자처했다.

로지에도 나름 유명 인물인지라, 그보다 키오가 마차를 모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키오가 마차를 몰게 되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덜컹, 덜컹.

인페르나 영지로 향하는 마차 안에 앉은 유리나가 먼저 말문을 뗐다.

“일단 인페르나 영지로 가도록 하지요.”

로지에가 대답했다.

“인페르나 남작님은 지금 수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라이렌 왕자가 황국으로 쫓겨났으니, 온 왕국이 다 알고 있을걸.”

“남작님께서 이레사 공녀님을 숨겨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그 점은 걱정하지 마.”

“하지만 왕세자는 어떻게 하지요?”

유리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티프니, 그러니까 절 도왔던 시녀가 그랬어요. 왕세자는 소남작님과 사샤 님이 아카데미에 올 걸 알고 있었더라고. 그러니…… 저희를 추격하지 않을까요?”

“…….”

나와 데클란, 그리고 로지에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깨트린 건 데클란이었다.

“……왕세자는 우리가 아카데미에 올 걸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나와 로지에는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왕국 수도 주변을 돌 때도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왕세자는 우리가 어디로 움직일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로지에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보였다.

지금 우리는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베라 자작가에서 나올 때 이런 숲이 있었나?’

문득 다음 마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이름이었다.

처음 보는 마을 이름이었다. 인페르나 영지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 아니었다.

“……!”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오 오빠, 지금 길 잘못 들어선 거 같은데요?”

나는 마부석과 이어진 작은 창문을 통해 키오에게 말을 걸었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마차 소리 때문에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키오 오빠, 마차 좀 멈춰 봐요. 저희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

묵묵부답.

여전히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제 말 들리세요, 키오 오빠?”

“……미안해요.”

마부석으로부터 끅끅거리는 울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키오 오빠?”

“미안해요, 사샤 누님…… 정말 미안해요…….”

흐느끼는 목소리가 마차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와, 왕세자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제 애인을 죽이겠다고 했어요.”

키오가 울부짖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 때문에 그분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사샤 누님…….”

“…….”

나는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이건 도대체…….

“제기랄…….”

데클란이 급히 창문의 커튼을 완전히 열었다.

우리는 어느새 외진 숲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왕세자와 그의 기사들이 보였다.

“……젠장.”

당했다.

함정이었다.

“어서 와.”

마차가 멈추자, 왕세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왕세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키오는 마부석에 앉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인질로 잡혀있었다. 나도 만일 그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인페르나 소남작, 나는 솔직히 그대에게 감탄했어. 어떻게 내가 꼭꼭 숨겨놓은 저 두 사람을 찾은 거지?”

“…….”

로지에는 왕세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투 태세를 하고 있었다.

이는 나와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쭉 훑어본 왕세자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살벌하게 굴기는. 난 그대들과 거래를 하러 온 거야.”

“거래?”

“그래.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지. 만일 그대들이 지금 당장 얌전히 왕국을 떠나 황국으로 망명한다면, 난 그대들을 더 이상 쫓지 않고 죽이지 않겠다.”

“……!”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왕세자는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내 예상을 뛰어넘고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내 입장이 곤란해졌어. 아카데미에서 그대들을 목격했다는 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올 거야. 입막음도 한계가 있지.”

그러면서 왕세자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쯧, 하고 혀를 다시 찼다.

“난 이 모든 죄를 마담 쟈니에트에게 뒤집어씌울 거다.”

“그게 무슨…….”

“마담 쟈니에트 그 여자는 돈만 주면 정보를 온 데다가 흘려서 언젠가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이번이 되겠지.”

“마담 쟈니에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게…… 무슨 뜻이지요?”

데클란이 왕세자에게 물었다.

왕세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절벽에서 떨어진 이레사 공녀는 마담 쟈니에트가 납치했다고 하지. 이레사 공작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위해. 그럴싸하잖아?”

왕세자의 말을 들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단 왕세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왕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라이렌 왕자가 사라진 지금 이 시점에서 왕세자에게는 아무런 방해물이 없었다.

유일한 걸림돌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레사 공녀였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라이렌 왕자의 지지파들이 화력을 다시 키울 게 분명했다.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어 라이렌 왕자를 되찾아 오자,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

그러니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번 일에 대해 함구하기만 하면, 왕세자는 모든 게 창창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제안이었다.

“……저는 인페르나 영지를 버릴 수 없습니다.”

로지에는 딱 잘라 말했다.

왕세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대가 나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 난 마음만 먹으면 그대들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 있어.”

거짓말.

저건 분명히 거짓말이다.

만일 그럴 수 있으면 당장 실행했었겠지.

왕세자는 분명히 모종의 이유 때문에 우리를 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우리를 이런 으슥한 곳으로 불러내 협상을 하겠다느니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아마…….’

우리 뒤를 뒷받침하고 있는 인페르나 남작가 때문일 테다.

사실 인페르나 남작가 하나만은 왕세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현 시국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온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느라 난리통이었다.

그리고 인페르나 남작가를 비롯한 변방의 가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투 방어 태세를 갖췄다.

변방의 가문들은 가뜩이나 왕실에서 도움을 주지 않아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왕세자가 로지에를 죽인다고 치자.

인페르나 남작이 가만히 있을까?

‘아니. 왕세자 목 베겠다고 왕궁으로 쳐들어갈걸.’

인페르나 남작은 아마 자기 영지뿐 아니라 주변 영지를 모두 부추겨서 반역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게 없으니까.

“……왕국 밖으로 망명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유리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세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이레사 공녀. 지금 그대의 위치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대는 지금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국왕 폐하께서 이미 그대의 장례를 치렀어.”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저도 왕세자 전하와 협상을 하도록 하지요.”

유리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세자를 대하면서 무서워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저희는 왕국 밖으로 망명하지 않는 대신, 인페르나 영지 안에서만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데클란 씨는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분이니, 문제가 없을 겁니다. 특히 저는 외부인에게 제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하지요.”

그 말을 하며 유리나는 제 숨을 가다듬었다.

“대신 그 대가로 왕세자 전하에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정보라 함은…….”

“라이렌 왕자와 이레사 공작가.”

유리나가 당당히 고했다.

“그들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네.”

유리나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진짜 이레사 공녀처럼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며 왕세자에게 고했다.

“절 망명시키지 않고 왕국 내에 두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의 귀한 정보를 드리도록 하지요.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

유리나의 말을 들은 왕세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두근, 두근.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유리나와 왕세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리나가 내건 조건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특히 최근에야 정적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왕세자에게는 천상의 기회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왕권을 다져야 할 때이기에 정보가 더더욱 필요할 테다.

“……좋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가 이레사 공녀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 할 테다.”

“그 점은 걱정 마시지요.”

나는 거기서 슬쩍 끼어들었다.

“성형 마법이라고 들어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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