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마담 쟈니에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런 마담을 잠시 바라보던 로지에는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 저리 가!”
소스라치게 놀란 마담 쟈니에트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를 죽일 생각인가요? 하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찾는 사람들을 영영 찾지 못할 거예요!”
뒷걸음질을 치며 로지에를 향해 꽥 비명을 질렀다.
그런 마담을 묵묵히 바라보며, 로지에가 물었다.
“그래서, 데클란 군과 이레사 공녀님은 어디에 있나요?”
“그,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그랬다간 왕세자 전하께서 절 죽이실 거예요!”
“저에게 죽임당하는 건 두렵지 않나요?”
“그야 로지에 님은 절 죽이지 않을 거잖아요!”
창문까지 몰린 마담 쟈니에트가 악을 쓰며 외쳤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자신감이 감춰져 있었다.
“로지에 님, 당신은 너무 착해요! 그러니 당신은 절 죽이지 못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당신은 용병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잖아요! 다들 기절시키기만 했죠!”
마담 쟈니에트가 반쯤 실성한 듯이 로지에를 향해 삿대질했다.
“그, 그래! 당신은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어!”
“음? 사람을 죽이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해요? 그건 그냥 실성한 거 아닌가요?”
“뭘 모르는 소리! 권력을 얻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당신은 고작 썩어 빠지고 낙후된 영지의 영주로 남게 되는 거야!”
마담 쟈니에트가 충동적으로 헛소리를 이어갔다.
“만일 당신에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더라면, 아마 데클란이란 그 남자를 벌써 이용했겠지!”
“…….”
마담 쟈니에트의 말에 로지에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던 마담 쟈니에트는 제멋대로 혀를 놀렸다.
“사실 당신도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데클란이 국왕의 사생아였다는 걸 말이야! 당신이 조금이나마 더 현명했더라면 그놈을 팔아서 왕세자에게 빌붙었겠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로지에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마담 쟈니에트는 속사포처럼 말을 계속 내뱉었다.
“이제 와서 시치미를 뗄 생각이야? 데클란이란 그 남자, 사실 국왕의 사생아였잖아!”
“…….”
로지에의 얼굴이 단번에 풀어졌다. 그는 어쩔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담 쟈니에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뭐야, 그 표정은? 설마, 정말 몰랐던 거야?”
“…….”
“하하, 하하하!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 어떻게 자기 가문이 후원했던 사람이 국왕의 사생아였다는 것도 몰라?”
마담 쟈니에트는 침묵을 지키는 로지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빌며.
로지에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짜증 나.”
“뭐, 뭐라고?”
“데클란 군은 나한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말해 준 적 없는데…… 그걸 왜 당신이 알고 있어?”
마담 쟈니에트를 쏘아보는 로지에의 두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뭐, 뭐야?”
“당신보다 내가 더 데클란 군을 아끼고 좋아하는데…… 왜 내가 데클란 군에 대해 모르는 걸 당신이 알고 있는 건데?”
로지에가 마담 쟈니에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는 반쯤 이성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마담은 그제야 자신이 역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 잠깐만!”
마담 쟈니에트는 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탈주로를 빼앗긴 상태였다.
“데클란은 이 집무실에서 향하는 어딘가에 있어! 그리고 나 외에 그 누구도 데클란이 갇혀 있는 비밀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그런데 날 죽일 셈이— 악!”
비참한 비명과 함께 마담 쟈니에트가 그대로 바닥 위에 쓰러졌다.
* * *
문 앞에 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나는 문을 연 여자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백조궁에서 지낼 때 종종 보던 사람이었으니까.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 옆에 심어놓은 자신의 심복들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이 세티프니……였죠?”
나는 여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마력석이 반응하던 그곳에 서 있는 이는…… 이레사 공녀의 시녀였던 세티프니였다.
“…….”
세티프니는 아무런 말 없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데클란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마력석이었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왜 세티프니에게 있는 거지?
나는 덥석 세티프니의 멱살을 잡았다.
“데, 데클란은 어디에 있어요? 이레사 공녀님은?”
“저는 여기 있어요.”
세티프니의 뒤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번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나는 세티프니를 놓았다.
“이레사 공녀님!”
세티프니의 뒤로 걸어온 이는 이레사 공녀였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홀쭉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공녀님, 괜찮으세요? 왜 이런 곳에…….”
“사샤 경, 어서 이레사 공녀님을 데리고 도망치세요.”
내게 멱살이 잡혔던 세티프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내게 명령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지금 세티프니가 뭐라고 한 거지?
“이레사 공녀님을 데리고…… 도망치라고요?”
“그래요.”
세티프니는 짜증이 난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사샤 경, 왕세자 전하는 당신이 이곳에 올 것을 먼저 예상하고 있었어요. 왕세자 전하는 여기서 당신과 인페르나 소남작을 죽일 계획이에요.”
“네? 그게 무슨—”
“그러니 당신은 이레사 공녀님을 모시고 어서 도망치세요. 밖에 마차를 준비해 두었어요. 위조한 가문 인장을 붙여놨으니 추적당하지 않을 거예요.”
“도대체 뭘 한 거예요?”
“왕세자 전하에게는 소란 중에 이레사 공녀가 도망쳤다, 라고 보고할 거예요. 그러니 빨리 가세요.”
“도대체 왜…….”
세티프니의 말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사샤 경, 세티프니는 내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내 시중을 들었어요.”
이레사 공녀가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주일 넘게 갇혀 있었던 탓에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세티프니는 내가 죽지 않도록 왕세자 몰래 나를 빼돌릴 생각이에요.”
이맛살을 찌푸린 세티프니는 나를 재촉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할게요. 인페르나 소남작은 왕세자 전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대신, 이레사 공녀님과 데클란 님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요청했어요. 그리고 왕세자 전하는 제게 두 사람의 소지품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셨고요.”
두 사람의 소지품.
그제야 로지에가 내게 보여주었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이레사 공녀의 귀걸이와 데클란의 셔츠.
“그때 저는 데클란 님이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 마력석에 계속 마력을 불어넣어 당신과 인페르나 소남작을 여기로 불러들였죠.”
“아…….”
모든 게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와 로지에는 데클란의 마력석을 따라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그 마력석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던 건 데클란 본인이 아니라 세티프니였다.
“……그럼 데클란은 어디에 있어요?”
두 눈으로 창고를 훑은 내가 물었다.
세티프니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어째서요?”
“전 이레사 공녀님만 살아계시면 돼요. 그러니 당신은 어서 이레사 공녀님을 데리고 도망쳐요.”
“데클란을 두고 가라는 건가요?”
“멍청하게 굴지 말고 어서 가라고요! 제가 기껏 벌어준 시간을 허비할 건가요?”
마침내 참지 못한 세티프니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나 역시 견디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누가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했었나요? 아니, 애초에 당신이 왜 왕세자에게 협조하고 있는 건데요? 당신도 공범이죠? 그래서 데클란은 어디에 있냐고요!”
내 날카로운 취조에 세티프니 뜨끔했는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데클란 님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요!”
“뭐, 뭐라고요?”
“이레사 공녀님 살려드린 것으로 감지덕지해야지, 지금 뭔 짓 하는 거예요? 이래서 천박한 평민들이란…….”
나를 쏘아보던 세티프니는 창고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여기서 잡히면 난 더 이상 책임 안 질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도망…….”
“세티프니.”
이레사 공녀가 세티프니의 이름을 불렀다.
세티프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레사 공녀는 그녀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퍽!
이레사 공녀의 주먹이 그대로 세티프니의 턱을 날렸다.
순간 세티프니의 얼굴이 그대로 찌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물리적인 충격에 휩싸인 그녀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티프니가 저 멀리 날아갔다.
쾅!
벽에 부딪힌 세티프니는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나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이레사 공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충격에 휩싸인 내 시선을 인지한 이레사 공녀가 내게 허둥지둥 다가왔다.
“그, 그게! 세티프니가 사샤 님에게 너무 무례하게 행해서……! 저, 저도 세티프니가 저대로 기절할 줄은 몰랐는데요!”
이레사 공녀는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다.
“미, 미안해요, 사샤 님. 방금 너무 폭력적이었죠? 저 원래 이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괘, 괜찮아, 유리나…… 살다 보면 욱해서 사람 한 명 날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레사 공녀를 위로했다.
왠지 모르게 오금이 덜덜 떨렸다. 아무래도 기분 탓이겠지?
“그런데 넌 괜찮아, 유리나? 어디 다친 데 없어?”
“네에……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데클란 씨가 마력으로 보호해주셔서…….”
유리나는 정말 다친 곳이 하나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다행이다! 그럼 넌 그 뒤로 줄곧 여기에 갇혀 있었던 거야?”
“네. 데클란 씨도 여기에 갇혀 있어요.”
“정말? 데클란은 어디에 있어?”
“그게…….”
유리나는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