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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71)화 (171/177)

171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와 있었다.

익숙한 마을의 풍경이 눈에 밟혔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보고 자란 곳이어서일까. 가만히 시선을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발은 물 위를 걷고 있는 듯이 가벼웠다.

어디선가 향긋한 꽃내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향기에 끌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연분홍색의 꽃잎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축복하는 듯한 콘페티처럼 느껴졌다.

꿈속에서 나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내 시선의 종극에는 데클란이 서 있었으니까.

‘데클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나무처럼 무뚝뚝하던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수채화처럼 고운 느낌으로 번졌다.

살갗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너무나도 따스했다.

마치 봄이 나와 그의 손 사이로 찾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날 정도였다.

‘사샤.’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보고 있어, 사샤?’

‘그야 데클란 네가 좋으니까.’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진심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꼭 말해 주고 싶었다.

데클란 네가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너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데클란은 나를 향해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내 볼을 어루만진 데클란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미안해.’

툭.

데클란이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데클란……?’

데클란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네 옆자리를 언제나 지키겠다고 했던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 데클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데클란은 내게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잘 있어, 나의 사샤.’

‘데클란!’

‘이런 식으로 작별 인사를 해서 미안해.’

데클란이 나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나는 급히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석상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왜? 왜? 왜?

왜 움직일 수 없는 거지?

나는 억지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클란!’

나는 내게서 멀어지려는 데클란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에게 손이 닿길 바랐다. 그래야 그를 붙들 수 있을 테니까.

내 부름에 데클란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본 나는 세차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은 끝내 데클란에게 닿지 않았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데클란이 내게 고했다.

‘울지 마, 사샤. 마지막인데, 웃는 얼굴을 보여줘.’

‘그게 도대체 무슨……!’

‘날 잊지 마. 그러면 언젠가 나를 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사샤…….’

그 말을 뒤로 데클란은 고개를 돌렸다.

내게 등을 진 데클란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데클란! 데클란!’

나는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악을 쓰며 용을 써도,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부끄럼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리며, 나는 울부짖었다.

꿈에서 깨어난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사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단번에 두 눈을 떴다. 찬물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어릿어릿하던 눈앞이 도로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로지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밤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로지에가 들고 있는 마력석 등불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도련님?”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로지에의 얼굴에 걱정이 만연했다.

“무슨 꿈을 꿨길래 우는 소리를 내?”

로지에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그 잔을 받고는, 멍하니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제가 우는 소리를 냈어요?”

“응. 난 또 사샤 양이 아픈 줄 알고 잠에서 깼어. 괜찮아?”

“네…….”

나는 잔에 담긴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악몽을 꿨어요.”

“악몽?”

로지에의 반문에 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가 꿈에서 겪은 것을 다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대신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까지 줄곧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도련님. 만약에요…….”

잔을 침대맡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만약에, 오스첸스 아카데미에 갔는데…… 그곳에 가서 이 마력석이 반응하는 곳까지 찾아갔는데…….”

울먹이는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그랬는데…… 데클란이랑 이레사 공녀님이 죽어있으면…….”

“사샤 양.”

로지에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데클란 군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데클란 군은 분명히 이레사 공녀님도 지켜냈을 거야.”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안에 매캐한 무언가가 뒤섞인 듯이 속이 답답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목을 죄어왔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나는 내 목에 걸린 마력석을 한 손으로 쥐었다.

나는 데클란의 검에 매달려 있던 마력석을 풀어내 목걸이처럼 목에 매었다.

밤에는 마력석이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마력석 조각을 가진 이가 마력을 불어넣고 있지 않아서였다.

아무래도 늦은 시각이라 다른 마력석 조각을 든 사람도 잠이 든 거겠지…….

‘그게 데클란이 무사하다는 증거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력석을 꽉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로지에가 내게 물었다.

“불안해?”

“…….”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로지에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나도 불안해.”

“도련님…….”

“만일 사샤 양의 말대로 오스첸스 아카데미 안으로 갔는데 데클란 군이 없고, 이레사 공녀님도 없으면…… 어떡하지? 다른 누군가가 마력석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

나는 한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 나와 로지에가 아는 모든 정보를 합쳐도,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는 언제나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불확실함에 대해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천천히 로지에에게 말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불확실함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저희가 여기 있을 수 있었던 거예요.”

만일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의 시체가 절벽 아래에서 발견되었더라면.

두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눈앞에서 입증되었더라면.

나나 로지에는 아마 이 여관에 누워 두 사람을 되찾을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일 가서 결판을 내도록 하자.”

“네.”

나는 로지에를 향해 빙긋 미소를 보였다.

* * *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두 눈이 뜨였다.

평소와 달리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데클란! 유리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로지에는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도련님!”

평상시 같으면 로지에가 자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로지에를 깨운 나는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일어나세요!”

키오와 크레스가 묵고 있는 옆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들을 강제로 깨웠다.

“으악! 누, 누구세요?”

화들짝 놀란 크레스가 이불을 제 머리 위까지 씌웠다.

“전원 기상! 이동한다!”

“뭐, 뭐야? 특수 부대 훈련 끝난 거 아니었어? 나 제대했는데?”

“크레스 너 잠 좀 깨라! 키오 오빠도 어서 일어나요!”

“네, 네에!”

뒤늦게 키오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우당탕 준비와 재촉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반 시간 뒤.

우리는 인근 마을에서 빌려온 마차에서 내렸다.

참고로 마차를 몬 건 키오였다. 자신이 마차를 꼭 몰고 싶다면서 자원해서였다.

“여기가 오스첸스 아카데미…….”

키오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키오의 말대로 우리 앞으로 오스첸스 아카데미가 보였다.

아카데미 주변은 시장통처럼 북적북적했다.

오스첸스 아카데미는 나름 명문 아카데미답게 제법 많은 신입생이 오픈 하우스에 찾아왔다.

다행히 정문 양쪽에 선 문지기들은 우리를 하나하나 멈춰 세워 확인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줄 세워서 한 명씩 검사하는 것도 무리였다.

덕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파에 뒤섞여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신입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 끼인 키오는 일부러 모자를 꾹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행여나 경비가 자신을 잡아낼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키오를 흘끔 쳐다본 경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아카데미의 제법 안까지 들어간 뒤에야 키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저 아무래도 제법 동안인가 봐요.”

“그게 아니라 학부모로 착각 당한 거 아니에요?”

크레스의 합리적인 지적에 키오는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 둘에게 말했다.

“어제 말한 대로 이 부근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네.”

키오와 크레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사샤 양.”

“네.”

나는 로지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는 목에 건 마력석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마력석이 웅웅거리며 다시 반응하기 시작했다.

저번보다 더 강한 반응이었다.

확실했다.

이 부근에 다른 마력석이 있다.

그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 건 어쩌면 데클란일지도…….

“여긴 출입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로지에의 뒤를 따라 걷던 나는 엄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남자 하인이 나와 로지에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와 로지에는 교장 집무실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마담 쟈니에트와 그녀의 비서들이 사용하는 행정적 공간이었다.

이 건물 입구를 지키는 듯한 하인은 나와 로지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라보았다.

“신입생입니까?”

“아니, 졸업생이다. 나는 인페르나 남작가의 로지에라고 한다. 그리고 이쪽은 내 시종.”

살가운 미소를 지은 로지에는 그렇게 자신과 나를 소개했다.

나는 로지에의 시종답게 깔끔한 미소를 지으며 하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내 인사를 깡그리 무시한 하인은 로지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졸업생이 여기에 무슨 일로…….”

“아, 별일은 아니고.”

로지에는 내게 손짓을 했다. 이에 나는 미리 준비해 온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열기가 무섭게 오색찬란한 보석들이 빛을 뿜어냈다.

순간 시큰둥하던 하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오스첸스 아카데미의 밝은 미래에 기여를 좀 하려고 하는데.”

로지에는 방긋 웃으며 가방 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 하인에게 건네었다.

“마담 쟈니에트를 만날 수 있을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보석을 본 하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 물론이죠. 마담께서 지금 바로 만나실 수 있는지 확인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하인은 잽싸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지에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력석은?”

“강하게 반응하고 있어요.”

목에 걸어 둔 마력석을 꽉 잡은 채, 나는 교장 집무실 건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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