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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69)화 (169/177)

169화

다음 날 아침.

채비를 마친 나는 홀로 여관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아베라 자작가였다.

“아베라 자작가에는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

자작가 저택에 도착하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나를 멈춰 세우며 물었다.

나는 냉큼 말에서 내려왔다.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요.”

“친구요? 누군가요?”

“크레스요. 사샤가 찾으러 왔다고 하면 알 거예요.”

내 말을 들은 문지기는 심부름꾼에게 크레스를 불러오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출을 받은 크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샤 씨!”

나를 본 크레스는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이레사 공녀가 실종된 이후, 라이렌 왕자가 황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크레스는 그 뒤로 왕세자의 호위 기사직에서 파면됐다고 들었다.

이제 황국과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으니 특수 부대의 필요성도 사라졌다.

게다가 평민을 무시하는 성향이 강한 왕세자는 크레스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이참에 그 누구보다 더 빠르게 크레스를 잘라버린 것이다.

참고로 키오 오빠도 마찬가지로 해고됐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키오 오빠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벌써 고향으로 돌아갔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크레스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가요, 사샤 씨? 아…… 그 전에, 이레사 공녀님에 대한 일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눈꺼풀을 아래로 깐 크레스가 무거운 심정이 드러나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이레사 공녀가 죽은 뒤 내가 큰 충격에 휩싸였으리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든 희망을 버린 게 아니었다.

‘이레사 공녀, 그러니까 유리나는 아직 살아 있어!’

그렇게 속으로 외친 나는 크레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크레스, 나 사실 널 속였어.”

“네?”

“나 사실 엔리야.”

“뭐라고요?”

크레스는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크레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미리 챙겨온 분홍색 털 뭉치를 머리 위에 얹었다.

“으아아아악!”

분홍색 가발을 쓴 듯한 내 모습을 본 크레스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소, 솜사탕!”

“그래. 내가 바로 오스첸스 아카데미 시절 내내 솜사탕 선배라고 불렸던 그 엔리야.”

“에, 엔리? 사샤 씨가, 아니. 네가, 엔리라고?”

“그래, 크레스야. 네 아카데미 동창인 엔리야.”

크레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너…… 그럼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던 거야?”

“어? 아니. 나 여자야.”

“응?”

“그리고 나 사실 진짜 엔리가 아니야.”

“어?”

“그러니까, 내 이름은 사샤야. 엔리는 가명이야.”

“뭐?”

순간 크레스의 얼굴 위로 강력한 물음표가 수십 개 떠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모든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엔리이든 사샤이든 뭐가 중요해.”

“주, 중요해!”

겨우 정신줄을 붙잡은 크레스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그…… 엔리, 아니. 사샤. 나…… 사실 아카데미 다닐 때부터 널 좋아했어!”

얘 지금 뭐라는 거니.

“그, 그, 그러니까…… 만일 네가 내가 알던 그 엔리라면…… 나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지 않을래?”

응?

으으응?

으으으으응?

뜬금없는 크레스의 고백에 나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이건 또 뭐야?’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 놀라고 말았다. 다른 감정들보다 당혹감이 더 앞섰다.

“크레스, 나 사귀는 사람이 있어.”

나는 사실대로 크레스에게 고했다.

그 말에 크레스는 벌에 쏘인 사람처럼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뭐? 누군데? 서, 설마…… 인페르나 소남작님?”

“응? 아니, 데클란.”

“어째서!”

크레스가 다시 한번 자리에서 뛰었다.

“그렇지만, 걘 이미 이 세상에……,”

그러다가 크레스는 아차, 하고 제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미, 미안해. 내가 말을 심하게 했네.”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그저 가만히 크레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뭘 사과를 해. 넌 모르고 있어도 괜찮아.”

“어?”

“어쨌든, 나를 따라 오스첸스 아카데미로 가지 않을래?”

“갑자기?”

크레스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깐만…….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나 이러다가 정신 붕괴 상태가 올 것 같아.”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날 따라와.”

“…….”

크레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가늠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러다 크레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미안한데 널 따라갈 수는 없어.”

“왜? 그렇지만 우린 네 도움이 필요—”

“그게 아니라,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 그래.”

크레스가 급히 웃는 낯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난 당연히 널 도와줄 거야. 지금 아베라 자작가 저택으로 가서 휴가 낸다고 말할게.”

“……무슨 일인지 안 물어볼 거야?”

머리 위에 올려 둔 분홍색 털 뭉치를 내리며, 내가 조심스럽게 크레스에게 물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크레스에게 부탁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가 왜 그의 도움이 필요한지 전혀 세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크레스가 내게 이것저것 물어봐도 나는 말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크레스는 내 생각과 다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난 특수 부대에서 너한테 신세를 많이 끼쳤으니까.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도와주고 싶어. 그리고 또 아카데미 동문끼리 원래 이렇게 돕고 사는 거지.”

“크레스…….”

나는 찡한 감동을 느끼며 크레스를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다닐 때 그저 ‘리코더 잘 부는 놈’으로 여겼는데, 이렇게 큰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정말 고마워, 크레스. 그리고 널 차서 미안해. 빈말이지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빌게.”

“뭐가 미안해. 따지고 보면 말도 몇 번 못 섞어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고백한 내가 머저리지…… 그런데 나는 며칠 정도 휴가 내면 돼?”

다시 아베라 자작가로 돌아가려던 크레스가 내게 물었다.

“음…… 일단 사흘?”

“사, 사흘씩이나?”

크레스는 잠시 흠칫 놀란 듯이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만 기다려 줘. 집사님에게 허락받고 올게.”

그 말을 남긴 크레스는 자작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쉽게 지원군을 얻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크레스의 도움을 얻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무언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일단 도움을 구한 건 다행이었다.

잠시 뒤, 크레스는 정말 약속대로 자작가의 저택 정문으로 돌아왔다.

“가자, 사샤.”

크레스가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등에는 작은 배낭이 들려 있었다.

못해도 사흘 치 짐을 싸 온 것 같았다.

‘얘 생각보다 본격적이네.’

아무래도 아카데미 다닐 때 날 좋아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만반에 준비를 다 하고 나올 수 있을까.

“정말 고마워, 크레스.”

나는 크레스를 향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크레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고마우면 이제 내가 널 어떻게 도우면 되는 건지 말해줘.”

“음, 조금 힘든 일이 될 텐데도 괜찮아?”

“물론이지. 참고로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건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2년 재수한 거야. 아카데미랑 연관이 없는 일이면 다 괜찮아!”

그러면서 크레스는 지난 몇 년간의 아카데미 라이프가 떠올랐는지 하하하, 실성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크레스는 남들이 5년 안에 끝내는 아카데미를 무려 장장 7년 동안 다녔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필기시험을 못 봐서.

크레스는 검술이나 체술에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깃털 펜과 양피지를 쓰는 학문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덕분에 크레스는 1학년 과정을 두 번, 그리고 5학년 과정을 두 번 밟아야 했다.

따지고 보면 화석 중의 화석이었던 크레스다.

그런 크레스에게 나는 애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나와 로지에 도련님과 함께 아카데미에 가줬으면 해.”

“……?”

순간 크레스의 두 눈동자가 힘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이 고정 장치를 잃은 기계처럼 떡하니 벌어졌다.

아마 그의 머릿속으로 지난 7년간 아카데미의 추억이 과부하가 될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 안 돼!”

이윽고 크레스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 * *

나는 훌쩍거리는 크레스와 함께 말을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샤 누님!”

여관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 사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키오 오빠?”

“어라? 키오 씨?”

내 뒤를 따라오던 크레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키오를 반가워하면서도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키오 오빠, 여기서 뭐 하세요? 그간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아아, 그게 말이지…….”

키오는 제 뒷덜미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내 뒤에 선 크레스를 흘끔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려고요. 전 이제 더 이상 왕세자 전하의 호위 기사가 아니잖아요.”

“아하.”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크레스와 마찬가지로 키오도 해고당한 게 분명했다.

“와아, 키오 씨 다시 보니까 좋네요! 전 키오 씨가 벌써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내 옆으로 걸어온 크레스가 키오에게 반갑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키오 씨는 저보다 훨씬 더 먼저 왕성 밖으로 나가셨잖아요? 그래서 벌써 고향에 도착하신 줄 알았는데…….”

“……그게, 사정이 조금 있어서 이제야 출발하게 되었어요.”

키오가 아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모래 가루가 섞인 듯한 곱지 않은 웃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걱정된 내가 키오에게 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예요? 뭔가 힘든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아니요. 그냥 제 애인에게 일이 조금 있어서요.”

아아, 그분.

키오의 말에 나와 크레스는 동시에 한탄하고 말았다.

키오의 애인이라면…… 아마 결혼까지 생각했던 바로 그 연상의 여성분일 테다.

내가 키오의 연애편지를 보내느라고 왕궁 담까지 넘고 탈영까지 감행했었던 일이 있었지.

“일이 잘…… 안 풀렸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키오에게 물었다.

그러자 키오는 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죄송해요, 누님. 지금은 별로 그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헉, 어떡해.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100% 그거다.

‘키오 오빠, 차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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