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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68)화 (168/177)

168화

“……인페르나 소남작이 왕국 수도 부근을 돌고 있다고?”

“네, 그러합니다.”

왕세자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제법 머리를 굴린 모양이군.”

왕세자는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로지에의 예상이 맞았다. 왕세자는 이레사 공녀와 데클란을 왕국 수도에 숨겨두지 않았다.

워낙 보는 눈이 많고 듣는 귀가 많은 수도에 그들을 감추는 건 위험했다.

그래서 왕세자는 그들을 수도 근처로 빼돌렸다.

기회를 보고 있다가 두 사람을 어디론가 멀리 보낸 뒤, 흔적도 없이 없애버릴 계획이었다.

“저어, 전하……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소남작을 없애버리도록 할까요?”

왕세자의 심기를 살피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랬다가 괜히 나만 의심받게 될 거다.”

왕세자는 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일단 가만히 놔둬. 대신에 감시는 계속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남자는 왕세자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남자에게 왕세자는 금화 한 닢을 던졌다.

“지금까지의 일에 대한 보수다.”

“가, 감사합니다!”

남자는 급히 그 금화를 주워 잡았다.

돈을 받고 신이 난 남자는 급히 입을 놀렸다.

“그, 그리고 인페르나 소남작과 함께 움직이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 아, 그 이레사 공녀 호위 기사 노릇을 하던 계집을 말하는 건가?”

“계집……? 아, 아닙니다. 남자였습니다.”

“남자?”

왕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분명히 인페르나 소남작이 공녀의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문지기에게서 들었는데.”

“예? 하지만…….”

왕세자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여자 남자 제대로 구별도 못 하는 게 어디서…… 됐다. 너는 그냥 여기까지 하도록 해라. 이제부터는 다른 감시역을 붙이도록 하지.”

“저, 전하!”

“나가보도록 해.”

왕세자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같은 사람에게 인페르나 소남작의 뒤를 쫓으라고 하면, 소남작에게 의심을 살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슬슬 감시역을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이런 왕세자의 속마음을 모르는 남자는 입술을 꽉 물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

집무실 안에 홀로 남은 왕세자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인페르나 소남작이 과연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찾을 수 있을까?’

귀신 같은 자식. 용케도 수도 부근에 가둬둔 건 알아차렸구나.

하지만 왕세자는 자신이 있었다. 인페르나 소남작이 그들을 결국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두었으니까.

게다가, 어떻게 운이 좋아 그들의 행방을 알게 된다고 해도…….

‘……과연 그곳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아니.

단둘이서는 절대 못 할 거다.

왕세자는 그렇게 확신했다.

* * *

여관으로 돌아온 나와 로지에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하아…….”

깊은숨을 내쉬며,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오늘도 허탕이었다.

“에글리시 백작가도 아니고…… 렉싱턴 후작가도 아니었어.”

로지에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크라바트를 풀어 내렸다.

로지에는 정말 자부한 대로 멋지게 차려입었다. 마치 진짜로 귀족가에 인사를 올리러 간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로지에의 시종답게 그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마력석이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력석의 반응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이는 에글리시 백작가에서도, 그리고 렉싱턴 후작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왕세자의 측근이라고 생각했던 에글리시 백작가에서 마력석이 약하게 반응했을 때, 나와 로지에 둘 다 충격에 빠졌다.

“……설마 아베라 자작가인 걸까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왕세자가 아베라 자작가를 돈으로 매수해서 거기다가 데클란이랑 이레사 공녀 숨겨둔 거 아니에요?”

“글쎄…… 그래도 일단 아베라 자작가에도 한 번 가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로지에는 고개를 들어 올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해가 산을 넘어간 지 오래였다.

“일단 오늘 가는 건 무리인 거 같아. 내일 가도록 하자.”

“네…….”

한숨을 내쉰 나는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꼬르륵, 하는 소리가 배에서 흘러나왔다.

“……사샤 양, 배고파?”

“네. 도련님은 배 안 고파요?”

“온종일 돌아다녔는데 배고프지. 그럼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하고 오자.”

침대로 다가온 로지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우리는 무작정 여관 밖으로 나섰다.

여관 주인의 말로는 말을 타고 십여 분 정도 달리면 상가 거리가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의외로 낯익은 곳이었다.

“와아, 여긴…….”

말을 멈추고 내린 나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이곳은 나나 로지에나 둘 다 잘 아는 곳이었다.

바로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쇼핑 거리였다.

“여기도 참 오랜만이네.”

로지에가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나와 로지에 둘 다 아카데미 재학생이었다.

그때의 추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저 가게에서 데클란 주려고 마차 모형 샀었는데…….’

여러 번 들락날락했던 가게를 다시 보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리고 저기서 유리나를 처음 만났고…….’

인파가 분주히 오고 가는 도로를 바라보자,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그렇게 추억에 사로잡힌 나와 로지에가 아무런 말도 없이 걷고 있을 때였다.

웅—. 웅—.

“어?”

화들짝 놀란 나는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마력석에 반응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에글리시 백작가나 렉싱턴 후작가에 있었을 때보다도 더 강한 반응이었다.

“……!”

나와 로지에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나와 로지에는 도로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한 손으로 마력석을 꽉 쥔 나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나는 마력석의 반응을 살피며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돌아갔다가 마력석의 반응이 가라앉으면 도로 왼쪽으로 꺾었다.

그러다 반응이 또 가라앉으면 반대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미로를 휘젓듯이 돌아다닌 뒤였다.

마력석의 반응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긴가?

쿵쿵 뛰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장소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

그랬다.

마력석의 반응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그곳은…… 오스첸스 아카데미의 대문 앞이었다.

* * *

“…….”

“…….”

여관으로 다시 돌아온 나와 로지에는 침묵 속에 잠겼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오스첸스 아카데미 앞에 한참 동안 서 있던 우리는 그대로 여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카데미 정문 앞으로 순찰을 하던 문지기가 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괜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나와 로지에는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 온 통밀빵을 먹으며,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데클란 군의 마력석을 훔친 게 아닐까?”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로지에가 천천히 말했다.

“그걸 누가 훔쳐요? 데클란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면서요.”

“그럼 왕세자가 데클란의 마력석을 빼앗아서 오스첸스 아카데미에 둔 게 아닐까?”

“왜 하필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요?”

“그건…….”

“그리고 마력석이 반응을 보이려면 마력을 넣어야 하잖아요. 그럼 누가 데클란의 마력석에 마력을 넣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마땅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로지에는 다시 조용해졌다.

로지에는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가 오스첸스 아카데미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회의적이었다.

“뭔가 이상해. 왜 오스첸스 아카데미인 건데? 이건 왕세자가 놓은 함정일지도 몰라.”

로지에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사샤 양, 우리 진정하고 같이 생각을 해보자. 뭔가 이상하잖아.”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건가요?”

내가 로지에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가 다소 거칠게 나온 탓이었다.

“아카데미 안 어딘가에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님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가만히 있을 건가요?”

“만약에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데클란이 아니면?”

로지에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반문했다.

“사샤 양, 데클란이 가지고 있는 마력석으로부터 반응이 왔다고 해서, 그 마력석을 지금 가진 사람이 데클란이라는 보장은 없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래도 결국 데클란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잖아요.”

“…….”

내 말을 들은 로지에는 완전히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복잡한 인과관계와 계산이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샤 양의 말이 맞아.”

한참 동안 신중한 생각에 잠겨 있던 로지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샤 양의 말대로 일단 시도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데 아카데미 안으로는 어떻게 들어가지?”

“어차피 곧 입학 시즌이잖아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내가 말했다.

“기숙사로 짐을 옮기는 마차에 숨어들어서 안으로 가면 어떨까요.”

로지에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왜 굳이 마차에 숨어들어?”

“네?”

“내가 마담 쟈니에트에게 면담 신청을 할게.”

정면 돌파?

황당하고도 당돌한 로지에의 계획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담 쟈니에트가 도련님을 만나줄까요?”

“만나고 싶어 하게 만들면 되지.”

그 말과 함께 로지에는 자신의 짐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에 기부금을 조금 준다고 하면 어떨까?”

로지에는 가방 안에 든 보석들을 내게 선보였다.

헉.

나는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방 안을 가득 채운 건…… 온갖 진귀한 보석들이었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오팔, 페리도트, 가넷, 에메랄드, 토파즈 등등.

커다란 보석 알들이 야밤 중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반짝 빛났다.

“도, 도련님…….”

이번 기부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보석들…… 다 어디서 났어요?”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음? 이레사 공녀님이 나한테 준 거야.”

“네? 왜요?”

“사샤 양을 잘 보살펴 준 공로를 높게 산다고 포상으로 주셨어.”

언제 그런 걸 한 거지?

나는 얼이 빠진 얼굴로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의 보석들이라면 일단 마담 쟈니에트를 만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문제는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간 뒤의 일이었다.

나와 로지에 단둘이서 과연 그 넓은 아카데미를 돌며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오스첸스 아카데미로 같이 갈 사람을 한 명 더 영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로지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네, 있어요.”

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시절 인맥을 자랑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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