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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67)화 (167/177)

167화

누군가가 왕세자의 집무실 문을 급히 두드렸다.

“전하, 인페르나 소남작이 왕궁을 떠났습니다.”

“그래?”

공무를 처리하고 있던 왕세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이렌 왕자가 황국으로 떠난 뒤, 왕세자는 온갖 귀족들에게 서신을 받고 있었다.

라이렌 왕자가 왕국 밖으로 쫓겨났다는 건 즉 이 왕국 안에 더 이상 왕위를 도전할 경쟁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여 온 나라의 귀족들은 왕세자에게 붙기 위해 온갖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왕세자를 좋게 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왕세자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라이렌을 다시 왕국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물론 왕세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라이렌이 다시 왕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죽여버릴 계획이었으니까.

오래간만에 독점하게 된 권력이다. 이를 이용해 왕위에 도전할 수 있는 왕족들은 전부 다 없애버리면 된다.

‘데클란 그놈도 포함해서 말이지.’

유유히 찻잔을 들어 올린 왕세자는 차향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인페르나 소남작의 시종이 실은 국왕의 사생아라는 소식을 처음 세티프니로부터 접했을 때, 왕세자는 그녀를 의심했다.

하지만 왕세자가 모은 모든 정보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 뒤로 왕세자는 줄곧 데클란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인페르나 영지를 완전히 망가뜨려야 해.’

인페르나 남작가.

변방의 하찮은 가문인 줄 알았더니, 설마 국왕의 사생아를 품고 보호해주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겁도 없이 그 사생아를 왕국 수도까지 데리고 오다니.

분명히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데클란을 앞세워 자신이 모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인페르나 영지를 가만히 놔두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데클란을 인질로 살려둘 계획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인페르나 소남작 뒤에 사람을 붙여.”

왕세자가 제 사람에게 명령했다.

* * *

나와 로지에는 말을 타고 반나절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달리던 우리는 수도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말을 세웠다.

“휴.”

한숨을 내쉰 나는 내가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왕국 수도에서 가까운 도시였다.

‘오스첸스 아카데미가 여기 근처에 있었지.’

학창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적당히 멀리 왔겠지?

“도련님, 오늘은 이만 쉬었다 가도록 할까요?”

“그래, 그러도록 하자.”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적당한 여관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로지에가 말을 마구간에 묶어두러 간 사이, 내가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뭐 필요하세요?”

“2인실 방 하나 주세요.”

“며칠 묵을 건데요? 요금은 선불이라 미리 계산해 주셔야 해요.”

“음…… 그럼 일단 하루만 지내는 걸로 할게요.”

그 말과 함께 나는 지갑을 꺼냈다. 일전에 이레사 공녀에게 받아두었던 봉급을 모아둔 게 있었다.

숙박비를 계산하고 있는데, 말들을 마구간에 두고 온 로지에가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뭐가 필요하신가요?”

로지에의 행색을 살펴본 여관 주인이 공손하게 물었다.

“아, 저랑 같은 일행이에요.”

내가 로지에 대신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네?”

내 말을 들은 여관 주인은 잠시 놀란 듯이 나와 로지에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전 또 그쪽이 여자인 줄 알았네요! 의심해서 미안해요!”

그러면서 여관 주인은 내게 방 번호가 달린 열쇠 하나를 건네었다.

“……다들 제가 남자로 보이나 봐요.”

방을 찾아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내가 로지에에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로지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 뭐 어때. 연인 사이라고 오해받는 것보다 더 낫잖아.”

“그냥 그렇게 오해받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응? 난 싫어. 데클란 군에게 실례인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런 게 있어. 여하튼, 어서 들어가자.”

로지에는 우리가 묵을 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양손에 짐 가방을 든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일인용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인 작은 방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가구들이 놓여 있는 조촐한 공간이었다.

“왕세자가 저희에게 미행을 붙인 건 아니겠지요?”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로지에에게 속닥거리며 물었다.

라이렌은 제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의심병이 도진 사람이었다.

그의 친형인 왕세자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로지에는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지. 그러니 일단 조심하자.”

“좋은 생각이에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로지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에 커튼을 쳤다.

나는 짐 가방 안에서 마력석을 꺼내 등불 안에 넣었다.

“사샤 양, 지도 어디에 있지?”

“여기요.”

나는 겉옷 안에 넣어 둔 지도를 꺼냈다.

왕국 수도를 벗어나면서 구매했던 지도였다. 수도를 비롯한 이 부근 지역의 주요 마을과 건축물들, 그리고 귀족 가문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었다.

로지에는 등불을 들어 올려 지도를 비췄다.

“아까 마력석이 제일 강하게 반응한 곳이 어디야?”

“이쪽 마을 지날 때요.”

내가 지도 위에 한 마을을 가리켰다.

지도 위의 마을을 지나갈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마력석이 예전보다 더 강하게 움직였다.

검에 매달린 마력석은 간헐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때문에 우리는 마력석의 반응을 쉽게 살필 수 있었다.

즉, 그 마을 근처에 데클란이 가진 마력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왕세자는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님을 수도에서 그리 멀리 빼돌리지 못했을 거야.”

지도를 세세히 살펴보던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한 사람도 아니고, 두 명이야. 게다가 데클란 군은 마력이 강하니까…… 쉽게 제압하고 움직이기 어려웠을 거야.”

로지에가 진중하게 자기 생각을 펼쳤다.

“게다가 이레사 공녀님이 실종돼서 온 왕국이 뒤집힌 상황이잖아. 자칫 잘못해서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님이 살아 있다는 걸 들키게 되면 왕세자 관점에서 끝장이겠지.”

“확실히 그렇네요.”

“아마 왕세자 측근의 저택 어딘가에 숨겨놨을 거야.”

신빙성이 높은 추리였다.

로지에의 말에 따르면, 왕세자는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어디론가 숨겨둔 상황이라고 했다.

로지에는 왕세자의 뜻대로 라이렌 왕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그 결과 라이렌 왕자는 황국으로 쫓겨났다.

그 뒤 로지에는 왕세자를 만나 두 사람의 행방에 대해 여러 차례 물었지만, 왕세자는 ‘때가 되면 풀어주겠다’라는 말만 고수했다.

그러나 로지에는 직감하고 있었다.

왕세자는 절대 그 두 사람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제 친동생까지 외국으로 내쫓은 매몰찬 남자였다. 하물며 제 혈연이 아닌 다른 이들은 어떠할까.

아마 전부 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써먹을 생각이겠지.

로지에에게 그간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왕세자가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어떻게 할지는 몰랐다.

어쩌면 두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국외로 추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소리 소문도 없이 살해하던가.

어쨌든 그 끝이 좋지 못하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하루빨리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구해내야 했다.

“이 부근에는 세 개의 귀족 가문이 있어. 렉싱턴 후작 가문, 에글리시 백작 가문. 아베라 자작 가문. 혹시 이 가문들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음…… 에글리시 백작 가문이랑 아베라 자작 가문은 알아요.”

나는 아카데미를 다닐 때 들었던 가문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에글리시 백작 가문이라면 한 번 들어봤다. 신입생 환영회 때 내게 다짜고짜 검술 대결을 신청한 놈을 후원하던 가문으로, 검술이 뛰어나다고 했었다.

그리고 아베라 자작 가문은 크레스가 섬기는 가문이다.

“둘 다 왕세자 측근이야? 사샤 양이 보기에 어때?”

“에글리시 백작 가문은 확실히 왕세자 측근이고…….”

특수 부대에서 훈련할 때 가끔 에글리시 백작 가문 출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가문 출신의 몇몇 사람이 왕세자의 개인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베라 자작 가문은…….

“아베라 자작 가문은…… 왕실 회의에도 안 나올 걸요?”

내 기억상 그랬다.

크레스는 항상 자신이 섬기는 가문이 다른 귀족들에게 무시당한다며 원성을 토로했었다.

비록 수도 근처에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었지만, 고작 자작 가문이란 이유로 은근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세자 측근, 라이렌 왕자 측근을 할 것도 없이…… 아베라 자작 가문은 그냥 정치판에 연이 없는 가문이었다.

내 설명을 들은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에 렉싱턴 후작 가문은 라이렌 왕자를 밀어주던 가문이었어. 지금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에글리시 백작 가문 근처부터 돌아볼까요?”

나는 지도 위에 표시된 에글리시 백작가의 저택을 한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왕세자의 측근이 우리를 수상하게 여겨 왕세자에게 보고할 수도 있으니까, 무언가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해서 가자.”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에글리시 백작가에 인사드리러 온 것처럼 꾸미고 가죠.”

로지에는 곧 인페르나 남작 작위를 물려받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귀족들과 관계를 다지기 위해 문안을 하러 온다는 건 그리 이상할 게 없었다.

내 계획을 들은 로지에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 정말로 인사하러 온 것처럼 잘 꾸며보도록 할까.”

자리에서 일어난 로지에는 제 가방을 들고 욕실 안으로 향했다.

“어디 가세요, 도련님?”

“멋 부리러.”

그 말을 남긴 로지에는 그대로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뒤를 이어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열정이 넘치시는데……?’

졸지에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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