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손이 저절로 덜덜 떨려왔다.
마력석이 움직이고 있다는 건…… 이 마력석의 다른 절반에 누군가가 마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절반을 가지고 있는 건…….
“……데클란.”
내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설마.
설마 데클란이 아직 살아 있는 건가?
그렇다면 유리나는?
절벽에 떨어지기 전까지 데클란이 유리나와 함께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럼 유리나도 데클란과 마찬가지로 무사한 건가?
그때였다.
로지에가 또다시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로지에의 손에 들린 건…… 이레사 공녀가 실종되었던 당일에 착용했던 귀걸이였다.
로지에가 이걸 왜…….
나는 황급히 로지에의 팔목을 꽉 잡았다.
“도, 도련님…… 지금 이건……!”
“왕세자에게서 받았어.”
“네, 네에?”
“일단 짐 싸. 가면서 얘기하도록 하자.”
로지에가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아직 백조궁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를 들을지도 몰랐다.
나는 급히 방 안에 있는 내 옷가지와 개인 물품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나와 로지에가 백조궁으로 나가는 동안 그 누구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희들 이제 더 이상 수사 안 받아도 되는 건가요?”
“응.”
로지에는 백조궁 밖에 준비되어 있던 말 한 마리를 내게 내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 양이 백조궁 안에 있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예를 들어서요?”
얘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말인데, 라고 생각하며 나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로지에 역시 자신의 말의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황국으로 떠나셨어.”
“네?”
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라이렌 왕자 놈이 왜 황국으로?
“왕세자 전하께서 이레사 공녀님이 돌아가셨으니 다른 왕족이 대신해서 황국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셨거든.”
로지에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뒤로 로지에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이레사 공녀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뒤, 왕궁 내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이레사 공녀가 없어졌으니 누가 황국에 가야 한단 말인가!”
왕국 귀족들에게 급한 건 이레사 공녀의 생사가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누가 평화 협정 대사로 황국에 가는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왕세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렌 왕자를 밀어붙였다.
“원래 황국으로 가야 하는 건 이레사 공녀 아닙니까? 그런데 그녀가 안타까운 사고로 죽었으니, 대신 라이렌 왕자가 황국으로 가서 자신의 죽은 약혼녀를 추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 죽었다니요! 아직 수색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라이렌 왕자는 급히 반발했다.
그러나 수색이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지만, 이레사 공녀의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에 험한 지역이었다. 웬만한 마력을 가진 이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절벽이었다.
그렇게 누가 황국에 가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사이.
인페르나 소남작의 충격적인 증언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라이렌 왕자가 일부러 자신의 기사들을 암살자로 분장시켜 보냈다?”
인페르나 소남작의 증언을 읽은 국왕 폐하는 혀를 찼다.
수사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전하. 여러 명의 수사관이 일주일에 걸쳐 확보한 증언입니다. 거짓말이 아닌 게 확실합니다.”
“이건 모함이다!”
수사관의 말을 들은 라이렌 왕자가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암살자를 보냈다니! 내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냐!”
“자작극을 꾸민 뒤 제게 그 죄를 씌우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왕세자가 국왕에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뒤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낯빛이 어두운 한 남자가 등장했다.
“너, 너는……!”
남자의 얼굴을 본 라이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는…… 내 호위 기사잖아! 어째서 왕세자와 함께 있는 거지?”
라이렌의 당황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호위 기사는 국왕 폐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저는 라이렌 왕자 전하의 호위 기사로서 항상 전하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자 전하께서는 제가 듣는 앞에서 종종 왕족으로서의 긍지를 잃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무슨 발언을 했다는 것이냐?”
국왕의 질문에 호위 기사는 후,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는…… 이레사 공녀님이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있으시면, 왕세자 전하에게 그 누명을 씌우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호위 기사의 말을 들은 라이렌 왕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행여나 공녀가 다쳐도 뭐가 나쁘다는 거지? 왕세자에게 뒤집어씌우면 돼!’
그래…… 확실히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레사 공녀더러 궁 밖으로 나가 민심을 끌어모으라고 했었다.
그때 제 호위 기사가 만일 누군가가 공녀를 해하면 어쩌겠냐며 걱정을 토로했었다.
그 토를 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홧김에 반쯤 진심이 담긴 그런 말을 했었는데.
그게 설마 이렇게 자신에게 되돌아올 줄이야…….
호위 기사의 진술에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망측한 발언입니까!”
“왕자 전하께서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요?”
일국의 왕자가 남에게, 그것도 왕세자에게 누명을 씌운다고 말했다니.
그 발언의 파장은 즉시 온 귀족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새,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라이렌 왕자가 자신의 호위 기사였던 남자를 향해 삿대질하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왕세자가 예상했다는 듯이 침착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 증인을 들여다 보내라.”
이에 다른 인물들이 줄줄이 회의장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백조궁의 하인들이었다.
“왕자 전하께서 확실히 그런 발언을 하셨습니다. 저희가 응접실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인들은 구체적인 상황 설명을 곁들어 주장을 펼쳤다.
한 명이 아닌 여러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니, 처음에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마음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증인들이 더 있습니다.”
다음으로 들어온 이는 이레사 공녀의 시녀였던 세티프니였다.
“세티프니! 네년이 감히!”
세티프니를 본 라이렌은 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런 라이렌을 애써 무시하며 세티프니는 제 증언을 이어갔다.
왕세자는 단단히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끊임없이 증인들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국왕이 불쾌한 표정으로 라이렌을 노려보았다.
“수치스럽구나, 2왕자!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폐, 폐하! 아닙니다, 이건 모두 왕세자가 꾸민…….”
“결국에는 또 왕세자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국왕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여봐라! 라이렌 왕자를 제 궁에 가두고, 황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해라!”
국왕의 마음이 라이렌 왕자로부터 완전히 돌아간 순간이었다.
상황이 자신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돌아간 것을 깨달은 라이렌은 급히 측근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건가! 왕세자가 꾸민 일이란 걸 그대들도 다 알잖아!”
그러나 이미 국왕의 명령이 떨어진 후였다. 라이렌 왕자의 측근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레사 공작! 내가 이레사 공녀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잖아!”
라이렌은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이레사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사자의 아버지인 이레사 공작이 어쩌면 이 상황을 엎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쥐꼬리만큼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잃었다는 충격에 빠진 이레사 공작은 이미 왕세자의 말에 설득당한 뒤였다.
“제 딸을 함부로 대하신 것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전하!”
“이레사 공작! 나는 아니라고—”
“시끄럽다!”
국왕이 라이렌 왕자를 향해 호통을 쳤다.
기사들이 라이렌 왕자를 자리에서 끌어냈다.
“왕세자! 네가 감히 나를!”
라이렌 왕자가 왕세자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그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라이렌, 내 어리석은 아우.”
왕세자가 라이렌을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네 아랫사람을 챙기지 못한 넌 왕이 될 자격이 없다.”
그것이 라이렌 왕자의 마지막이었다.
그대로 제 궁으로 끌려간 왕자는 궁 안에 갇혀 지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라이렌 왕자는 황국에 보내졌다.
지금쯤이면 마차 안에 짐짝처럼 실린 채 황국으로 이동되고 있을 테다.
* * *
‘꼴 좋다.’
로지에로부터 그간 있었던 일을 들은 나는 고소해했다.
황국에 귀빈으로 보내진다는 건 곱게 표현한 거지, 실은 추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궁에 쌓아놓은 모든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잃고 볼모로 추락하게 되었다니.
제 사리사욕만 좇던 라이렌에게 꼭 걸맞은 결말이었다.
“그러니까…… 왕세자가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님을 어디론가 숨겨두었다는 건가요?”
나는 로지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왕세자에게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달라고 했더니, 왕세자가 다음 날 두 사람의 소지품을 내게 보내줬어. 데클란의 셔츠, 그리고 공녀님의 귀걸이.”
“그게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까요?”
내가 조금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로지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꼭 그렇지는 않지. 하지만 공녀님의 귀걸이의 상태를 보면 망가진 흔적이나 혈흔이 묻었던 흔적이 없어. 그러니 최소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무사했다는 뜻이겠지.”
“왕세자가 소지품을 조작했을 가능성은요?”
“사샤 양은 참 꼼꼼하네. 하지만 이레사 공녀님의 귀걸이는 마력석으로 만든 거야. 위조할 수가 없어.”
“데클란의 셔츠는요?”
“데클란은 자기 셔츠도 직접 만들어서 입잖아. 이니셜까지 박힌 거 보면 데클란 본인의 셔츠가 맞아.”
그 말에 나는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럼 이레사 공녀님과 데클란의 수색은 어떻게 된 건가요?”
그렇게 물으며 나는 말 위로 올라탔다. 로지에 역시 제 말 위로 뛰어올랐다.
“철수했어.”
“네?”
“국왕 폐하께서 이레사 공녀가 죽었다고 공식으로 선포하셨어. 장례식은 이레사 공작가에서 치러질 예정이야.”
“아…….”
이레사 공녀를 위한 장례식이라.
무언가 조금 우스웠다.
사실 진짜 공녀는 죽은 지 한참이 지났을 텐데.
이제야 장례식이라니.
‘이대로 이레사 공작도 자기 가짜 딸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말을 부추겼다.
“어서 가자, 인페르나 영지로!”
히이잉—!
내 부름에 말이 우렁차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