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왕세자의 잔혹한 말에 세티프니의 안색이 변했다.
“잠시만요, 전하. 죽이신다니요?”
“왜 그리 놀라는 거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왕세자가 도리어 태연자약하게 되물었다.
세티프니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게, 분명히 국왕 폐하의 사생아만 죽이신다고…….”
그리고 이레사 공녀님을 살리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세티프니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아아, 그랬었지.”
왕세자가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이 태평스레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레사 공녀를 살려두어봤자 내가 무슨 이득을 보겠어.”
“이레사 공작을 협박할 수 있는 패로 쥐고 계실 수 있지 않습니까.”
세티프니의 말에 왕세자는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라이렌 그놈만 없으면 이레사 공작은 이 빠진 사자나 다름이 없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입니다, 전하. 이레사 공녀님까지 해치시는 건…….”
“시끄럽다.”
계속되는 세티프니의 항의에 왕세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공녀가 나중에 제 아버지에게 나에 대해 불리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해져. 후환이 없도록 죽이는 게 답이다.”
그러고선 왕세자는 세티프니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축객령에 세티프니는 말 한마디 더 덧붙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대신 그녀는 왕세자의 명령대로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의 소지품을 수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티프니는 모두의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왕성 밖으로 향하는 마차 위에 올라탔다.
‘……이레사 공녀님까지 죽일 거라고?’
덜컹, 덜컹.
마차 안에 앉은 세티프니는 제 손톱을 뜯었다.
무언가 불안했다.
세티프니가 처음 왕세자에게 붙었을 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레사 공녀만큼은 건드리지 말자고.
딱히 이레사 공녀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배후가 두려웠을 뿐이었다.
후작가 영애로 자라온 세티프니는 왕국 수도에 있는 저명한 가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그녀는 이레사 공작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이레사 공녀가 어렸을 때 실종되었던 사건만 떠올려봐도 그러했다.
이레사 공녀가 사라진 뒤, 이레사 공작은 온갖 미친 짓을 저질렀다.
이레사 공녀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녀의 유모와 하녀들을 전부 숙청했고, 또 공녀의 행방을 찾아오지 못한 일꾼들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전부 다 사형시켰다.
한동안 이레사 공작가에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는 괴담 아닌 괴담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올 정도였다.
이레사 공작은 그 정도로 제 딸을 끔찍이 아꼈다.
어쩌면 그랬기에 이레사 공작은 자신의 딸이 황국에 가는 걸 흔쾌히 허락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이레사 공녀가 황궁 안에서 철통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레사 공녀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왕세자 전하가 미리 손을 써서 공녀님과 그 국왕의 사생아를 빼돌린 거지만…….’
세티프니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지금 이레사 공작은 온갖 미친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제 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그대로 혼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부수며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모자라 벽에 걸어둔 장식용 검을 빼내 휘둘렀다고 한다.
듣자 하니 그 소동에 여러 사람이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지금 이레사 공작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반미치광이 상태였다.
‘난 왕세자 전하께서 라이렌 왕자님을 황국으로 보내고 난 뒤에 이레사 공녀님을 도로 공작가로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라이렌 왕자를 왕국 밖으로 내쫓은 뒤, 더는 쓸모가 없는 이레사 공녀를 풀어줄 줄 알았다.
실종됐던 이레사 공녀를 공작가로 다시 보내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이레사 공녀가 절벽에서 추락한 뒤, 한 농부 부부가 그녀를 집에 데리고 가서 치료했다. 회복해서 의식을 찾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
대충 이런 신파극 한 편을 찍어내면 될 일이었다.
‘만약에…… 이레사 공작이 내가 공녀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떡하지?’
딱, 딱.
세티프니는 제 손톱을 깨물었다.
이레사 공작은 몇 년 동안 미친 듯이 자신의 딸을 찾았다.
모두가 그에게 말했다. 이레사 공녀는 죽은 게 분명하다고, 그러니 이제 포기하라고.
그러나 이레사 공작은 계속해서 제 딸의 행방을 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제 딸을 찾아냈다.
그런 광기의 공작이 이번에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다.
‘나중에 꼬투리가 잡히면 어떡하지?’
왕세자는 교활한 인간이었다.
만에 하나 나중에 이레사 공작이 제 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면, 왕세자는 당장 손을 털고 모든 혐의를 다른 이에게 떠넘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죄는 세티프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되겠지.
‘안 돼.’
두 손을 모은 세티프니는 입을 꽉 다물었다.
‘국왕 폐하의 사생아는 몰라도, 이레사 공녀님을 죽게 둘 수 없어!’
* * *
“…….”
침대에 누운 나는 가만히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얼룩도 먼지도 없는 새하얀 천장이었다.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데클란…… 유리나…….’
머릿속에 두 사람의 이름이 자꾸만 감돌았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두 사람의 이름을.
사냥 대회의 사건 이후, 나는 줄곧 백조궁 안에 갇혀 지냈다.
이레사 공녀가 실종된 이후, 공녀의 사람들은 모두 궁 안에 연금(軟禁)되었다.
수사관들이 찾아와 백조궁 사람들을 하나하나 심문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이레사 공녀님 곁에 없었던 겁니까?”
나를 향한 수사관의 첫 질문이었다.
그 말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이유야 잘 알고 있었다.
윗놈들이 나더러 사냥 대회에 참가하라고 해서 참가했던 것뿐이다.
그렇지만.
‘……만일 내가 유리나 옆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데클란과 유리나는 지금 나와 함께 이 백조궁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뿌리를 깊게 내린 독과 같았다. 중독된 것처럼 나는 그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수사관과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아는 대로만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나는 사냥하러 사냥터에 갔었다. 이레사 공녀님에게 사자를 잡아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사자를 잡으러 갔다. 그 뒤로 사자를 잡았다. 그런데 사자를 어떻게 끌고 갈지 몰라서 사냥터 입구로 되돌아갔는데…….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횡설수설을 대충 들은 수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는 급히 잡았다.
“데,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님은…… 어떻게 된 건가요?”
“……국왕 폐하께서 장례식을 명령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색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는 아직도 행방불명인 상태였다.
그런데 벌써 장례식을…….
나는 수사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두, 두 사람 모두 죽었을 리가 없어요! 제대로 수색하고 있는 게 맞아요?”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사관은 나를 방에 두고 떠나갔다.
그 뒤로 나는 줄곧 방 안에만 갇혀 있었다.
“…….”
로지에는 어디에 있을까. 그도 나처럼 연금당한 건가.
‘우리 도련님…… 식사는 잘하고 계신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
내 질문이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사샤 양!”
“도련님!”
로지에의 얼굴을 본 나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를 향해 달려온 로지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 얼굴을 본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 이러다 뼈만 남겠어!”
“그러시는 도련님도 만만치 않으신데요!”
나 역시 마찬가지로 로지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호리호리한 체형인 로지에는 평소보다 더 말라 보였다. 지난 며칠 동안 고생한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조사 다 받으셨어요?”
“으응…….”
로지에는 내 시선을 사선으로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제 집에 가자, 사샤 양.”
“네? 하지만…….”
데클란과 유리나는 어떡해요?
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랬다간.
로지에마저 내게 두 사람이 더 이상 없다고 못 박아 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 같이 인페르나 영지로 가기로 했었잖아요.”
나는 텅 빈 시선으로 로지에를 주시했다.
“저랑 도련님 둘이서만 돌아가는 게…… 말이 돼요?”
나도 모르게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간 억제하지 못한 쓰라린 감정이 목청 너머로 역류할 것 같았다.
심장이 무거웠다. 이런 천근만근 되는 것을 매일 몸 안에 품고 다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도 수색 중이지요? 데클란이랑 이레사 공녀님은……,”
“사샤 양.”
로지에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여기에 없어.”
“아…….”
“왕궁에 더 지낼 이유가 없어.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자.”
으슬으슬한 한기가 내 몸을 덮었다. 분명히 화창한 날인데도 춥게만 느껴졌다.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뚝. 뚝.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물 밖으로 나와 호흡이 끊긴 것처럼, 나는 이 방 안의 이질적인 공기를 억지로 삼켰다.
“왜…… 왜 이렇게 빨리 단언하시는 거예요?”
“무엇을?”
“왜 데클란이랑 이레사 공녀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직 시체를 찾은 것도 아니면서……!”
그 말을 하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나를 바라보던 로지에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만일 지금 이곳에 인페르나 남작님이 계셨다면, 분명히 날 무척이나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셨을 거야.”
어색한 자세로 나를 안은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눈물을 억지로 삼킨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로지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쓴웃음을 짓고 있는 로지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여자조차 제대로 위로 못 하는 주제에 무슨 능력으로 영주가 되겠냐면서…… 나한테 잔소리를 퍼부으실 것 같아.”
“…….”
생각해 보니 인페르나 남작님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았다.
“나더러 가문의 수치라면서 아예 인페르나 가문 족보에서 내 이름을 빼겠다고 하실 것 같아. 그러니까 울지 말아 줘.”
“……인페르나 남작님한테 안 이를게요.”
“그래. 고마워.”
로지에가 하하, 얕은 웃음을 흘리며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데클란 군이 지금 날 보면 나한테 검술 결투를 신청할 것 같아. 그리고 날 반쯤 죽이겠지.”
“…….”
“데클란 군은 사샤 양을 엄청나게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데클란 군에게도 이르지 말아 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도련님, 지금 그 말은…….”
“가자, 사샤 양.”
그러면서 로지에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
나는 그대로 숨이 턱 막혔다.
로지에의 손에 들린 그것은 데클란의 검이었다.
내가 사냥터 입구에서 로지에와 재회했을 때 떨어뜨린 것을 로지에가 수습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검 자체가 아니었다.
마력석.
데클란의 검 위에 매달아 둔 마력석이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