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사냥 대회 당일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이레사 공녀가 사라졌다.’
온 왕국 사람들이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꺼내는 화두였다.
데클란이 실종된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름 없는 평민 시종보다 이레사 공녀가 더 중요했으니까.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기 전 열렸던 왕실 사냥 대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성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목격자들의 증언은 이러했다.
“저희끼리 휴식처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레사 공녀님이 피곤하시다고 잠시 혼자 떨어져 앉으셨어요. 그 뒤로 공녀님을 본 적이 없네요.”
한 귀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귀족 영애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 뒤로는 제가 봤어요. 공녀님이 혼자서 쉬고 계실 때, 누군가가 공녀님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걸더라고요.”
“누군가 공녀님에게 말을 걸었다고요?”
“네. 그 뒤로 공녀님께서 얼굴이 창백해지시더니, 곧바로 일어나서 그 남자를 따라갔어요.”
“그 남자는 누구였습니까?”
조사를 담당한 왕실 수사관이 귀족 영애에게 물었다.
그러자 귀족 영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남자였고, 또 저희로부터 등을 지고 있었어요.”
그 뒤로 현장에 있었던 여성 귀족들이 줄줄이 증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이레사 공녀에게 접근했던 남자가 누구인지, 혹은 그녀가 무슨 이유로 숲에 가게 된 건지 몰랐다.
그 뒤로 조사받은 사람은 이레사 공녀와 함께 숲으로 들어갔던 인페르나 소남작, 로지에였다.
“이레사 공녀님은 왜 숲에 가게 된 겁니까?”
왕실 수사관이 로지에를 향해 물었다.
“…….”
로지에는 입을 꾹 다문 채 파수꾼을 바라보았다.
이레사 공녀가 실종된 이후, 로지에는 줄곧 왕궁 안에 연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레사 공녀가 실종되기 바로 직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로지에였으니까.
일부 귀족들은 로지에를 아예 범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인페르나 소남작님. 공녀님은 왜 숲에 가셨습니까?”
“…….”
재촉하는 수사관의 질문에 로지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레사 공녀가 사라졌던 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 * *
쿠쿠쿵—!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암살자들을 상대하던 로지에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한눈팔지 마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암살자들 중 하나가 로지에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따끔한 통증이 로지에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마터면 목이 베일 뻔했다.
‘아차!’
방심했었다.
로지에는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 그는 급히 있는 마력을 쥐어 짜내 나무 위로 달아났다.
로지에를 쫓기 위해 달리던 암살자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이봐, 저기서 우리 쪽 사람들이 오고 있는데?”
암살자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저 멀리서 암살자들이 허둥지둥 달아나는 게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어쩌지?”
“일단 합류하자!”
로지에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암살자들은 일단 제 무리들을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암살자들과 헤어진 로지에는 급히 붕괴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목격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
로지에는 그대로 쓰러졌다.
저 멀리서 암살자들이 서로 우왕좌왕하는 게 들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로지에는 뒤편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돌이 붕괴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냥 대회 참가자들이었다.
“아니, 이곳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은 급히 로지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로지에는 멍하니 무릎 위에 놓인 제 손등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가, 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했다.
그 뒤로 연락을 받은 왕실 기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로지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로지에는 그저 절벽 아래를 가리키며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가, 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로지에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왕실 기사들은 일단 그를 휴식처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라이렌 왕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레사 공녀의 실종을 깨달은 라이렌 왕자는 로지에를 붙들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 망할 자식! 감히 공녀를 잃다니!”
라이렌의 목소리는 마치 깨진 유리 파편 같았다.
그 날카로운 음성을 듣자 로지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로지에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저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
그러나 그는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사냥터 부근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로지에의 머리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어?
로지에의 눈앞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이내 밝아졌다.
머릿속이 웅웅거렸고, 뺨이 욱신욱신 달아올랐다.
“……!”
그제야 로지에는 라이렌 왕자가 자신에게 손찌검했다는 걸 깨달았다.
“헉…….”
누군가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냥 대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설마 상상이나 했을까. 일국의 왕자라는 자가 만인이 보는 앞에서 폭력을 행사할 줄이야.
“사람 한 명 지키지 못해서 지금 이 사달이 나다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 라이렌 왕자는 계속해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이게 다 네놈의 탓이다! 너 때문에 내 계획이 다 틀어지게 되었다! 공녀를 찾지 못하면 네놈의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
로지에는 손등으로 제 코를 훔쳤다.
주륵.
코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고작 뺨 한 대 맞았다고 이렇게 코피가 나다니.
로지에는 아예 한 손으로 제 코를 막았다.
‘뭔가 이상한데.’
그나마 체력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로지에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하는 모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마치 과녁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로지에는 사샤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사샤 양은 어디에 간 걸까.’
아직 사냥터 안에 있는 걸까.
그렇다면 사샤 양은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걸까.
진동하듯 울리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가라앉히며, 로지에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라이렌 왕자가 눈에 들어왔다.
로지에는 여전히 한 손으로 코를 막은 채 라이렌 왕자에게 고했다.
“왕자 전하, 지금 많이 흥분하신 듯합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시끄럽다! 고작 황무지를 다스리는 가난뱅이 귀족 주제에, 네가 감히 무엇이라고 내게 명령하는 건가!”
라이렌 왕자가 로지에에게 악을 썼다.
로지에는 어떻게 해서든 라이렌 왕자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전하, 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어서 사람을 보내어 절벽 아래를 수색하도록……,”
“지금 네가 내게 하는 게 명령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라이렌 왕자는 로지에를 걷어찼다.
설마 왕자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로지에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쿵!
“꺄아아악!”
“어, 얼굴이 전부 피야!”
“누가 마법사를 불러와요! 저러다 죽겠어!”
로지에가 쓰러지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 맞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로지에는 제 손에 묻은 코피를 바라보았다.
라이렌이 제 뺨을 쳤을 때 터진 코피를 가린다고 한 손으로 막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얼굴에 범벅이 된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지금 제 얼굴은 피투성이에 가깝겠지.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기 전에 어서 몸을 일으키자.
그렇게 생각한 로지에는 급히 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저는 괜……,”
그러나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마치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 같았다.
‘어라.’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로지에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마력 고갈 현상…….’
조금 전 암살자들을 상대하느라 마력을 너무 많이 소비했던 모양이다.
‘……안 되는데.’
지금 쓰러지면 안 되는데.
절벽 아래로 가서 데클란 군과 이레사 공녀님을 찾아야 하는데…….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제 한계였다.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로지에를 본 라이렌 역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뭐 하는 건가?”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라이렌,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여봐라, 어서 왕실 마법사를……!”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왕실 마법사더러 데클란 군과 이레사 공녀님을 찾으라고 해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로지에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두 눈을 떴을 때.
“정신이 드십니까?”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가 로지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실 마법사였다.
“아……!”
마법사를 본 로지에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마법사가 로지에를 말렸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인페르나 소남작님. 마력 고갈 현상 때문에 머리가 아프실 겁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나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로지에가 마법사에게 물었다.
“반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왕실 마법사는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로지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몸은 괜찮은가?”
왕세자였다.
로지에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 왕세자 전하!”
설마 왕세자가 자신을 찾아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왕세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로지에를 향해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가만히 앉아있도록.”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녹슨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터라 로지에는 군말 없이 자리에 도로 앉았다.
“내 아우가 그대에게 폐를 끼친 모양이로군.”
왕세자가 저 멀리 서 있는 라이렌을 향해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
“일부러 숨길 필요는 없다. 라이렌이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두가 다 보았으니까.”
왕세자가 혀를 차며 로지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그는 왕실 마법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곁을 지키고 있던 마법사가 자리를 피했다.
“인페르나 소남작. 절벽 아래를 조사하러 갔던 수색관들이 돌아왔다.”
“데, 데클란 군은요? 이레사 공녀님은?”
왕세자의 말을 들은 로지에가 다급히 물었다.
조급한 로지에와 달리 왕세자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로지에의 인상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 모두 무사해.”
“……!”
왕세자의 말을 들은 로지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 순식간에 두통도 사라졌다.
무사하다니.
살아 있었구나!
‘그래, 역시 데클란 군이야! 분명히 떨어지면서 마력으로 자신과 이레사 공녀님을 보호했겠지!’
무성의 환호성을 내지른 로지에는 급히 왕세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지금 만나러 가도—”
“안 돼.”
왕세자가 로지에의 말을 끊었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하지만, 인페르나 소남작. 그대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