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자는 잡았다.
“휴.”
손등으로 땀을 쓱 닦은 나는 내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기절한 채 쓰러진 사자가 누워있었다.
나는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마취 탄을 사용해 사자를 잠재워 두었다.
‘힘 조절하기 참 힘드네.’
쓰러진 사자 옆에 대충 주저앉은 내가 생각했다.
데클란의 마력이 깃든 검의 위력은 대단했다.
처음에 나는 내가 평소에 쓰는 힘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사자를 그대로 베어버릴 뻔했다.
“이크!”
당황한 나는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사자는 내가 뒤로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놈은 내가 후퇴하기가 무섭게 나를 당장 물어 찢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잠깐만, 이 녀석아!”
당황한 나는 급히 검집을 들어 올려 놈의 이마를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사자는 크아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최상의 기회였다.
‘호오.’
나는 두 눈을 번뜩이며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자를 완전히 제압했다.
‘일단 사자를 잡긴 잡았는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는 내 옆에 졸도해 있는 사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끌고 가지?”
사자를 보고 지나치게 흥분한 게 화근이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사자를 사냥터 입구에 가까운 곳으로 유인한 다음 제압해도 늦지 않았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나는 사냥터 제법 깊숙한 곳에 있었다.
물론 이 사자를 옮기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힘이 제법 강했으니까.
문제는 내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사자를 운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녀석을 대충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사자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게 되겠지.
‘모래랑 돌에 발이 끌리면 아플 텐데…….’
사냥터의 바닥을 대충 살핀 나는 이래저래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한참 뒤.
“……사냥터 입구로 돌아가자.”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이 사자는 유리나에게 바치기 위해 포획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가서 데클란이나 로지에랑 같이 사자를 운반하도록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정신을 잃은 사자 위로 내 겉옷을 던졌다. 내 사냥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대충 상황을 정리한 나는 사냥터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며 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은 바삐 흐르는 시냇물처럼 정신이 없었다.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복잡했다.
사냥터 입구로 돌아가면 사람들이 모여 있겠지.
유리나가 있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데클란과 로지에도 유리나와 함께 있겠지?
그들에게 가서 바로 말해버릴까? 내가 사자를 잡았더라고?
아니면 내가 무얼 잡았는지는 비밀로 남겨 두고, 나중에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까?
이대로 라이렌 왕자 그 재수 없는 남자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렸으면 좋겠다.
왕세자 놈도 덩달아 배알이 꼴려서 빈정 상하면 더더욱 좋고.
그 와중에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유리나가 내가 잡은 사자를 보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데클란이 날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라고.
그렇게 순수한 희망을 품은 채 사냥터의 입구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어?”
무언가 이상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해야 하는 그곳에는 악에 받친 고함과 근심이 가득한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귀부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몇몇은 얼굴이 핏빛 하나 없이 창백했다. 개중에 소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뭐지?’
나는 급히 귀부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다른 방향에는 사냥에서 돌아온 것으로 보이는 귀족들이 삼삼오오로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심각한 언쟁에 휩싸여 있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서로 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뭐야?’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레사 공녀를 찾고자 했다. 그녀라면 지금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눈알을 데구르르 돌려도, 내가 찾는 이레사 공녀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그렇게 한참 동안 이레사 공녀를 찾던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키오 오빠! 크레스!”
나는 그들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려 보였다.
두 사람은 마침 왕세자의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사샤 누님!”
나를 알아본 키오가 손을 흔들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크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키오 오빠,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인사치레도 생략한 채 그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게, 큰일 났어요! 이, 이레사 공녀님께서…….”
“네? 이레사 공녀님이요?”
예상도 못 한 이름이 키오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나는 그만 크게 반문하고 말았다.
이레사 공녀님이,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에요, 키오 오빠? 공녀님이 왜요?”
“그게…….”
키오가 급히 내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네 이놈, 조용히 해라!”
바로 옆에서 뺨을 때리는 듯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그 고함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왕세자 본인이 서 있었다.
설마 왕세자가 바로 옆에 있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그는 기사들 뒤에 서 있어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왕세자는 키오를 향해 삿대질하며 크게 꾸짖었다.
“지금 무슨 일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함부로 입을 놀리려고 하다니, 경거망동하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키오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연신 사죄를 올렸다.
“쯧.”
왕세자는 그런 키오를 벌레 바라보듯이 노려보았다. 혐오감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왕세자는 이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 아니더냐?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왕세자는 일부러 ‘호위 기사’라는 말에 힘을 주며 내게 타박을 주었다.
“…….”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내게 주어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말을 아껴야 했다.
잘 모르는 상황에서 했던 말이 나중에 내게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호위 기사가 제 주인을 버리고 사냥놀이에 빠지다니. 제정신인 건가?”
내가 아무런 말도 없자, 왕세자는 일부러 더 나를 시험하듯이 몰아붙였다.
명백한 도발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여기서 ‘라이렌 왕자가 시켰다’라는 사실을 덧붙였다간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으니까.
그때였다.
왕세자의 어깨너머로 서 있던 크레스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크레스는 재빨리 두 눈을 세 번 깜빡거렸다.
‘어?’
아카데미 시절 자주 보던 동작이었다.
눈을 세 번 깜빡이기. 그건 수업 시간에 교사 몰래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오스첸스 아카데미 학생들이 사용하던 비밀 신호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제발 설명 좀 해 줘!’
그런 간절한 마음을 품은 채, 나는 급히 크레스를 향해 두 눈을 세 번 깜빡거렸다.
그러자 크레스는 입을 납작하게 벌리며 과장되게 입 모양을 뻥긋거리기 시작했다.
‘실.’
크레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첫 입술 모양을 읽어낸 나는 재빨리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 사인을 알아차린 크레스는 이내 입을 오리 부리처럼 삐죽 내밀며 다른 음을 시늉했다.
‘종.’
나는 재빨리 크레스가 내게 전달한 두 음절을 합쳤다.
‘……실종?’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제야 나는 왜 이곳의 분위기가 이렇게 혼란스러운지 깨달았다.
이레사 공녀님이 실종되었다.
왜? 왜? 도대체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머릿속에 순식간에 물음표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온몸의 피가 식어 내린 것처럼 등골을 타고 싸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듯 달린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이봐! 어딜 가는 건가!”
등 뒤에서 왕세자의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데클란!’
인파들 사이를 피해 달리며, 나는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데클란. 데클란을 찾아야 했다.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와 함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직접 부탁했었다. 나 대신 이레사 공녀를 잘 지켜달라고.
데클란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라면 이레사 공녀의 행방을 알고 있을—.
우뚝.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밟혔다.
“……도련님?”
로지에였다.
“사샤 양…….”
어깨 위에 담요를 두르고 있는 로지에는 맨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퀭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늘 생기가 가득 차 있던 로지에의 눈동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두 눈은 죽은 대지를 연상시켰다.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내가 로지에를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한 남자가 엄격한 목소리로 나를 말렸다.
마력석이 달린 로브를 두르고 있는 그는 마법사로 보였다.
마법사가 왜 여기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그제야 로지에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상처였다.
로지에의 뒤로 왕실 기사들이 호위처럼 서 있었다.
“도련님……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다치신 거예요?”
그 자리에 오도카니 멈춰 선 내가 로지에에게 물었다. 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
로지에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빛을 잃은 눈으로 나를 정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자갈이 갈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낮게 숙인 머리에서 흘러나왔다.
“미안해, 사샤 양. 정말로 미안해……. 난 네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어…….”
소중한 사람들.
그 한마디가 가지고 온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쓰러졌다.
툭.
내 손에 들고 있던 데클란의 검이 바닥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거짓말…….”
내 입에서 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
로지에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뚝, 뚝.
검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데클란이 매달아 둔 마력석이 투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