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데클란은 침착히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쪽과 왼쪽에는 서로 다른 무리로 보이는 암살자들이 서 있었다.
날이 선 검을 든 놈들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데클란.”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지에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의 이레사 공녀를 부축해 세우고 있었다.
“도련님.”
“공녀님을 부탁한다.”
로지에는 이레사 공녀를 자신의 등 뒤로 감추듯이 밀었다.
데클란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레사 공녀를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그 사이에 로지에는 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들은 누굴 노리고 온 자들이지? 이레사 공녀님을 노리는 건가?”
검을 꽉 쥔 로지에가 양쪽의 암살자들에게 물었다.
“…….”
양쪽에 선 암살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긴, 여기서 대놓고 ‘널 죽이러 왔다’라고 외치는 게 더 이상하다.
검을 쥔 로지에의 손에 힘이 더더욱 들어갔다.
“이레사 공녀님을 너희에게 넘기면, 나와 내 시종을 풀어줄 건가?”
로지에가 암살자들을 시험하듯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너희에게 볼일이 없다. 이레사 공녀를 우리에게 넘겨라.”
이에 가면을 쓴 암살자들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개자식들! 감히 왕자비 전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왕자비? 이레사 공녀를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너희들은 라이렌 왕자가 보낸 놈들이구나!”
“시끄럽다! 저 사생아와 네놈들을 같이 죽여주마!”
두 무리의 암살자들이 서로 이를 으드득 갈며 무기를 꽉 쥐어 잡았다.
이들 사이에 낀 데클란은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 중 한 무리는 이레사 공녀를, 그리고 다른 무리는 데클란 자신을 노리고 있다.
‘날 사생아라고 부르고 있다.’
데클란의 심장이 쿵쿵 날뛰기 시작했다.
저 암살자들은 데클란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정황상 라이렌 왕자가 보낸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을,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왕의 사생아인 자신을, 라이렌 왕자가 도대체 왜?
‘권력에 미쳤다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사실이었군.’
데클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칠 거면 좀 곱게 미칠 것이지. 왜 애먼 사람에게 피해를 주려는 건지.
데클란은 검을 꽉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쥐어진 검에 마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데, 데클란 군?”
대량의 마력의 기운을 느낀 로지에가 흠칫 놀라며 뒤로 고개를 휙 돌렸다.
“공녀님.”
로지에의 시선을 무시한 채,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를 불렀다.
“눈 감으세요.”
“예?”
뜬금없는 데클란의 말에 이레사 공녀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데클란은 그녀에게 두 번 설명하지 않았다.
쾅! 콰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클란의 검에 차오르는 마력이 번개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거센 파장을 일으키며 섬광처럼 빛났다.
“으앗!”
뒤늦게 데클란의 마력을 감지한 로지에는 재빨리 땅 위로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로지에처럼 순식간에 반응하지 못했다.
파밧!
창공을 누비는 용처럼 허공을 유영한 마력이 놈들을 그대로 급습했다.
“악!”
“크억!”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력에 직격으로 맞은 몇몇 암살자들이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데클란의 검에서 흩뿌려진 마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쾅! 콰광!
불꽃놀이를 연상시키는 폭발음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미처 표적을 찾지 못한 마력이 허공에서 소멸하며 한바탕 폭발을 유발하고 있었다.
‘이, 이 마력은 도대체 뭐야?’
여태껏 한 번도 데클란의 마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로지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러다가 마력에 자칫 휘말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로지에는 인페르나 남작에게서부터 데클란의 마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데클란이 대단하구나’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 눈앞에 폭주하는 마력을 보자, 로지에는 제 어머니가 야속해졌다.
‘그냥 대단한 수준이 아니잖아요, 남작님!’
데클란은 자신의 뒤에 굳어 서 있던 이레사 공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데, 데클란 씨……는 평민이 아니었나요? 어째서 이런 마력이…….”
“……복잡한 출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레사 공녀는 졸지에 포대 자루가 된 기분이 들었다.
“숲 밖으로 도망칠 겁니다. 그때까지만 참아주시지요.”
이레사 공녀를 꽉 붙든 데클란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암살자들은 각기 다른 대상을 노리고 있었다.
이레사 공녀, 그리고 데클란 자신.
저 두 암살자 집단은 암살 대상이 다르므로 서로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저놈들이 생각을 달리하고 서로 협공이라도 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물론 데클란은 자신을 믿었다.
데클란 혼자서 저놈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레사 공녀였다.
로지에나 데클란은 호위 기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는 싸움에만 익숙했다.
남을 지키는 싸움은 진짜 호위 기사인 사샤의 영역이었다.
그런 사샤가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암살자들과 정면충돌하는 건 무모했다.
“데클란 군!”
뒤에서 로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살자들이 전투 불능 상태로 쓰러진 것을 확인한 그가 뒤따라온 것이었다.
“도련님.”
“왜 마력을 그렇게 무식하게 뿜어 대는 거야!”
“고맙다는 말은 없어요? 왜 잔소리세요?”
“걱정돼서 그래! 그러다가 마력 고갈 현상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속도를 높인 로지에가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보다 한 걸음 더 앞서 뛰었다.
그러면서 로지에는 검으로 앞길을 가로막는 수풀을 베어냈다.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는 그가 베어낸 수풀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마력 고갈 현상? 그게 뭔데요?”
“마력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소모하면 오는 탈진 현상이야! 예전에 경험한 적 없어?”
“없는데요.”
“뭐?”
로지에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데클란을 흘겨보았다.
그는 데클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로지에는 곧 데클란이 자신에게 여태껏 한 번도 농담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데클란 군. 마력이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아마 도련님 열다섯 명분보다 더 강할걸요.”
“진짜로? 그런데 왜 나한테 한 번도 말 안 해줬어?”
“제가 왜 도련님한테 뭐든 꼬박꼬박 보고해야 하나요? 제가 무슨 도련님 부하입니까?”
“너무해, 우린 친구잖아!”
“소남작님!”
티격태격 말다툼하던 로지에와 데클란을 보다 못한 이레사 공녀가 언성을 높였다.
“대화 중에 죄송한데, 뒤를 보세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데클란과 로지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나무 위로 서너 명의 암살자들이 보였다.
부상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을 한 놈들이었다.
암살 대상을 놓칠 것을 대비해 다른 곳에 매복하고 있던 암살자들로 보였다.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발견한 암살자들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늘어난 활시위가 그대로 풀렸다.
“젠장!”
데클란은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로지에가 그의 등 뒤로 몸을 던졌다.
휘릭!
찰나의 차이였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데클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 바로 앞에 반으로 잘린 화살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
순간 오싹한 기운이 데클란의 등 위로 기어 올라왔다.
만일 이레사 공녀가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로지에가 자신의 뒤에 서서 화살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저 화살에 꼼짝없이 맞았겠지.
“먼저 가, 데클란 군!”
검을 든 로지에가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를 향해 외쳤다.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로지에에게 뒤를 맡긴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를 꽉 붙들었다.
“죽지 마세요, 도련님! 도련님이 죽으면 인페르나 남작님이 절 죽이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 난 내 어머니에게 살인을 저지르도록 할 생각 없으니까!”
과연 로지에다운 답이었다.
“데클란 씨, 왼쪽에서 암살자들이!”
뒤를 주시하던 이레사 공녀가 데클란에게 외쳤다.
이번에 데클란은 뒤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시간이 없었다.
“꽉 붙드세요, 공녀님!”
데클란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데클란이 일으킨 마력 폭발음을 듣고 몰려온 것이 분명했다.
‘잘 됐다.’
이대로 인파가 몰린 곳으로 달려가자.
보는 눈이 많은 곳이라면 적어도 암살자들이 대놓고 쫓아오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데클란은 온 신경을 귀에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기로 도망친다!”
“놓치지 마라! 절벽 쪽으로 몰아넣어!”
암살자들은 데클란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의 뒤를 집요하게 쫓았다.
제기랄!
암살자들이 던지는 단도를 피해 데클란은 여러 차례 길을 틀었다.
데클란은 여전히 이레사 공녀와 함께 가고 있었다.
그 탓에 그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데클란 씨! 앞에 길이 없어요!”
이레사 공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데클란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레사 공녀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어느새 숲에서 벗어나 있었다. 수풀이 드문드문 난 그곳은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었다.
‘이대로 가면 낭떠러지다.’
사냥 대회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자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았다.
데클란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레사 공녀는 데클란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더는 도망칠 길이 없다는 걸 확인한 암살자들이 데클란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포기해라, 사생아.”
‘이레사 공녀가 아니라 날 노리던 놈들이었군.’
데클란은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었다.
만일 이레사 공녀를 노리는 놈들이었다면 귀찮았을 텐데.
그때, 이레사 공녀가 데클란의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갔다.
“너희들은 누구지?”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왕자비 전하께서는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보낸 이들인가?”
이레사 공녀는 떨려오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되물었다.
“비키십시오, 왕자비 전하. 저희는 저 사생아만 처단할 것입니다.”
“사생아라니, 저 이가?”
이레사 공녀가 또다시 되물었다. 불필요하게 목소리를 길게 늘이면서.
데클란은 직감적으로 이레사 공녀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 됐다.’
데클란은 천천히 허리춤에 매어둔 검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는 조금 전처럼 마력으로 암살자들을 전부 처단할 계획이었다.
그 와중에 이레사 공녀는 더더욱 언성을 높이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무언가 착각한 것이 아니냐! 이 자는 인페르나 소남작의 시종이다!”
“비키십시오, 왕자비 전하!”
“대답해라!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의 사생아란 말인가!”
“다치고 싶지 않으시면 옆으로 비키시란 말입니다!”
계속되는 이레사 공녀의 말에 암살자들은 답답하다는 듯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지금이다!’
데클란은 그대로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광!
귀청을 찌르는 폭발음과 함께 데클란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놈이 마력을 쓴다!”
“조심해!”
당황한 암살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쾅!
갈 곳을 잃은 마력이 그대로 암살자들이 서 있던 땅을 채찍처럼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가 서 있던 바위가 쩍, 하고 갈라졌다.
어?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 번 금이 간 바위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낭떠러지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와, 왕자비 전하께서!”
“도망쳐! 무너진다!”
저 멀리 도망친 암살자들이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들은 붕괴하기 시작한 바위를 막을 수 없었다.
“공녀님!”
무너지는 바위 끝자락에 선 데클란이 급히 이레사 공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그의 손을 붙잡지 못했다.
“아!”
그녀의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이 바위에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젠장!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에게 이렇게 불편한 옷을 억지로 입힌 라이렌 왕자를 저주했다.
“데클란 씨, 저는—”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그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콰쾅!
데클란이 간신히 발을 디딘 채 서 있던 바위가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아, 안 돼! 왕자비 전하께서!”
“전하, 전하!”
암살자들의 비명을 뒤로한 채,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