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와아아아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함성이 온 숲을 뒤집었다.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국왕의 선포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각기 무기를 든 참가자들은 제 말을 타고 숲 안으로 달려갔다.
물론 말이 없는 나는 천천히 숲 안으로 걸어갔다.
‘말을 타고 가면 짐승들이 도리어 놀라서 도망칠 거야.’
사냥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나는 초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임하기로 했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일단 기본기를 잘 다지자!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옆을 지나치던 다른 참가자들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말도 없이, 동행도 없이 혼자 다니는 내가 꽤 괴짜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장인은 본래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 그리고 자고로 고수는 솔로 플레이를 즐기는 법!
나는 씩씩하게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족 전용 사냥터답게 숲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비록 화원처럼 꽃이나 잔디가 깔려 있는 건 아니었지만, 울창한 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걸어가기 좋은 길이 넓게 트여 있었다.
딱히 말이 없어도 걸어 다니기 쉬웠다.
상쾌한 우림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나는 유유히 숲 안을 누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왔네.’
바위에 이끼가 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크게 숨을 훅 들이마셨다.
맨 처음 숲에 들어와서 느꼈던 것보다 공기가 더 무겁고 축축해졌다. 게다가 숲의 그림자가 더 늘어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온 세계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쯤이면 사냥감이 보일 때가 됐는데…….’
높은 바위 위로 폴짝 올라간 나는 주변을 살펴보려고 했다.
그때였다.
—바스락.
뒤편에서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아주 얕고 약한, 작고 작은 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저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라고 여길 정도로 작은 소리.
그러나 나는 달랐다.
‘뭐지?’
나는 허리춤에 매어둔 데클란의 검에 손을 올렸다.
소리를 죽인 채 등 뒤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수풀을 가르고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크르릉…….”
사납고 낮게 깔린 울음소리를 내는 그것은 분명히 사자였다.
그것도 갈기를 휘날리고 있는, 사나운 수컷 사자.
‘오, 진짜다.’
놈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사실 곰과 사자를 사냥터에 풀어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실물을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릉…….”
나와 두 눈이 딱 마주친 사자가 앞발로 매섭게 땅을 밟았다.
나는 씩 웃으며 데클란의 검을 뽑았다.
기다려, 유리나.
언니가 널 위해 펫 한 마리 데리고 간다!
“어디 덤벼봐라, 이 고양이야!”
검을 쥔 내가 바위에서 높게 날아 뛰었다.
사자가 크게 포효하며 내게 달려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파앗—!
순간 데클란의 검에서 큰 파장이 일어났다.
검을 쥔 내 팔이 저릿저릿 아려왔다.
‘이게 데클란의 마력인가?’
검의 손잡이에 달린 자주색 마력석이 웅웅 빛나는 게 얼핏 보였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마력에 나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
‘뭐야, 이거.’
엄청 대단한데?
데클란 이 자식, 이런 대단한 걸 혼자 숨기고 있었어?
순간 흥분감으로 인해 온몸이 홧홧 달아올랐다.
“미안하지만 넌 오늘부터 이레사 공녀의 애완동물이다!”
마력에 취한 나는 그런 말을 내뱉으며 사자에게 덤벼들었다.
* * *
사냥 대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 정도 흘렀다.
“사샤 양은 잘하고 있을까?”
휴식처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있던 로지에가 중얼거렸다.
데클란은 그를 향해 흘끔 시선을 던졌다.
“걱정하시는 거예요?”
“응? 당연하지. 데클란 군은 걱정되지 않아?”
“저도 걱정되긴 하지요.”
데클란이 짤막이 대꾸했다.
“하지만 사샤는 멍청한 아이가 아니에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하지 않을 거예요.”
“하긴…… 맞아. 사샤 양은 가끔 보면 무모한 면도 있지만, 보통 머리가 아니지.”
로지에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가 칭찬을 받은 건 기분이 좋은데, 칭찬을 하는 사람이 로지에라서 그런지 데클란은 기분이 조금 껄끄러워졌다.
아무래도 로지에를 연적으로 인식해서 그런 것일까.
데클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을 나쁘게 보는 것도 이제 그만 둬야지.’
로지에처럼 좋은 사람도 없었다.
그는 사샤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깔끔히 손을 떼어냈다.
자신을 한 번 돌아봐 달라고 질척거리지도 않았다. 혹은 데클란을 향해 원망의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로지에는 그런 사람이었다.
너무나 순하고,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아마 그래서 사샤를 제 곁에 둘 수 없었던 거겠지.
로지에의 가장 큰 불행은 바로 그가 선량한 귀족이란 점이었다.
그에게는 인페르나 영지와 영지 주민보다 사샤를 먼저 우선시할 정도의 이기심이 없었다.
그게 다였다.
로지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데클란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황국에 가시면 적적해서 어쩔 생각이세요, 공녀님?”
“이레사 공작님이 외로워하시지 않겠나요?”
“그것이…….”
이레사 공녀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모두의 질문에 답을 주려 하고 있었다.
‘저쪽은 저쪽대로 바쁘네.’
온통 인파에 둘러싸인 이레사 공녀를 흘끔 바라보며, 데클란은 생각했다.
이레사 공녀는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다른 귀부인들이 화제의 이레사 공녀를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이레사 공녀에게 접근한 이들 중에는 순전히 호기심 혹은 동경심 때문에 다가온 이들도 있었다.
물론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라이렌 왕자 전하는 정말 공녀님을 사랑하시는 게 맞나요? 결혼하자마자 바로 황국으로 보내시겠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공녀님 생각하시기에도 너무하지 않나요? 누가 보면 라이렌 전하께서 공녀님을 이용하려는 줄 알겠네요. 아! 물론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볼 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몇몇 여자 귀족들은 대놓고 이레사 공녀를 적대하는 발언을 늘어놓았다.
딱 들어도 가시가 돋친 말들은 이레사 공녀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가득했다.
“……가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조심스럽게 속닥거렸다.
마음 같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레사 공녀를 저곳에서 빼 오고 싶었다.
사샤가 아끼는 친구였다. 그러니 로지에와는 다르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데클란은 고작 평민 출신의 시종에 불과했다.
괜히 나섰다간 도리어 이레사 공녀를 불리한 상황에 몰아넣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잘못해서 내가 국왕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돼.’
혹시 모르는 일이다. 데클란을 괘씸히 여긴 누군가가 그에 대해 뒷조사를 할지도…….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데클란이 고심하고 있던 차였다.
로지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데클란은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로지에는 이미 제 의자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데클란은 로지에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레사 공녀가 앉아있는 자리였다.
“귀하신 분들이 말씀 나누는 자리에 실례합니다.”
거침없이 이레사 공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 로지에가 입을 열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이끌렸다.
로지에는 청량하게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갔다.
“실은 이레사 공녀님께서 아침에 속이 조금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안색을 보아하니 아직 다 나으시지 않은 것 같은데, 잠시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공녀님이 편찮으시다고요? 제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로지에의 말에 귀부인 한 명이 반문했다.
아까부터 줄곧 이레사 공녀에게 시비조의 말을 걸던 여자였다.
로지에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응대했다.
“본래 건강한 사람의 눈에는 건강한 모습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요.”
“뭐라고요? 그러는 그쪽은 도대체 누구……,”
“아, 당신은!”
누군가가 귀부인의 말을 잘랐다.
“인페르나 남작의 아드님 아니신가요? 몸이 병약하여 북부 외가에 자주 지내신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는군요.”
인페르나 남작의 출신 가문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여자는 뒤늦게 말을 아꼈다.
로지에는 그 말을 듣고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저는 이만 라이렌 왕자 전하의 명령대로 이레사 공녀님을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이렌 왕자’의 이름이 거론되자, 귀부인들은 모두 잠잠해졌다.
아무리 파벌이 나뉜 귀부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차마 국왕이 있는 자리에서 왕자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녀님, 가시지요.”
로지에는 이레사 공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줄곧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공녀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숲 부근에서 걷도록 하지요, 공녀님.”
“고맙습니다, 인페르나 소남작.”
로지에의 손을 잡은 이레사 공녀는 그제야 숨이 탁 트인 것 같았다.
로지에와 이레사 공녀의 상황을 지켜보던 데클란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제법이신데요, 도련님.”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슬쩍 속삭였다.
“아무나 귀족 하는 줄 알아?”
“정말 고마워요, 소남작님. 안 그래도 현기증이 나던 터였거든요.”
이레사 공녀가 로지에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로지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셔서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 말에 이레사 공녀는 감동한 듯이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사샤 경의 깊은 인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네요.”
“하하, 사샤 양은 제 딸이 아니라 친구입니다만.”
“그 뜻이 아니었는데요…….”
이레사 공녀가 제 속뜻을 다시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이레사 공녀님?”
숲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꺄악!”
화들짝 놀란 이레사 공녀는 얕은 비명을 내질렀다.
만일 뒤에 서 있던 데클란이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드레스 자락을 밟고 넘어졌을 테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숲에서 튀어나온 자가 급히 사과했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였다. 차림을 보아하니 이번 사냥 대회에 참가한 왕실 기사 중 한 명으로 보였다.
“무슨 일이지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이레사 공녀가 물었다.
“그것이…….”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휴식처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임을 확인한 그는 이레사 공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급히 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공녀님! 공녀님의 호위 기사가 맹수에게 당해 중태에 빠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