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나는 사냥 대회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기사를 비롯하여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였다.
‘아는 사람 없나?’
나는 참가자 중에 혹시나 같은 특수 부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잠시 뒤 익숙한 얼굴 둘이 눈에 들어왔다.
‘어, 키오 오빠다! 그리고 크레스도 있네!’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키오와 크레스가 보였다.
두 사람은 나와 비슷한 기사 차림을 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장식의 로브를 착용한 귀족들 사이에 낀 키오와 크레스는 다소 긴장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예요! 나 좀 봐!’
나는 그들을 향해 강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나는 운 좋게 크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
나를 먼저 알아본 크레스의 얼굴 위로 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무언가 속닥거리며 제 옆에 서 있는 키오를 툭 건드렸다.
나를 본 키오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그는 턱이 고장 난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는, 나를 향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보아하니 인파 때문에 소리를 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아마 ‘사샤 누님!’이라고 외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키오 오빠의 그분은 어떻게 된 거지?’
키오 오빠를 도와 연애편지를 전달해 주려던 게 엊그저께 일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나와 키오는 소속이 달라져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편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물어보지 못했는데…….
‘지금 슬쩍 다가가서 물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어?’
마침 키오와 크레스 뒤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여타 귀족들과 달리 귀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한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그 로브 위에는 마력석으로 추정되는 브로치와 장식들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반짝이는 걸 모은 까마귀의 둥지처럼 온갖 화려함이 뒤섞인 차림이었다.
‘누구지?’
딱 봐도 귀티가 나는 복장은 뒤로 하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나는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왕세자 전하!”
남자를 알아본 누군가가 먼저 외쳤다.
그 부름을 뒤로 모두가 속속히 고개를 돌렸다.
“왕세자 전하, 오셨군요!”
“왕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어쩐지.
나는 왜 저 남자의 얼굴이 그렇게 익숙한지 그제야 깨달았다.
저번에 라이렌 왕자의 궁으로 가다가 왕세자와 한 번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그때 이레사 공녀에게 왕세자가 시비를 걸던 게 괘씸해서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 기억에 남아 있었구나.
‘왕세자도 참석하나 보네?’
내가 듣기로 라이렌 왕자도 이번 사냥 대회에 참석한다고 했다.
자신의 약혼녀인 이레사 공녀의 명예를 위해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아 오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여하튼 그런 강아지 소리를 지껄이며 사냥 대회에 나가는 게 꼴불견이었는데.
하필이면 왕세자도 이번 사냥 대회에 나오다니.
‘각자 개성대로 못돼 처먹은 형제가 쌍으로 나오네.’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며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내 불만을 알 리가 없는 다른 사람들은 왕세자를 보며 크게 떠들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분명히 왕세자 전하겠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왕세자 전하가 아니라면 그 누가 사자를 잡겠나?”
왕세자를 화두로 참가자들이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떨기 시작했다.
딱 라이렌 왕자가 등장할 때까지만.
“분위기가 좋군.”
순간 저 멀리서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강한 빛에 나는 앗,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그 빛의 근원지가 바로 라이렌 왕자의 로브에 주렁주렁 달린 브로치 장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패션쇼라도 하나? 뭔 장신구를 저리 다닥다닥 붙이고 왔어?’
나는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라이렌 왕자를 쳐다보았다.
라이렌 왕자는 왕세자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형님.”
“그래, 라이렌.”
왕세자가 거만하게 라이렌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명백한 하대에 라이렌 왕자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이렌 왕자는 이내 미소를 되찾으며 왕세자에게 말했다.
“이번 사냥 대회에 참석하시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뭐가 놀랍다는 거지?”
“제 반려인 이레사 공녀를 기리기 위한 사냥 대회 아닙니까. 이 아우의 여자에 그리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습니다.”
‘오, 형제 싸움?’
본래 남의 싸움이 제일 흥미진진한 법이다. 나는 라이렌 왕자와 왕세자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왕세자는 팔짱을 끼며 라이렌 왕자를 주시했다.
“네 반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으냐, 라이렌. 아직 약혼한 사이에 불과하거늘.”
“어차피 몇 주 뒤에 결혼할 여자입니다. 그러니 반려라고 칭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몇 주 뒤에 결혼할 사이라.”
왕세자는 라이렌 왕자의 말이 재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라이렌, 사람 일은 원래 아무도 모르는 법이란다. 행여나 이레사 공녀가 너와 혼인을 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이렌 왕자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왕세자는 냉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다. 조심하도록 해라, 아우여.”
라이렌 왕자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꽉 악물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시는 형님이야말로 조심하시지 말입니다.”
“곧 이 왕국의 주인이 될 사람이 바로 나이다. 내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지?”
왕세자가 빈정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라이렌 왕자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 국왕 폐하의 핏줄을 이은 자가 어디 형님 하나뿐인 줄 아십니까?”
“그건 아니지. 하지만 왕이 되는 자는 한 사람뿐이야.”
그 말을 남긴 왕세자는 더 이상 라이렌 왕자와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발걸음을 홱 돌렸다.
왕세자는 그대로 자신의 전용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
천막 안으로 모습을 감춘 왕세자를 노려보던 라이렌 왕자는 이내 마찬가지로 등을 홱 돌렸다.
그 역시 자신의 전용 천막 안으로 성큼성큼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냉전을 숨죽인 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숨을 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두 분 모두 살벌하시군요…….”
“어쩌겠습니까. 어서 왕위가 하루빨리 정리되길 빌어야지요.”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둘 중의 한 명이 사고 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이번 사냥 대회, 예감이 좋지 않다.
* * *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간 라이렌 왕자는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건방진 것. 언제까지 오만한 콧대를 높게 세울 수 있는지 어디 보자!”
라이렌 왕자는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
왕세자에 대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전하,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내가 지금 화를 그치게 생겼는가!”
라이렌 왕자는 괜히 제 서기관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기분이 더러웠다.
왕세자 그 자식이 나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다고?
‘고작 제 어미의 배에서 먼저 난 것밖에 없으면서, 꼭 자기가 차기 국왕이라도 된 듯이 굴고 말이야…….’
라이렌 왕자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오만함에 눈이 멀어 정작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한참 동안 분을 삭이던 라이렌 왕자가 제 서기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킨 건, 준비가 다 되었나?”
“예, 예!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 보고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서기관이 급히 라이렌 왕자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했다.
“조금 전 사람을 보내 확인한 결과, 그 사생아가 인페르나 소남작과 이레사 공녀님과 함께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서기관의 말을 들은 라이렌 왕자는 줄곧 자신의 불안감을 자극하던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클란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
국왕의 사생아 주제에, 잘도 왕궁 안에 숨어들어온 불순분자.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대서 꾀어내. 백조궁의 시녀들에게 들은 정보를 이용해서 그럴싸한 거짓말을 만들어 내라.”
“네, 알겠습니다.”
서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끝내야 한다.”
라이렌 왕자가 서기관에게 당부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처리해.”
“물론입니다. 왕자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이 사냥터에 절벽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사생아를 죽인 뒤 절벽 아래로 시체를 떨어트릴 예정입니다. 제아무리 왕실 기사들을 보내 수색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래로 떨어진 이들은 찾지 못할 겁니다.”
“그래, 좋다.”
서기관의 확고한 답을 받아낸 뒤에야 라이렌 왕자는 속이 시원해진 모양이었다.
‘왕자는 나 한 명으로 충분해. 그 데클란이란 놈이 국왕 폐하의 핏줄을 이었다고 밝혀지기 전에 아예 죽어버려야지.’
그렇게 결심한 라이렌 왕자는 제 검날을 다시 점검했다.
* * *
한편, 비슷한 시각.
왕세자의 천막 안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번 기회가 이레사 공녀를 없앨 최상의 기회이다!”
왕세자가 제 서기관들에게 다그쳤다.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저번에 이레사 공녀가 왕궁 밖으론 나갔을 때는 보는 눈이 많아 차마 암살을 시도할 수 없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그런 살벌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으며, 왕세자가 천막 안에 모인 제 측근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레사 공녀를 꾀어내서 사냥터 안으로 데리고 가. 그리고 절벽 아래로 던져버려.”
“예, 왕세자 전하!”
“백조궁 시녀 중에 매수당한 이가 있다. 그녀가 내게 준 정보를, 너희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좋다.”
왕세자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사냥 대회가 끝날 때 이레사 공녀가 왕궁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게다. 아니면 네놈들의 목을 전부 다 베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