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사냥 대회가 열리는 날이 찾아왔다.
그리고 백조궁은 새벽부터 분주해졌다.
“공녀님, 먼저 목욕하시지요.”
“향초와 아로마를 풀어놓았습니다.”
시녀들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이레사 공녀를 끌고 다녔다.
한 시간 내내 욕탕에 담가진 이레사 공녀는 머리카락의 물기가 마르기가 무섭게 의상실로 끌려갔다.
시녀들은 평소 꺼내지도 않던 귀한 향료를 이레사 공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본래 윤기가 찬란한 이레사 공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금을 덧씌운 것처럼 반짝거렸다.
“눈을 감아주세요, 공녀님.”
시녀들은 조심스럽게 새하얀 파우더를 그녀의 눈가에 발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파우더는 진주를 곱게 빻아 만든 진귀한 물건이었다.
‘우리나라 백성들의 세금이 이렇게 빻아지는구나…….’
이레사 공녀의 눈가에 반짝거리는 진주분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진주가 저렇게 소비되는 건 또 처음 본다. 정말 놀라운 사치이다.
그 외에도 시녀들은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등 온갖 보석들로 만들어진 화려한 장신구를 이레사 공녀의 몸에 달았다.
무도회도 아니고 사냥 대회에 가는데, 이렇게까지 꾸밀 필요가 있나?
그런 의구심을 가지며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이레사 공녀가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공을 들여서 꾸미는 거지? 어차피 사냥 대회라 외부 천막 아래에만 앉아있을 텐데.”
이레사 공녀도 나처럼 궁금했던 모양이다.
공녀의 질문을 들은 시녀들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공녀님,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은 국왕 폐하를 비롯하여 온 왕국에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그분들 앞에서 흠을 보이고 싶으신가요? 행여나 왕세자 전하와 왕세자비 전하에게 트집이라도 잡히시면, 라이렌 왕자 전하가 참으로 좋아하시겠습니다.”
그놈의 라이렌, 라이렌 왕자 놈!
시녀 입에서 나오는 왕자의 이름 때문에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시녀들의 불친절한 대우와 별개로, 그녀들이 치장한 이레사 공녀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고운 레이스가 몇 겹이나 쌓인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마치 꽃봉오리에서 걸어 나온 요정처럼 보였다.
어찌나 화려한지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공녀님, 머리를 숙여주시지요.”
시녀 한 명이 이레사 공녀의 머리 위에 실버 티아라를 올려주었다.
“이건…… 왕자비만이 쓸 수 있는 왕국의 보물이 아니던가?”
제 머리 위에 씌워진 티아라를 거울에 비춰보며, 이레사 공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공녀님께서는 곧 왕자비가 되실 분이니, 지금 착용하셔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아직 식을 치르지 않았는데.”
“왕자 전하께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들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이레사 공녀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기가 죽어서 그런 것보다는, 시녀들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레사 공녀에게 향했다.
“가시지요, 공녀님.”
“에스코트 부탁해요, 사샤 경.”
나를 본 이레사 공녀가 환하게 웃었다.
시녀들을 대할 때와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순전히 기쁨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유리나, 넌 웃을 때가 제일 보기 좋더라.
나는 이레사 공녀를 이끌며 마차 위로 올라탔다.
앞으로 유리나가 안전하게 라이렌 왕자에게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길 속으로 작게 기도하며.
* * *
사냥 대회는 왕궁에서 제법 떨어진 숲에서 진행되었다.
“숲이 정말 넓네요.”
다른 마차로 같이 따라온 로지에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왕족 전용 사냥터예요.”
이레사 공녀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보통 늦가을이나 초겨울이 되면 국왕 폐하와 다른 왕족들이 이곳에 와서 사냥을 즐기곤 한답니다.”
왕족을 위해 관리되어 온 사냥터답게 숲은 울창하고 빽빽했다.
문득 인페르나 영지에 있던 숲이 떠올랐다.
대지가 황폐한 인페르나 영지는 숲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군데군데 볼품없이 흙이 패고, 커다란 돌이 가득한 민둥산과 비슷했는데.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숲은 아름다운 전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터가 아니라 휴양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이제 겨우 여름이 끝나가는데, 사냥감이 있을까요?”
로지에가 이레사 공녀에게 물었다.
이레사 공녀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에 잠겼다.
“사실 전 사냥에 연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사냥감이 아예 없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듣자 하니 이번 사냥 대회를 위해 일부러 큰 짐승들을 풀어놓았다고 하더군요.”
“큰 짐승들이요?”
“네. 곰이나 사자 같은 걸 몇 마리 풀어두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데클란은 움찔했다.
“그런 것들이 득실거리는 불모지에 제 사샤가 들어가야 한다고요? 안 돼요, 사샤의 연인으로서 그건 결코 동의할 수—윽!”
“자, 자! 그럼 저희는 이동하도록 합시다!”
일부러 데클란의 옆구리를 찔러 그의 말을 끊은 내가 이레사 공녀와 로지에를 이끌었다.
데클란 얘는 왜 오늘따라 이렇게 과보호 성향을 보이는 거야!
이레사 공녀와 로지에, 그리고 데클란은 사냥터 입구에 만들어진 임시 휴식처로 갔다.
그곳에는 사냥을 나온 제 기사나 가족을 응원하러 온 귀부인들과 어린 자제들이 모여 있었다.
이레사 공녀가 휴식처로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어머, 저기 보세요. 이레사 공녀님이에요.”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네요. 게다가 아직 젊으신데, 곧 황국으로 가게 돼서 참 안타깝네요.”
“그래도 덕분에 라이렌 왕자 전하가 한 건 큰 공적을 올리게 되었잖아요?”
귀부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물론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처럼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지만.
“그럼 공녀님,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이레사 공녀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올렸다.
“잠깐만, 사샤 경.”
“기다려, 사샤.”
이레사 공녀와 데클란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레사 공녀와 데클란은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묘한 경쟁심이 도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레사 공녀는 재빨리 선수를 치듯 내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내 손에 고운 실크 손수건 한 장을 꼭 쥐여주었다.
“이건…….”
“사샤 경의 이름을 새긴 손수건이에요.”
이레사 공녀가 멋쩍다는 듯이 수줍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직접 만든 것이라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받아 주셨으면 해요. 행운이 찾아올 거예요.”
“와아, 정말 감사해요!”
유리나가 날 위해 직접 만든 손수건이라니!
감동에 휩싸인 나는 그대로 손수건을 펼쳐보았다.
손수건 위에는 내 이름이 유려한 필체로 쓰인 것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 옆에는.
“이건…… 옥수수인가요?”
“네.”
이레사 공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 경이 좋아하는 걸 자수로 남기고 싶었어요.”
“아하.”
나는 내 이름 옆에 놓여진 작은 옥수수 자수를 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고급진 손수건 위에 옥수수 자수가 놓아진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유리나가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고심해서 남긴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서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레사 공녀님.”
“별말씀을요. 사냥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얻길 바라요.”
“당연하죠. 저만 믿으세요! 사자 한 마리 잡아 올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
데클란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내가 만든 회복 약.”
“오호.”
나는 작은 유리병에 든 오묘한 푸른빛의 액체를 흔들었다.
푸른 바다를 닮은 색이 무척이나 고왔다.
“마력 섞어 놓은 거니까, 효과는 즉시 올 거야. 위험할 때 바로 마셔.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바로 지혈해 줄 거야.”
데클란이 내게 설명해 주었다.
이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 너 마약도 제조할 줄 알아?”
“마…… 뭐?”
“마약! 마법의 약을 줄여서 마약이라고 하지 않아?”
“……그냥 줄이지 말고 마법 약이라고 해줘. 어감이 좀 그렇잖아.”
데클란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와중에 뒤에 혼자 서 있던 로지에는 이레사 공녀와 데클란을 번갈아 보았다.
“뭐예요, 저만 빈손으로 온 거예요?”
로지에의 말에 마음씨 착한 이레사 공녀는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인페르나 소남작님. 딱히 뭘 준비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다들 저 빼고 선물을…….”
시무룩해진 로지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당황한 이레사 공녀는 얼른 그를 위로했다.
“괘, 괜찮아요, 소남작님! 저는 그저 평소 사샤 경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려고 작은 선물을 준비한 것뿐이에요! 부담가지지 마세요!”
로지에를 다독이는 이레사 공녀와 달리, 데클란은 고소하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이죽거렸다.
“도련님, 실망입니다. 사냥 대회 나가는 사샤가 전혀 걱정되지 않나요?”
“그, 그렇지 않아! 잠깐만, 사샤 양!”
로지에는 황급히 자신의 겉옷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도로 나온 그의 손에는 보라색 돌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걸 받아, 사샤 양.”
“이게 뭐예요?”
길바닥에서 주운 듯한 투박한 돌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클란은 내 손에 들린 돌이 무엇인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도련님. 저걸 사샤에게 주면 어떡해요?”
“이게 뭔데?”
데클란의 반응에 더 호기심이 생긴 내가 물었다.
데클란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어진 검을 들어 올렸다.
“내 거랑 이어진 마력석이야.”
데클란의 검 손잡이 부분에 비슷한 돌이 매달려 있었다.
“사샤 네가 가진 돌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공명 현상이 일어나면서 내 돌이 반응해.”
“그런데 난 마력 못 쓰는데?”
“그러니까 너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라니까…….”
데클란이 로지에를 탓하듯이 슬쩍 흘겨보고는, 내게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차라리 내 검을 가지고 가. 내 검에는 내 마력이 잔재해 있어. 그러니까 내 검을 사용하면 마력석이 조금은 반응할 거야.”
“그렇구나.”
“그리고 도련님 건 내게 주고.”
“알았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돌 장식을 가지고 있으면 데클란과 연결이 된다는 것 같다.
‘상당히 낭만적인데?’
속으로 히죽 웃은 나는 로지에의 목걸이와 데클란의 검을 바꿨다.
그걸 본 로지에가 데클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 목걸이 다시 돌려줘, 데클란 군.”
“도련님 목걸이는 이제 제겁니다.”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 이레사 공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사샤 경. 행운이 사샤 경의 편에 있기를.”
“물론이에요. 행운은 언제나 제 편에 있지요.”
이레사 공녀를 바라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다녀올게요, 이레사 공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