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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56)화 (156/177)

156화

이레사 공녀가 고아원에 한 번 다녀온 이후.

라이렌 왕자는 제법 얌전해졌다.

예전처럼 불시로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이제 왕자는 찾아올 때마다 미리 언질을 주곤 했다.

그리고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라 꽃다발이나 장신구 따위의 소소한 선물을 들고 왔다.

예전처럼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도 없었다.

도리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어떨 때는 다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레사 공녀를 찾았다.

“몸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딘가 아픈 일이 있으면 당장 왕실 마법사를 찾도록.”

그리고 이렇게 평소 전혀 물어보지 않았던 안부도 묻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가 왜 이런 부질없는 짓을 하는 거지?’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라이렌 왕자를 노려보았다.

마음만 같으면 검을 뽑고 싶었지만, 이레사 공녀의 조언이 떠올랐다.

검이 아니라 총을 쓰라고!

실수로 라이렌 왕자에게 총탄을 쏴서 이마에 큰 구멍을 뚫는 상상을 하며, 나는 이레사 공녀의 뒷자리를 지켰다.

“알고 있겠지만, 내일 사냥 대회가 있어.”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에게 말했다.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만, 이번 사냥 대회의 목표는 온전히 그대를 위한 것이다. 참가자들이 잡아 오는 사냥감들은 전부 그대에게 바쳐질 예정이지.”

“예.”

이레사 공녀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사냥 대회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녀는 이런 무용지물의 행사를 도대체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냥 대회 열 시간에 지 머리 뚜껑이나 열어서 썩어 빠진 정신머리나 세척할 것이지…….’

속으로 그런 험한 말을 지껄이며, 나는 라이렌 왕자를 노려보았다.

그때 마침 라이렌 왕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크, 내 노골적인 적의를 들킨 건가?

괜히 찔린 나는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다행히 라이렌 왕자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 호위 기사도 사냥 대회에 당연히 참석하는 거겠지?”

“사샤 경, 말씀이신가요?”

“이름이 그거였나? 가명 같은 이름이군……. 여하튼, 그래. 저 기사도 참석하는 건가?”

“제 호위 기사이니, 저를 호위해야지요.”

이레사 공녀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니까 굳이 나를 사냥터에 보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라이렌 왕자는 그녀의 말꼬리를 잡았다.

“아니지. 저렇게 실력이 좋은 이를 호위로 썩힐 생각인가?”

“호위 기사의 임무는 호위입니다만.”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내 말은, 이번 사냥 대회에 저 기사를 보내어 좋은 성과를 거두게 하는 게 그대의 명성을 올리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뜻이다.”

“저는 어차피 곧 황국으로 떠날 몸입니다. 이제 와서 제 명성이 높아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레사 공녀가 다시 한번 완곡히 돌려 말했다.

그녀는 내가 일부러 위험한 사냥터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라이렌 왕자 놈은 이레사 공녀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아니, 내 말대로 해. 저 호위 기사는 사냥 대회에 내보내. 그리고 그대는 다른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가도록.”

아주 막무가내였다.

그 뒤로 이레사 공녀는 여러 차례 나를 사냥 대회에서 제외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인페르나 소남작도 데리고 오도록 해. 아직 백조궁에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네. 이번 사냥 대회가 끝나고 인페르나 영지로 내려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잘 됐군. 소남작과 꼭 같이 오도록.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온 시종도 참가시키도록 해.”

“시종이요?”

“그래. 인페르나 소남작은 수도에 잘 아는 귀족도 없다던데. 아무도 없이 오면 적적할 것 아니야.”

이 새끼가 언제부터 로지에 도련님을 챙겼다고?

나는 다시 눈을 부릅뜨며 왕자를 노려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로지에 혼자 호위 기사도 없이 오면 권위가 없어 보이니까, 일부러 사람을 달고 오라고 한 것이겠지.

그 뒤로 라이렌 왕자는 계속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떠들던 그는 이내 바쁜 일이 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내일 사냥 대회 때 보도록.”

그 말을 남긴 라이렌 왕자는 응접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곤란하게 되었네요, 공녀님.”

텅 빈 응접실에 앉은 이레사 공녀를 보며, 내가 읊조렸다.

이레사 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라이렌 왕자 전하의 뜻이 저러한데…… 하아, 정말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마지막 한마디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공녀는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 사샤 경. 괜히 휘말리게 되었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녀님. 전에 얘기해드렸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전 어렸을 때 멧돼지 사냥도 가봤어요!”

물론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는 건너뛰도록 하자.

내 씩씩한 말을 들은 이레사 공녀는 그제야 안색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또 다른 호위 기사를 데리고 가라니…… 난 사샤 경 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데.”

“으음…… 그럼 데클란은 어떠세요?”

그런 공녀에게 내가 제안했다.

“데클란 씨를?”

“네. 어차피 라이렌 왕자 전하가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까지 데리고 오라고 말하셨잖아요. 그리고 데클란은 검술 실력이 저보다 더 뛰어나답니다. 그러니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내 설명에 이레사 공녀는 빙그레 웃었다.

“데클란 씨가 실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그래도 사샤 경보단 못하겠지.”

“네? 그렇진 않아요! 아마 저보다 잘할 거예요! 왜냐하면 걔는 마력을 쓸 줄 알거든요!”

“마력을?”

이레사 공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처음 듣는 사실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레사 공녀는 모르고 있었겠네.

“음, 어, 그, 그게…… 사실 데클란의 아버지가 마력을 사용할 줄 아셨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아하하, 웃으며 최대한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호한 설명은 도리어 호기심만 부추겼다.

“그 말은 데클란 씨는 귀족 자제라는 건가? 그런데 어쩌다가 인페르나 소남작의 시종이 된 거지?”

이레사 공녀의 악의 없는 질문이 뒤따랐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뭉친 의문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어…… 그게…… 걔가 귀족 자제는 아니에요.”

“아.”

거기까지 내 말을 들은 이레사 공녀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데클란을 어느 귀족의 사생아로 인식한 것 같았다.

……데클란에겐 미안하지만, 굳이 해명하려고 하지 말자.

사실 나도 데클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니면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그럼 사샤 경의 말을 따르도록 하겠어. 데클란 씨를 임시 호위 기사로 내가 데리고 가도록 할게. 사샤 경이 추천한 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절 너무 과신하는 거 아닌가요, 공녀님?”

“내 신뢰를 온전히 얻은 걸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사샤 경. 지금 이 세상에서 제 마음을 얻은 이는 오로지 그대 한 명뿐이니까요.”

이레사 공녀가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평생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이왕이면 가보로 간직하세요.”

“네!”

예전보다 생기 넘치는 이레사 공녀의 목소리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이레사 공녀는 곧 로지에와 데클란을 불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라이렌 왕자의 말을 전달해 주었다.

“……그러니까, 라이렌 왕자 전하가 절 사냥 대회에 오라고 하셨다고요?”

이레사 공녀의 말을 들은 로지에는 예상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지에 도련님을 부른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저는 도대체 왜 사냥 대회에 오라고 부르신 겁니까?”

그리고 데클란도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는 이레사 공녀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높으신 분들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하지만 데클란, 내일은 네가 이레사 공녀님을 호위해주어야겠어.”

“그럼 사샤 너는…….”

“난 사냥하러 가!”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순간 데클란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사냥?”

“응. 가서 이따만한 멧돼지 한 마리 잡아 올게.”

내가 헤헤 웃으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멧돼지’라는 말을 들은 데클란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사샤, 그만둬. 위험하게 왜 사냥을 하러 가려고 그래?”

“하지만 이레사 공녀님의 호위 기사로서 출전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안 선다고!”

“지금 자존심이 문제야?”

데클란은 순간 자신이 이레사 공녀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내게 다그쳤다.

“제발 가지 마. 그냥 내가 대신 잡아 올게.”

“뭐? 싫어. 나 힘세. 걱정하지 마.”

데클란의 말을 들은 나는 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뭐든지 데클란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거든!’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왕 나가게 된 사냥 대회, 열심히 해 보도록 하자!

목표는 가장 큰 사냥감! 만일 크기로 이길 수 없다면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승부를 보자! 어떻게 해서던 모든 참가자의 코를 납작납작하게!

이런 내 긍정적인 포부와 달리, 데클란은 걱정이 먼저 앞서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주라. 꼭 나가야겠어?”

“응.”

“하아…… 사샤 너 정말 내가 미치는 꼴보고 싶어?”

“흠흠.”

나와 데클란의 대화를 듣다 못한 이레사 공녀와 로지에가 동시에 목청을 가다듬었다.

동시에 나와 데클란은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레사 공녀는 데클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클란 씨, 그냥 솔직히 말할게요.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사샤 경에게 사냥 대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셨어요.”

“명령이 합리적이지 않을 시 불복종을 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한 거예요. 어차피 이번 사냥 대회만 잘 넘기면 끝이잖아요. 그러니 괜히 라이렌 왕자 전하의 눈 밖에 나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요.”

“…….”

이레사 공녀의 말에 데클란이 조용해졌다.

그도 잘 알고 있을 테다.

이번에 사냥 대회가 끝난 뒤 이레사 공녀는 황국으로 가게 된다.

로지에와 데클란은 그녀가 출발하기 전 먼저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레사 공녀를 태운 마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여차여차해서 이레사 공녀를 구출!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그 결말까지 얼마 멀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얌전히 라이렌 왕자가 원하는 대로 휘둘려주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데클란도 결국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내놈들 사이에 내 사샤를 보내는 게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죄송한데 저 먼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지에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나는 그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어, 어디 가세요, 도련님?”

“미안해, 사샤 양. 그렇지만 사랑이 넘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으려니까 너무 힘들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나 돌아온 건 로지에의 대답이 아닌 이레사 공녀의 한숨이었다.

“인페르나 소남작님, 저도 같이 데리고 가 주세요.”

두 분 다 왜 그러세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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