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55)화 (155/177)

155화

유리나? 지금 누가 유리나를 부른 거야?

당황한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웬 중년의 여자가 서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 위에 천을 두른 그 여자는 이 고아원에서 일하는 보육사로 보였다.

누구지?

이레사 공녀가 실은 유리나라는 이름의 평민이라는 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가 그녀의 평민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가설이 있었다.

‘설마, 왕세자가 이레사 공녀의 뒷조사를 한 건가? 그리고 여기서 그녀에게 망신을 주려고?’

그 생각에 나는 손에 검집을 꽉 쥐었다.

만일 이 여자가 이레사 공녀에게 불리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 자리에서 굳어 선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에나…… 아아, 신이시여…….”

잠시 굳어 있던 여자는 입을 닫았다 열었다 반복했다.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베네스타가 여자를 꾸짖었다.

“지금 공녀님에게 무슨 무례를 끼치는 겁니까? 어서 가서 아이들이나 챙기세요.”

그러나 여자는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당혹스러워진 나는 이레사 공녀를 향해 흘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이레사 공녀가 눈에 들어왔다.

어?

뭐지, 저 반응은?

“유, 유리나…… 정말 너니……?”

여자는 말을 더듬거리며 이레사 공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대로 검집에서 칼을 빼내 들었다.

“공녀님에게 접근하지 마.”

“허, 허헉!”

검을 본 여자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이 반응을 보아하니 암살자는 아닌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레사 공녀를 향해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내게 지시를 내리기를 기다리며.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부른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어서 물러나세요! 한 번 경고했어요!”

베네스타는 다시 한번 여자를 향해 호통을 쳤다.

그러나 여자는 베네스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온 신경은 오로지 이레사 공녀에게 꽂혀 있었다.

“나, 나란다, 유리나! 나는 네 이모! 네 가족인 이모야!”

여자는 이레사 공녀를 향해 울부짖듯이 외쳤다.

그 순간, 이레사 공녀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내게는 이모가 없다.”

차디찬 목소리가 공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여자가 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손을 떨고 있는 그녀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보였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유리나, 나란다. 네 이모를 못 알아보는 거니?”

“서거하신 이레사 공작부인은 외동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찌 누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이지?”

“유리나!”

여자의 턱 아래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통함이 가득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유리나,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를 봐! 네 이모라고!”

그렇게 외친 여자는 결국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레사 공녀는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처럼 잠잠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설마 이레사 공작부인의 출신 가문에 사생아가 뒤섞였다고 말하는 건 아닐 테고.”

“흐흑, 유리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이 이모가 잘못했다!”

여자는 땅을 치며 꺽꺽 울부짖었다.

“내가, 내가 남자에 눈이 멀어서 널 버렸어! 어린 널 채소 가게에 혼자 두고 도망치지 말아야 했는데!”

채소 가게……?

그 여자의 말을 들은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린 시절의 유리나는 분명히 자신의 이모가 채소 가게를 운영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설마, 이 여자는 정말 유리나의 이모인 건가……?

“나중에 널 버리고 온 게 후회가 돼서 다시 가게로 돌아갔어! 그런데, 그런데 네가 없었어! 그래서 그 죄책감에 이렇게 고아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어!”

이제 여자는 반쯤 미친 것처럼 보였다.

“매일 굶어 죽은 네가 내 꿈에 나타나! 악몽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제발 날 용서해 줘, 유리나!”

그렇게 비명을 내지른 여자는 이레사 공녀를 향해 설설 기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검을 움직이자 여자는 흠칫 놀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레사 공녀는 차가운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참 이상하지. 내게는 정말 이모가 없는데.”

“유리나…… 유리나, 유리나! 내가 잘못했어! 그, 그래! 원하는 게 뭐니? 내가 뭘 해야지 날 용서할 거니?”

“나는 오늘 그대를 처음 본다. 그러니 그대를 용서할 것이 하나도 없어.”

“아아, 아아악! 유리나! 내가 이렇게 미안하다고 빌고 있잖니! 이 정도면 용서를 해주어야지! 내가 널 어떻게 먹여 살렸는데!”

여자는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지르며 이레사 공녀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 여자를 나는 단번에 막아섰다.

이레사 공녀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그녀는 베네스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불쾌하군요. 미안하지만 이번 방문은 이렇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고, 공녀님!”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베네스타는 그제야 사람들을 불러 여자를 끌어내게 시켰다.

이레사 공녀는 베네스타의 사과도 받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공녀님!”

나는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금 그 여자,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레사 공녀가 뒤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공녀님, 그렇지만 저분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레사 공녀가 다시 한번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사샤 경, 생각해보세요. 만인의 경애를 받은 이레사 공녀에게 알 수 없는 평민 출신의 이모라니…… 이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깃거리인가요? 저 여자를 잡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테지요.”

“…….”

그제야 나는 이레사 공녀가 왜 자신의 이모를 부인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이레사 공녀, 아니. 유리나가 자신의 가족이었던 이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행이었다.

이레사 공녀는 그대로 마차 위에 올라탔다.

“마차 지붕을 씌워라.”

공녀의 드레스 자락이 마차 바닥 위에 다 가라앉기도 전, 공녀가 마부에게 명령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마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공녀님.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분명히 외부 사람들이 공녀님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시라고—”

“내가.”

이레사 공녀의 목소리가 마부의 말을 뚝 끊었다.

“이레사 공작가의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내가, 이제 황국으로 가는 대가로 왕국을 구원하게 된 내가.”

이레사 공녀가 무릎 위에 둔 두 손에 꾹 힘을 넣었다.

“이런 내가, 마차 지붕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공녀님…….”

“해.”

이레사 공녀의 음성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느껴졌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튀어버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마부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분고분 마차의 지붕을 도로 원상 복구해 두었다.

마부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레사 공녀는 창문에 커튼을 홱 쳤다.

이윽고 완전히 닫힌 마차가 출발했다.

이레사 공녀가 반응을 보인 건 마차가 고아원을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 있던 이레사 공녀는 천천히 자신의 두 손을 올렸다.

그러곤 그녀는 그대로 두 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으, 흐흑…….”

억눌린 울음소리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나왔다.

“…….”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나.”

유리나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유리나.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저는, 저는…… 정말 나쁜 아이예요.”

유리나가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중얼거렸다.

“전 이모가 제가 사라져서 행복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째서 이모는 행복하지 않은 거지요?”

“유리나.”

“다 제 잘못이에요.”

유리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직도 고아원에서 만났던 이모의 얼굴이 눈앞에 선한 듯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모를 떠나지 않았어야 해요. 이모를 기다렸어야 해요. 마담 쟈니에트를 따라 이레사 공작가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유리나.”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왜 모든 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

“그야, 이모는 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여전히 눈물 섞인 숨을 엉켜 내뱉던 유리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오지랖 넓게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그만 해.”

유리나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멎었다.

제 얼굴에서 손을 거둔 유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샤 님, 전…….”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 가시가 돋아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아니야.

유리나.

넌 항상 좋은 것을 누리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웃음이 가득한 사계절을 보내야 하는데.

봄이 오면 온 대지에 만개한 꽃을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여름이 오면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눈가에 찬연한 미소를 담고.

가을이 오면 황금빛으로 물든 낙엽을 주우며 포근한 미소를 선보이고.

겨울이 오면 온통 새하얀 천국이 된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야 하는데.

“난…… 네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어.”

유리나의 어깨를 쥔 내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널 가장 먼저 생각해 줘, 유리나. 남의 행복보다 네 자신의 행복을 더 챙겼으면 해.”

“사샤 님…….”

“네가 만일 마담 쟈니에트를 따라 이레사 공작가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네 이모가 행복해졌을 것 같아?”

“…….”

유리나의 입에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도 아마 은연중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결말은 절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넌 네 삶을 살아. 그리고 네가 행복해야지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사샤 님…….”

“유리나, 난 네 삶을 사는 널 보고 싶어.”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랑 약속해, 유리나.”

유리나는 멍하니 내 새끼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선한 충격에 빠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녀의 얼굴 위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재촉하듯, 나는 손가락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네가 행복해야지 나도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약속해.”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정말이지.”

이윽고 유리나는 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잖아요.”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 않으며, 유리나가 내게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