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54)화 (154/177)

154화

라이렌 왕자가 백조궁을 떠난 직후, 이레사 공녀들의 시녀들은 왕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 외부 일정을 조율했다.

이레사 공녀의 왕궁 외출 일정은 바로 그다음 날로 잡혔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살펴보신다고요?”

“그렇게 됐어.”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마치며, 이레사 공녀가 내게 대꾸했다.

“내 역할은 황국으로 가서 전쟁을 멈추는 거잖니. 전쟁을 멈추고 장차 이 왕국의 미래가 될 아이들을 지켜주었으니, 고아원에 가는 게 가장 그럴듯하지 않겠어?”

그러면서 이레사 공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 옆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시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출 채비를 마친 이레사 공녀는 우아한 차림으로 마차 위에 올라탔다.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줄곧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는데, 사샤 경.”

마차에 앉은 이레사 공녀가 맞은편에 나를 바라보았다.

“네,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사샤 경의 목에 난 붉은 자국은 뭐지?”

“네?”

나는 처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목에 난 붉은 자국이라니. 그게 뭐지?

그러나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네가 도대체 언제까지 웃기만 하나 보자.’

어젯밤, 그런 말을 남긴 데클란은…….

……음, 이하생략.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지. 그리고 내 목덜미에 남은 흔적은 아마…….

이레사 공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나는 그대로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으으, 데클란…… 왜 하필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다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두 손을 볼로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모른 척해주세요, 공녀님!”

그러자 이레사 공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리고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사샤 경?”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상당히 부끄럽다는 식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목에 난 울긋불긋한 자국이?”

“둘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렇게 콕 집어서 말하니 손발이 당장 불판 위에 오징어처럼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혹시 다친 거야?”

“네?”

“사샤 경의 목 위에 전에는 없던 상처가 생겼잖아. 혹시 어디에 부딪혀서 멍이라도 생긴 거야?”

이레사 공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나를 놀리려는 의도보다는 정말 몰라서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이레사 공녀가 어린 나이의 소녀였을 때부터 줄곧 공작가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 그 이레사 공작의 외동딸이니, 얼마나 유리막 안에 든 장미처럼 보호를 받고 자랐을까.

“으음…… 사실 어젯밤에 모기에게 물렸어요.”

목덜미를 손등으로 쓱쓱 만진 내가 아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레사 공녀는 조금 놀랍다는 듯이 나를 주시했다.

“모기? 모기에게 물린 자국치고 상당히 큰데…….”

“네, 대왕 모기였어요.”

“그렇게 큰 모기였으면 사샤 경도 자다가 깨어났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크게 물린 거야.”

“그 대왕 모기가 참 집요하더라고요, 아하하!”

모기 취급해서 미안해, 데클란!

속으로 데클란에게 눈물의 사죄를 올렸다.

그리고 순수한 이레사 공녀는 내 목덜미의 키스 마크가 정말 모기에 물린 자국이라고 믿어버렸다.

“사샤 경, 나중에 왕실 마법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왕실 마법사 중에 여자만 담당하는 이들이 있어.”

“으음…… 네,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사 공녀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는 왕실 마법사를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여자 왕실 마법사는 로레론치였다. 그리고 그녀가 내 목덜미에 난 자국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눈앞에 선했다.

아마 박장대소하며 날 계속 놀려먹겠지. 그러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졸라댈 테다.

생각만 해도 귀찮아!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부와 시녀였다.

“공녀님, 마차의 창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마부와 시녀는 마차 안으로 들어와 창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마차는 이윽고 창문이 턱 열린 개방형으로 변했다.

밖에서 마차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러다가 누가 공녀님에게 돌이라도 던지면 어떡하자는 건가요?”

이레사 공녀를 마치 물건처럼 자랑하려는 라이렌 왕자의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내가 쓴소리를 했다.

그러자 시녀가 도리어 퉁명스럽게 이죽거렸다.

“그게 사샤 경의 일 아닌가요?”

“뭐?”

“공녀님의 호위 기사잖아요. 알아서 잘해보세요.”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럼 저는 나중에 백조궁에 돌아가서 응접실에 있는 샹들리에 총으로 쏴서 부셔도 되나요?”

“뭐라고요?”

“그게 시녀님 일이잖아요. 공녀님이 사는 궁을 깨끗하게 다루는 일. 그러니까 시녀님이 다 치워주실 거죠?”

내 말에 시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무식한 말인가요? 지금 이게 사샤 경이 일부러 사고를 치는 거랑 같을 수 있나요?”

“네? 아닌가요? 지금 마차 뚜껑을 이렇게 확 열어놓고 야외로 나가는 게 일부러 사고 치는 거랑 뭐가 달라요?”

“사샤 경, 지금 뭐라고—”

“사샤 경.”

앙칼진 시녀의 목소리 위로 이레사 공녀의 차분한 음성이 가라앉았다.

“나는 괜찮으니 이만 가도록 해요.”

“공녀님…….”

나는 머뭇거리며 이레사 공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만에 하나 제가 습격당한다면, 제 주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사형에 처해지는 건 시녀들이겠지요.”

“공녀님, 어찌 그런 말씀을……!”

“내 말이 맞잖아요, 세티프니.”

이레사 공녀가 싱긋 웃으며 시녀를 바라보았다.

“라이렌 왕자 전하는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시는 걸 좋아하셔요. 잊으신 건가요?”

물론 그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의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싸늘한 눈길에 시녀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창백하게 얼굴이 질린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시녀는 재빨리 제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덜컹, 덜컹.

지붕이 열린 마차가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왕궁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길 봐, 이레사 공작 가문의 인장이 달린 마차야.”

“그럼 저 마차에 타고 계신 분은, 이레사 공녀님?”

왕국의 명문가인 이레사 공작가의 위세는 과연 대단했다.

수도 거리의 사람들은 곧바로 이레사 공녀를 알아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덕분에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레사 공녀를 향해 크게 외쳤다.

그런 지나가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이레사 공녀는 꼿꼿이 앉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저런 감사함을 담은 마음을 표현해오면 미소를 지으면서 손이라도 흔들어 줄 법도 한데, 이레사 공녀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레사 공녀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그녀에게서 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호기심이 가는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마차는 천천히 왕국 수도의 거리를 누비었다.

아무래도 마차의 마부는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이레사 공녀를 선보이는 길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번화가를 세 차례나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지.

‘피곤하네…….’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그러다가 마침 마차 뒤편에 앉아있던 시녀들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들은 나를 불쾌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하품도 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그녀들의 쌀쌀맞은 시선을 무시하며 기지개를 켰다.

굳이 그들의 마음에 들 필요가 있나?

시녀들의 살벌한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며, 나는 느긋이 마차 타기를 즐겼다.

마차는 그렇게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한 건 왕궁을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상당히 큰 곳이네요.”

마차에서 내린 이레사 공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가 도착한 고아원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배는 더 컸다.

고아원의 정문은 코끼리 한 마리가 지나가도 거뜬할 정도로 넓었다.

어마어마한 정문을 중심으로 늘어진 벽은 끝이 없어 보였다. 마치 작은 성곽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있었다. 천사처럼 생긴 어린아이들이 왕관을 쓴 왕족을 둘러싸 축복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었다.

그 조각상 아래에는 <왕립 고아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립 고아원이라니.’

어쩐지 규모가 예사롭지 않더니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공녀를 향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이레사 공녀를 향해 한 여자가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단정한 차림의 여자는 자신을 고아원의 서기관이라고 밝혔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레사 공녀님. 제 이름은 베네스타입니다. 원장님께서는 며칠 전 다른 지역으로 출타하신 관계로 부득이하게 제가 대신 안내해드리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이해 부탁드립니다.”

베네스타의 말에 나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원장이 없다고?’

고아원을 방문하러 왔는데 원장이 없다니. 게다가 그 누구도 아닌 화제의 이레사 공녀가 찾아왔는데.

정말 급하게 잡은 일정이 분명했다.

이레사 공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서기관 베네스타의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베네스타. 이쪽은 제 호위 기사인 사샤 경입니다.”

“사샤 경,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네스타는 친절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올렸다.

첫인상으로 보자면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다.

“바쁘신 와중에 이런 누추한 곳까지 걸음 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레사 공녀를 고아원 안으로 안내하며, 베네스타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왕립 고아원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가끔 귀족 부인들이 제 가문에 하인이나 하녀로 쓰려는 아이들을 직접 고르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는 있지만…… 여하튼, 공녀님이 찾아오셔서 아이들이 많이 좋아할 겁니다.”

베네스타는 이레사 공녀를 데리고 고아원 내부를 이리저리 보여주었다.

때마침 마당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이레사 공녀를 쳐다보았다.

“저 언니 진짜 진짜 이쁘다. 새로 오신 선생님인가 봐.” 

개중 한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을 들은 베네스타는 헉, 하고 숨을 삼키며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멋도 모르고 저런 말을……!”

당황한 베네스타는 급히 보육사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게 시켰다.

이레사 공녀는 베네스타를 말렸다.

“아니에요.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렇게 이레사 공녀가 부드럽게 상황을 정리하려던 그때였다.

“……유리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이레사 공녀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