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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53)화 (153/177)

153화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왕자 전하, 어찌 공녀님만 홀로…….”

왕자 뒤에 서 있던 왕실 호위 기사도 당황했는지 말을 얹었다.

그러나 라이렌 왕자는 막무가내였다.

“어차피 지금 왕국에서 이레사 공녀는 성녀처럼 드높여지는 상황이다. 그 누가 그녀를 해하겠는가?”

“하지만, 왕자 전하. 행여나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이레사 공녀님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괜찮다! 행여나 공녀가 다쳐도 뭐가 나쁘다는 거지? 왕세자에게 뒤집어씌우면 돼!”

제 호위 기사에게 짜증이 난 라이렌 왕자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시 돋친 왕자의 음성이 응접실 가득 어수선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응접실 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차.

라이렌 왕자는 그제야 자신이 이레사 공녀 앞에서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아, 공녀. 혹시나 오인하지 말았으면 해.”

“……무엇을요?”

이레사 공녀가 메마른 목소리로 되물었다.

만일 그녀의 목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아마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지 않았을까.

라이렌 왕자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그대를 해치려고 하지 않을 거란 말을 강조하고 싶었던 뿐이야. 이해하지?”

미안하다는 사과 하나 없는 무의미하고 무성의한 말이었다.

그런 말에도 이레사 공녀는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자 전하.”

“그래. 그대라면 내 깊은 생각을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했어.”

그 말을 뒤로 라이렌 왕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며칠 사이로 왕궁 밖에 한 번 나가서 수도 백성들에게 얼굴 좀 한 번 드러내고 오도록.”

자기 할 말을 남긴 라이렌 왕자는 그대로 응접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와, 왕자 전하!”

왕자의 호위 기사는 허둥지둥 응접실 밖으로 그를 따라 뛰어가려다가,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이 멈춰 섰다.

그는 이레사 공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레사 공녀님. 왕자 전하께서 결례를 끼치셨습니다.”

공녀에게 사죄의 말을 올린 그 호위 기사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응접실 안에 남은 건 나와 이레사 공녀뿐이었다.

“……검은 이제 거두어도 좋아요, 사샤 님.”

가만히 소파 위에 굳은 채 앉아있던 유리나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마음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어?”

“사샤 님께 내내 집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사샤 님이 검을 뽑으려고 하는 건 금방 눈치챘지요.”

“……미안해.”

그제야 나는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검집이 철렁, 힘없이 가라앉았다.

유리나의 말이 맞았다.

라이렌 왕자의 폭언을 듣다 못한 나는 하마터면 검을 뽑아 들 뻔했다.

유리나에 대해 제멋대로 지껄이는 라이렌 왕자의 폭언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 비열한 이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욱하고 올라온 화를 참지 못하고 하마터면 검을 뽑을 뻔했다.

유리나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절 위해 마음 써주시는 건 정말로 감사드려요. 하지만 방금 정말로 검을 뽑아 드셨더라면,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사샤 님을 가만히 두시지 않았을 거예요.”

“알아, 유리나. 미안해…….”

“검으로 베는 건 너무 느려요.”

유리나의 입에서 대뜸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만일 상대방을 제압하시려거든, 검이 아니라 총으로 하세요. 특히나 마력이 강한 인물일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죠.”

……음?

예상치 못한 유리나의 말에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유리나가 뭐라는 거지? 검은 느리니까 차라리 총을 쓰라고?

“검보다 총알이 훨씬 더 빨라요. 그러니 제아무리 마력이 강한 사람이더라도 총알을 피하지는 못할 거예요.”

“어, 음…… 유리나, 지금 그게…….”

“예전에 이레사 공작님에게서 들었던 말이에요.”

유리나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이레사 공작가 안으로는 총 반입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요.”

물론 그 미소가 마냥 아름답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선지 등골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유리나 너…… 조금 무섭다.”

멍하니 굳어 있던 내 입에서 내 속마음이 고스란히 기어 나왔다.

유리나는 앗, 하고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그런가요? 사샤 님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그냥, 사샤 님이 좋아하실 만한 거 아무거나 얘기한 것뿐이에요!”

유리나는 내가 왜 검보다 총이 더 암살에 적합하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유리나의 머릿속에 나는 도대체 어떤 이미지지? 그녀는 평소의 날 뭐로 보고 있는 거야?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유리나의 어깨를 꾹 눌렀다.

“알았어, 유리나. 날 위해 이야깃거리를 생각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샤 님도 절 위해 대신 화를 내주셔서 고마워요.”

유리나가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화답했다.

“이 왕궁에서 사샤 님처럼 절 위해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뭐가 고마워. 난 네 호위 기사잖아.”

“알아요. 이대로 사샤 님을 영원히 제 옆에 두고 싶네요.”

유리나 역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사샤 경의 옆자리는 데클란 씨가 먼저 가져가 버렸으니, 전 포기할 수밖에 없겠네요.”

응접실 문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유리나는 도로 이레사 공녀의 가면을 썼다.

나 역시 몸가짐을 다시 바로 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거 아세요, 공녀님? 사람에게는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두 옆자리가 있어요.”

“어머, 그 말은 즉…….”

“데클란이 비록 제 한 옆자리를 차지했지만, 공녀님에게 다른 쪽 옆자리를 드릴 수 있다는 건데요.”

뻔뻔스럽게 그런 농을 던지며 나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이레사 공녀는 이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사샤 경도 참 짓궂네요. 하지만 전 욕심이 많아서 그렇게는 안 되겠어요.”

그런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더 나아 보였다.

내 장난스러운 말이 그녀의 기분을 조금 더 낫게 만들었기를 빌며,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그날 저녁.

“왕궁 밖으로 외출하라고 했다고?”

또다시 내 방에 찾아온 데클란.

그는 오늘 이레사 공녀와 라이렌 왕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어이없지?”

“어이가 없다마다…… 이레사 공녀님은 정말 왕궁 밖으로 나갈 생각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이 든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잘나신 왕자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지.”

“라이렌 왕자는 도대체 뭐야? 머리가 조류야?”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던 나는 그대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쉿, 데클란! 그러다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콜록콜록 기침하며,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데클란을 다그쳤다.

그러나 데클란은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뭐가?”

“무책임해. 아무리 정략혼이라고 해도, 이레사 공녀는 라이렌 왕자의 약혼녀잖아. 어떻게 자신의 약혼녀를 그런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에 밀어 넣을 수 있는 거지?”

데클란의 말에 나는 그저 더 짙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레사 공녀님이 불쌍해. 결코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닌데…….”

데클란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데클란은 나를 향해 빤히 시선을 던졌다.

마치 나의 모든 윤곽을 제 눈에 담으려는 듯한 집요한 눈길이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 의해 뚫어지게 바라보아지는 건 꽤 긴장감 넘치는 경험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사샤.”

데클란이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따뜻한 손길이 내 손등을 고스란히 덮었다.

‘데클란은 손이 참 크네.’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며 내 손을 덮은 데클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난 널 결코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하지 않을 거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진지하게 굳은 데클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비교 대상이 고작 라이렌 왕자라니, 너무 슬프다.”

“……왕자니까 비교가 가능한 거야.”

“음?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런 게 있어.”

그 말과 함께 데클란이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이렇게 그에게 안기는 건 처음에는 어색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부끄러움보다는 긴장감이 더 가득했다.

데클란이 이 뒤로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그런 긴장감.

“그래서, 데클란 넌 라이렌 왕자를 반면, 교사로 삼는 거야?”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데클란에게 물었다.

물론 나는 이런 경쾌한 웃음 뒤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클란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만약에 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해도…… 널 위해서라면 그깟 신분쯤이야 버릴 수 있어.”

“엥?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네가 왕자면 더 좋아!”

내 말에 데클란의 손짓이 멈칫거렸다.

“……넌 내가 왕자면 좋겠어?”

“음?”

“네가 공주가 아닌데, 내가 왕자가 될 필요가 있을까?”

데클란이 피식 웃으며 내 이마 위에 살짝 키스를 남겼다.

“넌 내 사샤야.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해야 하는 공주가 아니라, 나한테만 상냥하게 대해주는, 내 사샤.”

순간 등골을 타고 기분 좋은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물론 난 네가 왕자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야. 그래도 상상하면 뭔가 멋지지 않아? 네가 왕자면 난 신데렐라가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괜히 밀려오는 긴장감에 나는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아무런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데클란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신데렐라가 뭐야?”

“아 참…… 넌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신데렐라가 뭔데?”

“예, 예전에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인데…… 밤늦게까지 신나게 놀다가 신발 잃어버린 여자 이야기야. 나중에 잘생긴 남자가 그 여자 신발 찾아주고 둘이 결혼해.”

“뭐야,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러면서 데클란은 내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하하, 뭐야. 간지러워.”

그 촉감이 간지러웠던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반응에 데클란은 어째선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 데클란?”

“……넌 왜 이렇게 여유롭기만 해? 나만 조급한 거야?”

“어, 응? 뭐라고?”

“하아, 사샤…… 네가 도대체 언제까지 웃기만 하나 보자.”

“뭐? 아, 잠깐—”

그 뒤로 나는 제대로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순간 천장이 뒤집히고 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소파 위로 쓰러져 있었고, 데클란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샤.”

“으, 으응?”

“입 벌려.”

“뭐……?”

도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뻥긋거리던 사이, 데클란이 그대로 내게 닥쳐왔다.

한 번 도발 당한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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