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로지에의 말을 들은 이레사 공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좋은 소식부터 듣도록 하지요.”
숨을 가다듬은 이레사 공녀가 로지에에게 천천히 말했다.
“우선 왕정 회의는 저희가 바라던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공녀님을 황국으로 보내어 평화 협정을 맺자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이레사 공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녀는 어째선지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로지에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에 선 데클란 역시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이레사 공녀님이 황국으로 가기 전에 공녀님을 기리기 위한 사냥 대회를 여시겠다고 합니다.”
뭐?
로지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 대회? 갑자기 웬 사냥 대회를 열겠다고?
나만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사냥 대회라니, 그것참…… 예상치 못한 행사로군요.”
제대로 된 단어를 찾지 못해 말을 더듬거리던 이레사 공녀가 천천히 답했다.
로지에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조만간 황국으로 가게 되셔서 준비하고 신경 쓰셔야 할 것도 많은데, 이런 불필요한 행사까지…….”
“아니에요.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언젠가 제 호위 기사를 왕세자 전하에게 선보이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어요.”
이레사 공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과거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마 이번 사냥 대회를 통해 사샤 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시려는 것 같네요.”
“그런가요? 참 쓸데없는 짓에 인력과 자원을 허비…… 후, 여기서 끊도록 하겠습니다.”
두 눈을 감은 로지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이는 데클란도 마찬가지였다.
‘사냥 대회라니…….’
나는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라이렌 왕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정말 유리나 말대로 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한 건가?’
듣자 하니 저번에 왕세자의 호위 기사가 나에게 호되게 당했을 때, 라이렌 왕자가 무척이나 흡족해했다고 했다.
이레사 공녀가 황국으로 가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그녀의 호위 기사가 아니게 되기 전에, 날 동네방네에 자랑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굳이 사냥 대회일 필요는 없는데.’
1:1로 진행되는 검술 대회가 더 걸맞지 않나?
굳이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하는 라이렌 왕자의 저의가 무엇일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레사 공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인페르나 소남작님.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소남작님께서 저를 황국에 볼모로 보내야 한다고 말씀을 꺼내셨을 때…….”
그 대목에서 이레사 공녀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때…… 혹시 이레사 공작님께서 반대하시지 않으셨나요?”
침묵.
응접실 안으로 싸늘한 침묵이 자리 잡았다.
‘아.’
나는 이레사 공녀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았다.
궁금했을 것이다.
아무리 가짜 아버지라지만, 그래도 자신을 향한 애정이 있는지.
정말 딸에 대한 애틋한 부성애가 남아있어서 자신을 거두어들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 딸이라는 껍데기만을 원한 것인지.
자신의 딸을 타국에 볼모로 보낸다고 했을 때, 그이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공작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없으셨습니다.”
한참 동안 주저하던 로지에의 입에서 그런 답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군요.”
이레사 공녀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의 시선은 응접실의 천장 끝자락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눈물을 흘릴 것처럼 보였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레사 공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밖에는.
그녀의 곁에 앉아 어깨를 내어 줄 수 없는 나 자신이 야속해졌다.
* * *
곧 온 왕국에 한 가지 소식이 퍼져나갔다.
이레사 공녀가 황국으로 보내지고, 그로 인해 조만간 왕국과 황국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질 것이라는 소식.
이 소식이 가지고 온 변화는 어마어마했다.
당장 왕궁 안의 분위기부터 훨씬 달라졌다.
매일 불안감에 싸여있던 왕궁 내 사람들의 얼굴 위에는 안도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전쟁이 터지면 어쩌지, 하고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은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특히나 기뻐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공녀 덕분이다.”
백조궁으로 찾아온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꺼낸 한 마디였다.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를 다시 찾아온 것은 왕정 회의가 끝난 지 일주일이 흐른 뒤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백조궁을 방문한 라이렌 왕자는 흡족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온 나라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다. 라이렌 왕자의 약혼녀 때문에 전쟁을 모면했다고, 그가 구원자라고.”
그 말을 하는 라이렌 왕자는 흥분한 듯이 소파의 팔을 여러 차례 탕탕 내리쳤다.
“이 얼마나 대단한가! 모두가 내 이름을 입에 올리며 칭송하고 있어!”
지랄도 풍년이다. 어딜 봐서 자기를 칭송하는 건가.
라이렌 왕자의 헛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마음만 같으면 당장 티팟 안에 든 찻물을 그의 머리 위로 쏟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이레사 공녀였다.
나는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로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지금 여기서 나섰다간 라이렌 왕자가 ‘감히 네가 뭐라고 나서느냐’라며 호통을 치며 난리를 피울 게 분명했다.
참고로 라이렌 왕자 뒤에 선 호위 기사는 특수 부대 출신의 기사가 아닌, 일반 귀족 출신의 왕실 기사였다.
“…….”
라이렌 왕자의 말에 화딱지가 돋은 나와 달리, 이레사 공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잠잠히 찻잔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이레사 공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라이렌 왕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 정도의 민심이라면 판도를 뒤집을 수 있겠어. 그래, 다음 왕정 회의 때 왕세자의 코를 완전히 납작하게 만들어서 국왕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다.”
“좋은 생각이네요. 감축드립니다.”
이레사 공녀는 마지못해서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분명 축하의 말이었지만, 어째선지 전혀 축복하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라이렌 왕자는 제 약혼녀의 감정까지 신경 쓸 정도의 대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기세를 더 밀어붙이도록 하지. 공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라이렌 왕자의 말에 이레사 공녀는 얕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죠?”
“나와 함께 왕궁 밖으로 나가야겠다.”
“……왕궁 밖이요?”
라이렌 왕자의 말에 이레사 공녀는 천천히 두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온 왕국이 모두 이레사 공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국에 왕궁 밖으로 나가란 말인가?
“모두가 저를 알아보고 달려들 텐데요.”
“바로 그거다. 탁 트인 마차를 타고 나갈 거다. 그리고 왕국 수도에 있는 백성들에게 나와 공녀의 모습을 선보이는 것이지.”
“왜 그런 일을 하시려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이레사 공녀가 사뭇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라이렌 왕자는 공녀를 향해 혀를 찼다. 마치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겠냐’는 듯한 눈길을 더하면서.
“지금 왕궁 밖에 모두가 나와 공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달리 말하자면 나의 존재에 대해 더 확실하게 선보일 기회다.”
그 말을 하는 라이렌 왕자는 백성들의 선망 어린 시선과 열렬한 환호성을 받을 생각에 벌써 흠뻑 취해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민심이 완전히 내게 돌아오게 할 계획이다. 놓칠 수 없는 천상의 기회지.”
‘나 참…….’
라이렌 왕자의 장황설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결국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은 어떻게 이렇게 일관적으로 이기적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레사 공녀와 함께 왕궁 밖으로 나들이 나가는 척하면서 백성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겠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레사 공녀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녀와의 관계성을 강조하겠지. 그러고선 약혼녀를 사랑하지만 나라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걸 선보이려는 목적일 테다.
제법 머리 굴렸네.
‘근데 자기가 언제부터 백성들을 챙겼다고…… 에휴, 내가 할 말을 안 한다…….’
라이렌 왕자의 말에 나는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에는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기 전까지 이용하겠다는 것 아닌가.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조금 주제넘게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왕자 전하. 지금 하신 방도가 매우 듣기 좋으나, 조금 위험할 것 같습니다.”
“뭐지?”
한참 혼자 떠들던 라이렌 왕자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에 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히 내가 할 말을 고했다.
“왕자님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이레사 공녀님과 함께 왕궁 외부로 나갔다가 암살 시도라도 당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유리나를 네 트로피처럼 쥔 채로 끌고 다니지 말라고!
그러나 라이렌 왕자는 그저 오만하게 콧방귀를 꼈다.
“그럴 일은 없다. 내 마력 실력을 무시하는 건가?”
“당연히 왕자 전하의 마력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이레사 공녀가 때맞게 내 말을 이었다.
“다만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누군가가 왕자 전하를 질투한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 망신을 주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저번에 왕세자 전하를 만났을 때 제 호위 기사를 망신 주려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레사 공녀는 굳이 ‘왕세자’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흐음…….”
이레사 공녀의 말을 들은 라이렌 왕자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제아무리 국왕의 혈통을 이어받아 마력이 뛰어난 라이렌 왕자라지만, 왕세자는 왕세자였다.
왕세자가 원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라이렌 왕자가 왕궁 밖으로 나간 틈을 타 수작을 벌이려고 할 테다.
“……공녀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군.”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라이렌 왕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소견을 고려해 주셔서 감사합……,”
“그럼 공녀 혼자 나가도록 해.”
이레사 공녀가 감사의 말을 올리려던 찰나, 라이렌 왕자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음?
라이렌 왕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레사 공녀 혼자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