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세티프니의 말을 들은 라이렌 왕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의 얼굴은 흰 양털처럼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충격에 휩싸인 듯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라이렌이 중얼거리듯이 되물었다.
“지금……뭐라고 했지?”
‘과연!’
라이렌 왕자의 반응을 본 세티프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돈과 사람을 풀어 뒷조사를 시키기를 잘했다.
비록 상당한 출혈이 나는 지출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세티프니가 물고 온 소식은 라이렌 왕자에게 이득이 되고 가치가 있는 정보다.
지금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이 정보라면 라이렌 왕자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 가문도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생각에 자신감이 생긴 세티프니는 재차 설명을 부어댔다.
“말씀대로입니다. 인페르나 소남작의 시종이란 그 남자, 사실은 국왕 폐하의 사생아…….”
“그 입 다물어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굳어 있던 라이렌 왕자가 대뜸 세티프니를 향해 윽박질렀다.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감히 국왕 폐하를 모욕하다니!”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화들짝 놀란 세티프니는 헉, 하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모, 모욕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전하께서도 아셔야 할 정보라 판단하여…….”
“멍청한 것. 국왕 폐하의 사생아? 그걸 나한테 말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나? 감히 폐하의 도덕성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다니!”
“소, 송구하옵니다!”
세티프니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이, 이게 아닌가?’
예상과 달리 불같이 화를 내는 라이렌 왕자.
그 반응에 세티프니는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너는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만일 내가 아니라 왕세자가 네 말을 들었더라면 네 혓바닥이 그대로 잘려 나가고 말 것이야.”
혓바닥을 자른다니!
그 끔찍한 말에 세티프니는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그러나 라이렌 왕자는 세티프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망할 것. 썩 꺼져! 그리고 앞으로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 입에서 내 귀로 들어온다면 네 목이 온전히 못 할 것이다!”
“예, 예!”
혼망해진 세티프니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듯이 도망쳤다.
“왕자 전하? 무슨 일이…….”
줄행랑을 치는 세티프니를 본 서기관이 왕자가 있는 응접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러나 서기관은 응접실 안으로 한 발자국도 제대로 내딛지 못했다.
—쨍그랑!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잔이 그대로 대리석 바닥 위로 나뒹굴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잔의 파편이 아직도 나뒹굴고 있을 때, 바닥 위로 또 잔과 접시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챙! 와장창!
서기관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날카로운 소리 뒤로는 흉흉한 얼굴의 라이렌 왕자가 서 있었다.
“치워.”
“예, 예!”
“혼자서 치우지 말고,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 다 불러서 같이 치워.”
“아, 알겠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왕자의 질문에도 서기관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라이렌 왕자의 얼굴은 험악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한 사람의 심기를 일부러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서기관들을 비롯한 다른 사용인들이 응접실 안을 청소하는 사이, 라이렌 왕자는 급히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철컥!
라이렌 왕자는 집무실의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잠금장치를 내렸다.
그는 한참이나 문가에 서서 복도에 인기척이 나는지 확인했다.
왕자의 명령 때문에 이 궁에 깨어있는 모든 이들은 응접실로 내려간 상태였다. 하여 왕자의 응접실 부근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외부의 동향을 살피던 라이렌 왕자는 마침내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후.”
긴 호흡을 내뱉은 라이렌 왕자는 두 눈을 꽉 감았다.
심장이 쿵쿵 막무가내로 날뛰고 있었다. 당장 송곳 따위로 찌르면 터질 듯이 아파졌다.
‘사생아? 국왕에게 사생아가 있었다고?’
세티프니가 자신에게 들려준 말이 아직도 귓가에 웅웅 울리고 있는 듯했다.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티프니가 일부러 자신에게 거짓을 고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녀는 분명히 정보의 진위를 꼼꼼히 살피고 난 뒤에야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다.
‘굳이 이레사 공녀라는 좋은 패를 황국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전하. 그 사생아를 대신 황국에 볼모로 보내십시오!’
세티프니는 자신에게 그 사생아를 이용하라고 했다.
확실히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버리는 건 아쉬운 일이긴 했다.
그녀를 약혼녀로 두고 있으면 이레사 공작과 그의 측근들을 잘 부려 먹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이렌 왕자는 이레사 공녀를 제 옆에 계속 둘 생각이 없었다.
그 여자는 어차피 자신의 도구와도 같았다. 도구에 애착을 가지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 사생아를 황국으로 보내는 건…….’
위험하다.
안 그래도 왕세자와 라이렌 왕자의 파벌 싸움이 계속되던 참이었다.
왕국 내에 귀족들은 이미 더는 갈릴 수 없을 지경으로 갈려 있었다.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이 길어지는 정치 다툼에 피곤해하던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혜성처럼 사생아가 나타난다? 그런데 대외에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하는 일이 바로 전쟁을 막기 위해 자진해서 황국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면 왕국 백성들의 민심이 누구에게 기울까?
하물며 귀족들의 관심이 누구에게 쏠릴까?
‘안 돼. 절대 안 돼.’
꽈악.
라이렌 왕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결코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 이름도 모를 사생아가 모두의 환심을 거두어 가는 꼴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 사생아가 그 민심을 발단으로 해서 왕위에 도전하게 될지.
‘세티프니의 입을 단단히 막아둬야겠어.’
그녀에게 일단 협박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비밀리에 사람을 풀어 그녀의 정보망을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라이렌 왕자는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갈았다.
‘설마, 이레사 공녀는 그 시종이 국왕 폐하의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인페르나 소남작이 일부러 사생아를 궁 안으로 데려온 건가? 혹은 그 사생아가 인페르나 소남작에게 접근해서 시종으로 들어온 건가?’
라이렌 왕자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번 싹 트기 시작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본래 남을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라이렌 왕자였다.
게다가 자신과 왕위 다툼을 할 수 있는 이복형제가 생겨났다고 생각하니, 그의 불안감이 극치에 달하기 시작했다.
‘녀석을 죽여버려야 해.’
입술을 깨물던 라이렌 왕자가 마침내 그런 결단을 내렸다.
‘왕세자 놈과 권력 다툼하는 데도 버거운데, 또 다른 왕자라니.’
제기랄!
—쾅!
이를 꽉 악문 라이렌 왕자는 기어코 주먹으로 집무실 책상을 내리쳤다.
‘놈을 없애버려야 해. 쥐도 새도 모르게,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이 세상에서 아예 흔적을 지워버려야 해!’
* * *
그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어둑어둑하기만 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이 왕정 회의 날이네요.”
“그래.”
따뜻한 차를 한 입 마신 이레사 공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지금 이레사 공녀의 방에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으슬으슬한 추운 기운을 견디기 위해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페르나 소남작…… 잘 해내겠지?”
이레사 공녀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조금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확신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로지에 도련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신 분이에요.”
“사샤 경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믿을 수밖에.”
그제야 이레사 공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로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백조궁을 떠났다. 왕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데클란은 로지에를 보좌하기 위해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나와 이레사 공녀는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공녀의 방 안으로 시녀들이 찾아왔다.
그녀들은 방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나와 이레사 공녀를 살피듯이 흘끔거리다 나갔다.
아마 라이렌 왕자에게 모종의 지시를 받은 게 분명했다.
‘기분 나쁘게 흘낏거리다니. 그냥 대놓고 쳐다보지.’
괜히 기분이 나빠진 나는 시녀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시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획 돌려버리더니, 이내 방에서 도망치듯 퇴장했다.
‘눈싸움도 못 이기면서.’
그렇게 시녀들을 쫓아낸 나는 느긋하게 이레사 공녀와 티타임을 즐겼다.
“사샤 경은 긴장되지 않아?”
“뭐가요?”
공녀가 쥐고 있던 식은 찻잔에 새로 따뜻한 찻물을 부어주며, 내가 되물었다.
“이번 왕정 회의가 만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면…… 나와 사샤 경은 떨어지게 되겠지?”
그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의 말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티팟을 내려놓은 나는 이레사 공녀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녀님.”
내 손의 온기가 그녀의 차디찬 손가락 끝까지 녹일 수 있길 바라며.
“제가 공녀님이 외롭지 않게 찾아갈게요.”
“……사샤 경은 참 멋진 말을 잘하네. 데클란 씨가 왜 반했는지 알 것 같아.”
이레사 공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데클란에 대한 말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네? 데, 데클란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요?”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나와야 하지?”
“공녀님!”
“장난이야.”
이레사 공녀가 쿡쿡 웃으며 내 볼을 한 손가락으로 찔렀다.
“얼굴이 빨갛게 변했네, 사샤 경.”
“으음…….”
평소답지 않게 내게 장난치는 이레사 공녀의 모습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였다.
“공녀님.”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끊기기가 무섭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인페르나 소남작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시녀의 알림에 나와 이레사 공녀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곧장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에는 로지에와 데클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본 데클란은 덤덤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저 표정은?’
도통 읽기 힘든 그의 얼굴 때문에 나는 혼란해졌다.
“어떻게 됐지?”
시녀들을 모두 물린 이레사 공녀가 로지에에게 급히 물었다.
“그것이…….”
로지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동시에 있습니다만…… 어떤 걸 먼저 듣고 싶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