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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49)화 (149/177)

149화

‘뭐래, 이 아저씨가?’

왕세자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반면 이레사 공녀의 얼굴은 찬물에 떨어진 촛농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국왕 폐하께서 허락하신 제 기사입니다. 그러실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는 당장 왕세자의 목을 졸라버릴 정도로 살벌한 인상이었다.

‘뭐야, 무서워!’

이레사 공녀가 저렇게 싸늘한 얼굴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를 왕세자도 느낀 게 분명했다.

“알아, 알고 있어. 농으로 한 말에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왕세자가 혀를 차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대에게 실력 좋은 기사가 붙었다는 건 알겠어. 참 부럽네. 하긴, 힘도 없는 라이렌 왕자에게 붙어살려면 호위라도 잘 두어야지.”

명백한 조롱을 남긴 왕세자는 그대로 마부에게 마차를 다시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멋졌어요, 사샤 누님!’

키오가 남몰래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날렸다.

“어서 뒤에 타시오! 왕세자 전하를 계속 기다리게 할 셈인가!”

마부의 호통이 죄 없는 키오와 크레스를 향했다.

이크, 하고 혀를 내두른 두 사람은 마차 뒤로 얼른 올라탔다.

그 와중에 크레스는 나를 향해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길은 마치 ‘사샤 씨 멋져요……!’라고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왕세자와의 적대가 끝난 듯했다.

“휴우…….”

“살았다…….”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줄곧 숨을 참고 있었던 시녀들이었다.

“꼼짝없이 당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요. 그래도 공녀님이 그럭저럭 쓸 만한 기사를 데리고 계셔서 다행이네요.”

시녀들은 서로 숙덕거리며 나를 향해 흘끔흘끔 시선을 돌렸다.

이봐요. 이왕이면 제대로 된 칭찬으로 들려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 위에 내려왔다.

“수고 많았어, 사샤 경.”

이레사 공녀였다.

그녀의 손은 어째선지 조금씩 떨려 오고 있었다. 게다가 온기 하나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째서?

“어디 불편하신 건가요, 공녀님?”

“아니. 나는 괜찮아.”

내 질문에 이레사 공녀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이동하도록 하지.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겠다.”

공녀의 말에 시녀들과 마부는 급히 마차를 재정비하고 이동 준비를 했다.

그렇게 다시 이레사 공녀와 내가 올라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이렌 왕자의 궁에 도착한 건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3시 4분쯤이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늦은 건가?”

마차를 세우고 궁 안으로 급히 들어가자마자 이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이레사 공녀의 입에서 나온 호칭을 들은 나는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감히 왕족을 기다리게 하다니, 이레사 공작가에서 궁중 예법 교육을 받지 못한 건가?”

이런 날이 선 소리를 내뱉으며 나타난 이는 바로 제2왕자인 라이렌이었다.

‘와아…….’

나도 모르게 속으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물론 긍정적인 탄식은 아니었다.

라이렌 왕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벌써 이 남자가 싫어졌다.

이렇게 남의 비호감을 쉽게 사는 것도 어찌 보면 재능이겠지?

이레사 공녀는 침착히 예법을 갖추며 허리를 살짝 숙인 인사를 올렸다.

“라이렌 왕자 전하를 뵈옵니다.”

공녀의 인사에도 라이렌 왕자는 혀를 차기만 했다.

“느긋하게 인사나 올릴 여유가 있나 보군.”

그러면서 라이렌 왕자는 응접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레사 공녀는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는 나와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뒷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으며, 라이렌 왕자는 대뜸 으름장을 놓았다.

“왜 늦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내가 아주 실망할 거다.”

‘네가 실망하면 뭐 어쩔 건데? 헉, 하고 벌벌 떨기라도 해주랴?’

내가 속으로 이죽거렸다.

라이렌 왕자를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나와 달리, 이레사 공녀는 덤덤히 답했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왕세자 전하를 만났습니다.”

우뚝.

응접실을 향하던 라이렌 왕자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 섰다.

“……왕세자 전하를 만났다고?”

라이렌 왕자가 그제야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레사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설마 실수하진 않았겠지. 특히 내 명예에 먹칠할 정도의 실수 말이다.”

왕세자의 안부를 묻는 겉치레 따윈 없었다.

라이렌 왕자의 주요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이런 왕자의 화법이 익숙하다는 듯이 이레사 공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 일은 일절 없었습니다. 도리어 왕자 전하께서 들으시면 통쾌하실 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끼익, 소리와 함께 하인들이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어디 한 번 들어보지. 앉도록.”

라이렌 왕자의 허락을 받은 이레사 공녀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호위 기사로서 자연스럽게 공녀의 뒤편에 섰다.

시녀들 중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응접실 바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이…….”

시녀가 차를 내오기도 전에, 이레사 공녀는 라이렌 왕자에게 오는 길이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그녀는 왕세자 전하가 처음에 어떻게 시비를 걸어왔고, 그 모욕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천천히 나열했다.

물론 그녀는 온전히 사실만을 고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과장된 발언이 몇몇 섞여 있기도 했다. 주로 왕자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말들이었다.

예를 들어.

“사샤 경이 왕실 기사를 손쉽게 제압하는 것을 보자, 왕세자 전하께서는 화를 참지 못하시고 그 자리에서 날뛰시더군요. 지나가던 다른 왕성의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제 귀에 다 들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레사 공녀는 이런 식으로 왕세자가 얼마나 못난 꼴을 보였는지 강조했다.

그리고 라이렌 왕자는 그때마다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많이 잘했군. 마음에 들어.”

이레사 공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라이렌 왕자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처음에 왜 늦었냐며 버럭 고함을 내지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저 이가 바로 왕세자의 콧대를 눌러준 호위 기사인가 보군.”

라이렌 왕자가 대뜸 내게 턱짓했다.

“아, 네.”

나는 얼른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라이렌 왕자에게 예의를 표시했다.

“아주 잘했다. 나를 향한 네 충성심이 갸륵하구나.”

“……?”

충성심은 무슨 충성심이요?

라이렌 왕자의 엉뚱한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왕자에게 내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비록 내가 아직은 왕세자가 아니지만, 참고 인내하고 기다려라. 충직한 부하에겐 큰 포상이 내어질 것이다.”

‘엄마야, 얘 돌았나 봐…….’

라이렌 왕자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제야 나는 왜 이레사 공녀가 마차 안에서 나더러 웃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곧 이 왕국이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지. 기다려라. 곧 나의 시대가 당도할 것이다.”

이 왕자는 새대가리인 것 같다.

‘어이없다, 진짜…….’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자아도취의 대사를 듣고 있자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음 같으면 내 이마를 한 손으로 ‘탁’ 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에게 이미 약속한 말이 있었으므로 그러지 못했다.

“내가 왕세자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 외모로도, 재력으로도, 머리로도, 그리고 인맥으로도 무엇 하나 뒤지지 않지.”

‘꼭 저렇게 어느 곳 하나 안 뒤진다고 말하는 놈이 가장 먼저 뒤지던데…….’

나는 인중에 힘을 꽉 쥐며 웃음을 참아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자화자찬을 하던 왕자는 곧 이레사 공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간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레사 공녀가 우아한 목소리고 말문을 뗐다.

“왕자 전하께서는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왕자 전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요.”

“그랬지.”

“제가 왕자 전하의 위상을 단번에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게 뭐지?”

라이렌 왕자의 두 눈에 빛이 번쩍 들어왔다. 역시 자기 이익이 걸린 일이라면 귀가 밝아지는 모양이다.

그런 라이렌 왕자를 덤덤히 바라보며, 이레사 공녀가 말했다.

“저를 황국으로 보내어 평화 협정을 받아내세요.”

“그게 무슨 말이지?”

왕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와 국혼을 올리세요. 그러면 저는 왕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현재 황국이 요구하고 있는 볼모로 저를 보낼 수 있습니다.”

“아.”

이레사 공녀의 설명을 들은 왕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장 좋다고 짝짝, 기립 박수할 줄 알았던 라이렌 왕자는 의외로 조용했다.

설마 자기 약혼녀를 버리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건가?

라이렌 왕자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매정한 남자라고 해도, 한때 자신의 약혼녀였던 사람을 머나먼 이국의 땅으로 보내버리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건가?

그런 생각에 라이렌 왕자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는데.

“이제야 이해했다. 그것참 명안이로군!”

라이렌 왕자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아까 했던 말 전부 다 취소다. 이 새대가리보다 못한 것.

“그대가 드디어 쓸모를 보이는구나. 좋다. 당장 왕정 회의 때 국왕 폐하께 제의하도록 하겠다.”

“안 됩니다.”

라이렌 왕자의 말에 이레사 공녀가 급히 막아섰다.

“뭐지? 왜 안 된다는 건가?”

“외부의 시선을 생각해 주셔야지요. 만일 왕자 전하께서 이 사안에 대해 직접 언급하시면, 다른 귀족들이 왕자 전하더러 약혼녀를 버리는 망나니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흐음…….”

그제야 자기 평판이 소중해졌는지 라이렌 왕자가 조용해졌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나 대신 이 방안을 회의 때 말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당연히 이레사 공작이나 다른 측근 귀족들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레사 공녀가 어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반대파들, 특히 왕세자의 지지자들이 왕자 전하와 전하의 지지자들을 두고 ‘제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여자를 희생하는 소인배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는 짓이 바로 그거였지만……라이렌 왕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정치판에 전혀 연이 없던 사람을 끌고 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이 주장이 공정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레사 공녀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인페르나 영지의 소남작을 수도로 불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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