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저거라니.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있네?
‘왕족들의 인성은 원래 다 이렇게 글러 먹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왕세자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한 손으로 제 턱을 괬다.
“아, 그러고 보니 국왕 폐하께서 최근에 전란을 대비해 특수부대를 소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왕세자는 턱을 치켜세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게 바로 이레사 공녀에게 하사된 호위 기사인가?”
“그러합니다.”
이레사 공녀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공손히 답했다.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세자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재미있군.”
한참 동안 허파에 바람이 낀 사람처럼 웃어젖히던 왕세자는 이내 차가운 얼굴로 되돌아왔다.
“국왕 폐하께서 이레사 공녀를 얼마나 아끼는 줄 알겠군. 이렇게 우락부락하고 강해 보이는 호위 기사를 보내주시다니.”
그러면서 왕세자는 전혀 우락부락하지 않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에 이레사 공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샤 경은 실제로 유능한 호위 기사입니다.”
“그런가? 하지만 내 기사보다는 못한 것 같군. 만일 일손이 부족하다면 내 사람을 보내줄 수 있는데, 어떠한가?”
“귀하신 왕세자 전하의 인력을 빼앗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음만 받겠다고 하지 말게나. 사양할 것 없네. 아무래도 내 소중한 아우가 그대를 잘 보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도우려는 것이니.”
왕세자와 이레사 공녀는 입가에 웃음을 건 채 화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서로를 위하는 것처럼 들리는 그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고, 서로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배어 있지 않았다.
‘서로 시선 제압하느라 바쁘네.’
왕세자와 이레사 공녀 간의 살벌한 기 싸움에 내 머리가 아파져 왔다.
유리나는 이런 신경전에 매일 시달려야 했던 걸까.
새삼 그녀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그녀의 자리에 있었다면 정확히 10분 뒤에 다 때려치우고 테이블 뒤엎고 깽판 치고 자리 박차고 나갔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왕세자와 이레사 공녀 사이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국왕 폐하께서도 내게 평민 출신의 호위 기사를 주셨는데 말이지. 한 번 시험해보지 않겠나?”
왕세자가 마차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마차 뒤에 있던 두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어……?”
마차 뒤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걸 보자,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참고로 내가 데클란에게서 들은 바, 마차 뒤는 짐을 싣거나 장비를 부착하는 공간이었다. 사람이 앉고 다니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제 호위 기사 둘을 앉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키오 오빠랑……크레스?’
그랬다.
왕세자의 호위 기사라는 사람들은 바로……같은 영지 출신인 키오와 아카데미 동기인 크레스였다.
이 사람들, 결국 왕세자에게 보내졌구나!
나는 이레사 공녀가 일찌감치 날 콕 찍어 지목했기 때문에 근무지가 정해졌었다.
그러나 다른 부대원들은 기사 임명을 받고 나서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뒤로 나는 이레사 공녀의 백조궁으로 보내졌고, 다른 부대원들과 연락이 잠시 끊겼었는데…….
서로를 알아본 나와 키오, 그리고 크레스는 완전히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우리는 그저 두 눈만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누님, 왜 여기 계세요?’
키오가 두 눈으로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오빠!’
당장 그렇게 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왕세자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비소를 흘렸다.
“공녀, 아무래도 그대의 호위 기사에 자신감이 있는 듯한데.”
여전히 마차 안에 앉은 왕세자가 거만하게 손을 들며 말했다.
“어디 내 기사들과 한 번 겨뤄보게 하지 않겠나?”
‘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 갑자기 뭐라는 거야? 난데없이 길바닥 한복판에서 검술 대결을 하라니?
“전하, 그건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레사 공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왕세자에게 고했다.
“왜 합당치 않지? 그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기사의 실력이 궁금해서 보겠다는 것인데.”
“왕궁 내부에서 검을 꺼내 칼부림을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문젯거리가 될 것 없다. 왕세자인 내 직위로 해결하면 될 것을……아, 그게 아니면. 혹시 그대 기사의 실력이 의심되는 건가?”
왕세자의 도발에 이레사 공녀의 주먹에 힘이 꾹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왕세자가 이죽거리며 키오와 크레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둘 중 한 사람이 검을 뽑아서 공녀의 기사를 상대해라. 명령이다.”
“…….”
왕세자의 말에 키오와 크레스는 서로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모두 나와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인 왕세자가 명령이라고 압박감을 주니, 또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귀찮게 됐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왕세자의 목적은 어떻게든 이레사 공녀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려 모욕감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약혼자인 라이렌 왕자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주게 될 테니까.
이레사 공녀를 위해서라도 내가 여기서 이기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오나 크레스를 상대로 이기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라고.’
자기 기사들이 내게 진 것을 본 왕세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아마 키오와 크레스에게 벌을 내리겠지.
‘하는 수 없지.’
혀를 찬 나는 그대로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었다.
“사샤 경!”
뒤에서 이레사 공녀가 다급히 내 이름을 외쳤다.
“괜찮습니다, 공녀님.”
등 뒤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내가 씩씩하게 답했다.
“제가 이겨요.”
내 말을 들은 왕세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 꼴에 기사라고 용기를 내는구나.”
“물론입니다. 저는 이레사 공녀님을 지키는 호위 기사니까요.”
나는 왕세자 앞에 공손히 고했다.
“다만 청이 있습니다.”
“뭐지?”
“저는 저 두 기사와 익히 싸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매번 저의 압승이었습니다.”
사실이었다.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종종 일대일 검술 대결을 하곤 했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다시 대결을 한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테다.
내 말을 들은 왕세자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네 말이 사실인가?”
“네. 어찌 왕세자 전하에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원하시면 훈련관들을 불러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내 말에 왕세자의 낯빛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아무래도 날 얕잡아 본 모양인데.
오늘 아주 잘못 걸리셨어요.
“하지만 왕세자 전하께서 대결을 권하셨으니, 마땅히 응하는 게 맞겠지요. 다만 공정성을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그게 뭐지?”
“저 평민 출신의 기사들 말고, 왕실 기사 한 명과 대결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좋은 생각이구나!”
내 말에 왕세자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도르, 네가 가도록 해라.”
“예, 전하.”
왕세자의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다른 호위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아하니 귀족 출신인 호위 기사들만 마차 안에 앉힌 모양이다.
‘진짜 치사하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왕실 기사를 바라보며, 나는 검집을 잡았다.
왕세자의 머리에는 내가 아무리 평민 기사들을 이겼어도 왕실 기사는 쉽게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귀족 출신의 왕실 기사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상대로 나온 왕실 기사는 실제로 마력을 사용하려는 듯이 검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그대로 놔둘 것 같냐!’
나는 왕실 기사가 마력을 사용하도록 가만히 멀뚱멀뚱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원래 히어로들은 변신할 때 가장 공격에 취약한 법이지!
왕실 기사의 손을 노린 나는 검의 평면으로 정확히 검집을 내리쳤다.
퍽!
“악!”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왕실 기사는 반격할 틈도 없었다. 게다가 마력을 운용하느라 온 정신이 팔린 상태여서 더더욱 그랬다.
그대로 손에 힘을 잃은 왕실 기사는 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제 승이군요.”
나는 가볍게 검을 도로 거두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난 대결이었다.
“……비열하군.”
적의를 띤 왕세자가 실눈을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왜, 꼬우면 네가 직접 나한테 덤비던가?’
나 역시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보면 일단 무조건 눈을 깔았어야 했지만, 어째선지 오기가 생겨서 그러지 않았다.
그러자 왕세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나를 노려보는 건가?”
아이고,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네요.
나는 얼른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내렸다.
괜히 왕세자에게 꼬투리가 잡혀 이레사 공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트집을 잡으려는 왕세자는 집요히 내게 다그쳤다.
“하, 이젠 내 말까지 무시하는구나. 벙어리가 아니라면 왜 날 노려보았는지 변명이라도 해보도록.”
“……노려본 것이 아니라 그냥 본 것입니다.”
내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냥 본 것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이라는 건가?”
“제가 날 때부터 인상이 더러웠습니다. 부디 이런 불쌍한 얼굴을 타고 태어난 백성까지 품어주실 수 있는 너그러운 주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풉!
왕세자의 마차에 타고 있던 그의 수하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누르며 입꼬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사람들을 노려본 왕세자는 이내 이레사 공녀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저 혓바닥 놀리는 꼴을 보라지. 아랫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는 건가?”
“사샤 경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왕세자에게 무조건 고개를 납작 숙이던 이레사 공녀가 처음으로 반발했다.
왕세자는 이레사 공녀의 미묘한 반응에 인상을 굳혔다.
“그럼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왕세자 전하와 제 호위 기사에게는 모두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소통하는 과정에 서로 오해를 산 듯합니다. 부디 왕세자 전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마음 넓은 네가 좀 아량 넓게 이해해줘라, 라는 뜻이었다.
이레사 공녀의 말에 왕세자는 놀란 듯이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그는 이레사 공녀가 이렇게 나올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공녀가 누군가를 감싸는 건 처음 보는군. 그저 궁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 아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왕세자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저 기사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지?”
“……물론입니다.”
“공녀가 아끼는 기사라니, 탐이 나는군. 내가 가지고 싶어.”
그러면서 왕세자는 확고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