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이튿날 아침.
이레사 공녀는 라이렌 왕자에게 접견 요청을 보냈다.
라이렌 왕자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답신을 보내왔다.
“왕자 전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시녀들이 이레사 공녀에게 물었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진짜 주인인 라이렌 왕자에게 따로 소식을 들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시녀들은 일부러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그리고 이레사 공녀 역시 이들의 연극에 놀아주기로 했다.
“오늘 오후 3시에 궁으로 찾아오라고 하시는구나.”
공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라고요? 그럼 당장 치장을 시작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시작해도 시간이 부족하겠는데요. 안 되겠지만 점심 식사는 건너뛰셔야 하겠습니다.”
얼핏 들으면 정말 왕자를 만나기 위해 준비해야 해서 하는 말 같았지만, 백조궁에 여러 날 지낸 나는 시녀들의 얄팍한 수를 단번에 눈치챘다.
시녀들은 그저 이레사 공녀를 괴롭히기 위해 이런 말을 지어낸 것이다.
감히 끼니를 건너뛰게 하다니. 참으로 극악무도한 악질이구나!
다른 건 다 괜찮아도 밥을 못 먹게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백조궁의 시녀님들은 실력이 형편없는 모양이네요.”
시녀들의 터무니없는 말을 듣다 못한 나는 그대로 볼멘소리를 냈다.
“뭐라고요?”
내 발언을 들은 시녀들이 두 눈을 호랑이 눈망울처럼 부릅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원하던 바였다. 일부러 화를 돋우려고 시비 투로 한 말이니까.
시녀들의 흉흉한 시선에도 나는 기가 죽지 않고 꿋꿋이 답했다.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지금이 오전 11시인데, 오후 3시까지 네 시간 내내 치장하겠다고요? 왜 그렇게 손이 굼뜨신 건가요?”
“이보세요. 귀족 영애의 치장은 본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세밀한 작업이랍니다. 당신 같은 평민들은 모르겠지만, 귀족들은 다 알고 있어요.”
시녀들이 나를 깔보는 듯한 어조로 이죽거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그래요? 그러면 하는 수 없네요. 라이렌 왕자 전하에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더 늦춰달라고 해야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감히 왕자 전하에게 기다리라고 말씀드리겠다니, 제정신인가요?”
시녀들의 날카로운 타박에 나는 일부러 바보 노릇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하지만 분명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으셨나요? 귀족 영애의 치장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모든 귀족들이 다 알고 있다고? 왕자 전하도 다 알고 계실 테니 너그러이 봐주시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요!”
내 능청스러운 궤변에 시녀들은 언성을 높였다.
과연, 귀족 영애들답게 다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런 시녀들을 훑어본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니요. 설마, 왕자 전하께서 사랑하는 약혼녀가 식사를 마다하면서까지 치장을 하길 바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러다가 공녀님이 영양실조로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어리석긴! 고작 한 끼 굶었다고 영양실조가 오지 않아요!”
그 말에 나는 일부러 헉,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그걸 시녀님들이 어떻게 아세요? 아, 혹시 굶어보신 적 있으세요?”
“저희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 하긴!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요즘 평민들 사이에도 끼니 굶는 사람이 없다잖아요.”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녀들에게 말했다.
“평민들도 안 그러는데, 라이렌 왕자님의 약혼녀 되시는 이레사 공녀님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
시녀들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이 상황을 관전하던 이레사 공녀는 부채를 촤악 펼친 채 제 입가를 가렸다.
“먼저 식사를 준비해주지 않겠어? 내가 꽤 시장해서 말이지.”
부채 뒤로 그녀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시녀들은 군말 없이 이레사 공녀를 만찬실로 안내했다.
이레사 공녀는 시녀들에게 일부러 일감을 더 얹어줄 겸 로지에도 불러 같이 식사하도록 했다.
졸지에 2인분 식사를 차리게 된 시녀들이었다.
정신없이 식사를 보조하는 시녀들을 구경하는 이레사 공녀는 제법 즐거운 듯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또 개구쟁이라니까.’
이레사 공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레사 공녀와 로지에가 식사하는 사이, 나와 데클란은 사용인들 전용 만찬실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점심은 귀족들과 달리 조금 더 간소한 식사였다.
아무리 사용인들의 식사라 할지라도, 일단은 왕궁 내에 들어오는 식자재로 만든 음식이라 맛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너 아까 시녀들한테 장난 아니더라.”
빵 조각을 수프에 찍으며, 데클란이 내게 슬쩍 중얼거렸다.
“그게 다 들렸어?”
화들짝 놀란 내가 데클란에게 반문했다.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랑 로지에 도련님이 마침 복도에 있었거든.”
“으윽……왠지 부끄러운데.”
내가 그 깽판을 치는 걸 데클란이 다 들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데클란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부끄러워. 위아래도 모르고 이레사 공녀님에게 골탕 먹이려던 것들이었는데, 네가 잘 대응해줬네.”
“데클란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응. 그게 사샤 네 매력이잖아. 이레사 공녀님이 왜 널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괜히 뜨끔해진 내가 반문했다.
데클란 얘는 이레사 공녀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안 거지?
“원래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거야.”
데클란은 그런 수상한 발언을 남긴 채 말을 아꼈다.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시녀들은 이레사 공녀를 치장하는 내내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다.
그러나 라이렌 왕자 전하를 만나러 가기 위한 치장이기 때문에 함부로 늦장을 피우거나 치졸한 장난을 치지는 않았다.
“가도록 하지.”
정확히 시간에 맞추어 치장을 마친 이레사 공녀가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검을 든 나는 이레사 공녀의 뒤를 따라 백조궁 밖으로 나섰다.
“사샤 경, 미리 말할 게 있어.”
마차 위에 올라탄 뒤, 이레사 공녀가 맞은편에 앉은 내게 말했다.
“뭡니까, 공녀님?”
“내가 라이렌 왕자 전하와 대화하는 동안 부디 웃지 말아줘.”
“……네?”
뜬금없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의 얼굴은 심각했다.
“부탁이야. 사샤 경이 웃기 시작하면 나도 자신이 없어져.”
“아……네, 알겠습니다.”
뭐가 뭔진 몰라도, 일단 하지 말라는 걸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이레사 공녀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귀청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뭐지?’
나는 곧바로 허리춤에 매달아 둔 검에 손을 댔다.
왕궁 안에서 마차가 갑자기 멈춰서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마차를 모는 마부들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마차를 세우지 않았다.
특히나 이레사 공녀처럼 높은 지위의 귀족의 경우 더더욱 그랬다.
“무슨 일입니까?”
마부석으로 이어지는 작은 창구를 연 내가 마부에게 물었다.
“그, 왕세자 전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왕세자가?
화들짝 놀란 나는 마차의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거둬냈다.
과연 마부의 말대로 저만치에서 제법 큰 마차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레사 공작 가문의 인장이 달린 이 마차와 달리, 반대편에서 오는 마차 위에는 왕가의 휘장이 박혀있었다.
라이렌 왕자는 지금쯤 자신의 궁에서 이레사 공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다.
그러니 저 마차 안에 탄 이는 분명히 마부의 말대로 왕세자인 게 맞았다.
“……귀찮은 게 찾아왔네.”
뒤에서 이레사 공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피로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서 나는 단번에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 소설에서도 왕세자와 라이렌 왕자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었지.’
원작 소설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이곳 헤브니아 왕국의 왕실은 막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왕실 내부에는 형제간에 우애는 막론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조차 없었다.
당장 국왕이 즉위하자마자 남은 왕족들을 다 죽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나마 국왕은 제 핏줄을 이은 아들들이라고 왕세자와 왕자를 잘 봐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왕세자와 왕자는 항상 서로 잡아먹을 듯이 다투기만 했다.
그리고 이레사 공녀는 그런 앙숙 관계인 두 형제 사이에 끼게 된 셈이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이레사 공녀님을 좋아하지 않으신가요?”
내가 이레사 공녀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원수의 아내 될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동생의 아내 될 사람이 아니라, 아예 원수의 아내 될 사람이구나.
‘참 피비린내 나는 집안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이레사 공녀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뒤에 앉아 따라오던 시녀들과 마부 역시 줄줄이 내려와 이레사 공녀 뒤에 공손히 섰다.
그들은 왕세자의 마차를 보고 잔뜩 긴장한 듯했다.
이는 이레사 공녀도 마찬가지였다.
마차 안에서 생글생글 웃던 그녀의 입술 위에는 어느덧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다.
‘도대체 왕세자가 어느 정도이기에?’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왕세자의 마차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왕세자의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의 창문이 내려가면서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게 누군가. 내 아우의 약혼녀 되는 이레사 공녀님 아닌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를 낸 이는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왕세자가 라이렌 왕자보다 몇 살은 더 많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보였다.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이레사 공녀는 차분히 왕세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이런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하나도 잘 지내지 못했다. 그대의 남편 될 놈이 하도 망나니짓을 해서 말이지.”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레사 공녀는 무작정 머리를 숙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바로 항복하며 포기하는 이레사 공녀가 영 싱거운지 왕세자는 혀를 찼다.
“잘 알면 됐네. 그대도 참 불쌍하지. 이래서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거다.”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그대도 늦지 않았으니 라이렌 왕자와 파혼을 생각해보도록 해.”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계속되는 도발에도 이레사 공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왕세자의 말을 받아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흥, 여전히 재미없는 여자로군.”
전혀 타격감이 없는 이레사 공녀에게 흥미가 떨어졌는지 왕세자는 이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다가 왕세자와 내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저 기생오라비 같은 건 또 뭔가?”
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레사 공녀에게 물었다.
그의 손가락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뭐야, 기생오라비?
나를 향하는 왕세자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왕세자쯤 되는 사람이 이렇게 사람을 대놓고 모욕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다소 덤덤한 내 반응과 달리, 이레사 공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 호위 기사입니다.”
왕세자의 모욕적인 언사에 잠시 흥분한 듯했던 이레사 공녀는 이내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그렇게 답했다.
“호위 기사라고?”
왕세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나와 이레사 공녀를 번갈아 보았다.
“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