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건물을 지키고 있던 철창문이 열렸다.
마차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마차에서 내린 세티프니는 수많은 건물 중 빛이 가장 으리으리하고 불이 환히 밝혀져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티프니 님.”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는 비서는 세티프니와 구면인 듯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한데, 마담 쟈니에트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의 말에 세티프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무실의 불은 대낮처럼 환히 밝혀져 있었다.
“세티프니 님!”
비서가 열어 준 집무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담 쟈니에트.”
세티프니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마담 쟈니에트는 싱글벙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세티프니를 맞이했다.
귀족을 접대하는 데 상당히 익숙한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영업용 얼굴이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세티프니 님? 연락도 없이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상당히 급한 일인가 보네요.”
“잘 알고 있으니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혹시 인페르나 남작가에 대해 알고 있나?”
세티프니가 마담 쟈니에트에게 물었다.
인페르나 남작가에 대해 뒷조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세티프니가 굳이 먼 거리를 달려 마담 쟈니에트를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담 쟈니에트는 수도에 사는 귀족들 사이로 널리 알려진 정보상이었다.
세티프니의 출신 가문인 후작가에서도 여러 차례 그녀를 통해 정보를 산 경험이 있었다.
물론 수도 근처에 정보상이야 널리고 널렸다. 귀족들이 몰린 구역마다 돈을 벌기 위해 나타나는 게 그런 작자들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담 쟈니에트의 진가는 바로 그다지 힘이 없는 하급 귀족 가문의 일까지 전부 다 꿰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특히나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오스첸스 아카데미에는 웬만한 변방 출신의 귀족 자제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니 지방 출신 귀족들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는 마담 쟈니에트가 가장 유용했다.
“인페르나 남작가요?”
세티프니의 입에서 나온 가문의 이름을 들은 마담 쟈니에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세티프니는 그녀의 반응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니 잘 아는 모양인데.”
“후우, 잘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마담 쟈니에트는 약간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인페르나 남작가라.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선생에게 마력을 휘두르고 나간 불량 학생을 후원하던 가문이 아닌가.
개교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 뒤로 단단히 화가 난 마담 쟈니에트는 인페르나 남작가에 편지를 써 더 이상 평민 학생의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험악하게 편지를 쓰면 보통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과 금전적인 손해배상이 돌아와야 하는데, 인페르나 남작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통의 편지를 또 보냈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편지는 없었다.
그제야 마담 쟈니에트는 깨달았다.
인페르나 남작이 자신의 편지를 그냥 읽고 씹은 거라는 걸.
“뭔가 쌓인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럼요. 그 가문 사람들은 상종할 것이 못 됩니다.”
“그래?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게 말이지요…….”
안 그래도 인페르나 남작가에 쌓인 악감정이 많았던 마담 쟈니에트는 세티프니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고했다.
인페르나 남작가에서 원래 제 외아들과 두 명의 평민 학생을 보냈다는 사실부터, 그 평민 학생들 중 한 명이 대형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것까지.
마담 쟈니에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티프니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데클란이라는 남자가 귀족의 사생아로 의심된다는 거지?”
데클란이라면 인페르나 소남작의 시종으로 따라온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귀티 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세티프니의 반문에 마담 쟈니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마력이 꽤 강한 걸 보니 아마 어느 후작이나 공작의 피가 섞인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만약에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제대로 뒤를 캐보았을 텐데, 휴우…….”
그러면서 마담 쟈니에트는 불평불만이 섞인 푸념을 잔뜩 늘어놓았다.
세티프니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후작이나 공작 정도 되는 귀족의 사생아라고?’
그럴싸한 추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후작가 출신인 세티프니가 웬만한 상급 귀족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세티프니는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후작가와 공작가들에 대해 떠올려 보였다.
개중에는 가주가 사생아를 둘 정도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몇몇 가문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세티프니가 아는 한 그 가문들은 각기 사생아들을 다 처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후작가나 공작가는 아닐 텐데…….’
마담 쟈니에트가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으며, 세티프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상할 정도로 마력이 강력한 남자.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평민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가 어마어마하게 강한 마력을 보유한 사람이란 말인데.
‘그렇다면, 설마…….’
그 남자는 설마……국왕 폐하의 사생아?
* * *
“데클란.”
“…….”
“데클란, 일어나!”
나는 내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든 데클란의 볼을 한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으음…….”
이내 잠에서 깨어난 데클란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자다 깨어난 모습도 이렇게 잘생길 수 있다니.
“……벌써 아침이야?”
그런 질문을 하는 데클란은 여전히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침은 아닌데…… 벌써 늦은 밤이야. 그러니까 이제 너도 네 방에 돌아가는 게 어때?”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두 눈을 감았다.
나는 데클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야, 더 자려고? 네 방에 가서 자.”
“싫어.”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는 데클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너랑 같이 잘래.”
“너 정말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나는 얕은 미소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를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이미 늦은 밤이었다. 달이 떠오른 밤하늘을 부엉이가 가로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데클란도 슬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로지에가 아마 데클란을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백조궁의 시녀들이 데클란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의심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날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지.”
“뭘 지켜.”
“넌 지금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 신분으로 여기에 온 거잖아. 그럼 시종답게 시종 노릇을 해야지.”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뭐야, 그 반응은?”
“난 로지에 도련님 시종 아닌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게 그런 거잖아. 잔말 그만하고,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
“날 쫓아내는 거야?”
다시 천천히 두 눈을 뜬 데클란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등불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이 유난히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하마터면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관찰할 뻔했다.
“쫓아내는 게 아니라…… 네가 피곤해 보여서 그런 거야. 네 방에 가서 편하게 쉬어.”
뒤늦게 정신을 되찾은 내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데클란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되돌아왔다.
“너랑 같이 있는 곳이 낙원인데, 굳이?”
하마터면 소리를 내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 낯간지러운 소리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간신히 폭소를 참은 내가 데클란을 놀리듯이 말했다.
그러나 데클란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들렸어? 하지만 난 진심이야.”
“알았어. 마음은 고맙지만……그래도 이제 슬슬 네 방으로 가 봐. 앞으로 머리 복잡한 일로 바빠질 텐데, 오늘이라도 열심히 쉬자.”
“알았어.”
그제야 데클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리 봐도 내 방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다소 시무룩해진 데클란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그에게 살짝 손짓했다.
“잠깐 여기로 와 봐.”
“왜?”
데클란은 그렇게 반문을 하면서도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다가왔다.
나는 데클란의 셔츠 옷자락을 한 손으로 꾹 쥐었다.
쪽.
데클란의 볼에 입을 맞춘 나는 곧바로 옷자락을 쥐던 손에 힘을 풀었다.
데클란의 어깨가 그대로 굳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긴장한 근육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잘 자, 데클란.”
그대로 데클란을 문밖으로 내보낸 나는 문을 쾅 닫았다.
“너……정말 이러기야?”
문밖에서 데클란의 항의 아닌 항의가 들려왔다.
“응, 잘 자.”
그 짤막한 말을 남긴 나는 그대로 등불을 끄고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귀 끝까지 홧홧 달아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늘한 침대 시트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였다.
나는 잠을 청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문밖에 서성이는 듯한 발걸음 소리는 이내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은 데클란이 제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
데클란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사실 나는 내심 그가 다시 내 방 안에 들어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데클란이 내 방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생각해보니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정작 데클란을 방 밖으로 내보낸 건 나 자신이면서 말이지.
연애하기 시작하니까 생각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것 같다.
머리와 마음이 원하는 게 일치하지 않는 건 정말 묘한 기분이다.
‘돌겠네…….’
두 눈을 꾹 감은 나는 이불을 입 위까지 끌어당겼다.
두 눈을 감자 데클란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사샤, 사랑해.’
그 말을 내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금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