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이레사 공녀는 목욕을 마친 뒤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라이렌 왕자를 만나기 위해 접견 요청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사샤는 그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문을 열자마자.
“헉.”
사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 안에 데클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샤의 침대 위에 데클란이 앉아있었다.
‘뭐, 뭐시여?’
데클란을 본 사샤는 반사적으로 등 뒤의 문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데클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샤.”
“데, 데클란. 아니, 이거, 뭐,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문에 등을 기대어 선 사샤는 횡설수설 질문을 내던졌다.
그러면서 사샤는 행여나 바깥에 돌아다니던 시녀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방 안에 들어올까 봐 방문을 철컥 잠가버렸다.
그것을 본 데클란의 눈가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문은 왜 잠가?”
“프라이버시.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해? 데클란 네가 왜 내 방에 있어?”
사샤는 목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데클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그것 외에 궁금한 건 없어?”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있는 데클란은 어째선지 서운해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황한 사샤의 눈에는 그 감정이 잘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도련님 옆방 쓰는 거 아니었어?”
데클란 앞에 선 사샤는 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이레사 공녀님이 네 방이 어딘지 알려 줬어.”
사샤의 질문에 데클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레사 공녀님이? 왜?”
“그야 내가 물어봤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에 사샤는 정신이 혼란해졌다.
그러니까,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에게 사샤의 방이 어딘지 물어봤고, 그걸 들은 이레사 공녀가 방 위치를 알려줬다는 거지?
“그거랑 네가 내 방에 있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이어지는 사샤의 추궁에 데클란의 목소리가 짓눌린 것처럼 낮아졌다.
“……사샤 넌 내가 네 방에 있는 게 싫어?”
“응? 아니, 아니! 좋아!”
데클란의 질문에 사샤가 황급히 답했다.
그러자 그 순간 데클란의 입꼬리가 하늘 방향으로 올라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사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왜 헤죽헤죽 웃어?’
워낙 무표정이 기본 얼굴인 데클란이였다. 그래서 사샤는 그가 환히 웃는 얼굴을 보니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사샤.”
데클란이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사샤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클란이 이끄는 대로 중심을 잃은 사샤는 그대로 그의 위로 쓰러졌다.
침대 위로 아예 드러누운 데클란은 사샤를 꽉 붙들었다. 그는 단단한 팔로 사샤의 허리를 완전히 휘감았다.
사샤는 졸지에 데클란의 위에 걸터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데, 데클란……?”
얼떨떨한 얼굴의 사샤가 데클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불러?”
침대 위에 쓰러진 데클란의 갈색 머리카락이 사륵사륵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탄탄한 어깨와 넓은 가슴골이 그대로 눈에 담겼다.
사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한 사샤에 반해 데클란은 태평하기만 했다.
“뭐가 아니야?”
‘그…… 이대로 가다간 전체 연령가가 아니게 돼! 어쩌면 15금 딱지를 달게 될지도 모른다고!’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던 사샤는 허둥지둥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으앗!”
“아.”
데클란은 재빨리 사샤를 잡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사샤는 아마 바닥 위의 카펫과 제대로 키스를 했을 테다.
“조심해야지, 사샤.”
아예 사샤를 제 옆으로 끌어당긴 데클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샤의 옅은 숨이 목덜미에 고스란히 닿았다.
조금 전에 목욕을 마치고 나온 모양인지 사샤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물기 어린 몸에서 은은한 체향이 그대로 느껴졌다.
꿀꺽.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선지 숨이 떨려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러기야?”
결국 데클란에게서 떨어지기를 포기한 사샤가 툴툴거렸다.
“갑자기라니?”
사샤의 옆에 누운 데클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반문했다.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잘 가꾸어진 검은 새의 깃털처럼 고와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응접실에서 널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는데.”
데클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진실을 토로했다.
사샤의 입이 그대로 벌어졌다.
“뭐?”
“네가 로지에 놈이랑 같이 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사샤를 탓하듯이 중얼거렸다.
물론 사샤를 진심으로 원망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몇 주 만에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그대로 자신이 보는 앞에서 로지에와 함께 쌩 나가버리니 골이 아파졌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레사 공녀가 분명히 사샤에게 로지에와 대화해서 정보를 얻어오라고 시켰을 것을.
하지만.
사샤가 로지에와 함께 나가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었다.
데클란의 말을 들은 사샤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보였다.
“데클란 너…… 혹시 질투했어? 그래서 날 보던 시선이…….”
“그래. 질투했어.”
데클란은 더 이상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돼?”
사샤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출구 없는 지독한 짝사랑인 줄 알았던 사샤와 데클란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데클란에게 있어서 사샤는 모든 것이었다.
그랬기에 데클란은 더더욱 조급했다.
사샤에게 자신의 마음을 더 깊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마음이 급해졌다.
사샤는 어안이 벙벙해진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그런 시선이 귀엽다고 느끼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니, 네가 설마 로지에 도련님에게 질투할 줄은 몰랐거든.”
“예전부터 늘 그랬는데. 설마 몰랐다고 말할 거야?”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질투하는 줄 알았는데…….”
“사샤 넌 참 순진하네.”
데클란은 그대로 사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음, 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
부메랑처럼 반사적으로 돌아오는 사샤의 말에 데클란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뒤를 잇는 사샤의 말에 그는 인상을 풀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로지에 도련님에게 방금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고 왔거든.”
“……도련님한테 그런 말을 했어?”
데클란은 조금 놀란 듯이 반문했다.
사샤의 진심을 의심한 건 아니었다. 다만 사샤가 여린 로지에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샤는 데클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정리하고 싶었어.”
“정리?”
“로지에 도련님이 나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건 정말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
데클란은 사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앞머리가 서로 뒤섞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사샤 넌 참 좋은 사람이네.”
“내가?”
“응.”
데클란은 그대로 사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 같으면 너만 보느라 다른 사람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텐데.”
“너무한 거 아냐?”
“미안해. 하지만 난 너 외에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이 아닌걸.”
“너도 참…….”
사샤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한 듯이 두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 방에는 왜 숨어 들어온 거야?”
“숨어 들어온 거 아닌데. 당당히 들어왔어.”
“왜?”
“사샤 널 안고 싶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데클란은 사샤의 몸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데클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사샤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그렇게 중얼거린 데클란은 순순히 두 눈을 감아주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데클란은 그대로 사샤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처음엔 장난스럽게 이어지던 버드 키스가 이내 콧잔등과 볼 위를 유영하듯 타고 내려왔다.
그의 숨결이 마지막으로 멈춘 종착지는 그녀의 입술 위였다.
“사랑해, 사샤.”
이어지는 열기 사이로, 데클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되돌아왔다.
“데클란 너,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애였구나.”
입술을 떼어낸 사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데클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몰랐어?”
“응. 전혀 몰랐는데.”
“앞으로 지겹도록 들려줄게.”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그러게. 네가 날 극단적으로 만드네.”
사샤의 뺨을 쓰다듬은 데클란이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사샤는 그대로 웃으며 데클란을 끌어안았다.
그 화사한 웃음에 데클란은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클란에게 그녀의 웃음소리가 이 세상의 어느 악기보다도 더 고운 소리처럼 들려왔다.
* * *
백조궁에 일하는 시녀인 세티프니는 어둠이 깔리기가 무섭게 겉옷을 챙겼다.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세티프니의 말에 다른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궁 밖으로 나간 세티프니는 마차를 한 대 임대했다.
그녀를 태운 마차는 한참이나 달렸다.
수도를 벗어난 마차는 마침내 한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철장과도 같은 울타리로 보호된 곳이었다.
“여긴 오스첸스 아카데미 학생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 누굽니까?”
건물 밖으로 지키고 있던 하인들이 등불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세티프니는 마차에서 내리는 대신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마담 쟈니에트를 만나러 왔다. 세티프니라고 하면 아실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