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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44)화 (144/177)

144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이 욕심부려줘. 그래야 나도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대로 내게서부터 등을 돌린 로지에는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잘 가꾸어진 화원의 길을 걸을 때마다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서풍에 따라 화원에 심어진 꽃들이 흔들렸다.

만개한 꽃들이 산뜻한 향을 내며 여물어져 가는 여름을 환영하고 있었다.

“사샤 양 말대로야. 화원의 꽃들이 예쁘네.”

앞에서부터 로지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나는 로지에의 뒤를 멀찍이 따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샤 양은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해?”

“해바라기꽃이요.”

“어째서?”

“그야…… 제가 어렸을 때, 도련님은 여름 때에만 인페르나 영지로 오셨잖아요. 그때 도련님을 만나러 인페르나 저택에 갔을 때, 정원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꽃이 예뻤던 기억이 나서요.”

나는 마음에 담고 있었던 말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것참 신기하네.”

“뭐가요?”

“나도 해바라기꽃이 제일 좋은데.”

왜냐하면 여름이 되어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갔을 때, 저택 안에 핀 해바라기꽃을 바라보던 사샤 양의 뒷모습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서…….

그런 말을 읊조린 로지에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에는 더는 눈물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

“하루빨리 수도에서 볼일을 끝내고, 데클란과 함께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가자, 사샤 양.”

“네, 도련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지에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가 이레사 공녀님에게 잘 말씀드릴게요. 로지에 도련님은 왕정 회의에 참석할 준비를 해 주세요.”

* * *

백조궁으로 돌아가자, 시녀들이 나와 로지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샤 님.”

“소남작님은 이쪽으로.”

시녀들은 로지에를 손님방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얼핏 듣자 하니 이레사 공녀가 로지에와 데클란이 백조궁에서 손님으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했다.

“소남작님의 시종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다. 바로 가도록 하지.”

시녀들에게 그렇게 대답한 로지에는 내게 슬쩍 눈길을 주며 작별 인사를 올렸다.

나는 로지에에게 백조궁의 시녀들이 모두 라이렌 왕자의 심복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지에는 백조궁 안에서 나와 되도록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굳이 로지에를 찾아가지 않기로 약속했다.

나는 일단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였고, 내 주인은 엄연히 말하자면 이레사 공녀였다. 그런 내가 주인의 동행 없이 홀로 로지에를 찾아가는 건 수상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로지에와 헤어진 나는 시녀 한 명에게 물었다.

“이레사 공녀님은 어디에 계시지?”

“안 그래도 공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가 딱딱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내게서 등을 홱 돌린 그녀는 앞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내게 불친절한 건 여전했다.

다행이다. 로지에가 이 장면을 보지 못하고 떠나서.

내게 쌀쌀맞게 대한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시녀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이레사 공녀의 방이었다.

“사샤 경!”

나를 본 이레사 공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만연했다.

이레사 공녀가 궁중 예법에 어긋나게 자리에서 일어난 것을 본 시녀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예법을 지적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시녀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내게 팔려있었다.

“어때, 사샤 경? 인페르나 소남작님과 좋은 시간 보냈나?”

시녀를 시원하게 무시한 이레사 공녀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네, 공녀님이 배려해주신 덕분에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누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시간 되었다니 참 다행이구나. 나는 소남작님의 시종이란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참 재미있는 사람이더구나.”

그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뭐야, 저 반응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이레사 공녀가 시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사샤 경과 함께 씻도록 하겠다.”

“공녀님!”

이레사 공녀의 말에 시녀는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데없는 욕실 초대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레사 공녀를 바라보았다. 동공이 절로 흔들렸다.

‘뭐, 뭐, 뭐라고요? 여주랑 같이 목욕하는 이벤트요? 갑자기 이러기 있어?’

한편 시녀는 당장이라도 방방 날뛸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공녀님, 어째서 일개 호위 기사와 같이 목욕하시겠다고……!”

“혹여나 내가 목욕 중에 습격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잖아.”

이레사 공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이런 경우를 위해 호위 기사를 붙여주신 게 아닌가?”

국왕 폐하가 거론되자 시녀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퇴장했다.

나는 이레사 공녀를 따라 그대로 욕실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시녀들의 도움으로 탈의를 마친 나는 수건 한 장을 몸에 두른 채 욕탕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욕탕 안에 앉은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고개를 돌리자 욕실의 입구로 들어오는 이레사 공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수건 한 장을 두른 이레사 공녀는 우아하게 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수건을 위로 끌어당겼다.

괜히 이레사 공녀에게 내 등에 있는 흉터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녀가 나를 무척이나 걱정할 테니까.

이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 시녀들은 불편한 듯이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이레사 공녀에게 물었다.

“목욕 시중을 먼저 들까요?”

“아니. 먼저 물에 몸을 담그고 싶으니, 나가 있도록 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나가라고 했을 텐데. 외부인 앞에서 두 번이나 말하게 할 건가?”

이레사 공녀는 일부러 ‘외부인’이란 표현을 강조하며 시녀들에게 일렀다.

시녀들은 자신들의 무례한 말이 이렇게 오래오래 우려 먹힐 줄은 몰랐는지 굳은 표정을 지으며 퇴장했다.

욕실 안에는 나와 이레사 공녀만 남아있었다.

“갑자기 함께 씻자고 제안해서 미안하네.”

여전히 나를 하대하는 말투였다. 이는 욕실 바깥에 있는 시녀들이 아직도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였다.

나는 상황에 맞게 여전히 경어를 사용했다.

“아닙니다. 공녀님을 지키는 게 제 일인데, 당연히 곁에 있어야지요.”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물이 조금 차갑지 않아?”

이레사 공녀가 일부러 성량을 높이며 내게 물었다. 마치 욕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사실 목욕물은 그럭저럭 따뜻한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레사 공녀가 왜 물 온도에 대해 트집을 잡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네요, 공녀님! 물이 조금 차가운 것 같으니, 온수를 틀도록 하지요.”

“좋은 생각이야.”

이레사 공녀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레사 공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그대로 냉수와 온수 수도꼭지를 한꺼번에 돌렸다.

양쪽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콸콸 물소리가 요란하게 욕실 안에 울렸다.

물소리는 제법 컸다.

그러니 욕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은 더 이상 나와 이레사 공녀 사이의 대화를 엿듣지 못하겠지.

과연 내 생각이 맞았는지 이레사 공녀가 내게 소곤거렸다.

“이제 경계심 풀고 제게 말을 해도 괜찮아요, 사샤 님. 그리고 갑자기 욕실로 끌고 와서 죄송해요. 이곳이 아니면 사샤 님과 단둘이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요.”

“아니야, 괜찮아.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유리나의 사과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간이 촉박한 걸 아는 유리나는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인페르나 소남작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게…….”

나는 유리나에게 로지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유리나는 아무런 말 없이 내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들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를 황국으로 보내는 척하면서 빼돌리겠다는 말이지요?”

“맞아. 위험 부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유리나 네 생각에는 어때?”

나는 유리나의 안색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가히 충격적일지도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유리나는 그다지 놀란 기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린 듯이 아파왔다.

보아하니 유리나 역시 자신이 황국에 볼모로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너무나도 버거운 짐을 유리나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유리나, 혹시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줘.”

내가 아니면 또 누구에게 유리나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유리나에게 진솔한 어조로 고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하겠어요.”

“하겠다는 건, 즉…….”

“인페르나 소남작님의 계획에 따르겠어요. 사샤 님이 믿고 따르는 분이니, 저 역시 믿고 따르겠어요.”

“정말 괜찮겠어, 유리나?”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내 앞의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키가 더 큰 유리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녀가 나보다 더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떠한 성벽보다도 더 견고했다.

“어차피 전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에요. 전 이대로 황국에 볼모로 보내져도 이상할 게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저를 인페르나 소남작님이 챙겨주셔서 그런 방안을 마련해 주신 거잖아요.”

“유리나…….”

“고마워요, 사샤 님. 인페르나 소남작님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유리나가 싱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나머지 일은 이제 저에게 맡겨주세요. 제가 인페르나 소남작님을 도와 국왕 폐하를 설득해보도록 할게요.”

흘러넘치는 욕탕 물이 넘실거리며 나와 유리나의 손을 간지럽혔다.

그 작은 물보라 아래로 느껴지는 유리나의 손길에는 힘이 꾹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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