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가 내 계획이야. 사샤 양이 보기에는 어때?”
“좋네요.”
로지에의 계획을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계획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는 척하면서 빼돌리는 것.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그게 뭐지?”
“이레사 공녀님을 빼돌리는 데 성공해서 인페르나 영지에 숨겼다고 칠게요. 그러면 황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사샤 양의 말은 즉, 황국이 볼모를 받지 못했으니 반발하지 않겠냐는 말이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황국은 왕국에게 평화 협정을 맺는 대신 왕족 한 명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요구한 왕족이 황국에 무사히 도착하지 않으면, 황국 쪽에서 협정은 무효라고 반발하며 나설지도 몰랐다.
로지에는 내 의문이 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자연재해나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으로 인해서 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경우는 면책 사유가 되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지에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음,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만약에 이레사 공녀가 황국에 도착하지 못한 게 사람으로 인한 잘못이 아니라면, 황국 쪽에서는 왕국 쪽에게 책임을 물 수 없어. 그게 국가 간 협정의 관례야.”
그 설명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으로 인한 잘못이 아니라니……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레사 공녀님을 빼돌리려고요?”
“인페르나 영지는 워낙 각박한 땅이라, 갑자기 지진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거든. 지진 때문에 놀란 말이 날뛰어서 이레사 공녀를 태운 마차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건 어떨까?”
그럴싸한 시나리오였다.
다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레사 공녀님이 인페르나 영지를 지나는 때에 딱 맞춰서 지진이 와요?”
나는 약간의 자조적인 웃음이 섞인 어투로 로지에에게 대꾸했다.
그러나 로지에는 나와 달리 웃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 리가 없지.”
“네? 그럼…….”
“언제 올지 모르는 우연의 일치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운명을 조작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설마…….”
“응.”
로지에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걸렸다.
“데클란 군 마력이면 충분히 가능해.”
“와아…….”
쩍 벌어진 내 입에서 절로 감탄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대국민 사기극이잖아?
이렇게 보니 로지에도 참 대단했다.
온실에서 자라난 순한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당당하게 남의 뒤통수를 치는 일을 꾸밀 줄도 알다니.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로지에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왜 그래? 사샤 양 생각으로는 계획이 안 통할 것 같아?”
“아니요. 완전 멋진데요.”
나는 로지에를 향해 엄지를 척 내세웠다.
“역시 우리 도련님 멋져!”
내 이어지는 칭찬에 로지에의 두 뺨이 살짝 붉어졌다.
“칭찬 고마워. 원래 칭찬을 받으면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하지만 사샤 양의 칭찬을 계속 듣고 싶어. 더 칭찬해줘.”
“네네, 당연하죠! 머리 쓰는 모습 최고예요! 이 세상에서 우리 도련님이 제일 잘났어!”
이어지는 내 칭찬에 로지에는 그저 웃기만 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의 미소가 너무나도 곱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로지에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는 이런 반짝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
새삼스레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실감이 났다.
앞으로도 이렇게 로지에와 함께 허물없이 웃고 떠들 기회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도련님은 곧 인페르나 남작 작위를 잇겠네요.”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순간 로지에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뚝 끊어진 것처럼 사라졌다.
“……그렇지.”
“뭐예요, 그 반응은?”
갑자기 심각하게 굳은 로지에의 얼굴을 보며 내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로지에의 얼굴 위로 곧장 어색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무서워서.”
“네? 뭐가 무서워요?”
“남작이 된다는 것이.”
“에이, 안 믿기는데요. 도련님은 태어나서 평생 자신이 남작님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사셨잖아요. 그런데도 무섭다고요?”
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질문으로 읊었다.
그랬다.
로지에는 현 인페르나 남작의 유일한 아들이다.
그러니 로지에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남작 작위가 자신에게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다.
거의 일평생을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그게 왜 무섭다는 걸까.
내 진솔한 질문에 로지에는 그저 얕은 웃음을 흩뿌렸다.
“내가 남작이 되면 너무 많은 걸 잃을 테니까.”
“뭘 잃어요?”
“친구들.”
로지에의 입에서 곧장 그런 답이 되돌아왔다.
그 말에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친구들을 잃다니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저랑 데클란이랑 평생 도련님 친구로 살 거니까요!”
“평생 친구로…….”
로지에의 입에 그 한마디가 걸렸다.
“친구, 친구로 말이지…….”
그는 멍하니 그 구절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그러나 내가 로지에의 안색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
“사샤 양은 데클란 군이 좋은 거지?”
로지에의 입에서 대뜸 나온 질문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네, 네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아까 응접실에 있을 때부터 느꼈던 거야. 나는 줄곧 사샤 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샤 양은 계속 데클란 군을 바라보고 있더라고.”
“그건…….”
“그리고 아까 사샤 양이 날 칭찬할 때도 말이야.”
로지에가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날 껴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질 않네.”
“아…….”
말문이 막혀왔다.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심장이 쿵쿵 날뛰기 시작했다.
졸지에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러나 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 내 입이 먼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련님, 저와 데클란은…….”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
로지에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조급한 목소리를 끊었다.
“사샤 양은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 그런데 왜 당황하는 거야?”
“…….”
정곡이 제대로 찔렸다.
졸지에 투명한 어항이 된 기분이었다. 로지에가 내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이.
아무런 말도 섣불리 하지 못하는 나 대신, 로지에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샤 양의 데클란 군을 바라보는 두 눈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그건 분명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겠지.”
“…….”
로지에의 말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다 알고 있었구나.
언제부터?
순식간에 머리가 혼잡해졌다. 얽히고 뒤섞인 생각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로지에는 내가 데클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2년 전에 내가 사샤 양에게 청혼했던 게 기억이 나네.”
“…….”
얼굴을 숙인 나는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기억난다.
2년 전,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인페르나 영지로 돌아갔을 때, 로지에는 내게 청혼했었다.
비록 반지도, 꽃다발도, 혹은 들러리도 없는 청혼이었지만.
그는 그 순간 진심으로 내게 그 말을 꺼냈을 터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로지에에게 뭐라고 했었더라.
“2년이 지났네.”
로지에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사샤 양은 분명히 2년 뒤에 답을 준다고 했었지?”
“……네.”
2년 뒤에, 데클란을 수도로 보내고 난 뒤에, 그때 다시 내 감정을 되돌아보자고 생각했는데.
그 약속한 유예 기간이 벌써 다 지나버렸다.
그리고, 내 답은.
“답은 듣지 않는 걸로 할게.”
“……미안해요.”
로지에의 말에 내 입에서 절로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로지에의 눈동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왜 사샤 양이 미안해하는 거야.”
“그야…… 제가 도련님을 실망하게 했잖아요.”
“실망하지 않았어.”
로지에가 그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거짓말.
그의 미소 속에 자갈과도 같이 자그마한 유리 파편들이 뒤섞인 것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기, 도련님.”
나는 로지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전 항상 도련님 편이에요.”
내 입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제가 도련님과 미래를 함께하지 못하는 건 도련님이 못생겼다거나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솔직히 도련님은 객관적으로 보면 잘생긴 게 맞고요, 인성도 너무나도 훌륭해요.”
“……고마워.”
로지에가 피식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무언가가 빠진 듯이 어색해 보이는 미소였다.
순간 지금 그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제가 도련님을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친구로서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요.”
“……응.”
“그렇지만 도련님이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전 도련님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도련님이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 말과 함께 나는 로지에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마치 기사들이 선의의 결투 전에 악수를 청하듯이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저는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까요?”
“……아니, 전혀 아니야.”
툭.
로지에의 눈가에 고여있던 이슬 같은 감정이 마침내 떨어졌다.
“난 욕심 많은 사샤 양이 좋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