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사샤와 로지에가 화원에서 거닐고 있을 때.
“…….”
“…….”
백조궁의 응접실에서는 싸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딸깍.
응접실 정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로 새로운 찻잔 두 개가 놓였다.
찻잔 안에 갓 우려 내린 따끈따끈한 차를 따르며, 시녀는 양쪽에 앉은 이들에게 흘끔흘끔 시선을 돌렸다.
아무런 말 없이 빙긋 웃은 채 앉아있는 이레사 공녀.
그리고 아무런 표정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앉아있는 데클란.
‘얼음장 같은 분위기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시녀는 이레사 공녀에게 물었다.
“새로운 케이크를 내올까요?”
이레사 공녀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손 한 번 대지 않은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대략 한 시간 전에 내놓은 케이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건들지도 않은 모양이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두 사람에게 의미 없는 말을 남긴 시녀는 총총걸음으로 응접실에서 퇴장했다.
시녀가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녀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안에 분위기가 어때요?”
“라이렌 왕자 전하에게 보고할 만한 건 없어요?”
다른 이들의 질문에 시녀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접실 안은 꽝꽝 얼어붙은 겨울 호수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이레사 공녀와 데클란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일절 없었다.
시녀의 말을 들은 다른 동료 시녀들은 혀를 찼다.
“그럼 첩자 같은 건 아니란 말이지요?”
“하긴, 인페르나 남작가라니.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무슨 인물을 데려왔겠어요.”
백조궁의 시녀들은 처음에 이레사 공녀의 손님으로 찾아온 로지에를 의심했다.
가뜩이나 정세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이레사 공녀를 만나러 왔다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그래서 시녀들은 일부러 이레사 공녀의 손님을 감시, 아니.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인페르나 소남작이란 자는 새로 들어온 건방진 호위 기사와 밖으로 나가버려 감시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응접실 안에 남은 소남작의 시종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응접실 밖에 서서 대화를 열심히 엿들은 결과.
두 사람 사이에는 의심스러운 말이 일절 오고 가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라이렌 왕자 전하에겐 어떻게 보고드려야 하지요?”
“그냥 평범한 이들이라고, 굳이 예의 주시할 필요 없다고 말하도록 하지요.”
시녀들 가운데 그런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뒷조사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말을 한 건 이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시녀인 세티프니였다.
순식간에 모두의 이목이 세티프니에게 끌렸다.
“뒷조사라니, 정확히 어떤 걸 뜻하는 거지요?”
“왕세자의 사람일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예를 들어, 일부러 인페르나 영지와 같이 먼 시골의 사람으로 위장시켜서 입궁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흐음…….”
세티프니의 말을 들은 시녀들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시녀가 세티프니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티프니는 본래 후작가 출신의 귀족 영애였다.
몇 년 전, 그녀의 가문은 라이렌 왕자와 그의 세력에 밉보인 탓에 큰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어느 정도로 타격을 입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녀의 결혼 지참금을 준비하기 어려울 수준으로 몰락했다고 답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티프니는 하는 수 없이 궁 안으로 들어와 이레사 공녀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라이렌 왕자의 수하가 되길 자처한 꼴이었다.
세티프니는 그렇게 해서라도 라이렌 왕자의 호감을 얻어 다시 제 가문을 회복시키고 싶어 했다.
단언컨대 세티프니는 백조궁 안에서 가장 라이렌 왕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정을 지닌 세티프니가 하는 말이니, 모두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세티프니 영애의 말대로 뒷조사를 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시녀들의 동의를 얻어낸 세티프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사람을 시켜서 인페르나 소남작과 그의 시종이란 사람을 조사해보도록 하지요. 무언가 발견하면 모두에게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세티프니의 말을 들은 시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는 응접실 밖에서 시녀들 사이로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
“…….”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차만 홀짝홀짝 마셨다.
이레사 공녀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가 그지없었다.
‘왜 이렇게 말이 없는 거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린 이레사 공녀는 자신의 반대편에 앉은 데클란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사샤와 로지에가 응접실 밖으로 떠난 뒤, 데클란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내가 공녀라서 말을 편하게 하지 못하는 건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이레사 공녀는 결국 먼저 나서서 데클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인페르나 영지는 어떤 곳인지, 왕국 수도까지 오는 여정은 어떠했는지, 왕궁 안에 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지, 등등.
그리 대단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데클란이 마음을 놓고 편히 대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데클란은 과묵하기 짝이 없었다.
질문에 대한 최소한의 답을 제외하고는 일말의 사담도 입에 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 안은 고요함 그 자체로 굳어버렸다.
‘말수가 적은 사람인가 보네.’
이레가 공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데클란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인페르나 소남작의 시종이라는 이 남자는 제법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레사 공작가에 지내면서 숱한 미남을 봐 온 이레사 공녀의 눈에도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평민 출신의 시종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행동거지에 귀티가 났다.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사교계를 휘어잡았을 인물이네.’
아마도 영애 여러 명을 울리지 않았을까.
이레사 공녀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데클란도 비슷한 결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나한테 말을 거는 거지?’
데클란은 자꾸만 자신에게 대화거리를 던지는 이레사 공녀가 어려웠다.
자신보다 대외적인 신분이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라이렌 왕자의 약혼녀다.
괜히 말을 잘못 했다가 경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에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가 묻는 말에 사실만을 말했다. 자기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는 일절 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데클란은 이레사 공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사샤가 그녀와 비슷하게 생겨서 오해를 샀던 적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이레사 공녀를 슬그머니 쳐다본 데클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사샤가 훨씬 더 예뻤다.
사샤를 보고 이레사 공녀로 오해한 사람들은 모조리 안구 검사를 받아야 한다.
데클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레사 공녀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낌새를 보였다.
아무래도 이 조용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인페르나 소남작님과는 어디서 지내고 있지?”
이레사 공녀가 데클란에게 물었다.
나중에 인페르나 소남작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 연락을 할 생각으로 한 질문이었다.
공녀의 질문에 데클란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문지기에게 사실 그대로 말했다가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던 게 기억나서였다.
“……수도에 있는 숙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데클란이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그게 어느 숙소지? 정확한 주소를 모르면 가문 이름을 알려줘.”
설마 로지에와 데클란이 어느 여관에서 지내고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레사 공녀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여타 귀족들이 그러하듯 로지에와 데클란이 다른 친분이 있는 귀족 가문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이레사 공녀에게 데클란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자신들은 지금 평민들이 애용하는 여관에서 숙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데클란은 대신 이렇게 에둘러 말했다.
“가문 이름은 없습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이레사 공녀도 알아듣겠지, 하고 데클란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데클란의 착각이었다.
‘이름 없는 가문이라고?’
이레사 공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가문 저택에서 지내고 있다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이레사 공녀는 그에게 충고하듯 진심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소남작은 왕정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귀족들도 만나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회의를 준비하는 게 더 이득일 텐데.”
“예.”
“그러니 최소 후작 정도 되는 이의 저택에 머물도록 해. 시종인 자네가 소남작에게 조언해주도록.”
“…….”
이레사 공녀의 말에 데클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최소 후작 정도 되는 사람의 집에 가라니. 그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아나.
‘우리 로지에 도련님의 인맥을 이리도 과대평가하시다니. 도련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네…….’
물론 로지에에게 귀족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로지에에게는 오스첸스 아카데미에서 만나 친분이 있는 귀족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로지에를 도울 만한 형편이 되는 이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 후작가나 공작가 출신의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데클란은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공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로지에 도련님이 오늘 왕궁 밖으로 나가시면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관?”
이레사 공녀의 긴 속눈썹이 눈깜빡임과 함께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레사 공녀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호위 기사의 귀한 손님인데, 여관으로 돌려보내선 안 되겠지. 인페르나 소남작을 이 궁으로 정식으로 초대하겠다. 지금 시녀들에게 일러서 그대들을 위한 손님방을 준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걸로 다시 왕성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일 필요는 없겠구나.
데클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사샤의 말대로 공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 맞다.’
순간 드는 생각에 데클란은 다시 공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혹여나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손님방에 대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지?”
“사샤가 지금 쓰는 방과 가까운 곳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옆방이면 더 좋습니다.”
사샤와 둘이 만나고 싶은 욕심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의 입에서 이런 답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거긴 내 방인데.”
“예?”
“어?”
순간 생각이 꼬인 두 사람은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순간 데클란과 이레사 공녀는 서로 눈이 딱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그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이레사 공녀 쪽이었다.
“자네도…… 사샤 경을 좋아하는 건가?”
“……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데클란은 홀린 듯이 순순히 자신의 마음을 시인했다.
그러자 여태껏 잠잠하기 짝이 없던 이레사 공녀의 두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