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무성의 눈치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당장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긴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비록 하인과 시녀들을 모두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누군가가 도청하고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가뜩이나 이곳 헤브니아 왕국은 이웃 황국과 달리 마법이 일상화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라이렌 왕자의 사람들이 이상한 마법이나 마도구를 이용해 우리의 대화를 엿듣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부러 웃음기를 감추며 이레사 공녀에게 공손히 말했다.
“공녀님, 그렇다면 제가 소남작님을 모시고 백조궁 주변을 산책해도 되겠습니까?”
“백조궁 주변이라면, 어디로 가려는 거지?”
“백조궁 주변에 넓은 화원이 있지 않습니까. 왕궁 내에서만 볼 수 있는 꽃들이 많은 화원이니, 소남작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백조궁에 대해 소개를 받을 때 기억해 두었던 장소를 술술 입에 담았다.
굳이 화원을 만남의 장소로 거론한 이유는 간단했다.
탁 트인 넓은 장소니 괜히 오해 살 이유도 없고, 또 미행이 따라붙을 위험도 적으니까.
내 생각을 읽어낸 이레사 공녀는 일부러 없는 명분을 만들어냈다.
“어머나, 소남작님이 화훼에 조예가 깊은 줄은 몰랐구나.”
화훼에 조예가 깊기는! 이런 가식적인 대화!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그렇습니다. 소남작님은 꽃을 좋아하셔서 남작가에 있을 때도 꽃을 가꾸셨답니다. 그렇죠?”
“예, 그렇습니다.”
로지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 시원하게 답을 되돌려주었다.
이레사 공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사샤 경에게 화원 안내를 부탁드려야겠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남작님의 일행분이…….”
그러면서 이레사 공녀는 로지에 옆에 서 있던 데클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하.’
나는 이레사 공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나와 로지에, 그리고 데클란까지 셋이서 우르르 밖으로 나가면 수상해 보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데클란은 놓고 가라는 뜻이었다.
귀족 화법에 능한 로지에 역시 이레사 공녀의 속뜻을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 호위 기사를 공녀님에게 맡기고 싶군요. 실력이 좋은 이입니다.”
“그러면 참 좋겠네요. 그럼 사샤 경, 소남작님과 오래간만에 만난 김에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가 씩씩하게 답했다.
그러자 순간 잠잠히 대화를 듣고 있던 데클란의 몸이 움찔거렸다.
음?
‘……뭐야, 왜 저래?’
그 미묘한 반응을 알아차린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왜 저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거지?
그러나 내게는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안내해 주도록 해, 사샤 양.”
곧이어 들려온 로지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네에.”
나는 그대로 로지에와 함께 응접실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응접실 문을 열기 전, 나는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선선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레사 공녀의 뒤로, 무뚝뚝한 표정의 데클란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는 어째선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의 강렬한 시선에 나는 마음속이 불편해졌다. 마치 장미 가시에 콕콕 찔린 것처럼.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러나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데클란에게 이유를 물어보기로 한 나는 응접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응접실 문을 열고 나오기가 무섭게 문에 딱 붙어서서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나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호위 기사가 되신 분이 공녀님을 홀로 두다니, 제정신인가요?”
나는 내 옆에 선 로지에를 가리켰다.
“소남작님에게 화원을 구경시켜주라는 공녀님의 명령이 있었는데요.”
나는 일부러 ‘명령’이란 말을 강조하며 대꾸했다.
“…….”
시녀들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뻥긋거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래도 괜히 트집을 잡으려다가 포기한 모양이지.
‘다들 왜 힘들게 꼬여 살까.’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로지에를 밖으로 안내했다.
나는 로지에와 함께 화원으로 향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백조궁 사람들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지에 역시 이런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여기예요.”
화원에 도착한 나는 로지에에게 손짓했다.
화원을 슬쩍 쳐다본 로지에는 곧바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잘 지냈어, 사샤 양?”
“왜요, 못 지낸 것 같아요?”
나는 아하하 웃으며 로지에의 인사말에 화답했다.
그러나 어째선지 로지에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백조궁의 사람들이 널 괴롭혀?”
“네?”
“아까 널 향해 말하는 본새가 꽤 날카롭던데……. 이레사 공녀님도 알고 계셔?”
“아.”
그제야 나는 로지에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건지 알았다.
아마 백조궁의 시녀들이 내게 못되게 구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나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로지에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백조궁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예요.”
“정말로?”
로지에는 내 말을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최대한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어딜 가나 신입 군기 잡는다고 선임들이 일부러 엄하게 대해잖아요. 오스첸스 아카데미에 처음 입학했을 때 신입생 환영회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내가 갔던 환영회는 그러지 않았는데.”
“평민들 문화예요. 이해해주세요. 그나저나, 도련님은 왕성 안에 왜 들어오신 거예요?”
로지에가 나에 대해 그만 걱정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게 말이지…….”
그렇게 말문을 뗀 로지에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여긴 듣는 사람이 없어요.”
나는 얼른 그에게 일러주었다.
“아,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네.”
그렇게 중얼거린 로지에는 이내 그간 있었던 일을 내게 들려주었다.
내가 인페르나 영지를 떠나고 난 뒤, 영지 내부가 얼마나 어수선해졌는지.
전쟁에 의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영지민들은 식재료와 의약품들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지 내부에 품귀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웃과 이웃끼리 싸움이 터졌다.
그 와중에 황국 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피난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혼란한 틈을 타 각종 사기 행각과 빈집털이 도둑 등 범죄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인페르나 남작과 로지에, 그리고 파수꾼들은 영지 내부를 관리하는 와중에 경계 태세를 갖추느라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화원 안을 걸으며 로지에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두 나라의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애먼 민간인들이 고생해야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해버리고 말았다.
“그냥 헤브니아 국왕이랑 황국 황제랑 맞짱 뜨면 안 돼요?”
“음?”
내 말을 들은 로지에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까 국왕이랑 황제랑 둘이서 육탄전으로 맞짱 떠서 이긴 쪽을 전쟁 승자로 하는 거예요. 굳이 기사들 병사들 끌어들이지 말고요.”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나온 해결책은 전혀 달라.”
내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어 준 로지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국은 평화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이 나라의 왕족 한 명을 볼모로 보내오길 요구하고 있어.”
로지에의 말을 들은 나는 멈칫했다.
‘아, 이 얘기가 벌써 인페르나 영지까지 흘러 들어갔구나.’
그렇다면 온 왕국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달리 말하자면, 국왕도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건데…….
“국왕 폐하는 왕세자도, 라이렌 왕자도 황국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아. 하지만 황국의 요구에 맞춰주지 않으면 평화 협정은 물 건너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로지에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왕정 회의에 참석하시려는 거예요? 이레사 공녀를 대신 황국으로 보내라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로지에는 잠시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처음부터 예상하고는 있었다.
수도와 아무런 연이 없는 로지에가 굳이 왕성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데클란이 내게 로지에가 국왕 폐하를 만나려 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백조궁의 시녀가 갑자기 왕정 회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로지에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무래도 평화 협정에 관한 일 때문일 거라고는 예상했다.
로지에는 그 누구보다 인페르나 영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설마 그가 이레사 공녀를 황국으로 보내자며 앞장서려고 할 줄은 몰랐다.
누군가가 이레사 공녀를 볼모로 보내자고 주장할 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설마 로지에일 줄이야.
“표정이 밝지 않네.”
옆에서 로지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을 해봤자 들킬 게 뻔하니, 나는 순순히 자백했다.
“네,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어째서?”
“이레사 공녀님은 좋은 분이시니까요. 이건 단순히 그분이 제가 섬기는 분이라 하는 말이 아니에요. 공녀님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로지에에게 나와 이레사 공녀의 사이를 설명하는 대신, 나는 뭉툭하게 말을 아꼈다.
그러자 순간 로지에의 입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사샤 양은 이레사 공녀님만 괜찮다면 이 왕국이 쑥대밭으로 변해도 괜찮다는 거야?”
“……그러는 도련님은 모두를 위해서라면 한 사람을 불행에 빠트려도 괜찮다고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차마 답하지 못한 내가 반문했다.
“아니. 그럴 리가.”
단번에 로지에의 답이 되돌아왔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거야.”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로지에는 내가 아는 로지에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로지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도련님 계획을 말해주세요. 제가 이레사 공녀님에게 잘 말씀드릴게요.”
내 말을 들은 로지에는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