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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40)화 (140/177)

140화

그러나 놀랍게도 차는 정상이었다.

‘하긴, 왕성 안에서 대놓고 이레사 공녀나 나를 골탕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맥이 빠진 나는 이레사 공녀와 함께 차와 케이크를 즐기며 훈훈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뒤 우리는 점심시간에 맞추어 만찬을 즐겼다.

이레사 공녀가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풀 코스 요리였다.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뒤, 이레사 공녀는 나를 다시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그녀가 내게 먹이는 케이크를 맛보고 있다.

“이것도 한 번 맛보세요. 올해 갓 수확한 피스타치오를 갈아서 만든 마카롱이에요.”

“유리나, 나 정말 배불러서 더 이상은…….”

“맛만 보세요! 마카롱은 녹으면 맛없어요!”

“으음, 그럼 딱 하나만……!”

큰마음을 먹고 유리나가 먹여주는 마카롱을 한입 물었다.

“헉.”

“왜, 왜 그러세요, 사샤 님?”

“마, 맛있어……!”

사람의 배는 참 신기했다. 분명히 배가 부른데도 계속 식도 너머로 디저트가 넘어갔다.

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유리나가 먹여주는 디저트를 냠냠 먹었다.

졸지에 유리나의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거 너무 맛있다, 헤헤. 나중에 데클란이랑 같이 먹어 봐야지…….’

그 와중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데클란을 떠올렸다.

이렇게 맛있는 걸 데클란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혀끝에 감도는 온갖 달콤한 맛에 길들여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유리나의 방문을 노크했다.

화들짝 놀란 나와 이레사 공녀는 둘 다 동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명색이 공녀와 호위 기사인데, 이렇게 놀고먹는 모습을 외부에 보일 수는 없었다.

“들어오도록.”

흠흠, 하고 목청을 정리한 이레사 공녀가 불렀다.

들어온 이들은 시녀와 하인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레사 공녀는 하인을 처음 본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녀는 시녀에게 답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 자가 공녀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왔습니다.”

시녀는 조금 전보다 더 공손해진 태도로 이레사 공녀에게 말했다.

물론 ‘전보다 더’ 공손해졌다고 해서 완전히 유순해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어투는 여전히 삐딱했다.

하인은 이레사 공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본론을 꺼냈다.

“공녀님, 인페르나 남작가의 로지에 소남작님을 알고 계십니까?”

인페르나 남작가? 로지에?

영혼의 고향과도 같은 그 두 단어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는 이레사 공녀도 마찬가지였다.

“인페르나 남작가라면…… 알고 있다.”

그러면서 공녀는 내게 슬쩍 눈치를 보냈다.

그녀는 내가 오스첸스 아카데미를 다닐 때 로지에의 시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로지에가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을 터.

다만 이레사 공녀는 이 하인이 왜 갑자기 인페르나 남작가의 로지에를 언급하는지 궁금한 듯했다.

물론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지에 도련님이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아니, 도련님은 그런 이미지가 아닌데?’

영문을 알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반면 이레사 공녀의 대답을 들은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로지에 소남작님이 이번 왕정 회의에 참석하는 걸 이레사 공녀님이 추천하신 겁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난생처음 듣는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로지에가 왕정 회의에 참석한다고? 도대체 왜?

‘아.’

그때,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무언가가 있었다.

약 두 주 전.

데클란과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도련님은 국왕 폐하를 접견하려고 하셔.’

그때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었다. 인페르나 남작가를 싫어하는 국왕이 로지에를 만나 줄까? 라고.

혹시 이 일은 데클란이 말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재빨리 머리를 돌린 나는 이레사 공녀에게 몰래 손짓을 하며 슬쩍 눈치를 주었다.

‘일단 여기로 데리고 와 보자!’

이레사 공녀는 전생에 내 영혼의 쌍둥이라도 되었는지 내 말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들었다.

“내가 불러들인 게 맞아. 이곳으로 데리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이레사 공녀의 명령에 하인은 각지게 인사를 올린 뒤 시녀를 따라 방을 퇴장했다.

시녀는 방을 나가기 전에 이레사 공녀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티를 냈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궁 밖에서 일하는 하인 앞에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레사 공녀는 그런 시녀의 눈길을 완전히 차단하며 고개를 돌렸다.

“로지에 소남작이라면, 사샤 님이 섬기던 도련님 아닌가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이레사 공녀가 내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맞아요. 그런데 저도 로지에 도련님이 왜 여기에 오셨는지 모르겠어요.”

정확한 내막을 잘 모르니, 괜히 내 추측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레사 공녀는 흐음, 하고 턱을 괴었다.

“로지에 소남작이란 분은 사샤 님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계시는 건가요?”

“음,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나는 데클란에게 내가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다면, 로지에도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

“일단 로지에 소남작이 여기에 오고 난 뒤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사샤 님과 아는 분이라면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요.”

“네, 로지에 도련님은 위험과 거리가 가장 먼 사람이에요.”

순한 토끼와도 같은 로지에의 인상을 떠올리며,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반 시간 뒤, 시녀가 방문을 노크하며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나는 이레사 공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의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데클란과 로지에였다.

“사샤.”

로지에의 뒤에 서 있던 데클란이 나를 보며 반색했다.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로지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 아니, 실례했군요. 이레사 공녀님을 뵙습니다.”

데클란처럼 내 이름을 부르려던 로지에는 이레사 공녀를 향해 먼저 인사를 올렸다.

이레사 공녀는 로지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인페르나 소남작인가요?”

그런 질문을 하는 공녀는 로지에의 얼굴을 세세히 관찰하듯이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릴 적 만났던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눈치였다.

그러자 이레사 공녀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던 평민 소녀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로지에는 그녀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레사 공녀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궁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일단 앉으시지요.”

로지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이레사 공녀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호위 기사답게 그녀의 뒤에 섰다.

그때 나와 마찬가지로 로지에 뒤에 서서 지키고 있는 데클란과 두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데클란의 눈길은 잔잔한 노을처럼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었다.

‘또 만났네, 데클란.’

나는 로지에 뒤의 데클란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2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나는 혹여나 데클란을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그 사다리가 놓은 벽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은 훈련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훈련관들의 압박이 더더욱 강해졌기에 그러지 못했다.

그 뒤로 계속 데클란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비록 지금 자리가 자리인지라 내 감정을 표출해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이는 데클란도 동감하는 바 같았다.

그렇게 무언으로 서로의 감정을 전달하는 와중에, 이레사 공녀와 로지에 사이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공녀님, 먼저 저를 궁으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듣자 하니 제게 용건이 있으시다고요.”

“네, 그러합니다.”

로지에는 자신보다 훨씬 작위가 높은 귀족을 대하면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귀가 있는 곳에서 의논하기에는 적절한 화제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면서 로지에는 응접실 주변에 서 있는 시녀와 하녀들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에 이레사 공녀는 부채를 꺼내 들더니, 그것을 차르륵 펼쳐 제 입을 가렸다.

“사샤 경.”

공녀가 부채 너머로 내 이름을 살짝 불렀다.

나는 그녀의 입가로 고개를 숙였다.

이레사 공녀는 나만 들릴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지에 소남작이 제게 하는 말은 전부 이 궁의 주인에게 들어가게 돼요.”

상당히 에둘러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단번에 이레사 공녀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이 궁의 실질적인 주인은 이레사 공녀가 아닌, 라이렌 왕자였다.

로지에와 이레사 공녀가 만났다는 사실은 곧 라이렌 왕자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완전히 비밀리에 봉인될 수 없다.

아무리 사용인들을 물리고 문을 닫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고 해도, 온 사방에는 라이렌 왕자의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니 이레사 공녀는 자신이 로지에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신중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샤 님이 나중에 로지에 소남작에게 직접 듣고 저에게 전달해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다시 폈다.

대신 나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제법 큰 목소리로 말했다.

“로지에 소남작님. 제가 이레사 공녀님의 호위 기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하러 오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내 말을 들은 로지에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그때 데클란이 로지에를 향해 고개를 숙여서 무언가 속삭였다.

짧은 수 초 뒤.

데클란에게서 설명을 들은 로지에는 모든 것을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아니다. 인페르나 남작령에서 인재가 났으니 당연히 축하해야 할 일이지.”

“감사합니다. 공녀님, 소남작님이 바쁜 걸음 하셨습니다. 소남작님과 따로 시간을 가져 회포를 풀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허한다.”

이레사 공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대꾸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녀가 로지에를 향해 살짝 한쪽 눈을 감으며 신호를 보내는 걸 목격했다.

로지에 역시 이레사 공녀에게 윙크하며 신호를 반사했다.

역시나 눈치가 빠른 사람들! 아무나 귀족 하는 게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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