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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39)화 (139/177)

139화

이레사 공녀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시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문이 그대로 막혔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시녀를 바라보며 나는 눈치 없이 이레사 공녀에게 입을 놀렸다.

“공녀님, 어째서 저 시녀는 공녀님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도 한마디 하지 않는 겁니까? 사실 저 시녀가 이곳의 상전인 겁니까?”

“으음, 사샤 경. 그렇지 않아요. 이 백조궁의 임시 주인은 바로 저랍니다. 왜냐하면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저에게 권한을 주셨거든요.”

이레사 공녀가 ‘권한’이란 말을 유난히 강조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녀를 향해 흘끔 시선을 보냈다.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공녀님.”

꽈악.

시녀가 제 소맷자락이 구겨지도록 강하게 붙잡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기서 한술 더 뜨기로 했다.

“그래도 저 시녀는 끝까지 사과를 안 하네요. 백조궁의 계급 조직은 외부와 많이 다른 모양이네요?”

일부러 시녀더러 더 약 오르라고 ‘외부’라는 말을 세게 발음했다.

그러자 시녀는 이내 이를 아드득 갈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결국 시녀에게 제 무례함에 대한 사과를 받아냈다.

‘이 정도 했으면 유리나도 만족했겠지?’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이레사 공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나 유리나는 생각보다 더 강적이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예?”

“그대가 지금 왜 내게 사과를 하는지, 어디 한 번 설명해줄 수 있나?”

이레사 공녀가 여전히 부채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시녀에게 되물었다.

“그것이…….”

“외부인 앞에서 더 확실하게 해야지. 그대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어서 고해보도록 해.”

“그, 그게…….”

시녀는 우물쭈물하며 이레사 공녀의 인상을 살폈다.

그러나 이레사 공녀는 그녀를 순순히 놓아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레사 공녀는 도리어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윗사람인 내가 그대에게 세 번이나 빌어야 하나?”

‘오, 세다.’

나는 얌전히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했다.

“외부인 앞에서 내 체면을 이렇게 깎아 먹다니, 이건 곧 라이렌 왕자 전하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해도 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레사 공녀가 그간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시녀는 급히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이레사 공녀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백조궁의 주인이신 이레사 공녀님에게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말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지, 그게 잘못이 아니잖아.”

부채를 살랑거리며 이레사 공녀가 딱딱하게 시녀의 말을 정정했다.

“나는 그대가 말을 올려서 기분이 상한 게 아니야. 그대가 아무짝 쓸모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여서 화가 난 거지. 다시 말해 봐.”

“……아무짝 쓸모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시녀는 독을 뱉어내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입 밖으로 냈다.

탁!

이레사 공녀는 그제야 제 부채를 거두어들였다.

“잘했어. 네 본분을 알았으면 이제 시녀답게 가서 다과나 가지고 와.”

예…… 하고 기운 없이 대답을 올린 시녀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공녀는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들, 나가서 사샤 경이 지내시게 될 방을 정리하고 와.”

“아침에 이미 정리가 끝났습니다만.”

하녀들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이레사 공녀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 내가 분명히 내 방 바로 옆에 사샤 경의 방을 두라고 명령했을 텐데? 그런데 내 옆방이 왜 아직도 텅 비어있는 거지?”

“공녀님, 어찌 평민 출신의 호위 기사를 공녀님과 같은 층의 방을 쓰게 하실 수 있습…….”

“왕궁 하녀들은 처벌받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이 대화의 흐름을 좀처럼 용납할 수 없었던 내가 하녀들의 말을 툭 끊었다.

내 말을 들은 이레사 공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샤 경?”

“저도 귀족 가문의 사용인으로 잠시 일해봐서 아는데요, 귀족들에게 함부로 말대꾸하는 건 곧 명령 불복종, 즉 큰 처벌을 받는 행위랍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녀들을 향해 흘끔 시선을 던졌다.

흠칫 놀란 하녀들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조금 전 나와 이레사 공녀가 최고의 이인 작업을 통해 건방진 시녀를 어떻게 내보냈는지 똑똑히 목격해서이다.

“저 하녀들은 감옥에 몇 년씩 살다 온 사람들인가요?”

“글쎄요. 몇 년을 보내면 좋을까요?”

“지, 지금 가서 방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하녀들이 일제히 응접실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쾅!

응접실의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나는 이레사 공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람들 도대체 뭐야? 왜 저렇게 너에게 무례하게 굴어?”

“사샤 님 말씀대로 라이렌 왕자 전하가 제게 붙인 감시자들이에요. 특히 저 시녀는 라이렌 왕자 전하를 지지하는 어느 자작가 출신의 여식이라고 들었어요.”

“자작가 출신? 그런데 이레사 공녀인 너에게 까부는 거야?”

“네, 보시다시피요.”

이레사 공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런 생활에 지쳐있는 것 같았다.

기운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유리나는 이런 삶을 살 필요가 없는데.

이것보다 더 좋은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데.

그런데 유리나 너는 왜 이런 왕궁에 잡혀서 이런 생활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못 나가게 해요. 이대로 결혼식이 있을 때까지 영영 왕궁 내에 갇혀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뭐야. 널 감옥의 죄수처럼 가둬두는 거잖아.”

“뭐, 똑같죠. 하지만 어쩔 수 없답니다.”

그러면서 이레사 공녀는 응접실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에는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는 꽃들이 보였다.

백조궁 앞에 가꿔진 화원이었다.

“저는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마담 쟈니에트가 절 이레사 공작가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굶어 죽었을 거예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럴 리가 없잖아. 네 이모가 있는데. 그리고 채소 가게에서 굶어 죽다니…… 그건 너무 슬프잖아.”

“사실 전 이모가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레사 공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잠잠하게 말을 이었다.

“이모는 저를 싫어했어요. 그러니 저를 버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유리나…….”

“일주일이 지나도 이모는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다 커서 어른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이레사 공녀의 입가에 낯선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왜 저는 몰랐던 걸까요. 이모가 왜 채소들이 썩도록 가만히 놔두고 가게를 떠났던 건지. 일주일 뒤에 돌아올 거라고 하셨으면서 겨우 이틀 치 빵만 살 수 있는 돈을 놓고 갔던 건지.”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몰랐다.

내가 유리나를 처음 만났을 때, 유리나는 자신의 이모에 대해 말했었다.

그때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북부에 채소를 팔러 가서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모가 오지 않았어도, 어린 저는 바보처럼 이모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가게를 떠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냥 가게에 남아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그렇게 굶어 죽었을 게 뻔해요.”

그런 말을 하는 이레사 공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마담 쟈니에트가 저를 이레사 공작가로 보내 준 덕분에 귀족 놀이를 해볼 수 있었어요. 큰 저택에서 맛있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좋은 냄새가 나는 욕실에서 씻고, 크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고…….”

“…….”

“……그리고 모두들 저를 보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어요. 저더러 이레사 공녀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저는 그 이름이 마치 제 것인 것처럼 그들을 속였어요.”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굶어 죽어야 마땅했던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걸 그렇게 오래 누렸으니, 그 대가를 치를 만도 하지 않나요?”

“……유리나.”

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떤 것 말씀이세요?”

“네가 이레사 공녀가 되어서 받은 것들이 많으니까,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이런 생활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모두와 떨어진 구석에 위치한 작은 궁. 적대적인 사용인들. 일거수일투족이 족족 자기 약혼자의 귀에 들어가는, 자유가 제한된 감옥.

그 누구라도 이런 곳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유리나. 넌 어린아이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상황에 휘둘렸을 뿐이야. 네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이레사 공녀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죗값을 치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역시 사샤 님은 상냥하시네요.”

이레사 공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아름다운 미인이 짓는 화려한 미소였건만,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만일 사샤 님이 절 이곳에서 꺼내주실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유리나…….”

“아,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복도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걸 느낀 이레사 공녀가 덧붙였다.

“전 사샤 경에게 쓸데없는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유리나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티 트레이를 든 시녀가 다시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차와 다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시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그녀는 나와 이레사 공녀 앞에 찻잔과 다과를 세팅해 놓았다.

‘보통 소설 보면 앙심을 품은 시녀가 차 안에 이상한 걸 타 넣던데.’

과거 소설 독자로서의 경험을 살린 나는 유심히 시녀가 따르는 차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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