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왕성 깊은 곳에 위치한 백조궁.
나는 지금 그곳에서 이레사 공녀를 모시고 있었다.
아니지.
모신다는 말은 틀린 표현이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일종의 하극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섬겨야 할 이레사 공녀는 섬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내게 온갖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예쁜 걸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남이 보면 내가 주인이고 이레사 공녀가 아랫사람이 된 줄 알 지경이었다.
“사샤 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유리나가 싱긋 웃으며 내게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접시를 받지 못했다.
“유리나, 이제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어.”
이미 점심을 풀코스 요리로 끝낸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디저트와 차로 입가심까지 착실하게 마쳤다.
간만에 먹는 정찬이어서 행복하게 즐겼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모든 시녀와 하녀들을 물린 유리나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그녀의 방 안에 들어간 나는 입이 쩍하고 벌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방 안에는 애프터눈 티 세트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 그래도 한 입만 맛보세요.”
“더 먹었다간 나중에 저녁때 배가 안 고플 것 같아.”
“그렇지만…… 사샤 님을 위해 제가 특별히 파티시에를 시켜서 제작 주문한 케이크란 말이에요.”
유리나가 아랫입술을 빼죽 내밀며 내게 애교를 부렸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함락되고 말았다.
“으음, 알았어. 그럼 딱 한 입만…….”
유리나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나는 입을 아, 하고 열었다.
내 입 안으로 케이크 한 조각이 쏙 들어왔다.
“어때요? 맛있죠?”
내게 케이크를 먹여준 유리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나는 입 안에 퍼지는 미묘한 맛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맛있긴 한데, 으음…… 이건 무슨 맛이지? 어디서 많이 먹어본 맛인데…….”
“옥수수예요!”
한 손으로 포크를 든 유리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그 말에 나는 하마터면 입 안에 든 케이크를 뱉어버릴 뻔했다.
“오, 옥수수? 왜 하필 옥수수야?”
“그야 사샤 님이 옥수수를 좋아하니까요!”
“솔직히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옥수수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찬물을 한 입 마신 내가 유리나에게 되물었다.
유리나는 친절하게도 내게 입을 닦으라며 냅킨을 한 장 내어주었다.
“그때 사샤 님이 제게 물어보셨잖아요. 제 이모의 채소 가게에 옥수수를 파냐고.”
“아…….”
내가 그랬었나?
유리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때 나와 그녀 사이에 정확히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세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추측건대, 유리나의 이모가 채소 가게를 한다는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혹시 옥수수를 파냐고 물어봤던 것 같았다.
유리나는 그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왠지 미안한데.’
나는 상대방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기만 한데, 상대방은 나와 스쳐 지나가듯 만났던 그 순간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왠지 유리나에게 실례를 저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서 미안해졌다.
그래도 유리나는 여전히 기뻐하는 눈치였으니……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유리나가 내게 내민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두 주 간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특수 부대 훈련을 성황리에 마무리를 지었다.
‘뭐…… 엄청난 개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결론적으로 그 누구 한 명 죽지 않고 사지가 멀쩡하니, 그러니 제법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튼.
그렇게 특수 부대 훈련이 정식으로 종료되고 난 뒤, 부대원들은 모두 기사 임명을 받았다.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축하를 위한 피로연도 없는 조촐한 임명식이었다.
임명식이 끝난 뒤 부대원들은 각기 발령을 받게 되었다.
부대원들 절반은 국왕과 왕비의 호위 기사로 배정을 받았다.
남은 인원들의 절반은 왕세자와 그의 아내인 왕세자비,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왕손자를 호위하기 위해 이동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제2왕자의 호위 기사로 결정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 혼자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
‘아직 정식 왕족이 아니라서 특수 부대 출신의 호위 기사는 나 한 명만 보내나 보네.’
나를 안내하러 온 하인을 따라 백조궁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레사 공녀가 아무리 라이렌 왕자와 약혼을 한 사이라고 해도, 아직 정식적으로 결혼 허가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왕족과 똑같은 대우를 하는 건 형평성에 있어서 어긋나다—라는 게 왕세자와 그의 파벌의 주장이었다.
‘왕세자랑 라이렌 왕자랑 둘이서 기 싸움을 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구나.’
허구한 날 형제끼리 싸움이라니…….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이레사 공녀가 지내고 있는 백조궁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공녀님이 오실 겁니다.”
나를 응접실까지 안내한 하인은 이내 밖으로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60초 뒤.
“오셨군요!”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레사 공녀가 다시 등장했다.
반가운 얼굴을 또 보게 되다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레사 공녀님,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유리나가 실은 구면이라는 사실을 들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공손하게 그녀를 부르며 허리를 숙였다.
이레사 공녀도 일부러 외부인들의 시선을 자각하며 내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잘 도착하셨습니다. 저의 호위 기사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샤 경.”
사샤 경.
아무리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대면에서 이렇게 호칭을 들으니 쑥스러워졌다.
나는 일부러 아하하,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공녀님을 섬길 수 있다니, 제 크나큰 영광입니다.”
“참 상냥한 말씀을 들려주시는군요. 그럼 이곳까지 오시느라 더우셨을 텐데, 먼저 목이라도 축이도록 하시지요.”
그러면서 이레사 공녀는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에게 시원한 물을 내오라고 명령했다.
“기사가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사샤 경.”
“감사합니다, 이레사 공녀님.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네요.”
“경의 기사 임명식에 꼭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이레사 공녀가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평민들의 기사 임명식에 갔다간 평판이 낮아질 것이라면서…….”
“흠흠.”
이레사 공녀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시녀 한 명이 헛기침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던 나와 이레사 공녀의 시선이 시녀로 쏠렸다.
“공녀님. 외부인에게 시시콜콜한 내부 사정을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시녀가 딱딱한 어투로 공녀에게 고했다.
이레사 공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외부인이라니. 사샤 경은 이제 내 호위 기사이자, 내 사람이야.”
이레사 공녀의 반론에도 시녀는 주눅이 들지 않고 도리어 목을 뻣뻣하게 폈다.
“어차피 위기 태세가 가라앉으면 다시 제 고향으로 돌아갈 평민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마시지요.”
그런 말을 하면서 시녀는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그 시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재수 없어.’
어떻게 사람 얼굴 앞에다가 대고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그러면서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이레사 공녀의 인상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녀에게 지적당한 것 때문에 기분이 적잖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자기보다 더 아랫사람에게 혼나는 모습을 나에게 들키게 된 거다.
나라도 부끄럽고 기분이 나빠질 테다.
‘아무래도 라이렌 왕자가 이레사 공녀를 잘 대해주지 않는 모양이지?’
이건 원작 소설에서 어렴풋이 묘사되었던 부분이다.
라이렌 왕자와 이레사 공녀는 그저 정략적 관계로 약혼을 맺은 사이였다.
라이렌 왕자는 차기 국왕이 되고 싶은 야망이 큰 자였다. 그러니 그는 혹여나 이레사 공녀가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러니까 원작에서 이레사 공녀가 나중에 데클란이랑 도망치게 된 거잖아.’
물론 원작 소설 전개가 제대로 망가진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생각만 해도 이레사 공녀가 안쓰러웠다.
‘저 시녀도 아마 라이렌 왕자가 붙여놓은 수하겠지?’
끔찍하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그 남자가 보낸 사람들에게 24시간 감시당하는 삶이라니.
이레사 공녀가 왜 나를 찾고 그토록 기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왜 필사적으로 나를 호위 기사로 만들려고 했는지도.
‘유리나 대신에 내가 나서 줘야지.’
그렇게 다짐한 나는 시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를 외부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시녀가 아니꼽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그러자 나는 사뭇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저를 외부인이라고 생각하시다니, 참으로 식견이 짧으시군요. 세상 보는 눈이 옹이구멍보다 좁은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발끈한 시녀는 인상을 팍 쓰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산전수전 다 겪고 지옥의 훈련 캠프에서 돌아온 내게 그녀의 찌그러진 인상은 간지럽기만 했다.
나는 시종일관 은은하게 웃으며 시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이레사 공녀님을 섬깁니다.”
“네? 시녀님이라고요오? 공녀님을 섬기신다고요오오?”
나는 일부러 말꼬리를 늘리며 능청스럽게 놀란 연기를 했다.
내가 자신을 놀려먹고 있다는 걸 짐작한 시녀는 더더욱 날카롭게 인상을 썼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조금 많이 놀라서요.”
나는 호들갑을 떨며 과장되게 큰소리로 외쳤다.
“공녀님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시기에, 저는 또 당신이 라이렌 왕자님이 보낸 감시자라도 되는 줄 알았지요.”
정곡이 찔린 시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이레사 공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어찌 저 무례한 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시녀는 당장 이레사 공녀에게 나를 꾸짖을 것을 요청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유리나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멍석을 깔아놓은 자리를 그녀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이레사 공녀는 도리어 시녀에게 반문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예, 예에?”
“사샤 경이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잖아. 내가 하는 말에 트집을 잡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건 그렇게 보기 좋진 않은데.”
“공녀님, 저는…….”
“특히나 외부인 앞에서 말이야.”
촤악.
이레사 공녀는 일부러 얕은 한숨을 내쉬며 부채를 꺼내 자신의 입을 가렸다.
“외부인 보는 앞에서 내게 이렇게 망신을 주다니…… 그대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부채 너머로 이레사 공녀의 미소가 슬쩍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