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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37)화 (137/177)

137화

데클란의 말에 로지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도대체 뭘 믿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왕성 안에 들여달라고 찾아간 게 벌써 2주가 되었잖아.”

“네, 바로 그게 문제인데요.”

“2주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갔으니, 이제 슬슬 들여보내 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로지에가 헤헤, 웃으며 데클란에게 화답했다.

데클란은 당장 이 테이블을 뒤엎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다음 바위 하나를 제 등에 묶고 세 시간을 전력 질주로 달리고 싶어졌다.

이 순수한 도련님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한숨을 내쉰 데클란은 포크를 들어 올렸다.

일단 밥을 먹고 생각하도록 하자.

포크로 덤플링 하나를 그대로 찍은 데클란은 지난 2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수도에 도착한 날 사샤를 만나게 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사샤와 헤어진 뒤, 데클란은 그녀의 부탁대로 편지를 보냈다.

그 뒤로 로지에가 있는 숙소로 돌아간 데클란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두 눈을 감으면 자꾸만 사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귀여운 눈가. 사랑스러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두 볼. 살짝 벌어진 입술 너머로 보이는 혀…….

데클란은 그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로지에는 데클란과 함께 왕성으로 갔다.

정확히 말하면…… 왕궁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로지에와 데클란을 본 왕성의 문지기는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멈춰 서시고, 신분을 밝히십시오.”

“인페르나 남작가의 로지에 인페르나다. 그리고 이쪽은 제 시종인 데클란.”

‘시종은 얼어 죽을 시종…….’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문지기는 로지에의 말의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이 그의 얼굴과 옷차림을 살폈다.

아무래도 그는 인페르나 남작가가 어느 변방에 박혀있는 가문인지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하긴…… 남작 같은 소귀족 작위를 일개 문지기가 알고 있을 리가…….’

혹시 누군지 모르겠다고 안에 안 들여보내 주면 어떡하지?

데클란은 슬슬 분위기가 불안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챘다.

잠시 고민하던 문지기는 로지에에게 잠시 기다리라면서 다른 문지기를 불러왔다.

서로 무언가를 속닥이던 두 문지기는 이내 로지에에게 물었다.

“인페르나 남작 영식, 이시라고요?”

“공식 명칭은 소남작이다.”

“아아, 그렇군요…… 인페르나 소남작님, 왕성에는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왕정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

로지에가 당당히 문지기에게 고했다.

그러자 문지기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로지에를 바라보았다.

데클란은 문지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걸어서 오신 겁니까?”

그랬다.

데클란과 로지에는 여타 귀족과 달리 왕성의 입구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그렇다. 말은 숙소에 있다.”

로지에가 정직하게 대답했다.

문지기들의 시선이 곱지 않게 변했다.

“숙소라는 건…… 지금 어디에 지내고 계신 겁니까?”

그 질문에 착한 로지에는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의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까지 알려 주었다.

로지에의 대답을 들은 문지기들은 인상이 더더욱 어둡게 변했다.

그때 데클란은 문득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일반 숙박 시설에 묵는 귀족이 있나?’

로지에와 데클란이 지내고 있는 숙소의 사람들은 전부 평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귀족들은 다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지? 지방에 영지가 있는 이들은 수도에 올라와서 어떻게 지내지?

다들 수도에 집이 한 채씩 있는 건가?

“죄송하지만 소남작님, 왕정 회의에 참석을 허락하는 문서라던가…… 초대장 같은 것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문지기들이 최대한 공손하게 로지에에게 물었다.

그러나 로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당연하지. 애초에 초대받은 손님이 아닌데.

그게 로지에와 데클란의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문지기들에 의해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나마 로지에가 귀족이라고 험하게 쫓겨나지 않았다.

만일 평민 둘이었다면 제 주제도 모르고 왕궁 근처에 얼씬거린다며 몽둥이로 흠씬 얻어맞았을지도 모른다.

“마차를 한 대 임대해야 할까요? 뭔가 있어 보이는 귀족처럼 보이게?”

일단 숙소로 돌아간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제안했다.

로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대 마차에는 남작가 가문 인장이 없잖아.”

“그래서요?”

“귀족 가문 소유의 마차만 왕성 안에 들어갈 수 있어.”

“그럼 저희 왜 애초에 마차를 안 끌고 온 거예요?”

“그래서 덕분에 시간 절약했잖아. 그리고 남작가 마차를 가져왔다간 어머니가 뭘 타고 다녀?”

“…….”

하기야 그랬다.

외부와 사교 교류가 워낙 없는 인페르나 남작가는 애초에 멀리 이동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가문 인장이 달린 마차가 단 한 대뿐이었다.

“흐음, 문지기에게 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국왕을 설득할 두뇌와 배짱이 있으면서, 문지기 한 명 못 구워삶아?

“그럼 저희 왕궁 안에 못 들어가는 건가요?”

“아니.”

로지에가 딱 잘라 말했다.

“내일 다시 가 보자.”

“내일 가면 뭔가 달라져요?”

데클란이 로지에에게 반문했다.

“문지기가 달라지잖아.”

“그걸 도련님이 어떻게 아세요?”

“문지기는 매수당하기 쉬운 직업이야. 그래서 문지기는 한 달에 딱 한 번만 무작위로 당직을 서.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 동안 매일 다른 문지기를 만나게 될 거란 거야.”

“……그걸 도련님이 왜 알고 계신 거예요?”

왕국 수도에 와 본 적도 없으면서?

너무 수상할 정도로 왕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로지에를 향해 데클란이 의구심이 가득 찬 눈길을 보냈다.

로지에는 그저 환하게 웃기만 했다.

“북부에 있을 때 조부님에게 얼핏 들었던 거야. 조부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셔.”

“그래도 그렇지…… 내일 가서 문지기가 달라졌다고 일이 잘 풀릴 것 같지 않은데요.”

데클란이 투덜거리듯 로지에에게 고했다.

그리고 과연 일은 데클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내일 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셔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레 가도 달라지는 건 없었고.

“다른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으신 경우라면, 그 가문의 인장을 받아오십시오.”

심지어 두 주 내내 갔는데도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보안상의 문제로 출신 배경이 불투명한 분은 왕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제 저런 말을 듣고 쫓겨났다.

오늘은 또 어떤 거절의 말을 들으며 퇴장당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데클란은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휘 저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데클란 군.”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며, 로지에가 물었다.

데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이 나게 생겼어요? 2주일 동안 시간 낭비한 것 같잖아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시간 낭비가 아니야.”

로지에가 데클란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데클란 군은 파수꾼 역할을 내려놓고, 대신 내 시종 역할 하면서 톡톡히 쉬고 있잖아?”

“……딱히 쉬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하면서 살아?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것도 보고, 잠도 열심히 자고. 좋지 않아?”

“돈 아까워요.”

“인페르나 남작가도 일단 귀족 가문이야. 이 정도로 재정이 휘청거리지 않아.”

그러면서 로지에는 데클란의 접시를 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서 먹어, 데클란 군. 안 먹고 버리는 게 더 아까워.”

“…….”

로지에의 말에 데클란은 더는 군말을 달지 않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사샤를 다시 볼 수 있지?’

입 안에 음식을 대충 집어넣으며, 데클란은 생각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지금 씹는 게 무슨 맛을 내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온 신경은 사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사샤.

‘지금쯤 넌 뭘 하고 있을까?’

뭘 하고 있던지, 넌 여전히 사랑스럽겠지.

어서 왕성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약속했는데. 다시 만나겠다고 말했는데.

지금쯤 사샤는 벌써 기사 임명을 받았겠지? 그리고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겠지?

보고 싶다.

사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 이제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무한 번 되돌리고 더듬는 건 싫다.

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진짜 너를 보고 싶다.

그리고 너의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

너를 품에 끌어안고 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

“데클란 군?”

로지에의 목소리가 데클란의 사고를 끊었다.

데클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로지에가 그에게 손짓했다.

“이제 왕성으로 가자. 오늘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네.”

그제야 데클란은 자신의 접시와 그릇이 완전히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샤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던 사이, 어느새 음식을 다 먹어버린 것이었다.

음식값을 치른 로지에는 데클란과 함께 레스토랑 밖으로 걸어 나갔다.

데클란은 입을 꾹 다문 채 로지에의 뒤를 따랐다.

‘오늘도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

이러다가 로지에의 계획이 틀어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면?

그러다가 사샤를 영영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데클란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어째선지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사샤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인페르나 남작가의 소남작님이시라고요?”

낯선 목소리에 데클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왕성 앞에 도착한 로지에는 새로운 문지기에게 열심히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들어갈 수 있을까?

솔직히 못 들어갈 것 같았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지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자는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니. 나는 분명히 인페르나 소남작이라고 말했다.”

“압니다만…… 혹시 왕궁 내부에 소남작님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분이 계실까요?”

그 말에 데클란의 신경이 펄쩍 튀어 올랐다.

‘저거다!’

그래, 지금까지 로지에가 왕성 대문을 못 넘은 건 이 빌어먹을 문지기들이 로지에가 귀족임을 안 믿어줘서 그렇다.

왕궁 내부에 로지에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있습니다.”

로지에가 문지기에게 대답하기 전, 데클란이 먼저 선수를 쳤다.

문지기가 데클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레사 공녀님.”

데클란이 당당하게 문지기에게 고했다.

“이레사 공녀님께서 저희의 신분을 보장해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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