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이레사 공녀의 하루는 쾅쾅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로 시작됐다.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공녀님.”
왕궁의 하녀들이 이레사 공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 노크 소리가 방 안으로 전달되기가 무섭게 하녀들은 문을 벌컥 열었다.
침대 위에는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이레사 공녀가 앉아 있었다.
하녀들은 그런 공녀의 인상을 살피지도 않았다.
펄럭—!
창문의 커튼을 걷어낸 그녀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어둠에 젖은 진한 남색 하늘은 그저 우중충하게 보였다.
공녀의 침대 옆 테이블에 세숫물을 올리는 하녀, 침대 위의 이불을 걷어내는 하녀, 그리고 사이드 테이블에 주전자와 잔을 올리는 하녀.
모두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일에는 이레사 공녀의 안색을 살피는 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레사 공녀는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하녀들에게 제 불평을 토로했다.
물론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항의가 이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과연 하녀들은 그녀의 예상대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라이렌 왕자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라이렌 왕자님이 날 새벽 5시에 깨우라고 명령을 했나?”
“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앵무새같이 똑같은 답을 되돌려 준 하녀들은 침대 위에 앉은 공녀에게 공손하게 손짓했다.
“세안하시지요, 공녀님.”
이레사 공녀는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만약 거부하거나 반항하기라도 하면, 이 하녀들은 라이렌 왕자에게 제 일을 다 샅샅이 고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라이렌 왕자는 또 잔뜩 화가 난 채 자신을 찾아와 호통치겠지.
‘뭐라고 했더라? 곧 왕족이 될 사람이 채신머리없게 굴지 말라고?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모자란 계집처럼 굴지 말라고?’
이레사 공녀는 속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웃었다.
왕궁에서 호화롭게 거하면 뭐 하나.
정작 자신에겐 허락된 자유가 없는데.
이레사 공녀는 라이렌 왕자와 약혼한 이후 거처를 옮겼다. 바로 왕성 안에 있는 백조궁이었다.
이레사 공작은 공녀가 왕성에서 거하는 걸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듣자 하니 그는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했다.
자신의 여식이 얼마나 라이렌 왕자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궁에서 호의호식하며 부족함 하나 없이 떠받혀 살고 있는지.
사교계에 도는 소문이 건너 건너 자신의 귀까지 들어온 걸 보면, 이레사 공작은 퍽이나 우쭐거리며 다니는 모양이다.
‘총애는 무슨. 헌팅 트로피 취급받고 있는데.’
이레사 공녀는 두 눈을 감으며 하녀들이 자신의 얼굴을 닦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이 하녀들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백조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은 라이렌 왕자의 명령에 따라 백조궁에 거하는 이레사 공녀를 모시는 것.
‘그래, 난 손님에 불과하지.’
그 사실에 이레사 공녀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차라리 이레사 공작가에 있을 때가 나았다. 그곳에선 적어도 이레사 공작의 눈이 있어서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가 없었는데.
이곳은 적진 중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딜 가나 가시밭 위를 걷는 기분이 들어.’
마른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는 하녀들의 손길을 느끼며, 이레사 공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이렌 왕자는 이레사 공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약혼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레사 공녀에게 말했다.
“공녀, 행여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앞으로 잘 처신하라, 이 말이다. 내가 공녀와 약혼을 한 건 그대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대의 가문이 내게 줄 수 있는 권력과 병력 때문이다.”
라이렌 왕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녀에게 말했다.
“그러니 허구한 날 무도회에 가서 춤이나 추는 영애들처럼 멍청하게 굴지 말도록. 공녀는 그저 가만히 왕성 안에서 지내면 돼.”
그리고 모든 것은 왕자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었다.
이레사 공녀는 조촐한 짐을 챙기고 곧장 왕성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녀는 왕성 안에 있는 백조궁에 쫓겨나다시피 안착하게 되었다.
라이렌 왕자는 이레사 공녀가 외부에 활동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그는 이레사 공녀에게 왕성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처음에 공녀는 왕자에게 항의했다.
“라이렌 왕자 전하, 왜 저를 왕성 밖에 못 나가게 하시는 거죠?”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좋든 싫든 공녀는 이제 내 것이 될 사람인데, 굳이 외부 활동할 필요가 있나?”
“전하, 저는 장식장 안의 인형이 아니에요. 저에게도 삶이란 게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왕성 안에 얌전히 안전하게 지내는 게 무엇이 나쁘다는 거지?”
“저에게는 사교계에서 만나는 지인 영애들이 있어요. 밖에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권리가 있고요.”
이레사 공녀의 말에 라이렌 왕자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
“흥, 머리 빈 여자들끼리 모여서 시시콜콜하게 드레스나 모자 장식 따위를 의논하는 모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전하!”
“그런 불필요한 모임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현 왕세자를 끌어내릴 방도나 찾아보도록 해. 왕성 내에서 공녀의 지위와 위치를 키워가란 말이다.”
“왕성 안에서 갇혀서 지내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지요?”
“외부 사람을 왕성 안으로 들이는 건 막질 않을 테니, 알아서 잘해보도록. 명색이 이레사 공작가의 귀애한 따님 아닌가.”
그 대화를 끝으로 이레사 공녀는 왕성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레사 공녀는 곧 라이렌 왕자가 왜 자신이 왕성 안에서만 머무르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혹여나 이레사 공녀가 왕성 내의 일들을 밖으로 가지고 가서 자신을 불리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라이렌 왕자가 왕세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라이렌 왕자는 권력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유난히 강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남을 신뢰하기보다 의심하고 배신하는 데 도가 트기 시작했다.
이레사 공작이 이미 라이렌 왕자에게 완전한 지지를 약속했음에도,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이렌 왕자는 이레사 공녀를 일부러 왕성에 붙잡아 두었다.
하녀들을 붙여서 그녀의 모든 일과를 지켜볼 계획이었다.
물론 이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레사 공작은 그저 왕자가 자신의 딸을 참으로 아끼는구나, 생각하며 껄껄 웃기만 했다.
‘답답해서 미쳐버릴 노릇이었지.’
이레사 공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라이렌 왕자는 남들 보는 눈을 의식해서인지 이레사 공녀가 외부 손님을 백조궁에 들이는 건 허락했다.
이레사 공녀는 이 점을 이용해 자신의 지인들을 왕궁 내부로 초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지인들은 번번이 초대를 거절했다.
이레사 공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마 눈치가 보이겠지.’
한창 전쟁이 거론되고 있는 난국이었다.
게다가 왕세자와 라이렌 왕자 사이의 갈등이 더더욱 고조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 이레사 공녀를 방문한다는 건, 그녀의 약혼자인 라이렌 왕자와 전쟁에 대한 그의 사상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복잡한 정치사에 그 누구도 끼고 싶지 않았을 테다.
‘그나마 사샤 님이 왕궁 안에 계셔서 다행이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으며, 이레사 공녀는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만일 이곳에서 사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레사 공녀는 매일매일 우울감에 시달리며 수척해졌을 테다.
‘어서 사샤 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매달렸다.
이레사 공녀가 훈련관을 통해 전해 들은바, 이번에 편성된 특수 부대는 내일이면 최종 훈련을 마친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사 임명을 받게 된다.
물론 정식 기사 임명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임시로 발급한 특별한 기사 자리였다.
아마 특수 부대가 해체되고 난 뒤 다시 회수할 임시 자리겠지.
그래도 기사는 일단 기사였다. 그러니 그들은 당당히 다른 왕실 기사들과 함께 왕족들을 호위하게 될 것이다.
‘사샤 님이라면 믿을 수 있어.’
이레사 공녀는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딱딱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입은 가만히 해 주십시오. 치장하는 중입니다.”
“……그래.”
이레사 공녀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화장을 돕기 위한 하녀들의 손길이 얼굴 위에 닿았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하는 평범한 손길이었지만, 오늘따라 너무나 거슬렸다.
어차피 왕성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러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이레사 공녀는 매일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치장을 받아야 했다.
‘곧 왕족이 될 사람이니, 그 정도 품위는 갖춰야지 않겠나?’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까지 과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공녀는 인생 경험이 적어 잘 모르는군. 공녀가 제대로 꾸미지 않았다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그대를 깎아내리기라도 하면?’
‘그 두 분은 애초에 저를 찾아오지도 않으시는…….’
‘뭘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내 평판에 흠집 잡힐 일은 하지 말고.’
라이렌 왕자는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레사 공녀에게 불필요한 치장을 강요했다.
왕자가 공녀에게 매일 착용하라며 보내온 티아라는 무게가 꽤 무거웠다. 거기다가 온갖 보석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니 목이 아팠다.
그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하녀들이 조이는 코르셋이었다. 몇십 년 전에 없어진 의상 유행을 라이렌 왕자는 ‘고풍스러워 보인다’라는 이유로 이레사 공녀에게 적용했다.
매일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어디 자기도 나중에 탑에 유폐되어 혼자 무거운 쇠로 된 수갑을 차고 살아보라지.’
속으로 그렇게 라이렌 왕자를 원망하고 있는데, 다른 하녀가 의상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녀님, 준비가 다 끝나셨습니까?”
“무슨 일이지?”
하녀들이 자신의 귀에 무거운 귀걸이를 거는 걸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이레사 공녀가 물었다.
“라이렌 왕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현재 응접실에서 공녀님을 뵙겠다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가겠다고 알려라.”
이레사 공녀의 말을 받은 하녀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이레사 공녀는 거울을 흘끔 바라보았다.
거울을 통해 반사된 창문 밖은 어두컴컴했다. 아직 아침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뭐하러 이렇게 일찍 날 보러 온 거지?’
급히 치장을 마무리한 이레사 공녀는 왕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라이렌 왕자는 이레사 공녀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지?”
고작 5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을 뿐인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이레사 공녀는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도착하셨을 때 치장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공녀의 대답에 왕자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간단한 일조차 빨리 끝내지 못하면 장차 어찌 날 내조하실 생각인가?”
“…….”
이레사 공녀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만일 이 자리에서 왕자의 머리 위에 찻물을 쏟는다면 어떻게 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아예 백조궁 안에 감금될 게 분명했다.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이레사 공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공녀가 새로운 호위 기사를 지명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요?”
“긴말하지 않겠다. 그 호위 기사를 백조궁에 들일 생각조차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