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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34)화 (134/177)

134화

“인페르나 영지에서 온 사샤.”

“…….”

“인페르나 영지에서 온 사샤!”

“……으, 어, 네? 네에?”

“어머,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니?”

“죄, 죄송해요.”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급히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내 맞은편에는 왕실 마법사인 로레론치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단번에 부름에 답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이 덜 깼니? 오늘 상태가 왜 이렇게 메롱이야?”

“으윽……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머리를 더더욱 아래로 숙였다.

지금 나는 예전에 신체검사를 받았던 의원에 앉아 있었다.

오늘 오전 훈련이 끝난 뒤, 훈련관들은 부대원들을 모두 의원으로 보냈다.

지난 며칠간 계속된 훈련으로 행여나 근육이 다치지 않았을까 검사를 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부대원들과 떨어져 왕실 마법사인 로레론치에게 검진을 받고 있었다.

로레론치는 내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각종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깜빡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녀의 질문을 놓치고 말았다.

팔짱을 낀 로레론치는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

“에휴, 사샤 너. 누가 보면 어젯밤에 첫 키스하고 밤새 설레서 잠 설친 다음에 아직도 어제의 여운에 잠긴 사람인 줄 알겠다, 얘.”

“……혹시 독심술 쓸 줄 아세요?”

정곡이 그대로 찔린 나는 바보처럼 그렇게 반문했다.

“응? 엥? 뭐?”

내 반응에 로레론치는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 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쓰고 있던 안경을 잠시 벗더니, 이내 두 손으로 제 눈을 비볐다.

“잠깐만, 내가 귀가 이상해져서 뭘 잘못 들었나 보다.”

귀가 잘못된 거면 왜 눈을 비비는 거지?

“휴우, 세상에…… 너 남자친구 생겼어?”

잘못 들었다면서 왜 이렇게 확신을 두고 질문을 하는 건데?

나는 급히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레론치 님, 그래서 제 몸 상태는 어떤가요?”

“음, 수면 부족인데다가 심박수가 너무 높아. 연애하니까 좋지?”

“아, 아니에요!”

나를 놀리는 듯한 로레론치의 말에 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완전히 꼬리를 잡은 로레론치는 히죽 웃으며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후후, 부러워라. 청춘이구나, 청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누가 사귀자고 했어?”

하아…….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나.

깔깔 웃으며 나를 자꾸만 놀리는 로레론치 때문에 나는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분하지만 로레론치의 말이 맞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 * *

어젯밤.

데클란과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나 이제 정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래.”

데클란은 나를 붙잡지도, 혹은 내게 조금만 더 오래 남아 있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데클란의 배려가 나는 고마웠다.

왜냐하면 만일 데클란이 나를 잡았더라면, 나는 차라리 감옥에 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곁에 남아 있었을 테니까.

“사샤, 우리 곧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럼.”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에 도련님이랑 같이 곧 입궁할 거라면서? 난 아마 이레사 공녀님의 호위 기사로 배정받을 것 같아. 그러니까 기회가 되면 날 찾으러 와.”

“……이레사 공녀?”

내 말에 데클란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미묘한 반응에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으, 으응. 이레사 공녀님이 나를 직접 호위 기사로 지명하셨어. 그래서 아마 두 주 뒤에 기사 임명받고, 곧바로 이레사 공녀님 슬하로 발령받을 것 같아.”

“……이레사 공녀는 널 왜 지목했는데?”

“어…….”

데클란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사실 이레사 공녀는 진짜 이레사 공녀가 아니라 가짜인데, 내가 아카데미 다닐 때 그 친구를 도와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아무리 데클란이라도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이레사 공녀가 사실은 평민인 유리나라는 사실.

이건 내가 죽을 때까지 무덤으로 가지고 갈 비밀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얘기 안 해. 유리나가 귀족 사칭한 걸 들키면 사형당할 게 분명하단 말이야.’

나는 유리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데클란은 입이 무거워서 비밀을 잘 지키겠지만…… 그래도 그에게 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유리나의 진짜 정체가 들통나게 되면, 나는 가장 먼저 데클란을 의심하게 될 테니까.

그런 상황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데클란을 믿고 싶었다.

복잡한 사정을 빠르게 계산한 나는 능청스럽게 아하하, 웃으며 데클란에게 답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내가 특수 부대 부대원 중에 유일한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여자인 게 뭐 어때서.”

“아무래도 동성인 내가 더 편하신가 보지! 그리고 이레사 공녀님은 엄청 마음씨가 곱고 착하신 분이야!”

“착한 거랑 널 뽑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도 잘 몰라! 높으신 분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는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가볍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어라, 잠깐만. 원작 소설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이레사 공녀의 희생 때문이었잖아.’

그러니까 이레사 공녀…… 아니, 유리나는 곧 황국으로 떠나게 된다는 건가?

그럼 이번에 이레사 공녀는 누구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는 거지?

원작 소설에서 데클란이 이레사 공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는 그가 그녀의 호위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데클란이 아니라 내가 이레사 공녀의 호위 기사로 임명되었다.

‘설마, 내가 유리나와 사랑의 도피를?’

순간 머릿속에 참고 이미지가 떠올랐다.

황국에 도착하고 바로 하루 전날. 내 두 손을 꼭 잡고 호소하는 유리나.

‘사샤 님, 저희 같이 도망쳐요.’

그러면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거절하겠지.

‘유리나, 나는 널 섬기는 기사야. 그리고 넌 라이렌 왕자 전하의 약혼녀고.’

‘그렇지만 저는 라이렌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유리나가 울먹거리며 내게 외친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더더욱 들어갔다.

‘저에겐 오로지 사샤 님밖에 없어요. 저를 데리고 도망쳐주세요, 사샤 님.’

그 말에 넘어간 나는 유리나를 데리고 어느 시골로 도망치고…… 그 누구도 우리를 알아볼 수 없는 구석진 시골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음, 막장이네.’

나와 유리나의 대체 결말을 상상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가 아무리 유리나를 아낀다고 해도 그렇지, 나는 그녀와 ‘사랑의 도피’를 할 생각이 없었다.

유리나에게는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내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에 잠기자, 데클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별일 아니야.”

곧 머릿속의 생각을 쓱 지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서 나는 데클란을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또다시 만나, 데클란.”

“그래. 다시 만나자, 사샤.”

“응, 잘자.”

“……미안하지만 그 말은 못 들어줄 것 같네.”

데클란이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밤은 너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할 것 같아, 라고 한 마디를 덧붙인 데클란은 그제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솔직하고도 담백한 고백에 나는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석상처럼 굳어있는데, 저 멀리서 병사 한 명이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나는 부랴부랴 내 숙소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다행히도 하녀로 분장한 탓에 그 누구도 나를 멈춰 세우거나 심문하지 않았다.

체구가 작은 게 딱 봐도 어린 하녀처럼 보이는지 그 누구도 내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안전하게 숙소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키오의 방으로 돌아갔다.

“사샤 누님!”

내 노크 소리를 들은 키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가신 지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잖아요!”

“편지 전달하고 왔어요.”

나는 키오를 향해 승리의 ‘V’자를 내보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순간 키오의 입이 고장 난 것처럼 떡하니 벌어졌다.

키오와 같은 방을 쓰는 크레스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 정말요? 왕궁 밖으로 나가서 편지를 부치고 오신 거예요?”

“음…… 네, 그렇다고 치죠.”

굳이 상세한 상황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키오와 크레스는 마치 위인을 바라보는 듯이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대단해요, 사샤 누님! 정말 감사합니다!”

“사샤 씨는 사실 큐피드의 현신인 거죠?”

키오가 그의 애인과 재결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키오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사샤 누님, 만약에 일이 잘 풀린다면…… 제 결혼식에 꼭 와 주세요.”

“결혼식이요? 알았어요, 꼭 갈게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곧 취침 시간에 맞추어 해산했다.

침대에 누운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를 잔뜩 마신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로 눈앞에 데클란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데클란…….’

내게 사랑을 고백하던 데클란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이불을 코 위까지 끌어당겼다.

데클란이…… 내 남자……?

그리고…… 미래의 내 남편……?

“꺄하하하!”

낯간지러운 호칭에 나는 그대로 이불을 팡팡 걷어찼다.

그렇게 나는 밤새 머릿속으로 데클란과 신혼여행 후 신혼집 투어 및 2세까지 모두 계획한 뒤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 * *

“밤새 신혼여행 어디로 갈지 고민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잔 인상인데.”

턱을 괸 로레론치가 히죽거리며 나를 놀려먹었다.

이 마법사, 정말 독심술 쓰는 거 아냐?

“독심술 마법 쓸 줄 아세요?”

“아니? 난 그냥 실력 좋은 왕실 마법사 출신의 의사인데?”

그러면서 로레론치는 내게 병 하나를 내밀었다.

“쭉 들이켜.”

“이게 뭔데요?”

“기력 보강에 좋은 영양제. 훈련 기간 아직도 두 주 남았다면서.”

“감사합니다.”

로레론치의 친절함에 감동한 나는 그 자리에서 영양제를 전부 비웠다.

“그런데 너 말이지, 괜히 다른 사람한테 너 애인 생겼다고 티 내지 마렴.”

내게서 빈 병을 회수한 로레론치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왜요?”

“왜긴. 너 앞으로 이레사 공녀님 호위 기사로 발령 날 거라면서? 라이렌 왕자 전하한테 괜히 찍히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 네가 연애하느라 직무 태만이라고 모함이라도 하면 넌 그대로 끝이야.”

으음?

로레론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말 그대로야. 라이렌 왕자 전하랑 이레사 공녀님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잖아. 그런데 공녀님이 독단적으로 널 자기 호위 기사로 임명했다면서?”

“그렇죠.”

“지금쯤 왕자 전하께서는 자기 사람을 공녀님에게 못 붙였다고 이를 아득아득 갈고 있을걸?”

로레론치의 말에 나는 그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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