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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33)화 (133/177)

133화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멍하니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데클란의 시선은 한결같이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키스하는 분위기야?”

멍청하게도 나는 데클란에게 그런 질문을 내던지고 말았다.

데클란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질문, 2년 전에 너한테서 들었던 기억이 나네.”

“…….”

데클란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이 콕, 하고 찔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데클란이 이어서 또 물었다.

“그때 내가 키스하는 분위기가 맞다고 답했더니,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응.”

당연히 기억이 난다.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심장 떨리는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그에게 뭐라고 했더라?

“……네가 와인으로 요리하느라 술 취해서, 그래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었지.”

내 대답을 들은 데클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말고.”

“아…… 그거 말고? 그때 내가 또 무슨 말을 했었더라……?”

내가 조심스럽게 데클란의 눈치를 살피며 반문했다.

“내게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키스하라고 했었잖아. 기억나?”

“아.”

데클란이 나 대신 읊어준 말을 듣자, 그제야 기억이 되돌아왔다.

확실히 나는 데클란에게 ‘네게 운명의 상대가 있어’ 따위의 말을 했었다.

그야 나는 이 세계가 소설 속 세상인 걸 알고 있고, 또 데클란에게는 정해진 연인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 운명의 상대가 바로 너인 것 같아.”

데클란이 불쑥 말했다.

뭐?

순간 사고의 흐름이 끊긴 나는 기겁했다.

“뭐, 뭐라는 거야?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오늘 내가 너와 이렇게 만난 걸 보면 알 수 있잖아.”

데클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선지 그의 음색의 끝자락이 묘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넓고 넓은 왕성에서 너와 내가 서로 벽 너머로 만나게 되는 게 얼마나 가능성이 낮은 일인지 알아?”

데클란이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사샤, 난 그저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달려왔어. 그런데 네가 그곳에 있더라.”

“데클란…….”

“난 앞으로도 네가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거야. 확신할 수 있어.”

그렇게 짤막하게 말을 덧붙인 데클란은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두 손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러니까 내게도 여지를 줘.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으니까.”

“…….”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데클란은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도대체 왜?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마치 돌이 던져진 호수 안에 사는 작은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혼란이 나를 제멋대로 뒤흔들었다.

“데클란…… 너, 너는 왜 날 좋아해?”

한참 동안 침묵을 삼키던 내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런 단순한 답이 되돌아왔다.

“좋아하면 안 돼?”

“하지만…….”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데클란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없었다.

데클란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부러 아침에 나를 보기 위해 우리 집에 와서 아침 식사를 하고.

항상 내가 귀엽고 아름답다고 말해주었고.

로지에가 내게 잘 대해줄 때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앞으로 커서 항상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말했고.

그리고 또…….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

데클란은 언제나 나를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때, 데클란이 내게 불쑥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믿어줄 거야?”

“뭐라고?”

“지금 검으로 내 가슴을 찔러서 심장이라도 도려내서 보여줘야 해?”

그 험한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데클란의 얼굴을 본 나는 그가 나를 협박하려는 것도, 혹은 조롱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나를 마주 보고 있는 데클란의 얼굴은 처연했다.

어째서.

어째서 넌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하는 거야.

“사샤.”

“…….”

다정하게 내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에 나는 그만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런 나를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이 데클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사샤, 제발 믿어줘.”

“…….”

“널 사랑해.”

“……알아.”

여전히 데클란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내가 중얼거렸다.

잘 알고 있었다.

데클란이 나를 줄곧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덮어두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데클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야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니까…….’

내 모든 비교 대상은 이레사 공녀였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그 귀족 여자와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를 어떻게 같은 평행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 있을까, 하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당연히 데클란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정작 데클란이 원하던 사람은 처음부터 나였는데.

‘나,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어쩌면 나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던 걸까?

데클란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그가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아직 이레사 공녀를 만나지 못해서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속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지.’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 있었던 멧돼지 사건.

그때 데클란이 내게 화살을 겨눴었잖아.

‘그래, 데클란. 너는 한때 내가 미워서 그런 짓을 했다고 했으면서…….’

나는 급히 데클란에게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열린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데클란 넌 내가 어렸을 때 일부러 내게 화살을 겨눴었잖아…… 라는 말은 목청에 걸린 듯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데클란이 그 일에 대해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알았으니까.

비록 복장이 타도록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데클란이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나를 업고 사다리를 타 올라간 것도, 내 등 뒤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그래서 차마 데클란에게 말할 수 없었다.

너는 한때 날 미워하지 않았었냐는 말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겨줄지 알고 있어서.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고뇌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이상했다.

데클란이 그때 내게 저지른 짓은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못된 짓인데. 어째서 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오히려 왜 그를 내가 먼저 걱정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나는 그저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지.

‘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정말로 데클란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고마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고맙다니, 왜?”

난데없는 감사의 말에 데클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달빛 아래 반짝거리는 그 눈이 유달리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어.”

“뭘 생각한 적이 없어.”

“으음…… 그게, 항상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난 주인공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 사람인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생각을 중얼거렸다.

“이런 나를 네가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됐어.”

“사샤, 왜 그런 말을 해. 넌 당연히 사랑받아야 마땅한데…….”

“네 말이 맞아, 데클란.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나는 데클란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데클란, 미안해.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인데…… 왜 항상 나를 남과 비교하려고 했던 걸까?”

한 손을 뻗은 나는 데클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남들은 그저 내 삶의 조연에 불과한데.”

나는 데클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이 될래.”

그러고선 긴장감에 파르르 떨려오는 눈꺼풀을 꽉 감았다.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와 데클란은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입술 위로 상냥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포개진 입술 너머로 서로의 숨이 엮이고 섞였다.

그 감촉이 너무나도 따스하고 포근해서,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다 갑자기 이러다가 사다리가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 맞다.”

“……왜?”

떨어진 입술 너머로 나지막한 질문이 돌아왔다. 그의 숨은 고르지 않았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별건 아니고……. 이러다가 사다리 넘어지면 어떡하지?”

“사다리 걱정할 여유가 있는 모양이네?”

데클란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마력으로 사다리 잡아놓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 언제부터 그랬어?”

“처음부터.”

데클란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슬쩍 훑었다.

그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가 홧홧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널 위험에 빠지게 할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뒤로 데클란이 다시 고개를 깊게 숙였다.

나른하게 밀려오는 감각에 나는 두 눈을 다시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데클란에게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사랑해, 사샤.”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배가 간질간질했다. 마치 수천 가지의 꽃들이 일제히 꽃잎을 펼치며 개화한 것 같았다. 그 위로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들었다.

“나도 사랑해, 데클란.”

그 말이 끊기기가 무섭게 데클란이 내 허리를 휘어잡았다.

순간 등골을 타고 날연한 열기가 내려갔다.

데클란은 상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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