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강건한 데클란의 태도에 나는 설득당하고 말았다.
“아, 알았어.”
나는 하는 수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의 등에 다가갔다.
나를 그대로 업은 데클란은 사다리를 성큼성큼 올라타기 시작했다.
졸지에 포대 자루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근데 너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둘 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나는 사다리 위를 빠르게 올라가는 데클란에게 항의하듯 물었다.
그러나 데클란은 태연했다.
“안 떨어져.”
“근데 나 꽤 무겁단 말이야. 요즘 밥을 좀 많이 먹어서…….”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런 잔소리가 되돌아왔다.
“많이 먹은 게 고작 이 정도야? 더 먹어. 특히 고기 많이 먹고.”
“안 돼. 그러다가 사다리가 우리 무게를 못 견디고 부서지기라도 하면……!”
“너보다 옥수수 포대 한 자루가 더 무겁겠다.”
“말린 옥수수 말고 갓 수확한 옥수수 기준으로 말하는 거지?”
“넌 왜 항상 이상한 곳을 걸고넘어지는 거야?”
중심을 잃고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는 그대로 데클란의 어깨에 짐처럼 실려 성벽 위까지 올라갔다.
사다리의 끝까지 올라간 데클란은 나를 벽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꽉 잡아. 떨어진다.”
“으, 으응.”
벽 위에 걸터앉은 나는 데클란의 소맷자락을 꽉 붙들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성벽 아래로 향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금 전 내가 데클란과 함께 서 있었던 곳이 까마득히 멀게 보일 정도였다.
내가 한참 동안 오르락내리락했던 거리를 단번에 이동하다니.
게다가 데클란은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왕궁 주변 경비가 너무 허술한 것 같네.”
데클란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벽 너머로 출입구가 두 개는 더 있어. 그쪽 출입구는 병사들이 있어.”
“넌 그 출입구는 어떻게 통과한 거야?”
“보이다시피 이렇게 하녀 분장을 하고 있잖아?”
그러면서 나는 데클란에게 내 머리 모양과 옷차림을 선보이듯 두 팔을 펼쳐 보였다.
내 모습을 잠시 살펴본 데클란은 피식 웃었다.
“귀엽네, 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너,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냐?”
“사실인걸.”
데클란은 도리어 나를 향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 당장 소매에 넣고 도망치고 싶어.”
“그거 소매치기 아냐?”
“이대로 너랑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뜻이었어. 아무도 없는 곳에, 나랑 너랑 단둘이서만 있는 곳으로…… 그럴 수만 있으면 좋겠다.”
“그럼 거기서 우린 뭐 먹고 살아?”
내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데클란은 사뭇 진지하게 내 질문에 답했다.
“사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집도 짓고, 요리도 하고, 옷도 짓고, 뒷밭도 가꾸고, 낚시도 해오고, 집 앞에 작은 정원도 만들고……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행복하기만 하면 돼.”
그런 말을 하면서 데클란이 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살짝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리카락 정리해주려고.”
내 반응을 본 데클란이 짤막이 말했다.
“아. 그래.”
내 동의를 받은 데클란은 한 손으로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만졌다.
“이대로 보내기 아쉽네.”
데클란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탈영한 걸 들켜서 감옥 가는 것보다 낫지.”
“감방에서 재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윽, 난 싫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은 나는 왕궁 쪽을 향하는 사다리 위에 발을 내디뎠다.
“데클란, 내 생각에는 전쟁이 조만간에 끝날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벽 너머 사다리에 서 있는 데클란을 향해 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데클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고 싶어서 한 희망찬 발언이었다.
“로지에 도련님이 왕궁 안에 들어가면 나도 같이 들어갈 수 있어.”
데클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 정말? 너도 같이 들어올 수 있어?”
“그럼. 난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 역할로 따라온 거니까.”
“아하. 내가 없으니까 네가 로지에 도련님의 시종이 된 거구나!”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어릴 때부터 로지에라면 지독히도 싫어했던 데클란이 어느새 이렇게 다 자랐을까. 이제는 로지에와 함께 다니는 것도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다.
‘얘도 이제 철들었네.’
벽 너머로 서 있는 데클란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그렇게 웃어?”
“음? 그냥, 좋아서.”
“뭐가.”
“그런 게 있어. 나 이제 정말 간다.”
차마 데클란에게 ‘네가 다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일부러 직답을 피했다.
대신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번에는 이렇게 야밤에 몰래 숨어서 만나지 말고, 밝은 대낮에 정정당당하게 만나자.”
그렇게 작별 인사를 올린 내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던 찰나였다.
“잠깐만.”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데클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달빛을 등지고 사다리에 기대어 선 데클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눈 좀 감아봐.”
데클란의 낮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눈은 왜?”
“정말 오랜만에 만났잖아. 널 그냥 이대로 보내기가 아쉬워서…….”
“그렇긴 한데…… 근데 왜 눈을 감아?”
“…….”
내 두 번째 질문에 데클란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의미 모를 침묵에 나는 그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데클란을 빤히 주시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데클란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한 짓 안 해. 그러니까 눈 감아봐.”
“정말로?”
“네가 싫어하는 짓을 내가 왜 해.”
데클란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눈 정도야 감아줄 수 있지 않을까.
“알았어. 도대체 눈은 왜 감으라는 건지…….”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두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온몸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는 걸 깨달았다.
선선히 부는 여름의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샤.”
낮게 깔린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여러모로 고혹적인 중저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데클란 목소리가 이렇게 고왔나?’
묘하게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음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와서인지 한 번도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들어보니 제법 미성이었다.
“왜 그래?”
내가 몸을 슬쩍 움츠린 걸 용케 봤는지 데클란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네 목소리가 설레어서 떨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별일도 아닌 것에 나 혼자만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안해졌다.
“……그래?”
나긋한 목소리가 느릿느릿하게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고른 숨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이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이 분위기.’
겨우 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아니, 잠깐만.’
데클란이 지금 나에게 두 눈을 감으라고 한 건, 설마.
‘……설마 키스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데클란과 내가? 그런걸?
순간 머릿속에 참고 이미지가 절로 떠올랐다.
두 눈을 감은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왁! 으아아왁!’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상상되는 장면에 나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미쳤나 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로지에랑 결혼하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으면서!’
“사샤?”
자꾸만 혼자서 움찔거리는 나를 본 데클란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이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번쩍 떴다.
“데클란, 너 솔직히 말해 봐.”
“뭐, 뭘.”
“나보고 왜 눈 감으라고 한 거야?”
두 눈을 부릅뜬 내가 데클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데클란은 잠시 얼이 빠진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상했어.”
나는 속으로 기겁했다.
얘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뭐, 뭐, 뭐? 뭐를 상상해?”
그러자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사샤 네가 밤에 두 눈을 감고 잘 때 이런 모습이겠지…… 싶어서.”
“…….”
“넌 잘 때도 정말 사랑스럽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아…….
의외로 순수한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맥이 빠진 나는 아하하, 하고 쑥스럽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미안해. 내가 오해했네.”
“오해?”
“그, 난 또 네가 키스하려고 하는 줄 알았지! 왠지 모르게 그런 분위기였잖아!”
나는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애매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나는 데클란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데클란도 빨리 ‘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어?’ 따위의 핀잔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어떻게서든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장면을 지워버리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데클란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
계속되는 데클란의 침묵에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뭐야, 얘 왜 말이 없어?
내가 한 말에 충격을 받은 건가? 왜 이렇게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어?
무언가 흐름이 거슬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 데클란.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어. 아까 그건 그냥 장난으로…….”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온점을 찍을 수 없었다.
데클란이 이렇게 불쑥 반문했기 때문이다.
“내가 해줬으면 좋겠어?”
“뭐라고?”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데클란이 내게 무언가 엄청난 말을 한 것 같은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만. 데클란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다시 두 눈 감아봐.”
데클란의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울렸다.
평소 무뚝뚝하기 짝이 없던 그에게서 이렇게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을 듣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