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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31)화 (131/177)

131화

‘헉!’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사다리를 그대로 넘어뜨릴 뻔했다.

등골이 오싹해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세요?”

혹시 이 근처를 지나가던 순찰병인가?

하지만 조금 전에 솜사탕 불법 거래하던 사람들 대화를 들어보면 여긴 분명히 순찰을 잘 다니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 정말 이렇게 재수 없이 탈영한 걸 걸려서 감옥에 가는 건가…….’

사랑의 큐피드 역할도 제대로 못 해 먹겠구나…….

그렇게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사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내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저녁이었지만, 구름 사이로 나온 달빛이 남자의 얼굴을 어느 정도 비추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데클란?”

나는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데클란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데클란이 왜 여기에 있지?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을 보게 된 게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 데클란이야?”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내가 성벽 바로 앞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자칫 잘못하다가 저 멀리서 성벽을 지키는 문지기들에게 발각되지 않을까, 걱정할 새도 없었다.

“데클란, 네가 여기에는 어떻게…….”

심장이 북을 울리듯 쿵쾅쿵쾅 날뛰기 시작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가 비눗방울처럼 톡톡 터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마음속에 가랑비가 지나가듯 잘게 깨진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무언가에게 홀린 것처럼 내 앞에 선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샤, 너 지금 뭐 하는…….”

“세상에…… 몸이 단단한 게 진짜 데클란이네.”

남자의 어깨와 팔을 주물주물 만지며, 내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자, 낯익은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기가 강한 갈색 머리카락. 보름달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그리고 귀티나게 날이 선 인상.

확실했다.

내 앞에 있는 이는 데클란이 맞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데클란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농작물도 아니고, 꼭 만져야지만 확인할 수 있는 거야?”

“으앗, 미안해!”

그제야 내가 데클란을 제멋대로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뒤늦게 두 손을 내뺐다.

얼굴을 붉히기엔 너무 늦어버린 타이밍이었다.

나는 그대로 화제를 바꾸듯 데클란에게 질문 폭탄을 던졌다.

“데클란,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수도에 있어? 언제 온 거야? 왜 왔어? 어떻게 왔는데? 넌 인페르나 영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어머님은? 아니, 인페르나 남작님은 어떻게 된 건데? 도대체 왜…….”

내 입에서 물음표와 물음표가 서로 꼬리를 물고 튀어나왔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혀가 제대로 꼬여서 횡설수설하기만 했다.

데클란은 연신 질문을 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잔잔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어?”

“나 보고 싶었다는 말은…… 안 할 거야?”

“어…… 뭐라고?”

데클란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당혹스러웠다.

얘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내 곤혹스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데클란의 말이 이어졌다.

“난 사샤 너 보고 싶었는데.”

“그, 그랬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아…… 어, 그, 그렇구나.”

“눈만 감으면 네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잠이 안 왔어.”

“아…… 내가 불면의 원인이 되다니, 미안해.”

“그런데 우스운 건 뭔지 알아?”

데클란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눈만 뜨면 또 네 생각만 나더라고.”

“…….”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입을 꾹 닫았다.

잠시 나와 데클란 사이에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하며 데클란에게 물었다.

“그런데 수도에는 언제 온 거야?”

“수도에 도착한 지 세 시간도 안 됐어. 숙박할 숙소 잡고 난 뒤에 로지에 도련님은 바로 쉬러 가셨어. 워낙 몸이 약하신 분이라…… 그리고 나 혼자 바람 쐬러 나왔어.”

“로지에 도련님도 오셨어?”

“응.”

“수도에는 왜 온 거야?

“난 로지에 도련님 일 때문에 수도로 올라오게 되었어.”

데클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지에 도련님? 수도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무슨 일인데?”

“으음, 아무래도 나보다는 로지에 도련님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텐데…… 도련님은 국왕 폐하를 접견하려고 하셔.”

그 말에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 로지에 도련님이 무슨 수로 국왕 폐하를 만나?”

인페르나 남작가와 왕실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 아니었나?

게다가 유명한 가문도 아닌, 변방에 있는 작은 남작가 출신이다. 국왕이 굳이 로지에를 만나주려고 할까?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로지에 도련님에게 들어.”

데클란의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나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살짝 투정을 부리듯 툴툴거렸다.

“수도에 올 거면 편지라도 하지.”

“편지…… 쓰려고 했었는데, 미안해.”

어째선지 데클란의 입에서 쓰라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데클란이 말을 이어갔다.

“네가 왕성 안에 지낸다는 생각이 나서, 그냥 왕성 근처로 와 봤어. 그런데 대문 근처에서는 병사들이 많아서 얼씬거리지도 못하다가, 이곳 사람이 없는 곳으로 와봤어. 그런데…….”

데클란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사다리를 향했다.

“……네가 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더라.”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였다.

“신기하지 않아? 마치 신이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 것 같아.”

“그렇네.”

“보고 싶었어.”

순간 데클란의 두 팔이 나를 끌어당겼다.

“나의 사샤.”

데클란의 따뜻한 손길이 유영하듯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포옹에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몸을 기대었다.

그와 동시에 익숙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

그래.

잊고 있었다.

데클란에게선 이런 체향이 났었지.

데클란이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샤 넌 정말 내 생각 한 번도 안 했어?”

“음…… 했지.”

나는 솔직하게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기쁨이 묻어난 듯한 데클란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래? 얼마나?”

“그걸 굳이 세고 있진 않았는데…….”

그러자 나를 끌어안는 데클란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키 차이 때문에 내 얼굴은 그대로 그의 품에 푹 묻히고 말았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내, 내가 지금 왜 데클란에게 안겨있는 거지?’

아직도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데클란과 로지에가 인페르나 영지를 떠나 수도에 올라오게 된 것인지.

데클란은 어쩌다가 내가 넘은 성벽 바로 건너편에 있는 건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 내 앞에 데클란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있으면 마음이 절로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는 걸 잠시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데클란의 품속에서 머리를 기댔다.

“데클란 너,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내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데클란이 대꾸했다.

“매일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니야. 매일 보면 질려.”

“사샤 넌 예뻐서 매일 봐도 안 질려.”

“너 말 되게 예쁘게 잘한다.”

“예쁜 사람한테만 예쁘게 말해.”

“하하, 농담도 참.”

나는 데클란을 살짝 밀어냈다.

이대로 더 끌어안고 있다간 들킬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덤덤하게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데클란이,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 천하의 데클란이, 실은 심장이 미치듯이 쿵쾅쿵쾅 날뛰고 있다는 걸.

그 사실을 내가 눈치챘다는 걸 데클란에게 들킬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나, 사실 편지 배달하러 나왔어.”

“편지?”

“응.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나는 데클란에게 키오와 그의 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사람이 완전히 파국을 맞이하지 않도록 이 편지를 하루빨리 인페르나 영지로 보내야 했다.

내 말을 들은 데클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마침 나와 로지에 도련님이 묵고 있는 곳 옆에 편지 배달 대행을 해주는 가게가 있었어. 거기로 가면 될 거야.”

“와아, 정말?”

데클란의 말에 나는 신이 나서 손뼉을 짝짝 쳤다.

“다행이다! 그럼 나 대신에 이 편지 좀 보내 주면 안 돼?”

그러자 데클란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아…… 그건 좀 곤란해.”

“어째서?”

“나 사실 탈영…… 비슷한 걸 했거든.”

“……?”

데클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돌리고 있는 듯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데클란이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 지금 원래 왕궁 밖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

끄덕끄덕.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똑똑한 데클란!

“만약에 네가 왕궁 밖으로 나갔다는 걸 훈련관이 알게 되면 어떻게 돼?”

“음, 글쎄? 감옥 가지 않을까?”

내 순진한 대답에 데클란의 인상이 험해졌다.

“너 그러면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어서 들어가!”

내게서 편지를 낚아챈 데클란은 그걸 자신의 품에 넣고는, 그대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혼나게 된 학생처럼 말을 더듬었다.

“데, 데클란? 왜 이래? 화났어?”

“화 안 나게 생겼어? 너라면 내가 감옥 가면 좋겠어?”

“아니, 싫어!”

“나도 싫어. 그러니까 어서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사다리가 세워진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데클란은 돌연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몸을 숙였다.

“타.”

“어?”

“내 등에 타라고.”

그 말에 나는 아하하,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장난하지 마. 내가 왜 너한테 어부바를…….”

“어서.”

데클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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